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3/2010

케이프타운 서약, 로잔정신에의 헌신 강조

서문과 제1부 전문 공개… 신앙고백도 포함
▲이번 제3차 로잔대회 문서인 ‘케이프타운 서약’의 초안 작성자인 영국의 크리스 라이트(Wright) 박사. ⓒ로잔운동
지난 17일부터 24일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차 로잔대회에서 도출된 ‘케이프타운 서약(The Cape Town Commitment)’의 서문과 제1부가 로잔운동 사이트를 통해 공개됐다. 문서의 나머지 부분인 제2부는 대회 기간 현장과 온라인에서 논의에 참여한 복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작업을 거쳐 11월 말 발표될 예정이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신앙의 선언과 행동에의 요청(A Declaration of Belief and a Call to Action)’이란 부제로 발표됐다. 부제가 말해주듯 이 서약은 제1부에서 로잔운동의 신앙 고백을 정리하고, 제2부에서는 이같은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세계 복음화 사역에 있어 고려되어야 할 구체적인 문제들과 이에 대한 교회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전체적인 구조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서문을 통해서는 1974년 제1차 대회의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과 1989년 제2차 대회의 ‘마닐라 선언문(The Manila Manifesto)’으로 정리되어 있는 로잔정신에 대한 변함 없는 지지와 세계 복음화에 대한 헌신을 재선언하고 있다.
서문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헌신과 이를 위한 로잔운동에의 헌신”을 약속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첫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증거하는 일에 계속해서 헌신하는 것, 둘째, “성경적 복음의 핵심 진리를 명확히 보여 주고 이를 선교 현장에 적용하는” 로잔 문서의 정신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서문은 밝히고 있다. 특히 “두 문서에서 이뤄진 약속들에 충실하지 못해 왔다”는 반성 어린 고백과 함께, 격변하고 있는 오늘날 세계에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전파하고 복음의 뜻을 성취하는 일에 있어 두 문서가 근거가 되어야 할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서문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정황을 세계화, 디지털 혁명, 경제적·정치적 균형 변화, 빈곤, 전쟁, 질병, 생태 위기, 기후 변화 등 바뀌어가는 것과,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죄악된 인간이라는 바뀌지 않는 것의 공존으로 제시하고, 로잔정신이 추구하는 ‘모든 교회가, 전 세계에, 온전한 복음 전하기(the whole church taking the whole gospel to the whole world)’라는 의미에서의 세계 복음화로의 헌신을 재선언했다.
이어 제1부에서는 로잔운동이 믿는 바, 즉 로잔운동의 신앙 고백을 분명하게 정의하는 작업이 이뤄져, 로잔운동이 근거하고 있는 복음주의 신앙의 기반이 총 10개 항목으로 나뉘어져 서술됐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사랑한다(WE LOVE BECAUSE GOD FIRST LOVED US)
서약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선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이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은혜에 응답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둘째,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한다(WE LOVE THE LIVING GOD)
성경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영원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서약은 강조한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자, 통치자이시며, 심판자이시자, 또한 세상의 구원자”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 우리가 있음을 감사하며, 당신의 통치하심에 순종하며, 그 정의로우심을 기뻐하며,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서약은 말하고 있다.
셋째,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사랑한다(WE LOVE GOD THE FATHER)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됐다고 서약은 밝힌다. 예수님에게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증명됐으며, 이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통로가 되어 상호적인 사랑의 주고 받음을 가능케 했다.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깊은 성경적 기반을 갖고 있다고 서약은 설명한다.
넷째, 우리는 성자 하나님을 사랑한다(WE LOVE GOD THE SON)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라 하셨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우리에게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구세주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고 서약은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권능으로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역사를 지배하시며, 모든 열방을 심판하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섯째,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사랑한다(WE LOVE GOD THE HOLY SPIRIT)
서약은 또한 삼위일체의 연합 안에서 성령 하나님을 사랑함을 밝히며, 성경의 증거 없는 우리의 믿음, 기도, 선교는 인간의 노력에 지나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 없이 우리의 삶은 복음의 아름다움을 반영할 수 없다”고 서약은 확신하고 있다.
여섯째,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WE LOVE GOD’S WORD)
한편, 서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뤄진 성경이 영감에 의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며,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말씀임을 믿는다고 천명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마지막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생각으로 더하거나 뺄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
일곱째,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한다(WE LOVE GOD’S WORLD)
하나님이 만드시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쁘게 즐겨야 한다고 서약은 밝힌다. 서술에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된 이 항목은 이번 문서에서 특별히 눈여겨 볼 만한 점으로, 환경 문제를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의 영역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서약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열정을 나누는 것”이 우리의 책무임을 일깨우고 있다.
여덟째,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사랑한다(WE LOVE THE GOSPEL OF GOD)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복음의 사람들이며, 복음은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고 서약은 말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복음 안에서의 은혜이며, 이 복음의 은혜를 땅 끝까지 전하기 위한 열정이다.
아홉째,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한다(WE LOVE THE PEOPLE OF GOD)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사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기억하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서약은 강조한다. 또한 이는 바람직한 선택 정도가 아닌 반드시 따라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요, 우리가 복음에 순종한다는 증거가 된다고 서약은 밝힌다.
열째,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사랑한다(WE LOVE THE MISSION OF GOD)
서약은 끝으로 세계 선교는 “하나님과 성경, 교회 그리고 인간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핵심되는 이해”라고 설명하며, 세계 선교에 헌신해야 할 우리의 책임을 촉구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는 모든 것을 연합시키고 화해시키는 것임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죄와 악으로 인해 분열된 세상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신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서약은 이같은 성경의 가르침에 드러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는다는 점을 천명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로잔 언약과 마닐라 선언의 초안을 작성한 존 스토트 목사가 설립한 국제랭햄파트너십(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 국제총재인 크리스 라이트(Wright) 박사가 작성했다. 구약학자이자 선교학자인 라이트 박사는 전 로잔신학위원회 의장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미국/영국 싱클레어 퍼거슨, 영국 로즈 도우셋, 스리랑카 아지스 페르난도, 이집트 아테프 젠디, 브라질 만프레드 그렐러트, 미국/크로아티아 피터 쿠즈믹, 호주 피터 젠슨, 케냐 에스터 몸보, 짐바브웨 빅터 나카, 자메이카 라스 뉴맨, 미국 존 파이퍼, 아니지리아 유수푸 투라키, 홍콩 카버 유 박사가 이번 문서에 참여했다.
케이프타운 서약(The Cape Town Commitment) 서문, 제1부 영어 원문 보기:
conversation.lausanne.org/en/conversations/detail/11544

마틴 루터의 면죄부의 효력에 관한 95개조 반박문

마틴 루터의 면죄부의 효력에 관한 95개조 반박문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믿는 자의 전생애가 회개 과정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2. 이 말씀의 뜻은 신부가 집행하는 죄자복과 죄사면에 관한 속죄 성례의 뜻과 전연 다른 것이다. 
3. 그러나 회개는 다만 심적 참회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는 외적표현으로 드러나야 한다. 
4. 참된 심적 참회는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해야 할 것이다. 
5. 교황은 자기와 자기교회가 만든 법을 범한 죄 외에는 아무의 죄도 사면할 의지도 없고 권한도 없다. 
6. 교황은 아무의 죄도 사면할 권한이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사면하심을 공포하거나 보증할 따름이다. 자기 자신의 사면권에 속한 것일지라도 만일 당사자가 거부한다면 교황의 사면은 무가치한 것이다.
반박문 일부 보기
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복종하더라도 모든 일에 겸손치 않는 자의 죄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신다. 
8.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생존자에게만 적용하고 사망자에게는 적용치 말 것이다. 
9. 성령께서는 (살아있는) 우리를 위하여 교황을 인도하시므로 교황의 반포 법령에서 사망자와 그 필요에 관한 조항은 늘 제외하여야 한다. 
10.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 교회법에 의한 참회를 연옥(煉獄)에까지 유보시키는 사제들은 무지하며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11. 성경적인 죄의 적용을 연옥의 죄로 변질시킨 가라지는 의심할 나위도 없이 주교들이 잠든 사이에 뿌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12. 전례에 따르면 교회법에 의한 벌은 사면 전에 선고해서 참된 통회를 하게하였다. 
13.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청산하는 것이며, 교회법규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자로서 그러한 법에서 당연히 해방되어 있다. 
14. 회개치 않은 죄인이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사람의 심령상태는 오직 공포를 초래할 것이며 그 불완전이 크면 클수록 공포도 또한 클 것이다. 
15. 각설하고, 이 공포만으로도 죄인들에게는 소위 연옥의 고통을 겪는 것과 같다. 이 공포는 절망의 공포다. 
16.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차이점은, 구원의 확실성(평강)과 절망에 이르는 상태와 절망의 상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17. 연옥설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선이 증가되어야 공포가 감소될 것이다. 
18. 이상의 지적들은 성경적 근거로서나 이성의 증거로서도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19. 구원의 예정성에 대한 확실함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으나 연옥의 영혼들에 대하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20. 그러므로 교황이 모든 죄를 사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자기가 정한 죄의 사면에만 국한된 것이다. 
21. 그럼으로 누구든지 교황의 사면부가 사람을 그 받을 모든 형벌에서 석방구원 한다고 선전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의 영들의 죄를 사면할 수 없다. 그들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성경적 방법으로 속죄 해야만 한다. 
23. 모든 죄를 사면할 수 있는 권한은 가장 완전한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이다.(세상에는 없다) 
24.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분별하고 허황한 약속에 의하여 버젓이 사기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연옥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은 주교와 교구 신부들의 임지에서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 
26. 교황은 천국열쇠를 가졌다는 자기 직권으로서가 아니라 도고기도로서 영혼의 죄사함을 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옳다. 
27. 저들(면죄부 파는 자들)은 돈이 헌금궤에 쩔렁하고 떨어질 때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28. 돈이 그렇게 쩔렁하고 떨어질 때 탐욕과 이익은 늘어나겠지만 교회의 기도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 
29. 마치 성 세베린과 파스칼리스에 관한 전설의 기록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그곳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어떠한지를 누가 알 것인가! 
30. 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확신 할 수 없거늘 어찌 자기가 완전히 사죄함을 받았는지 알 수 있으랴 
31.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드물다. 또 참으로 회개를 하고 면죄부를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거의 없다. 
32. 누구든지 면죄부를 받고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면 저와 저의 선생은 다같이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33. 교황의 사죄가 곧 하나님의 지극히 귀한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특히 경계해야만 한다. 
34. 그 이유는 사면의 은총은 인간에 의하여 정해진 예전적인 사죄행위의 형벌에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5. 영혼을 연옥에서 사들이려 하거나 고해증(告解證)을 사려는 자에게 참회가 불필요하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비(非)그리스도교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36. 어떤 그리스도인이든지 진심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고 참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부가 없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하심을 얻는다. 
37. 참된 그리스도인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면죄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모든 은사를 다 받을 수 있다. 
38. 교황의 사면도 결코 무시할 것은 아니다. 이는 내가 이미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이 사죄하심을 공포함이 되는 까닭이다. 
39. 면죄부에 대한 관대한 생각과 참다운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사람들에게 권장한다는 것은 유능한 신학자에게 있어서도 매우 어려운 것이리라. 
40. 참다운 회개는 징계를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부에 대한 놀라운 사실은 징계를 등한시하고 슬픔을 가지려하는 행위까지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41. 사도적 사죄(교황의 면죄부를 의미함)를 받게하는 행위를 선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알도록 설교해서는 안된다. 
42. 교황의 지도가 면죄부를 미끼로 해서 그것을 자선 사업인양 교훈한 것은 교황의 잘못된 의도임 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3.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 보다 더 선한 일임을 배워야 한다. 
44. 면죄부로 인간은 선하게 되지 못하며 사랑의 선한 행위로만이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 이다. 
45. 오직 면죄부를 위하여서는 교황에게 돈을 바치고 가난한 자에게 관심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음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 딤전 5장 8절의 교훈 같이 경제생활이 어려운 가족을 위하여서는 필요한 것을 저축할 수 있어도 결코 면죄부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모든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면죄부에 대한 판매 행위는 그 어떤 개인에게는 자유로운 행위일지 모르나 그것을 성도들에게 강요해서는 결단코 안된다. 
48. 경건의 신앙생활은 교황에게 면죄부를 사는 일보다 그 개인을 위해 훨씬 좋은 행위인 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9. 교황의 면죄부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옳은 행위이다. 그러나 면죄부 문제로 하나님께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임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만일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의 행상행위를 안다면 성 베드로 성당이 양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 세워지기보다 차라리 불타서 재가 된 것을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알려야만 한다. 
51. 교황은 면죄부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까지 라도 그 돈을 갚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52. 교황 자신도 면죄증서로 영혼을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그 행위 자체도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53. 모든 교회에서 면죄부 문제가 묵인된다면 그렇게 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적이 되는 것이리라. 
54. 말씀을 증거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면죄부 문제를 더 깊게 다루는 행위는 부정을 행하 는 것이다. 
55. 교황의 생각에 사죄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면 사죄 축하에는 종 하나만 울리고 행렬도 한번만 할 것이다. 그 반면에 있어서 복음이 매우 중요하다면 복음은 종 백개로 울려 전하고 행렬을 백번하고 성례를 백번해서 전할 것이다. 
56. 교황은 면죄부 발행의 근거가 되는 교회의 보물에 대해 그리스도인에게 제대로 명시하거나 알리지 않았다. 
57. 그것은 현세적 보화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렇게 손쉽게 쌓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성경적) 교훈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58. 그것은 속사람에게 은총으로, 겉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의 교훈으로 항상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덕과 성도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교황의 독자적인 뜻을 위한 것일 뿐이다. 
59. 성 로렌티어스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 시대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어의에 따라 말한 것이다(St. Laurentius는 258년 순교했다). 
6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써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1. 형벌의 면죄와 교황관리의 유보사건을 위해서는 교황의 권력만으로도 충분하다. 
62. 교회의 참 보물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인 거룩한 복음이다. 
63. 그러나 참 보물은 먼저된 것을 나중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교황과 그 추종자들이) 당연히 미움을 받을 것이다. 
64. 면죄부를 발행한 교회의 보물은 나중된 것을 먼저된 것으로 여기기에 당연히 가장 큰 환영을 받을 것이다. 
65. 복음의 보화는 예로부터 사람을 많이 낚는 그물이었다. 
66. 그러나 면죄부의 보화는 사람의 재산을 낚는 것이 되었다. 
67. 설교자들이 큰 소리로 최대의 은혜라고 외쳐대고 있는 면죄부는 이득이 증가하는 한, 최대의 은총이라고 해석된다. 
68.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경건에 비하면 그것(면죄부)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69. 주교들과 신부들은 사도의 사면특사를 경건하게 영접할 것이다. 
70. 그러나 저희가 주의할 것은 이 특사들이 교황의 말을 전하는 대신 자기네들의 욕망을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71. 사도 계승의 면죄의 진리에 반대하여 말하는 자는 추방과 저주를 받을 지어다. 
72. 그러나 누구든지 면죄부 설교자들의 잘못되고 뻔뻔스런 말에 대항하는 자는 복을 받을지어다. 
73. 교황은 어떤 방법이든지 면죄부 판매를 방해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분노로써 책망할 것은 당연하겠지만 
74. 그것을 구실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방해하려고 기도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교황은 심한 의분을 나타내어야 하리라. 
75. 교황의 면죄부에 굉장한 능력이 있어 -불가능한 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한 인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 빠진 생각이다. 
76. 그와 반대로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교황의 면죄부로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 죄책을 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77. 베드로가 지금의 교황이라고 할지라도 면죄부와 같은 그 이상의 은총은 줄 수 없다고 하는 말은 베드로와 교황을 모독하는 것이다. 
78.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현 교황이나 혹은 다른 어느 교황이든지 그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 수 있으니 곧 복음의 능력이요 병 고치는 은사이다. (고전 12:6,9~) 
79. 교황의 문장(紋章)을 붙이고 두드러지게 세워진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다.. 
80. 면죄부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묵인된다면 이것은 주교와 교구 신부들과 신학자들이 책임을 져야한다. 
81. 사죄에 대한 방종적 설교에 평교인으로부터 예민한 질문이 튀어 나오는데 아무리 유식한 학자라도 교황의 위신을 깎이지 않게 하고 대답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82. 예를 들어 말하면 아래와 같은 질문을 어떻게 답변한 것인가 “만일 교황이 지극히 거룩한 자선주의를 가지고 영혼들의 가장 큰 요구를 들어준다면 왜 연옥 전체를 비우지 못하나? 이는 가장 중요한 명분이다.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하려고 썩어질 돈으로 성당을 건축한다면서 이것(연옥을 비우는 일)이 어찌 사소한 명분일 것인가? 
83. 영혼들이 연옥에서 벗어났다면 왜 그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장례미사나 추도미사를 계속드릴 것인가? 그런 미사를 위하여 기부된 돈은 그런 미사가 소용없으니 돌려보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84. 하나님을 공경치 않고 하나님의 원수 된 사람이라도 돈만 내면 연옥에 있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영혼을 구출하는 은혜를 베풀진대 왜 돈을 받지 않고 순전히 은혜로 그런 영혼을 구출하지 않는가? 이것이 하나님과 교황의 무슨 새로운 신성함인가? 
85. 또한 참회에 관한 교회의 법규는 사실상 오랫동안 사용치 않았기 때문에 폐지되고 사문화되었는데 왜 아직 돈으로 사는 면죄부로 구원받는 것 같이 인정해야만 하는가? 86. 제일 돈 많은 자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자들이 내는 돈으로 하지 않고 자기의 돈으로 성 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87. 또한 참으로 회개하고 온전히 사죄함 받은 사람들의 무엇을 사하려 하고 무슨 영적 은혜에 참여함을 주려는가? 
88. 만일 교황이 하루 한번뿐 아니라 백번 씩이라도 진실한 신자들에게 사죄의 은전을 베풀진대 교회에 얼마나 큰 유익이 될까 
89. 교황의 목적이 영혼 구원하는 것이요. 돈을 받는 것이 아닐진대 전일에 내린 사죄장이 왜 무효가 되나 그것이 면죄부와 같이 동일하게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인데 
90. 평교인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데 이론적으로 증명치 못하고 완력으로만 나아간다면 교회는 그 원수들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그리스도인으로 불결하게 할 것이다. 
91. 만일 면죄가 교황의 바른 정신과 의도에 따라 설교된다면 오늘의 이러한 어려움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92. 그리스도인들에게 “평안할지어다 평안할지어다” 하고도 평안이 아닌 것을 말하는 선지자들을 다 물러가라. 
93.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 십자가"하고 십자가를 강조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94. 그리스도인들은 저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만을 고통과 죽음과 지옥을 통과해서라도 따를 것이다. 
95.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평안의 보장에 의해서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고통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14,22).

고통의 문제 - 하나님 알기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도구이다. 어떤 도구인가? 자신(하나님)에게로 향하게 하는 표지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면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내 자신을 포기하게 되고 더 이상 일어설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단순하게 이렇게 고통을 '이해'하고 그 원리대로만 적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실상은 그러하지 못하다. 고통은 정말 힘든 것이고 아픈 것이다. 이 고통은 우리를 그야말로 극단에 이르게 한다. 벼랑끝으로 몰아낸다.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에 내던진다절벽 끝에 서있는 느낌. 이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하는  자괴감. 내가 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맞지 않을까?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까지 나를 몰아친다. 이 고통의 아픔은 그만큼 견디기 힘들다.

고통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다
몸이 아픈 고통, 경제적으로 쪼들려서 살아야 하는 고통도 있다. 북한의 굶는 아이들이나 아프리카의 기아민들처럼 아무 곳에도 먹을 것이 없다면 그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또 마음의 고통이 있다. 이 역시 통증이 심하다. 몸이 아픈 것 못지 않게 아프다. 서로 미워하고 오해하며 상처를 받게 됨에 따라 생겨나는 고통은 찢어진다는 표현 그대로 찢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또 죽음의 고통도 있다. 죽는 것이 고통인지 아닌지는 경험해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아픔은 이루말할 수 없다.

이 고통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 고통은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 한 필연적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고통은 우리에겐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통은 하나님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는 도구이다. 고통은 우리의 편안한 삶에 각성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고통은 우리가 삶을 되돌아 보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는 위로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고통이 필연적이라면 차라리 숙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속편하지 않을까한대 맞아야 잠이 잘 오던 군대에서의 졸병 시기와 같은. 하지만 고통은 아무리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준비된 마음보다도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러한 고통 외에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고통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아니 오히려 이 고통 속에 뛰어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고통이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상을 깨뜨리는 고통이고, 또 하나는 세상으로의 동화를 거부하는 고통이다.

일상이라 함은 우리의 삶을 받치고 있는 시간이라는 속에서 갖는 우리의 생활 자체를 말한다. 기독교인도 사람인 이상 어찌 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침에 일어나고 식사를 하고 가정을 갖고 직장을 가져야 하며, 돈을 써야 하고 버스를 타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이러한 일상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에 함몰되면 우리의 의식은 그 일상을 이어가는데만 골몰하게 된다. 모든 것은 평범해 져버리고 그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우리가 가져야 할 감사와 경이를 우리는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주님이 나를 구원했다는 말조차 일상이 되어 버린다. 또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조차 감동이 없어져 버린다.

각성이 없이 이러한 일상에 내 생각을 그냥 맡겨버리면 내 영혼의 상태를 점검하기 싫어진다. 내 일상으로 인해 이 홈페이지에 들어오는 것조차 싫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일상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되어 왔고 그 의미가 소중한지 매일매일 느껴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이 일상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일상을 깨지 않으면 우리는 매일 영혼을 갉아먹는 것이 된다.

일상을 깨어보라. 얼마나 신비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지. 아침의 햇빛은 내 영혼을 쪼갠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숨을 쉬면서 내가 갖고 있는 이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걸음조차 신기하고 손가락의 움직임조차 감사하다. 온몸이 마비된 자에게 손가락 움직임은 얼마나 감동을 주는가. 손가락 움직임은 온몸의 다양한 활동을 종합한 에너지의 총합이 이뤄진 결과이다매일 먹는 밥이 정말 흔한 일이 아닌 점도 알게 된다꽃들이 다양한 색깔로 반길 때 그곳에 담긴 DNA를 통해, 그리고 만져지는 그 촉감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일상을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매일 갈고 있어야 하며, 마치 굶주린 이리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양식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외에도 세상과 동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고통도 있다. 이 세상은 우리를 자신들의 세계에 동화시키기 위해 교묘하고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겨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과 가깝다.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누가 준 재능이지 모르지만 모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천재적인 재능으로 우리를 재미로 붙들어 놓는다. 그 갈고리는 정말 교묘해서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아 버린다. 티브이와 영화, 여자와 음식, 맛과 향기, 월급과 경쟁심, 수많은 감정 싸움 등은 나를 이 땅에서 꼼짝달싹 못하게 밀착시켜 버리게 한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접촉할 수밖에 없는 것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달콤한 유혹을 뿜어내며 우리를 쓰러뜨린다이 땅의 거주민들은 굉장한 미인들이 많고 그들은 언제나 나를 자신들이 최고로 여기는 가치를 받아들이게끔 동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직장은 우리에게 신앙적인 태도보다는 세상의 틀을 갖추게 강요한다. 술을 마시게 하는 것, 동료와 경쟁하게 하는 것, 개인의 악한 권위에 굴복하게 하는 것 등은 그런 유혹의 하나이다.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기 보다는 학원에 보내야 하는 것도 이런 세상의 원리에 동화되는 작용이다.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는 것도 그 종류이다.

우리에게는 이 교묘한 수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구별의 능력과 신앙의 성장이 필요하다. 또 용기와 심지어는 목숨을 거는 각오까지 돼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동화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보라. 술자리에서 술을 거부하게 되면 어떤 위협을 받게 되는지. 오른쪽 뺨을 때린 자에게 왼쪽 뺨을 대는 행위에 어찌 고통이 따르지 않겠는가. 복수를 포기해야 하는 것에는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복수심을 죽여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겸손하려면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그 교만의 마음을 얼마나 강하게 눌러야 하는지. 내 모든 소유를 팔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하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곳곳에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부정하게 하는 지시를 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은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하는 자는 딱 두 가지이다. 이미 그렇게 따르고 있거나 아니면 완전히 외면하면서 살고 있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고통을 우리는 견딜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는 견딜 수 없다. 견딜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이다. 하나님이 그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그분에게 맡겨야만 한다. 기도로 승리해야 한다.

예수님도 그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어 했다. 기도로 이겨내고 믿음으로 이겨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신다. 아니 정말 도와줄 수밖에 없다.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이 땅에서 신앙을 견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의 선택은 너무나 자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내 의지와 내 뜻을 열어드리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내 골격을 바꾸는 일이다. 뒤틀렸던 골격을 다시 잡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뒤틀린 척추가 다시 잡힘으로써 온몸이 건강해지듯이 내 뒤틀린 삶이 바로잡히는 순간 내 마음과 생명 속에는 기쁨과 생기가 다시 넘치게 된다. 그 기쁨이 있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사모할 수 있으며 그 기쁨을 맛본 자로서 그 진정한 달콤함을 못잊어 지금 동화된 순간에도 다시 돌아갈 힘을 얻는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고통이자 또다른 쾌감이다. 나는 매일 처절한 고통을 겪는다. 아니 죽는다. 매일 죽는다. 기독교인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고 매일 이런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출처] 고통의 문제| 작성자 균열의 발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