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신이 감동되어 말씀이 임한 이후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계시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 그 흔했던 수많은 선지자들의 활동이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약 200년 간의 포로 귀환의 역사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그 이후 침묵하십니다. 마치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70 식구 얘기가 있은 이후 모세가 등장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 성경은 역시 침묵합니다. 그래서 이 400년의 기간을 암흑시대, 또는 신, 구약 중간시대라고 일컫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져서 암흑시대라 일컫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도 이 시대에 대해서는 글로 기록된 자료가 가장 빈약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경책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는 한 장 차이지만 그 사이에 숨겨져 있는 400년의 역사는 구약을 읽던 우리의 관점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왠지 신약은 구약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어쨌든 구약보다는 좀 수월한 느낌이 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복잡한 역사얘기가 없어서 좋고, 읽으면 그래도 깨달아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어서 친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읽는 신약은 곁으로 그냥 읽어서 얻는 깨달음이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구약을 역사적인 배경과 연결해서 읽지 않으면 윤리와 도덕률을 깨닫는 수준 정도의 교훈밖에는 얻기 힘들고, 눈에 안보이게 깔려있는 수많은 신약의 사건들과 예수님의 교훈은 그래서 읽어도 읽어도 어려울 때가 많은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신약의 배경이 되는 정치구조, 사회구조, 영적인 상황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는 연결된 것이고 흘러온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약에 나타나는 기원 후의 역사, 소위 A.D. 원년이라 불리우는 예수탄생의 역사도 과거에 끈이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끈은 바로 구약 이후 400년 동안 성경이 침묵한 그 기간 동안의 것입니다.
구약은 구약인가보다 하고 신약은 신약인가보다 하지만, 신, 구약 그 사이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배울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의 선지서 부분처럼 바로 이 신 구약 중간 부분도 안개에 싸여있는 동네처럼 늘 뿌연 느낌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도 우리가 조금 투자해서 공부해 놓으면 신,구약이 뻥 뚫리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지 않고 있는 이 기간 동안의 역사를 이스라엘이 소장하고 있는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기록, 세계역사들, 또 역사가들이 기록한 책들을 통해서라도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 신약시대에 나타나는 성경의 주인공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다는 것은 이제 ‘국가’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그 국가를 이루고 있던 제도나 조직도 이젠 옛날 같은 형태로는 재조직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잡혀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유다의 지도층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들에 의해서, 이전의 국가조직처럼은 못 돼도,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데 혁혁한 활동을 한 사람이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였다는 것은 이미 공부했습니다.
이제 중간기 시대를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려놓아야 할 그림이 있습니다. 지금 이 중간기 시대의 사람들이 어디 어디에 흩어져 있는 중인가를 염두에 두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들어가서 나타나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지역뿐만 아니라 그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라 이 중간기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주 옛날에 앗수르에 망했던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얘기를 보면, 그 당시 그들의 예배장소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분명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남방 유다가 포로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같이 하고 싶어했지만 단호히 거절하는 얘기가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이 산’(요4:20)이라고 표현된 그리심산에 예배처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있던 세겜(그리심산)을 복구해서 그들 나름의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키워나간 것입니다. 마치 남방유다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던 것처럼, 그들도 바사제국 말기 즈음에 건설 허가를 받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이 중간시대를 세겜중심의 종교문화를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또한 성경의 사본 중에는 사마리아 사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모세오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섬겨온 흔적이 이렇게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이후 성경은 유다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기록이 없어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신약에 와 보니 예수님이 자라나신 땅은 북방 이스라엘의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팔레스타인 땅 북부지역의 한 도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과는 상종을 안하고 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이 북부 갈릴리 지역에는 살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구약을 공부한 것으로 보면 북방의 10지파들이 살고 있던 땅에는 북이스라엘 사람만 살 것 같았는데, 막상 신약에 오니까 북방땅에도 유다지파 요셉과 마리아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어느 때인지 이 북부 갈릴리쪽에도 정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바사에서 귀환한 백성들은 나름대로 살 곳을 찾아 여기저기 흩어진 것 같습니다. 에스라서 명단에 나타나는 귀환백성들은 주로 레위지파 중심의 지도급 인물과 예루살렘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인데 이들의 후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북쪽 지역으로도 퍼져나가 정착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거나, 북방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거나, 남방 유다지역을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 있거나, 이 사람들은 모두 다 팔레스타인 땅 덩어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서 후손이 퍼져나와 계속해서 신약까지 흘러간 것입니다. 또, 팔레스타인 땅, 가까이로는 요단동편 베레아지역(모압), 데가볼리(갈릴리 동복쪽 이방땅), 지중해 연안의 두로와 시돈 지역에도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3개월 간은 베레야지역에서 사역하시는데 회당에서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눅13:10).
그런데 이 사람들 말고 또 있습니다.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즉 포로로 잡혀갔거나 일찍이 팔레스타인 땅을 벗어나 외국에 흩어져서 계속 거기에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애굽으로도 흩어졌고, 또 우리가 아는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나름대로 살게 됐고, 에스더서에 있는데로 바사(이란)의 수사성에도 유대인 무리들이 살았습니다. 바벨론, 바사의 세력이 지나고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면서 터키 지역(소아시아, 에베소), 유럽(첫 성 빌립, 데살로니가, 마게도냐, 아테네, 고린도 지역 등),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에도 유대인들이 살았습니다. 물론 러시아 쪽으로도 흘러가 산 유대인들이 있습니다(심지어는 일본에도 유대인들이 흘러들어 갔다는 사실을 전시해 놓은 사진을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0.
바울사도가 이방을 전도할 때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도한 것을 보면, 위에서 설명한 세게 여러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 나름대로 회당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 바뀌고 바뀌는 팔레스타인 땅의 패권 –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70년간 바벨론에 종살이를 합니다. 그 후 구약이 끝날 때는 바사의 통치를 받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바사통치를 받은 총 연수는 약200년입니다. 그러다가 B.C 336년 경 그리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바사를 점령해서 약 30년 간 지배권이 넘어갑니다. 그후 알렉산더의 부하였던 프톨레미가 이집트지역을 점령하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어 100년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나서 역시 알렉산더의 부하 중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프톨레미와 맞수였음)가 팔레스타인 땅을 프톨레미에게서 빼앗는 바람에 이번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셀주크 왕국)왕조가 약 34년 간 지배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유다의 마카비가 B.C. 165년에 셀레우코스에 대항하는 독립전쟁을 일으켜 성공합니다. 그후 약 100녀간을 유대는 독립국가로 있다가 B.C.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게 예루살렘을 점령당하므로 그 유명한 로마제국의 수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것은 다시 한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벨론(70년)⇒ 바사(200년)⇒ 헬라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30년)⇒ 이집트의 프톨레미왕조(100년)⇒ 앗수르
바벨론 통치자 셀레우코스왕조(34년)⇒ 유다가 독립함(100년)⇒ 로마의 점령(B.C. 63년)⇒ 예수 탄생(B.C.4년)
1) 첫째 주인: 바벨론 – 바벨론은 70년 동안 유다를 지배합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
두스(벨사살)는 혜성처럼 나타난 페르시아 고레스에게 패합니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남
아있는 유대인들은 근근히 그저 개인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이지 특별한 집단이나 공동체 운
동도 없습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고급 인력들은 나름대로 왕궁에 등극되기도 합니다. 이때
다니엘과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이곳에 잡혀온 레위인, 제사장을
중심으로 율법이 가르쳐지고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을 통해 유대인으로서
의 정체의식을 고수합니다.
2) 둘째 주인: 바사(페르시아) – 성경에 나타나는 포로시대의 주인공들은 주로 바사, 즉 페
르시아의 왕들을 많이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포로에게 자유령을 내렸던 고레스를 비롯해
서 다리오 1세,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1세, 다리오 2세, 아닥사스다 2세를 거쳐 다리오 3세
에 이릅니다. 이 왕들 사이에 함께 살았던 유대지도자들은 다니엘, 스룹바벨, 예수아, 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등입니다. 그러니까 포로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선
지자들은 바사의 영향력 밑에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는 이 동안에 일어났던 성경의 사건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포로귀환, 성전재건, 성곽재건, 개혁운동 등을 통해 새
로운 포로귀한 공동체가 생기는 기간입니다.
후대에 이르러 역사는 이 공동체를 ‘유대교’라고 명명합니다. 구약의 왕국시대까지는 ‘유대교’라는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나라’가 없어진 이후 과거 왕국의 조직이 아닌 세 공동체그룹이 형성되면서 ‘유대교’라는 이름으로 일반 역사 속에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명되게 된 가장 큰 중심 인물은 에스라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띄고 역사에 등장하게 된 다윗의 후손, 유대인입니다. 에스라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했나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외적인 그들의 생활도 점점 달라지지 시작합니다. 페르시아 말기(에스라 후 100년) 즈음부터는 유다는 자체의 화폐를 찍어내고 내국세를 징수라는 정도의 권한이 허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의 제사장 가문 이름의 인(印)들이 찍힌 항아리 손잡이가 발견된 것을 보면 이미 이때부터 제사장들이 바사의 총독으로서 행정관 역할도 한 것이 아닌가 보입니다. 또한 이 때는 이미 대대수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대신 그 당시 공용어였던 아람어를 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적 공용어로는 아람어를 썼지만 히브리어도 기독교 초기까지 계속해서 쓰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헬라문화도 주변을 공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페르시아와 헬라는 자주 접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아직 헬라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전이라 해도 이미 문물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인, 군인, 학자 등이 오고 갔고, 헬라어 공예품들과 드릇들이 뵈니게 항구를 거쳐 유다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이제 유대인들이 헬라문화에 접속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3) 셋째 주인: 그리스(헬라) – 사실 바사의 마지막 왕인 다리우스 3세와 그리스 마게도냐의 알렉산더는 같은 시기에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각각 자기 나라에서 왕이었지요. 그런데 이제 그 패권이 알렉산더에게로 넘어갑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운 사람입니다. 학문과 문화, 철학에 일찍 눈이 떴던 알렉산더는 온 세상을 헬라화시켜야 한다는 분명한 꿈을 갖고 대단한 열정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갔던 사람이었습니다.
B.C. 333년 이수스 전투로 페르시아 군을 패주시킨 후, 뵈니게, 두로, 이집트라 치례로 그의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유다)도 그의 수하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그의 정복은 동방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바벨론 지역을 공격해서 수사(에스더 궁이 있던 곳)까지 점령했고 멀리 인더스강까지 건넜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병에 걸려 서른 세 살이 채 못되어서 죽었습니다(B.C. 325). 정말로 짧고 거창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의 저돌적인 공격은 동방지역에 새로운 획을 그었습니다. 헬라화입니다. 당시로서는 온 세상을 완전히 헬라화하는 바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비록 그는 갔어도 그의 부하들이 이 빼앗은 땅들을 맡아서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4) 넷째 주인: 프톨레미 왕조 – 온 세상을 다 얻다시피 통일천하를 한 알렉산더는 그 어마어마한 땅들을 정복했지만 갑자기 죽는 바람에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에는 서로 권력을 잡으려는 투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 두 사람이 가장 큰 권력을 갖데 되는데, 프톨레미와 셀레우코스였습니다. 프톨레미는 이집트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셀레우코스는 바벨론 땅을 갖게 됩니다. 이 두 경쟁자는 팔레스타인과 뵈니게를 탐냈는데 결국 프톨레미 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은 ‘헬라인이 다스리는 이집트’의 속국이 됩니다. 이 왕조는 1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을 다스립니다. 헬라의 속국이었을 때는 팔레스타인에 이렇다 할 중요한 사건이나 자료들이 없는데 반해 이 프톨레미 왕조는 유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지 않아도 과거 수백년 동안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이집트에 거류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프톨레미 1세가 팔레스타인 원정 중에 많은 포로들을 끌고 왔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생활 터전을 찾아 이민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찍이 프톨레미 1세는 알렉산더 대왕을 기념해서 지중해를 낀 해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개발해서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 도시는 오늘날까지도 대도시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도시에만도 약 백 만 명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있었다고 하니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아볼로라는 사람도 알렉산드리아 출신(행18:24)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집트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 동안 히브리말로 쓰여진 구약성경을 가지고 그 땅의 공용어인 헬라아로 된 구약성경을 만들게 됩니다. B.C. 3세기 경, 프톨레미 2세의 명령에 의해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최초의 번역본을 ‘칠십인경, 혹은 칠십인역’ 이라고 한다고 앞에서도 말씀드렸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세계를 헬라화시켰기 때문에 유대인의 점유물이었던 구약성경도 헬라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신약시대에 와서 온 열방에 복음이 전하되도록 하는 예비 작업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접하게 된 이방인들도 직접 헬라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경건한 이방인들이 생기게 된 바탕이 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다섯 번째 주인: 셀레우코스 왕조
① 선왕들의 호의정책 – 알렉산더 대왕의 유력한 두 부하가 있었다고 했지요? 한 사람은 앞에서 얘기한 프톨레미 왕조를 이룬 프톨레미 1세이고 또 한 사람은 셀레우코스 1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셀레우코스 왕조도 헬라 사람의 왕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역사의 무대에서 일찍 사라졌지만 그의 부하들이 곧 이어 이집트와 바벨론 두 큰 덩어리 땅들을 차지했기 때문에 알렉산더가 원했던 대로 사실은 헬라화가 된 셈입니다.
자, 여러분 알다시피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 끼어있는 땅이 바로 팔레스타인이라 그랬지요? 그렇기 때문에, 늘 양 쪽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프톨레미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훔친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것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100년이 지나는 동안 계속해서 엎치락뒤치락 이것 때문에 싸워왔는데 드디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고, 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습니다(B.C. 198). 우리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안디옥 교회’ 같은 이름도 사실은 이 안티오쿠스 가문의 이름입니다. 어쨌든 이 전쟁으로 셀레우코스 왕조는 팔레스타인을 자기네 영토로 통합해 버립니다.
셀레우코스 1세는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갖고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포로 석방령을 내렸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제의지원을 위한 국가 보조비도 약속 했으며, 제의 종사자들은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마련되었던 제단용 땔감(느10:34)도 면세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전 수리공사비도 보조받게 되었습이다.
그러다 보니 유대 공동체는 역사가 흘러가면서 알렉산더, 프톨레미, 셀레우코스, 이 세 왕조로부터 결국 헬레니즘 문화의 공격을 받게 되는 정황이 된 것입니다. 온 세상이 헬라화 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알게 모르게 이 문화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 안에도 헬라식 도시들이 여러 개 세워졌습니다. 헬라의 문화는 발달된 문화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② 안티오쿠스 4세의 잔인한 유대교 탄압 – 그러네 위기가 닥칩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을 잔혹하게 핍박하는 정책으로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왕들이 정복민들에게 호의적이었는데 이 왕은 태도가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기 역사 중에 아주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장본인이 됩니다. 그의 핍박을 대항해서 유대인들이 투쟁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 유대의 독립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마카비 전쟁입니다.
이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을 핍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선왕 안티오쿠스 3세는 그 당시 점점 무서운 속도로 세력이 확장되어오고 있던 로마와 자꾸 격전을 했는데 결국은 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막대한 조공을 로마에 바쳐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피정복 국가로부터 세금을 뜯어내고, 갖은 방법으로 돈 되는 것을 갈취할 수밖에 없는 악정을 합니다. 신전들을 습격해서 금붙이를 빼앗아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로마에 조공을 바치게 된 상황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프톨레미 6세도 다시 팔레스타인을 찾고 싶어서 위협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안티오쿠스 4세는 우선 내정을 정돈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도시국가 같은 정복국들을 ‘헬라’라는 구심점으로 통일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우선 종교적으로 헬라의 신들(그리스 신화 아시죠?)을 섬기도록 강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제우스 신이라고 자칭하며 가시적인 신격화를 합니다. 이런 정책을 정복민에게 감행할 때, 유대인들의 형편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순수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어도 시원치 않은 판에, 오히려 유대 공동체는 타락으로 썩고 있었습니다. 헬라화를 은근히 받아들이는 세력도 있었고, 이들은 자연히 셀레우코스 왕실에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썼으며, 그러다 보니 왕실은 돈을 많이 갖다 바치는 사람을 끼고 정치를 하는 겁니다. 대제사장직을 싸고 암투를 벌이는 거지요. 나체로 참석하는 헬라식 운동경기를 열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할례의 표기가 부끄러워 재수술을 받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B.C. 167년 급기야 유대인 양민들을 급습하여 학살합니다. 그의 부왕이 내렸던 유대인들에 대한 특혜를 폐지하고 유대교의 모든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했습니다. 희생제사를 금지했고, 안식일과 절기 지키는 것을 금했고, 율법의 사본들을 파기하는 명령을 내렸고, 할례를 금지시켰습니다.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한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이교의 제단들을 도처에 세웠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숭배하게 했으며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6) 마카비 혁명
① 하스모니안 왕조와 헤롯왕조 – 유대인들은 이 잔인한 탄압을 무장을 하고 궐기하게 됩니다. 이 때 율법과 언약에 열심이었던 제사장 가문에 속한 맛다디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들들(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살, 요나단)과 함께 이 탄압에 대항하여 투쟁합니다. 결국 이들의 활동으로 안티오쿠스 4세에게서 독립하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우리는 흔히 마카비운동이라고 부릅니다. ‘마카비’란 맛다디아의 셋째아들 유다의 별명인데 ‘쇠망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승리로 마카비 가문은 100년 동안 독립을 합니다. B.C. 166년 유다의 마카비가 앗수르의 안티오쿠스 4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은 후 그 다음 해인 B.C. 165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는데 바로 이를 기념하는 명절이 신약에도 나오는 수전절입니다. 그 때 아래로 마카비의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유대인들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 왕조를 하스모이안 왕조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제4대까지 내려왔을 때는 예루살렘 동남쪽의 이두매(에돔지역)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이 때 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총독들을 두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안티파스(B.C. 78년 사망)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에돔을 다스리던 왕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대헤롯:마2:1-12)의 할아버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다 역사에 등장하게 된 헤롯가문(에돔가문)이 후에는 점점 로마세력이 커진다는 정세를 파악하고는 자꾸 친 로마 정책을 폅니다. 그러다가 로마를 등에 업고 마카비 왕조에 반역합니다. 로마와 손을 잡고 출발한 헤롯 왕조는 후에 유대의 왕자리를 빼앗아 왕이 됩니다. 그러니 헤롯가문은 유대인이 볼 때는 반역자인데, 그 밑에 복종해야 하는 기가막힌 관계를 갖고 출발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 탄생하시는 그 시각에 유대의 왕으로 에돔 사람 헤롯대왕이 있었고, 그 위에 로마라는 큰 지배세력이 버티고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제부터 ‘이중 지배구조의 압제’라는 틀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 이와 같이 셀레우코스 왕국(앗수르 지역)의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와의 전쟁으로 독립을 얻어낸 유다 마카비 혁명의 역사는 앞으로 전개될 신약시대의 정치 구조에 큰 영향을 기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신약에 헤롯가문이 등장하게 되는지 그 연고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카비 시대와 관련되어 탄생되는 헤롯왕조의 가문을 이해해야 신약시대의 정치 판도가 보이디 시작합니다.
② 마카비 시대의 유대교 부흥 – 마카비 운동의 시작은 다섯 형제의 아버지 맛다디아였습니다. 유대 공동체 내에서는(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했지요?) 제사장들이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에 늘 신정적 통치가 있었고, 그 사회를 내적으로 이끄는 지도급은 성전중심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잔인한 안티오쿠스 4세의 학정은 성전을 핍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과 더불어 싸웠다는 것은 성전문화를 고수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유대인들은 그래서 제일 먼저 성전을 청결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더욱 더 열심을 내고 부흥하게 되는 문화를 낳게 됩니다. 지금까지 여러 종주국에 지배를 받아오다가 마카비 자유시대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마카비 시대’는 소위 ‘유대교가 제도적으로 다져지는 시대’라고 일컬어집니다. 바로 이 마카비 시대 속에서 발전된 유대교가, 에스라시대 이후로, 신약시대 즉 예수님 시대의 영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반드시 어떤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율법 중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주도된 이 새 공동체는 ‘토라’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지키는 일이 가장 기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개혁운동의 핵심은 ‘율법’이었습니다. 즉 안식일, 할례, 정결의식, 십일조, 성전과 제사규례 등을 강조함으로써 정화된 ‘새 이스라엘’ 공동체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새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재정의되게 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로부터 독립한 이 이스라엘은 이제 어엿한 국가적 실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불려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율법을 중심으로 결속된 유다의 남은 자들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유일무이한 최고가지가 된 것입니다. 율법은 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율법을 높이다보니 그 율법에 나타나는 제사행위는 당연히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마카비 혁명을 주도한 맛다디아 가문은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 혈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스모니안 왕조는, 왕이요, 대제사장 역할을 하는 유대 공동체의 정신적 수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역사는 후에 이들 유대 공동체 내에서 ‘누가 대제사장이냐?’가 곧 ‘누가 권력가냐?’로 대치되는 역사를 낳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 첫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 안에서 재물을 사고 파는 사람들을 내쫒은 사건을 압니다. 그 때 그 성전도 바로 이 흐름을 타고 흘러내려 가다가 또 부패하기 시작한 대제사장 부류들이 장사를 하고 있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7) 여섯 번째 주인: 로마 –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가장 유명한 제국이었던 로마도 처음 B.C. 8세기 경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간 쯤에서 생겨난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도시국가 로마는 점점 힘이 강대해져서 B.C. 270년경에는 드디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습니다. 이러면서 잡아온 노예들을 검투사로 만들어 즐겼는데 이런 노예들을 특별히 ‘스파르타쿠스’, 즉 ‘검노’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검노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검노들이 뭉쳐서 반란군이 되었고 급기야는 그 수가 10만이나 이르게 됩니다. 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원로원은 폼페이, 크랏수스를 임명했고 이들은 성공리에 검노들의 반란을 진압합니다. 그 후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을 더 가입시켜서 원로원을 누르고 그 유명한 ‘3두정치’라는 걸 합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케자르, 즉 율리어스 시저(가이사)였습니다. 가이사는 이렇게 해서 등장합니다. 그 후 가시아는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 북이탈리아 지역) 지방에 쳐들어가서 엄청난 숫자의 부족들을 평정합니다.
품페이 장군 역시 여러 지역에 출정(出征)해서 나라들을 합병합니다. 그는 특별히 동방으로 진출해서 터키 지역과 수리아 등지를 정복합니다. B.C. 64년에 다메섹을 점령한 후 수리아 주(州)를 만들더니 1년 후에는 그 아래로 눈을 돌려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 일조를 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전쟁으로 1만 2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카비 혁명으로 시작된 유다의 독립이 약 100년 후 다시 로마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즉 B.C. 63년에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킨 이 사건을 시작으로 로마 통치시대를 견 것입니다. 마카비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 2세는 항복을 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합니다. 이로 인해 힐카누스는 더 이상 왕으로서가 아니고 “대제사장”으로서 유다를 다스리게 됩니다. 폼페이가 그렇게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안티파터(안티파스의 아들, 대헤롯이 아버지)는 “집정관”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지역을 다스리게 해 주었습니다. 이때로부터 마카비 수하에 있었던 헤롯 가문은 공공연히 유다지역의 정치가로 등단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폼페이와 가이사는 패권을 놓고 싸웁니다. 결국 가이사는 이집트에서 폼페이를 죽입니다. 가이사는 여기서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를 만납니다. 이 일로 이집트 프톨레미왕조의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 됩니다. 프톨레미 왕조라는 이름으로 흘러오고 있었던 이집트 기억하시죠? 가이사는 그 후 아프리카와 스페인 싸움에도 승리하여 로마의 영토를 넓혀 나갑니다. 그리고는 최초로 로마를 통일천하하는 주인공이 됩니다. 유대의 힐카누스 2세와 에돔사람 안티파터는 이제 가이사를 섬기게 됩니다. 가이사는 마카비 가문의 힐카누스 2세를 한 지역의 총독 정도로 임명을 했고, 안티파터를 사실상 유대의 행정관으로 임명을 합니다. 안티파터의 세력이 점점 확잦되는 것입니다. 안티파터는 그의 작은 아들 헤롯(이하 나오는 헤롯은 대헤롯)을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던 중 가이사는 그의 충신이었던 부루투스에 의해 살해되어 일생을 마감합니다(B.C. 44년). 가이사는 최초로 천하통일을 하긴 했어도 황제라는 칭함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가이사가 죽은 후, 로마의 힘 싸움은 가이사의 양아들이었던 옥타비아누스와 또 역시 가이사의 신하였던 안토니우스 두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그러는 와중에 안티파터는 살해를 당했고, 그의 아들 대헤롯은 정치적으로 곤궁에 빠집니다. 파르티안들(Parthians, 바대. 오늘날 이란 북부지역, 오순절 사건 때 여기서 온 사람들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다. 행2:9) 이 헤롯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 마카비 하스모니안 가문 중 한 사람인 안티고누스가 이 파르티안들과 합세를 한 것입니다. 헤롯은 결국 이집트로 도망가 있다가 로마로 들어가 있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유다 마카비 가문의 안티고누스는 다시 하스모니안 왕조로서 유다를 통치하게 됩니다 (B.C. 40년 경).
로마로 간 헤롯은 대단한 로비활동을 합니다. 만약 자기를 유대의 왕이 되게 해 주면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로마 원로원은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합니다. 지금 쫓겨온 신세인데 왕으로 임명했다는 말입니다. 현재 유다 땅은 유대인 안티고누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은 헤롯 가문을 ‘에돔의 종놈들’이라고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가 헤롯을 정식 ‘왕’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지금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어도 다시 빼앗어라. 뺏을 때 도와주지!” 그런 뜻이겠지요. 헤롯은 다시 싸워서 이 당을 얻어야 했습니다.
결국 헤롯은 로마군의 지원을 받아 마카비 하스모니안 왕조 계열의 마지막 통치자 안키고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성을 빼앗습니다. 이 때 헤롯을 도와준 사람이 안토니우스였습니다.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대단한 충성을 맹세했겠죠? 이렇게 해서 헤롯은 명실공히 “유대의 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B.C.37년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에돔사람 헤롯가문은 “유대의 왕”으로 다스리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B.C. 37년부터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B.C. 4년까지 유대를 통치합니다. 대헤롯은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동부지역(수리아, 터어키 등 지중해 동쪽 내륙)을 장악했던 안토니우스는 그만 이집트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집니다. 가이사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이라는 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과 해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므로 명실공히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대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예수님 탄생 시기의 로마의 황제입니다. 이때에 아우구스도(아우구스투스)가 영을 내려 천하에 있는 사람들은 다 호적을 하라고 하는 바람에 요셉과 마리아도 그들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내려갔습니다(눅2:1).
이렇게 황제 명칭을 최초로 가긴 사람이 가이사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숭고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나중에 받음)였지만 ‘가이사’라는 이름이 통상 ‘로마황제’를 상징하는 칭호로 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가이사’ 하면, 황제를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