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2009

정체성의 위기 – “높아지려거든 낮아지라”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이유 외에, 우리가 진실로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겸손은 더 깊은 게시를 향한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진정 겸손한 사람들은 지혜와 계시를 받는다. 교만하고 오만하며, 스스로 지혜로운 체 하는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것들을 받는다. 예수님은 겸손한 자들이 영광스러운 일을 경험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11:25). 여기서 어린아이들이라는 말은 생물학적인 나이와는 상관이 없고, 영적인 태도와 성숙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열린 마음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부어 주신다. 또한 하나님의 가장 커다란 비밀들을 계시해 주신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비범한 기름부음을 허락하시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신다. 왜 이렇게 하실까?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나타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것을 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성경 속에 슈퍼스타들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성경 속의 인물들을 살펴보라. 모든 경우에 하나님은 평범하다.

그들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두 가지이다첫째는 그들 삶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와 강력한 기름부음이다. 둘째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겸손하고 순종적인 태도이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다(childlike)’는 것을 주의하자. 이것은 유치한(childish)’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미성숙함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겸손하며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믿음의 표현들은 어린아이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나는 전 세계에 있는 어린아이들의 삶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강력한 임재로 인해 계속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심지어 많은 아이들은 놀라운 기적과 표적과 이사를 나타내고 있다. 내가 가는 모든 곳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 진보하는 것에 있어 그분이 우리보다 더 큰 열망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한 최고의 것들을 항상 가지고 계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29:11).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고 계시다. 그것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게다가 그분의 생각은 우리를 향한 평안과 소망과 밝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발걸음과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돌보신다. 당신의 아픔과 두려움, 기쁨과 슬픔을 세심하게 돌보신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꿈을 돌보신다. 그 꿈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그 꿈이 이뤄지는 것을 보고 싶어하신다.

어느 날 하나님은 나에게 매우 고무적인 말씀을 해 주셨다. “나의 백성들은 그들이 머리로 아는 것을 믿게 될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머리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과 손으로 옮겨 놓으신다. 우리는 말씀을 그저 듣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될 것이다(1:22).

이제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내려놓을시간이다. 성령님께서 당신의 삶의 전적인 통제권을 내어들릴 시간이 되었다. 내려놓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은 마귀가 당신을 속이기 위해 행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탁월하게 당신의 삶을 이끌어 가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요한의 권면을 들으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의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그들이라는 말은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거짓 선지자들을 뜻한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신자이며 제자라면 성령님은 당신 안에 내주하시고, 당신이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풀어 놓아 주실 것이다. 그 삶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다니엘 11 32절은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고 말하고 있다. 마귀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알고 있다. 이 사실이 마귀를 두렵게 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마귀가 당신을 두려워할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는가? 마귀는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마귀를 일대일로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일대일로 싸운다면 당신은 항상 패배할 것이다. 야고보의 권고를 기억하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4:7). 당신이 겸손하게 하나님께 복종하며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질 때에야 비로서 하나님은 당신이 마귀를 성공적으로 내어 쫓을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여정 가운데 당신의 마음이 성령의 조명하심에 완전히 굴복되어, 당신의 시작이 완전하게 변화되도록 하라.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은 교리와 신학만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교리와 신학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적용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크리스천의 삶은 철저히 실제적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행동하는 신학이며, 움직이는 교리이다. 그 삶은 행함이 있을 때에만 진실되다. 그것은 행함 있는 사람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매일의 삶을 통한 행함으로 함께 어우러져 주님의 추수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열쇠는 그리스도로 새롭게 된 영적인 마음과 생각을 갖는 것이다. 당신의 길을 계시적인 빛으로 비추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발에 등불이 되게 하고, 당신의 길에 빛이 되게 하라(119:105). 빛 가운데 걸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어둠 가운데서 넘어져 있는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데, 왜 혼란스러운 마음속에서 헤매고 있는가? 시간이 많지 않다. 추수할 것이 많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시다. 더 이상 마귀의 거짓말과 세상의 쓸데없는 화려한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마라.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성령님을 통하여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정체성의 위기를 벗어나라. 당신이 누구인지 받아들여라. 당신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이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으라. 당신은 지금 평범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특별하게 사용하고 싶어 하시는 소중한 그릇이다!

<출처: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바비 코너>

정체성의 위기 – “영적인 생각”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육신적인 생각과 영적인 생각을 대조하고 있다. 육신적인 생각은, 죄오 인해 더렵혀지고, 영적인 것들에 대해 무디고 어두워져있다. 하지만 육신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매우 밝다. 지적으로 훌륭하지만, 영적인 실체에 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딤후3:7). 바울은 육신적인 마음으로는 성령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영적인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영적인 생각이 있어야 한다.

모순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전히 육신적인 생각의 법에 지배를 받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도 고투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여전히 세상과 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행동을 낳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는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영적인 생각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11:40).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 말씀을 하기 직전, 마르다는 예수님의 명하신 대로 무덤 문을 열어 놓으면 악취가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르다는 육신적인 관점으로 보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관점을 바꾸시고,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육신적인 생각은 내가 보면 믿겠다라고 말한다. 영적인 생각은 내가 믿으면 보리라고 말한다. 바울은 우리의 마음이 영적으로 밝아지는 것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1:17-18).

오직 하나님의 빛 안에서만 빛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날마다 게시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걷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지성이 있다 하더라도,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에 관한 가장 단순한 개념조차도 이해할 수 없다.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지적인 노력으로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신적인 게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하는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6:16-17)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이 영적인 생각과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이미 주어져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이 된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3:16). 영적인 마음을 기경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겨야 한다. 계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간구하라. 지적인 지식과 추구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을 주셨고, 그것을 사용하기는 기대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인간적이고 지적인 지혜를 성령보다 의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영적인 마음으로 채워진 사람에게 큰 은혜를 주시고 능력으로 기름을 부으신다.

<출처: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바비 코너>

구원의 두 방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부탁을 받아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을 보는 눈을 열기 위한 준비로서 구원의 두 방면에 대해서 말 할 것입니다

믿을 때 이미 얻은 구원
에베소서 2 8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믿는 자들이 이미 구원을 얻었답니다. 이것은 불의 형벌에서 구원 받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적으로 말하면 세상으로 비유되는 애굽에서 구원 얻어 세례로 비유되는 홍해를 건넌 후에 광야로 비유되는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교회 생활하는 있는 믿는 이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유황 불 못은 면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십 세 이상의 남자만 육십 만 명이었으나 두 사람만 가나안에 들어 간 것처럼 교회생활을 한 자 중에서 천국에 들어 갈 자는 좁고 협착한 생명의 길을 가는 아주 소수의 무리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다.
 
믿고 구원 얻은 자가 앞으로 이룰 구원
빌립보서 2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직 구원을 받지 않았고 앞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변화를 말합니다. 열매 맺은 자나 변화 받은 자나 거룩하게 된 자나 이기는 자라고 하는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그 증거는 아래 성구를 읽어 보시면 압니다.

[ 21: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므로 구원의 두 방면이 있습니다. 신약의 믿는 이들도 이스라엘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의믿는 이들의 위치는 애굽에서 나왔으며 광야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유황 불 못에는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완전하게 변화 되고 거룩하게 되지 않으면 천국에는 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갔던 바깥 어두운 곳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이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니 믿는 자들이 자기는 구원 받았다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함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은 조건부 적이었음 
출애굽기 19 5-6절을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세계 열국 중에 하나님의 나라로 택함을 받았고 언약을 받았을지라도 조건부 적이었습니다. 내 언약을 지키면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소유가 되지 못하며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키지 못함으로 버림 받았음 
고린도 전서 10 1-11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이 언약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새 언약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언약은 이스라엘의 믿는 이들에게 했지만 믿는 우리에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을 했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광야란 시험의 장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시험하고 우상숭배하고 간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한 자들이 남자의 수만 육십만 명쯤 되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가 광야에서 엎어져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도 예수 영접이 후 세례를 받고 교회생활을 합니다. 이 교회생활이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과 같습니다. 형제님들은 지금 시험 보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형제님들 학교 다닐 때에 시험 보다 말고 여행 다녔습니까? 아니면 시험 보다가 잠잤습니까? 아니면 시험 보다가 텔레비전이나 보고 놉니까? 지금의 여러분의 행동이 영원을 결정합니다.
 
똑 같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금의 믿는 이들과 똑 같습니다. 구약은 육체의 법이고 신약은 영의 법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저울추로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저울추는 두 개 일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으십시오. 번제단의 요구는 넓고 낮지만 향단의 요구는 좁고 높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경이 거의 모든 것이 두 방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원도 두 방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번제단의 요구란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연약합니다. 비유로 말하면 여자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먹고 연단을 받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변화 받아 거룩하게 되는 것은 향단의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지옥도 두 방면이 있습니다. 바깥 어두운 곳과 유황 불 못이 있습니다. 안 믿는 자들은 유황 불 못에 가게 되고 믿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변화 받지 못하고 거룩하게 되지 못하면 바깥 어두운 곳에 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으로 비유되는 애굽에서 구원 받아 세례로 비유되는 홍해를 건너 교회로 비유되는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시험을 받았지만 천국으로 비유되는 가나안에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둘 외에 모두 광야에서 엎어져 죽었습니다. 그 광야가 지금의 교회입니다. 구원 받았다고요? 성경에는 이미 이룬 구원과 미래형 즉 앞으로 이룰 구원을 수없이 말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구원의 두 방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시대 말의 과도기 때에는 법이 바뀜
이제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지막 때는 신실하여 자기 목숨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다 유황 불 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시대 말에 있을 두 가지 저주 때문입니다.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문제와 666표를 받는 것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는 평화의 이름으로 올 것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는데 기독교 즉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합하여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자가 선지자의 이름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믿는 자들 중의 우두머리 즉 대표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믿는 자라도 여기에 속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즉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거나 짐승의 표를 받으면 영원토록 불타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해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도 그랬듯이 과도기 때는 법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이것에 대비함이 없습니다. 그 실체를 아십니까? 그 표는 어떻게 새길 것 같습니까? 적그리스도의 실체는 누구이며 그 일은 어떻게 나타날 것 같습니까? 이 두 가지 법을 지키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영원토록 불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눈을 떠야 합니다. 예언이란 때가 되면 세상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마지막 때가 되었다면 지금 눈을 들어 보십시오. 이미 다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은 이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 계시록을 통해서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은 이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말을 해도 믿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 14: 9-12]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아버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기 원합니다. 아멘

<출처:예수님따라가기>

제사장의 두 방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부탁을 받아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 눈을 뜨게하기 위한 준비로서 제사장의 두 방면에 대해서 말 할 것입니다.

현재 거룩하게 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을 제사장이라 함
베드로 전서 2 9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을 선택하신 이유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덕은 업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은 그러나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8절에서 걸려 넘어지는 불순종자들을 언급한 다음에 9절에서는 그와 정 반대되는 순종자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접인 그러나로 번역함이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여기까지는 올바른 해석을 위한 바로잡음이었습니다.
 
이제 본론을 말하자면 여기에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선택에 기초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택하신 백성은 끝까지 견인할 것을 믿고 그 전제 하에서 한 말입니다. 우리는 아래 성경 구절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2 5절을 보면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거룩한 제사장들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믿는 이들이 제사장들이 아직 안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두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아직 못 된 자들이 있고 이미 이룬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들에게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는 베드로 형제는 현재 거룩한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고 요구 받는 형제들은 아직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그 다음에 신령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제사장의 두 방면이 있습니다. 믿고 신앙생활을 한 후 열매를 맺은 또 다른 말로 변화되고 거룩하게 되어야 제사장으로 세워집니다. 구약에서도 나이 30세가 되어야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장성해야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5 16절을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형제가 자신의 복음 전파하는 것을 제사장 직무를 한다고 말하였고 이방인들을 구원시켜 순종케 하는 것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믿는 이들을 두 무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믿어 순종케 된 자들을 제물이라고 하였고 바울 자신이 하는 복음전파를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왕 같은 제사장이란 성전 된 성도들이 건축되고 거룩하게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 된 삶을 사는 자를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천년왕국(제사장 나라)에서 보상으로 주시는 왕 권
요한 계시록 20 4-6절을 보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현재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나중에 주님 재림 후에 보상으로 주시는 제사장 직분을 말합니다. 그들은 천년 동안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이제 다시 정리하자면 제물이란 죽임을 다하여 각을 떠서 번제단에 불에 태워 흠향할 향기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복음을 전파해서 수많은 믿는 자들이 생겨도 그 자아가 파쇄 되어 죽은 자가 되지 못하면 그는 제물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제물이란 살아 있는 상태로 번제 단에 올려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을 원합니다. 제물이란 자아가 파쇄 된 자를 말합니다. 이는 순교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형제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일하다가 죽임을 당한 자만 순교자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보시기엔 어떤 자가 육의 몸이 살아 있더라고 그의 자아가 파쇄 되어 죽은 자의 생활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죽은 자요 그런 자가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파하여 이런 제물을 바치는 자를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제사장에게 보상으로서 주님 재림 후에 왕국 통치권을 주실 것입니다(20:4-6)

그러므로 제사장의 두 방면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 믿는 이들 중에 거룩하게 되어 영 안에서 거룩한 제사를 드릴 뿐 아니라 복음전파를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순종케 하는 자들을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자임을 알게 하소서이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아멘!  
<출처:예수님따라가기>

하나님의 나라의 두 방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부탁을 받아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지금은 성경을 보는 눈을 뜨게하기 위한 준비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두 방면에 대해서 말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나중에 나타 날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 19 11-27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므나의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나중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오해하는 그들을 향하여 므나 비유를 베풀어 교훈하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열 므나를 맡겼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에게 한 므나씩 동일하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귀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종들은 믿는 자들입니다. 므나는 화폐를 말하나 구속을 상징합니다. 모세의 성막에서 사용 된 재료들을 보면 바깥 뜰에 해당되는 기명 기구들은 놋으로 만듭니다. 놋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또 바깥 뜰에 상관된 것을 제외한 받침이나 갈고리는 은으로 만듭니다. 은은 구속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상징하는 것은 그 이름에 답이 있습니다. 은 받침은 받쳐주는 것을 말하고 갈고리는 걸어 매어 붙잡아 주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받쳐주거나 붙잡아 주는 것을 상징하는 받침대나 갈고리는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의 구속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주셨다는 것은 각각 한 종에게 똑같이 한 므나 씩을 주었다는 말인데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신 것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와는 다릅니다. 달란트는 금입니다. 금은 거룩을 상징합니다. 그 달란트는 각각 재능을 기준으로 하여 주셨는데 재능이 많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주셨고 재능이 적은 자는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 즉 적게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달란트 비유는 재능을 기준으로 하여 각각 달란트를 달리 주셨고 므나 비유는 구속을 기준으로 하여 똑같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오실 때까지 장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우리는 모두 구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남기지 못한 자는 버림을 받을 것이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 므나 비유에서는 이스라엘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할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으로서 나중에 재림하신 후에 모든 종들의 행위를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공개적으로 나타 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우리 안에 은밀하게 현재 임한 하나님의 나라
요한복음 18 36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정치에 관심을 두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사단의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행위입니다.
 
누가복음 17 20-21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지금 현재 임재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나 지금 현재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 된 자들입니다. 이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모두 사단의 나라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나라는 하늘에 속한 나라요 지금 현재 주님을 사랑하여 그의 법을 지키는 자들 속에 은밀하게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 나라를 말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붙어 있는 가지요열매를 맺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쭉정이는 이 비밀을 알지 못할뿐더러 인정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알고 자기 속에서 법을 성취해 가시는 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두 방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한 방면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 안에 은밀하게 오셔서 현재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 삼으셨습니다.
 
또 한 방면으로는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이 땅에 나타날 나라를 말합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이 세상 나라가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11:15)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두 방면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타날 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열매를 맺기 어렵습합니다. 주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아멘! <출처:예수님따라가기>


10/29/2009

영과 혼의 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4:12,13)

1. 혼과 영의 구분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성장에 크게 관련되는 것이다. 만일 혼과 영을 분별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영의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며 여러 번 혼에 속한 것을 영에 속한 것으로 오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혼에 속한 생활에 머물 때에는 영에 속한 것을 찾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곳에서 혼은 어떠하며 영은 어떠한가를 말씀하셨다. 또 성경은 어떤 사람은 혼에서 근심하고 어떤 사람은 영에서 근심하며 또한 어떤이는 혼에서 기뻐하고 어떤이는 영에서 기뻐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성경 구절을 총괄하여 영의 작용이나 혼의 작용이 같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이 곧 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4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 하셨다. 혼과 영은 정확히 구분된다. 영은 영이요 혼은 혼이다.

창세기 2장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최초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이다(창세기 2 7절의 '생령'은 원문에서는 '산 혼'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혼은 사람의 특징이다). 이 생기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의 영이다. 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후 그의 영은 하나님에 대해 죽었다. 그 때부터 아담과 그의 자손의 영은 혼의 압력을 받아 결국은 영과 혼이 혼합되었다. 사람이 구원받을 때 사람의 영은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난다. 영은 장기간 혼과 혼합되어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2 혼과 영의 효능은 유사하나 소속된 범위가 다르고 근본자체도 다르다.
오늘 우리가 기뻐할 때 그 기쁨은 다 같은 것이지만 그 기쁨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분별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근심할 때 그 근심은 과연 혼에 속한 것인가, 영에 속한 것인가? 근심은 같은 근심이지만 그 근심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리라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늙었으므로 그런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얼마 후 그 하나님의 약속하심이 응하기 전 그의 아내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곧 하갈을 그에게 주어 이스마엘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십 사 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그의 아내 사라로 말미암아 이삭을 낳게 하셨다. 우리가 창세기 15, 16, 17, 21장을 볼 때 이삭과 이스마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없으나 갈라디아서 4장을 읽어 보면 우리는 비로소 이삭이 무엇을 의미하며 이스마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는 약속으로 낳았고 하나는 혈육으로 낳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분별할 수가 있다. 사람에게 아들이 있다고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아들을 어떻게 낳았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됐든 아들만 있으면-이삭이건 이스마엘이건 관계없이-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이스마엘은 혈육을 대표하고 이삭은 영적인 사실을 대표했다. 이스마엘은 사람이 자기의 총명과 능력으로 얻어 온 것을 의미하고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혼에 속한 것인가? 혼에 속한 것은 곧 자기로부터 온 것이다.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인가? 영에 속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로부터 온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하나님이 하시길 기다리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혈기에 속한 것이며 혼에 속한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므로 나도 비로소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이 움직이시므로 나도 비로소 움직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영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의 모든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었는가를.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하는 일은 많지만 우리 속에서는 계속 그것을 정죄하고 있다. 우리 속에서 정죄하는 것은 우리의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보다도 우리가 한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이 우리 속에서 운행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3. 고린도 전서 3장에서는 '건축'을 말하고 있다.
사역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우고 어떤 사람들은 풀과 나무와 짚으로 세운다고 했다. 그러면 어떠한 역사가 금과 은과 보석의 역사이며 어떠한 역사가 풀과 나무와 짚의 역사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금과 은과 보석은 하나님에 속한 것이라고 했다. 금은 영광을 대표하고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의미한다. 은은 구속을 대표하며 아들의 역사를 의미한다. 보석은 땅의 불태움을 통해 이루어진 화합물로서 성령의 역사를 대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이 있고 아들의 십자가가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이 바로 금과 은과 보석의 역사이다. 무엇이 풀과 나무와 짚의 역사인가? 이것은 인간 자신에 속한 것을 말한다.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고 인간의 성정은 나무와 같고 인간의 역사의 결과는 지푸라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금, , 보석은 하나님에 속한 것을 대표하고 풀, 나무, 짚은 인간 자신에 속한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 , 보석은 다 지면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고 땅속 깊은 데서 파내서 얻은 것이다. , 나무, 짚은 다 지상에서 자라나는 것이고 얻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은 곧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육체로 말미암은 것은 다 인간 자신에 속한 것이고 쉽사리 이룰 수 있는 것이며 영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속에서 나온 것이며 영적가치가 있는 것이다.

설교를 하든지 복음을 전하든지 다 이러한 분별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잉태한 아기를 낳으려는 것같이 전한다. 이것이 금과 은과 보석의 역사이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머리가 빠르고 말주변도 좋고 기억력도 좋아 그것을 의지하여 전한다. 그러므로 그는 매우 바쁘게 일을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풀과 나무와 짚의 역사일 뿐이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어느 형제가 한 지방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볼 때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참 좋았다. 모든 형편을 볼 때 당연히 기뻐해야겠지만 이상한 것은 전할수록 속에서 힘이 빠져가는 것이었다. 속은 갈수록 허전하고 메마르고 힘이 빠져 갔다.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잘못을 자복하고 자신을 의지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은 표면적인 형편의 좋고 나쁨보다도 속에서 과연 누가 했느냐에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의 분별은 외면적인 말에나 외면적인 효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분별의 근거는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어디에서 왔는가에 있다. 이런 분별이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해도, 똑같은 설교를 해도 듣는 사람의 느낌에서는 한 사람은 총명한 사람으로 느껴질 뿐이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대해 보면 "하나님이 바로 여기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을 대해 보면 그가 단지 총명하고 말주변이 좋은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진 사람만이 능히 사람으로 하나님을 만지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혼을 만진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만지게 할 뿐이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4.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에서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생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종과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남을 비판하기를 두려워하며 그의 태도와 언어가 매우 겸손하고 온유했으나 그와 같이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의 태도가 억지로 하는 것임이 느껴졌다. 그러므로 참된 겸손은 힘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가장된 겸손을 취했으므로 그의 겸손은 매우 힘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겸손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그는 겸손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인 겸손이다. 이것이 바로 혼에 속한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그의 속에서 역사하시면 그는 자연히 겸손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앉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얼굴에 분을 바르는 사람은 항상 거울을 보게 된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은 그 자신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속에서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영에 속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인위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노릇하기가 매우 힘이 든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힘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언제든지 알아야 할 것은 외면적인 행위나 내면적인 행위가 다 좋은 것 같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 근본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인간의 혈기의 능력으로 모방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힘써 참고 있어 매우 딱하게 여겨지지만 어떤 사람은 힘써 참고 있지만 그 자신은 조금도 참은 것처럼 느끼지 않는가. 후자의 경우를 볼 때 우리는 머리 숙여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서 역사하신다고 말하게 된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인간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분별은 외면적인 것에 있지 않고 근본적인 것에 있는 것이다.

육의 생명에 속한 것도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으나 자연스럽다고 해서 다 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천성이 온유한 것과 주님이 주신 온유는 전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인간적인 사랑과 주님으로부터 온 사랑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적으로 매우 겸손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겸손과는 완전히 분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이고 천성적인 것이 영에 속한 것처럼 나타나게 되므로 사람들은 자주 자기의 천성적인 성품으로 주님의 역사를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혼에서 비롯된 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영으로 온 것만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것이다. 성품이 아주 부드러운 사람도 어느 날 이것을 볼 때 그를 시험하는 것 중에서 천성적인 온유가 가장 무서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 언젠가 그의 온유가 바닥이 드러나고 그의 인내도 바닥이 드러났을 때 그의 온유는 고작 그 정도이며 그러한 인간의 천성적인 것에는 한도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은 그 능력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주님이 하시는 것을 우리는 할 수 없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라 시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 자신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것이다. 오직 주님이 우리 속에서 하시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할 수 있다. 그후 우리는 스스로 신기하여 "이럴 수가 있을까?"하고 자문하며 머리 숙여 말하게 된다. "주여, 내게는 인내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이 내 속에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것이다.

5.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외면적인 것으로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며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혼에 속한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진상을 알려면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이것이 영에 속한 것인가, 혼에 속한 것인가 하고 묻는 것도 별 가치 없는 짓이다. 그것은 우리가 물을래야 물을 수 없고 분석할래야 분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묻지 않아도 알 수 없고 물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영에 속한 일은 우리 자신이 분석해서는 ''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영적 절름발이가 될 수 있다. 참을 보려면 하나님의 빛이 있어야한다. 빛이 비취면 우리는 자연히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볼 필요 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으로 우리 속에 비춰주시기를 바래야 한다.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들어올 때 우리는 즉시 무엇이 혼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인가를 볼 수 있다. 이 판단이 어떤 사람의 판단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움직일 때 우리 속에서 "틀렸다"고 하시고 또 움직일 때 속에서 "이것은 깊이가 없는 것이다." 또 움직일 때 속에서 "이것은 네 자신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라고 판단하신다.

, 이러한 분별력은 속에서부터 온 것이지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다. 속에서 보는 것이 참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너의 이런 행동은 네 자신에 속한 것 같다."고 지적해 줄 때 우리 자신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 말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오직 내 속에서 보는 것만이 참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 속에 빛이 있게 하시고 속에서 보고 분별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혼과 영의 분별은 그리스도인의 분별력의 근본이다. 우리의 식별력은 우리가 배워서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빛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빛을 비추어 우리 자신의 역사와 생활에서 무엇이 혼에 속한 것인가,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이다.

워치만 니 [열두 광주리 가득히, "혼과 영의 구분"]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야고보서 1:21"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가 한 말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써 믿는 자가 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받음으로써 우리의 마음, 즉 혼을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구원해야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해야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통해서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여러분의 영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지 않으면 (야고보의 표현을 따르자면  혼이 구원받지 않으면), 몸과 육체의  감각으로 교육을 받아온 마음은 여러분이 어린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아있도록 몸을 편들게 됩니다.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이며, 몸이 다스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이들에게 "너희가 아직도 육신적이다...." (고전 3:3) 라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을 어떤 번역본은 "너희는 몸이 지배하는 사람이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 불구하고 그들의 몸은 새롭게 되지않은 마음을 통하여 그들의 영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발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어린아이로서 살다가 죽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항상 막연합니다. 그들은 믿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우지않고는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살 수 없습니다.

육신으로 사는 사람은 불신앙속에 살며 항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삶은 전쟁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된적이 없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전쟁을 승리하셨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마귀는 실패한 적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마귀와 싸우려고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탈진하여 대항할 힘이 없을 때까지 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면 새롭게 된 마음을 통하여 그의 영이 몸을 다스릴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혼(마음)은 이제 영의 편을 들게 될것입니다. 혼은 말씀으로 새롭게 됩니다. 새롭게 된 혼 (마음)은 영이 다스리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영을 통하여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자의 영(양심)과 거듭나지않은 자의 영(양심)의 차이
사람의 영은 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음성을 안내,즉감,내적 음성 혹은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양심은 안전하지 않은 안내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사람이 어떤 "종교적인" 훈련을 받았다면 그는 주로 그가 받은 훈련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어떤 훈련도 받지 않았다면 그의 양심은 많은 잘못된 것을 행하도록 허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거듭났다면 그의 영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으로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만일 그의 거듭난 영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게 되고 묵상하는 특권을 가진다면,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실천한다면, 그의 양심 즉 그의 영의 음성은 안전한 안내자가 되고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한다면, 또한 우리의 영의 음성에 즉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을 훈련한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삶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영의 개발
대부분의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권과 자신들의 권리에 걸 맞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있어야할 영의 개발을 왜 그들을 놓쳤을까요? 마귀가 할 수만 있으면 진리를 신자들이 모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곁길로 잘못 가거나 다른 영역에 있도록 하려고 애쓸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나서 5분 후에 강대상 앞으로 나와서 "주님, 내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면 당신 안에 발전소를 가지고 있는것입니다! 성령님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고, 그 분이 당신 안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그 분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십시오. 성령님은 거기 계시며 당신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성령님은 또한 신사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 분은 당신이 원하지않거나 요구하지 않으면 들어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빼앗아 주관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게 반응을 보일 때만 우리를 도와주실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을 실행하기까지는 수동적입니다. 집회에 나가기 전에 나는 종종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다. 더 크신 분이 내 안에 계신다" 내 능력으로는 부족한 일을 해야할 때 나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이 더 크신 분이다 그분은 세상에 있는 마귀보다 크시다그분은 세상에 있는 미움보다 크시다. 더 크신 분이 내 안에 계시다."

이렇게 말을 하면 나는 내 안에서 내 마음에 조명을 비추고, 내 영에 지시를 내리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정복자가 되어 마귀와 그 졸개들을 짓밟고 바로 행진할 수 있습니다.  더 크신 분이 내 안에 계시며 그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배웠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안내자로서 계신 성령님을 모셨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하루를 시작해야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출처: "인간의 세가지 본성" 케네스 해긴

오신 목적이 죽음이었던 그리스도 (마 16:20-23)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조용히 불러모으시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많은 논쟁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과연 그는 누구였는가? 그저 팔레스타인 변방에 출현하여 짧은 기간 군중의 인기를 누리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한 죄수였는가? 세계 4대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위대한 생을 살다 간 인류의 스승이었는가? 아니면 참으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인류의 역사와 철학과 문화 등 많은 부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질문은 모든 인간, 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예수님의 아이덴티티를 규명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이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내놓습니다. “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더군요. 세례 요한을 죽이고 나서 무척이나 찜찜해하던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상당히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하는 얘기가 그는 바로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이 무척 두려워하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이 당시 꽤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출현을 보고 큰 희망을 가졌을 터인데, 갑자기 그렇게 억울하게 죽는 것을 보고 못내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출현을 보고 그에게 요한에게 가졌던 기대와 희망을 투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엘리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엘리야의 위치는 매우 독보적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시대가 끝나면서, 즉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4:5). 특별히 엘리야는 죽지 않고 바로 하늘로 들려 올라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시면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는 사람으로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충분히 엘리야가 왔다고 믿었을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겠다고 하신 엘리야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예레미야 같은 그런 위대한 선지자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지자의 역사라고 할 만합니다. 백성 가운데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선지자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선지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그럼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성미 급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대답에 예수님은 매우 만족하셨습니다. 지금까지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친 보람이 있는것입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졸업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하산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라는 그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즉 이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나라에 올 수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시험에 합격했고, 남은 것은 주님께서 구속의 사역을 마무리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졸업시험에 합격하고 하산할 때가 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군요. 새로운 가르침, 다음 단계의 레슨이 이제 시작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이 새로운 레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에 의해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 새로운 레슨, 즉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가서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까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 모르고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느니, 엘리야가 왔느니, 위대한 선지자가 나타났느니 하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의 개념과 정작 그 메시야로 오셔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고백한 제자들마저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마자 베드로가 달려들어 예수님을 붙잡고 하는 말을 보십시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며 정들고 사랑하게 된 스승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누가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려고 한다면 자신이 목숨을 걸고라도 스승님을 보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필요하다면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의병이라도 일으킬 용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베드로, 의리의 사나이 아닙니까? 인간이 이렇게 신의가 있어야죠. 우리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보시며, “그래, 베드로, 고맙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야.” 이렇게 말씀하실 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염려해서 나섰던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아주 극단적인 책망만 받고 말았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치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겠지요? 베드로의 고백에 금방 그렇게 칭찬해 주셨던 주님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베드로라는 그 반석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겠다고까지 하셨던 주님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린 말 한 마디에 이렇게 심하게 책망을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 아닐 수 없군요. 어쩌면 마음의 큰 상처를 받았음직도 합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의 사역과 역할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이처럼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커다란 긴장을 야기했던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이 이해하고 기다리던 메시야는 그들을 해방시키고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줄 왕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왕국을 재건할 강력한 통치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온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모시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로마의 압제와 싸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하러 오셨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달성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왕으로 옹립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충성심에서 주님이 고난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것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계획에 저항하는 행위가 될 뿐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목적은 고난을 받고 죽으시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님이 저 무자비한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고난당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붙잡히든지, 함께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은 그렇게 죽임을 당해야 할 만큼 힘이 없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힘없이 붙잡혀 죽임을 당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이 목적을 가지고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고 의리를 지키려다 보니까 베드로는 결코 주님의 죽으심을 용납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참 고맙고 기특한 일일지 모르지만,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는 그것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공작일 뿐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가깝고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였습니다. 또 방금 그렇게 칭찬했을 만큼 믿음직한 베드로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바로 베드로의 사랑과 충성을 통로로 삼아서 사탄의 유혹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사탄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마치 하와를 통해서 아담을 타락시켰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재산과 자녀들까지 잃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욥에게 그의 아내가 다가와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럴 때는 사탄의 유혹을 간파하고 물리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담은 실패했지만 욥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주님처럼 가까운 사람을 통해 다가오는 사탄의 유혹에 그렇게 무정할 정도로 대처해야 할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피가 되어 떨어졌을까요? 얼마나 두려웠으면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온 인류의 죄악을 한 몸에 짊어지고 그 대가로 처절하게 심판의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연약함을 가지셨던 주님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난을 걱정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에게는 결코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 그 모든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이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베드로의 만류가 예수님의 두려움과 연약함을 부채질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비록 스승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아무런 대책없이 바라만 보아야 했던 베드로의 가슴이 찢어질지라도, 그 방법 외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들의 손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에 우리가 분노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 길 외에는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었고, 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우리의 죄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과 은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몸소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 받으심으로 인하여 가능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그 크신 사랑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악된 성품이 죽고 우리의 악한 습관이 죽고 더러운 언행과 심사가 죽어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내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율법을 내 대신 해 주신 하나님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8:3)

오늘은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신 것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7:12)/(딤전1:8) 그러나 그 선()한 율법이 도리어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을 의롭게 하는 일은 못 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 증언이 로마서 320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한 바로 그 증언입니다.

갈라디아서 311절에서도 율법으로는 아무나 의롭게 되지 못함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법대로 정죄하는 일 밖에는 못합니다. 율법은 도리어 진노를 이루게 합니다. (4:15) 율법은 죽이는 일은 해도 살리는 일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5:4)가 되는 엄청난 저주를 받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본절에 나타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 이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 뜻은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무나 연약하다는 것을 성경이 입증을 해 주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그 누구라도 율법의 완전한 요구를 이룰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할 수 없는’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는 말씀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이 연약한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 여기서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그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 즉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는 일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한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하시나니’ 라고 가르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로 하나님이 친히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만 할 정죄를 자기 아들에게 대신 죄를 정하시고 그 아들을 죽이심으로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4) 는 복음의 증언이 성립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진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 21절에 보면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귀절 속에는 보시는 봐와 같이 죄의 왕과 은혜의 왕이되는 두 왕이 나옵니다. 죄라는 왕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다고 합니다. 사단은 사망의 세력(권세) 잡은 자 입니다.(2:14)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죽기를 두려워 함으로 그에게 쉽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반면 은혜라는 왕은 무슨 권세로 왕노릇 합니까?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은혜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이 땅에 나타난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줄 수 있는 권세가 그분의 의로 인해 은혜의 왕이 되시는 예수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은혜의 권세가 우리에게 없었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의롭게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을 깨달은 자의 신앙 간증의 노래를 들어 보십시요!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중간 생략)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 (71:14-19)

주의 의()를 우리는 찬양 해야 합니다. 종일 토록 주의 의만 구원이 됨을 찬양 해야 합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소망을 주의 의에만 품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설교자)는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40:10)라고 하는 신앙 양심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참 된 성도는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 (시119:7) 하겠다는 신앙심을 자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롬10:3) 하면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를 이루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의 요구가 연약한 우리 사람들의 육신에게 직접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가 저주로 임하게 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일명 칭의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4:9) 로 나타 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참아 보지 못하시는 (1:13)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곳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만 의롭다 하십니다. 성경은 밝히 기록 합니다. 성경의 기록을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복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복음을 좇아 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말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3:21-27)

율법의 마침은 예수님에게 끝이 났습니다.(10:4)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이 엄청난 축복의 복음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렷하게 증언 하십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10:29-30) 합니다.

이 복음을 듣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시여, 부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고백하십시요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시119:142) 하는 신앙심의 고백을 부디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올리시길 바랍니다.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시119:2) 아멘!

<출처: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죄와사망의 법[로마서 8:1-4]


이 네 구절의 성경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믿는이는 전 성경을 보석을 끼워 박은 반지에 비유하고, 로마서는 그 반지에 있는 보석에 비유하고, 로마서 8장은 그 보석이 발하는 빛으로 비유했다. 이 말이 조금 지나치게 들리겠지만 체험있는 사람은 다 그가 말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로마서 8장은 가장 분명하면서도 가장 깊고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 로마서 8 1절부터 4절은 이 장에서도 가장 특별하다. 로마서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네 장이 있는데 바로 5장부터 8장까지이다. 5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것을 말하고, 6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 것을 말한다. 7장은 육체가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없음을 말하고, 8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의를 이룬 것을 말한다.
 
로마서 8 1절부터 4절은 이 네 장의 뜻을 포함한다. 1절은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음을 말하고, 2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말하며, 3절은 육체의 연약함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말하고, 4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네 구절은 우리가 얻은 구원의 결정(結晶)이다. 1절부터 4절까지를 말하기 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주의를 환기 시키고자 한다. 로마서 7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로마서 7장은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말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이 참인가? 많은 때 우리에게 원함은 있으나 해 내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만 해 내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만 해 내지 못한다.
 
로마서 7장은 네 글자 곧 '할 수 없다'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 위에 모두 '할 수 없다'는 네 글자가 씌여져 있음을 기억하라. 당신이 선을 행하려는 결심의 원함이 없다면,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무능(無能)을 알 수 없다. 당신이 이기려고 할 때, 당신은 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깊은 일은 그만두고라도 작은 일 곧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이나 삼백 육십 오 일 끊임없이 성경을 읽으려 하는 것도 할 수 없다. 극히 작은 일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없음을 느낀다. 하루, 이틀, 많아야 한 주는 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은 할 수 없게 된다. 당신은 죄가 있으면 제거해야 하나 제거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안다. 예를 들어, 성질은 가장 이기기 어려운 것이다. 어떤 믿는이는 성질이 아주 좋지 않지만 동시에 그는 이렇게 하지 않아야 함도 안다. 어느 날 그의 집의 가장 좋은 화병이 일꾼에 의해 깨뜨려졌다. 그는 깨진 것을 보면 또 화를 낼까 두려워 곧 이불을 머리까지 둘러 덮고 잤다. 실제 그의 성질은 이불 안에서나 이불 밖에서나 무엇이 달라졌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실한 말을 하고 사실에 넘게 말하지 않으려 하지만, 할 수 없다. 한 번 넘어지고, 두 번 넘어지고 나서 다시 넘어지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다. 세상을 사랑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다.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려 하지만 할 수 없다. 비록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기 원하지만, 일단 다른 사람이 어떠어떠하다는 것을 생각하기만 하면 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면할 수 없다. 우리의 많은 체험들이 모두 우리의 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할 수 없다'이다. 그는 절망했으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라고 말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중 누가 교만하고 질투하지 않을수 있는가? 누가 세상을 사랑치 않을수 있는가? 누가 선을 행함에 원함은 있지만 할 수 있는가? 한 번 할 수 없고, 두 번 할 수 없고 마지막에는 이김을 구하지 않는가?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어찌 여러분에게 율법을 주어 거울처럼 비춰 보는 것뿐이겠는가? 아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다. 8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이제', 어제는 지나갔고 방법이 없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방법이 있다. 이 얼마나 귀한가헬라어를 잘 아는 어떤 사람은 믿을 만한 옛 기록에 근거해 "정죄"(定罪)라는 두 글자에 두 가지 용법이 있음을 증명했다. 하나는 법률적인 용법이고 하나는 일반적인 용법이다. 일반적 용법은 곧 통상적인 용법이다. 여기에서 "정죄"의 일반적 용법은 "무능"(無能), "방해하다"(견제하다)의 뜻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이 성경 구절에서 무한한 안위를 얻는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 방면에서 정죄할 수 없다. 육체 방면에서 다시 무능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어떤 방해가 없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한, 할 수 없음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할 수 있다. 8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서 말한 두 가지 법을 주의하기 바란다. 곧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다. 여기에서 왜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말하고 "생명의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말하지 않는가? "생명의 성령"과 "생명의 성령의 법"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죄와 사망"과 "죄와 사망의 법"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죄는 곧 안의 능력이다. 죄의 법은 곧 죄의 습관이다. 예를 들어 땅에는 중심인력(引劣)이 있다. 어떤 물건을 떨어뜨리기만 하면 인력에 의해 이 물건은 아래로 떨어진다. 이 인력은 법이 되었다. 그것의 습관은 어떤 것을 만나면 끌어서 내려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여기에서 떨어뜨리면, 결과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장소를 바꾸어서 떨어뜨린다 해도 결과는 여전히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곧 법의 적용이다. 책 한 권을 여기에서 떨어뜨리면 떨어지는데 저기에서 떨어뜨리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상황은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릇 습관에 있어서 서로 같고 결국에도 서로 같은 것이 바로 법이다. 죄가 하나요 죄의 법이 또 하나이다. 우리의 범죄는 우리 안에 죄의 법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책 한 권을 떨어뜨리면 땅에 떨어지는 것이 땅의 중심에 있는 인력의 법으로 인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을 보았는가? 우리의 범죄가 하나의 법이 된 것은 기회를 잘못 만나서 실수하거나 넘어진 것이 아니다. 범죄는 일종의 습관이요 넘어짐도 일종의 습관이다. 범죄와 넘어짐 모두 법이 된 것이다. 하나의 법은 어떤 곳, 어떤 상황이든지 같은 작용에 대해서 모두 같은 결과가 있다. 만약 우리가 범죄하는 것이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죄의 법이 아니며 우리에게는 방법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범죄한 까닭이 환경이 좋지 않고 직업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면, 당신이 환경을 바꿀 때 직업을 바꾸면 범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이여,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범죄가 우연적인 것이 아니요 죄의 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자주 쉽게 화를 낸다 하자. 당신이 상해(上海)에서 쉽게 화를 낸다면 항주(杭州)에 가더라도 쉽게 화를 낸다. 당신이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쉽게 화를 낸다면 직업을 바꾸더라도 여전히 쉽게 화를 낼 것이다. 어느 때 어떤 곳에서든지 건드리기만 하면 화가 나온다. 형제 자매들이여,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죄의 법이 깊이 우리를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죄는 이길 방법이 있고 죽음도 이길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만 죄와 사망의 법은 이길 수 없다!
 
왜 성경은 "죄와 사망의 법"만을 말하고 "죄의 법"과 "사망의 법"을 말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죄와 사망은 실제로 하나의 법이기 때문이다. 죄와 사망의 법은 두 가지의 법이 아니라 한 가지 법이 두 방면으로 나뉘어졌을 따름이다. 이 법을 죄의 방면에서 말한다면, 안에 하나의 습관이 있어 적극적인 방면에서 많은 죄를 범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법의 사망의 방면은 안에 율법의 요구를 준행하는 능력이 부족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소극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망"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망이란 곧 연약함이 극점에 달하여 조금의 힘도 없으며 생명을 잃은 것이다. 사망이 하나의 법인 것은, 연약하고 무능함이 우리가 항상 가지고 있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에서 가장 주의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이다. 바울이 말한 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는 사망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는 죄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매일매일 느끼는 어려움이 바로 이 죄와 사망의 법이다. 많은 때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할 능력이 없으며,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능력이 없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이 죄와 사망의 법이 얼마나 미운가를 본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죄와 사망의 법을 미워해야 한다. 우리는 이 법에 대하여 결국 방법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그분은 근본적인 구원의 방법이 있으시다. 그분의 구원의 방법은 당신의 자질구레한 죄들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당신의 근본적인 법을 해결하는 것이다. 본래 당신은 같은 시험을 만나면 항상 같은 결과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는 성령의 법이 있는 것과 성령의 법이 없는 것의 차이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는 이길 방법이 없게 된다.
 
로마서 8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고 해방받는 것은 어디에서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 나는 "할렐루야!"라고 외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좋은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범죄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정죄함이 없고 곧 자유함이 있다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의지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죽음 안에 연합시키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부활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은 그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다.
 
요한복음 3 16절은,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안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다. 로마서 6 3절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은 후에 침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비록 당신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었는지 모를지라도 이것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당신이 믿음으로 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은 당신을 그리스도 안에 연합시켰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믿는이라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이가 없다. 각각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얻는가? 로마서 8 1절부터 2절에 있는 두 개의 "완료형"은 매우 귀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이미 우리의 죄를 처리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은 이미 우리의 사망-영적인 것에서의 지극히 연약함-을 처리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로 죄를 이겼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같이 사망을 이겼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을 얻은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있는 하나의 법이 전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당신 안에 죄와 사망의 법이 있음을 안다. 당신에게는 분명 당신의 특별하고 독특한 죄와 사망의 법이 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당신으로 하여금 그 죄와 사망의 법을 벗어나게 했다.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은 곧 부활의 법이요, 주님을 사망에서 부활케 한 그 법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은 그날 얻은 생명이 곧 부활의 생명이요, 거듭남의 생명이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믿을 때 얻은 생명은 부활한 생명일뿐 아니라 또한 동시에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써 이 법은 우리로 하여금 해방을 얻게 하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한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긴 주님의 그 생명을 우리에게 나눠주시며 우리로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의지하여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게 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어쩌면 이것을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급할 것이 없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으면 된다. 당신은 하나님께 "주여, 당신의 말씀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저를 해방하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곧 해방될 것이라고 말하는가? 아니다. 장차 해방될 것이라고 말하는가? 아니다. 성경은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예전에 마치 감옥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죄와 사망의 법이 나를 가둠이 감옥의 가둠보다 더 심하게 나를 가두었다. 죄와 사망의 법이 나를 둘러쌈은 감옥이 나를 둘러쌈보다 더 심했다. 그러나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해방했다. 마치 나는 감옥으로부터 관청의 석방을 받은 것과 같았다. 어떤 사람이 감옥으로부터 석방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기뻐서 즉각 나오겠는가 아니면 한바탕 울고서야 나오겠는가? 그는 석방받은 그 때 그날로 곧 기쁘게 나올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나를 해방하였고, 나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했다. 해방은 성령의 역사이며 벗어남은 우리가 얻은 결과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당신은 담대히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수 있는가? 당신은 이 생명이 얼마나 큰 것을 포함하고 있는지 아는가? 하나님은 단지 당신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신 것이다. 당신에게 당신을 붙잡고 있는 더러운 사상, 질투, 성질이 있는가? 당신은 담대히 믿음으로써,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내가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있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당신은 이미 해방을 받았고 이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 당신은 어제 당신을 붙잡은 그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해방받았음을 믿을 수 있는가? 당신은 백만 명의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죄인인데, 만약 당신이 이 구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다."는 말씀을 붙잡는다면 당신은 곧 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만약 내가 오늘 당신에게 선행하기를 권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덕 닦는 것을 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당신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라고 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하셨다고 말하므로 우리는 다만 믿기만 하면 된다. 온 세상에서 이기는 둘째 방법은 없다. 당신이 수신극기(修身克己) 할 수 있고 죄와 사망을 이길 수도 있지만 결코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수는 없다. 다른 것이 없다.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내가 구원받았을 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해방했고 그 더럽고도 연약한 법에서 벗어나게 했음을 믿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이기게 된다. 당신이 믿을 때 성령은 즉각 역사하시며 본래 당신을 붙잡던 그 법은 당신을 주관할 방법이 없게 된다. 나는 나에게 죄가 있음을 안다. 나는 또한 죄와 사망의 법이 지독한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이 나를 붙잡을 수 없음을 믿는다.
 
지구의 중력이 비록 하나의 법이지만 손으로 책을 들고 있으면 손의 힘은 중력의 법을 이길 수 있다. 중력의 법이 제거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법이 그것을 이긴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 것은 마치 이러한 이치와 같다. 죄와 사망의 법이 폐해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하나의 법이 나로 죄와 사망의 법에 붙잡히지 않을 수 있게 하고, 나로 죄와 사망의 법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정부에는 사람이 강도짓을 할 수 없는 법률이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강도짓을 하는 경향이 없다면 그 법률은 나와 관계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정부의 그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강도짓을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러한 법이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죄는 밖에 있는 행위이고, 법은 안에 있는 요구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죄를 이기는 것은 한 가지 한 가지 일을 이기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죄의 법을 이긴다면, 그것은 곧 이 죄의 법의 요구를 이긴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면 그는 강한 노력으로 한 번 두 번 마시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안에 술을 탐하는 요구를 없앨 수는 없다.
 
내게 한 친구가 있었다. 주님을 믿지 않았을 때, 중국 연극을 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징과 북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기만 하면 그의 안은 즉각 움직였다. 그가 한번 연극을 보러가면, 결국 삼일 밤 낮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보다 너무 피곤하면 땅에 쓰러져 자고, 깨어나면 다시보고 하기를 삼일 밤낮 동안을 했다. 주님을 믿은 이후, 주님은 그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구원하셨다. 그는 이제 자신을 강하게 억제하여 보러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절대적으로 보러 가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은 모두가 다 이러한 구원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안을 구원하시고 그로 안에서 이 법의 지배를 받지 않게 하신다. 그러므로써 그들에게는 자연히 좋은 외적 행위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하셨지만, 그분은 결코 죄와 사망으로 하여금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는 않으셨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 책 한 권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 한다면, 나의 방법은 결코 대단한 힘을 들여서 지구의 중력을 없애지 않아도 된다. 나는 다만 나의 손으로 이 책을 들기만 하면 된다. 지구의 중력이 여전히 존재할지라도 내 손의 쥐는 힘이 그것을 이겨서 지구의 중력이 비록 존재할지라도 조금의 효력도 없게 한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불뱀을 없앤 것이 아니라 놋뱀을 세우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의 요구를 이기는 데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이 좋지 않을지라도 다급해 하지 말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잡을 수 있기만 하면 충분하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해방했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해방을 얻었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는 해방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믿고 집에 돌아갔을 때, 죄의 법은 여전히 똑같이 존재하는 듯하다. 어쩌면 당신은, 『집회 중에서 나는 이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고 믿었는데, 어째서 지금도 존재하는 것 같은가?』라고 자문할지 모른다. 이 때 사탄은 당신에게 와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믿지 않아도 이러하고 믿어도 여전히 이러하지 않은가?』라고 참소한다. 믿음의 시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당신이 이때 느낌을 상판하지 않고 참소를 상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승리하게 된다. 당신이 조금 조심하거나 방비해서 당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보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책임지실 수 있다. 처음으로 시험이 당신 앞에 임할 때, 당신이 설 수 있다면 곧 이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믿음이 참된 것인가를 시험하신다. 당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구원하시는 것이 참인가를 시험해야 한다. 믿음이 참이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믿는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나는 당신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셨으므로 책임지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이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음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여신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어떠한 사실인가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눈은 하나님을 보고 자신을 보지 말아야 함을 기억하라. 성경은 또 한 번도 당신에게 당신 자신을 보고 당신의 체험을 보라고 하지 않았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구원받음에는 믿음이 필요하고, 이김에도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시험이 올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사탄은 당신이 믿으나 믿지 않으나 같지 않느냐고 말한다. 당신은, 『네가 한나절을 그렇게 해도 나는 여전히 믿는다.』고 말해야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며 오직 마귀만이 거짓을 말한다고 말해야 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나는 참으로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고 권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권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이김이 없다. 1절은 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할 수 없음이 없다고 말하는가? 2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는 이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고 이미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없고 방해받는 까닭은 모두 죄와 사망의 법 때문이다. 이 법은 우리를 묶고 우리로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분의 부활 생명과 성령은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할 수 없음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벗어남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이상 할 수 없음이 없는 것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을 해주사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잘 지나갔으며 이제는 여유 있게 승리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해 주기를 바랄 수 없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더이상 할 수 없음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리스도를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여전히 예전과 같이 연약해진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 15장에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살라는 명령이 있다.
 
8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죄를 정하사'는 원문에 따르면 '죄의 죄를 정하사'이다). 이 구절은 우리 사람들이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을 세상에 오게 하사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셨다고 말한다. 주님은 한면으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사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다른 한면으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가지고 가사 심판하셨다. 이렇게 하여 죄가 다시는 힘이 없게 되었다. 8 4절"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준행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우리가 오늘 믿으면 우리는 오늘 곧 능력이 있고 이김이 있게 된다
<워치만 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