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화 훈련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우리의 정성이요 마음이며 훈련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은사가 훈련으로 받느냐 배워서 되느냐 하는 편견과 고집을 가지는 사람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은사의 개념도 모르는 사람의 옹졸한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강팍하고 굳어진 심령은 결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심령으로는 맛보지 못 할 것이요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신앙 인으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려고 하다가 마실 물이 준비가 되어있지 아니하는 경우 예배 중에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처다 보면서 이것을 마음의 눈짓으로 말해도 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나의 사모는 이를 즉각적으로 헤아리고 대처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심령으로 사모와 통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부부간에는 말없이 그 심령을 서로가 이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서로가 교제를 나누고 심령을 통하고 살았기 때문에 서로가 심령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로 이러한 관계입니다.
내주 하시는 성령사역에 민감해야 심령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심령이 깨닫고 아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이러한 민감한 심령은 알아차립니다.
영적으로 결단하지 않고 인간적인 계산으로 하게 되면 심령이 부담을 느끼고 짐을 지게 됩니다 이것을 또 무시하고 계속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강행을 하게 되면 양심이 침소를 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때 한 두 번 이러한 부담이나 느낌을 무시하게 되면 영적 지각은 또 둔하여 집니다 깨닫는 것도 둔하여지고 느끼는 것도 둔하여지고 영적인 감각이 둔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지각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게 되고 이러한 영적인 지각을 통하여 신령한 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심령으로 아는 경험적인 지식이나 영적 지각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느끼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지 이성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약적인 원리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을 구약의 원리처럼 돌비나 양피지나 종이에 새기지 아니하고 성도들의 육의 심비에 새겼다고 합니다.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롬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후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도 심령이 둔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했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반드시 말씀과 성령은 양쪽 수레바퀴와 같아서 함께 굴러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각과 심령의 영역은 다르기 때문에 심령으로 섬기는 것과 우리 생각으로 섬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의 영역에서 작용합니다 좀더 깊이는 잠재 의식에 영역에서 역사 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씨앗이 잠재의식의 영역 넘어 영의 영역에 깊이 심어지고 이 말씀이 다시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의 영역에 다시 흘러나와야 하며 성령의 깊은 감동의 역사가 내 마음의 영역에 부어지고 우리의 이성이 다시 이를 해석하고 깨달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안되고 말씀을 실생활의 경험적인 차원에서 심령이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설명됩니다.
우리의 마음의 영역에서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이러한 현상이 바로 성령의 신령한 기름부음의 사역이요 이러한 기름부음의 현상이 우리 심령에 부어지는 것들이 믿음의 현상이요 지혜의 말씀이요 지식의 말씀이요 통변이요 예언의 말씀이요 능력이요 병고치는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령한 역사가 일어나도 말씀이 없으면 안됩니다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는 비유에서 말씀의 씨앗이 심어져야하는 것입니다 심어지지 않은 말씀이 나올 때는 신령한 사역이라도 이는 사단이나 귀신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례).중이 목사 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이야기는 자신이 전혀 예수를 대적하는 중의 입장에 있으면서 어떤 목사가 전도하러 왔다가 자신으로부터 성경강해를 8시간이나 듣다가 전도를 포기하고 돌아갔는데 당시의 이 중은 성경을 한번도 읽은 적이 없지만 성경을 꿰둟어 알고 있었고 이 전도하려고 온 목사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조차 미리 알고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었기에 이 목사님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어떻게 말하려는지 조차 훤히 알고 대화를 하니 께임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나중에 예수 믿고 목사가 된 후에 다시 이 목사님을 만났는데 과거처럼 될 수가 없었고 전혀 이러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씀은 영적인 원리를 터득하게 되고 이 영적인 원리가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길잡이는 되지만 우리의 생각영역에서 작용하는 이 말씀만으로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부족합니다.
깊은 영의 영역에서 흘러나오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우리가 깨닫게 되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러므로 성경은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오게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이렇게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내 중심인 참된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신의 생각이나 형식적이거나 율법적인 것을 의미하지 아니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령으로 섬기(예배)라는 말은 성령의 기름 부음의 내적 역사가 있어 성령에 깊이 사로잡힌 심령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성령은 우리 심령 가운데 임재하시며 우리의 깊은 내적인 심령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느끼고 인식하며 받아드리어 그를 대접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훈련이 되어 육성이 죽고 영적인 심령이 된 사람의 이러한 심령은 곧 율법이 따로 없고 선지자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성령)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성령)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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