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사회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의 많은 가르침을 음미해 보면 사회 문제에 관해 함축적으로 시사한 부분은 발견할 수 있다. 예수가 살았던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사회란 나의 이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었다. 예수는 이웃과의 관계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려 욕망을 제어할 때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 이웃에 대한 관계
자기 마음을 다스리라
복음서 저자 마태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정결규례에 대한 논쟁에서 사람이 자기 마음을 규제하고 깨끗하게 해야 함을 가르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예수는 인간의 마음에서 이웃을 향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과 거짓증거와 비방”이 나온다고 설명하고 있다.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과 거짓증거와 비방” 등은 사회적 관계를 훼손하는 것들이다. 예수는 사회적 범죄들이 일차적으로는 인간 마음의 탐욕과 자기 규제의 상실에 기인함을 지적하고 계신다. 악한 생각은 심리적 차원에 머무나, 동기적인 차원에서는 이미 범죄에 해당한다.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비방 등은 악한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으로서 사회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이 먼저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함을 가르치신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를 살피라
예수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를 먼저 비판하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를 보는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신다. 그리고 훈계하신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인간이란 자기 눈에 있는 것은 티로 보나, 남의 눈에 있는 것은 들보로 본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결점은 티처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나, 남의 결점은 들보처럼 아주 큰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자신을 성찰하라는 것이다. 인간 관계의 문제점은 자기의 잘못에 관하여는 관대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헐뜯는 데 있다. 여기서 각종 사회적 분쟁이 나온다. 부부관계, 대인관계, 노사관계 등의 문제는 이러한 왜곡된 태도에서 발생한다,
거짓 선지자를 분별해 내어라
복음서 저자 마태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예수의 경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거짓 선지자란 일차적으로 종교적인 미혹자를 가르키고, 이차적으로는 사회적인 미혹자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적인 미혹자는 바른 신앙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교주들로서, 오늘날의 예로는 통일교 교주 문선명, 신천지 교주 이만희 등이 있다. 사회적인 미혹자는 “대중영합주의자” (popularist)로서, 감언이설로 한 순간에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유대 열심당원, 그리고 독일의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 북한의 김정일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이리가 들어 있다. 마태는 참 사회 지도자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 참 영적 지도자는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광야에서 어린이가 가져온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축사하시어 오천명을 먹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따랐고, 심지어는 이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하였다(요 6장). 만일 예수가 대중영합주의자였다면 그는 이들을 이끌고 신흥 종교를 세우고 이 종교의 교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들을 피하였고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셨다. 예수는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다시 대중들이 예수께 나아오자 예수는 이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설교를 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요 6:51)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예수는 광야의 기적이란 자기의 초능력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남을 먼저 대접하라
예수는 이웃관계의 황금률을 말씀하신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진정한 이웃관계란 먼저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자기를 대접하지 않는다고 이웃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먼저 이웃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이웃도 우리를 대접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바른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남이 나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기대하지 말고 먼저 내가 먼저 남에게 선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 관계, 사회관계의 기본이 바르게 설정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기업의 고질적 노사분규는 경영자 내지 노동자 어느 일방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황금률이 실천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사(勞使)가 서로를 존중하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서로를 먼저 대접할 때 임금교섭의 어려운 갈등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주는 노동자를 먼저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저들의 어려움을 알아주어서 각종 복지문제에 신경을 써 주고, 노동의 열매가 이들에게 합리적으로 돌아가도록 할 때 노사갈등의 상당 부분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도 오늘날과 같이 세계적인 불황이 다가온 어려운 시기에 경영자의 어려운 처지에 동참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할 때 어려운 노사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수 있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성숙한 일본에서는 노사관계가 생산성을 중시하는 협력적 노사관계가 정착되어 한국에서 보는 바와 같은 투쟁형 노사관계는 상당 부분 해소되고 있다. 일본기업의 생산성 향상의 열쇠는 협조적 노사관계이다. 일본의 생산성 3원칙은 고용보장, 노사협의에 의한 파이의 확대, 파이의 분배공정이다. 예수의 황금률 진리는 일본기업의 성숙한 노사관계에서 부분적으로 실천되고 있다고 보인다.
구제하라
예수는 사회의 가난하고 불우한 자들에 대하여 구제를 힘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구제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이런 행위들은 진정한 구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상(賞)을 받았다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예수는 은밀한 구제 방법을 가르치신다.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 진정한 구제(救濟)란 은밀히 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알고 칭찬을 받을 때, 그 구제의 의미는 사라진 것이다. 구제는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예수는 우리들이 직면한 경제적인 문제를 도외시 하지 않으신다. 예수는 우리들에게 살기 위하여 의식주(衣食住), 특히 일용할 양식이 있어야 함을 아신다. 그러나 의식주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거나 얽매이는 자들은 “믿음이 적은 자들”(마 6:30)이다. 예수는 의식주로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의식주가 있어야 함을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예수는 제자들에게 우선(優先)순위를 가르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것에 두게 될 때 의식주의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현하는 것보다 우리의 의식주라는 생계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주님의 제자의 도리가 아니다.
오늘날 미국을 건설한 17세기 청교도들은 예수의 말씀을 실천한 자들 중에 대표적 사례이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신대륙에 상륙하여 배고픔과 추위와 가뭄과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공동체를 세웠다. 이들 청교도들의 위대한 정신이 오늘날 미국이라는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한 나라를 만들어 내었다. 오늘날 미국의 풍요(豊饒)함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에 순종하여 신대륙에 이주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청교도 조상들의 노력에 대한 축복의 구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은 물질적으로 풍요한 나머지 선조의 위대한 신앙과 근검정신에서 이탈하고 세계의 에너지를 상당한 부분을 절약없이 소모하고 월가의 황금을 낳는 황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물질주의에 빠졌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당하는 금융위기는 미국의 선조들이 가졌던 위대한 정신에서 이탈한 신앙의 위기에서 비롯된다.
○ 사회적 소외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약자를 돌보라
예수의 비유에 의하면 최후 심판 때 임금은 의인과 악인을 양과 염소를 분별하듯 가려낸다. 이 때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선행(善行)이다. 임금은 의인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란 이들이 행한 가난하고 병약하고 갇힌 자를 돌봤다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사회적 약자(弱者)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이에 반하여 비(非)의인들에게 임금은 심판을 명하신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그리고 임금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5:42-43). 여기서 심판자인 임금은 자신을 사회적으로 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옥에 갇히고, 나그네 된 자와 동일시 한다. 저주 받은 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하여 게을리하고 돌아보지 않은 자들이다.
사회적 약자에게 한 것은 바로 주님께 한 것이다
최후의 심판 때 임금은 의인(義人)들에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이에 의인들은 놀라서 임금에게 반문한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7). 이에 주님은 사회적 약자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에게 한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정죄의 심판을 받은 비(非) 의인들은 주님께 반문(反問)한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마 25:44). 주님의 대답은 사회적 약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을 사회적 약자와 동일시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주님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 대하여 한 것이 곧 자기에게 한 것이며, 지극히 작은 소자(小子)란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라고 말씀하신다(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선을 베푼 것에 대하여 상을 주신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푸는 지극히 작은 선(善)도 포상할 것을 말씀하신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1:42).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으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평화와 정의와 사랑의 실천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땅에서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병들고, 갇히고, 헐벗은 자들에 대한 사랑의 만남과 이들과의 공감(共感)적인 나눔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가진 자들이 지닌 부와 권력을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병들고 갇히고 헐벗은 자들과 나누고 이들을 돌보는 데 쓰라고 요구하신다. 예수는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자면 사회복지(社會福祉)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 지상에는 완전한 평등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능력과 환경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가진 자들이 사회적으로 덜 가진 자들에 대하여 배려하고 나누는 공감적이고 겸허한 태도를 가질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은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그리고 2008년 미국 발(發) 금융위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경제적 위기를 당면한 오늘을 사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주시는 귀중한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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