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2009

46 십자가에 달리신 왕, 나사렛 예수

예수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당시 로마 지배자들에 의하여 체제에 대한 모반죄로 십자가에 달리신다. 예수는 로마 병정에 의하여 노예와 체제 반란자들이 달리는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예수는 사실로 메시아였다. 그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심문에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공언했다. 그러나 그의 메시아 되심은 가야바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거부되었다. 바로 이 사실을 공언했다는 사실로 예수는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했다. 그는 실로 유대인의 왕이었다. 그는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공언했다. 예수는 이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리신다. “유대인의 왕”이란 예수의 공언은 현재 있는 유대의 왕 헤롯의 권좌를 부정하는 것이요, 이것은 로마 황제의 권좌를 대표하는 총독의 권좌를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공언하신 메시아와 유대인의 왕이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는 사실로 메시아였으나 그는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였다.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었으나 그는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왕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진실한 모습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빌라도에게 이해될 수 없었던 것이다.

1. 예수의 죄목: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빌라도는 예수에 대하여 사형을 언도하고 죄패를 써서 그가 지신 십자가 위에 붙인다. 죄패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요 19:19) 이라 기록되었다. 예수는 가장 비정치적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가장 정치적인 죄목을 달고 십자가에 처형되기에 이른다.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은 로마가 임명한 분봉왕 헤롯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로마 황제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을 나타낸다. 빌라도는 예수를 로마군병들에게 넘겨준다. 로마군병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운다(마 27:28-29). 예수는 채찍질 당하고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간다. 예수는 두 사형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 마태는 이들을 “행악자”(눅 23:39)로, 누가는 “강도”(마 27:38)라고 지칭하고 있다. 행악자는 실제적인 범죄자를 의미한다(막 15:27). 강도를 지칭하는 희랍어 단어는 오히려 정치범이나 저항운동가를 의미한다. 이들은 열심당원이었다. 예수 자신은 열심당원이 아니었는데 역설적으로 열심당원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그 죄명이 바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인 반란의 죄를 뒤집어 쓴 것이다.

2. 원수의 용서를 비는 예수
십자가 상에서 예수는 하나님에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는 무죄였으나 정치범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쓰고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었다. 이런 경우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원한(怨恨)을 가질 법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저들을 용서하며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왜냐하면 저들이 자신이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신 원수 사랑을 실천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여기에 예수와 마호메트의 차이가 있다. 마호메트는 원수를 응징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이 사랑을 순수 실천하였다. 오늘날 예수의 후예인 기독교 신자들은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나, 마호메트의 후예인 무슬림은 세계각지에서 자살테러와 분쟁에 개입되어 있다.

3. 범죄자 가운데 하나로 처형됨
공관복음서 저자, 마태(마 27:38-44), 마가(막 15:24-32), 누가(눅 23:32-43)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는 두 강도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마태와 마가는 지나가는 자들과 두 강도도 예수를 비방하고 모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의당히 십자가에 처형된 자는 그 처형에 합당한 잘못을 저질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누가는 두 강도 중 한 강도는 예수를 비방하나 또 한 강도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 사실을 전해준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눅 23:32-33). 한 강도는 예수를 비방한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 다른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40). 그리고 그는 예수께 청원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이에 예수는 그에게 대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예수는 자기와 회개한 강도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서 낙원에 이르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는 무죄하나 강도들과 같이 처형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 53:12). 예수는 강도로 간주되었고, 그렇게 최급을 받고 처형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죽어가는 가운데서도 자기의 죄를 참회하고 메시아를 인정하는 한 강도에게 죽음을 너머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소망을 주신다. 예수는 그에 대한 인격적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 사후를 부탁하는 자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위로를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는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들이 낙원에 가게될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소망을 주는 분이시다.

4.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심
복음서 저자들은 제각기 개성있는 시각으로 예수의 죽음을 알려주고 있다. 마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우주적인 사건이 표징으로 나타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마 27:45).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 23:46).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마가와 비숫한 어조로 마태는 증언하고 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여기서 묘사되는 예수의 죽으심은 단지 무죄한 사람의 죽음을 넘어서고 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다.

운명하시기 전에 부르짖은 예수의 최후 절규 장면은 삼위일체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들 예수는 자기를 음부에 버리시는 아버지를 향하여 부르짖는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성부는 성자를 인간의 죄의 대속제물로 받으셨다. 성자는 대속제물로서 자신을 죄인인 인간과 동일시하신다. 그러므로 성부는 아들을 음부에 버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과 일치화(identification)가 된 아들은 음부에 떨어져야 한다. 운명하시기 직전 예수가 부르짖은 절규는 성부로부터 버리심을 당하는 성자의 절규이다. 성자는 여태까지 그렇게 신뢰 가운데 있었던 성부로부터 버리심을 당한다. 그 순간 아들은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신 것이다. 이 절규의 순간은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시는 순간이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에도 아버지를 신뢰하는 아들의 신앙, 아들을 신뢰하는 아버지의 신뢰는 성령이 연결하는 신뢰의 띠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버리심을 받는 사건은 단지 아들만이 처형되는 사건이 아니다. 이 십자가 사건에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 내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이 십자가 사건은 내면적으로 삼위일체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버리심을 당하는 사건 속에서도 성령은 여전히 버리시는 성부와 버림을 당하는 성자를 연결하는 신뢰와 사랑의 띠로서 함께 계신다. 버리시는 성부도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아들을 속죄제물로서 버리시는 것이다. 버림을 당하시는 성자도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부로부터 기꺼이 버림을 당하시는 것이다. 자기 희생과 자기 주심 이라는 사랑의 띠에 성부와 성자는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본질은 자기를 주시는 헌신이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죽으심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에서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다. 인간 역사 과정에서, 주후 약 33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처형사건에서 하나님이 죽으시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죽었다는 것은 성부인 하나님의 죽으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들의 죽음 안에서 아버지가 죽으신 것이다. 아들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와 서신에서 역사적 예수의 영원한 기원과 정체를 우리들에게 증언해주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성령의 영감 속에서 역사적 예수를 그 영원하신 원천인 태초로 거술러 올라가서 계신 하나님이요 태초의 말씀으로 증언하고 있다.

십자가 사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감정(the pathos of God)을 느낀다. 철학적인 신은 죽지 아니하며, 인간과는 소통할 수 없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의 신으로 표상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신론의 하나님은 저 멀리 하늘 저편에만 계시고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가까이 갈 수 없는 신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의 사건은 죄인과 연대하시고 함께 느끼시는 하나님의 공감과 연민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무관하시고 초연(超然)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하여 증오하시고 대속으로 용서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 십자가의 하나님: 신(神) 개념의 혁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전통적 헬라적 신(神) 개념의 혁명을 가져다 준다. 헬라적 신은 불변하는 신이며, 시간 속에 있을 수 없으며, 고통을 느낄 수 없으며, 특히 죽을 수 없는 존재였다. 이러한 신은 인간에게는 거리가 멀고 친근하게 느낄 수 없는 분이다.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은 너무나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감히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분이시며, 이름도 제대로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한 신 개념을 깨뜨린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하나님이다.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대속제물로 주셨다. 아들은 성자요, 삼위일체적으로는 성자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다. 분명히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죽음을 말한다. 이것은 현대 1960년도 미국의 사신(死神) 신학자들이 선언한 내재화된 세속시대 속에서 선언되는 신의 죽음과는 다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죽음은 세속화된 세상에서 신성한 영역이 더 이상 없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자리가 더 이상 없다는 의미에서 사신론(死神論)의 주장이 아니다. 역사상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하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귀하신 생명을 대속의 제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바로 성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 성자 하나님이 중보자로서 자기의 몸을 희생제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재래적인 신 개념의 혁명이다. 재래적인 신은 인간에게 죄의 보상을 요구하며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고 인간의 비극과 형벌을 요구받고 인간 스스로의 보상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방(異邦)신은 변덕이 많고, 자의적으로 인간에게 불행과 재난과 질병을 가져다 오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항상 공포를 느끼는 그러한 신이다. 이에 반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죽으신 분은 인간이 자력으로 죄책을 담당하고 속죄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능히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구약의 선지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다: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 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사 63:4). 이 십자가의 대속은 하나님이 자신이 이미 주전 8세기에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그 말씀대로 하나님 자신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성취하신 경륜의 사건이다.

7. 골고다의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역사적 현장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 처소가 바로 골고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골고다의 사건은 실증시켜 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요한서신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서신으로 우리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사도 요한이 증언하는 바같이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 사랑이란 바로 자신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시작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골고다의 수치와 치욕과 고통 속에 자신을 드러내시고 죄인인 인간과 동일시되신 아들,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일치하시는 하나님, 십자가의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갈등의 세계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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