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는 제자들이 가르키는, 외형적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고” 무너질 것을 예고하신다(마 24:1-2, 막 13:1-2, 눅 21:5-6). 그리고 예수는 역사 종말이 올 것과 종말에 대한 징조를 예고하신다. 역사 종말은 예수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 복음이 지니는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이 세상 나라와 질서가 하나님이 보내신 인자의 심판에 의하여 멸망하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이다.
19세기 하르낙, 리츨, 헤르만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종말사상이 신화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알버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예수의 설교의 종말론적 차원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러나 그 역시 예수의 종말 설교가 묵시록적인 세계관에 의하여 채색된 것으로 이해했다. 슈바이처는 이 묵시록적 세계관은 신화론적 세계관이기 때문에 과학시대의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실재로 도래할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슈바이처의 종말론은 미래적 종말론이기는 하나 실재적으로 다가오는 종말론은 아니었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의 종말 이해가 실재적으로 다가오는 세계의 미래적 사실을 예언하신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복음서 기자들, 마가, 마가,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의 종말 가르침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앞으로 일어날 미래적 사실을 예언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적 비관주의: 다가오는 종말론적 환란
예수는 역사의 종말에 대하여 실재적이고 비관적인 입장을 개진하고 계신다. 종말의 때는 미증유(未曾有)의 대환란의 날이 될 것이다. 복음서 저자 마가는 종말에 일어날 큰 환란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이는 그 날들이 환란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란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막 13:19).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역사 종말에는 여태까지 없었던 큰 환란이 다가오는데 하나님은 그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을 단축시키실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역사적 예수는 역사 종말의 징조를 다음 여섯 가지로 말씀하신다.
첫째, 예루살렘의 함락과 무너짐이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 21:20).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이미 이루어졌다. 예수의 예언이 있은지 약 40년 이후인 A.D. 70년 초순에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실제적인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유대의 열심당원들이 로마에 대해 무력 반란을 일으킨 것이 그 원인이었다.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그 해 9월 12일경이었다.
둘째, 세계 각지에서 난리의 소문이 들리며, 민족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마가는 종말에 관한 예수의 예언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막 13:7-8). 누가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눅 21:10). 복음서 저자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란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란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 24:21-22). 이 민족 간의 분쟁의 구체적인 실례들은 1950년 한국의 남북 전쟁, 1990년대 보스니아의 민족 분쟁, 2000년대 이라크에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쟁, 아프카니스탄에서 탈레반의 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 등이며, 오늘날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민족들의 분쟁이다.
셋째, 지진과 기근 등 자연적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막 13:8).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 그 예가 2004년 12월 동남아시아 해변지역에서 수십만을 휩쓸고 간 쓰나미, 2008년 중국 씌촨성의 대지진, 2009년 이탤리의 지진 등이다. 그리고 1918년 전 세계적으로 5천만명이 사망했던 스페인 독감, 2003년 중국에서 시작된 사스(SARS, 중증 급성호흡기 증후군), 2005년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AI), 2009년 4월 멕시코에서 일어나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pandemic) 2009 인플루엔자A(H1N1, 돼지 독감)다.
넷째, 불법이 성하며 사랑이 식는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다음과 같이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 그 예가 1940년대 6백만 유대인 학살사건, 2001년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미국 맨하탄 쌍둥이 건물에 대한 자살테러 사건, 그후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자살테러 사건들, 2008년에 버지니아 공대 연쇄살인 사건, 2009년 강호순의 연쇄살인사건, 최근들어 인기 연예인들의 연쇄자살 사건,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동반자살 풍조 등이다.
다섯째, 신자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 마가는 신자의 박해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막 13:9).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눅 21:1213). 오늘날 중국이나 아프카니스탄, 이란, 사우디, 북한 등에서 신앙 때문에 적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거나 순교를 당하고 있다.
여섯째,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된다. 복음서 저자 마가는 만국으로 복음전파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전하고있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 13:10). 교통기관의 발달로 인하여 복음이 거의 세계적으로 원시부족에게도 전파되고 있으며, 여기에 인터넷을 통한 복음활동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더욱이 한국선교사들이 세계 오지(奧地)에 들어가 원시부족들에게 저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종말론적 현실주의 - 깨어 있으라
역사적 예수는 다가오는 종말의 실재에 관하여 예언하신다. 이것은 신화론이 아니라 예언자적인 역사에 대한 통찰이며, 그의 메시아적 예견에서 나온 것이다.
첫째, 재림의 날과 시에 대하여는 예수 자신도 모르신다. 마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재림의 때와 시는 성부 하나님만 아신다.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역사적 예수는 종말의 날짜를 확정하는 것에 관하여 경고하신다. 그것은 천부 하나님의 작정에 있기 때문에 예수 자신도 모르신다고 하신다.
둘째, 사람들은 열락에 빠진다. 재림의 때는 노아 홍수의 때와 같다. 마태는 다음과 같이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사람들이 세속적 쾌락주의에 빠져서 노아 홍수 때의 사람들처럼 세속의 열락에 취할 것을 경고하시고 계신다. 예수는 주인의 오심을 알지 못하고 동료에 횡패를 부리며, 술을 먹는 악한 종의 비유를 드신다(마 24:48-49).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50-51). 오늘날 세계적으로 만연된 쾌락주의의 만연과 퇴패주의가 그 구체적인 징표이다.
셋째, 신자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막 13:33-3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 13:35). 마태도 동일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마태는 그 날과 그때는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가르치신 열 처녀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다”(마 25:1-2). 미련한 처녀는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마 25:3), 슬기 있는 처녀는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다(마 25:4).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때(마 25:5),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한다(마 25:6). 슬기로운 처녀는 기름을 담은 등으로 신랑을 맞이하였으나, 미련한 처녀는 기름이 없으므로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다(마 25:10-12). 지혜로운 신자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2-44). 깨어 있는 자에게는 주님의 재림은 도둑같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영접이 된다. 오늘날 고도의 과학기술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사람들의 사고가 종교적이기 보다는 세속적이 되고, 교회 설교에서도 종말에 관한 설교를 들을 수 없는 세속주의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묵시록적 세계 종말 - 인자의 도래
역사적 예수는 다가올 세계 종말에 관하여 예언적인 두 가지 특징적인 언급을 하신다.
첫째, 세계 종말은 우주적 재난과 더불어 올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그 때에 그 환란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막 13:24-25).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눅 21:25-26). 마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날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둘째, 인자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신다. 마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막 13:26-27). 누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7).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0-31).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인자는 역사를 종결시키는 심판자이시다. 이러한 인자 상(像)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기대되었던 하나님의 왕국을 회복시키는 메시아상(像)이다. 그러나 이러한 묵시록적 인자상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는 다르다. 역사적 예수의 인자상은 고난받는 종이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도피주의 아닌 윤리적 책임성 강조
예수는 다가오는 종말에 즈음하여 신자들이 깨어 경성하며 하루하루를 보람있게 살아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종말론적 도피주의가 아니라 종말론적 책임성과 경성을 가르치고 계신다. 종말이 다가오니까 가정과 일자리를 버리고 종말의 도피처를 찾으라고 가르치지 않으시고 우리 있는 자리에서 종말을 기다리라고 가르치신다. 종말 시(時) 심판주와 구원자 되시는 분이 바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다른 도피처가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인격과 이름이 바로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요, 구원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페푸자나 뮌스더나 과천이나 계룡산이나 신도읍이 도피처가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교회요, 가정이요, 직장이 바로 우리의 피난처다. 심령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경배하는 그곳이 바로 종말 때에 우리의 피난처이다. 다가오는 종말을 대비하는 신자들의 올바른 태도에는 다음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신자는 종말 도래에 직면하여 불안해하지 않고 우리의 구속이 가까왔다고 위로를 받는다. 누가는 이러한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눅 21:28).
둘째, 신자는 종말의 날짜를 달력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종말의 장소를 지정하지 않는다. 주님은 몇 날 몇 시라고 정해놓고 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시한부 종말론은 이단적 종말론으로 그 시대마다 사회적 혼란을 일으켰다. 주님은 예기치 않는 시간에 오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특정한 장소에 오시지 않는다. 특정한 장소를 지정하는 것은 이단적인 것이 된다. 주님은 어느 특정한 모임이나 장소에 오시지 않고 우주적 사건으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오시는 것이다.
셋째, 신자는 때를 분별하면서 준비하는 종말론적 삶을 산다. 누가는 종말을 기다리는 신자의 자세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눅 21:29-31). 그리고 역사적 예수는 종말은 분명히 오며 자신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눅 21:32). 신자는 이 예수의 말씀을 믿으면서 종말론적 삶을 사는 자이다.
넷째, 신자는 때를 따라서 양식을 나누어 주며 슬기롭게 산다.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5-46). 진정한 신자는 성경적 종말론을 가지고 오늘의 시대를 분별하고 예수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종교개혁자 루터처럼 오늘 하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현실에 충실한 자이다. “오늘 주님이 오신다”는 종말론적 태도를 가지고 깨어 있으며,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직장인으로서, 학생으로서, 주부로서, 봉사요원으로서 오늘 하루의 자기의 일과를 열심히 수행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바로 진정한 종말론적 삶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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