예수님이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면서 불러낸다고
하셨는데, 과장법적인 표현일까? 아니면 실제일까?
지금도 많은 목자들이 양들의 이름을 다 져주지는
않더라도 특별히 사랑하는 몇몇 양들에게는 이름을 져준다. 그런가 하면 베두인들 가운데 어떤 종족은 모든
양에게 다 이름을 져준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양을 300마리 키우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름을 다 붙여주었다고 하는 것은 한 마리 한 마리 개별적으로 300마리 양을 다 안다는 이야기다.
우리 눈에는 양들이 다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구분을 하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달려온다고 한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아는 것이다.
양들의 이름은 양들의 특징을 가지고 짓는다. 눈이 크면 왕눈이, 점이 있으면 점박이 점순이 점돌이... 그런 식으로 이름을 져주는 것이다. 태어난 장소를 이름으로 져주거나, 태어날 때 특별한 일이 있었으면 그것을 가지고 이름을 져주기도 한다.
양들에게 이름을 져주는 것은 그만큼 양들을 사랑한다는 표시이다.
베두인들은 하루 종일 아니 평생 동안 양과 같이 지낸다. 그들은 친구가 없다. 양이 친구이다. 그래서 양을 가족처럼 사랑하고 가족처럼 돌보고 가족처럼 같이 생활한다.
베두인의 장막은 한쪽 끝에 양우리가 있다. 사람 사는 집과 양우리가 같은 천막 안에 있는 것이다. 같은 지붕
아래서 사람과 양이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커튼 하나 사이로 한쪽에는 사람이 살고 다른 쪽에는 양이
산다. 이것이 목자의 삶이다. 그만큼 양을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베두인 장막을 방문했을 때 다리가 부러진 양을 한 마리 보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 양이 양우리에 있지 않고 주인(목자)의 안방에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이 불쌍하니까 자기 방에서 재운 것이었다. 나단의 신탁 가운데 나오는 말이 단순히 시적인 표현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삼하 12:3).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목자가 양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그만큼 양을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 49:16).
하나님은 내 이름을 그분 손바닥에 새기셨다.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분은 나를 아신다.
내 이름을
아신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만 아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나
요한만 아시는 것이 아니고, 리빙스턴이나 말틴 루터나 존 웨슬리만 아는 것이 아니고, 빌리 그래함 목사님 같은 분만 아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사람도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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