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2010

씨앗들이 독을 만들어 낸다

예수님으로부터 방출된 신비한 빛으로 둘러싸이자, 나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나는 지금 산림지대를 탐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숲을 찬찬히 살피게 되면서 나는 큰 나무들에 달려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과일들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어떤 과일들은 배 모양이었고, 또 가른 것들은 가시가 달린 껍질을 가진 녹색 조롱박 모양이 이었다. 모든 과일들은 한 가지 독특한 공통점을 갖고 있었는데, 껍데기가 투명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껍질을 통해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너는 이 과일을 절대 먹어선 안 된다. 아들아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것이 맛있고 안전하게 보이지만, 그 씨들은 너의 영에 독을 만든단다. 네가 이 나무에서 먹을 때 모든 악산 습성이 탄생될 것이다. 이 나무들은 많은 남자와 여자들에 의해 이곳에 심겨졌고 자라나서 거짓으로 엉켜졌다. 그것들은 철학과 인류의 위대한 아이디어들을 말한다.”

내 눈은 다윈주의의 나무를 찾기 위해 재빨리 빽빽한 숲을 훑어보았다. ‘다윈의 진화론이라면 이 숲 안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데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특별한 과일이 그것을 나타내는지 분별하지 못했다.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호리호리하고 딱딱한 나무의 유혹적인 과일을 볼 수 있었다.

신학이라고 불리는 큰 나무들이 이룬 자그마한 숲 전체는 회색빛의 어두움으로 덮여 있었다. 이런 특별한 나무들은 매우 컸고, 그들은 꼼짝도 안 할뿐더러 잘라내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한 개를 넘어뜨리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 것 같았다.

예수님은 신학이라는 나무의 무리를 향해 정면으로 가셨다. 우리는 거대한 나무들 사이를 쉽게 지나갔다. 나는 위대한 사상가와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이 각각의 나무들에 새겨 있는 것을 목격했다. 우리 이전에 이곳을 지난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거대한 인물들의 발 앞, 즉 뿌리 근처에 꽃을 두었다.

사람들은 진짜로 여기에 경배하려고 오는구나!” 나는 갑자기 공포에 질려 갑자기 말을 꺼냈다. “심지어 이 나무들 중 어떤 것들은 그 앞에 감상적인 돌 제단을 세워 놓고 있구나하고 나는 역겨움에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님이 설명하셨다. “이 신학의 숲 이상의 것은 절대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제단들을 세웠다. 그들은 이곳에 멈추어 계시나 또는 신학적 개념에 대해 경배하고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여전히 이 제단을 관리하기 위해 온다고 주님은 계속 말씀하셨다. “나의 마음은 그 사람들로 인해 무너졌단다. 나는 그들이 숲의 이 부분을 지나쳐 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많은 눈물을 숨겨야 했지. 네가 보듯이, 내 아들아, 가장 큰 위험은 거짓의 숲 안 이곳에서 진리가 자라는 것이란다(고후11;1-4). 심지어 선택 받은 사람들까지 속이기에 충분한 진리가 이곳에 있다(3절참조).

오직 나만이 진리를 드러낼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진리는 너를 망가뜨려 버릴 것이다(53:9). 나의 영을 통해서 진리를 볼 때만이 너는 생명을 가져올 수 있다. 너는 절대 진리를 경배해선 안 된다. 너는 반드시 나(하나님)를 경배해야 한다!” 그분의 음성은 강했다. “나는 거짓을 뚫고 가는 길이다. 나는 살아 있고 활동적인 진리이다. 나는 진리를 주는 자이다.

아담과 하와는 나를 떠나 진리를 추구했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나와의 친밀함을 희생했다. 일단 그들이 지혜의 나무 실과를 먹은 후부터 그들은 나로부터 숨어야 했다. 네가 나를 선택할 때, 숨을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투명하고 솔직하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투명성이 크게 요구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얻고 그분과 함께 은밀한 처소로 들어가지 위해서 우리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나 혹은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숨길 이유가 없다. 우리가 세상의 거짓들에 매달리는 동안 우리는 더 이상 주님과의 친밀함을 위해 노력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순전한 마음과 섞이지 않은 동기들을 품고 그분의 얼굴, 오직 그분 한 분만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은밀한 처소 중에서>

친밀함을 선택하라

지식인가 친밀함인가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지라도, 성령 안에서는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싶고 생각에 잠긴 고요한 침묵이 그분을 뒤엎었다. 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무슨 말이든 완전히 부적절한 말이 될 것임을 알기에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점차로 엄숙한 침묵이 사라지면서 평화롭고 부드러운 애정이 그분을 덮었다. 그것은 마치 신랑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신부의 예복과 같았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대하여 아직 더 하실 말씀이었다.   

너의 영과 혼이 어지럽게 만드는 세상의 것들로 인해 불결해지도록 하지 마라라고 그분은 사랑을 담아 말씀하셨다. “욕체적인 갈망이 너를 시험에 들게 하여 네가 받은 현재 수준의 계시에 안주하도록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나의 바람은 너와 또한 내가 소명을 준 다른 사람들이 나의 진리가 흘러갈 수 있는 열린 통로가 되는 것이다. 너의 마음을 내게 열렴. 너희 존재가 나에게 쓰임받을 수 있는지는 더 이상 질문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 네가 얼마나 나와 친밀하며 네 자신을 나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가가 질문이 되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나와 동행했단다. 우리는 친교를 나누었고, 한낮의 시원한 곳을 함께 산책하는 것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그 후 에녹이 왔다. 그는 통찰력보가 친밀함을 선택한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에녹의 마음은 순결했다. 노아 역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타락했을 때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의 종 모세는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나를 선택했단단(33:12-15). 엘리야는 나와 하나가 되길 갈망한 사람이었고, 내 임재의 우물에서 어떻게 물을 길어 나르는지 알았다. 모세처럼 엘리야는 내가 그와 동행하지 않으면 삶을 계속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변화산 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와 등장했지. 나와 그들과의 관계 때문에 그들은 독특한 형태로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내 임재의 영광과 함께 나와의 친밀함 가운데 누리는 기쁨은 그들 마음속의 갈망이었다. 그들은 나와의 친밀함을 말하는 율법과 예언자를 대표하였다. 율법은 나에게로 인도하며, 예언적 기름부음은 인류를 나에게로 끌어당긴다.”

내 임재의 우물로부터 나온 계시가 모든 인류를 나에게 이끈다는 의미를 이해하느냐? 성령의 사역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네가 내 임재 가운데로 와서 네 영과 성령이 만나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간단한 진리를 이해해야만 한다. 너의 마음과 헌신을 나에게 주렴. 너희 관심과 너의 귀를 나에게 주렴. 우리 이제 서로 사랑하며 친구가 되자. 영원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천사도 흠모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 오직 나의 신부와 내가 앞으로 누리게 될 것이란다.”

그때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때의 형상을 그리게 되었다. 말씀하시는 동안 주님께서는 손짓으로 부르는 자세로 두 팔을 올려 활짝 펼치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진리로 계시만을 위해 나에게 오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그 무엇보다 나와 함께 있고 싶어 나에게 오는 사람들 중 한쪽을 너는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만일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참으로 생명을 주는 진리와 영혼을 살리는 능력과 권능(dunamis)들이 네가 내 임재의 우물을 길을 때 함께 풀려질 것이다.”

생명은 진리 그 자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임재의 우물 안에서 달콤한 하나 됨으로부터 나온다. 진리는 너를 자유롭게 하지만 나의 임재는 너에게 생명을 준다. 오로지 네가 내 안에 거할 때만이 생명을 갖는다.”

그분의 음성은 참으로 부드러워서 거의 들릴락 말락 한 단계였는데, 모든 단어가 감정으로 충만했다. 주님의 강렬한 응시가 나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분의 눈은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눈은 촉촉하게 빛났고 한 방울의 눈물이 주님의 오른쪽 볼을 따라 내려와서 옷 위로 떨어졌다. 그것은 당신의 신부와 친밀함을 갖고자 갈망하시는 주님의 열정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은밀한 처소 중에서…>

생명력

생명력 에 대한 개념은 그 기원이 창조에 있다. 생명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은 그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셨기 때문에 살아 있다(2:7). 생명 그 자체는 생명의 힘이신 하나님의 영의 임재의 결과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활동들은 생명을 주시며 생동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보내실 때 만물이 창조되고 살아났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을 거두실 때 그들은 죽었다(104: 29-30). 생명의 비밀과 근원은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것이다.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의 나무는 인간에게 영원한 삶을 제공하였다(2:9; 3:22, 24). 아담과 하와가 그 나무에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는 한, 그 실과는 그들을 유지시켜 주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죄를 짓게 되자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났다. 하나님은 그들이 타락된 상태로 영원히 사는 것을 막기 위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그룹과 불의 검이 생명나무를 지켰다(3:1-24)

그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죄의 상태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지 못하게 되었다. 몇몇의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었는데,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육체적으로 이동되었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하늘로 올려졌다. 그들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셨고, 그들이 떠난 후 수천년이 지나도록 이 셋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생명은 끝나지 않고, 죽음에 의해 깨어지지도 않는 믿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아담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요일5:11-12)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모든 변화가 일어났다. 신약성경은 분명히 조에(zeo, 헬라어 생명’)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 미래의 소망일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소유될 수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다. 영원한 생명은 그분과의 믿음을 통해서만이 이 삶에 들어올 수 있다.

예수님에 의하면 생명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적이고 적인 것 모두를 말한다. 양적인 면에 있어서는 한때이면서 영원하다. 질적인 면에 의해서 그것은 풍성해질 수 있고 또한 불안전할 수 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생명을 유지시키는 분이시고, 그분의 임재나 부재가 그 질을 결정하는 분이다. 그분은 생명력이시다. 그분이 말씀하길,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말씀하시길,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니”(6:54)라고 하셨고, “무릇 살아서 나는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는냐”(11;26)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생명나무의 영적인 완성이시다.

<은밀한 처소/데일 파이프/순전한나드>

낱말풀이:귀신들, 마귀들, 마귀, 하늘의 처소, 하나님의 집,하나님의 나라(왕국), 권세들(Power), 정사(Principality), 사단,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귀신들, 마귀들: 헬라어로 다이몬.” 흠정역(KJV)귀신들(demons)”마귀들(devils)”로 잘못 번역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마귀로 번역된 별개의 두 낱말이 있는데, 각각 다른 영적 존재를 나타냅니다. 오직 하나의 마귀 즉 사단이 있으나 귀신들은 많이 있습니다. 귀신들을 한 때 천사들이었으나 자기 처소를 떠난자들입니다(6, 12:9, 25:41)

이 영적 존재들은 악의 정도가 서로 다릅니다(12:45). 귀신이란 용어가 포괄적으로 사용될 때, 작은 귀신들로부터 주요한 정사들, 권세들까지 모두 귀신의 범주에 들어갈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특수한 용어로 사용될 때, 이는 보통 귀먹고 벙어리된 영이나 인간의 생각으로 가장한 두려움이나 정욕의 영 들과 같은 모든 더러운 영들을 말합니다.

귀신들은 지옥의 지상 전투부대입니다. 그들은 매우 많은 악령들이며, 하나님은 분명히 인류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뜻에 반향적으로 거역하는 영역 이디나 점령할 법적권리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유다서 6절은 이 타락한 천사들이 흑암 즉 도덕적 타락의 영적 장소에 영원한 결박으로 갇혔다고 말합니다. “귀신들을 쫓아낼쫓아낼 책임은 모든 신자에게 있습니다(16:17).

마귀: 헬라어로 디아볼로스.” 참소하는 자, 비방하는 자, 사단을 나타내는 한 이름. 이 단어에서 영어 단어 마귀가 나오므로 오직 사단에게만 적용되어야만 합니다(바인의 해설 사전).

하늘의 처소: 성령이 하늘이라고 말할 때, 이는 문맥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세 장소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하늘입니다(19:1). “셋째 하늘은 마마도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곳입니다. 낙원(고후12:2, 4)으로도 알려져 있는 여러 층의 영광 가운데 으뜸인 곳, 하늘들의 가장 높은 것으로 관 씌어진 하나님의 거하시는 장소입니다(6:9).

마지막으로, 성령에서 하늘의 처소라고 알려져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의 전투장이 바로 이 영역입니다(3:10, 6:12참조). 선과 악의 영들이 인간의 영혼들을 놓고 격전을 벌이는 곳이 여기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악이 사라지게 될 때, 이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보편적이고 참된 의미에서 모든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영원한 집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집은 오직 함께 지어질때 제 기능을 합니다. 그곳에서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2:19-22). 그러므로 이 책(하나님의 집/프랜시스 프랜지팬)에서 하나님의 집을 도시 안에 살아 있고 연합되었으며 기도하는 교회로 정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복음주의자들과 오순절파들과 전통적인 교회들과 은사주의자들을 다 포함하여 구성될 것이며, 인종적이고 계급적인 편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고 성경의 진리를 믿으며 형재로서 서로 헌신하는 크리스천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각자가 소속해 있는 독특한 유대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도시에 주님의 치유가 임하도록 특별하게 기름부음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왕국): 성경적으로 말해서, 이는 항상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영원한 영적 실제(reality)를 가리킵니다. 이 광활한 하늘의 왕국은 주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영원 속의 천국과 시간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고 들어가게 되는 천국의 향기입니다. 저자가 왕국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두 번째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전 세계가 정복되어 그리스도께 복종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하여 말할 때, 이는 구속받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거듭남을 통해서 상속받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발견하는 영생의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1:14-15, 5:3, 10, 6:33참조).

권세들(Power): 정사들과 함께 일하지만 그들 밑에 복종하는 계급을 성경은 권세들로 부릅니다. 권세는 자신에게서 라디오 전파처럼 애너지를 발사하여 자기 관할 지역에 그 힘을 뻗칩니다. 권세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귀신으로 그의 주 활동은 관할 지역을 그의 특정한 악의 에너지로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권세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 이름 그대로 어두움의 권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미덕들(virtues)이라고 하는 천사 계급에 대응하는 악한 영들입니다. 어떤 교회가 기쁨이나 믿음과 같은 특별한 덕을 가지고 사역을 베풀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이나 우울증의 권세가 도시의 어느 퇴락한 지역을 통해서 역사할 수 있습니다.

한 권세가 영향력 있는 사람의 마음을 종종 드나들거나 교회 안에 어떤 부정한 태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권세들은 대체로 도 단위의 관할 구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권세들은 또한 나라의 전 지역에 걸쳐 영계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여러 다른 권세들이 정사의 지배 아래 함께 일하지만 보통 한 두 권세가 가장 영향력이 있고, 결과적으로 그 지역의 언어 습관에까지도 영향을 미칩니다(뉴욕 시를 둘러싼 몇 주의 딱딱한 지역 발음과 남부 지역의 느리고 거의 늦장 부리는 것 같은 말씨를 비교해 보십시오).

정사들과의 경위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권세들에 대적하여 성공적으로 싸우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영적 권세를 집행하는 것과 대체(displacement)의 원리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권세들을 쫓아내지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그 지역 성도들이 중보 기도로 싸움에 나설 때, 그들은 영계에서 있을 자리를 잃고 대체됩니다(24:29, 3:10, 6:12).

정사(Principality): 헬라어로 아르키.” 낱말의 뜻은, “시작, 통치, 다스림이며 사단의 계급 구조에서 일정한 계층의 영적 존재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정사들은 권세들과 이보다 더 많은 하위 부류의 귀신들을 다스립니다. 정사들은 나라들, 나라 안의 지역들, 주들, 도시들과 심지어 교회들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들은 지옥의 체제 안에서 통치권을 가진 영들이며 하늘나라의 천사장들에 대응하는 영들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대적하는 지역 전투의 임무들을 할당하며 전투를 지휘합니다. 대체로 그들은 어느 주어진 지역을 통괄하는 악의 행정관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적 권세와 대체의 원리를 통해서 정사들에 대적하여 성공적으로 싸웁니다. 정사들은 사람 안에 거하지 않고 하늘의 처소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가 쫓아내지않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지역사회 속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견고히 세워져 갈 때 영계에서 대체됩니다(3: 10, 6:12).

엘리야의 임무 – 그리고 수눔 보눔(Summum Bunum:최고선, 인간이 궁극적을 추구하는 바를 뜻하는 라틴어-역주)

하나님의 검이 인간들의 마음을 더 깊이 찌르면 찌를수록, 귀신이 득실거리는 세상으로 인하여 몸서림과 경련도 더욱 더 많아질 것이다.

마귀는 그의 황홀케 하는 영으로 사람들을 교묘하게 조종하면서, 사람의 영과 혼 속에 숨어 남아있기를 바랐다. 주님은 힘(두나미스)으로 사람의 정신과 영에서부터 마귀를 들추어내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는 않앙ㅆ다. 오히려, 주님은 그분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하심으로 그분의 엑소시아를 달성하셨다. 그런 다음 주님은 그분의 백성들 속으로 성령님을 보내셨다. 그 이래 겨루기는 이미 승리했지만 계속되고 있다. 성령님께서 인류와 세상에서 귀신을 내쫓을수록, 사단은 더욱 더 표면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이는 다가오는 어둠의 증대가 사단의 능력이 아닌 그의 패배로 인함임을 뜻한다. 내가 개심(改心)하기 전에, 마귀는 신비사술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통해서 내 안에 서식하고 있었다. 성령님이 오실 때까지, 나는 육적인 결심으로 의로운 척 연기하며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축할 수 있었다. 사단은 그 겉치레를 훼방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내 안에서 확실한 은신처를 가졌다. 그리하여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나는 내가 그래왔던 것만큼 괜찮은사람일 수가 없었다. 성령님은 원수를 표면으로 드러나도록 하고 계셨다. 이는 완전한 치유의 마지막 단계이다.

우리에 관한 모든 악의 증대는 인간들의 깊은 생각 속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서 그 속에 길제로 있어온 것들을 표면으로 가져오시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단은 인류가 계속 착한 채 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러한 방식으로 사단을 계속 숨어서 인류를 조종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선한동기로 합리화시키지만 사실은 그들을 증오와 적개심에 빠지게 하는 무의식적인 수준으로 행해진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메마름과 고층들을 보내는 이는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4장을 보라).

진짜 내가 표면에 드러나 내가 그것을 직시해야만 했을 때에, 그것은 굴욕적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일부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표면화되는 것이 사악한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실은 그렇지가 않다.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이다. 죄를 감추는 것은 사단의 일이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모두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본다. 승리는 이미 주어졌다. 사단의 기만은 온 인류의 생각과 마음을 벌집처럼 쑤셔놓고는 그 위를 흰색 도료로 회칠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이 악한 줄을 아신단(15:19). 그분은 줄곧 알고 계셨다. 그분은 오직 우리가 이를 보기를, 이를 인정하기를, 그리고 온전하게 되기만을 바라신다. 이 때문에 고난이 온다(16). 화가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온전케 되려면 화를 보내셔야만 한다.

따라서 엘리야의 임무는 직접 악을 노출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이 표면으로 드러나도록 해서 회개되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도끼는 여전히 뿌리를 베고 있다. 진리의 검은 아직도 혼과 영을 쪼갠다. 하나님의 정신 의학(psychiatry)은 작동하고 있다. 그분의 선지자들은 반드시 듣고 순종해야 하는데, 빛은 어둠이 숨긴 것을 적발하기 때문이다. 감춰졌던 것은 뜯기고 발버둥 치다 죽는다. 그리고 많이 용서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의 종이 굴욕을 당하고 겉으로 보기에 사람 앞에서 경히 여겨지는 것은 다 괜찮은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신에게 영예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산을 기어오르고, 가장 긴 홈런을 날리며, 정치적으로 승리한 자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위대한 설교가들에게서 듣기 위해 몰려다니며, 기적을 행하는 자들을 아낌없이 찬양하며, 거대한 성전(聖戰)을 치르려 떼 지어 떠날 것이다-겸손한 복종의 문을 조용히 두드리시는 주님을 놓칠 뿐이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취지에 부합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종을 공경하든 칭송하든, 이는 그 종들에게 굴욕이 되며 이로써 그 다음에는 그 종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새기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들 안에서 충분히 깊어지면, 그들은 세상을 한 번 더 뒤집어엎을 것이다.

기적에 의해서든 굴욕이나 고통에 의해서든, 기도를 통한 승리로 인함이든 실행에서의 깨어짐으로 인함이든, 엘리야의 임무는 하나의 준비(preparation)이다. 우리 모두는 하얀 작물을 거두길 원하지만, 그전에 우리들 대부분은 퇴비를 거둘 것이다(4:35; 13:8). 순종은 준비의 표어(슬로건)이다. 히브리서 58절이 우리에게 말해주듯, 예수님께서 그분이 당하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신 것처럼, 교회는 굴욕 당함으로 참된 마음의 순종을 배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나 교회가 어림짐작으로 그 일을 성공시키려 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성령님께서는 악을 표면으로 가져오는 작업을 개시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이 세상 앞에서 낭패를 당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패배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실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실패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6장에서 나오듯) 그 선지자를 돌로 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성서의 역사 전반에 걸쳐서, 하나님은 어떤 이들을 보내셔서 그 나머지 사람들의 어둠을 드러낼 빛을 비추게 하셨다(고전11:19). 그분은 회개로 이끌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흔히 우리가 우리 안의 악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노출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messenger)들을 욕할 때이다. 하나님은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증인들도 결코 어둠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이기지 못하더라’(1:5, RSV 역자해석)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

세상은 평화와 조화, 그리고 꿈, 그 자체로 죄책에 사로잡혀 있는 꿈의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주님은 인생의 시련을 사용해 크리스천들의 혼을 완전케 하신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악이 잔존한다 해도 낙담하지 않는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45:7)

선지자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한 분 하나님을 섬긴다(8:28). 세상은 모든 것이 전부 똑바르게 되어야지,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좌에 안계시거나 돌보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지자는 지구(세상)를 회복시키려는 꿈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식으로는 전혀 회복시키지 않으실 주님에게 충성한다-물론 종국에는 모든 것을 회복시키 주실 테지만 말이다. 선지자는 엉망진창의 한복판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신뢰하면서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괴로움은 참된 것이 완전하게 될 수 있도록 세상에 남아있다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을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11:18-19)

하나님은 진짜 보석이 드러나 윤이 나게 하시려고 흠 있는 것을 허락하시며, 그러는 사 이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 그러므로 수눔 보눔(최고선)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다. 그분은 인간들에게 아버지(Father)의 증거가 되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곁에 앉으신 지혜이시다. 그분은 인간들 사이에 하나님의 표현이고 입증이 되신다. 그분의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하여 인간들 사이에 더욱 더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가 아직 그분처럼 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에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사를 통해서든 재앙을 통해서든 죄를 드러내는 일이고, 이것이 곧 엘리야의 임무이다. 이것이 없이는 영광에 이르는 부활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우리 가운데서 말라기 3장을 이행하기 위하여 금은 연단하는 자의 불로 온다. 교회가 이 엘리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일어나기를!

그러는 사이, 강에는 댐이 세워지고 아이들은 차에 치이지 않게 보호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환상과 꿈, 모호하고 직접적인 말씀이 남자들과 여자들을 불러 각자 그들의 부분에서 역할하게 할 것이다. 대단원의 막이 내기기 전에, 크고 작은 부분들이 그들의 활약과 활동들로 채워질 것이다. 각 장면마다 세부적이고 사소한 일들이 더해지다가 드라마 속의 악인이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교회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위해 요단을 건너고 있다. 오늘날 백성들 앞에서 법궤를 운반하는 제사장들은 주님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지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모사들과 치유자들, 복음전하는 자들과 교사들을 받아들여 왔다. 축사 사역자들까지도어느 정도 인정을 얻고 있다 그러나 선니자들과 사도들은 맨 마지막인데, 이들이 매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단은 요단의 물들을 밀어올리기 위해 앞서 간다. 사도행전 13 2절에서처럼, 하나님은 따로 세워질 자들이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이다. 주님이 부르신다. 그러나 누가 응답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엘리야의 임무/&폴라 샌드포드>

함정을 조심하라

우리가 듣는 것에 대해 동료신자들의 검증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보다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따르는 함정들을 보다 면밀히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함정은 육체이다.
우리 각자는 자연적으로 특별해지기를, 다른 형제, 자매들과 구별되기를, 유일하고, 진귀하고, 우위를 차지하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가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계시를 가져다 주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다른 동료 신자들보다 낫다고 말하는 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는가? 사실 모두 그들의 생각일 뿐인데 말이다. 거의 모든 교파가 한 두번은 그들 자신들의 계시만이 바른 것이고 그들의 교인들만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교만은 우리 모두를 속이고 만다(3).

두 번째 위험은 물론 사단이다.
사단이 실족한 것은 교만으로 인함이었다(28:14-17). 사단은 누구든지 같은 길로 내려갈 자를 이끈다. 사단은 그의 쓰러져가는 장막에 가장 큰 위험이 될 만한 이를 찾아와 병들게 한다. 사단과의 전쟁에 누구도 홀로 뛰어들지 못하게 하라. 그 전쟁을 맡을 자는 더 이상 돈키호테 식 성도가 아니다. 이제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 병기를 충돌하고 나아가나 상치 아니할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 하나로 짜진 몸이다(2:7-8)

사단의 일은 난도질하고 분리하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를 다른 이들보다 높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로 겸손하고 서로 의존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두머리로 가장 낮은 자가 되게 하시고 성인을 가장 죄인으로 만드신다(딤전1:15)

사단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 접근한 것처럼, 듣기가 최절정일 때 기도의 날개 위에 찾아온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성령으로 일단 가장 충만하게 될 수만 있다면, 기도할 대 가장 황홀한 기쁨을 누린다면, 그분의 말씀을 가장 확실히 안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만큼 사단의 맹습에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되지가 않는다. 예수님께서 침례 이후에 이때보다 더 성령으로 충만할 때가 있었는가? 그 정점일 때 사단이 다가왔다. 사단은 성공하지 못하고서 얼마동안떠났다(4:13)

그리고 사단은 언제 다시 왔는가? 예수님께서 힘이 빠지고, 낙심하고, 상하고, 깨어졌을 때인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거의 변모하실 때쯤이었다. 이때 사단은 사랑하는 한 제자 베드로의 입을 통해 왔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사단은 그 다음 언제 왔는가? 성찬식이 막 시작될 때에, 예수님과 사도들의 생애에서 연합과 예배가 최고조일 때이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22:3).

사단은, 우리가 이미 내려갔을 때가 아니라 영광의 절정이 기회를 마련해줄 때에 온다.
러므로 듣기(하나님의음성)는 안전을 제공하지 않는다. 수많은 상담가들의 도움을 받을 때 안
전하다. 영성이 안전을 지켜주지 않는다.오히려 드러냄이 안전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형
제자매들과 한 데 짜여져 있는 것이 안전하다. 체험은 크고 귀중하지만, 강한 자가 교만에 결박
당했을 때에는 빼앗길 보물일 뿐이다(3:27).

성경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다. 사단도 성경말씀을 잘도 인용한다. 오직 몸안에서 자신을 낮춤(humility)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일단 보호 장치가 있다면, 이 모든 것들-영성, 성경지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은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음성)듣기에서의 영적 성장은 약함에서 강함으로, 실수에서 실패치 않음으로, 위험에 노출됨에서 안전함으로, 불확실함으로, 혹은 의존에서 독립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이다. (하나님의 음성)듣기에서의 영적 성장은 그가 다른 형제자매들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에 이뤄진다. 만약 그가 그 자신의 힘을 확신한다면, 그는 약하고 쉽사리 속임을 당한다. 그의 지식이 틀림없이 보장해준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실족한 것이다. 만약 그가 홀로 어둠의 힘과 맞서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 싸움은 필요가 없다. 적들은 이미 그를 차지했다. 만약 그가 독립한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그의 찬양은 속이 텅 빈 것인데, 그는 그에게 그의 필요를 보여주실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직접 듣는 것은 축복이지만, 그 축복은 듣는 이로 하여금 그의 형제자매들의 지혜에 훨씬 더 의존할 정도로 그를 겸손케 할 것이다. 모세가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고 그의 형제들과 다르다고 여기소서 그들의 연약함을 경멸하지 시작하지 않았던들, 그가 온유함으로 바위를 향해 말하지 않고 그 바위를 쳤겠는가?

모세와 아론이 총회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라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20:10-11).

어떻게 모세는 그 형제들이 죄를 법했을 때에 민수기 12장과 16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엎드리지 아니하고 그들과 분리될 수가 있었을까? 그는 직접 듣기의 절정에 도달해있었다. 그의 얼굴은 광채로 빛이 났다. 혹시 그가 교만해졌던 것일까?

경고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자.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를 건지실 것이고, 우리에게 영예를 주실 것이다(91:15).우리는 그 높은 곳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시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가 넘어지면 그보다 더 많이 우리를 바로 세워주실 것이다.

<엘리야의 임무(The Elijah Task)/&폴라 샌드포드/순전한나드>

한가지 목적: 그리스도의 충만을 드러냄

한 단체의 가치는 내세우는 주장이나 기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단체 안에서 어떠한 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나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새롭고 신선한 기름부으심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예비해 주셨는지 모르는 채로 갈등해 온분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주 극적인 방법으로 당신에게 얼마나 주님이 필요한 분인지 가르쳐 주시던 시절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셨지만 외적 축복의 형태 뿐 아니라 십자가의 방법으로도 가까이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당신의 삶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당신은 이것을 기뻐해 왔습니다.

동시에 옛날에 주님이 축복해 주셨던 많은 생각과 계획이 지금은 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이 고수했던 기독교 주제들이나 교회의 행정 같은 것이 더욱 단순해지고 더욱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독교만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예수님을 알기만을 소원하게 되었소, 당신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영혼은 고양되었습니다.

겪어 온 변화 속에서 당신은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삶 속에 예수님의 온유와 권위와 사랑이 나타나기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나타내지 않는 어떤 프로그램이나 교회 활동도 그것이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없는 죽은 행위에 불과함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당신에게 새롭고 신선한 기름 부으심을 예비하신 증거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용하셔서 당신이 사는 도시를 더럽히는 마귀의 요새들(stronghold)을 부수어 버리실 것이며, 교회에 거룩함을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까, 그리스도교입니까?
우리는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속에 하나님 대신 교리를 채워 놓았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 대신에 안내서를 쥐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순복음파인지 침례교파인지 어느 교회의 배경에서 나왔는지 식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특정한 전통을 발전시켜 온 것 같고, 그 중 어떤 것은 그리스도께 단순히 순결하게 헌신해야 하는 진리를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생각을 같이 하게 되면 금방 그들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만족스러운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는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고,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서 열정적으로 오직 주 예수님의 영과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왕국의 거룩한 기준에 도달하도록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이 우리의 목표나 초점이 되지 않을 때 장래에 미혹될 여지가 많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하신 일을 보십시오. 겨우 3년 반 동안에 평범한 남자들과 여자들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담대한 제자들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들은 고난에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고, 희생이 있다고 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보통 사람들에게 영적인 권위가 덧입혀져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자를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사람을 변화시키신다는 살아 있는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3년 반 동안 희석되지 않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속에 만들어 내셨던 것과 같은 것을 우리 안에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다른 점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가, 안 하시는가 입니다. 예수님, 그분이 유일한 차이점입니다.

어떤 분은 그건 2천년 전의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지만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의 음성도 듣고 기적도 옆에서 보지 않았냐고요? 그 당시 예수님을 통하여 일하시던 그 성령께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임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늙거나 약해지거나 변절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동일하게 쏟아 부으십니다. 예수님께서 1세기에 하셨던 그 말씀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움직입니다’(4:12). 그분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28:20)? 예수님은 동일하십니다. 성령께서도 임해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적용됩니다. 우리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2천년 전 사람들 안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셨던 그 영원하신 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히 같은 일을 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예수님을 희석하거나 제한하지 않아야 하는 것뿐입니다. 그분 외에는 다른 어떤 것이나 사람으로 만족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할 뿐입니다.

교회 행정이나 지엽적인 교리로 논쟁한다면, 어떤 사람은 목사를 찾고 어떤 사람은 장로를 찾고 또 어떤 사람은 제직회가 아니면 조금도 움직이려하지 않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함께 사역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 하는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을 키우시지 않습니다. 종들을 키우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역자가 아닌 종이 되어야 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교회를 회복하시는 것을 보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지도력의 형태는 단순합니다. 즉 지도자는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당신에게도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당신에게도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심히 있습니까? 교회에 대한 관심도 행사 중심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모습을 지니려고 애써 노력하는 성도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진심으로 그분을 추구하기만 하면 교회의 형태야 어떠하든지 그 모임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오순절 전에 하나님께서는 단지 120명의 작은 다락방 교회 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에서도 선지자와 교사들이 함께 모여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구하고 있었습니다(13:1). 마틴 루터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모든 것은 불만을 느꼈던 한 수도사였지만, 그 역시 하나님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의 모든 부흥을 일으키실 때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였지만, 공통점은 그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제일로 구했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님께 외적 형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앞에 어떤 마음의 자세로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목적 있는 필사적 추구
우리는 교회의 행정이나 절차 등에 대해 말하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는 조직적으로보다는 형태 없이 빈 것으로시작하십니다. 지하실이나 다락방에 모여서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성령께서 은혜로 그들을 비워 놓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필사적으로 만드십니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등을 모두 내놓고 끈질기게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우셨던 것처럼 그들도 모든 특권과 안락을 버리고 그분의 형태를, 종의 형태를 취합니다(2:7).

그리고 그들의 무력한 것을 그분 앞에 가지고 옵니다. 진정으로 비어 있을 때 진정한 충만함이 올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그들은 자신의 영적 빈곤이 하나님의 선물로써 그분의 왕국에 대한 준비임을 깨닫습니다(5:3; 3:17).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없음이 더욱 크게 느껴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 커져 가지 않던가요?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사람들은 새 부대로서, 깨끗해지고 비워져서 새로운 술로 더욱 늘어날 수 있는 그릇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을 닮아 그리스도의 내적 충만함으로 부풉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성령의 열매와 능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할 때 틀에 박히고 굳어져 있어서는 안 되며 정해진 형식 없이 부드러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찾는 열정이 있어서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 실제로 형성되기까지 만족하지 않는(4:19)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식이나 행정을 고집하지 맙시다. 요는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복음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는가 입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필사적으로 추구하고 찾겠습니까?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종교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속에서 교회 지도자로서 또는 중보기도하는 자로서의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파를 다른 교파보다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6)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분 안에 거한다면, ‘그분이 행하신 대로 행할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님이 인격이 아니라 종교로 되어 버린 부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1세기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었고 예수님의 영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단순했지만 말할 수 없이 위대했고 능력이 있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 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행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집을 세우는 데 필요한 요구 사항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만이 세워지도록 소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바른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봅시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4:12).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만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증과 아들의 권위를 실제로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목표-그것이 우리의 목표이기도 해야 하는데-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식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셨던 기도와 같은 응답을 받을 수 있고 같은 일을 하며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보다 낮은 기준과 타협할 여기가 없으며 더구나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에 불순종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이 말씀은 확실히 예수님의 말씀이기 선포되고 예수님의 영이 자유롭게 행하실 수 있는 곳에 예수님의 삶과 생명이 나타남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금의 목표, 평생의 목표가 되게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충만함으로 교회에 나타나심을 꼭 봅시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에 대한 사랑보다 교리나 행정을 앞세웠던 것을 용서해 주소서. 잘못된 종교적 전등이 끼쳤던 영향력에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소서. 지금 당장에라도 주님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허락해 주소서. 주님만을 추구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the LORD]/프랜시스 프랜지팬/순전한나드>

하나님의 뜻의 세 가지 수준

하나님의 세 가지 구별되어지는 뜻이 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히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 온전하신 뜻
첫 번째 아직 이세상 가운데는 오지 않았지만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 같이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21;2)처럼, 천국은 언젠가는 이 땅으로 임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길 간구하는 이러한 기도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간청함으로 올려졌는데, 언젠가는 응답될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개인에게 오는 것은 아니다. 성령님에 대한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그가 하나님의 손과 손목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가락처럼 움직이곤 한다. 그러나 콘서트에서 바이올린 혼자서만 독두를 할 수 있는가? 아리아로만 오페라를 장식할 수 있는가? 우리의 형제들과 동역하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살전2;19). 어떠한 한 개인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다른 모든 형제들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우리는 그 완전한 뜻 안에 있을 수가 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이 말씀은 우리가 온전하여 진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기까지 우리는 타락한 채로 남겨져 있고 우리는 이를 잊어버린 채 위험한 상태로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우리의 탕자적인 성향을 포용하시며 그분의 은혜 가운데로 우리를 걷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휠씬 크고 힘센 나라들을 차지하시기 위해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있는 문들을 열어 주시며,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질서와 열매를 가져다주시는 이 작은 우연의 일치들로 계속적인 기쁨을 누린다.

우리는 어떤 차를 미처 보지 못해서 우리가 멈추지 않았다면, 큰 피해를 주었을 상황에서, 우리의 발이 브레이크 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어느 날 아침에 잠깐 떠올렸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다. 단편적인 생각들이 마음에서 생각으로, 그리고 말로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마음을 기쁨과 슬픔에 반응하며 우리를 성령 안에서 걷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없기에 말하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 계속 의아해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말하고 기도했던 것에 기적과 이사가 일어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찾고 우리를 통해 평안을 얻는다. 주님 그분 자신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 기뻐하신 뜻
하지만 우리는 거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관대하신 뜻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우리는 아들들로 인정받았고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처음부터 그 여왕의 잔치에 함께 했던 자인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에 대한 이해가 약간 부족하긴 하지만, 그것을 아는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훈련 가운데 있으면서, 있어야 하고, 소심해지며, 치유를 가져오시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접근하기도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무지에서 깨어나 훈련받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잘못된 말을 했을 때 갑자기 몸이 화끈거리거나 창피함에 사로잡히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실 때가 있다. 혹은 친구나 관계를 통해 꾸짖기도 하신다. 차가 시동이 안 걸리거나 진흙 가운데로 던져지는 것 같이 수백 가지의 방법으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아버지는 우리의 실수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죄를 가르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뭇 다른 방법으로, 때로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계심으로 우리를 꾸짖으신다. 다른 예로, 오늘날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는 비인격적이고 매정하지만 효과적인 법에 걸려드는 것에 반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의 가책으로 활발히 개입하신다. 우리는 바람 가운데 씨를 뿌리고 회오리 바람 가운데 거둔다.

선하신 뜻
우리를 아버지의 세 번째 수준으로 데려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율법이다. 이것은 좋고, 아주 좋은 것이지만, 부동적이다. 시편119편은 선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찬양이다. 사도 바울은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7:12)라고 말하고 있다.

그 율법은 십계명도 아니며 모세 오경도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율법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기초로 했다. 이것은 아주 잘 만들어지고 훈련된 전 우주의 기본이요 질서이다. 혼돈 또한 이 합리적인 기본원리 속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원리들이 마구 섞인 것을 말하는 것이며, 어떠한 것도 이 기본 원리 밖에 있는 것은 없다. 인류 가운데 모든 도덕적인 율법으로 주어진 십계명은 우리의 이해범주 밖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하시기 위함이다.

이 율법은 우리에게는 비인격적이지만, 그분께는 결코 비인격적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항상 사랑하시며 인격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해로 그 사랑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작동을 비인격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렇기 때문이다.

그 율법은 가차 없다. 아무것도 그것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도 그분의 법칙들을 지키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우리에게 기적과 신비로 보이는 것들은 사실은 알고 있는 원리들을 초월하는 원리들의 작동으로 된 것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균형과 응보의 원리로 지으시고 역사하셨다. “모든 작용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다.” 모든 화학과 기술도 이러한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를 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의 율법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건축가들은 초고층건물들을 짓지 못하며 우주인들이 지구 밖을 여행할 수 없고 전기공은 집에 전선을 설치할 수 없다.

우리는 어찌하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사업에 대한 불법적 행위나 공학 기술을 무시하는 것보다도 더 쉽게, 너무나도 당연시 여기며 다른 남녀들과 잠자리를 한다. 그들은 죄를 범하고 일주일이 지나도 잡히지 않는 범법자들처럼, 마치 그들이 율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법무 집행보다도 완벽하다. 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들을 설명할 뿐이다.

우리의 믿음은 계시 안에 있다. 크리스천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다. 선지자들은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하는데, 우리의 중보의 힘과 용서의 권세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능력은 모두 그 안에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강조하는데 선지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상의 탑의 확실한 대들보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를 토대로 지으신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스스로를 높을 때, 그는 선지자의 자격에 대해 다루심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뜰 안에도 들어갈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21:33). 물리적인 법으로 그들의 삶에 위로와 보호함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영적으로 시도하려면 자유롭게’(법 없이] 되어야만 한다고 행각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모든 생각들을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고후10:5).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다른 누군가를 동의하게 만들 자격을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를 사용하신다. 각자 의견을 고수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들 자신의 만족에 따라 자유롭게 실험하기를 주장한다면 인과응보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그의 형제로부터 물건을 훔쳤을지라도 하나님과 그 형제는 그를 계속 사랑할 수 있다. 모든 삶이 정상적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던진 부메랑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부분에 긍휼을 품으시고 회개와 용서를 위해 경고하기 원하실 때를 제외하고, 인간에 대해 느끼시는 하나님의 방법에서도 변함이 없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징벌을 명하실 때 용서와 치유를 원하시는 개인적인 감정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불변의 율법에 따라 징벌하셨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법률이기에 모든 것을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내가 이 일을 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변덕스러운 응보가 아니라 우리가 뿌린 것에 대한 수확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든지 빵 조각을 물에 던지면 축복의 빵 덩어리를 얻게 된다. 하나님은 번영에 대한 원칙에 준하여 그분의 전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첫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1:28)였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우리가 하지 전보다 확대되어서 돌아오게 된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2).

어떤 이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만약 우리가 잘못된 동기로 뭔가를 한다면, 그 법의 작용에서 다소 제외된다고 생각하는데, 터무니없는 소리다! 하나님의 율법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랑한다면 잠지리를 같이하는 것이 괜찮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생각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죄는 죄다. 법은 법이다. 우리는 어떠한 느낌과 어떠한 동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을 보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씨 뿌린 것에 대해 계속 은혜의 추수를 하고 있다. 우리는 바퀴, 타이어, 전깃불, 건전지, 발화, 안전장치 등의 발견으로 인한 혜택을 누리고 있다. , 전기기구, 의복, 텔레비전과 라디오, 수술과 의술이 모든 것에서 우리에게 혜택이 돌아오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퀴리부인이 한 발견으로 전 인류가 혜택을 누리고 있다. 율법은 비인격적이자 일반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뿌린 씨를 그들이 거둔다. 우리는 서로가 개인적으로 뿌린 씨앗들로 인해 서로 좋은 것들을 수확하고 있다. 이는 축복된 삶을 나누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원리로, 악인이나 의인이나 똑같이 전화를 하고 텔레비전을 본다. 모두들 뿌리고 거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5:45).

열 살짜리 소년이 공평함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아들 테미에게 너는 내가 침실로 가거 자라고 할 때에 가서 자야 해. 쟈니가 어떻게 하느냐는 신경 쓰지 말거라. 나는 아빠란다. 너는 아빠자 한 말대로 해야 돼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에 이런 식으로 답하시곤 한다. 사실 공평에 대한 우리의 간청함이 우리의 탐욕을 가리우는 망토처럼 사용될 때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분의 의중을 담아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20:15)라고 물으셨다.

선지자는 그가 어떤 이상한 것들을 보든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꼭 기억해야 한다. 만약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15:15)

믿음은 이해를 앞서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따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이해를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은 축복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사단들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되는 불변의 율법이다.

<엘리야의 임무(The Elijah Task)/&폴라 샌드포드/순전한나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나? 밖에서 우리 귀에다 대고 속삭이시나? 천사를 보내시나?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나?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느 방법으로 말씀하고자 하실지라도 그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지문들에 우리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점은 우리로 겸손하게 하고 뭐든지 딱 맞는 상자에 넣어두려하는 우리의 성향을 무너트려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한 목소리를 발하실 수도 있고, 하늘의 전형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임을 확신하기를 항상 바라고, 그 듣기를 통하여 그분을 더욱 더 사랑하기를 추구하실 바란다.

때로 우리는 보다 확실하길 바라면서, 만약 하나님께서 들리는 음성으로만 말씀하신다면 우리가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일지라도 흔히 듣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들리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에, 마태복음 3 17절은 하늘에서부터 한 음성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1 11절과 누가복음 3 22절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한다. 주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동일한 단어들도 다르게 듣도록 하시는데, 보통은 그분의 목적과 듣는 이들의 필요에 따라서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진실은 그 차이점들로 인하여 경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아진다. 사울이 주님을 보고 들었을 때, 그 곁에 있던 자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9:7).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사울의 태도는 그와 함께 있는 자들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달랐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시고…” 라고 부르짖으셨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낸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12;28-29).

때때로 우리는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크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보다 흔히는 그들에게) 정확하게 말씀해주신다면!”하고 바란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다. 그분이 또박또박 말씀하셨을지라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우레가 울었다하고, 또 다른 이들은 천사가 말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날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고 생각지 못했다.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개인적으로 듣고 지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어떤 그룹에게 환상을 주시거나, 크게 말씀하시거나, 설교자나 선지자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실 수 있는데, 그러면 각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다르게 들을 것이다.

사람들이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있어라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그들만이 그 진실을 가졌다는 생각을 드러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의 듣기(지각하기, 이해하기, 받아들이기, 간직하기)는 언제나 주관적이다. 내가 아무리 어떤 특정 사건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인식하더라도, 그래서 사방을 완전히 패쇄하고 있더라고, 그 일이 내게 신속하게 벌어질 수 있다. (우리)의 지각은 항상 낸 형제들의 교정을 필요로 할 것이다(1:14; 20:18; 24:6).

<엘리야의 임무(The Elijah Task)/&폴라 샌드포드/순전한나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다섯 가지 방법

민수기 121-8절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시는 다섯 가지 방법이 열거돼 있다. 이는 가장 간접적인 방법에서부터 가장 직접적인 방법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이다.

1. 가장 간접적인 방법으로, 의식적인 생각의 방해를 가작 적게 받는다. (dream)을 통해 말씀하시는 방법.

2. 두 번째는 환상(vision)을 통해서이다. 환상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①비몽사몽(trance). 여기서 생각은 거의 전적으로 저지당한다. ②그림(picture)로 비쳐지는 상이다. ③직접 보기(direct seeing)이다. 영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유형이든지 간에, 우리의 생각이 활동적이게 참여하고 있으나,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우리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신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수도 있긴 하지만, 꿈이나 환상 모두 기본적으로 비언어적이다. 꿈이나 환상은 언어를 초월한다.

3. 세 번째 방법은 모호한 화법(dark speech)이라고 한다. 모호한 말하기에서 하나님은 언어를 상징적으로 사용하신다. 말이 생각 속에 들어온다. 생각이 동원되지만, 메시지 자체는 현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다. 생각이 사용되지만 그냥 지나칠 뿐이다. 주께서 정신적인 영역을 확대하여 관련시킬수록, 주님은 그만큼 더 우리가 우리 육체의 이해로 그 의미를 왜곡시킬 위험을 무릅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생각에 말씀하시지만, 육체 또한 포함된다. 하나님은 모호한 화법으로 의사소통하시며, 주로 말장난과 비유를 통해서이다.

4. 사다리의 네 번째 단은 직접 화법(direct speech)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영으로 주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에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말장난이나 비유는 없다. “일어나 교회로 가로고 말씀하시면 일어나 교회로 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방법을 분류하기가 어렵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날카롭게 직접적으로 뜻하신 것을 우리가 상징적으로 해석해서 혼돈스럽게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고 있다.

5. 다섯 번째 방법은 가장 명료한데, 들리는 음성(speak audibly)이다. 아론과 미리암, 모세다 모두 그분의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다(12).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이 산에서 들었던 것처럼(17:5).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시던 때에 사람들이 들었듯이(3:17), 혹은 예루살렘 거리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이 들었던 것처럼(12:28).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음성듣기를 반복적으로 테스트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으로 말씀하시지 앟을 테지만, 우리 자신의 어떠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잘못 들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진실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마자, 우리의 육체와 사단은 당황하게 될 것이다. 생각 (mine)과 혼(soul)은 이러한 것들을 점검하지 않은 채로 그냥 지나가게 하지 못한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그분의 방법으로 진행하시면, 사단은 우리 존재의 보좌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내면의 전투는 번갈아가며 사단에게 그 안에서 놀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다. 사단은 좀처럼 비신자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사단은 이미 비신자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을 괴롭히겠는가? 육체와 사단 둘 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을 공격한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육체와 원수가 우리의 주파수를 방해하기 전에 충분히 하나님과의 사랑의 허니문을 즐기는 이는 거의 없다. 모두 오래지 않아 방해를 받는다.

<엘리야의 임무(The Elijah Task)/&폴라 샌드포드/순전한나드>

창조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십시오.

주님의 사랑은 너무도 광대하십니다. 비록 그 엄청난 사랑의 최고의 계시가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질서의 전달자들을 통해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만일 자연의 질서가 우리의 마음을 창조주에게로 가까이 이끈다면, 그 자연의 질서는 초자연으로 세계로 들어가는 창문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연의 질서는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숨겨진 창조주의 변함없는 사랑의 선포와 메시지를 함께 들려줍니다(1:20).

다윗은 창조물의 전달자들을 통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추구를 선포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이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19:1-6)

하나님께서 일상의 단조로움에 묻혀 사는 어린 목동이었던 다윗의 굶주린 마음에 신랑과 같이 빛나는 계시를 주셨을 때, 그의 마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다윗은 창조주의 사랑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매일 쉽 없이 떠오르는 태양은 그의 소유된 백성을 향한 지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그 백성을 기뻐하십니다(62:5)! 이런 통찰력이 다윗의 마음에 화살처럼 꽂혔을 때 그의 마음에 얼마나 큰 감동이 일었을까요? 단지 몰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우리는 창조의 질서를 통해 우리를 추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현재 마주치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그분의 발자취에 고정하지 않은 채 마음만으로 그분의 신성한 그분의 발자취에 고정하지 않은 채 마음만으로 그분의 신성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삶은 단지 기계적인 일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성자들은 자연과 피조물의 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누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물 속에 숨겨진 사랑의 하나님의 표징들을 깨달으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보는 눈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헌신과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자에게, 피조물은 하나님의 흔적을 보여주는 극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손으로 심겨진 나무와 숲이여!
, 푸른 초원과 반짝이는 꽃들이여!
내게 말해다오.
그분이 네 곁을 지나갔느냐?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인 증인, 쉼 없이 발하는 음성, 그의 깊은 사랑의 메시지와 그분의 뛰어난 온유함 가운데 흘러나오는 아름다움으로 피조물의 질서를 움직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타오르는 사랑의 동기와 이 모든 피조물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랑을 인식하기 위한 마음의 눈을 갖기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없이는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 이 아름다움의 이면에 담겨 있는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듣는 귀와 보는 눈이여!

낮은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중에 발견하게 되는 우리의 연약함, 즉 기울고 절뚝거리는 우리의 관계는 우리의 마음이 갈망하고, 찾고, 쫓던 분을 찾음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발견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 곳에는 대부분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분이 누구인가 생각할 때 이것이 충격이 되어선 안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은 어떤 사람보다 더 낮게 엎드리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가장 온유하고, 모든 사람 중 가장 겸손하고, 또한 가장 낮은 자이십니다. 그분이 가장 추구하시는 것은 연약하고 깨어진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가장 평범하고, 단순하고, 심지어 가장 약하고 깨어진 상황은 건너뛰고 모든 높은 곳에서만 그분을 찾습니까!

그 분은 부유한 자로서 가난해지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를 멸시하지 않으신 그분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낮은 자리를 자신을 던지셨고, 어떠한 위엄이라는 관점에서 허용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내려가셔서 낮아지고 또한 여전히 낮은 곳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사랑과 희생으로 낮아지고, 온유함의 길을 선택하고, 순복의 자리를 품을 때 우리를 기다리는 그 놀라움은, 바로 자기 비움의 가장 낮은 자리에 계신 우리 예수님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더 높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비워 그들 아래에서 섬기면 그러한 우리의 아래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 분은 언제나 아래에 계시면, 언제나 온유하시고, 언제나 사랑으로 자신을 비우십니다. 그리고 연약한 자들을 높이고 힘을 주기 위해 자신의 힘을 계속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예물로 우리 자신을 낮추는 그곳에서 우리는 그분을 발견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를 향해 그분의 사랑을 부으시고, 모든 기회를 따라 우리의 사랑에 힘을 북돋기를 갈망하시며, 그분과의 새로운 교제로 위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이 낮고 기대하기 어려운 곳은 종종 가장 달콤하고 가장 위대한 교제를 만들어 냅니다.

최고의 사랑, 위대한 기쁨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간을 초월하여 우일 가운데 울리고 있으며, 그 말씀을 통해 그분은 오늘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살펴보십니다. 주님은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하듯 사랑하고, 그분이 영원히 사랑하듯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사랑을 위해 전부를 주고, 아무것도 아끼지 말라고 부지런히 재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간청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2-14).” 이 말씀에 핵심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싶은 희생과 내려놓은, 바로 그 동일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이웃을 위해 네 목숨의 전부를 내려놓으면 너희는 가장 높고 가장 위대한 사랑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영원히 사랑한 방법이며, 이것이 내 친구인 너희가 너희의 우정을 보여주도록 초청하는 나의 방법이다.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드리는 사랑의 제사가 하나의 강의 되듯, 이 두 명령이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하나로 모일 때, 기쁨이 충만하리라는(15:11)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 모든 것을 행하는 기쁨을 누리며, 모든 말을 마치 하나님께 하듯 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위엄의 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방법은 진리 안에 있는 그 존재를 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진리를 절대로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언제나 사랑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러한 삶 가운데서, 우리의 주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모든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명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함께 품고, 전부를 드린 사랑으로 반응하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전부의 사랑 안에서 이 명령들이 온전히 함께 이루어질 때,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실 것입니다(14:21, 23)

사랑의 초고의 경지는 순복하고 비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배우자, 가족, 친구, 심지어 원수를 위해 내려놓으신 분과의 가장 높은 경지의 교제를 하게 됩니다. 주님의 전부를 주신 것처럼 우리가 전부를 드리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때, 우리는 참된 사랑 안에 거하게 되어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15:11, 벧전1:8).

<‘전부’(Entirety)중에서…/다나 캔들러/드보라하우스>


방해 장치 피하기

육체와 원수가 듣기를 방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로는 무엇이 있는가?

신비사술
신비사술은 매우 두드러진 장치이다. 육체와 사단은 둘 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은사를 모조리 복사한다. 하나님을 듣는 법을 배우게 될 사람들은 모든 신비사술적인 것들, 예를 들어 운세말하기, 별자리점, 카드점, 구슬점, 강신술, 손금 읽기, 마술, 요술, 연금술, 장미십자회의 신비사상, 마법걸기, 맹세와 저주, 자기 체면고 다른 사람 체면 걸기 등등과 결단코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918:9-14; 20:6, 27; 47:12-14절을 보라) 신비사술에 관련되었던 사람은 누구든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개종 후에 훨씬 더 어려운 시간을 가질 것이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신비사술에 연루된 역사가 있는 사람은 2, 3세대 후에 그것이 제거된다 하더라도,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95:9]. 호바트 프리면(Hobart Freeman)은 그의 책[광명의 천사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많은 경우 투시력과 심령적인 세력은 신비사술의 결과로써 보통 2, 3세대 후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가 점쟁이었던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는 어린 나이에 심령적이고 투시적인 여러 다양한 경험들에 관계하면서 신비사술에 굴했던 흔적이 나타난다. 강력한 무당은 심령적 유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의 결과로써, 보통 이런 방식으로 성장한다. 인격과 성격상의 결함들은, 그 부모나 조부모가 행한 신비사슬적인 죄의 결과로써, 후손들에게서 흔히 다음 형태로 나타난다. 병적인 우울 폭력적인 기질, 무책임성, 비도덕성, 만성적 두려움, 히스테리, 신은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과 무신론, 증오, 숙환, 예측불가 행동, 그리고 다른 많은 비정상적인 것들이다』

폴라와 나는 호바트 프리먼이 말한 것이 진실임을 증명할 수 있다, 샌드포드 가계에는 13명의 기도하는 에스겔샌드포드들이 있는데, 미국 독립전쟁 때 타이콘데로가 점령시 이튼 알렌(Ethan Allen)과 함께 했던 원조 기도하는 에스겔샌드포드로 거슬러 올라살 수 있다. 나의 모계는 오사지 인디언 계열로, 매우 독실하고 신비주의적인데, 그들 가운데는 뱀을 부릴 수 있고 다른 신비주의적인 능력을 가졌던 자도 있었다. 내 부모는 점쟁이가 되는 데 관계되었었고 나중에는 장미 십자외 사상에 빠졌었다. 나 또한 책을 읽으려고 파니 아줌마를 보러 갔었고 개인적으로 장미 십자회의 사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었다. 폴라와 나는 둘 다, 호기심에서, 강령술적인 책을 몇 권 읽었고(예를 들면 에드가 케이시의 책과 같은), 시카고에서 잘 알려진 아서 포드(Arthur Ford)가 개최한 강신술 모임에 한번 참관했었다.

우리가 개종하자마자, 그 마귀(devil)가 반격을 가했다. 일찍이 내가 가담했었던 것 때문에 내 안에서 거주하고 있던 한 영이 실제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성령세례가 임하자마자, 전쟁이 벌어졌다. 귀신이 표면에까지 떠올랐다. 축사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 집에서 행해졌는데, 심지어 고양이가 광포해져서는 온 집을 미친듯이 뛰어다니고, 피아노 위로 뛰어오르면서 똑 같은 공책을 세 번이나 공격했다. 이날 축사로 나는 자유케 되었지만, 전쟁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우리는 어둠의 세력에 의해 공격을 당하기 쉬웠다. 여러 차레 반쯤 잠이 든 상태에서 가위에 눌렸고 온 몸이 마비되어 아무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속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해서 되뇌이면 귀신의 억압이 풀어지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우리는 악한 영에게 나가라고 큰 소리로 명령할 수가 있었다. 가끔씩 나는 신비적으로 보이는 것에, 하지만 성령 안에서가 아닌 것에 빨려 들어가곤 했다. 조상으로부터 온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멈추어야 함을 주장해야 한다고 배운 후에야 그 출입문은 마침내 패쇄되었다(31;29-30을 보라).

내 조상들이 행한 신비사술이 내가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몇 년 동안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정말 화가 났다. 이런 일은 어떤 하나님의 성회에서도 있었다. 우리 모두는 손을 높이 들고 주를 찬양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있었다. 갑자기, 주님을 기뻐하던 한 가운데서 나는 생각했다. ‘?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방해를 받았어. 내게는 기회가 없었다고! 이건 공정하지 않아.’ 나는 손을 내리고, 내 감정대로 하고 내뱉었다! 내가 다시 자유롭게 충만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전까지 가르침을 받아야 할 깊은 교훈이 매우, 매우 많이 있었다. 나는 우리가 출생때부터 반역자라는 사실을 배우야만 했다(48:8). 나는 내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을 비난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땅의 타락한 상태에 영향을 받았던 것에 대해 정말이지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다. 우리는 아담의 타락으로 우리 모두 범죄했다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자기가 어리석어 자기 길을 망치고는 속으로 여호와를 원망한다”(19:3 우리말 성경). 우리가 결함에 대해 하나님을 탓할 수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소위를 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신비사슬에서 장난삼아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다. 쭉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은 사단의 속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 divination)
점은 미래를 보는 것으로 금지된 일이다. 투시는 일반적으로 사단의 보조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주로 우리 자신의 혼적 힘으로 이뤄진다. 그들은 지혜와 계시, 통찰이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운 선물을 그대로 따라 한다. 사무엘은 사울이 생각했던 그런 단순한 선견자가 아니었음에도, 사울에게 잃어버린 당나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말해준다(삼상9:18-20). 예수님께서 멀러 떨어진 일을 아셨고 사도들도 그랬다는 것은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흔히 등장한다. 사단과 성령님은 모두 사람들이 정상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정보와 지혜를 드러낸다. 사단은 함정에 빠트리고 죽이려고 그렇게 한다. 성령님은 생명을 가져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다. 점은 모조품이며, 선악과나무에서 열매를 두 번째 따먹는 행위다. 두려움과 신뢰 부족으로 그렇게 시도하는 것인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알려고 하지 않고 기꺼이 믿음 안에서 기다릴 것이다.

강신술
(강령술 등)죽은 자의 영과 접촉을 시도하는 모든 것에 더하여, 강신술은 하늘과 땅의 교제를 사단이 모방한 것이다. 천사들과 성도들은 우리를 돌보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되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12:1). 히브리서 1장에 분명히 기록된 대로, 우리가 천사들이나 성도들에게로 행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이나 성도들을 개인들에게 방문하라고 보내실 것이나, 이 모든 방문은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것이지 방문을 받는 사람들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한 예가 하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어 산 위에 계신 예수님을 방문하게 하셨던 때이다(엘리야는 죽은 적이 없지만, 모세는 죽었었다). 성경 전체에 걸쳐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의 사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만 말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틀어 하나님의 천사들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하기 위해 우리를 보살피는 것을 들었다(91:11; 63:9; 3:28; 1:13; 16:22; 5:19, 12:7, 27: 23; 1:14). 하늘과 땅의 교감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는 그분과 오직 그분께서 그분의 종들을 통해 우리를 보살피시는 것이다. 성도들과 천사들을 경배하거나, 그들에게 기도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우리를 즉시 곤경에 빠드린다. 쟁점은, 우리에게 누가 하나님이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중하고도 자유롭게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러나 사단은 훔치고 강탈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으로라도 죽이고 빼앗고, 눈을 가리고, 속이고, 기어들어오기 위해서 온다(10:10; 고후4:4; 20:3; 10:1).

마술
마술은 기적과 치유를 사단이 따라한 것이다. 마술은 잘못된 동기들을 가지고서 경이로운 어떤 일이 일어나도도록 하기 위해 심령의 힘으로 우주의 원리들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술과 기도 사이에는 얇은 경계선이 있다. 사울이 주께 드릴 제사에 부정하게 접근하였을 때에 사무엘이 이렇게 말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삼상15:22-23). 거역은 사술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룩하지 않은 욕구에서 바른 원리들을 작동시킨다면, 심지어 시도에서조차-그것은 사술과 가까운 것인데, 혼적인 힘을 가지고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결과를 낳은 원리들을 활성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 중 상당수가, 그분의 뜻을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머무르지 않았을 때에,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뜻을 이뤄내기 위해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면 우리의 혼적인 기도들은 위험하게도 사술에 가까워진다.

참된 기도는 겸손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이고 사람과 하나님 모두 자유롭게 놔둔다.아무것도 통제하지 않는다. 아무 영적 레버들도 끌어올리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설교자들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열거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서 그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기도들에 응답하셔야만 합니다.” 혹은, “당신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는 당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게끔 하는 방법을 당신에게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마술에 근접해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는 것들에 매우 신중해야만 한다. 마술이 바라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심령적인 힘으로 어떤 원리들을 작동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술은 비인격적인 원리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기도는 인격적인 예의를 으뜸으로 여긴다. 마술은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침해하고 무시하며, 그 바라는 결과를 강제적으로 얻으려 한다.

참된 능력은 정중함과 협력 하에 자유의지와 힘이 결합하여 나온다. 이는 기적과 치유, 이사와 표적을 낳는다. 마술은 그 동일한 것들을 사랑에서 분리된 채로 얻으려 시도한다. 선의의 마술이란 없다. 모두 악의일 뿐이다. 자유의지에서 분리되어 생명을 작동시키거나 조작하려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사랑에서 벗나간 이용, 조작, 착취이며, 사실 그것의 진짜 이름은 증오이다.1970년대의 텔레비전 쇼 요술쟁이의 주인공 사만다는 악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악의 속임수이다. “작동시킨힘은 무엇이든 그 배후가 사단적인 미혹과 통제이나, 당사자는 그것을 알지도 못할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그의 위에 운행하시며 자유롭게 그에게 기도하도록 권하기 때문에 그가 기도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마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언젠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속임의 반지가 그를 꾀어 그렇게 하도록 했고 그것으로 그를 가두어 망령들이 누워있는 땅으로 그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부적, 마법, 주문, 저주, 최면은 다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협력하도록 복종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육적으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첫 계명은 정복하는 것이었다(1:28).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리고 그처럼 서로 복종한다(5;21). 자연은 자유롭게 우리에게 그 산물의 중대를 내야만 한다. 모든 주문, 부적, 최면적인 힘들은 동물과 자연, 사람을 사랑 안에서 자유의지의 증대로가 아닌, 통제를 목적으로 의지를 유혹적으로 꾀어서 압도하는 것이다.

최면은 굉장한 효과를 이루어낼 수 있지만, 바른 방법으로 힘의 증진을 가져오지 못한다.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성령님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복종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른 많은 변형들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염려, 순간이동, 사이코메트리, 체현, 유체이탈, 기타 등등. 이들은 모두 그릇된 신념의 동일한 뿌리를 지니고 있는데, 그 안에서 그들은 사람의 심령의 힘을 작동시킨다. 이는 보통 당사자가 알든 모르든 사단의 원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모두 하나님의 참된 은사의 모조품들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은 증오와 속임, 속박과 미혹, 강압, 그리고 어둠의 능력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랑과 자유, 성령의 능력을 벗어난다. 악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6:43).

신비사술적인 것에 참여해왔던 자라면(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혹은 자신의 가계에 관련된 것이 있음을 아는 자라면, 그것을 회개하기 위하여 모든 사건들의 모든 기억들을 찾아내 신비사술과 마귀적인 방식들을 끊어버리는 것이 좋을 테다. 각각의 계약은 반드시 파기되어야만 한다. 오직 십자가와 예수님의 보혈만이 그 결속을 끊고 오물을 씻어준다. <엘리야의 임무(The Elijah Task)/&폴라 샌드포드/순전한나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