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2009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과 여러 가지 영적 경험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과 여러 가지 영적 경험 - 로렌스 길릭 예수회 신부 글, 번역(김한글)
 요한 복음 9장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놀라운 질문을 한다. 눈이 먼 사람을 보면서 그들은 묻는다. 선생님 이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그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그들은 마치 눈이 멀음을 적어도 죄에 대한 벌로 간주하거나 눈이 멀음과 죄를 동등하게 보고 있다. 그들은 이 눈멀음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 한다. 나 자신 시력을 잃은 것에 대해, 사도들이 질문한 비슷한 질문들을 던져 보곤 했었다. 나는 태어 날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8 살때에 "이 가혹한 은총"을 받았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고 의사들은 몇 번 씩이나 나의 눈을 검사하였다.

루우드의 물과 성인과 순교자들의 뼈로 축성을 받았지만, 44살인 지금까지도 눈이 먼 상태이다. 나는 아직도 하느님의 배려 깊으신 사랑과 시력을 잃은 것에 대해 화해하려 노력하면서 질문해 보곤 한다. 질문들은 너무나도 빨리 생기는 것에 비해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느리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대답은 분명 온다. 최근에 나는 남다코다 주의 베드렌즈 국립공원을 여행하였었다. 나와 동행한 두 친구들은 우리들이 지나가면서 보는, 계곡, 언덕과 바위들의 장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에게 언어로 설명해 준다는 것이 머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의 웅장한 경치, 야구 선수들이 절묘하게 공을 날리는 것, 무용수의 우아한 동작들을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면서,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단어로 표현하려 하는 것의 한계 때문에 친구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자신이 눈이 먼것에 대해 글로 묘사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시도인지를 느낀다. 여러분이 한번 눈을 감고 그냥 눈이 먼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상상해 보라. 이 것은 곤혹스런 경험이다. 순간적이나마 경험하는 어두움의 와중에도, 만일 전화가 울리면 재빨리 눈을 뜨고 수화기를 잡을 수 있지 않은가? 내 친구들이 베드렌즈 공원의 장관을 나에게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나도 "가혹한 선물"을 가짐으로서 얻는 경험들을, 여러분들에게 완전하게 이해시킬 수 없다. 그래서 거의 불가능한 과업을 시도하지는 않겠다.

그 대신, 여러분들이 겪는 경험과 비슷할 수 있고 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싶은 몇 가지를 쓰고자 한다. 나는 우리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눈멀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이 어두움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좀더 보편적인 은총에 대해 가르쳐 준 것에 대해 말하겠다. 가끔 사람들이 나와의 접근을 피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처럼, 눈이 안보이게 되는 재앙을 입을까봐 나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감지 할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 나를 욕되게 할까 혹은 무례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내 곁을 빨리 지나가려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 자신의 눈먼 상태를 뒤돌아 볼 수도 있는 기회를 재빨리 지나 가고 있는 것이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축복이자 괴롭힘일 수 있지만, 눈 이 멀었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않으려 피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나는 아직도 이 사실과 씨름하지만 매일 매일 그 것과 부딪치면서 내 자신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소용없는 저항을 계속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의 눈먼 상태에 의해 정복당하도록 허락할 때 더욱 더 많은 평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 9장을 여는 사도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 이 것은 그 사람이 지은 죄의 탓도 아니고 그의 부모의 죄의 탓도 아닙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또 지금 우리에게, 우리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눈이 멈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다. 그분은 매우 분명하게, 마지 못해 하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보는 사람을 가려 못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 멀게 하려는 것 입니다 (요한복음 9, 39).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더 심오한 진실을 볼 수도 있는 삶의 모든 사건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느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는, 우리 각자의 눈 먼 상태를 직면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영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들을 점차적으로 빛의 삶으로 천천히 안내되어 가도록 허용하면서, 우리들의 인간성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생기는 약점들과 더불어 계속 기도하면서 사는 삶. 이것은 한번에 끝나는 치유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이것은 투명하게 볼 수 없다는 한계와 더불어 솔직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불안감과 눈이 멈 우리들은 아는 것을 경험하는 것에 본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알겠다". "내가 의미하는 것을 알겠니"?라고 물어 볼 때 see와 know를 서로 교체하면서 같은 의미로 쓰여진다. 마치 어떤 것을 모르는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양 겁을 낼 수 도 있다. 알려고 하는 것은 때로는 어두움의 무서운 형태일 수 도 있다. 우리들은 쌍둥이인 토마스 사도가, 믿기 위해서 보아야만 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믿는자가 될 것을 격려하신다 (요한 복음 20, 29). 눈먼 사람으로 지낸 36년 이 지 난 후에도 나는 아직도 혼돈스런 새로운 환경에 접할 때에는 마비될 것 같은 공포를 경험한다.

나는 피정을 지도하러 몇 년 전에 한국에 있었다. 첫날 아침 창 밖으로부터 들려 오는 소음에 공포를 느꼈던 경험이 기억난다. 예수회 건물은 언덕 위에 높이 있어서 서울 시내의 택시들과, 버스와 트럭들이 멀리서 어렴풋이 지나다니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 비슷한 소리들을 내 평생 들었다. 그것은 혼란과 무질서의 소리들이었다. 또한 이것들은 알려진 안정된 자리에 있으라는 경고인 동시에 모험에 초대하는 소리이다. 나는 나의 공포를 직면하는 것을 배웠으며 예수회 건물이 주는 안전함을 벗어나서 서울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시내 한복판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초대에 응 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현기증나도록 움직이는 것들과 소음의 신비안에서 나는 보는 것도 배웠다.

만일 우리가 불안정함을 단지 피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으로만 간주한다면 우리는 눈이 먼 것이다. 우리들은 공포라는 물위를 걸으라는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장님이 되었기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눈이 멀게 되었기 때문에 불안정한 어둠의 공포 때문에 너무 슬픈 나머지 우울증까지 겪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제공할 수 도 있는, 하느님께서 다른 한 손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른 직업에 따른 선택, 결혼, 인간 관계에 대해 극도로 걱정을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투명성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절망적인 형태의 어둠의 상태가 된다. 투명한 시력은 주어진 상품이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하느님의 보호를 배제하게 되는 방어적인 태도이다. 영적 생활은,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보살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지켜만 보는, 관중으로서의 스포츠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보호하고 있는 확고함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떼어 내는 갈등으로 이루어진 여정이다. 만일 우리 자신들을 변호하고 우리들의 어둠을 직면하기를 거부하면서 산다면 우리들은 환상 속에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은 겉잡기 힘들고 대리적일 뿐이다.

  영적 삶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았고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움직이고 향해나가고 심지어는 신뢰를 하는, 신비를 침착하게 환영하는 사람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은 보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청하였다. 예수님은 그에게 시력을 되찾게 해 준다는 약속도 없이 "가서 실로암 우물의 물로 씻으십시오 (요한, 9, 7)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만 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시력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그 자신이 스스로 연못으로 가야 했다. 그의 시력을 되찾는 일은, 그의 어두움의 신비를 예수님의 치유의 약속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에 달려 있다. 눈이 안보인 다는 것은 가혹한 은총이지만 그러나 계속 나아가면서 훌륭하게 성숙될 수도 있다. 나는 "나를 보내는 "실로암 우물"이 무엇이건 간에 그곳으로 좀더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을 배웠다. 나의 삶에 하느님의 약속이 충실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예수님은 그 남자에게 가서 씻으라고 말하신다, 그리고 그는 시력을 찾고 돌아 왔다. 부딪히거나 상처가 생기지 않지만, 가끔 온갖 종류의 어둠 속으로 눈이 안 보이는 나를 보낸다". 그러나 돌아 올 때는 보게 되고 그것을 봄으로서 나는 믿는다. 이렇게 되면 불안정함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은 눈이 안 보이는 것으로부터 내가 배운 영적 삶의 제일 첫 번째 요소이다.

  선택과 받아들임 눈먼 사람에게 도전을 가했던 유태인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만의 안전과 명확한 답을 찾는다. 예수님은 그들의 엄격한 율법주의를 포기하고 진정으로 각자 마음안에 있는 불안전감으로 들어 갈 것을 제안하신다. 우리는, 이런 지도자들은, 그 신비의 진정함을 불신하려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먼 사람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에게 두 번이나 찾아 오신 것을 주목하라 (요한, 9:1-35). 눈먼 지도자들의 관심은 안전에만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시력이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눈이 먼 그 사람은 종교적인 논쟁에 말려들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한때는 눈이 멀었었지만, 지금은 시력을 회복했다는 것만을 알 뿐 이다 (요한 9:25).

  눈이 먼 나에게 두 번째 제공 된 영적 삶의 선물은 받아들임이다. 그것은 가끔은, 가장 고통스러운 받아들임이다. 파티 혹은 다른 모임에서, 나는 그 저녁시간을 보낼 사람이나, 같이 앉거나, 같이 이야기할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에겐가, "미안해요. 저기 내가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친구가 있어요"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할 수 없다. 물론, 하느님이 나에게 보내신 그 특정한 사람에게 항상 전적으로 마음이 열려져 있거나 고마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똑같은 미소를 띠며, 나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나를 초대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것은 권력이라든가 부를 가진 사람들이, 몇 가지 중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신자들의 영성은 "성령을 받아들임, 즉 그것을 받아들이고 감사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우리들을 비우는, 그런 종류의 가난에 기초 해 있다. 나는 곧잘 경이롭지만 이상한 상황을 통하여 감사의 미덕을 경험하도록 초대되었다. 몇 번은, 내가 길을 건너가도록 도와준 후에도 계속해서 나를 도와 줄려고 했던 술에 취한 사람이다. 또 한번은 토론토의 지하철역에서 전철이 멈추고 문이 열렸다. 나의 양쪽에서 각각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많은 사람들과 소음 때문에 양쪽 모두 내가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받아들임은 쉬운 미덕이 아니다. 지나치게 까다롭기 때문에 하느님의 초대를 정지시키는 것은 가장 단순하게 일어 날 수 있다.

어떤 집에 손님으로서 초대를 받아 갈 때나는 어떤 형태로든 계란 음식은 싫어한다. 나는 가끔 크고 작은 계란 조각을 셀러드에서 발견한다. 가끔 나는 내가 무엇을 먹는지 조차 모를 때가 있다. 한국을 방문했었을 때 내 친구는, "나는 무엇인가 있는 것을 보기는 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라면서 나에게 말을 해 준다. 옷을 사러 갈 때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선택을 해 주어야 한다. 항상 같은 사람과 가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나의 복장도 일관성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인디아의 시인, 타고르는 "그분은 오신다. 그분은 오신다. 그분은 끊임없이 오신다" 라고 쓴다. 신앙인 인 우리들은 그분이 선택하시는 어떠한 형태건 그 안에서 그분이 오시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요구받는다.

단지 우리가 보는 것을 증명을 해야 되는 것에 묶여서, 오시는 분이 그 분이라는 것을 보는 것을 놓쳐 버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어둠이다: 피부 색, 머리 모양, 뚱뚱하거나 날씬하거나, 이런 것들은 분명히 그를 감싸고 참신하게 하겠지만, 오시는 그분은 오히려 꽁꽁 싼 것을 풀고 받아들여 지시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기 있는 형제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마테오 25:40)라고 말씀하신다. 눈이 멀었다는 이 가혹한 선물은 나의 자유와 선택할 수 있는 사치에의 욕망을 전적으로 대치한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나 자신이 선호하는 것과 나만의 바램이 있고,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잡은 다음에는, 내가 좀더 그분의 도움과 동행을 좀더 받아들이는 것을 배움으로서, 나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배운다.

나의 욕망과 기대의 손을 펴기는 하지만, 나의 손안에 무엇이 들어 와야 한다는, 이미 정해진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분의 현존을 민감하게 만져 볼 수 있기 위해 손을 펴고 있다. 바리세이파 사람들이 믿음의 기회를 잃은 동안, 장님으로 태어난 그 사람은 그의 시력의 회복과 함께 신앙의 빛을 받았다. 눈먼 사람의 받아들임은 바리세이파 사람들의 선택적으로 논란을 좋아하는 것이 나란히 대조가 된다. 영적 삶에서는 요구가 아닌 바램을 가지는 것, 완고한 기대가 아닌 희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눈먼 나를 받아들임으로서 나는 신앙이 제공하는 시력을 받았다. 나는, 어떻게 그 분이 오시든지, 혹은 무엇을 가지고 오시든지 고마와 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의존성과 독립성 나의 삶에서 "나 혼자 할 수 있어"와 , "좀 도와 주실래요? 사이의 긴장을 겪고 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 내가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는 것,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비현실적이며 영웅적이 되는 것에 대해 쉽사리 두려워 한다. 또한 너무 의존적이 되거나 남의 짐이 되거나 내가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내 눈이 먼 것을 이용하거나, 게으르다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한다. 요한 복음에서의 눈먼 사람은, 그가 누구인가를 나타 내는 데에,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 그의 부모들이 먹여 살렸던 사람, 그 자신 유다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등, 3가지 현실에 의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삶 안으로 들어 오셔서 낫게 해 주심으로서, 이 세가지 아이덴티티에 의존하고 있던 것을 극적으로 넘어 서게 하였다.

8절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이 진정 누구인가하고 물어 본다. 마을 전체가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지금 여러 가지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들은 지금 아들에게 책임을 져왔던 자신들로부터 떨어진다. 그들은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요한 9: 23) 라고 말한다. 그들 자신이 회당에서 위치를 잃게 될까봐 겁을 낸다. 그의 시력을 되찾음으로서 그는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한다. 34절에서, 절대적인 자유가 제공되었다. 새롭게 보게 된 그 남자는, 평생을 몸담았던 회당에서 쫏겨 났다. 그 다음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찾아서 새로운 아이덴티티, 의존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제공해 주신다. 이 이야기에서 신앙과 믿지 못함, 시력과 눈이 멀음이 긴장을 야기시키지만, 시력이 제공하는 자유로 인해 이 사람은, 믿는 자로서 해방이 되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하면서 30일 피정을 하였다.

나는 하느님 안에서 적절하게 의존적이 되는 것과 그가 보내는 도움과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서 고투하였다. 일주일 후에 나는 메사추세츠주의 병원의 정신과 병동에서 일을 하라고 보내졌다. 나에게 수퍼바이져가 첫 번째로 한말은, "물론 제일 처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이 병동에서는 독립적이 되야 한다는 겁니다"였다. 나는 적절한 독립과 감사하는 의존간의 긴장을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 긴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나에게는 은총이며 나를 도와 주는 사람에게도 은총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자부심이,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도록 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끊임없는 갈등이다. 언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자연스럽거나 편하게 될지 혹은 그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불쾌해 할지 전혀 모른다. 내가 길을 걸어 갈 때 내가 쓰고 있는 하얀 색 지팡이로 내 앞을 톡톡 치면서 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때에는, 지팡이는 항복과 패배의 견딜 수 없는 상징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장님이며 내가 혹시 너무 독립적이 아닌가하는 것에 대해 따질 것 없이, 또 도움 없이 나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이 긴장이 해결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장님이며, 내가 너그럽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도움의 빛을 고맙게 받아 들 일 수 있다. 내가 가혹한 선물을 저항하지 않을 때, 또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내가 은총이 되는 것을 허락 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자주적이 되는 것을 보면서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들은 차에 올라타고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친구들을 방문할 수 있고 또 훌륭하게 자선에 관한 일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너무도 손쉽게 책을 펴들고 읽는 사람을 보며 원망 할 수도 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그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피로해 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눈을 사용 할 수 있는 나의 친구들 역시 다른 영역에서 비슷하게 의존적이 될 수 있으며 능력의 모자람과 제한과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도록 배워야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설정한 자주성과 진실된 의존성이 보편적이라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내 친구들은 차를 운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그림책 속에 실려있는 사진이나 그림을 보며 세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못미치지만, 책속의 그림 그대로 그리고 싶어하거나 그림속의 사진처럼 기술적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할 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우리들이 가진 한계와 싸운다. 한편 이 한계들은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의존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의존적이 된다는 것에 대한 또 하나 고통스러운 단면은, 인내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 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 자주 나는 누군가가 와서 나의 우편물을 읽어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가 왔을 때는, 그의 우편물을 먼저 읽고 싶어 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좀더 기다려야 할 는지도 모른다. 나를 도와 줄려고 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나의 참을 수 없음이 의존성을 더욱 불쾌하게 할 것이다. 길을 건너 갈 때에는 모든 차들이 지나가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뿐더러 앞차가 지나간 후에도 내가 건너 가는 시간동안 뒤에 다른 차가 지나가지 않도록 거리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참을성이 없기 때문에 갈등을 겪는 사람들은 눈이 안보이는 사람들 뿐만은 아니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 귀가 안 들리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들, 모두 다 그런 악마와 씨름을 한다. 신앙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일상 생활의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바로 악마와 나의 눈먼 상태와 씨름을 하는 악마가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이해 할 때 나의 영적 삶의 모험에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항상 참지 못함의 형태로 나타나는 악마와 직면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 "야훼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은 일이다 (애가 3, 26)라는 구절을 읽는 것을 참으로 힘들게 한다. 

내 안에 있는 참지 못하는 에너지가 가끔 폭발을 하면 나는 급히 내방으로 들어오는데 도중에 층계에 내 발가락이 걸리거나 반쯤 열린 문에 내 머리를 박곤 한다. 나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듣는다 "야훼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실 날을 기다리신다. 복되어라. 그 분을 기다리는 자 (이사야서 30: 18-19). 은혜로운 하느님 앞에서 나는 기다린다. 나는 점차 "섬기는 자"보다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전환된다. 그분은 나에게 봉사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나를 조용히 가라 앉혀 주고, 나에게 권위가 아닌 강인함을 주고, 단지 단순한 에너지가 아닌 용기를 주신다. 참을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겪는 갈등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참을성의 부족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의 참을성이 부족함- 나에게 희망작인 기대로 부른다.

 사람들이 그들의 기도에 관해 나에게 이야기하러 온다. 그들은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문을 열기 전에 세 번씩이나 초인종을 누른다. 나의 방으로 급히 들어 와서 재빨리 앉은 다음 나에게 이미 다른 약속에 늦었기 때문에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53 분밖에 할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기도 생활이 매우 공허하고 무미 건조하다고 털어놓는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단지 가만히 침묵속에 앉아서, 자신들이 한말을 자신들이 다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우리들의 삶은 연속적이라는 것은 진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대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을 성이 없다가나, 지나치게 요구를 하거나, 독립적이라면, 이것이 그대로 하느님과 우리들의 관계안에서도 대부분 반영이 된다. 성서 속의 눈이 먼 그 남자는 예수님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치유하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또 예수님이 다시 그에게 오셔서 그에게 시력을 되찾게 해 준 분임을 나타내고, 신앙의 새로운 비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론 눈이 먼 그 사람의 삶과 영적 삶은 같은 점이 많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창조물들이 그 분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눈이 먼 상태 때문에, 마치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는 가끔 자신들을 우리 자신의 재산인양 취급하고 창조주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이려 한다. 여하한 형태로든 안전하지 못함을 항상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안전성을 항상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도구로 간주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또 우리가 어떤 것을 거부해야 되는지에 대해 혼자서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만 한다고 느낀다. 눈이 먼 것은 이러한 악마들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매일 겪는 육박전은 그들과의 전쟁을 더욱 격렬하게 하였으며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눈 이 먼 것처럼, 영적 생활도 끝없는 회심과, 낙오와, 다시 일어서는 것의 연속을 포함한다. 나는 항상 은총속에 서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또 항상 고마워 하는 눈이 먼 영적 사람이 될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