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뒤로 몰러가 침륜(άπώλεία )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침륜이라는 άπώλεία 라는 뜻은 ‘이미 얻은 것이 황폐해 지거나 또는 이미 얻었던 것이 없어짐’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즉시 또는 어느 기간이 지난 후에 자신의 허물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거듭나는 경험을 했다며 기뻐서 외치는 사람들의 간증을 종종 듣습니다. “저는 거듭났습니다.
이제는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렵니다!” 죄를 용서받고 회개의 경험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 기쁨과 감격스러움 속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외칩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경험을 한 후에 다시 빠지게 되는 갈등과 좌절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험을 시작하는 첫걸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완전한 구원을 얻었노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의 완성을 다 이루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라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한번쯤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νουθεσίαν)로 기록하였노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πέσῃ) 조심(βλεπέτω)하라.(고전10:11~12)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말씀 중에서 경계(νουθεσίαν)는 νουθεσία의 목적격으로서 ‘경고, 훈계나 책망’입니다.
넘어짐으로 표기된 πέση는 πίπτω의 2인칭으로서 ‘떨어지다, 망하다, 죄에 빠지다, 있는 것이 없어지다’등입니다. 그리고 조심으로 표기된 βλεπέτω는 βλέπω의 명령형 능동으로서 ‘주의하다, 깨닫다, 식별하다, 삼가다’등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뿌듯하고 행복한 경험을 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죄의 소욕과 욕심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욕심과 생각이 다시 머리를 드는 걸까요?
거듭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거듭난 후에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거듭난 후에 거듭남을 유지하도록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수 있는지 어떻게 죄에서 승리하며 성화의 길을 걸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가르침이나 배우지 못해서 혼란스럽다며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먼저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거듭났다”라는 것은 지각(知覺)으로 인식하한 것뿐이지 육신(70%라는 물)이 거듭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점을 알아야 거듭난 이후에 올바른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자신의 옳지 못한 인성이 과거와 같이 육신의 타락으로 정욕과 욕심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성령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는 뜻이지, 지각으로 인식하고 말로만 하는 것은 압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육신에서 일어나는 죄의 뿌리가 되는 지난날의 옳지 않았던 성품, 성질, 인식, 말하는 언어, 등이 바꾸어진 육신이 성령의 지배를 받음이지, 자기의 육체가 요구하는 소욕에 맡겨서 인성이 바꾸어지지 않은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바울 사도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고 육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육체는 여전히 남아 있고 남아 있는 육체라는 세포(유전자)나 후천성으로 배양된 습관들이 계속 남아있으므로 육신에 속한 소욕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변하도록 살아야 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러므로 한번 거듭난 것으로써 육체로 이루는 체질이 완전무결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해 첫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어린 아기”라는 말입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먼저 기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워야 합니다. 이처럼 거듭남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 거듭남을 어떻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면 그 순결하고 깨끗한 상태를 보존하며 살아가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며 나의 옛 자아가 죽고, 옛 성품이라는 인성이 바꾸어지고, 오로지 성령님의 지배만을 받는 생이 거듭남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이 “그렇게 말하는 목사님은 그렇게 사십니까?” 하고 반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반문이 일어나는 생각이라는 성품이 바꾸어졌으면 그렇게 반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바꾸어야 할 점이 누구보다도 많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이처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도 아깝기 때문에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이지 완전해서는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모든 악한 성정과 욕심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성품을 개발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있는 것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으면서 품성을 개발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거듭난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성화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날마다 자기 인성을 선한 쪽으로 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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