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2009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3:4)

당대에 율법에 해박한 석이요 학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많이 배웠다는 니고데모는 세상적인 지식과 자신이 터득했다는 학문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데 걸림이 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만만하게 내 뱉은 말입니다. 니고데모의 이 말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의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완전한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진리는 세상적인 상식이나 전공한 학문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1. 생각을 멈추어 보세요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계1:17)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한 요한 사도가 귀양생활을 하던 밧모라는 섬에서 들려주는 그의 고백처럼, 갑자기 무한하신 존재 앞에 압도되어 모든 생각에 사라져버리고 고요한 침묵에 한없이 잠기는 순간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마음속에서 자신과 남을 끝없이 판단하며 떠들어대던 육신의 목소리가 조용해지고, 분석하며 헤아리기에 분주하던 생각이 자취를 감추고, 한없는 충족감에 잠겨 고요히 안식하는 그런 순간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던 어느 날 진리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채 깊은 명상에 잠기는 순간 문득 무엇인가 감지하게 됩니다. 정당하다고 주장하던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워하며 꼬리를 감추는지를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아주 지혜롭다고 신뢰하던 우리 자신의 생각들이 얼마나 순화되지 못한 육신의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지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무한하신 존재의 빛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자신이 드러나는 그 순간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2.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은 항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생각들로 아주 분주합니다. 생각을 멈춘 상태에 머무르는 순간은 아주 드물거나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것과 합쳐져 있지 않다면, 우리 생각들의 대부분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있지 않은 “자아”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완전히 죽지 않은 육신의 에고인 “나”가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가면을 쓰고 합리화시키며 나오더라도 그것은 결국 육신의 자아가 죽기 싫어서 안간힘을 쓰는 것뿐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구루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갈5:19~21).

성경은 말합니다. 육체에서 일어나는 일과 생각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감정에 의해서 자주 바뀌기 쉽습니다. 성숙되지 못한 신자들은 아직도 변화하지 못한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을 니고데모처럼 항변하기도 합니다. 자아의 그루터기가 완전히 잘라지지 않은 채 올라오는 자신의 생각을 네고데모처럼 항변합니다. 그 생각들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육신의 감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의 상식과 학문으로 터득한 전공분야로 니고데모처럼 항변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휘둘려버릴 때가 많습니다. 내 생각이 멈추어지고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충동적인 생각에 끌려 다니며 짓는 죄를 멈출 수 있습니다.

3. 생각을 꺼버리는 버튼
우리 마음속에는 생각을 꺼버리는 버튼이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육신에서 올라오는 소욕과 생각을 꺼버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버튼이 있습니다. 그 버튼을 사용하여 육신의 생각을 꺼버리는 법을 체득한 사람은 육신의 생각들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 우리는 빨리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로 성령을 택하고 육신의 소욕과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각을 꺼버리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약하게 하고 악하게 물들이는 것들로 마음이 번거로워지거나 그늘에 덮여지는 어두운 생각들로 우리의 마음이 캄캄해지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빨리 꺼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왜곡된 성격과 인격과 고집 센 아집에서부터 나오는 생각의 뿌리가 내리지 못하도록 빨리 생각을 포기하고 성령님께 드리는 지속적인 연습을 해야 합니다. 생각이 끝날 때만 평화가 오고 자신의 생각을 멈출 때에만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멈출 때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악한 상상과 생각을 물리치기 위한 지속적인 영혼의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으로 교묘한 술수를 내거나 죄를 지으려는 유혹을 굳게 저항하며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켜주실 수 있는 분을 믿음에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영원한 근원이신 예수님께 머물면서 그분의 마음이 내게 전달되도록 진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4. 남아 있는 안식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4:9~10)

성경은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일을 멈춘 사람들을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생각이 없어지는 경험, 육신의 소욕을 하나님께 드리는 경험, 육신이 짓는 죄를 쉬는 경험을 하는 사람, 이것이 진정한 안식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해야 할 남아 있는 안식입니다.

항상 자신과 남을 정죄하며 떠들어 대는 비판의 목소리와 남을 끊임없이 원망하며 변명하는 생각을 성령의 버튼으로 조용히 꺼버리고 사랑과 용서의 속성에 함께 녹아들어가서 조용히 그분의 임재 속에 쉬는 경험을 체험하는 사람만이 남아있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다시 만들어 놓으실 전능자의 품안에 안기는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손을 펴서 전능자의 앞에 내려놓는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안식의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다가오는 영원한 안식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사람의 마음에는 고요한 평화가 있습니다. 안식에 들어간 사람의 마음속에서 비쳐오는 아름다운 빛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거듭난 사람의 성품의 일부분이라 하겠습니다.

므두셀라가 주는 교훈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개역한글판 창 5장)

이 땅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을 들라면 우리는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서969세를 살다가 죽었으니 거의 1000년 가까이 살았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참고로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 가운데 900세 이상 살았던 사람은 다음과 같다.
아담 930세, 셋 912세, 에노스 905세, 게난 910세, 야렛 962세,
므두셀라 969세, 노아 950세 그러면 므두셀라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① 크로던스 성경주석에 의하면 므두셀라는 ‘므두’(보내다라는 뜻이 있음)와 ‘셀라’(그가 죽을 때에라는 뜻이 있음)를 말하는 것으로 므두셀라는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을 보낸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것은 무엇을 말하겠는가?
므두셀라가 죽을 때에 홍수 심판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② 히브리교수를 지낸 챨스 H. 샤우 박사는 므두셀라의 옛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므두셀라’는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이 쏟아져 내린다’ 라는 뜻이다.
이와같이 그 의미를 알아 차리고 에녹은 미리 하나님과 동행을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변함없이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미리 예시함이 없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 자연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벧전 1 :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詳考)하니라

그러면 우리가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통하여 노아의 홍수심판의 시기를 살펴 보도록 하자.

28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이 노아를 낳은 후 오백 구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 칠십 칠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32 노아가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개역한글판 창 5장)

성경의 예시처럼 살펴 보면 노아의 아버지는 라멕이요, 노아의 할아버지는 므두셀라가 된다.
결국 에녹은 노아의 증조(曾祖)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위의 내용을 수학적 기호를 사용하여 보면 아래의 내용과 같이 되어 진다.
므두셀라 969세에 죽음 =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음 + 라멕이 182세에 노아를 낳음 + 노아 600세에 홍수가 남.

여기에서 보아도 므두셀라의 나이 369세 일 때 노아가 탄생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노아의 탄생 = 므두셀라가 187세에 라멕을 낳음 + 라멕이 182세에 노아를 낳음
노아의 탄생 = 므두셀라의 나이 187 +182 = 므두셀라의 나이 369세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내용을 좀 더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87 + 182 + 600 = 969

결론적으로 우리는 노아의 홍수 심판의 사건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님을 배웠다. 이것은 마치 살인사건을 해결하려는 형사처럼 미궁(迷宮)의 사건을 추적(追跡)하여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범인(犯人)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기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主 여호와께서는 자기(自己)의 비밀(秘密)을 그 종 선지자(先知者)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決코 行하심이 없으시리라 (암 3:7)

"자유의지"라는 단어의 기원과 그 의미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하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 속에 죄와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데, 창2:16-17을 보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고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심으로 봐서 타락전에 지닌 인간의 속성에는 아직 선악의 개념이 없었고 타락 후에 선악을 아는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창3:22)

성경을 읽어봐도 자유의지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이 '자유의지'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 그 기원과 역사 -

혹시 자유의지라는 단어 속에 인간의 행함이 근거가 되도록 할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기원한것이 아닌지.... 제가 배움이 짧아서 자유의지라는 단어에 알러지가 있는것 같습니다.

'자유의지'라는 개념의 바탕은 '마음대로'이지만, 어떤 경우이던 '선택'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으셨다면 '선택에 의한 행함'이 없게 되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따랐을 뿐이니까요. 그러니 '행한대로 심판하신다'(롬2:12;요5:29;갈6:8)는 말씀은, 자유의지'라는 용어가 없어도 '자유의지'가 있음을 성경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창2:17), 선악과를 먹었습니다(창3:6

그러나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2:16,17)는 말씀에서 보듯이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정해준 범위 안에서의 자유 즉 '제한된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임으로 구별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롬8:8:19;고후5:17).

그리고 "무었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행17:25)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가 인간의 행함이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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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교육학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백지와 같다고 말을 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부적합하지만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에게 어머니가 다른 사람을 따라가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는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가 가장 중요함을 본성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괴자가 유혹을 할 때 그를 따라가면 아이는 자유의지에 따라 유혹을 받은 것입니까? 아니면 유혹때문에 어머니의 당부를 잊어버림으로 어머니 곁을 떠난 것입니까?

우리는 원인간의 상태를 사실 잘 모릅니다. 우리는 다만 그가 자유의지로 유혹을 받았는지 아니면 단순히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유혹을 받았는지를 모릅니다. 통속적으로 완전한 자유로 범한 잘못이 아니면 책임도 묻기 어려울 것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우리는 원인간에게 주어진 극히 선한 상태가 얼마나 특별한지 결코 알지 못합니다. 원인간이 가진 어린아이와 비교할 수 없는 순수성도 우리는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자유만이 항상 결과를 이끄는 것도 아니고 자유만이 책임을 지게 만드는 조건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타락 이전의 인간상태는 더욱 더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는 타락 후 하나님이 준 계시를 통해 무엇이나 생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영원한 작정에 대해서 굳게 말씀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결과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자유의지로 미워하는 것을 거부하고 사랑하고자 한 것같지 않습니다. 그냥 창조의 선성을 따라 하와를 사랑의 노래로 받아들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 당시에 중성적 인간이었습니까? 오히려 그들에게 성은 자유의 문제에 속한 선택과제가 아니라 창조의 선성에 따라 아름다운 것일 뿐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조이전에는 어쩌면 인간은 그의 자유로 결정한 행위에 따라 선을 결정하기보다 창조의 선성을 따라 선한 존재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가 결정해야 할, 의지의 문제가 구태여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창조부터 타락까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아는 것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만유의 창조주시며 주권자라는 사실이며 그것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는 진리라는 믿음입니다.

부연하자면 저는 인간의 본질을 지,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을 꼭 불변의 성경적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신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받은 자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재창조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산상수훈

마태복음5:3-10절과 누가복음6:20-23절에서 이른바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이 부분은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하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누가는 이보다 더 간결하게 기록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이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축복의 결과를 말씀하는 각 줄의 후반부를 읽으면, 전반적으로 이스라엘을 이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모습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다시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사는 축복을 경험한다.

*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위로와 채우심을 경험한다.

* 하나님의 백성은 땅을 차지한다.

* 하나님의 백성은 용서받는다.

*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본다.

*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자녀로 인정받는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 안에서, 그분의 공급과 먹이심과 용서를 경험하며 사는 백성에 관한 아름다운 비전을 제시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새롭거나 논쟁거리가 될 만한 무언가를 말씀하신 게 아니다. 이미 수세대에 걸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성취된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새로우며, 논쟁의 씨앗이 된다. 그분은 먼 훗날 언젠가 받을 축복에 대해, 어떤 가상의 세대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너희가 복을 받을 수 있다’가 아니라 ‘네가 복되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역사적 선언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혜택을 누린다.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하는 방법에 관한 몇몇 이론이 유대인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좀 더 공들여 지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손을 씻고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예수님을 성가시게 했다.

쿰란공동체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금욕적인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심당원은 억압에 항거하는 게릴라전을 선호했다. 이런 집단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할지 자신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다. 적어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방해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지 안다고 확신했다.

예수님은 이 세가지 견해에 모두 반대하셨다. 바리새인의 율법 해석에 강력하게 반대하셨다. 그분은 결코 수도사가 아니었고, 게다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도하셨다.

나는 산상수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의 접근으로만 이해했다(이제 와서 보니 그릇된 생각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에 굶주리고, 마음이 청결해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해야 한다. 이런 영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더 잘 받을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누가복음의 산상수훈보다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더 잘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이미 궁핍한 자들에게 가난하고, 배고프고, 비참하고, 미움 받으려 애쓰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나는 이제 더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으로 도덕적 교훈을 주시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분이 산상수훈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래 좀 더 구체적인 사항을 선언하셨다고 믿는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가 열릴 때가 이미 도래했다고 선언하셨다. 어떤 사람들이 그 나라를 누리는 축복을 받을지 선포하셨다. 라이트 형제가 처음 하늘을 날았듯이 예수님은 첫 비행 편에 대해 이미 선포하셨다. 누가 그 비행기에 탈 수 있을지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에서 자주 강조하신 위대한 역설을 선언하신다. 바로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겸비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바른 행실이 하나님 사역을 부흥시킬 것이라는 말씀은 하지도 않으셨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결코 사람 손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자 도래한다.

예수님은 마치 물속에 던져진 그물처럼 은밀한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겨자씨처럼 놀란 만한 성장을 보인다. 오랜 여행 끝에 돌아오는 주인처럼 예고 없이 갑자기 등장한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이웃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자비는 택하신 백성을 넘어 병든 수리아 적장과 의지할 곳 없는 이방인 과부를 돕는 데까지 이른다. 하나님은 적합하지 않은 자들을 축복하신다.

만일그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볼 수 있었다면, 이러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축복은 의인이나 부유한 자들에게 부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의 축복은 가난한 자, 배고픈 자, 아픈 자, 슬픈 자, 따돌림 받는 자, 예수님께 나아오려고 가족의 명예를 저버려야 했던 자들처럼 희망이 절실한 작고 평범한 사람에게 부어졌다. 예수의 사역을 통틀어 살펴보면, 그분이 죄인, 세리, 나환자와 같은 사람들을 축복하셨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의 옷을 입은 예수’ 중에서…>

산상수훈을 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품으시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설교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청중이었다. 사실 초대 그리스도인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상당한 노력을 한 후에야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운동에 동참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와 정반대의 경우를 경험한다.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도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전 세게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성경 읽는 일을 제외하고는 유대의 민족적 유산과 접촉이 없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 시작해서 모든 종족과 문화적 정체성을 포괄하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런 변화에 예수님의 의도가 있는가? 어떤 이들은 현 기독교에 이스라엘을 위한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역은 실종되고 오히려 예수님의 목적과 별로 관계없는 형태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종종 이 때문에 정죄를 느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가셨다. 이 사실은 사람들을 화나게 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그저 유대인들만을 이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훨씬 더 넓고 포괄적인 생각을 하셨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고향 나사렛에서 있었던 한 매력적인 사건을 기록한다. 예수님은 고향의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을 읽으신 후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읽으셨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 말씀은 예수님 사역의 여러 단면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눈먼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유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는 이 예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정당화하고자 이 구절을 사용했다. 즉, 가난한 자와 죄수, 소경, 그리고 부패한 정부나 경제적 힘이 있는 자들에게 억눌린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사역 말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들의 이해는 옳다. 예수님이 선포한 나라가 도래하는 새로운 시대에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사역이라면 어떠한 것이든지 옳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 건강, 평화를 가져오며, 특히 가난한 자, 눈먼 자, 포로된 자, 눌린 자들을 위한 사역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문자적 의미를 따르는 이런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님의 명백한 의도를 간과하게 한다. 예수님의 정충은 그분의 뜻하신 바를 온전히 이해했다.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포함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이야기는 사실 가난한 자, 눈먼 자, 포로된 자를 위한 사역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사야 말씀을 앞뒤 문맥을 고려하여 읽는다면, 이것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것이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 것 중수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무릇 나 여호와는…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사61:4-8)

이사야를 연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예수님도 물론 그렇게 하셨으리라) 이 예언의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벨론에 의한 멸망’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 사람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갔고, 도성은 파괴되었고, 농토는 황폐해졌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종교를 모독하려는 의도로 성전을 파괴하고 불살랐다. 이사야는 이를 이상한 방식으로 해석했다. 이방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겼다고 해석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이 스스로 승리하셨다고 해석했다. 이사야는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용서하실 거라고 거듭 예언했다. 이스라엘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도성이 재건되며 놀라운 축복의 시기가 시작되리라. 이것이 예수님이 읽으셨던 구절의 뜻이다.

이 구절에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모두 다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이들은 바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눈이 멀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을 사랑을 보지 못하고, 포로 됨과 죄악으로 인해 억눌린 이스라엘 백성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순간 이 포로 된 자들이 자유롭게 딜 거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오백 년 전 바벨론에서 돌아왔으나 여전히 포로인 채, 소경으로 궁핍한 채 억눌려 있다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신다. 즉,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청중, 전에 예수님의 이웃이었던 이 사람들이 바로 가난하고 눈멀고 포로 된 자라는 말씀이다. 죄악이 여전히 국가적 실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직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셨고 회복시키지도 않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좋은 소식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이 듣는 그대로 오랫동안 기다려 온 예언이 이루어져 해방이 찾아왔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복 주시려고 그들에게로 돌아오셨다.

그렇기에 “그들이 다 그를 증언”(눅4:22)하였다는 말씀은 놀랍지도 않다(‘증언하다’라는 헬라어는 ‘누구에 대해 좋게 말하다’라는 의미도 있다-역주).

분명히 예수님의 고향에 가득한 흥분은 예수님이 눈먼 자들을 고치는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 흥분은 나라가 해방되고 재건되며, 다시 하나님 앞에 구별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은 고향에 돌아오셔서,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건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정확히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종교적 민족주의
하지만 예수님은 이웃의 암묵적인 동의에 반하는 이질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화나게 하셨다. 위대한 선지자요, 이스라엘의 영웅인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사렛 사람들이 전에는 들어 보지 못한 말로 이들의 사역을 묘사한다. 이스라엘이 큰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셨다. 그런데 굶어 죽어가는 이스라엘 과부의 집은 모두 지나치게 하고, 한 이방인 과부를 돌보며 그와 함께 거하라고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스라엘의 나환자는 내버려 두고, 엘리사에게 적국의 장군을 고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과거의 경험하여 알고 기대하는 대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발언은 이웃을 몹시 화나게 했고, 그들은 바로 회당에서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전에는 이 장면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런 살기등등한 분노의 순간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2001년9월11일 이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살기등등한 분노가 내게 더 가까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나사렛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광경을 생각해 보라.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다니는 모스크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는 고향 땅, 팔레스타인의 꿈이 실현되는 환상을 보았다고 선언한다. 알라가 은총과 축복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풂으로써 이 계획이 실현될 거라고 코란에 근거해 입증한다고 가정하자. 청중은 과연 그 메시지를 좋아할까? 아마 그 이슬람 종교 지도자는 암살될 것이다….

인종적, 종교적 적개심이 맹렬히 급증하는 곳에서 이런 설교를 한다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그랬듯, 분노를 유발할 것이다. 심지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종교적 편협
예수님의 설교를 이해하려면 거룩한 땅 이스라엘이 먼지만 풀풀 날리는 고요한 곳이고 예수님이 거기서 평화로운 농부들과 어울려 하프 반주에 맞춰 사랑 노래를 부르셨다는 식의 몽상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아마 당시 팔레스타인은 못해도 지금만큼이나 고요했을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억압받았고 많은 수가 이에 분노했다. 어떤 사람은 살인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실제로 사람을 죽였다.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극단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로 여겼다. 그들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미움과 경멸이 유대인들에게 무능한 광신자요 끊임없이 다투기를 즐기는 자들로 보았다. 로마의 지배가 잔혹하게 효과적이었고 효과적으로 잔혹했기에 유대인은 이를 증오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 그때에도, 폭동과 민란이 늘 있었다.

예수님은 거의 배타적일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만 설교했다. 하지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성경이 늘 말씀해 온 대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다가가시는 것을 보고라고 촉구했다. 게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복음을 놓칠 수도 있다는 구약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배타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유대인에게만 설교했지만,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놀란 만큼 좋은 소식,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소식을 전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의 경건 문제가 아닌, 통치권 변동의 문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말미암아 가족이 갈라서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핍박받고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메시지는 사실로 확증된다. 가족이 갈라서고 제자들은 살해당했다. 그분의 운동이 끝날 때까지(그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백만의 사람이 예수님의 메시지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평화의 왕’이라 불린다. 중동평화조약을 생각해 보라. 폭력이 현존하는 가운데 평화협정이 이루어져 그 영향력이 적군에까지 미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해하신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 고향 사람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듯이, 예수님도 나사렛 사람들에게 그들이 미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했다.
<유대인의 옷을 입은 예수 중에서…>

※초막절※

(레 23:40)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레 23:33-4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며 칠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이는 여호와의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 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역사와 계절의 리듬을 알려주는 카렌다를 주셨다. 이 달력은 하나님의 특별한 달력으로 우리들이 사용하고있는 그레고리안 달력과 다르다. 이 달력속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에 베푸신 일을 요약해줄 뿐 아니라 앞으로 미래에 그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실 것 인가도 예언적으로 알려주는 특별한 달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 교회의 탄생, 교회의 공중 휴거, 이스라엘의 미래가 여호와의 일곱절기 속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메시아닉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들은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일곱 여호와의 절기를 “모세의 법속에 나타난 메시아”라고 부른다. 이는 참으로 특이한 이름이며 참 맞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절기를 이루시는 메시아 이시기 때문이다. 절기란 말은 그저 먹고 마시는 축제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그리고 공포하신 날이란 말이다.

일곱 여호와의 절기 중 맨 마지막 절기는 초막절이다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숙콧(Sukkot) 즉 초막이라 부른다. 유대인들의 생각속에는 그들은 지금 영구한 집에서 거하는 것이 아니라 초막속에서 거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우리들의 본성은 생각이나 깨달음을 통해 움직이기 보다는 행동을 통해서 실행하는 존재임을 절실하게 깨닫고 초막절을 지킨다. 그래서 그들은 초막속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평강을 얻는다. 영어로는 Feast of Tabernacle이라 번역되어있다.

초막절의 핵심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신뢰하며 거하는 것이다
그 날에는 여호와의 초막이 영원히 우리와 거하게 될것이며 이는 천년 왕국을 말한다.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레 26:11)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초막절은 인류 역사의 위대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그랜드 휘날레이다.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기 전에 예루살렘에는 천년 왕국 성전이 서게 될 것이다(겔40-48장)

초막절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첫째: 초막절은 여호와의 축복을 생각나게 해주는 기쁨의 날이다(42-43)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몇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흩어져 살아왔던 민족이다. 그들은 세계의 어떤 민족보다 고난 당해온 민족이다. 이 세상에서 유대인 만큼 고난 당한 민족은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흩어져사는 방황과 고난이 영원히 끝나게 되는 날이 이르게 될것이며 그 슬픔과 눈물이 영광과 기쁨으로 변하는 날이 오게 될것이다.

초막절의 본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상기시켜 주는 날이다(42-43).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돌봐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신 축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깨닫게 해 주는 절기가 초막절이다. 광야 시절에 그들은 초막에 살았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집에서 거하게 되었다.

둘째: 초막절은 추수의 완성을 이루는 날이다(39)
(레 23: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 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미국에서 지켜지는 추수 감사절처럼 초막절은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날이다.

(신 16:13-15)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일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찌니라”

유대인들에게 한가지 기억될 일은 기쁨의 축제는 언제나 속죄를 받은 후에 이루어 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속죄일이 있은 후에 초막절이 있다. 사람들에게 거룩함이 없는 축복은 실망과 절망으로 이어진다. 초막절동안 제사장은 엄청난 많은 제사를 드리게 된다(민29). 희생을 드리는 숫자가 199에 이른다. 우리들은 이 한가지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드린 아들의 희생을 떠나서는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게 해 준다.

셋째: 초막절은 천년 왕국을 향하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을 통하여 메시아가 이 땅에 임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드릴때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예비하신 메시아왕국을 보게된다(슥 12:10-13:1; 사35; 눅1:67-80).

스가랴 선지자는 천년 왕국때에 일어날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큰 변화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슥 14:16-19)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 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 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예루살렘은 세계의 수도가 될것이며 전 세계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초막절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중동의 사태는 테러와 전쟁소문으로 어둡기만 하지만 그 날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게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테러 분자들이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못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가장 최고의 날이 기다리고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될것이다. 모든 과거의 죄는 메시아로부터 속죄함을 받아 깨끗하게 씻겨질 것이다.

슬픔을 당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이제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물론 교회는 유대인들이 국가적으로 회복되기 7년 전에 가장 최고의 날을 맞이하게 될것이다. 그동안 흩어져있던 성도들이 공중에서 주를 만나 모여서 기쁨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날을 기다리고있다.

넷째: 초막절에 행하는 특별 행사 - 먼저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두가지 명령을 받았다.
(레 23:40-42)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1.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즐거워하고
2. 이스라엘에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해야 한다

네 종류의 나무 가지를 취하는 일은 농업에 관련된 일이며 초막에 거하는 일은 역사적인 일이다. 농업에 관련된 절기의 부분은 분명히 우주적이며, 광야 생활 때 초막에 거했던 역사적인 일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된다. 나무 실과와 나무 가지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도구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비를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실과의 추수를 거둘수 없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초막절 절기를 지키면서 물의 의식을 행한다. 이는 유대인들이 초막절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나게 해 주기 위하여 행하게 되는 두가지 의식중에 하나이다.

1. 실로암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붓는 일     2. 네개의 큰 촛불을 세우는 일
이 의식은 유대인들이 광야생활 할 때에 하나님이 주신 물을 회상케 해 주는 일과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신 축복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예수님 께서도 초막절때 자신을 이와 비교해서 가르치셨다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초막절의 명절을 지키면서도 모세의 법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못했다. 또 초막에 거하는 일은 영광의 구름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신것을 뜻한다. 그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을 의지했던 믿음이 강조된다. 유대인들은 평안한 집을 떠나서 임시적인 초막에 거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경험을 갖게된다.

초막절에는 두가지 면이 있다
물질적 육체적인 필요의 면과 물질적 육체적인 것 대신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필요이다. 우리가 농사를 질때 비가 내려야 된다는 물질적인 필요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그런데 히브리 말로 비(rain)를 게쉠 geshem이라고 하는데 그 뜻이 “육체적”이라는 의미를 갖고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비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비는 구름이 있어야한다. 영광의 구름 즉 영적인 쏘스가 비를 가져온다.

농부들은 귀한 열매를 얻기 위하여 비를 기다린다
(약 5:7-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 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그래서 구름 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며 예수님께서 재림하실때에도 구름을 타고 오신다.교회의 성도들이 휴거 될 때에도 구름속으로 끌어 올려 들림받아 주를 영접하여 올라가게된다.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같은 이유에서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비를 위해 기도한다. 편안한 집을 떠나서 구름 아래서 하나님을 믿으며 생활한다. 그리하여 초막절을 지키면서 초막절의 양면인 인간의 육신적인 생활과 영적인 생활의 현저한 대조를 경험한다.

성년 남자 유대인들은 매년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세번씩 하나님 앞에 나와야만 한다
(출 23:14-19)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의 정한때에 칠일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너는 내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내 절기 희생의 기름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지니라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유월절과 무교절, 초실절, 그리고 초막절이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 에서 성취되었다. 초실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 초막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된 성도들과 함께 지상 재림 하셔서 예루살렘에 천년 왕국을 세우심으로 성취 될 것이다.

결론: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꼭 기억해야할 것은 모든 여호와의 절기는 각각 거기에 맞는 의미가 있으며 또한 적절한 시기가 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때 지금 우리들은 오순절과 나팔절 사이에 끼여 있는데 이제 어느 순간에든지 나팔 소리가 들려오게 될 시간대에 살고있음을 명심해야한다. 그러므로 교회 성도들에게는 마지막 한 절기인 나팔절만 남아있다. 속죄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때 유대인들에게 속죄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초막절은 우주적인 절기이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가 다 같이 모여서 지키게 될 절기이다.

다니엘 12:2-3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구약의 욥,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다니엘이 예레미야와 같이 우리들과 함께 우주적으로 지키는 절기가 될것이다. 우리는 그 날에 초막절을 지키면서 다니엘에게 우리가 지상에 있을 동안에 당신이 기록한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었노라고 신앙의 담소를 나누게 될 것이다.

초막절은 하나님의 축복을 깨닫고 기뻐하는 절기이다.

초막절은 인간 영육간의 추수의 완성을 이루는 절기이다.

초막절은 천년 왕국을 향하고있는 절기이다.

유대인들은 나팔절에 전 해에 얼마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를 주셨는가를 기준으로 축복을 판단한다. 그래서 씨애틀에서 목회하고 있는 나에게는 비가 내리는 것이 축복임을 생각하고 위로를 받아본다.

그들은 초막에서 영광의 구름아래 보호를 받으며 살고있음을 실감한다. 그래서 초막절의 육신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드린다.

결국 여호와의 일곱 절기중 가을에 있는 세 절기 즉 나팔절, 속죄일 그리고 초막절의 종착지는 영광의 천년 왕국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마라나타!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 20)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계록 22:12)
<전윤근목사- 씨애틀 늦은비교회> http://www.nujunb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