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2010

일어나 예비하라


“여호와께서...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12).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하고 믿음으로 일어나 싸우기로 결단한 사람들을 사탄이 가장 질투하고 두려워합니다. 적은 숫자일지라도 믿음으로 허리를 동이고 싸움에 임하는 군대를 두려워합니다. 두발로 서서 대적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앞에서 움츠러듭니다. 그리고 당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당신의 사기를 중화시켜 떨어뜨리려고 책략을 꾸밉니다.

마귀가 쓰는 방법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불신과 의문을 불러일으키도록, 패배의식이 들고, 좌절하게 만들고 마음을 분산시키는 지옥의 생각들을 당신 마음속에 밀려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과 영에 대고 그는 소리칩니다. “더 이상 싸워봤자 아무 소용없다. 네 개인의 문제로 투쟁하느라 너는 너무 지쳐있다. 너는 결코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지옥의 권세는 너무 커서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쉬는 게 좋을 것이다. 더 이상 전쟁에 열심 낼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정신을 분산시키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당신이 십자가의 승리로부터 눈을 떼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자신의 약점, , 부족한 점에 시선을 집중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신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와 고통에 더욱 불을 지릅니다. 당신이 계속 지탱해 나갈 만큼 강하지 않다고 믿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힘이 중요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죽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 우리 모두는 전투 중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 고요하고 일시적으로 유예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영적 전투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님이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만큼 강한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탄이 견뎌내지 못할 무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 기도, 금식과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현재 고통으로부터 눈을 떼 내어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의 시련으로부터 눈을 들어 이 전쟁의 대장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승리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무기를 너에게 공급해주었다. 그리고 네가 연약할 때 힘을 부어 주기위해 준비되어 있다.

< David Wilkerson>

십자가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경비행기가 비행을 하다가 야산 중턱에서 어떤 물체와 부딪혀 마을로 추락을 하면서 폭발하는 바람에 옆에 있던 건물 안의 사람들까지 많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난 산 중턱에는 미국 감리교 훈련센터가 있고 그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 경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등대역할을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조종사는 십자가의 불빛을 보고 고도를 조정하여 산에 부딪히지 않도록 비행을 했다고 합니다.

사건을 조사하던 AP통신의 기자가 이렇게 타전을 했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바로 야산 중턱에 있던 철탑 십자가였습니다. 사고가 나던 날 밤 그 십자가는 불이 꺼져 있었고 비행기는 그 십자가에 부딪혔습니다'. 불 꺼진 십자가는 무익합니다. 즉 십자가 없는 승리, 십자가 없는 축복, 십자가 없는 행복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신앙으로 회복 되어져야 합니다.

기업은 안전성이나 신뢰성과 같은 이미지를 대중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로고를 활용합니다. 로고는 기업이나 단체에 대해 많은 것을 뜻하는데, 최소한 사람들이 어떻게 봐 주었으면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기독교 상징주의의 발달을 연구해 보면, 기독교의 상징은 초기부터 십자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좀더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선택하지 않았을까? 십자가는 언제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고린도전서 1 23> 많은 사람이 그 어리석은 십자가를 내세우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훨씬 더 호의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합니다. 그들은 죽음과 고통을 연상케 하는 불쾌한 이미지를 지우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지성적이고 세련된 사람들의 감수성을 불쾌하게 하는 야만적인 개념이라고 합니다.

헬라인들이 꿈꾸는 메시아 상은 플라톤보다 위대한 철학자였습니다. 우주의 질서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해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련된 신앙을 뒤집고 십자가에서 죽는 메시아라면? 그런 메시아는 헬라인들에게 정말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리석은 십자가를 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열매를 거둡니다. 십자가를 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솔제니친은 구 소련 작가로 체제를 비방하는 반역자로 수용소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고생을 하다가 서방으로 망명한 사람입니다. 솔제니친의 감옥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그는 특별 범죄자로 구분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통으로 인해 정신력과 신념이 모두 탈진했을 때 솔제니친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바닥에 십자가를 그어주며 그것을 바라보라고 한 후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제니친이 그 십자가를 한참 주목했다고 합니다. 그는 십자가를 아는 지식인이었고 러시아에서 이미 성경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솔제니친은 그 사나이가 바닥에 그어준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에 알지 못하는 힘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십자가가 그에게 참 자유와 능력이 되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고통에 처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붙잡고 그 앞에 나아가는 믿음, 그 십자가로 인하여 능력이 되는 믿음을 힘입기를 바랍니다.

1219
년에 덴마크의 왈뎀카 왕은 군대를 이끌고 적군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이길지 질지 모르는 불안한 가운데 왕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전쟁을 하나님께 맡깁니다.'그런데 갑자기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 보였습니다. 왕은 그 십자가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싸운 결과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부터는 전쟁 때마다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를 그린 국기를 만들어 앞세우고 나가 승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질병과 싸워 이겨서 건강한 삶을 살고, 가난, 저주와 싸워 이겨서 풍족한 삶을 살고, 죄악과 싸워 이겨서 의로운 삶을 살고, 모든 시험, 유혹과 싸워 이겨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하도록 역사 하십니다.

십자가에는 잃어버리면 안 되는 십자가 고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가 현실적 종교임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십자가가 고통과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인생의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 죽어 가는 세상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에 대해 일깨웁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감춰진 영광입니다. 이 어둔 세상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는 항상 슬픔과 눈물로 얼룩진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없어질 것이고, 우리에겐 영생의 소망만 남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말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 21~22>

예수님께서 가졌던 인성의 특징은 무엇이었나?


1.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사이를 가로막는 죄를 짓지 않으셨다.

2.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성령을 통해서만 일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인성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우리는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얻은 죄인들이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와 영향력을 성공적으로 깨뜨리셨다. 이제는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아버지로부터 가로막지 못한다.

2. 단 한 가지 해결되지 않은 무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성령을 의지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가이다.

신분의 대혁명


이제 우리의 비전을 혁신해야만 할 시점에 왔다.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당신의 비전은 너무도 작습니다라고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가장 좋은 해결책은 우리가 기대하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10명의 새 신자를 기대하고 있다면 자, 이제 그 수를 100명으로 늘리자.

이러한 반응은 이 말의 참뜻을 놓치게 만든다. 수를 늘리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더 큰 비전을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비전은 우리가 누군가, 그리고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우리 신분에 대한 혁명적인 인식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분에 대한 혁명적인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 자신의 신분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비극은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신학자들이 범하는 실수는 예언서에 담겨진 모든 좋은 것들을 천년 왕국이라고 하는 비밀한 카펫 밑에 모조리 쓸어 넣은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 지금 당장 논쟁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용기와 믿음과 행동을 요구하는 이 모든 것을 다른 시기로 연기시키는 경향성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은 이것이다. 좋은 것은 현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학의 기초에는 앞으로 교회의 상황은 계속 점점 더 나빠질 것이고 따라서 교회의 비극은 말세가 되었다고 하는 또 하나의 지표라는 생각이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인식으로 교회가 약해지는 것이 곧 교회가 올바른 길에 서 있다는 확신을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었다.

세상과 교회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표시인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사고에 내포된 많은 문제점들을 지적할 수 있지만 지금 언급하고 싶은 한 가지는 여기에는 아무런 믿음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관점과 반대되는 것은 모두 마귀적이라고 하는 불신앙 속에 우리는 갇혀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교회가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란 생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다.  이는 왜 우리가 소수일 수밖에 없음을 변명해 주는 것처럼 보이며 어쩌면 가까스로 변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런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 믿음 체계를 붙잡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에 위배된다. 에베소서320절 말씀처럼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계획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 “(예수살렘이)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졌도다)”(1:9).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결과는 우리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하나님의 귀히 여기시는 존재라는 생각보다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해 더욱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우리들의 무능력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두려워 떠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 부르시고 자주 넘어지는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부르셨던 동일하신 그분께서 우리를 이 땅위에 있는 사랑하는 아들의 몸이라고 불러주셨다.

다윗의 열쇠


구원의 복음은 사람의 영과 혼과 육체 모두를 다루게 된다. 존 레이크(John G. Lake)는 이것을 삼중 구원(Triune Salvation) 이라 불렀다. (evil)이란 단어를 연구해보면 하나님께서 뜻하신 구원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분명히 연구해보면 하나님께서 뜻하신 구원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613, “악에서 구하옵소서에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이란 말은 인류에게 내려진 모든 죄의 저주를 일컫는다. 악에 대한 헬라어 단어인 포너로스(Poneros)는 고통을 뜻하는 포노스(ponos)란 말에서부터 나왔다.

또한 이 단어는 빈곤하다는 뜻하는 페네스(penes)에서 파생한 단어이기도 하다. 이것을 종합하면 악-, 고통-질병, 빈곤-가난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구원 역사를 통해 죄와 질병과 가난의 권세를 파하셨다. 최초에 아담과 하와가 지구를 정복하도록 부름 받았을 때 그들에게는 질병과 가난과 죄가 없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대로 회복될진대 어찌 이보다 못한 것을 기대해야만 되겠는가? 궁극적으로 이것을 더 나은 언약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우리에게는 천국 열쇠가 주어졌다(16:19을보라). 천국 열쇠 가운데 한 부분은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이다(10:19참조). 요한계시록과 이사야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윗의 열쇠(22:22; 계3:7)는 이러한 원리를 독특하게 적용한 구절이다.

엉거스의 성경 사전(Ungers’ Bible Dictionary)을 보면 이 열쇠의 능력은 왕실의 보물 창고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 권한에만 국한되지 않고 과연 왕이 제공하는 그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이 허락된 사람이 누군가를 결정짓는 권한이기도 하다”(p.629)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의 모든 소유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것이 된다. 그분의 보물 창고에 있는 모든 소유는 그리스도를 통해 유리 것이 된다. 그분의 보물 창고에 있는 모든 자원은 그분의 부르심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마음껏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관연 구가 왕을 뵈러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느냐를 결정하는 권한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과 관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복음을 선포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구원받기 위해 왕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할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구원받기 위해 왕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입을 다물고 있다면 듣지 못한 그 사람들이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선택한 것이 된다.

정말 정신이 번쩍 나는 말이 아닌가! 이 열쇠는 주께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고 우리가 사용할 값비싼 열쇠이다. 그러나 만일 이 열쇠를 땅에 묻어 두고 장차 오실 왕을 위해 이익을 남기지 않는다면 그 대가는 더욱 클 것이다. 분명히 그 대가는 영원이라는 시간을 두고 치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