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2011

"세상에 무릎꿇지 말라" - A.W 토저,


“오직 예수님과 비교해 자신의 영성을 살펴야 한다. 자신을 세상과 비교하면 루시퍼처럼 교만해지지만 예수님과 비교하면 모세처럼 온유하고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군사로 세상을 ‘놀이터’가 아닌 ‘전쟁터’로 여기며 가증한 세대를 향해 탄식하고 울어야 한다.”


잠든 심령을 깨우는 ‘외치는 선지자’ 에이든 윌슨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는 최근 출간된 ‘세상에 무릎 꿇지 말라’에서 세상의 가치관에 굴복하지 말고 참된 믿음을 회복하라고 통렬하게 촉구한다. 


토저는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 중 한 명으로,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비판하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이 시대의 예언자라는 평을 받았다.


토저는 책에서 신앙의 본질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 한다. 그는 ‘종교적 언어 게임’을 경계하라고 역설한다. 
‘종교적 언어 게임’이란 성경을 읽으면 자동적으로 삶에 적용된다는 생각이다. 토저의 주장에 따르면 과거에는 강력하고 생명력 있는 언어가 많았지만 현대는 그 말의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습니다”란 문장에서 ‘영접하다’엔 생명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말’이란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은 말은 기독교의 핵심을 파괴한다. 그는 “말을 주문처럼 사용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며 “이런 미신적인 태도를 버릴 때 비로소 주께서 진리의 갑옷을 입혀주신다”고 말한다. 


“성령께서 말에 의미와 능력을 실어 주실 때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성령의 활동이 없는 말은 아무 효과가 없다. 교리문답과 복음을 줄줄 외워도 거듭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능력이 말에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은 복음의 껍질이다.” 


반면 그는 ‘정결케하다’ ‘내적조명’ ‘자기부정’ ‘자기희생’ ‘경배’ 등은 현대 그리스도인을 위해 살아 있는 말이라며 깊이 묵상할 것을 제안했다. 토저는 세상을 멀리한다고 해서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세상문화 속에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영성의 샘은 밖으로 흐르기 때문에 오염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것이 영성의 샘을 오염시키려 한다 할지라도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가는 영성이 그것을 깨끗하게 만든다.” 


인간에게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믿고 거짓 평안을 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안을 느끼고 열심히 기도해서 참된 평안을 얻는 것이다. 현대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믿으며 거짓 평안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토저는 성경 말씀에 의해 깨어지고 위로받을 때 진정한 평안을 얻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리에게 주시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으신 것은 주시지 않는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했는지 알기 위해 성경을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절제와 자기부정과 희생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적인 그리스도를 아기에 비유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아기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해 이유 없이 풀이 죽어 있기도 하고, 이유 없이 즐거워하기도 한다. 또 이 교회 저 교회를 쫓아다니기 바빠서 조용한 곳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삶에 진지한 목적이 없다. 또 그들은 모든 것을 놀이의 대상으로 여긴다. 사경회를 종교적 놀이터로 만들어 광고하고, 성경공부에 사람을 모으기 위해 재미라는 포장지를 사용한다. 직업을 잃게 될 때 자신의 무능이나 부적격을 탓하지 않고 상사에게 책임을 돌린다. 


또 부드럽고 위로가 되는 성경구절에는 주목하지만 마음을 찌르고 의기소침하게 하고 징계하고 책망하는 구절들을 건너뛴다.


이와같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기와 같은 특징이 있다. 그러나 아기는 나이를 먹으면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지만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간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아울러 토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삶을 맡기라고 한다. 골리앗에 비해 힘과 체구에서 열세인 다윗을 싸움에서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승리에 대해 어디서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토저는 “다윗이 자신이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두셨다는 것을 잘 알았듯이 우리도 주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무익한 종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깨우쳐준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의 저수지를 주지 않으신다. 그렇게 될 때 그곳에 물이 고여 썩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지혜의 말씀 능력을 주시지 않고 그들 안에서 능력이 되시며 그들 안에서 지혜의 말씀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일하신다. 그들이 일하는 것이 아니다.”

곡식속의 가라지- 릭조이너

근래에 교회에 예언사역이 유례없이 세워지고 있는 것과 동시에 많은 거짓 예언자들도 떠돌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님께서 좋은 씨를 뿌리실 때마다 원수가 그 밭에 가라지를 뿌리려고 할 것이라고 주님 자신이 경고하셨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24:11)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주님께서 가라지를 두신 뜻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주님께서 그의 밭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도록 두신 목적 중의 하나는 가라지에 대처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우리가 마지막 때의 대결에 대비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신다. 그 분은 처음 유다를 택했을 때부터 그가 배반자임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또한 유다가 도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돈주머니를 맡기셨다. 분명히 거기에는 돈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장 돈을 훔칠 법한 이에게 일부러 돈을 맡기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바로 가까운 주위에 마귀와 대적하도록 만드는 사람들과 상황들이 들어오도록 허락하셨다. 이를 통한 훈련이야말로 지속적인 일치나 물질을 안전히 지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주님의 주 전략 중 하나는 그들의 진영밖에서 뿐 아니라 안에서 원수를 대적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추수 때 즉 그것이 성숙해지기까지는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라지는 실제로 곡식과 꼭 같이 생겼다. 하지만 곡식은 우리에게 양분을 주지만 가라지는 몸에 해롭다. 다행히도 익은 곡식은 고개를 숙이지만 가라지는 계속해서 꼿꼿이 서있다. 성숙해감에 따라 진정한 하나님의 은사는 사람을 갈수록 더 겸손하게 만든다.

거짓 은사는 사람을 더욱더 교만하게 한다. 추수 때가 되기 전까지는, 참되나 성숙하지 못한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익하다. 심지어 가장 위대한 선지자중의 하나인 사무엘 마저도 마음보다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려했었다.(삼16)

고난과 시련은 우리가 이 멍에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더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질 때가 많다. 우리는 때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시련이 필요하다. 갈등은 우리가 방향을 잃어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목적지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논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사역을 정화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논란은 모든 진리와 사역의 회복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오류와 극단주의를 바로 잡을 수 있게 한다. 또한 논란은 자기의 이기적인 야망을 위해 새로운 운동을 좇으려는 이들을 가려낸다.

사탄의 사랑함정

사탄의 사랑함정
마귀의 세계 통합 교회가 마침내 그 메시지를 온 지구상에 큰 소리로 퍼뜨릴 때에, 셀 수 없이 많은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은 속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판단할 것입니다. "세계 교회 통합"은 좋은 일 일거야. 여기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관해 얼마나 많이 이야기하는지 몰라. 이렇게 예수님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정통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이들이 틀림없어."

이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습니다. 사탄의 그 마귀적인 연합의 바로 진짜 주문은 "예수, 예수, 예수" 일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벌써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모든 단체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지? 어쨌든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쟎아. 회교도들도 예수님을 선한 인간이자 위대한 선생으로 생각하고. 시크교도들과 힌두교도들도 예수님을 존경해."

이쯤에서 잠깐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9.11과 같은 국가의 재난으로 인한 국가적인 일치단결에 대해 저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믿음을 가진 미국인들이 일치단결한 국가로서 함께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이러한 연합이 우리의 슬픔이 다 가라앉은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종교간 통합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견하고 있는 이것은 예수님의 예언가운데 있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태복음 7:22).

거의 모든 종교들은 축사(귀신을 내어쫓음)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데 큰 성과를 이루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들 중 많은 수는 축사, 가르침, 선행 등을 다른 예수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적하셨듯이, 이런 사람들은 심판 때에 주장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당신의 이름으로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복음 7:23).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모르노라. 그리고 너희들도 나를 모르는 것이 분명하도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라, 그럼에도 너희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단지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전했도다. 너희들은 나의 복음의 능력을 제거하려고 했느니라. 너희들이 말하는 예수는 틀린 예수니라. 이제, 내게서 떠나가라. 너희들은 나의 왕국에서 조금도 분깃이 없노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1:3). 이 절에서진실함과 깨끗함(simplicity)’의 헬라어 단어는 단일성(singleness), 유일함, 독점적임(exclusiveness)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그리스도는 복잡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는 매우 단순하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신성을 가지시고,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이 단일하고 유일한 진리에서 떠나 부패하게 될까 걱정스럽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린도후서 11:3).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리고 다른 예수를 전파하는 목사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린도후서11:4).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구나. 너희는 너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에 관해 듣고 있구나. 그래서 나는 너희가 진정한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예수로 인해 타락하게 될까봐 두렵구나."

"너희는 모르고 있지만, 너희는 그리스도의 신성에서부터 벗어나게 꾀임을 받고 있구나. 너희가 어떻게 그 사실을 용납하는지 나는 믿을 수가 없구나. 너희는 너희를 타락시키는 이 거짓 선생들을 잘도 참아주는구나. 너희는 심지어 그들이 말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지도 않는구나. 바로 지금, 너희는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너희는 귀신의 복음 아래 앉아 다른 예수를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그 다른 예수, 귀신의 복음이 어디로 너희를 꾀어 가는 지도 모르고 있구나." 

헌신의 그릇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헌신의 그릇으로 옮겨 놓습니다. 이 그릇은 넓은 장독 뚜껑같이 생겼으므로 그 안에 담긴 포도주가 다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오해의 그릇과 연단의 그릇을 지나오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만민이 다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놓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가를 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힘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권세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죄에는 마음 속으로 짓는 죄와 법적으로 짓는 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는 법적으로 지은 죄이고 따먹기 전에 먼저 마음 속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선악과라는 생각을 한 것은 마음으로 지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을 때 법적인 죄뿐만 아니라 마음 속의 죄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버림을 받아 지옥에 가야 될 우리들이 예수님 십자가 밑에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불로 모든 탐욕, 우상 숭배를 태워 마음 속의 죄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모든 마음 속의 죄,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성령의 불로써 태워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권능을 힘입음으로써 우리가 만민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사, 장로, 권사, 목사로서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며 세상에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얌전하고 점잖은 척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마음 속의 죄를 씻지 못하고 표리가 부동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인위적인 신앙 생활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우리 자신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봉사를 필요로 하고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서 모범을 찾으려고 가까이 와서 바라보거든 자신의 의지와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온전히 성령님만 의지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이 진정한 헌신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