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대한 10가지 장애물을 다음과 같다.
1. 사람들은 회개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있어 만사가 잘되어 감을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그들이 회개해야 할 것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라고 하였다. 자기 몸에 아무 이상도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처방된 약을 먹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백성들 보고 자기에게 돌아오라고 명하셨을 때 그들은 완강하게 대답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말3:7)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명하시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회개해야 하냐고 말한다. 그들은 잘못한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중풍(감각과 운동 능력이 마비되는 질환)보다 더 못된 병은 분명 없는 것이다.
2. 사람들은 회개하는 것을 쉬운 일로 상상한다.
회개는 단지 몇 마디 기도를 하고, 탄식하며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하면 끝나는 것인가? 회개를 쉽게 여기는 이런 자만심이 회개에 큰 장애물이 된다. 사람을 죄 가운데 대담하고 저돌적이 되게 하는 그것은 회개를 가로막을 것임에 틀림없고, 그런 소견이 사람들로 죄 가운데 대담하게 만드는 것이다. 낚시꾼은 마음 내키는 대로 멀리 낚시줄을 풀어낼 수 있고 그런 다음 이것을 또다시 끌어당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마음 내키는 대로 멀리 죄속에 날뛰다가 그 후 마음 내키면 회개하여 되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이것은 그 사람으로 용감히 죄악을 행하도록 만들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회개를 쉽게 여기는 이런 그릇된 자만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음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로 악한 사람은 산더미 같은 죄책을 짊어졌는데,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나기가 쉬운가? 구원이 단숨에 얻어지는가? 사람이 죄에서 하늘나라로 도약해 들어갈 수 있는가? 사람이 마귀의 팔에서 아브라함의 품속으로 껑충 뛰어 들어갈 수 있는가?
둘째로 만일 죄인 속에 있는 모든 능력이 다 동원되어 회개를 반대한다면, 그때 회개는 쉽지 않다. 자연인의 모든 기량이 죄와 대립하므로, “내가 이방신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렘2:25)고 하였다. 죄인은 그의 육욕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와 하늘라나를 잃고자 한다. 남편과 아내를 갈라놓는 죽음도 악한 사람과 그의 죄를 갈라놓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회개하기가 그렇게 쉽겠는가? 천사는 무덤에서 돌을 굴려냈지만 그 어떤 천사도 마음에서 돌을 굴려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 하실 수 있다.
3.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주제넘은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이 이 향기로운 꽃에서 독을 빨아 먹는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딤전1:15) 그리스도께서는 뜻하지 않게 허다한 사람의 멸망의 계기가 된다. 비록 택한 자에게는 그가 생명의 떡이지만 악인에게는 “부딧히는 돌”(벧전2:8)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의 피는 향기로운 포도주이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마라의 물이다. 어떤 이들은 이 의의 태양에 의해 부드러워지고(말4:2) 또 다른 이들은 완강해진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으니, 그러므로 나는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생명의 나무로부터 죽음을 빨아먹고 구원자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긍휼은 뜻하지 않게 허다한 사람의 파멸의 원인이 된다. 긍휼 때문에 사람들은 주제넘어져서 죄 가운데 계속 행해도 될 줄로 생각하지만, 왕의 관대함이 신하들로 반역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시편 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긍휼이 있는 것은 주를 경외케 하기 위함이요(시130:4) 우리로 죄짓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이 공의에 도전함으로써 긍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긍휼이 풍성하시다는 이유로 죄짓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거의 베푸시지 않는다.
4. 무기력하고 나태한 기질이 있다.
회개는 지루한 일이고 또 많은 근면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찌꺼기에 가라앉아 움직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들은 울면서 하늘나라에 가느니 차라리 잠자며 지옥에 가고 싶어 한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9:24), 즉 자기 가슴을 치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노를 열심히 저어서 회개의 눈물바다 저편으로 가는 것보다 차라리 하늘나라를 잃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수고와 노력 없이 세상을 소유할 우 없으면서 그보다 더 훌륭한 것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게으름은 영혼의 암이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잠19:15) 라고 하였다.
5. 죄의 근질근질한 쾌감에 대해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살후2:12)라고 하였다.
죄는 한 모금 설탕물인데, 독이 섞여 있다. 죄인은 죄 속에 위험이 들어 있지만 즐거움도 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그 위험은 즐거움이 그를 매혹시키는 것만큼 그를 겁나게 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죄의 사랑을 대(大) 마귀라고 일컫는다. 죄를 즐거워함이 마음을 완강하게 만든다. 참다운 회개에는 죄에 대해 몹시 슬퍼함이 있어야 되는데,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사랑하는 그것을 슬퍼할 수 있는가?
죄를 즐기는 자는 죄짓지 않도록 기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그의 마음은 너무나 죄에 혹해 있어 죄를 너무 일찍 떠나는 것이 두렵다. 삼손은 들릴라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지더니 그녀의 무릎은 그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죄악을 혀 밑에 알사탕 굴리듯 하면 이것이 그를 얼빠지게 하여 마침내 그의 죽음이 된다. 죄의 즐거움은 비단실로 된 교수형 밧줄이다. 이것은 마침내 참혹한 일이 될 것이다(삼하2:16).
6. 회개가 우리의 기쁨을 없애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회개는 우리의 기쁨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 정화시키며, 과도한 죄의 찌꺼리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땅 위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쾌한 광란(hilaris insanal)에 지나지 않는다.
거짓 기쁨 가운데 우리는 밤을 몰아낸다. 세상적인 환락은 가짜 웃음에 지나지 않으며, 슬픔이 그 뒤를 바짝 쫓는다. 술객의 지팡이 처럼 이것은 즉각 뱀으로 변하나 신적인 회개는 삼손의 사자처럼 그 속에 꿀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기쁨에 있을 뿐 아니라 의에도 있는 것이요(롬14:17), 아무도 참회자만큼 그렇게 참되이 즐겁기 못하다.
우는 것을 일종의 쾌락이다. 기쁨의 기름은 주로 상한 마음속에 부어지기에,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사61:3)라고 하였다. 팔레르모 부근의 들판에는 수많은 갈대가 자라는데 그 갈대 속에는 설탕을 만드는 달콤한 즙이 들어 있다. 마찬가지고 상한 갈대 같은 참회하는 마음속에서는 달콤한 하나님의 성령의 기쁨이 자라고 있다. 하나님은 눈물의 액을 마음을 명랑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포도즙으로 변화시키신다.
회개하는 영혼이 아니고서야 누가 즐거워하겠는가? 그는 모든 약속의 상속자인데 그것이 기뻐할 일이 아닌가? 하나님은 통회하는 마음속에 거하시는데 거기에 기쁨이 없을 수 있는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고 하였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음악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한 격조 더 높여주고 더 아름답게 해주는 것이다.
7. 마음의 낙담이 회개를 방해한다.
죄인은 말하기를 “회개할 마음을 먹어도 나는 허사다. 내 죄는 내게 아무 소망이 없을 정도로 큰 죄이다”라고 한다.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러나 그들이 말히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렘18:11-12)라고 하였다. 우리의 죄는 태산 같은데 어떻게 이 죄들을 바다 속에 던지겠는가?
불신앙이 핏빛 색깔의 죄와 재판관의 법복을 입으신 하나님을 표시하는 곳에서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기보다 차라리 하나님을 피해 도망하려고 한다. 이것은 위험하다. 다른 죄들은 긍휼을 필요로 하지만 절망은 긍휼을 배척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강심제를 땅에 팽개쳐 버린다. 유다는 단지 그의 배반과 살인 대문에 정죄받은 것이 아니다. 그를 멸망시킨 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그의 불신이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그런 매정한 생각을 품어야만 하는가? 그는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사랑의 심정을 품으신다(욜2;13)
8. 형벌을 면하리라고 희망한다.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자만하며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동안 줄곧 그들을 용서해 주셨으니 결코 처벌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 재판이 연기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재판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시10:11). 주님은 참으로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시며 그의 인내심으로 그들에게 미끼를 써서라도 회개시키려 하시지만, 여기에 그들의 비참함이 있는 것이니, 그가 처벌하시기를 참으시기 때문에 그들은 회개하기를 참는 것이다. 인내심의 정해진 기간이 곧 만료될 것임을 알라.
9. 비난의 두려움이 회개를 방해한다.
내가 회개한다면 나는 사람들의 멸시를 사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은 당신이 지혜의 말씀 연구에 전념할 때 풍자와 비난을 각오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을 비난하는 그들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 보라.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며 영적으로 광기에 날뛰는 그런 자들이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정신상태가 좋지 않은 자들에게 비난당하는 것을 괴로워하는가? 누가 미친 사람이 자기를 비웃는다 하여 신경을 쓰는가? 악한 자가 무엇 때문에 당신을 비난하는가? 당신이 회개하기 때문인가? 당신은 당신의 의무를 다라고 있다. 그들을 비난을 당신의 머리에 면류관으로 두르라. 회개함으로 사람들이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회개치 않음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정죄하는 것보다 더 낫다.
만일 당신이 신앙적으로 비난을 견뎌내지 못하겠거든 결코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지 말라. 루터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은 마치 십자가에 못박힌 자와 같다”라고 하였다. 고난은 성도의 제복이다. 슬프도다! 비난이 무엇인가 말인가? 그것들은 십자가에서 떨어져나간 부스러기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차라리 멸시할 것들이요 마음에 둘 것이 못 된다.
10. 회개의 마지막 장애물은 과도한 세상 사랑이다.
에스겔의 청중들은 그들 마음이 탐욕을 따라가자 완강해져 반역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놀랍지가 않다(겔33: 31). 세상은 사람들의 시간을 너무 빼앗아 버리고 사람들의 애착심을 너무 매혹시키기 때문에 사람들이 회개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병에 눈물을 담기보다 오히려 자기들의 자루에 금을 담고 싶어 한다. 나는 교회에도, 제단에도 유의하지 않고 경작지 돌보는 데만 부지런한 터키인들에 대하 읽은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에 거의 유의하지 않으며, 그들은 묵은 땅을 일구기보다는 쟁기와 흙덩이 일구는 데 더 마음을 쓴다. 가시나무가 말씀을 질식시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의 만찬에 초대를 받았는데 세상적인 핑계를 가지고 발뺌하는 자들이 나온다.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눅14:18-19)라고 하였다.
농장과 상점이 교인들의 시간을 너무 차지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위한 여가를 전혀 갖지 못한다. 그들의 황금 추들이 그들의 은 눈물을 방해한다. 사르디니아 지방에 한 가지 약초가 있는데 이 약초를 많이 먹으면 웃으며 죽는다고 한다. 그러한 약초가(아니 보다 정확하제는 잡초가) 바로 이 세상이라, 만일 사람들이 이것을 너무 무절제하게 먹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회개하다가 죽기는커녕 그들은 웃다가 죽을 것이다.
<회개/토마스 왓슨/C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