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2009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 - 양은 목자 때문에 살고, 목자는 양 때문에 산다(8) - 이진희 목사



베두인들은 문명의 세계와 완전히 담을 쌓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평생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들에게 양이나 염소 몇 마리만 있으면 광야에서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다.

그것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양이나 염소는 우선 털을 공급해준다. 이 털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양털(wool)로 만든 옷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양이나 염소는 매일 젖을 공급해준다. 그래서 매일 신선한 우유를 마실 수 있다. 또 이 젖으로 치즈나 요구르트도 만들어 먹는다.
 
죽으면 고기를 먹는다. 가죽으로는 장막을 만들기도 하고 물주머니를 만들기도 한다. 뿔로는 나팔을 만들어 양을 칠 때 사용하기도 하고, 는 제사용으로 사용한다. 로는 연장들을 만든다. 광야에는 나무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불을 지피는가? 바로 양이나 염소 똥이다. 그것을 말려서 태우면 아주 화력이 좋다. 이렇게 양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의 문제를 다 해결해준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금 과 은 그리고 옷을 잔뜩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수많은 양떼들을 몰고 나왔다( 12:36-38). 그들이 양떼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양이나 염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산 것이 아니었다.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만 마시고 산 것이 아니었다. 매일 신선한 우유를 마셨다. 때로는 고기를 먹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옷을 40년간 입은 것이 아니었다. 양털로 필요할 때마다 옷을 해 입었다. 모두가 다 양 덕분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목자는 자기 양을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하고 돌보고 자기 가족처럼 여긴다. 또 양은 자기를 돌보아주는 목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친다. 죽어서도 모든 것을 다 주인을 위해 바친다. 이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이다. 목자 때문에 양이 살고, 양 때문에 목자가 산다.

양의 젖을 짜주지 않으면 퉁퉁 분다. 염증이 생긴다. 자주 짜줘야 한다. 그래야 또 나온다. 털을 깎아주지 않으면 피부병에 걸리기 쉽다. 또 움직이는 것이 둔해진다. 잘 따라오지 못한다. 넘어지기 쉽다.

양은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서지 못한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나중에는 호흡곤란으로 죽고 만다.

털은 자꾸 깎아주어야 한다. 깎으면 또 자라지 않는가? 털 깎을 때 보면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홀딱 깎아버린다. 그런데 양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잠잠히 있다( 53:7).

소가 도살장에 끌려갈 때는 안다고 한다. 양도 자기가 죽을 것을 안다. 목자가 시퍼렇게 날선 예리한 칼을 양의 목에 갖다 댄다. 그래도 양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 위에 묶어놓고 칼을 내리치려 할 때 이삭이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양으로 바쳐질 때 그러셨던 것처럼, 양은 자기를 그렇게도 사랑해주던 목자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도 가만히 있는다.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다.

양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듯이, 양도 자기 목숨까지 자기 목자를 위해서 바치는 것이다. 은혜를 아는 것이다. 감사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라고 찬송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까워서 바치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