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원래부터,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선교, 신앙의 확신을 갖는 선교가 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보내심에 순종하고
부응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과 그분의 형상인 다른 인간들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또 그들을 종교적으로 지배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인간인
우리가 다른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고 부응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란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성령을 이 세계 안으로 보내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 안으로 보내시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요한복음
식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 왜냐하면 성령은 "생명의 샘"이기 때문이고, 이 세상 안으로 생명, 온전한 생명, 충만한 생명, 상처 받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이고 살리는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영원한 이 생명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죽기 전부터 이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이 세계 안으로 그리스도를 보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가
인격(人格)으로 온 "부활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파괴될 수 없는 생명"이 밝히 드러났으며, 그리스도를 이 세계로 보낸 생명의 영은
부활의 능력이 되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옵니다. 성령의 보내심은 꺾일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
사랑과 그분의 놀라운 생명 희열의 드러남입니다. 예수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병자들이 치유되며, 애통하는 자들이 위로 받고, 버림받은 자들이 용납되며, 죽음의 마귀들이 추방된다고 공관복음서는
말합니다. 성령이 임재하는 곳에 생명이 있다고 사도행전과 사도들의 편지들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기쁨과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헤아려 볼 때, 선교란 바로 위로와 생명의 용기를 퍼뜨리고 죽어가는 자를 일으키는 생명 운동과 구원 운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가 이 세계로 가져온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선교 이해에 어떤 의미를 줍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를 그리스도교적 제국(帝國), 그리스도교적 문명 혹은 서구의 종교적 가치를 확산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를 영원한 구원을 보장하는 교회의 확장과 증식(plantatio
ecclesiae)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교를 우리 자신의 신앙 결단과 회심 경험의 전달로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제국, 그리스도교적 문명 혹은 서구적 가치 공동체의 시민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곧 하나님의 영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곧 성령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회심을 경험하고
신앙을 결단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원한 영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교 선교의 이런 전통적 형태 안에서 우리는 영의 보내심과 새로운 생명을 분명히 너무 좁게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적 생활양식, 교회의 교제와 개인적 신앙 결단과 경험도
선교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선교는 새로운 생명의 선교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것입니다. 100년 전에 뷔르템베르크(B temberg)의 각성 운동의 설교자였던 크리스토퍼 불름하르트(Christoph
Blumhardt)는 우리가 "종교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로, 교회로부터
세계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로부터 전체를 위한 희망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교적 문명이나 서구적 가치의
확산 대신에 "생명의 문화"를 세우고 "죽음의 야만성"에 대항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그의 마지막 교서(敎書)에서 천명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서구 국가들, 유럽 국가들과
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생명 존중은 중요한 안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난 시절의 세계
정복자들의 오만(傲慢)을 상실하였습니다. 우울감(tristesse)은 우리의 생활 정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흡사 차가운 무감정(Apathie)에 마비된 것과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냉대는 우리가 그들의 생명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일로 동요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은 이제 힘이 아니라 무능(無能)입니다.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인류는 사회 재앙이나 군사
재앙 때문에 망하기 전에 이러한 영적인 무관심 때문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생명을 다시 끔찍이 존중하고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죽음과 또 죽음을 퍼뜨리는 모든 세력들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생명의 선교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생명, 즉 온전하고 충만하며 쪼갤 수 없는 생명입니다. 하나님, 영원하며 무한하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너무나 가까이 계셔서 당신을 사랑하시며,
그분의 사랑 안에서 당신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용납하신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이 아닙니까? 이 사랑의 불꽃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게 될 것이며, 일어나서 "머리를
높이 들고", 그리고 "똑바른 길을 걸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바로
그 때부터 우리의 생명의 영은 깨어나며,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능력을 받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사랑의 "빛나는 눈"으로, 우리의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면, 이러한 경험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는
일, 병든 자를 고치는 일,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일과 죄인들을
용서하는 일, 즉 위협 받고 상처 받는 생명을 파괴의 세력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은 이러한 생명의 복음에
속합니다. 또 이것은 우리가 정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 혹은
개신 교회를 확산시키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정을 쏟아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선교란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데려 오는 것"(cogite
intrare)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와 만물의 새 창조에 대한 희망으로 초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당신은 하나님의 이 미래의 세계로 초대 받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오늘 바로 즉시 하나님이 그분의 날에 완성하실 이러한 갱신을 미리 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를 확장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미래를 위해 열정을 쏟는다면, 유럽
교회의 흉측한 분열을 더 이상 수출하지는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 대신에 종교적 교파주의를
확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종교를 반대하는 문화 혁명이 사그라진 후, 그리스도인들이 수용소와 지하로부터 나와 대중들에게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감리교 신자들, 감독교회 신자들, 장로교회 신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의 지체들만이 존재했을 따름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빨리 퍼져 나갔던지, 매일 새로운 교회가 문을 열었으며, 오늘 날엔 4천만에서 6천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분열된 교회들이 교회일치적인 사귐을 나눌 수 있으려면, 그리고 그들
자신의 관심보다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릴 하나님의 나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려면, 언제나 함께 박해를
받고 순교자가 되는 경험이 필요할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선교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보다 앞섭니다.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의 살아있는 공동체는 저절로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선교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이 있는 곳, 폭력과 죽음이 생명을 위협하는 곳, 삶의 용기가 상실되어 삶이 위축된 곳이라면, 그 어디서나 생명의
선교는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의 영원한 생명은 이생의 삶과
다른 삶이 아니라 이생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다"라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3절에서 강조합니다. 성령의 구원경륜(救援經綸)은 모든 생명과 모든 생명체를 포괄하며, 종교와 영성(靈性)에만 국한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새 창조의 지평 안에 있는 성령 체험 이제 우리는 세 가지의 파도(波濤)를 타면서 성령의 선교를 추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며, 어떻게 우리가 이 일에 참여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갱신: 성령
강림을 체험한 초대 교회(행 2:17 이하)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예언자 요엘의
예언(3:1 -5)의
성취로 이해하였습니다. 엄청난 재앙이 임하는 종말에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의 문장이 말하듯이, 물론 모든 육체란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경건한 육체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모든" 육체,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요엘이 "육체"라고
표현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자들은 특히 "약자들, 힘이
없는 자들과 희망이 없는 자들"입니다(H. W. Wolff). "너희 자녀들이 장래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다". 아직은 생명을 충만히 누리지 못하는 젊은이들과 이제는 충만한 생명에
참여하지 못하는 늙은이들은 누구보다 먼저 이 생명의 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은 너무 젊거나 이미 늙어 버린 자들도
성령을 받습니다. 이리하여 세대들 간에 새로운 평등이 이루어집니다. 그
누구도 너무 젊지 않으며, 그 누구도 너무 늙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평등하게 새 생명의 영을 받습니다. 젊었다고 유리(有利)한 것이 아니며, 늙었다고 불리(不利)한 것도 아닙니다. "아들들과 딸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남종들과 여종들"은 성령을 받을 것입니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평등해집니다. 여자들도 남자들만큼 하나님의 영에
가까이 있습니다. 이제는 남성적인 우월감(優越感)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여자들과 남자들의 새로운 메시야적 공동체가 동등한 은사와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장래 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논쟁의 여지가 없이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똑같이 세례를 베풀었으며, 그래서 그들을 영의 은사를 소유한
자들로 인정하였습니다.
오직 남자만을 성직에 임명하고 여자를 설교와
예언에서 배제하는 교회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령을
"소멸시키고"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고 있습니까? 성령 체험 안에서 남자 주인들과 남자 노예들, 여자 주인들과 여자
노예들은 새로운 사귐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회적 차별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철폐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일어난 영적 각성 운동들은 모두 이러한 성령 체험의 사회혁명적 요소들을 깨닫고 확산시켰습니다. 이들은 가부장제도, 남성 중심의 교회와 노예 주인들에게 위험스러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어린이들과 노인들의 이런 성령 체험은 그들의 생명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위협적인
것이 됩니다. 연약하고 사멸할 생명에게 생명의 영이 임한다면, 이것은
곧 거대한 우주적 재앙 -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할 것이다" - 에 의해 위협 받는 모든 생명체에게 그가 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탈취하는 지배자들, 지금의 부자들과 아름다운 자들도 궁극적으로는 여기에 동참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늙은이들과 젊은이들, 남자들과 여자들, 주인들과 종들의
공동체는 "위험 속에서 구원"을, 허무한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그리고 사라지는 시간 안에서 영원한
미래를 몸소 선포하고 증언합니다.
모든 생명체의 갱신: 구약성서에
의하면 영(ruah)은 하나님의 생명의 숨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의 숨을 도로 취하시면, 모든 것은 먼지로 흩어집니다(시
104:29 이하). "모든 만물"은
이러한 우주적인 연관성 안에서 "모든 육체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흙이 있는 자가 육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
34:14). "땅을 가득 채우고 모든 것을 모으는"(지혜서 1:7 , 사 34:16) 것은 하나님의 이 생명의 숨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생명의 숨에 의해 생겨났고, 이를 통해 생명을 조성하는 창조의 공동체 안에서 "결합됩니다". 사람도 모든 피조물의 이러한 생명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이 공동체로부터 벗어나면, 생령(生靈)을 잃게 됩니다. 만약 인간이 이 공동체를 파괴하면, 자기 자신을 파괴합니다. 생명의 영, 이것은 무엇보다 피조물들의 생명 연관성입니다. 만물은 서로 의존해 있고, 서로 함께 지내고, 서로를 위하며, 종종 서로 안에서 공생(共生)하기를 좋아합니다. 생명은
사귐이고, 사귐은 생명을 전달합니다. 창조의 영과 마찬가지로
새 창조의 영도, 인간들 사이에서도 그러하듯이, 인간과 모든
다른 생명체 사이에서 생명의 사귐을 회복합니다.
새 창조는 육체를 폐기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육체를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의 영을 사람의 마음 속에 주신다면(겔 11:19 ,
36:27), 사람들은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버리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11장이 예언 한대로, 샬롬(평화)이 사람들과 동물들을 하나의 새로운 생명
공동체 안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라"(사 32:15-16). 구원 경륜(救援經綸)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구원
생태학(救援 生態學)도 역시 존재합니다.
주님은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함께 사는 모든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땅으로부터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창 2장). 이 땅은 우리의 공동 환경이며, 실제적으로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시락 40:1). 우리가 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대지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대기권과 생명권을 포함하는 지구 시스템(system)을 말합니다. 성서적 전승에 의하면 땅은 풀, 나무와 동물을 "산출한 존재"이며, 인간도 역시 땅으로부터 취해졌습니다. 이 땅의 생명 공간은 모든
생명체의 창조 공동체의 한 부분입니다. 땅을 단지 원료로만 생각하고 땅을 더 이상 거룩하게 여기지 않게
된 것은 현대의 산업 사회가 도래하면서부터 입니다. 하나님의 땅의 거룩함을 재발견해야 할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재앙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서(智慧書)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영은 "온 땅"에
충만합니다. 여기서 오늘 성령에 의해 개시(開始)되고 확증(確證)된 하나님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계 21장)을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면, 영생도 없습니다. 그리고 새 땅이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