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2009

40.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유월절 엿새전 금요일 밤 예수는 베다니에 도착하신다. 다음날 안식일은 조용히 쉬신다. 그 다음날 예루살렘 입성 준비를 하신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많은 순례자들의 행렬이 예루살렘에 넘쳤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갈릴리 예언자의 명성이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에게 들렸기 때문에 예루살렘 도성으로 입성하는 예수를 사람들은 주목했다. 예수는 당나귀를 타고 마침내 유대교의 중심지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말을 타는 호전적 메시아상과는 달리 당나귀를 타시는 예수의 모습은 그의 평화주의적 성격에 걸맞는다.

평화의 왕의 입성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고 예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나귀는 평화의 왕의 상징이다. 정복자는 말과 군대를 끌고 입성하나 겸손과 평화의 왕인 예수는 당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다. 예수가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에서 우리는 자신을 평화의 왕으로 생각하는 예수의 메시아 의식을 찾아볼 수 있다. 마태는 선지자 스가랴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마21:5, 슥9:9).

가는 길마다 종려나무 가지를 펴고는 군중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하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군중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마21:11)라고 환호한다. 마태는 예수에 대하여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 칭호는 유대인에게 나사렛 예수의 진정한 모습을 알리려는 복음서 저자 마태의 진정한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마가는 보다 강하게 유대나라의 회복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언급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11:10). 마가가 언급하는 다윗의 나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아가 가져오는 영광스러운 왕국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누가는 평화의 왕, 메시야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무리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19:38). 누가는 이 광경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우려를 언급하고 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19:39). 이에 예수는 대답하여 이르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이러한 예수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 자신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적 자의식을 분명히 가지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심
마태는 예루살렘 입성 후 성전에 들어가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예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마21;12-17). 예수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신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신성한 처소가 장사치의 운집소가 되고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을 한탄하신다. 그리고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면서(마21:12),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다. 마가와 누가는 이 때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거의 비슷한 어구로서 기록하고 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11:17):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눅19:46).

그리고 난 후 예수는 청결하게 된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치신다(눅19:47). 성전은 하나님의 율법을 강의하고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곳이어야 한다. 예수는 성전의 본래 기능을 회복시키고자 의도하신 것이다. 백성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놀랍게 경청한다(막11:18).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나 백성들이 그에게 호응하기 때문에 일단 좌절하고 만다(막11;18). 복음서 저자 누가는 다음같이 그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눅19:47-48). 마가는 보다 자세히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라는 표현으로 사용하면서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지 않은 “권세 있는 새 교훈”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경청하여 들었고, 그래서 예수를 함부로 잡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복음서 세 저자 마가, 마태와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떨어진 베다니에서 일어난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막14:3-9, 마26:6-13; 요12:1-8). 예수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초대돼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다. 이때 한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붓는다 (막14;3). 이것을 보고 가룟 유다가 향유(香油)를 허비한다고 화를 냈다. 유다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라고 경제적으로 계산한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는 이 여인의 행위가 보다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14:8). 장례(葬禮)의 준비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예수는 그 이유를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막14:7). 이 세상에 가난한 자는 끊어질 수 없다. 그러나 구세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단 일회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인간 가운데 계신 사건은 단 일회적이다. 그 시기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의 시기, 곧 나사렛 예수의 생애 기간이다. 예수는 이제 구속사역을 끝내고 다시 돌아가셔야 한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14:9). 앞으로 선교 사역에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헌신의 모델로서 증거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말씀에서 고난의 종으로서 예수의 메시아 의식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종교 지도자들의 체포 음모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의 마지막을 담고 있는 이 부분 앞뒤에 여러 교훈과 비유들을 많이 담고 있는 반면, 마가복음에서는 바로 사건이 전개된다. 이런 점에서 마가의 기록은 속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께 나아와 성전을 청결케 한 권위에 관해 질문한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21:23). 이에 예수는 포도원 농부 비유(마21:33-44, 막12:1-12; 눅20:9-19)를 들려주면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과 대결한다. 비유는 다음과 같다: 포도인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관리를 맡기고 타국에 갔다. 수확철이 되어 주인이 수확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죽였다. 그래서 주인은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면서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는데,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아들을 잡아 포도원에서 내어 좇아 죽였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농부들에게 세(貰)로 줄 것이다(마21:33-41).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比喩)를 듣고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예수를 체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무리, 군중들을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기” 때문이었다(마21:45-46).

유월절 이틀 전 유대의 최고 종교기구인 산헤드린(Sanhedlin)이 모인다.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모두 71명으로 구성된 이 귀족 집단은 유대 민족의 최고 입법기관이며 최고의 사법권을 가진 회의이다. 이들 지도자들은 모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계층이었다. 이들 회의는 종종 격렬한 논쟁을 벌이곤 했으나 예수를 체포하는 문제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마가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막14:1-2). 체포의 방법이 어려운 문제였다. 예수를 환호하는 무리들의 반감을 잠재우러 묘안을 짜낸다. 이들은 예수를 신중하게 교묘하게 체포하고자 한다(막14:10-11; 눅22:3-6).

가룟 유다의 수수께끼
그리고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에 가담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마태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마26:14-16). 가룟 유다는 ”예수란 사람은 어두움 속에서 가만히 잡는 것이 상책이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가 왕래하는 곳을 잘 알았고, 그곳으로 그들을 인도하기만 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룟 유다는 돈을 좋아하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가룟 유다를 옥합을 깨뜨린 여인과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기 때문에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다. 이 때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고 불만을 터뜨린다. 이에 대하여 복음서 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그의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요12:6). 이러한 요한의 평가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신실한 제자가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그래서 그 많은 군중들을 떨쳐 버리고 메시아의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의 종의 길을 간다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가룟 유다는 자기 선생에 대하여 큰 실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를 넘겨 주어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 차라리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는 이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들면서 말씀하신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14:21).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적 행위 사이의 긴장이 있다. 하나님은 예수가 팔리도록 예정하였다. 여기에 가룟 유다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를 파는 일을 맡은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의 측면에서는 필연적이나 가룟 유다의 내면적 자유의지에서 예수를 파는 것은 그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의 길과 7세기 후 마호메트의 길:

고난, 희생의 길과 영광, 정복의 길
초라한 당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의 평화의 길은 7세기 후에 군대를 이끌고 메카로 입성하는 마호메트(Muhammad, A. D. 570-632)의 길과 대조적이다. 마호메트는 초창기 세력화가 되기 전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유화적(宥和的)이었으나 메디나에서 세력화된 후부터는 기독교를 압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호메트는 군대를 일으켰다. 그리고 반대자들을 칼로 응징하였다. 이슬람의 원수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칼로 응징할 것을 코란은 가르치고 있다. 코란을 깊이 읽으면 읽을수록 받는 인상은 온 세계를 이슬람화 하기 위하여 “지하드”(거룩한 전쟁)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메카로 가는 마호메트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의 길과 다르다. 그 길은 이슬람 적대자에 대한 증오와 정복과 응징의 길이다.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시도한 2001년 맨하탄의 쌍둥이건물에 대한 자살테러 공격은 일부 극단주의자의 일이라고 간주하기에는 너무나 이슬람 교리와 연관되어 있다.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을 유도할 수 있도록 코란의 내용은 타종교에 대하여 적대적, 응징적이며 보복적이다. 대표적으로 다음 코란의 구절은 비이슬람에 대하여 성전(聖戰, 지하드)을 촉구하고 있다: “선지자여 불신자들과 위선자들에 대항하여 성전하되 그들에 대하여 엄격하라. 그들의 거주지는 지옥의 사악한 말로이니라”(수라 66:9) 알라는 반대자를 증오하고 응징하는 신이며, 죄인을 대속하는 신이 아니며,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는 신이 아니다.

예수의 길은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의 길 같이 보인다. 예수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고, 골고다의 희생의 길이다. 예수는 그를 박해하는 원수들을 증오하지 않고 고난과 희생과 헌신의 길을 가신다. 그리하여 우리 인류를 구속하셨다. 예수는 자기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른다고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역사적 예수는 우리들에게 종교를 만들어 넘겨주지 않았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대속(代贖)의 은혜와 사랑의 정신을 남겨주셨다. 그의 제자들이 스승 예수의 대속의 공로(功勞) 위에서 사랑의 정신을 따라 만든 종교가 바로 예수의 종교이다. 이것은 예수가 만든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희생과 영으로 세워진 종교이다. 이 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희생과 헌신의 종교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사랑과 평화와 대속의 길이다. 참 신, 하나님은 고난을 스스로 짊어지시고 스스로를 내어놓으시고 인류를 구원하신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