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2010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다. 요즘 먹고 살 만하니까 교회생활을 액세서리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졌다. 과거처럼 코가 석자나 바지는 생활이 아니라 여유를 가지는 생활이 되어서 그런지 그렇게 뜨거웠던 기도생활도, 간절했던 새벽기도도, 이제는 졸업한 지 오래된 것 같다.

신약성경 마 9:1~8, 2:1~12, 5:17~26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중풍병자를 비롯하여 그 주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아주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중풍병자 (네케) 자기 생각으로 똘똘 뭉쳐 머리 안이 굳어져 마비되어 있는 상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들어와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 그리스도 예수의 사상이 내 안에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 죄를 깊이 뉘우침 또는 마비됨이란 의미로서 사람의 생각으로 굳어져 하나님의 생명의 피, 그리스도의 생명이 몸 안에 돌지 않아서 마비되어 절뚝거리는 상태, 자신의 생각의 옥에 갇혀 있는 상태를 말고 있다.

다른 예로 문둥병자는 예수의 피로 갈아야 하는 상태, 말씀이 오염되어 변질된 상태, 열병환자는 자신의 감정과 혈기에 열이 넘쳐 나 있는 상태, 혈루병 환자 : 생명인 피를 내면세계에서 돌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하여 레마를 내놓은 상태, 생명의 본질이 마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 병을 고친 사건은 육신적인 병을 고친 사람도 해당되지만 그 사건을 접하고 있는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해당되는 병을 갖고 있음을 진단하시고 고침을 받기를 원하시는 내용이다. 또한 그 병을 치료함을 얻는 자가 바로 신유의 은사를 받은 것을 의미한다.

신유는 고치는 사역만이 아니라 자신의 병을 치료받는 것도 신유의 은사를 받은 것임을 직시하고 성경을 대했으면 한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갔더니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할 때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인가? (왕하 5:11~12) 자신이 살고 있던 고향에 강은 너무나 아름답고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목욕하기가 너무나 좋은 곳이다.

그런데 겨우 시냇물처럼 사람들이 폴짝 뛰어 건너뛸 수 있는 너무나 초라한 개천이라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목욕하기가 너무나 용이하지 않음을 분개한 것이다. 그러나 요단(야르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상태로 되어진 생명이 흐르는 강으로서 내가 낮아지고 낮아져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어 내 생각이 깨어지고 씻겨지는 강을 의미한다.

나아만 장군에게 일곱 번 목욕하라는 명령의 의미는 단순히 목욕하는 차원이 아니라 짐승의 속성을 완전히 씻으라는 명령이다. 나아만 장군의 내면세계 속에 잠자고 있는 짐승의 속성을 말씀의 방망이로 완전히 깨어져 하얗게 어린 아기처럼 피부가 깨긋해 지는 장면은 마치 마술처럼 영화 드라마처럼 멋진 장면이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 피부로 바꾸어졌다는 뜻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로 변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갖고 있는 짐승의 속성이 강물 속에 씻기고 씻겨서 깨끗하게 된 상태를 말하는데 예수를 처음 믿었다고 해서 완벽하게 완전한 구원을 이뤄진 것이 아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는 과정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 3:7~8 요단 물로 들어가라는 말씀도 낮아지고 낮아지는 요단 강안에서 꼼짝 달싹하지 말고 확실하게 서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여자문제, 돈 문제, 기타 문제로 넘어지고 있는가? 이미 드러난 목회자들의 잘못도 문제이겠지만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희희낙락하지 말라.

이미 드러난 목회자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자숙하고 자성하고 있다면 진정한 참회 속에서 주의 뜻을 이행하고 있다면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쉬지 않고 계속 감행해야 할 것이다. 만약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있다면 그리고 그 일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면 과감하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뤄진 강, 요단 강물 속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바로 세례며 침례인 것이다. 베드로전서 3:21처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바로 요단 강물에 서 있는 것이며 그 안에서 목욕을 해야 되는 나아만 장군인 것이다. 말씀 속에 퐁당 잠겨 있어야 한다.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나오는 물속에 들어가서 발목, 무릎, 허리, 능히 건너지 못할 강물에 잠겨야 한다.

3절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바이샤우후 베아르비아)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동침 안에서 새 생명으로 들어 올렸다는 의미를 말한다. (고전 12:25~27, 6:1~2) 중풍병자를 한 사람이 들고 올 수 없으며 두 사람도 안 된다. 왜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지 않으면 들고 올 수 없다.

4절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내고(히타르)라는 말씀은 “뚫다, 깨트리다, 지붕이음을 제거하다”는 의미로서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굳어져 있는 중풍병자의 머리속의 생각 하나 하나를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왓장을 벗기듯 깨뜨려서 벗겨냈다는 뜻을 갖고 있다. ( 9:18~19) 그러면 수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중풍병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 글을 쓴 본인을 비롯하여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일 것이다. 얼마나 수많은 잡념 속에 사로잡혀 고정관념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바로 중풍병자일 것이다. 내가 먼저 네 사람이든 네 천사이든 지금 예수님 앞으로 인도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지붕의 기왓장을 벗겨내는 것처럼 하나하나 벗겨져야 한다.

5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서 저희는 ‘복수’로 중풍병자가 아닌 환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것이다. 도저히 중풍병자의 믿음은 아주 미미하여 치료받을 수 있을 만큼 신앙의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를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네 사람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친구로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로 동침되어 있는 성도들이 필요한 시대다. 자신에게 이루어진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주고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깨닫고 중풍병자의 고정된 관념을 하나하나 벗겨내어 예수님 앞에다 내려놓는 믿음이 절실한 시대다. 이런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을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대목에서 기도하는 차원이 바로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람이 해야 되는 기도이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아무런 체험 없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중풍병자가 낫기 위해 데려간 네 사람의 신세를 진 것을 갚는 기도다.

하나님께로부터 빌려온 빚을 탕감받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빚을 갚고자 하는 간절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바로 빛을 탕감 받은 자들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심보다는 네 사람(레바이)의 믿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신 것이다. 네 사람의 단어 어근(라바)은 “동침하다”라는 단어로 즉 짐승의 속성이 소멸된 성도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시는 역사를 우리가 체험해야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여러분이 가장 뚜렷이 기억해야 할 내용은 "마지막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영원히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며, 이 땅의 문명 역시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시작된 인류의 역사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곧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를 알리는 경고가 온 세상에 널리 선포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들이 아무리 마지막 때를 경고한다 해도, 모든 사람이 듣고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 12 10절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고 했습니다.

선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떠나 정결한 마음을 이뤄갑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악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여전히 악을 행하며, 점점 더 악해집니다. 검은 것은 더 검게, 흰 것은 더 희게, 육은 더 육으로, 영은 더 영으로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 11절 말씀은 이처럼 악인과 의인으로 양극화되는 마지막 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양극화 되어가는 마지막 때의 모습

1)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11절 전반에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전해도,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의와 더러움 속에 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받고, 받지 않고는 각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의롭게 만드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만,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찌하실 수가 없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그대로 불의하게, 더러운 사람은 더럽게 남겨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의한 것"이 무엇인지는 고린도전서 6 9-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불의한 것입니다. 즉 불의한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유혹에 미혹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가 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걸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곳곳에 많이 기록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주여, 주여 부른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야 구원 받는다고 수없이 기록하고 있는데 사망에 이르는 죄가 뭔지 수없이 기록하고 있는데도 그런 건 다 빼버리고 무조건 구원 받는 것처럼 가르쳐가지고 어찌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의한 일들이 계속 쌓이면 더러운 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더러운 것"은 사람의 도리에서 벗어나며 난잡하며 방탕한 것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음행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음행을 넘어선 것들이 있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일을 저지르거나, 입에 담기도 민망하여 세상 사람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지저분하고 충격적인 일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음행 중에서도 더러운 것에 속합니다. 다른 예를 들어, 시기의 경우에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더러운 행함이 나옵니다. 상대를 시기하는 마음이나, 그로 인해 상대에게 악을 행하는 자체도 이미 불의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투기가 지나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없애려 합니다.

TV 사극 등을 보면, 종종 궁중의 여인들끼리 시기하여 저주를 하거나 주술적인 행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대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화살을 쏘거나, 상대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바늘로 찌르는 등 악한 영의 힘을 빌려서라도 상대를 해치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한 마음과 행함이 도를 지나쳐서 보통 사람들의 양심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이 나오는 것이 바로 더러운 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이에도 서로 이간질 시키는 것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더러운 행동입니까? 거짓말해가면서 이간질 시키는 사람들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에 이간질 시켜 상대를 매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더러운 행동들인지요? 마지막 때가 될수록 세상의 불법과 불의는 더 심해지고 죄악의 전파 속도도 빨라집니다. 수십 년 전, 아니 십여 년 전만 해도 너무 수치스럽게 여겼던 일들을 이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행합니다.

한 번, 두 번, 불의하고 더러운 일들을 점점 접하게 되면, 그렇게 보고 듣는 것이 마치 씨를 뿌린 듯이 마음에 심어집니다. 양심이 무뎌져서 악한 것을 보아도 경계하지 못하고 어느새 자신도 물들어서 따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착하게 자란 평범한 아이들도 나쁜 친구들을 만나 함께하게 되면 악하게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나쁜 친구들이 때리고 욕하고 훔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면서, 아직은 양심에 찔리더라도 친구들을 따라 자기도 악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따라하다 보면, 점차 양심의 가책도 사라집니다.

이제는 자기도 자연스럽게 욕하고 때리고 담대하게 훔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에 거하면서 불의와 불법을 계속 보고 들으니 점점 더 깊은 죄 가운데로 빠져들어 갑니다. 세상 어디서도 깨끗한 곳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2).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도 선한 양심 속에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 4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했습니다.

죄악 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어찌하든 자기를 지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죄를 버려가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신 것이 본문 11절 후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자"는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온전하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말씀을 온전히 이루어 세상과 구별되며,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처럼,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는 그 깊이가 다릅니다. 성결을 이룬 사람들 중에서도 영의 사람과 온 영의 사람의 깊이가 다른 것과 비슷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의로운 차원을 넘어, 진리에 속한 모든 분야를 두루 갖췄을 때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행하면서 깨우치는 만큼 성령의 감동하심 속에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아갑니다.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으면, 말이나 행동이 품위 있고 아름답게 나옵니다. 선에 속한 지식과 주의 교양을 갖추어 말과 행실에서 책잡을 것이 없게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늘의 지혜를 받아서 경우에 맞게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 15-16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니 우리도 선을 좇아가야 되고 우리 주님을 닮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쳐야 되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의로우며 더 나아가 거룩함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이 자기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죄악과 접하기 싫다고 해서 세상과 분리되어 살 수는 없으며, 자신이 원치 않아도 악한 것을 보고 듣기가 쉬우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와 악에 무감각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죄를 지적하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설령 교회에서 죄를 지적한다 하더라도, 성도들이 죄에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 때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결단하여 돌이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무서워서 하나님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죄를 버리지도 못하는 상태로, 교회와 세상의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 죄를 지적받고 마음이 불편해지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죄를 지적하지 않는 교회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요? 이런 세상이니,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고 죄를 지적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해서 떠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받을 백성이라면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교회에서 죄를 지적해도 자기를 지키지 않고 세상에 물드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의하고 더러운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의롭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키려면,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한 대로, 말씀과 기도 속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이 노력과 함께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또 성령님이 도와주셔야 됩니다. 3박자가 맞아 떨어져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야 내가 거룩해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이게 진리인지 비 진리인지 죄인지 악인지 선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뭘 버려야 되는지 뭘 하지 말아야 되는지 뭘 해야 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해서 내가 거룩해질 수 있고 성결 될 수 있고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섰을 때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고, 기도의 힘으로 선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택의 순간에서 불의와 타협하게 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안의 성령이 탄식하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곤고해지므로, 무엇이 문제인가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 불의를 행하는데 곤고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의롭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불의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심히 물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3).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요한계시록 22:17절 후반에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듣는 자란 복음을 듣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만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 2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을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고,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 곧 참으로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된 사람이라야 새 예루살렘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목마른 자가 나오는데 의에 대해, 진리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많이 바뀌었다면, 이 여인의 인생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고달프고 힘든 삶을 인내하며 어찌하든 만족을 찾아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진정으로 충만함과 기쁨을 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곤고했겠으며 얼마나 갈급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처럼,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갈급함을 채우고자 육적인 것을 취하고 또 취해 봅니다. 그러나 육을 아무리 취해도 그 마음에 진정한 해갈은 되지 않습니다. 짠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오히려 육을 취할수록 갈급함은 더해 갑니다. 이럴 때는 육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수를 찾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수이며,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았을 때, 그 마음에 생명수가 채워지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목마름이 해결되고, 희열이 넘쳤을 것입니다. 이처럼 거듭나는 기쁨을 맛본 사람들은 변화된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심히 행해 나갑니다. 그 갈급함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서 부지런히 배우고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 속에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를 공급받게 됩니다. 영생을 사모하며 의에 갈급한 사람은 누구라도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데 많은 교회들이 대표기도 할때를 보면 "이 죄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는 등 죄인 자가 왜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요?

죄를 짓고 사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짓고 사는게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0절에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하였듯 마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라 하신대로 하기 때문에 버리라는 거 버리고 죄와 악을 버리기 때문에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하고 말씀을 늘 듣고 아무리 듣고 안다 해도 내가 마음에 행치 않으면 의로워지지 않으면 마음에 할례하지 않으면 악을 버리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든 레이족이든 장로님들 권사님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할례하지 아니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쭉정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곡이 되어가야지 쭉정이 신앙생활하면 안 될 것입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아직도 간음기가 있고 욕심이 있고 교만하고 악을 가지고 있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도적질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하나님 말씀을 들어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많은 세월만 지금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성령을 보내주신 것도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구원의 길이 열렸고, 주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한 번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조건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아 나도 믿으니까 구원 받았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란 개념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믿습니다" 하면 그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개념을 안다고 하면 그런 말을 못합니다. 물론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근데 믿는다고 하는 게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참 믿음이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안타까운 지금의 현실입니다.

듣고 지식으로만 알고 "믿습니다"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행치 아니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이런 죽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고.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역사는 아무것도 따르지 않지 않습니까? "믿습니다"해서 응답이 오나요? "믿습니다" 하면 응답이 와야 하는 것인데 성경은 분명히 수없이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고 간구한 것은 응답 받은 줄로 믿으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다 주신다, 이렇게 곳곳에 기록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갓난아기가 세상에 태어났는데, 젖도 먹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면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수를 마신 사람이라 해도 더 이상 생명수를 마시지 않고 영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로 인해 고난 당하셨고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제는 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며 죄 가운데 살면, 한번 성령을 받았다 해도 성령이 소멸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생명책에서도 이름이 지워집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그 마음에 희열이 넘치고 감사가 가득하므로 부지런히 죄를 벗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심방합니다. 마음을 다해 예물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의 값을 지불할 수는 없습니다. 혹여 구원에 대해 어떤 값을 지불할 수 있다 해도, 그 값은 어느 정도라고 정할 수가 없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고 세상 모든 보화를 드렸다 해도, 구원의 값을 치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귀한 독생자가 처참한 형벌과 사망을 대신 당해 주셨는데, 무엇으로 그 값을 치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말할 수 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천국을 주신 것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은혜입니다그 은혜를 중심에서 깨닫는 사람이라면,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도 그냥 받고만 있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와 사랑의 향으로 드릴 때 기뻐 받으시고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큰 축복으로 돌려주십니다. 성결의 능력을 더하시고 영혼이 잘되게 하십니다. 심는대로 30, 60, 100배로 갚아주시고 믿고 구하는대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십니다.

요한일서 4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거룩함을 이루어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죄를 많이 버렸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잘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죄를 버리기는 하는데 그 속도가 더디고 억지로 힘들게 싸워 버린다면, 이것도 민망한 일입니다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생의 밑바닥, 가장 깊은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속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 은혜가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서 죄를 버린다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마음인데, 더러운 죄를 버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더구나 그 죄 때문에 질병과 재앙과 온갖 시험 환난을 겪는 것인데, 당장이라도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중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4). 성경 말씀을 더하거나 빼서는 안됨 
이어지는 18-19절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했습니다.

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임의로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신다 했습니다. 또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신다 했습니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가졌다면, 이러한 말씀을 더욱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는 것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부분은 빼거나 희석시켜서 가르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결에 대한 부분입니다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와 악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거룩하라", "성결하라", "죄를 버리라", "육체의 일을 행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런 말씀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은 빼 버리고,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흐린다"는 말씀도 있는데, 이런 말씀도 싹 빼고 가르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도 있는데 성령을 한 번 받으면 무조건 구원받는 것처럼 말합니다. 한번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반드시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영적으로 신랑 되신 주님의 신부입니다. 장차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시면,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서 흠도 점도 없으신 신랑을 맞아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혼인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예복을 갖춰야 하며, 영광스럽고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그에 맞는 거룩한 단장을 해야 합니다.

계시록 22: 14절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했습니다. '두루마기'는 주님의 신부들이 입어야 할 예복을 의미합니다. 예복을 입으면, 자세가 반듯해지고 행실도 평소보다 품위 있게 변합니다. 마음가짐도 달라집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예복, 곧 두루마기는 우리의 행실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기 전에는 두루마기가 검은 색입니다. 온갖 죄악에 찌들어 새까맣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고 나면, 맑은 물로 부지런히 두루마기를 빨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할례하며, 거룩한 행실로 신부단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행실을 가지려면, 먼저 그 마음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결국, 죄악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정결하게 할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그 밖에도, 방언이나 각종 은사를 금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잘못이라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 신약 수없이 부르짖어 기도하라 했는데 부르짖어 꼭 기도해야 되느냐 잠잠히 기도해야지 초신자나 부르짖어 기도하지 초신자가 아닌 사람은 묵상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이 못 들으시느냐 이런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짖어 기도하라면 부르짖어 기도하면 될 터인데 또 방언을 하면 잘못되었다 하는 둥 하나님 말슴들을 이렇게 제하여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나 선지자들이나 제자나 사도 바울이나 부르짖어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고 우리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성경에 있는 것을 제하여 버립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수도 없이 구약 신약에 말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사와 표적을 비롯하여 영의 세계에 대한 말씀들이 자기 지식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그런 부분은 빼고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천국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결코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습니다. 더구나 성경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결정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행했는가, 행하지 않았는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나뉘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결코 사람의 생각 속에 더하거나 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물에 빠져 죽으면 육의 생명을 잃지만, 영혼이 실족할 때는 영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삼가 근신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5).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20절에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마무리 짓는 22장에서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세 차례나 반복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 7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셨고, 12절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말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에 사는 증거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고 또 말씀하고 있는데 속히 오시리라 하면 당연히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말입니다.

죄 짓고 구원 받을 자신이 없는 사람은 두려워서 그 말을 안 받으려고 하겠지만 믿음이 있고 내가 천국갈 수 있다 하는 사람들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처럼 거듭하여 경계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그날과 시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때의 징조에 비춰 보면, 그때가 얼마나 가까운지는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한 2000여 년 전에 비해 끝 날에 더욱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설령 그 때가 넉넉히 남아 있다 할지라도, 각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이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라 해도,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당장이라도 가야 합니다. 언제라도 부르심에 응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죄의 담을 신속히 헐어버리고 죄의 담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라 이 말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주님을 맞을 준비가 덜 된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습니다.

그러나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들을 때 소망이 되고 가슴이 벅찹니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눈물부터 나오고, 그리운 주님께 무슨 말씀부터 드릴까, 어떤 모습으로 안길까 하면서 마음이 설렙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믿음의 선진들은 칼에 목을 베이고 사자 밥이 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해도 영광인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내 믿음 지킬 때 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믿음의 선진들도 칼에 목 베이고 사자 밥이 되면서도 찬양할 수 있었고 기도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고통의 순간이 아니라, 그립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은 순교하는 것도 아니고 살아서 주님을 맞게 된다면 얼마나 더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면서 기쁨으로 화답할 수 있습니다.

그 날을 얼마나 소망하는가에 따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또 내가 얼마나 신부단장이 되었는지를 스스로 측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 속에도 하나님이 은혜, 주님의 은혜가 입혀집니다.

6).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21절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자들은 이미 주님을 믿는 자들과 앞으로 믿을 자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매일의 삶 자체가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속하셨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 날마다 인도받게 하십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심같이 구하는 것마다 응답하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성령의 불 담으로,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범사에 형통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 끝나면 그립던 주님의 품에 안기고 천국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값없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할 것은, 이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주셨을지라도 각자가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은혜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는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말로는 은혜와 감사가 풍성한데 정작 그 마음은 변화가 더디기도 합니다. 감사할 줄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정말로 그 은혜에 감사한다면 그 은혜를 통해 변화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열매를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깊은 진리를 깨우쳤다. 하거나, 나의 근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는 "내가 이러한 사랑을 받았으니 내 생명 다해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고 눈물로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길이 보입니다. 속히 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지켜보면 그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 있기도 하고 더 이상 은혜에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처럼 은혜를 받고 쏟아 버리기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사람이 밧줄을 필사적으로 잡는 것처럼, 그 은혜를 꼭 붙잡아야 합니다. 중심에 새겨서 영적인 열매를 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결단하고 마음을 지키고자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 성결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며 더 많은 열매를 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 성결의 능력뿐 아니라 실한 열매를 맺을 능력도 더하시고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불의에서 떠나고자 노력하던 성도들도 한 번 두 번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각종 예배에 다 나가던 사람이 이제는 간신히 주일과 금요철야만 나가고, 때로는 주일 대예배만 근근이 드립니다. 기도 시간도 한 번 두 번 빠지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아예 쉬어 버리게 됩니다.

충만함이 없으니 구역이나 기관 모임도 빠지게 되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억지로 나간다 해도 이 사람 저 사람과 걸리고 감정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에 속한 일들은 조금씩 줄이고, 반대로 세상을 하나하나 취하기 시작합니다. 충만할 때는 버린 것 같았던 것들을 다시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 빠져들다가 중한 질병이 오거나 큰 시험 환란이 왔을 때, 이때라도 돌이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런 상황에 처하면 회개하여 돌이킬 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도 없습니다세상 방법을 구하기도 하고, 그러다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는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기 부탁드립니다. 날마다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온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존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료제공 : 우림과 둠밈

조직신학 요약 12 - 헌금

① 헌금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처음 나온 새신자들이 당혹스러운 것 중에서 하나가 바로 이 헌금에 대한 것입니다. 헌금함이 돌려지는 것을 보고서 과연 내가 내는 헌금이 어디에 쓰여지고 또 왜 내야하는가에 대해서 한번쯤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렇다면 헌금의 정의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일주일이면 일주일, 한달이면 한달동안, 이모양 저모양으로 돌봐주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또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으로서,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가진 건강, 지혜, 재능 등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전부 그의 것이며 잠시 우리에게 맡겨진 위탁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중 일부 혹은 전부를 다시 그에게 돌려 보내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또한 헌금의 중요한 의미로는 신앙조직의 집단이며 공동체인 교회생활을 하는 교인의 의무입니다. 헌금이 쓰여지는 선교활동이나 구제사업에 동참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헌금생활은 개인생활의 기도와 성경공부 및 믿음에 힘쓰는 것을 기반으로 해야만 온전하게 성취될 수 있습니다.

② 헌금은 왜 드립니까?
헌금을 드리는 가장 기본적 이유는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과 ,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는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 16:2)고 하셨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말 3:10)고 하셨으므로 순종의 의미에서 드리며, 교회의 기능중에 하나인 구제와 봉사를 실천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말고도 교회의 행사와 운영을 위하여서도 헌금은 필요한 것이며 특히 복음전파를 위해서 헌금의 뒷받침은 매우 긴요합니다. 금전은 인격시험의 시금석입니다. 금전에 대한 자세로 그의 인격과 믿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감사하고 헌금할 줄 아는데 따라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하는 교인의 올바른 마음자세는 모든 주어진 선물은 자기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위한 선물인고로 당연히 가난한 형제에게도 분배되기 위하여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과 성령으로 건설하는 것을 권하고 있는 한 교회 내에 말씀의 사역자를 위시하여 개개인에게 직분을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면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헌금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의 유지를 위해서, 또는 국내외 전도를 위하여, 또 가난한 자의 구제를 위하여 규칙있게 계획적으로 헌금하는 행위는 성경에서 분명히 명하고 있는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③ 헌금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각교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모든 신자가 매주일 예배 때마다 공통적으로 드리는 헌금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십일조는 하나님의 구별하신 것으로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헌금입니다. 예를 들면, 수적인 의미로 100만원 소득이 있는 사람은 90만원을 다쓰고 10만원을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100만원 수입 후 10만원을 먼저 드리고 나머지 90만원을 쓰는 것입니다.


가축에도 십일조가 있으며 농작물에도 십일조가 있습니다. 농작물이나 가축의 경우 처음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하에 가장 좋은 부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축복을 분배한다는 형제 사랑의 도리에 근거를 둡니다.


그리고 일반헌금으로는 매주일 낮 예배시간에 모든 신자가 드리는 주일헌금을 들 수 있으며, 하나님께 받은 여러 가지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헌금인 감사헌금이 있습니다. 생일이나 입학, 취직, 승진등의 감사한 일에 대한 헌금을 말합니다.


그 외에도 절기헌금, 특별헌금, 구역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등의 기타헌금이 있습니다.

④ 헌금은 어떻게 내야 합니까?
헌금이란 잘 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에게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잘못 드리면 하나님께 욕되고 사람에게는 징계가 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헌금을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우선헌금은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세무서에 납부하는 것처럼 헌금의 정당한 수납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바치는 것은 헌금이 아닙니다. 사회사업이나 정치자금 같은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정성껏 준비하는 것입니다. 결코 인색한 마음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액면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득(이익)을 얻은대로 그에 비례해서 합당한 헌금을 내야 합니다.


헌금을통하여 즐겁게 자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각자의 형편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손수 수고한 것으로 드려지는 것이 더욱 값지며, 주님 일에 풍족하도록 하는데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⑤ 헌금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헌금은 교회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의무적인 면에서도 꼭 시행해야 하지만 바치는 자에게도 크게 축복이 되므로 이를 시행함이 유익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큰 축복이 됩니다.


고린도후서8:4-6에서는 "이 은혜와 서로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쫓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하는 것이 은혜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신자가 주의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드릴 때 기쁨을 체험케 되며, 또 마음에 있는 악의 뿌리를 제거시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십일조 헌금을 하면 적극적으로는 넘치게 축복을 받게 되고(말 3:10) 소극적으로는 재난이 없어지며(말 3:11), 열방이 인정한 만큼 복을 받게 됨을(말 3:7) 성경에서 증언하십니다.


진실한마음으로 바치는 자는 그들의 자원을 더욱더 넉넉하게 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 이 말씀이 경제 원칙에는 위배될지 모르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지혜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명시해 두고 있습니다.

⑥ 헌금은 어디에 사용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은 여러 가지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헌금은우선 복음사역과 선교사역에 필요한 자금으로 적극 활용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일학교 각 부서 활동비 및 교육비로 조달됩니다.


또한 교역자 및 유급 직원들의 생활비(보수)로 충당됩니다. 말씀의 교역자가 그의 가정의 생활비로 인하여 그 직에 전념할 수 없다면 이것은 결코 교회의 바람직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제비 명목으로,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돕는 부조금으로 사용됩니다. 그 외에도 교회 내부의 각종 관리비, 수리비 및 시설 확충비, 교육관 운영비 등으로도 쓰여집니다.


이것이외에도 교회의 사업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역자 양성기관, 전도사업, 교육사업등 이것이 활발히 실행되어지기 위해서 헌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교회란 돈이 안 드는 교회가 아니라 본래의 교회의 사명을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직신학 요약 12 - 기도생활

①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그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감사하고 또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서 특별히 나와 나의 가정, 그리고 교회와 이웃을 위하여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이 나누는 대화입니다.


옹알이를 하는 귀여운 자식이 물을 달라는 것인지, 기저귀를 갈아달라는 것인지를 알고 사랑으로 그 원하는 것을 해주는 부모의 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물며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간절히 원하는 바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를 아버지께서 어찌 못 들으시겠습니까?


악인도제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할 때 돌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언제나 기도로써 그들의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 주시길 원하십니다. 또한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서 우리의 신앙이 더욱 풍성하게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②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인 기도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것들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추어서 기도의 시작에서 끝마무리로 이어집니다.


우선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성경말씀과 생활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존중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를 사례하되 영적인 은혜와 육적인 것, 개인적인 것이나 단체적인 일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자복(회개)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에 걸리는 죄악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간구를 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자비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구하며, 하루동안의 필요한 것까지도 구합니다.


그리고는다른 이를 위한 기도(중보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 곧, 온세계 모든 인류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교회와 주의 일꾼들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아멘"이라는 말로 끝맺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높이고, 나의 죄를 자백하였다 하더라도 기도의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이름뿐임을 기억해야합니다.

③기도는 언제 합니까?
기도란 독수리가 올라가지 못하는 곳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간디는 런던에 있을 때 회의를 하다가 기도드릴 시간이 되었으므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바닥에 꿇어 앉아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원의 한 위원회 석상에서도 회의를 하다말고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는 아침과 저녁 때 해가 질 무렵 하루에 두 번씩 기도를 하였습니다.


"네가 숨을 쉬지 않고 사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것 같이 기도 없이는 기독신자 됨을 볼 수 없느니라"고 헬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때, 모든 경우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라고 성경말씀에 씌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인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식사전과 잠자리에 들기 전과 아침에 깨었을 때, 또한 어려움이 닥치는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도와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④기도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습니까?
기도에는그 모이는 인원수에 따라서 개인 기도와 공적인 기도(공중 기도)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개인기도는 자신의 생활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모든 일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속상하고 어려운 일들에 부딪혔을 때 집안에서나 조용한 곳에서 홀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는 기도입니다.


주로 신앙생활을 성숙시키는 역할을 하는 기도로서, 소리내서 할 수도 있고, 조용하게 속으로 바라는 바를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공적인기도는 공중 기도라고도 하는데, 예배 중에서와 어떤 모임에서 전체를 대표하여 하는 것으로서 그 예배와 모임과 형편에 따라 기도합니다. 대표자가 기도하는 경우 그 내용을 같이 맘속으로 아멘으로 경청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자가 그 모임의 모든 회중들의 기도를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는 삼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적인 기도중에서 통성기도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가 한 맘으로 소리내어서 한 주제를 놓고서 같이 합심으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이때는 자신의 맘속에서 우러나오는 모든 간구와 소원들을 소리높여서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⑤기도시에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자신이 범죄하고도 그것을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있다면 그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기를 거절할 때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조그만 잘못도 용서해 주지 못한 입으로 어떻게 자신의 커다란 죄를 하나님께는 모두다 용서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기도를 그 자신의 쾌락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인 사욕을 위한 소원과 옳지 못한 것을 바라는 기도는 하지 않음만도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에 대한 자세가 옳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성경말씀에 씌어 있습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심에 확신이 없이 의심을 하면서 기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때 그 기도는 진정으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

조직신학 요약 11 - 예배 생활

① 예배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신앙을 키우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꼭 해야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도 매주마다 빠지지 말고 해야하는 것이 바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대화하고 교제하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배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주시며,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마음에 헌신과 충성을 새롭게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예배에 참석한 우리들은 예배를 통하여 믿음, 소망, 사랑, 이해, 용서, 온유, 겸손 등이 함양되어 우리의 변화된 생활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의 건강을 위해서 하루에 3끼 밥을 먹듯이, 영의 건강을 위해서 매주 예배에 참석하여야 합니다. 어제 밥을 먹었기 때문에 오늘 밥을 안먹어도 된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번 주에 예배를 드렸는데 이번 주에도 왜 꼭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는 옳지 못한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공식예배인 주일예배, 찬양예배, 삼일기도회에 참석함으로써 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②예배의 순서는 어떻게 진행됩니까?
처음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가장 당혹한 순간이 예배의 순서를 제대로 모르거나, 앉고 일어서는 부분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예배의 순서는 각 교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아래와 같은 공통의 순서를 따라 예배를 드립니다.


먼저묵도를 하는 것으로 예배가 시작하며, 이때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예배에 임하는 경건한 자세를 갖도록 합니다. 이어서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다같이 드립니다. 다음으로는 찬양(찬송)을 다같이 부르는데, 대개 일어서서 찬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장로님이나 기도를 맡은 자가 회중을 대표하여서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를 같이 드립니다. 그리고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서 성경봉독을 하는데, 성경을 찾아서 그 구절을 사회자가 봉독하거나, 같이 교독을 합니다.


그리고는 성가대의 찬양이 있는데, 이때는 모든 성도를 대신하여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의 찬양을 조용히 듣습니다. 이후 말씀을 목사님이 전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분명하게 해석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주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마무리 기도가 끝나면, 찬양을 부르면서 헌금을 하는 순서인데, 이때는 미리 준비한 헌금을 정성스럽게 드립니다.


그리고는성도의 교제를 위한 광고의 시간이 있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인 축도를 목사님이 하시면, 공식적인 예배가 끝납니다. 그리고 축도송을 성가대가 부르는 동안 오늘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의 1주일 생활에 대한 간구를 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③ 예배시작하기 전에 준비는 어떻게 합니까?
예배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준비가 중요합니다. 일주일동안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모든 죄들을 모아서 기도로써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또한 일주일동안 굶주렸던 영의 양식인 말씀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시간에는 적어도 10분 전에는 도착하여서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의 예배순서지를 보면서 미리 찬송과 성경봉독할 부분을 찾아서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자신과 설교자와 모든 순서맡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며, 예배당 안에서는 불필요한 언행을 삼가해야 합니다. 반가운 사람을 본다고 해서 큰소리로 인사를 나누거나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행동은 모두 다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교회에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리고드릴 헌금은 미리 깨끗하게 준비하여서 성경책이나 찬송가에 끼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헌금시간에 꼬깃꼬깃한 돈을 주머니나 지갑을 뒤져서 찾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렇듯 예배를 준비하는 모든 마음자세가 경건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④복장이나 외모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우리는 귀한 손님들을 대접할 때나 어려운 어른들을 만나뵙는 자리에 참석할 때, 양복이나 정장을 입음으로써 예를 표합니다. 그리고 결혼식이나 축하할 자리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멋있는 옷으로 입고 갑니다.


하물며 인간들을 만나는 데도 이처럼 예의를 갖추고 복장에 한껏 멋을 부리는 데, 우리를 만드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데에 입고 갈 옷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일주일동안 자기가 평소에는 아껴두었던 옷을 정성스럽게 다리고 깨끗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화려하거나 비싼 옷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차림이 아닙니다. 비록 누추하고 볼품이 없는 것이지만 깨끗하게 손질해서 입고 하나님의 잔치자리에 참석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각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들에 맞는 색깔과 피해야 할 색깔의 옷들이 있으니 그것은 절기를 참고해서 입으면 됩니다.


⑤교회 주보는 어떻게 활용합니까?
교회문 앞에서 안내하는 분들이 주보를 나누어 주는데, 이 주보는 그 날의 예배를 안내하는 순서지입니다. 여기에 예배의 순서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예배시작하기 전에 미리 펴서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오늘의 성경말씀을 찾아서 갈피를 꽂아서 표시를 해두고, 찬송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는 광고나 교회소식들을 읽도록 합니다. 그 란에는 한주간에 교회안에서 있었던 행사나 경소사들이나, 또 자치회 모임들이 안내되어 있습니다. 교회생활에 빨리 익숙해지고 교인들과 친교를 나누고자 한다면 이 광고를 주의깊게 살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주의 말씀이나 성경공부의 란은 집에서 매일 매일 성경을 직접 찾아가면서 묵상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하루라도 말씀을 거르지 않고 읽어가는 일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렇듯 주보를 잘 활용하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주보를 그냥 버리고 오거나, 낙서나 다른 용도로 써서는 안될 것입니다.

조직신학 요약 10 - 종말에 대하여

① 재림은 성경의 어느 곳에 나옵니까?
예수를 믿는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나 공통적으로 사후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기에 죽음이라는 주제는 늘 조심스러우면서도 예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후의 부분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상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종말의 날에 임하실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재림(SecondComing)이란 말은 이 시대의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위해 처소를 준비하러 갔다가 그들을 그와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시 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재림에 관해 전파한 최초의 사람은 아담의 7대손이 에녹이었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 1:14)


신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말씀은 그의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신약 27권의 거의 모든 저자들은 재림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해서 신약의 216장 중 318개의 절에 걸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매 25절마다 한 번씩 나오는 셈으로 성경의 5분의 1이 예언이고 그중 3분의 1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며 신약성경의 20분의 1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양의 성경구절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②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의 곳곳에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였는데,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크게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주장이 사실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 예수께서는 이처럼 그가 지상에 다시 오실 것을 여러 번 하신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들을 하늘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자란 구약의 성도를 포함한 오늘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무덤에 누운 이미 죽은 자들도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사악한 통치자들을 멸하시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때 지상의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모든 자들은 사단과 함께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되며, 자신의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③그리스도께서는 어떤 모습으로 재림하십니까?
과연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떠한 모양일까요? 예수께서는 처음 베들레헴의 허름한 말구유에 누우신 연약한 모습의 인간으로 오실까요? 아니면 지금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처럼 영으로 임하실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성경구절이 답변을 해 줍니다.


"이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9-11)


성경은 또한, 하늘 구름이 그의 마차가 될 것이며, 천사들이 그의 호위자가 되고, 천사장은 그의 전령이 되며,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의 영광스러운 수행자들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로 오셔서,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원수들을 그의 발 아래에 두실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임하심에는 세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의 형태는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유대나라 말구유에 오셨던 예수입니다. 둘째는 영으로 오심이요, 셋째는 영과 육이 합쳐진 완전한 인격으로 오심입니다.


처음에 육체로 오셨던 그리스도가 이제는 영으로 와 계십니다. 다시 말해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로 오신 것도 불완전한 것이요. 영으로 오신 것도 불완전한 것이기에 영과 육이 합쳐진 완전한 인격이 필요합니다. 완전한 인격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가지시게 될 인격체로서 그것만이 완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완전한 인격체로 다시 오시는 것, 그것이 재림입니다.

④종말 때에 어떤 자들이 상을 받게 됩니까?
예수께서는 성경말씀 곳곳에 다음과 같이 할 때에 상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을 위하여 지극히 적은 일이라도 선을 베품으로 의를 뿌렸을 때입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 11:18)


둘째, 우리가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자를 도와 주었을 때입니다.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눅 14:14)


셋째, 우리가 열심으로 은밀하게 기도하였을 때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데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넷째, 우리가 어떤 한 그리스도인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주었을 때입니다. "누구든니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리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14)


다섯째,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되었을 때입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2-23)


여섯째,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을 때입니다. "모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룻2:11-12)


일곱째,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잘 돌보았을 때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로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요2 1:8)

⑤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희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 3:13)


우리는 주님께서 불현듯 오실 것을 늘 명심하고 지내야 합니다. 그러한 의식은 우리를 순수하고 거룩한 삶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날은 도적같이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빈집에 도둑이 들어올 때 미리 '내가 오늘 너희 집을 털겠다'고 예고를 하고 오지 않습니다. 불쑥 아무때든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임하시는 재림의 날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날에 불현듯 임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베드로전서 4:7) 우리는 열심으로 예수를 믿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날이 임할 때 주님 앞에서 잘했다 칭찬받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전 15:58)

조직신학 요약 9 - 성례에 대하여

성례에 대하여

1.성례란 무엇입니까?
2.세례식이란 무엇입니까?
3.세례의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4.성찬식이란 무엇입니까?
5.학습세례란 무엇입니까?

①성례란 무엇입니까?
기독교에는 두 가지 대 예전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성례"(Ordinances)라고 합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을 말합니다. 이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귀중한 방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용서와 생명의 구원을 인간들에게 주시고 확증하시려는 방편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많은 율법적 규례들을 주셨는데 그 중에서 이 두가지 규례를 성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오직 우리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의식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을 통해 그의 백성을 하나로 묶기를 의도하셨습니다.

그런 만큼 이 성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소중하면서도 거룩한 의식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②세례식이란 무엇입니까?
세례는 기독교 성례전의 하나로서, 입교하려는 사람들에게 물을 사용하여 베풀어 씻는 예식입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친히 세례를 베푸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도 세례가 베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기독교 초기부터 중요한 교회의식의 하나로서 존재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전통적인 세례가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례를 줄 수 잇지만, 질서와 공중의 덕을 위하여 교직자(목사)가 없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목사나 그 밖의 교직자가 세례를 베푸는 것이 보통입니다.

세례에 사용하는 물은 보통 물이기는 하나, 다른 한편 단순한 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포함된 물 곧 그의 말씀과 연결된 물이므로 특별한 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의미의 성례인 세례를 받아야만 교인의 자격이 주어지며, 세례는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그의 인생을 시작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태어나 제2의 생을 출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는 아주 귀중한 경험입니다.

③세례의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세례라는 원래 말 뜻은 "씻는다"는 말 가운데 내포되어 있습니다. 죄를 씻어 거듭난다는 뜻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례의 힘은 결코 물을 적용하는 어떤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례의 내용에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인지하면서 세례의 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의 형식은 대개 침례와 산수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을 뿌림으로 행하는 세례를 산수례라고 하며 몸을 물에 잠금으로 행하는 세례를 침례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물을 붓거나 물로 씻는 세례가 있으나 오늘날 그렇게 행해지지는 않습니다. 보통 일반 기독교에서 행하는 세례는 산수례이며, 침례교에서 행하여지는 세례는 침례입니다.

그러나, 세례에는 어떤 형식이나 사용할 수 있으며 반드시 어느 일정한 형식만이 참된 세례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면 모두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의 중요성이 그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죄의 용서를 받게 되고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된 그 능력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④성찬식이란 무엇입니까?
성찬의 성례는 세례의 성례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여 주셨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고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6-28)

성찬식은 성단의 성례, 주의 만찬, 주님의 식탁, 성례,떡을 뗌, 성만찬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집니다. 성찬에서 사용되는 것은 가루로 만든 떡과 포도 열매로 만든 발효시킨 포도주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것자체가 지닌 의미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서 하늘의 선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것으로 성찬에 참가하여 포도주와 떡을 들 때마다 주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공급받고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갖난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듯이 하나님나라에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늘나라의 양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⑤학습세례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려면 학습과 세례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럴려면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 학습교인은 13세 이상되는 원입교인으로 학습 문답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지망하고 배우는 교인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배워야 합니다.

학습교인은 준교인이기 때문에 교인의 생활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온 학습교인은 예배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고 연구하며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하며 교회의 사업과 선교사업을 위하여서 헌금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세속주의의 생활을 버리고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개인적으로 가족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학습교인으로서 6개월 이상 잘 한 다음에는 세례문답을 하고 완전한 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학습교인이 된 사람은 세례교인, 즉 입교인이 되어서 일생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하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세례교인은 학습교인으로서 6개월 이상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잘 한 다음 당회에서 문답을 받습니다. 당회에서 그를 입교인으로서 가합하게 여기면 교회에서 신앙고백과 서약을 한 다음 당회장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완전한 입교인이 됩니다. 입교인이 되면 성찬에 참석하게 됩니다.

입교인은 완전한 교인으로서 교회의 전체회인 공동의회 회원이 되어서 교회의 일을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교인은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개인적으로 가족적으로 철저히 해야 합니다.

세례교인은일생 동안 교인으로서 교회의 모든 일을 잘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인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인은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의 일에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의 에배에 잘 참석할 것은 물론 교회의 사업과 선교사업을 위하여 헌신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거짓말은 다 드러나게 돼있습니다

6년 전 프랑스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한 여인의 거짓말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거짓말로 인해 내무장관은 비난 성명을 발표했고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며 시내에는 사람들이 규탄 시위까지 벌였습니다. 그리고 ‘반유대주의’ 파문이 순식간에 유럽 전 지역으로 불을 붙였습니다.

거짓말 사태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프랑스 여인인 르블랑은 경찰서를 찾아가 전철 안에서 아랍인과 흑인 청소년 6명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했습니다. 자신을 유태인으로 착각한 청소년들이 자신의 옷을 찢고 또 머리카락을 잘라냈으며 심지어 자신의 배 위에 나치즘을 의미하는 卍자를 새겼다고까지 이야기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악당들은 자신의 13개월 된 딸이 타고 있는 유모차까지 뒤집었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주장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프랑스는 완전히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우선 폭행을 당했다는 장소가 은밀한 뒷골목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랑하는 파리와 근교를 오가는 고속전철 안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태인으로 오인 받아 폭행당했다”는 말은 사태의 심각성을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반유대주의’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틈만 나면 ‘반유대주의’ 행위에 대해 엄중 대처하겠다고 발표한 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여인과 아이가 폭행당하고 있을 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를 저지하지 않고 방관만 했다는 사실이 프랑스 국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습니다.

프랑스 정부와 언론과 프랑스 국민들이 그토록 난리를 치고 나서 이틀 만에야 이 여인의 주장은 모두 거짓말로 밝혀졌습니다. 이 여인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증인이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고 또 기차역의 폐쇄회로 TV 녹화 테이프에서도 그녀가 말한 용의자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경찰은 이 여인의 주장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은 이 여인을 추궁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 여인은 모든 것이 자신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자백했습니다. 한 여인의 거짓말에 프랑스 대통령과 온 국민이 놀아났고 또 프랑스 뿐 만 아니라 유럽전역에까지 ‘반유대주의’ 파문이 확산되었습니다.

지난 달 미국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은 또 한 여인의 거짓말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거짓말로 인해 미국 언론은 서로 취재경쟁을 하며 난리가 났고 시민들은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분개했고 특히 여자들은 이제 무서워서 거리를 나다니지도 못하겠다고 했고 전 세계로는 ‘인종차별’ 논쟁까지도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거짓말 사건 전모는 이러했습니다. 8 30일 저녁 미국 워싱턴 주 밴쿠버에 사는 베서니 스토로(28) 여성이 저녁 커피 전문점을 향해 길을 걷고 있는데 한 20대 흑인 여성이 다가와 “너 정말 예쁘다. 이것 좀 마셔볼래?” 라고 말하며 갑자기 염산이 든 컵을 자신에게 던졌다고 했습니다. 얼굴 전체에 염산을 뒤집어 쓴 그녀는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을 듣고 달려 온 시민들의 도움으로 곧장 병원에 실려 갔지만 깨끗했던 피부가 다 망가지는 끔찍한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고 당시 선글라스를 쓴 덕분에 실명은 면했지만 눈과 입 주위에 큰 화상을 입고 대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스토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을 느꼈다. 나에게 염산을 던진 사람의 눈에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질투가 가득했다.”라면서 “내게 왜 그랬는지 진짜 이유를 꼭 알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사연이 알려지자 격려의 메시지와 함께 성금까지 미국 전역에서 쇄도했습니다. 스토로는 "반드시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즉시 경찰은 스토로의 진술에 따른 몽타주를 작성하고 범인 검거에 나섰고 언론은 매일 대서특필했고 스토로는 여러 미디어에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보여주면서 “자신은 이 어려움을 극복할 것이다”라고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과 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언론에서는 흑인이 대통령이 되는 이때에 아직도 인종차별이 남아 있는가 하는 논란까지도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흘 만에 미국 다른 지역에서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어떤 여인이 물같이 보이는 것을 뿌리고 달아났는데 그것에 의해서 얼굴과 가슴에 2도 화상을 입는 염산테러가 발생하는 모방범죄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9 16일 스토로가 행한 모든 것이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는 충격적인 언론보도가 나왔습니다. 경찰은 이 여인의 진실에 일관성이 없고 또 거리에서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시민도 나타나지 않았고 또 염산을 뿌렸다는 흑인 여성에 대한 진술도 오락가락한 것을 보고 이 여인의 집을 수색하며 추궁을 했습니다. 그러자 스토로는 “화상은 자해에 따른 것”으로 모든 것은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고 경찰에 자백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온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거짓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뱀이 하와에게 던진 거짓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7)” 그러나 뱀은 하와에게 그것을 먹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내뱉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 그 거짓말에 그만 하와와 아담은 놀아났고, 또 그 거짓말로 인해 오늘날까지 이 세상은 죄악의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은 죽었다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신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아닌 자신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렇게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그 거짓말에 사람들은 놀아나고 있으며, 또 그 거짓말이 진리인 양 믿으며 그렇게 이 세상을 헛되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돼있습니다. 프랑스 전역을 뒤집어 놓았던 한 여인의 거짓말이 그러했듯이, 미국 전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한 여인의 거짓말이 그러했듯이, 이 세상에 떠도는 모든 거짓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온 천하에 거짓으로 백일하에 다 드러날 것입니다.“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101:7)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