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회에서 일어난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 해야 할까? 일부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언’이라고 부르며 개발, 훈련 및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직통 계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예언이나 직통 계시를 받는 사람들을(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매도한다.
과연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존재하고는가? 예언의 은사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웨인 그르뎀 박사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을 평이한 글로 개편한 [신약과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 예언의 은사,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 1988, rev, 2000]에서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계속되며 교회는 이 은사를 적극적으로 개발, 활용할 것을 권장한다.
그루뎀은
고린도전서 14장의 자세한 주석을 통해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웨인 그루뎀 박사는 미국의 명문 하바드(B.A), 웨스트민스트 신학대학원(M. Div)을 거쳐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으며 현재 미국 트리니트복음주의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다음은
신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에 대한 웨인 그루뎀 교수의 견해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예언의 은사
신약이
말하는 에언의 은사는 “우리 마음(또는 생각)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주신 것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의 권이에 종속되는 것으로서 안위와 권면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고전14:3), 회개와 전도를 하는 것(고전 14:25)이 그 주된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고린도전서 14:25절은 예언과 계시를 동의어로 사용된다. 예언이나 계시는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주시는 것이다. 그루뎀은 예언이나 환상을 보는 자들을 무조건 신비주의자로 정죄하고 이단시하는
정통보수신학에 제동을 건다. 그루뎀 교수는 특히 예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미국 그레이스교회의 존 맥아더의
견해를 신랄하게 반박한다.
동시에 그는 오늘날의 예언은 기록된 성경말씀과 같이 정확무오한
것이 아니라 오류의 가능성도 있으므로 분별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의 예언을 과신하는 자들에게도 따끔한 경고가 된다.
기록된 성경말씀과 예언의 은사
오늘날의
예언은 우리들이 통상적으로말하는 하나님의 말씀, 즉 절재적인 신적 권위를 가지며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기록된 성경말씀과는 다른 것이다. 오늘날의 예언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이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14:29)라고 말하며 또한 “예언을
멸시하지 말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5:20-21)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틀린계시를 주시지 않지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한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주신 것일지라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어려우며(예, 행 10장에서
베드로가 받은 보자기 속의 동물 환상), 또한 우리의
생각 때문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자기가 받은 계시를 “여호와의 말씀이나라”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잘못 이해한 데서 생긴 오류이다. 오늘날의 게시는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계시와는 다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세나 예레미아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셨다고 기록한다(신18:18-20; 렘1:9; 겔2:7)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말하고 기록한 예언은 절대적인 신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셨을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권위를 ‘보증’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예언이며 전 시대를 위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다(딤후3:16).
신약에서도
구약의 선지자들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선지자가 아니라 사도들이다. 신약의 사도들(및 일부 사도의
지도 하의 제자들)이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자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했다(고전2:13; 갈1:8-12).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동격에 두고 있다(벧후3:2).
신약에는
사도나 사도의 위임을 받은 일부-마가, 예(행11;27), 안디옥(행13:1), 두로(행21:4), 가이샤라(행21:8-9), 로마(롬12:6), 고린도(고전14장), 에베소(엡4;11),
및 데살로니가(살전5;2) 등 전
교회에 골고루 흩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루뎀은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가지고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성경말씀과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사적인 게시,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구루뎀은 하나님께서는 게시를 두 가지 통로를 통해 교회에 주신 적이
없다는 기적종식론자(기적과 기적 행하는 은사들이 사도시대에 끝나고 주장하는 사람)로 대표되는 리차드 개핀 교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성경이
분명하게 분명하게 말하는 고린도전서 14:24-28절에 의할 때 예언의 은사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개핀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예언의 은사는 지금도 계속된다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번 포잍레스 교수는 구루뎀과 개핀의 견해를 비교 평가한 후, 사소한
오류를 지적한 후 전체적으로 그루뎀의 팔을 들어준다(Miracies 강의에서). 포이 트레스에 의하면 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 ‘계시’라는 말을 전문 술어로 지나치게 좁게 정의하여 ‘특별 계시는 곧 성경말씀’이라고 단정지어 버리기 때문에 개핀가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고 비판한다.
성경에는
‘계시’ 또는 ‘계시하다’라는 말이 꼭 정확무오한 특별 계시, 곧 성경말씀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롬1:18),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마11:25),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 가는 것(엡1:17)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저명한
신약학자인 D. A. 카슨도 [주석상의 오류, Exegetical Fallacies]에서 조직신학자가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계시와 성경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계시의 정의를 혼동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한다.
또한
예언과 같은 특별 계시적인 은사는 교회 설립은 은사(Church founding gift)이므로 초대
교회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런 은사가 필요 없다는 주장에 대해, 포인트레스는
“만일 사도들이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이런 은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성경 반입이 금지된 오지의 선교사들에게
이런 은사가 더욱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더군다나
포이트레스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 없이 고린도전서 14:1절과
데살로니가전서 5:20절이 명확하게 인정하는 예언의 은사를 사람인 자기들이 무엇이길래 부정하느냐” 면서 그들의 횡포를 책망한다.
얼마
전, 한국의 교회성장연구소가 부산에서 제일 큰S장로교회의
담임 목사인 정0도 목사와 인터뷰한 내용이 오디오 테이프에 실렸다. 그는
교회 성장에 관한 질문에 대해, 수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것이 교회성장에 절대적인
역활을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사용상의 유의점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포함하는 에언의 은사는 유익하지만 위험한 만큼 엄격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는 마귀의 시험에 빠지기 쉽다. 사실
신앙의 거성들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영계를 제대로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사도 요한도 계시의 와중 속에서 피조물인 천사를 경배했다가 두 번이나 책망을 받지 않았는가?(계시록 19:10).
하나님의 음성의 종류
피터
로드 목사가 쓴 [하나님의 음성 듣기, Hearing God]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늘
날 우리 집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열렸는데 피로연의 안내 역활을 맡은 한 청년이 로드 목사에게 말했다. “오, 목사님 저 덤불 속에 18가지 종류의 귀뚜라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구뚜라미라고? 나는 이 집에 오래 살았지만 귀뚜라미 소리를 의식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나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곤충학을 전공하는 그 대학생은 육신의 귀를 사용하여 200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귀뚜라미 소리를 분변(分辯)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사람은 듣기를 ‘배우는 것”이라며 듣는 귀를 개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으며 동시에 수많은 소리가 들리지만 듣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릴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세 번이나 불렀지만 사무엘은 그 이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모르고 제사장
엘리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삼상3:4-8) 제사장
엘리가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루심에 응답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신자들이나 목회를 오래 한 목사님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알고 난 후에, 못 들은 것이 아니라 들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라서 무시한 적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더러 한다. 듣는 귀를 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