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을 기능적 이해보다 인격적으로 인식해야
비 가시적이고 은밀하며 내재적으로 역사 오순절 날의 회심을 사모하는 마음 가져야 성경은 성령님을 호흡, 비둘기, 기름, 인, 검, 비와 이슬, 열과 빛을 발산하는 불, 생수라든지, 모든 사람이 같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선물, 능력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단순히 그의
작용과 기능의 여러가지 면을 서술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성부와 성자의 개념을 말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성령의 분명한 개념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성경을 통한 성령의 작용은 비가시적이고
은밀하고 내적으로 역사 하신다. 둘째, 성령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시고 자기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성령님은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계신다. 성령님은 자기 자신에게 사람들의 주의을 끌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촛점을
맞추게 한다. 이러한 성령님의 특성 때문에 성도들이 성령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성령님은 삼위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시다.
1. 성령님에 대하여서 기능적으로만
인식하지 말고 인격적인 인식을 가져야 한다.
성령님과 성령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사를 구별해야 한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다. 마음, 뜻, 생각, 감정, 의지, 가르치심, 증언, 중재하심과 같은 인격이 지니는 속성을 지니고 계신다.
성경이 증언하는 성령에 대한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 16장8절에서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로마서
15장30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4장30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로마서 8장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사도행전 13장2절에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사도행전 16장6절에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사도행전 16장7절에서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행전 20장28절에서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이처럼 성령은 인격적인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2. 성령님께서는 자신을 모욕하는
자에게 징계를 가하신다.
이사야 63장10절에서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히브리서 10장29절에서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사도행전 5장3절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책망하신다,.
마태복음 12장31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태복음 12장32절에서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3. 성령님은 성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며 가르치시고 인도하셔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신뢰, 사랑을 지니게 하신다.
요한복음 14장2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장2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장13절에서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6장14절에서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한복음 16장15절에서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로마서 8장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고린도전서 2장12절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장6절에서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서 12장7절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요한일서 5장7절에서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하였다.
결론적으로 바울 사도는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면서, 기쁨을 일차적 미덕, 사랑 다음에 언급하였다(갈 5:22). 에베소에서도 바울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성령의 충만과
연결시켰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엡 5:18-19).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이렇게 편지하였다.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
기쁨은 초대교회의 주요한 특성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누가는 오순절 날에 회심된 삼천명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은“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행 2:46-47)고 하였다.
사도들이 투옥되었고 나중에는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계속
전도한다면 더 무거운 형벌을 받으리라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행 5:41).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서 백성들 가운데 큰 부흥을
일으키니 “그 성에 큰 기쁨있었다”(행 8:8).에디오피아 관리가 전도자 빌립에게 세례를 받자 “그는 기쁨으로 자기의 길을 갔다”(행 8:39 ).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추방을
당하고 새로 회심한 자들도 위협을 당했을 때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다”(행 13:52).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밤중쯤 되어...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들었다”(행 16:25).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을 삶 속에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생활은 즐거운 교향악이라기보다는 슬픈 장례 행진곡과 흡사하다. 독일의 철학자이며, 불가지론자인 니체는 말하기를“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주장을 하기 전에 먼저 그들은 속죄받은 것처럼 보여야 할 것이다”하였다.
결국 성령님은 자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성도를 기뻐하신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가르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우리가 기쁨이 넘치는 풍성한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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