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획을 긋는다. 예수는 여태까지 숨겨온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하신다. 베드로는 예수에 대하여 인격적인 신앙고백을 한다.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의 스승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바로 인자이신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공적 표명이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의 정체성에 대하여 물은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해석하는 바와 같이 예수 자신이 메시아 의식이 아직도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분명히 자각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자기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
예수께서 갈릴리 북부지역 가이사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신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은 로마가 지배한 당시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이 있었던 곳이다. 수백가지 신상(神像)들이 세워졌고 이 지역에서 여러 신들에게 제사가 드려졌던 곳이다. 이러한 만신전이 있는 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人子. Son of Man)를 어느 신과 비교하고 있는가라고 물으신 것이다. 이에 제자들은 대답한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이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신들에 대한 종교적 지식이 아니라 신앙고백, 즉 신앙하는 지식에 관하여 질문하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즉 제자들이 자신의 전 존재를 헌신할 수 있는 신앙고백에 관하여 질문하신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역사적 예수가 이렇게 물으신 것은 예수 자신이 자기의 메시아적 자아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의 종의 의식(意識)을 분명히 가진 예수께서 골고다 고난의 길을 가시기 전에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해 보신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표(公表)를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축복하시며 말씀하신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바요나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나’는 요한의 축약형이다. 베드로란 반석(petro)이라는 뜻이다. 예수를 메시아로 아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 혈통으로 난 사람과 하나님으로 난 사람을 말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베드로에 대한 축복: 천국 열쇠를 주심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열쇠를 준다는 것은 전권(全權)을 넘겨준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에 의해 선포되고 예수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권세를 부여받았다. 음부(陰府)란 죽은 자의 나라이며, 음부의 권세란 사망의 권세를 말한다.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 개인이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했다는 로마 천주교의 교황이 자칭 천국 열쇠를 계승한다는 뜻이 아니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 어느 누구에게나 천국의 열쇠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신칭의의 교리가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의(義)롭다 칭(稱)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천국의 시민이 된다. 여기서 이신칭의를 가진 모든 자는 천국의 열쇠를 받는다는 만인제사장(universal priesthood) 교리가 나온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메시아의 비밀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공표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신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 16:20).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메시아 의식의 부재(不在)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예수는 명료한 메시아 의식을 가졌으며, 그 시대에 편만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는 대중적 메시아상과는 전혀 달리, 자신을 고난의 종인 메시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란 대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영광의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하나님의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고난과 고통의 길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메시아의 비밀과 십자가의 길은 연결되어 있다. 메시아는 일반 군중들이 바라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눈으로 보기에는 수치스럽고 보잘것 없는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그의 구원을 주시는 모습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요, 오묘이다.
고난의 메시아
예수는 비로소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종교지도자들에 의하여 고난과 거절과 죽음을 당하는 고난의 종을 자신이 부여받은 메시아적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인자(人子. the Son of Man)의 날과 관련하여 인자가 영광 속에 나타날 것을 시사(示唆)한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눅 17:24). 인자의 날이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천사들과 같이 재림하실 날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전(前)에 인자는 먼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어 이 세대로부터 버림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눅 17:25). 복음서 저자 마가는 예수께서 인자의 고난 사상을 이미 구약성경 연구를 통하여 알게 되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막 9:12). 구약의 구절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23),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시 22:7) 등은 십자가 신학적으로 볼 때 고난받는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육신적인 생각에 사로 잡힌 제자
베드로는 예수의 고난 예고를 듣고 스승을 붙들고 만류한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베드로는 스승에 대한 인간적인 정(情)에 집착하여 고난과 죽음의 길이 자기 스승 예수에게 미치기를 원치 아니했다.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 시대 군중들 사이에 만연한 영광의 메시아상을 생각했다. 영광의 메시아는 다윗 왕국의 후예로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정치적으로 압제하고 있는 로마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막강한 힘으로써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에 새로운 신정질서를 세우실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관념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에 대한 기대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 대중적 기대란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로마의 점령군으로부터 해방하고 정치적 해방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을 무력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자들이 당시 열심당원(zealots)이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 군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도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도 이처럼 당시 유대군중들에게 편만한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돌이키시며 베드로를 꾸짖으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예수의 인간성은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원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인성(고난을 피하고자하는 본성)을 그의 신성으로 이기셨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자기 부정(否定)의 제자직
예수는 제자들에게 제자직의 도리를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 부정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요, 진정한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는 진정한 자기 부정에서 진정한 자기 발견과 획득이 나온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5-26).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진정하게 자기가 긍정되고 획득된다. 그리고 개인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생명의 존엄사상을 가르치고 계신다. 인간 개인의 목숨이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기에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주셔서 대속하셨던 것이다. 진정한 신본주의는 인간의 존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애를 내포하고 있다. 진정한 신은 영광의 길 아닌 고난의 길을 통하여 자신의 거룩한 구속의 섭리를 실행하신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정치적 메시아 사상
역사적으로 많은 군중들은 고난의 종의 사상 보다는 영광의 메시아 사상에 매료되어 왔고, 예수의 사상을 그렇게 오해하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유대의 열심당은 로마군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하여 함락된다. 그리고 주후 2세기에는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hba)가 반란을 일으킴으로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유배되고, 이 유대 지역의 이름이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을 바뀐다. 이들은 모두 정치적 메시아 사상을 실현하고자 한 자들이다.
예수 이후 근 2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지하동굴인 카타콤베에서 숨어지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313년 콘스탄황제가 기독교로 귀의하면서 로마는 기독교화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이 지상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시적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스위스의 개혁신학자 브룬너(Emil Brunner)가 말한 바와 같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의 공인은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서구 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도록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지닌 영성을 제도화함으로써 교회의 모습을 변질시킨 것도 사실이다. 11세기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의하여 함락되자 성지회복을 목적으로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요청으로 서구 기독교계가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4차례 있었던 십자군 전쟁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 지상에서 추구하려는 영광의 메시아 사상에 지배된 것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재세례파들이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켜서 뮌스터에 새 예루살렘을 세우고자 하였다. 19세기에는 자유주의 신학이 이 세상에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면서 예수의 사상을 인본주의적 평화의 나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해방신학과 혁명신학이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인 민중해방을 통하여 이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한국에서도 1970년대 당시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사회적 인권과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민중신학이 시작되었다. 당시 권위주의적 군사정권 아래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민중신학은 공헌을 하여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관하여 좋은 이미지를 남겼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보다는 사회적 관심에 치중함으로써 교회의 정체성 문제를 야기시켰다. 더욱이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화가 실현된 이후 민중신학은 한계를 맞고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집단적으로 구국기도회, 각종 규탄대회를 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사회적인 운동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반석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워지고 교회는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이 지상 위에서 조용한 사랑과 평화의 헌신의 누룩운동을 통하여 파편적으로(숨겨진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종교 개혁자 루터를 통한 베드로 신앙고백의 새로운 발견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의 열쇠는 물질적인 열쇠가 아니라 신앙의 열쇠요 약속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로마 천주교는 이것은 베드로가 제도적으로 받은 것이고 그 이후 로마 천주교가 이를 교황이 세습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왔다. 이것이 중세 천 년 동안의 신앙적 암흑기인 것이다. 루터는 로마 천주교 신부(神父)였고, 스스로 경건에 힘쓰다가 “자비로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피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근 1천5백년동안 묻혀있었던 신앙고백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다시 발견한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칭의(稱義, justification) 신앙은 바로 예수의 메시아이심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신앙고백 위에 먼저 우리 개인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제도적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제도적 교회는 그 안에 역사적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하는 신자들을 유형적으로 그리고 무형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오늘날 이신득의의 신앙을 고백하는 종교개혁 전통의 교회는 역사적 예수께서 축복하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가장 잘 이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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