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와 임재(臨在)는 우리가, 인간의 공동체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와 이 땅이 경험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임재하는 자는 여러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 중의 어떤 한 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창조적이고
살리고 구원하며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안으로부터 약동하는 우리의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모든 감각을 통해 완전하고 충만하고 치유 받고 구원 받은 생명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그리고 우리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맛보고, 만지며, 봅니다. 성령 하나님을 일컫는 이름들은 많습니다. 그것들 중에서 보혜사(Paraklet)와 생명의 샘(fons vitae)이라는 이름이 나로서는 가장 아름답습니다.
1.하나님의 영의 임재에 대한 성서적 전망 성령에
대한 기다림과 성령의 도래 성령을 향해 비는 기도는 모두 성령의 도래를 비는 기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특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것을 성령의 현현(顯現:
Epiklese)이라고 부릅니다. 대개의 오순절 찬송은 단지 "창조주 성령이여, 오소서"(Hrabanus
Maurus: Veni, Creator Spiritus)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향해 비는 기도는 그의 편만한 임재를 갈구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의 은사가 아니라 그 이상(以上)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무한한 임재입니다. 이 임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은 깨어나고,
온전히 약동하며, 생명의 능력을 부여 받습니다. 성령의
도래를 비는 기도는 마라나타(Maranatha) 기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마라나타 기도는 그리스도를 향해 비는 기도이며,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마지막 바로 앞 구절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단지 예수의 인격을 향한 기도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분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파루시아(內臨)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의 시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영광의 보증"이라고 불립니다(엡 1:14 , 고후 1:22 ). 지금 성령 안에서 개시(開始)되는 바로 그것은 장차 영광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영광의 나라는 기대 밖에, 그리고 느닷없이 오는
것이 아니라, 영의 나라 안에서 벌써 예고되고, 그 안에서
임재하는 힘을 지닙니다. 이것은 마치 봄과 여름, 파종과
추수, 일출과 정오 와 같습니다. 성령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는 자는 기다림을 향해
마음을 열어 놓으며, 영의 에너지로 하여금 자신의 생활 속으로 흐르게 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구원 받기 위해 탄식할 도리 밖에 없고 탄식 가운데서 침묵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은 이미 그들 가운데서 탄식하고, 그들을 위해 친히 간구합니다(롬 8:26 ).
억눌린 이 생명과 파괴된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오심을 비는 기도와 탄식은
그 자체로서 성령의 역사(役事)요, 그의 생명의 첫 표징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늘 두 가지의 모습으로 체험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대면(對面)인데, 우리는 이 대면을 위해
간구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臨在)인데, 우리는
이 임재 안에서 간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空間)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를 두 가지의 모습으로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임재의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부르는 대면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령을
향해 비는 기도에게 주어지는 응답은 그의 도래, 그의 충만, 그의
내주(內住)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심령
안으로, 우리의 공동체 안으로, 우리의 땅으로 성령이 오기를
기도하는 자는 하늘로 도피하거나 피안의 세계로 은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심령, 그의 공동체, 이 땅을 위한 희망을 갖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데려 가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상처 받기
쉬운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오기를 비는 기도는 위대하고 꺾일 수 없는 생명 사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향해 비는 기도의 또 다른 응답은 그가
"만인(모든 육체)에게 강림하는 것"(욜 2:28 ,
행 2:17
이하)입니다.
이 놀라운 은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만인"(모든 육체)은 분명히 무엇보다도 인간의 생명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9장 10절
이하에 기록되었듯이, 이것은 모든 생명체, 풀과 나무와 동물도
포함합니다. 시편 36편
9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생명의 샘"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서 "물"을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메마르고 목마른 만물에게
생기를 주는 "생명의 샘물"과 물의 비유가
사용된 것은 성령의 활동을 이해 시키기 위함입니다. "생명의 물"인 그는 죽어가고 메마른 것을 살리고, 결실을 맺게 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성령이 단지 하나의 신적인
위격(Person)만이 아니라 신적인 원소(Element)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보냄을 받으며", 그는 폭풍과 같이 "옵니다". 그는 마치 홍수와 같이 모든 생명체를
온통 덮어버리며, 모든 것 속으로 침투합니다. 만일
성령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라면, "하나님의 영의 강림" 안에서 모든 육체는 신성(神性)해집니다.
죽어야 할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거룩한 것이요, 하나님 자신처럼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강림" 안에서 신성(神性)이 열리며, 여성 신비주의자 멕트힐트 폰 막데부르크(Mechthild Von Magdeburg)가 읊었던 것처럼, "충만하고 흘러 넘치는 신성"이 됩니다. 샘, 강과
바다 안에서 물은 동일한 본질을 이루지만, 물의 운동은 단계를 이룹니다. 영 자체로부터 서로 다른 영의 능력으로 넘어가는 과정, 은혜(Charis)로부터 많은 은사들(Charismata)로 넘어가는 과정은 하나의 유출(流出)처럼 유동적입니다. 신성이 편만하게 임재하면, 그 안에서 인간 생명체, 아니 실로 모든 생명체들이 알차게 개화(開花)하고, 영원히 살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