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예수님이 이
땅위에서 하신 사역 중
대부분은 치유사역이다. 전체
복음서들의 거의 5분지의 1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한 치유와 기적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전인적으로 온전한 형상이 회복되어지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왜곡된 신비주의나
은사 운동은 배격해야 하겠지만
오히려 교회가 성경적인 치유를
권장해서 성경적인 예수님의 치유목회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위한 존재임을
일깨우기 위해서 개인의 질병을
고쳐주는 것 뿐만 아니라 사회의
고통을 치유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이는 신자들에게 올바른 기독교 영성을 가르치고 훈련시킴으로 감당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2. 치유 목회의 기본적
이해
가) 전인적 인간이해
전인적 인간이해는 치유의 개념이해에 있어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질병의 원인도 전인적 요인이고, 치유도 전인적 치유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부터 나오는 인간이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영성을 포함시키는 것이며 멸성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전인적 인간이해는 치유의 개념이해에 있어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질병의 원인도 전인적 요인이고, 치유도 전인적 치유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부터 나오는 인간이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영성을 포함시키는 것이며 멸성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영육간에 전체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났음을 의미하며 인간의 본래적
통합성의 측면에서 전인적으로 히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각 요소
중 그 어떤 것도
무시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전체로써
다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치유목회는 인간을
돌보며 인간 삶을 도와주는
전인 회복이다. 그러나
치유 목적은 영적 회복을
우선으로 몸과 영혼과 정신이
하나가 된 인격적인 전인으로서의 영혼인
것이다. 치유목회는 따라서
전인적인 치유가 되어야 할
것이다.
“치유”한다는 것은 흐트러져
있는 상태, 분열, 이완(弛緩,느즈러짐), 이탈, 정상을 잃은 상태에서
정상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과
함께 창조 당시의 사회적인
질서의 회복뿐만 아니라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
질환으로부터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이 어느 한 부분에
결함이 생기면 전인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함이 일어난
그 부분의 치유만으로 결코
온전한 치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치유는 전인적인 치유(Total Healing)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 질병의 원인
구약 성경에서
사용된 질명은 죄를 지어
하나님께 불순종함과 배역함으로 생겨난
것으로, 하나님과 이웃, 자신과 사회와의 부조화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질병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칠 때
영, 혼, 육의 통합된 전인은
고통을 받는 것이다.
구약에서 사용된
질병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① 질병은
죄의 결과로 이해한다.
② 구약성경은
질병을 사탄의 역사로 이해한다.
③ 나쁜
감정들이 질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④ 음식을
주의하지 않고 취하거나 전염이
심한 병이 유행할 때에도
예방하지 않으면 질병이 오는
경우도있다. 신약에서는
“병든, 연약함”의 뜻으로 쓰였다.
이처럼 모든 질병은 한 가지의 원인만으로 오지 않는 것을 살펴보았다. 인간의 질병은 영, 혼, 육의 병 및 사회의 병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병을 유발시키는 원인들을 상호 작용하고 있다. 질병은 특정한 기능의 와해를 의미하며 신앙이 병들게 되면 삶의 기본적인 기능들이 철저하게 파괴된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치유 사역을 위해서는 포괄적이며 동시적인 전인적 치유이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모든 질병은 한 가지의 원인만으로 오지 않는 것을 살펴보았다. 인간의 질병은 영, 혼, 육의 병 및 사회의 병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병을 유발시키는 원인들을 상호 작용하고 있다. 질병은 특정한 기능의 와해를 의미하며 신앙이 병들게 되면 삶의 기본적인 기능들이 철저하게 파괴된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치유 사역을 위해서는 포괄적이며 동시적인 전인적 치유이어야 할 것이다.
다) 치유의 이해
일반적으로 치유(Healing) 와 신유(Divine Healing)는 구분
될 수 있다. 대개의
치유는 보편적으로 병이 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타종교나 심지어
주술, 샤머니즘에서도 병이
치료되곤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유는 의학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오랜 시간을
요하는 치료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 받는 것이다. 또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치료가 단
시간에 고침을 받는 치유는
신유의 일부로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대부분의 치유가 하나님의 치유인
신유이기 때문에 두 단어가
상호교환적 용어(interchageavle
terms)로 사용되었다.
성경 사전에서
치유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치유는 병든 사람을
치료하거나 건강을 회복시킨다는 의미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과 내용은 상처를
아물게 하고 사고로 인한
상처, 외과적 질병
등을 낫게 하거나 육체
또는 정신의 특정한 병적
상태를 효율적으로 치료하는 행위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치유는
인간의 본래적 상태로의 회복이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시고
죄로부터 구속하시며 치유를 통하여
계속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유란 질병의 제거 뿐만
아니라 질병 이전의 상태로
회복을 말하며 더 나아가서는
완전한 구원을 말한다.
여기에서 치유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치유를
뜻한다. 치유에 대한
어원은 구원과 회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치유가 신약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의미의 명사로 50여
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치유는 전인적인 인간의
구원임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라) 목회적 상황과 치유 목회의 중요성
지금까지 성경에
나와 있는 치유는 모든
성도와 교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동시에
치유는 샤머니즘(Shamanism)적
현상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에
끊임없는 논쟁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는
분명히 성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역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된다.
21세기를
맞이한 이때에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하고, 목회적
권위도 실추된 이 시점에서
치유가 초자연적 치유와 일반치유의
어느 한쪽만을 강조함으로써 극단을
달리게 될 때는 위험하다. 그러므로
치유목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영성적
치유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자들에게
온전한 인격체로 전인적 구원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
치유목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치유 목회의 신학적 이해
가) 치유의 영성적 접근 이해
본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치유의 영성적
접근은 인간의 영성을 모든
부적응과 문제의 근원이며 뿌리로
보는 치료법들이 포함된다. 영성 치료법은 인간의
잠재력 개발치료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1) 칼 융(Jung)의 분석적 치료법
융의 분석심리학적
치유의 방법은 인간의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정신적인 고통도
치료하는 방법이다. 그는 우리에게
영혼의 치유에 대한 접근의
방식을 제공하여 주고 있다. 그는 영성적 성장을
전인성으로 향하는 모든 움직임에
중심적, 필수적 차원이라고
보았다. 또한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인간 속에
내재된 강력하고도 보편적인 본능으로
믿었다. 따라서 융의
분석적 치유나 치유목회가 본질적으로
전일성을 이루는 삶의 성취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 실존요법(logotherapy)과 의미치료
프랭클(Frankl)은 마치 전염병과도
같은 실존적 신경증을 낳게
하는 현대사회 곳의 집단벅인
“가치진공”을
지적한다. 이러한 “가치진공”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 왜곡된
가치, 그릇된 신념” 등을 만들어 내게
한다. 따라서 치료의
효과와 영적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개인의 가치체계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인생철학이나 종교
등의 견고한 기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3) 아싸지올라(Roberto Assagioli)의
정신통합치료
아싸지올리에 의하여
개발된 정신통합이론은 목회상담과 심리치료의
통찰과 방법에 훌륭한 자원이
된다. 정신통합은 영성적이면서
성장 지향적이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자아는 우리의
궁극적인 정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초인간적인
자아의 반영이다. 정신통합은
이 고차원의 자아를 우리들의
창조의 중심과 본질로 여긴다. 이 참된 자아를 인간존재의
통합적인 중심으로 만들려는 것이
이 치료의 근본적인 목표이다.
나) 치유 신학의 부정적 이해
기독교가 잃어버린
것 중에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자유능력에 대한 풍성한 유산을
상실한 것이 최대의 손실이다. 이러한 불신앙적인 손실은
치유에 반대하는 부정적인 입장이
생겨남에 따라 야기되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현대의 기독교
교회들은 그들이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에 대해 공시적으로
아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편적으로 치유에 반대하는 기본적인 편견:
첫째는
“우리의 신유와 상관하기를 원치 않는다”라는
것이다.
둘째는
“나의 질병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십자가이다”라는
생각인데,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병을
주신다는 확신이다.
셋째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는 성지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성자가 아니다”라는 편견이다.
넷째는
“우리는 더 이상의 표적들과 기사가 필요 없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섯째는
“기적들은 진짜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실재를 표현하는 원시적인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또 치유사역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첫째는
선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을 이루시기 위해
병을 주신다는 견해이다. 두 번째는
중지주의이다. 치유에 대한
두드러진 부정적인 견해의 하나는
더 이상의 표적과 기사는 필요 없다는
중지주의이다.
다) 치유 신학의
긍정적 이해
오랄 로버츠(Oral Roberts)는 하나님은 질병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치유하시는
분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브루너(Frederick D. Brunner)
도 “모든 환자에
대한 하나님의 기본적 의도는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긍적적인
관점으로 신유를 보는 사람은
예수 사역 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의 능력으로 더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4. 영성 신학의 기본적 이해
가) 신학적
이해
기독교 영성의
이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과 관게를 맺을 수
있는 접촉점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는 치유목회의
원래대로의 회복의 의미와도 같은
의미이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으로 기초가 놓여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워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중심은 성령의 함께 하시는
은혜로 생명력 있으며 역동적인
삶으로 드러나 우리의 삶의
태도와 모습을 형성해 가는
것이다. 여기에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여러 성령의
은혜와 열매들이 외적인 삶의
태도로 드러나면서 은총의 내적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을 언급할 때는
반드시 성령과 그의 역활을
이해해야 한다.
나) 목회적
이해
영성 신학의
목회적 이해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예수의 성육신적인
희생과 헌신을 본받아 성령의
지도와 인도하심으로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영혼
구원을 위한 회복과 치유의
복음 전도와 사회 정의에
같은 관심의 목회적 관점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목회자이며
종교개혁자, 그리고 영성
신학자였던 웨슬리는 영성의 차원을
개인이나 교회 공동체라는 곳에만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차원에서 사회봉사적 활동과 사회
변혁적 참여 활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또한 목회적
입장에서 보는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이다(갈2;20).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고난의 길이 곧, 목회적 영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목회자로서
영성을 대하는 태도는 인간의
모든 문제속에 내재한 심리
– 사회적인 차원과 영성적인
차원에 균형적, 동시적으로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5. 치유 목회와 영성
가) 치유 목회와
영성의 상관성
영성치유는 이와 같은 생명현상을 깨닫고,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깨달아 이를 구현하고 성취하도록 돕는 전인적 치유이며, 인간성의 성화(sanctification) 과정이다. 즉, 영성치유는 하나님의 신비인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가 지향하는 하나님과 동료인단 및 피조물과의 깊은 친교와 연대성을 성취하도록 돕는 전인적 치유이다.
또한, 영성치유는 인간성의 존엄근거이며
영광의 근거인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을 일깨우고, 인간성을
비본래적 존재로 타락시키는 온갖
세상적 힘과 권세들, 그리고 망상과 욕망, 오만과 이기적 자기애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복음 안에서
자유 하는 인간, 사랑하는 인간으로 돌아서게
하는 전인치유이며 인간성의 해방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기존재의 다차원적 통전성을 자각하고, 자기 존재의 근거들과
통일되고 연합되며, 전체
생명에 참여하고 관계하는 생명전체, 인류전체, 우주전체에
전인적으로 참여케 하는 치유이다.
영성치유란 인간존재가
우주적 창조와 섭리 속에서
인간의 위치와 사명을 자각하고, 인간의 정신형상과 영성의
의미를 전우주의 생성과정에서 파악하여
우주 속에 지질권, 생명권, 정신권을
하나님에게로 수렴해 가는 성례전적
과정이다.
영성치유는 결국 참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을 위한 사람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적 생명의 성숙을 돕는 전인적 치유로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움직이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할 뿐 아니라, 그의 삶을 몸으로 따라 실천하도록 돕는 체계적 치유이다. 그러므로 영성이란 치유이며, 치유목회란 영성치유, 영성훈련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고 본다.
나) 영성훈련을 통한 치유
기독교 영성의
삶은 결국 이 세상적인
삶에서 돌이키고, 자신의
내면을 정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성훈련의
최종적 목표는 “사랑”이러야 하고, 그 사랑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다. 김경중도 그의 논문 “Developing the Healing Ministry
through Bible Study and Prayer” 에서
은사계발의 가능성을 훈련을 통해서
제시한 적이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연구자도 동의한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미
성령 받은 신자에게는 권능이
주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각 신자에게 숨겨져 있는
영적인 은사를 계발하는 것은
목회자의 몫이고 그 방법으로서
훈련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마가복음 16:17-18절의 말씀은 “믿는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라고 하셨고, 사도행전 1:8절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라고 하였다. 즉, 이는 성령 받은 신자는 그 안에 이미 권능이 임하여 있음을 보여준 것이고, 이 사실을 각 신자들이 이해의 결핍이나, 믿음의 결핍으로 나타내질 못하고 있기 때문에 훈련 프로그램은 각 사람의 은사를 나타내는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
예배의 영성을 통한 치유목회
예배의 형식은 지방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데,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도 예배의 형식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배의 정신은 본질적인 문제인고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교회의 예배는 성전예배와 회당예배의 상응하는 두 개의 구성요소를 내포한 가운데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로서의 예배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백성은 그에게 응답하는 것이 참된 예배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는 사랑은 체험케 하여 병든 믿음, 병든 마음을 치유하여 이 세상에 소외된 이들을 위한 섬김의 삶을 실천케 하는 깊은 의미가 있다.
존 터너(John Turner)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인들이 모인다는 것은 이미 어떤 일이 일어 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예배의식 속에는 누군가에게 어떠한 종류의 치유가 일어나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예배의 영성을 통해 예배자들 모구가 심령과 인격과 삶을 변화시켜 사회문화와 세상과 우주 세계까지를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되도록 변화시키며 회복하는 치유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라) 경배와 찬양을 통한 치유목회
경배와 찬양에는 삶이라는 부분과 그 안에 놀라운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예배하는 삶 자체라는 것이다. 물론 영적 전쟁을 수반하고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고 상한 심령이 치유 맏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꼭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고 예배한다면, 영적 자유와 치유는 물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경배와 찬양의 능력은 삶 자체가 예배자로서 있을 때만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질병을 치유 받기 위한 반 능동적인 의무적, 주술적 행위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임재하심과 창조주, 우주의 섭리자로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일상적인 삶 속에서 찬양할 때 찬양의 치유능력은 육체적, 심리적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모든 영역적 부분에서 치유되고 영속적인 치유, 즉 전인 치유의 삶을 살게 될 것이며 이는 곧 구원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에서 찬양 예배, 다시 말해서 경배와 찬양 운동을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교회 예배에서의 찬양의 전인 치유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교회의 움직임들이 있기를 바란다.
6. 치유 목회와
영성의 활성화를 위한 제안
지금 한국 교회 곳곳에서 들리는 “영성”이라는 단어들은 사실 한국교회의 정체성과 신학교육의 위기, 목회자의 영적 능력 부족, 사명감 결여, 신자들의 비신앙적 모습, 비인간화 된 모습 속에 더욱 파괴되는 “하나님의 형상”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치유목회 사역 중,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나타나는 치유 현상을 사역자들은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방법이나 형태만이 마치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강조하고 선호했다. 또한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병든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타난 주님의 다양한 치유의 형태나 치유의 참다운 이해에 대한 신학적 정립은 목회사역에 꼭 필요한 모습이다. 앞으로의 한국 교회의 나아갈 모습은 총체적인 전인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딤전4:7)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치유목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