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보내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였을 때 당시 갈릴리에서 다스리던 유대 왕 헤롯은 이 소식을 듣고 당황해 한다. 그 이유는 예수의 복음 사역에 대하여 군중들이 열광하였기 때문이었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눅 9:7-8).
헤롯 왕은 세례자 요한이 그를 향하여 동생 아내 헤로디아를 취하는 것이 옳지 않다(막6:18)고 비판했을 때 두려워했다. 헤롯 왕은 세례자 요한을 참수하여 그를 제거한 후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젊은 랍비 예수가 나타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자 군중들이 열광적으로 그를 따르게 되었을 때 헤롯 왕은 새로운 위협을 느꼈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헤롯 안티파스(Herot Antipas)의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눅 9:9).
오천명을 먹인 사건: 오병이어의 기적
4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그들의 복음서(마14:13-21, 막6:30-44, 눅9:10-17, 요6:1-15)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일어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자(요 6:1), 거대한 군중들이 따랐다. 이는 이들이 예수가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요 6:2). 날이 저물자 열두 제자들이 나아와 이들의 식사 문제 때문에 예수에게 말한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눅 9:12).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에 제자들은 대답한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눅 9:13).
그 곳은 빈들이었고 “남자가 한 오천 명 되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르신다: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눅 9:14). 제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군중들을 다 앉힌다(눅 9:15), 그런 후에 예수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다”(눅 9:16). 예수께서 축사하시자 떡 5조각과 물고기 2마리는 5천명이 먹을 수 있을만큼 부풀었다. 예수의 축사를 통하여 그 속에 내재한 로고스(말씀)의 창조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눅 9:17).
예수를 왕으로 만들려는 군중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예수에 대한 군중들의 오도된 상(像)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군중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한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군중들은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몰려온다. 유대인들은 옛적 출애굽시에 경험한 만나(manna) 기적이 다시 일어난 것이요, 이것은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 6:14). 유대인들은 만나 기적이 일어난 산(요 6:3)을 하나님의 계시의 장소로서 시내산을 생각하고 있으며, 예수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생각하였다. 군중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산으로 피신하는 예수
복음서 저자 요한은 군중들의 이러한 추대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예수는 군중들에 의하여 억지로 왕으로 추대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자신의 선교 사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군중들의 열광과 환호에 미혹되지 아니하셨다. 이것을 수락하는 것은 일시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대중영합주의에 말려드는 것이다. 군중들의 감정은 수시로 변한다. 이 대중영합주의는 나중에는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절규한 목소리(요 19:15)가 된다. 예수는 군중들의 추대에 대하여 거절하고 자신의 고독한 길, 고난과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이 길이 바로 구약성경이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 고난의 종이 가는 길이다.
생명의 떡
예수께서 광야에서 군중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단지 육신의 허기를 면케하여 주고자 함이 아니라 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에서(요 6:59) 오병이어 기적의 진정한 의미를 군중들에게 가르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역사적 예수는 그의 본성에 있어서 태초의 말씀(요1:1)이었다.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요, 사람들의 영혼이 매일 먹고 살아야 하는 영적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하신 것이다. 예수는 창세기가 증언하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더러 임의로 따먹으라고 허락하신 생명나무 실과이다. 이 생명나무는 인간의 타락과 함께 없어졌다가 요한계시록 22장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나타난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예수를 육신의 관점에서만 아는 군중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가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예수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린다”(요 6:41). 이들은 예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말한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42).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어 말한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 6:52).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한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요 6:60).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말씀하신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요 6:61).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영적인 설교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예수를 단지 정치적인 메시아로 보고 그를 추종하였던 무리들은 실망하고 많은 수가 예수를 떠나갔다.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라”: 성만찬적 연합의 진리
예수는 사람의 영혼이 먹고 영생을 얻는 생명의 떡에 관하여 증거하신다. 그리고 이 떡은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사람들이 이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는 다시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란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가져다 준 대속(代贖)의 진리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란 단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고발되고 로마 총독에 의하여 사형이 집행된 정치적 범죄 내지 바리새인이 뒤집어 씌운 종교적 모독죄에 대한 형벌로 보아서는 안된다. 복음서 저자 사도 요한은 예수 자신이 증거하신 자신의 죽음이 지니는 대속의 의미를 우리들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 이 말씀은 초대교회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말씀이다. 오늘날까지 기독교회는 예수의 말씀에 따라서 일년에 4번 또는 매월 한 번씩 성만찬을 집행하면서 이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고 있다. 단지 기념이 아니라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와의 신비적 연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도 성령 안에서 그의 내주하심을 경험하는 모든 신자의 마음 속에서 영적인 체험의 사건으로 재현되고 있다.
역사적 예수의 정체
광야에서 일어난 오병이어의 기적은 “역사적 예수란 누구인가?”라는 그의 정체(正體)를 드러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애굽한 후 광야 40년간 이스라엘을 먹인 자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그 황량한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떡과 고기를 맛보도록 하였고 그들의 육신의 생명을 연맹하도록 하였다.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리고 메추라기는 중동지역에 집단 서식하는 새들인데 하나님이 이 새떼들을 이스라엘 진영으로 몰아주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축사하셔서 그것이 5천명이 먹일 수 있도록 불어나도록 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예수의 기적은 능력의 과시에서가 아니라 무리들이 빈들에서 기진맥진하여 쓰러질까 연민과 사랑에서 이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역이었다. 둘째,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인 자신을 믿어야한다는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셋째, 무리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생각하고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자 예수는 이들을 피하셨다. 여기서 역사적 예수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는 종교적 기적 연출가도 아니고, 정치적인 선동가도 아니고,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요 메시아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러한 예수를 증언하기 위하여 그의 복음서를 태초의 말씀에서 시작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는 태초의 말씀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예수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역사적 예수의 정체란 성부 하나님의 품 속에서 나타나신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도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동일한 증언을 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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