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2010

4. 고대 한민족의 신앙과 번영


다음으로, 아사달에 정착한 고대의 한민족은 어떠한 신앙을 가졌으며, 어떻게 살아갔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왼쪽 사진은 환웅천강도라는 중국에서 발견된 그림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단군신화를 중국인마저도 그대로 믿고 그려놓은 것이지요.

동방에 정착한 셈계의 장자의 백성들은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사달의 넓은 들판과 한반도에 퍼져 나가며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으나 임금을 세우지 아니하고 그들에게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신앙이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규원사화 단군기라는 고대 역사책에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신으로 가장 높은 으뜸 자리에 계시며 천지를 창조하고 전 세계를 주관하고, 수 없이 많은 사물을 만드시니 넓고 넓게 둘러싸므로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아주 밝고 밝아 작은 티끌하나 새지 않도록 하시었다" 


이 단군기에 보는 바와 같이 우리민족의 신에 대한 정의가 확실히 보여지고 있습니다. 유일신이요, 창조의 신이요, 빛과 같이 밝은 신이다.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을 정도로 유대인의 야훼 하나님하고 정의가 똑 같습니다.

또한 고대 한국인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겼다는 사실이 고조선의 역사학자였던 신지(臣智)의 역사책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타나 있습니다. 


"체일용삼(體一用三)이요 삼신일체(三神一體)요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이렇게 쓰여 있는데, 이것은 몸은 하나인데 활동만 창조의 신, 구원의 신, 역사의 신 이런 식으로 활동만 셋으로 한다. 그리고 이 세 신은 사실은 하나이다. 이 셋이 모이면 하나이다. 이런 뜻입니다. 오늘날의 삼위일체 이론하고 완전히 똑같습니다. 그 까마득한 고대의 우리 조상들이 어찌하여 기독교의 신학에서도 가장 어려운 삼위일체 신학을 정통으로 꿰뚫었을까요? 


그것은 원래 우리 민족의 집안이 셈의 제사장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인 윤내헌 교수의 고조선사 연구에 보면 "이는 3.1 사상 또는 삼위일체 사상이라고 하는데 그 후에 한민족 사상의 주요한 요소를 형성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흑백논리도 아니고, 있다 없다도 아닌, 항상 세 개의 요소로 설명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임금일지라도 항상 나무로 된 집을 짓고 살았고, 돌로 된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땅은 나그네와 같은 삶이고 돌아갈 집이 저 세상에 있다는 나그네 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이 나그네 정신과, 훗날에는 구원, 천국, 낙원이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복음의 전파가 없었을 때에도 자생적으로 메시아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어떤 때는 미륵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정도령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지만, 사상 자체는 메시아를 갈망하는 사상이 우리 민족의 고유의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김진홍 목사님의 강연에도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고대 한국인이 지켜 오던 법으로서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은 유대인들의 십계명과 매우 유사합니다. 오히려 열 개로 늘려 있는 것을 십계명의 뜻은 다 들어 있는 일곱 가지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여덟 번째 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는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라.
  2.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생명있는 것을 사랑하라.
  3.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내신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4.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5. 서로 시기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라.
  6.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도둑당한 집의 노비로 삼는다
  7. 남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서 갚아야한다.
  8.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또한 고대 한국인들은 수천 년 동안 왕을 세우지 않고 신정일치의 전통을 잘 이어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사무엘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이 그토록 원했던 그 사상을 고대 한국인들은 오래도록 잘 지켜 온 것입니다. 즉 천군(天君)이라는 제사장의 인도 하에 신정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도읍의 이름도 신시(神市), 즉, 하나님의 도시, 하나님의 마을로 불렀던 것입니다. 나라를 세운 목적도 특정인의 이익이나 특정 종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은 놀랍게도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사람 사회에 유익을 끼친다, 모든 인류에게 봉사한다는 뜻의 '이타주의 사상', '박애(博愛)사상', 즉 기독교로 볼 때 '아가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나라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위해 세워진 나라는 우리나라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단군(檀君)이 나라를 이끌어 왔는데요, 단군은 어떤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직책의 이름이었습니다. 단군(檀君)이란 신단수(神檀樹)라는 거룩한 나무 밑에서 제사를 인도하던 신정일치 사회에서의 천군(天君)을 뜻합니다.


즉 미스터 헤븐(Mr. Heaven)이지요. 생명나무(生命樹), 즉,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거룩한 제사를 지내던 천군(天君)을 줄여서 단군(檀君)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도 신이 정한 성역인 에덴동산 중앙에 서 있던 나무아래에서 신에게 경배하였는데요, 우리 민족도 신이 임하셔서 여러 가지를 듣고 지도하던 나무, 즉, 신단수(神檀樹)도 생명나무(生命樹)와 같은 개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방으로 이주한 우리민족은 하나님의 규례대로 장자권자(長子權者)가 백성을 보살피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대제국(大帝國)을 형성하였건만 아무도 영웅호걸을 숭상하지 않고 대제국이라는 이름을 절대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기록도 남지 않아 그 대제국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우리민족을 격하시키기 위해 오랑캐라는 뜻의 동이족(東夷族)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글자 속에 큰 활이 들어가 있습니다. 동방에 있는 활을 잘 쏘는 나라라는 뜻이지요. 지금도 올림픽에서 활 쏘는 종목은 항상 금메달을 따오지요. 그것은 과거부터 우리민족에 그러한 소질이, 유전자가 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동방족(東方族)이라 불리는 고대 한민족의 여러 나라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동쪽으로 이주한 한 형제요 공동체의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와 우애로 살았기 때문에 전쟁이 있을 이유가 없고 자기 자랑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빌로니아다, 앗시리아다, 징기스칸이다 하며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지식의 부족으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약하고 부족한 민족으로 평가절하 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평화를 사랑한 우리 조상들은 흰옷을 즐겨 입어서 '백의민족(白衣民族)' 이라고 불려 졌으며,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고, 작은 자는 큰 자를 공경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 중의 하나인 회남자(淮南子)는 이 동방에 있는 장자권의 나라, 곧 엘람과 앗수르의 나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회남자 대형훈(淮南子 隊形訓)을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으니 동방의 덕목이 어진 고로 군자의 나라가 있다 하느니라."


'중국의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중국의 정치가 혼란에 이르면 동방에 가서 배워 오라.' 이것이 고대 중국사람들이 오랫동안 진심으로 의존했던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21세기의 중국인들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을 회남자(淮南子)의 이 말대로 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동방에 돈 독(毒)이 오른 나라가 있으니... 돈 독(毒) 의 나라라 하느니라."
한류열풍도 돈과 관련하여 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섬김과 사랑으로 이웃나라를 도와서 고대에 빛나던 한민족의 이름을 다시금 높여야 할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고인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고인돌에 대해서는 무덤이다 제단이다 여러 가지 학설이 많습니다마는 원래는 제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제단을 지키던 원로가 돌아가시니까 평생 정들었던 고인돌 밑에 묻어드리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제사보다는 형식만 남아가지고 조상 제사 드리는 무덤으로만 인식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고인돌은 대단히 큽니다. 어떤 것은 상판의 길이가 10m, 폭이 4m 되는 것도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 제단, 거대한 돌 강대상입니다. 그래서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세계적으로 고인돌은 'Dolmen'으로 불리운다. 이것은 우리말의 '돌멩이' 바로 그것이다)


전 세계에 고인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 세계 고인돌의 50퍼센트가 한반도와 만주 땅에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 민족이 거의 대부분이 성직자 집안이었다, 곧, 전 세계 강대상의 50퍼센트가 우리나라에 있었으니, 우리는 제사장 집안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종교적인 민족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세운 고조선의 영역을 지도로 나타내면 왼쪽 그림과 같습니다. 동방족들은 아리라, 곧 지금의 송화강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흩어져 살면서 서로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따라온 중국인들, 곧 야벳 족속들은 중원대륙으로 내려갔을 때, 기술, 종교, 문화적으로 그 능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동방족 형님들에게 계속적으로 도움을 청하게 되었으며, 동방족들은 중국인들을 계속해서 도와주다가 그중의 일부는 아예 산동반도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산동반도와 중국의 동해안에 걸쳐 동이족들이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중국인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기록을 토대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동방족들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해상왕국을 만들게 됩니다. 훗날 장보고 시절에도 이 지도가 그대로 복원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이주해온 경로를 잘 알기 때문에 심지어는 수메르의 잔재로 남아있던 나라, 비록 니므롯의 나라가 되어 버렸고 바벨론의 나라가 되어 버렸지만, 그 추억을 더듬어서 고대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도로 찾아가는데, 그 당시 역사기록을 보면 중동에 '수밀이국'이라는 나라가 있어서 '수밀이국'과 교통하였으며, 무슨 왕 몇 월 며칠에 '수밀이국' 사람 몇명이 찾아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수메르는 망했고, 이미 나라 이름이 바뀌었지만, 과거의 기억을 통해 여전히 수메르라고 불렀으며, 한자로 표현하다 보니 '수밀이'가 된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수메르국 여인의 장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왼쪽 그림은 수메르 땅의 제국인 페르시아, 곧 성경의 '파사'지역에 남아있는 벽화입니다. 이 벽화에 보면 외국사신들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제일 오른쪽에 보시면 긴 도포를 입고 머리에 깃털 장식을 하고 당당하게 칼을 차고 있는 이 청년은 바로 한국 (고구려나 신라)에서온 청년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와 신라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를 나누었음을 이 벽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오른 쪽 그림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 남아있는 사신들의 행렬도 벽화입니다. 전 세계의 사신들이 페르시아 (파사)의 왕에게 알현하면서 선물과 조공을 바치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이 많은 사신 중에 몇몇 사람들은 까마득한 땅 끝, 동방에서부터 온 동방족 사신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3. 한민족의 이동 원인과 이동 경로





그럼, 한민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머나먼 극동(極東), 영어로 'Far East' 라고 하는 한반도까지 왜 왔을까? 에 대한 원인과, 어느 길로 왔을까? 하는 이동경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른 쪽 위의 그림은 알타이어의 발원지인 터키의 아라랏산이고, 오른 쪽 아래 그림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백두산 천지입니다. 아라랏산에서 천지까지 머나먼 길을 우리조상들은 왜 이주해 왔을까요? 그리고 어떤 경로로 이동했을까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세상 어디를 가도 대답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문서로 기록된 증거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11장 9절에 보면, 잘 아시듯이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탑 사건 때 말이 갈리면서 온 지면에 흩으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들도 말이 갈리면서 극동까지 온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성경 외에는 어디에도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말해주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왼쪽 그림은 바벨탑과 유사한 지구라트의 모양입니다.

성경의 이야기와 여러 가지 증거들을 모아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무력으로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많은 민족을 압제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자권자(長子權子)였지만 장자권(長子權) 수호에 실패한 셈의 첫째 아들 엘람 가문과 둘째아들 앗수르 가문 등은 함의 손자요 구스의 아들인 니므롯의 통치 하에서 시달리다가 바벨탑 사건이 터지자 동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이후 성경에서는 그 이름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바벨탑 사건이후에 큰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자권 (長子權)을 잃게 된 것을 통탄해 하면서 이제야말로 신앙적으로 바로 살아보자는 굳은 의지로 빛 되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동방(東方)을 향해 대장정을 떠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동방(東方)이라는 곳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고 해라는 것 은 바로 빛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빛 되신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땅 그곳이 바로 극동(極東), 'Far East' 인 것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백두산 천지의 일출광경입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실 때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몽골 사람들이 한국을 쏠롱고스(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무지개가 동방(東方)에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셈족들이 빛 되신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고자 약속의 땅(무지개 땅), 빛의 땅 동방으로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족보를 잠시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창세기 10장 21절에 보시면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다'라고 해서 셈족 자손 중에서는 에벨이 가장 유명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거꾸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지요. 셈이 여러 아들을 낳았는데, 성경에는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 그리고 그 이후의 자손들을 거쳐 데라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하듯이 셋째 아들의 족보가 나와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장자권자가 가장 중요한데요. 맏아들 엘람과 둘째아들 앗수르라는 가문은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그 이유는, 아우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던 정통 장자권자들이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자 이번에야말로 신앙적으로 바로 살아보자 하는 신앙각성으로 동방으로 떠나 버렸기 때문에 성경에는 사라져 버렸고, 셋째 아들 가문만이 남아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시게 되는 히브리인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은 에벨이라는 이름에서 왔습니다. 에벨이라는 이름은 구약성경에서는 에벨이라고 되어 있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헤버라고 되어 있습니다. 헤버는 헤벌로서 이것이 바로 히브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잘 모르던 시절에 일부 신학자들이 히브리라는 말은 이집트의 노예인 하피루에서 왔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실은 에벨에서 온 말인 것입니다.

셈의 정통 장자권자들이 빛을 찾아 동방으로 떠났을 때 "셈의 장막에 거하면 복을 받으리라"던 노아의 명령을 따라 야벳의 일부 후예들이 셈족을 따라 나섰고, 이들은 그 후에 중국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함의 맏아들 구스 가문의 일부도 셈족을 따랐는데, 이들은 인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예로서 중국인의 고대 지도자들의 미이라가 발견되었는데요, KBS 특집에도 나왔었지요. 중국인들의 조상의 골격은 놀랍게도 동양인이 아니라 백인, 즉 코카시안(Cocasian) 의 두개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보고에 의하면 미이라에 머리칼이 붙어 있었는데, 머리카락도 금발이었습니다. 그래서 흑발의 몽골리안을 따라오던 이들이 몽골리안의 아내들을 많이 맞아서 동양적으로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이나 생활문화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중국말은 영어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의자를 좋아하는 입식(立式)생활을 하는 것도 야벳의 자손임을 알 수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책인 사마천의 사기(史記), 서전 요전(書傳 堯傳)과 같은 역사책에도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史記 五帝本紀)를 보시면 '곡이 진봉의 딸을 취하여 요(堯)를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요(堯)는 요(堯)임금, 순(舜)임금 할 때 요(堯) 임금을 말합니다. 요(堯)의 아버지는 곡이었다고 되어 있는데요, 곡은 성경에도 나옵니다. 이 곡은 야벳의 아들입니다. 마곡이라고 부르지요.


서전 요전(書傳 堯傳)에 보시면 순(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순(舜)의 아버지는 고수였다. 그런데 그 고수는 완고하고 그 어미는 악하며 순(舜)의 아우 상은 교만하였는데, 유독 그 집안에서 순(舜)만이 효로서 화합하고 아름답고 어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堯)의 대를 이어 중국인의 지도자가 된 것이지요. 이 고수도 성경에 나옵니다. 고수는 바로 함의 아들 구스입니다.

셈의 아들인 엘람과 앗수르 중에서 엘람은 성직자적인 분위기였고, 앗수르는 행정, 군사를 담당한 기마민족, 곧 고구려 , 신라까지 연결되는 집안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야벳 가문의 일부와 구스 가문의 일부를 데리고 아라랏 산을 넘어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몽골을 거쳐 만주 땅에 이르는 대장정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명에 우스 라는 이름을 가진, 즉 우스토브, 우스벤스키, 우즈베키스탄 등 의 지역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 우스라는 말의 성경적인 뜻은 천사가 인도해준 땅, 약속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라랏산에서부터 만주까지 오는 길이 너무 머니까 좋은 땅이 나타나면 "아이고 여기가 바로 '우스'다." 하며 의지가 약한 순서대로 주저앉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가까이에서부터 만주 근처까지 우스 라는 말이 붙은 지명이 대단히 많은 것이지요. 이렇게 중간중간 주저앉을 때 "아니다." 하며 계속 나아가고 "아직도 저렇게 해가 뜨고 있잖니?" 하며 끝까지 나아가서, 마치 월드컵때의 투지와 같이 민족의 이동시에도 16강, 8강, 4강에 드는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서 한국인의 이동경로를 지도로 나타내면 오른 쪽 그림과 같습니다. 터키의 동쪽 아라랏. 알타이어의 발원지이자, 흑요석의 발원지이고, 오클라의 발원지, 여기서부터 우리 민족이 대장정을 거쳐 중앙아시아 무슨 스땅을 거쳐 몽골리아, 만추리아 그리고 한반도까지 오게 된 경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바다를 거쳐 일본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또 일부의 사람들이 북동쪽까지 가다가 그 당시 빙하기의 영향으로 얼어붙어 있던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 에스키모가 되었고, 거기서부터 일부는 빙하의 계곡을 따라 캘리포니아 쪽으로, 그리고 미국의 동부 쪽으로 뻗어 가서 오늘날의 아메리카 인디언, 남미의 인디오가 되게 된 것입니다.

셈족을 주축으로 한 일부 야벳과 구스족은 시베리아를 거쳐 바이칼 호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큰 강변의 넓은 땅을 보고, 좌 청룡 우 백호도 아라랏산 근처와 비슷한 곳에 정착하였는데, 이 큰 강을 보니까 수많은 오리, 기러기가 내려앉는 강(오리라, 아리라)이었는데, 이곳이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입니다. '아리라' 라고 강을 부르게 되었고, 그 강변의 넓은 땅의 이름을 아사달, 즉 우스달, 아스달 하여 약속의 땅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스달이죠. 아사달이란 말은 한자(漢字)식 표현이고, 우리 조상은 우스달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곳은 지금의 지명의 보면 '하얼빈' 지역입니다. 


이곳이 바로 약속의 땅, 빛나는 아침의 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이름을 '아침의 나라' 곧 '조선(朝鮮)'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빛나는 아침의 나라, 그것은 바로 고대 우리 조상들이 세운 고조선(古朝鮮)입니다.

그곳을 지도로 보시면 왼쪽 위의 그림과 같습니다. 만주 땅 한가운데 하얼빈 (안중근 의사가 이또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그 장소지요), 이곳이 바로 아사달 지역인 것입니다.

왼쪽 그림은 하얼빈 지역의 넓은 들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아사달 땅이고요. 그리고 이곳은 그 이후에도 고조선의 대를 잇는다고 주장하는 아골타가 중국에 금(金) 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아골타는 놀랍게도 고려사람 김함보의 자손으로서 한국사람임이 밝혀졌습니다. 즉 아골타는 금(金)씨(김씨의 고대발음)로서, 자신의 성을 따서 나라 이름을 금(金) 나라, 곧 금(金)제국을 지은 것입니다.

이곳에 오른 쪽 그림과 같은 비석이 서 있습니다. 금나라의 수도 상경 회령부 의 유적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 기원 추정의 근거(증거)들

1. 언어학적 증거

그럼 먼저 언어, 곧 말에 대해서 보시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민족의 기원에 대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로 언어입니다. 왜냐하면 민족(民族)이라는 것은 어족(語族)으로 분류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는 알타이어에 속하고, 알타이어라고 하는 것은 터키 아라랏산 근처가 발원지입니다. 또 현재 알타이어에 속하는 말은 터키어, 몽골어, 만주어, 그리고 우리 한국어 등등입니다.


이러한 언어들에는 유사한 말이 대단히 많습니다. 한 예로 중앙아시아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등 '--스탄(stan)' 이라는 나라가 대단히 많습니다. 이 스탄이라는 뜻이 사전에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이 영어의 'Land' 곧 '땅'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민족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땅이라는 글자를 'ㅅ당' 으로 표현을 해 왔습니다. 발음대로 읽으면 '스땅' 입니다. 그러다 이제 쌍 디귿으로 통일해서 '땅'으로 발음하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고, 그 외에도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연구는 한국인의 조상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했고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시베리아와 몽골을 지나 만주 땅에 정착했으며, 그 후 한반도, 일본까지 뻗어갔다고 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바로 알타이어의 발원지인 터키의 아라랏산 근처의 마을입니다. 과거의 어느 때인가 우리 조상들이 이 근처 어딘가에 살았을 가능성이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2. 흑요석의 분포
두 번째 한국인의 기원의 대단히 중요한 증거는 흑요석이라는 특수한 돌의 분포입니다. 화살이나 칼 등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재료가 바로 이 흑요석이라는 새카만 돌입니다(왼쪽). 그것을 깨어 가지고 그 파편을 이용해서 도루코 칼처럼 사용하는데요, 갈아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깨면 생선비늘처럼 납작하게 벗겨지듯 깨어집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바드 대학같은 최고의 대학병원 외과의사들이 스텐레스로 된 수술셋트를 선호하는 것이 아니고 흑요석 수술세트를 더 선호합니다. 

그러면은 더 정확히 되고, 수술 후 회복에도 훨씬 더 요긴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이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 촉, 칼 등등이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중앙아시아, 몽골, 만주, 한반도 그리고 미국 인디언 주거지역까지 그대로 연결되어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데 이 흑요석이라는 것이 전세계 아무데서나 생산된다면 이것은 어떤 민족의 기원을 찾아가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될 것입니다. 모든 땅에 다 난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흑요석이라는 돌은 터키의 아라랏산 근처에서만 생산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되었던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 발견되었건 터키에서 돌을 가지고 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요즘 같으면 터키에서 흑요석을 수입해 가지고 한국에서 만들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입, 수출이라는 형태가 아닌 까마득한 고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몽골, 만주, 한반도의 주민들이 흑요석을 썼다는 사실은 바로 과거 어느 때인가 아라랏산 근처에서부터 민족의 운명을 바꿀 중대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먼 여행을 떠나면서 흑요석을 잔뜩 등에 짊어지고 가면서 조금씩 사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흑요석으로 만든 연장들입니다. 이와 같이 갈지 않아도 옆으로 탁 치면 벗겨지듯 나오는 비늘 모양의 파편을 조심스럽게 쥐고 가죽간은 것들을 싹 그리면 도루코 칼 보다 더 잘 나갑니다. 바로 아주 날카로운 연장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오른 편 그림은 아라랏 산인데 이 아라랏 산 근처에서만 흑요석 돌이 나기 때문에 어느 민족이 쓰고 있건 여기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진속에 서있는 돌은 흑요석은 아님)


3. 황토 매장 문화
세 번째로 우리 민족이 장례 시에 시신을 묻었던 매장문화가 민족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고대 한국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황토로 덮어서 매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황토를 구하기 힘들어서 유족들이 관의 일부만 황토를 뿌리고 나머지는 주변에 있는 보통 흙으로 덮어버립니다. 그러나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끝까지 황토로 덮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인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붉은 흙 곧 오클라(okla)로 사람을 매장하는 문화는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중앙아시아, 몽골, 만주, 한반도 등에 이르기까지 다 이러한 풍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부터 대륙을 건너서 인디언까지 아직도 이 붉은 흙을 오클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예로 미국의 오클라호마 라고 하는 주 이름도 인디언 말로서 붉다 혹은 붉은 땅이다, 붉은 땅에 사는 사람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오클라 라고 하는 흙의 사용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메리카까지 넘어갔고, 말까지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물감 중에 황토색을 오컬, 오클러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말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죽은 사람을 오클라, 곧 황토로 매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우리나라 옛날 그림이 아니고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매장 풍습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이와 같이 똑같은 매장문화가 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새, 깃털 숭배문화
또 하나의 한국인의 기원을 알 수 있는 문화적 증거는 날개 혹은 새(鳥) 숭배문화입니다. 고대 한국인들은 새와 날개를 매우 숭상했기 때문에 족장이 죽을 때는 깃털로 싸서 붉은 흙으로 매장을 했었습니다. 또 우리 민족의 깃발도, 지금은 태극기입니다만, 원래 우리 민족 고대의 깃발은 신성한 새 (봉황[鳳凰]새)를 그린 '봉도등(鳳圖騰)'을 사용하였습니다. 또 우리 민족의 장관들, 관료들은 그 계급을 새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 그 이름을 작위라고 해서, 공작, 후작, 자작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새의 이름들이 바로 우리 민족의 관료의 이름에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중국인이나 다른 민족이 배워 간 것이지요.

그리고 이 깃털 숭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중앙아시아, 몽골, 만주 한반도를 거쳐 미국 인디언들까지도 관찰됩니다. 특히 미국 인디언들이 깃털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은 서부영화를 통해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완전히 깃털로 뒤덮여서 나오는 것이 인디언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날개나 깃털, 새를 숭상했을까요? 그 이유는 날개라는 것은 바로 천사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를 간단하게 표현하다 보니까 천사의 몸체 중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날개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날개는 바로 천사의 날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를 숭상하는 것, 거기서부터 기원된 것이 날개 숭배사상인 것입니다.

왼쪽그림은 독수리의 활기찬 날개의 모습이지요. 오른 쪽 아래의 그림은 고구려(高句麗)의 고대(古代) 고분(古墳)에서 발견된 그림입니다. 우리 민족은 높은 사람들의 무덤에 반드시 신성한 새 (예를 들면 지금 이 그림과 같은 봉황(鳳凰)새...)를 그려 놓았습니다. 그것도 동서남북 중에서 죽은 사람이 쳐다보는 가장 중요한 방향인 남쪽에다가 새 그림, 즉 천사의 날개를 그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인도를 받아 천상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소망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 역시 고분(古墳)의 남쪽에 그려져 있는 신성한 새입니다. 붉은 색 때문에 붉을 주(朱) 자를 써서 주작(朱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마는 봉황에서 기원된 것입니다. 그래서 좌 청룡(靑龍), 우 백호(白虎), 남 주작(朱雀), 북 현무(玄武) 하지 않습니까? 반드시 남쪽에 새가 앉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쳐다보는 가장 중요한 방향이 바로 남쪽입니다. 

가장 중요한 곳에 천사가 지키고 서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봉황(鳳凰)새의 수컷은 봉(鳳)이고 암컷은 황(凰)입니다. 그래서 선배한테 얻어먹을 때 남자 선배를 붙들었을 때는 봉(鳳) 잡았다 라하고 여자 선배를 붙들었을 때는 황(凰) 잡았다고 해야 합니다. 봉황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수컷, 암컷 한 쌍을 말하는 것입니다.


5. 무궁화 숭배문화
다섯 번째로 한민족의 기원을 따지는 중요한 문제가 우리 민족의 국화인 무궁화, 무궁화 숭배사상에서 나옵니다. 무궁화의 학명(學名)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입니다. 여기서 보시듯이 원산지가 우리나라가 아니고 메소포타미아 중동에 있는 시리아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궁화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시면 'the Rose of Sharon'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샤론의 꽃'입니다. 이것은 아가서에도 나오듯이 '샤론의 꽃', '샤론의 장미' 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 과거에 급제한 어사에게 씌워주는 어사화도 바로 무궁화입니다. 그리고 화랑들이 쓰고 다니던 모자에 달려 있던 꽃 그것도 무궁화입니다. 그러니까 무궁화가 실재로 활용되고 있던 것이 신라시대부터 이미 확실히 나와 있고, 단군의 이야기에 보면, 그 때 이미 무궁화의 한자식 표현인 목근화 씨를 가지고 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나라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을 보십시오. 대통령의 뒤쪽에 대통령을 나타내는 문장을 보시면, 중간에 무궁화가 있고, 좌우에 봉황새 두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천사가 좌우에서 호위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무궁화가 한 가운데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이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선하고 지혜로운 분만 앉아 있다면 이 민족이 급속히 발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왼편 그림은 현재 우리나라 국화로 쓰이고 있는 분홍색 무궁화를 보여 드리고 있습니다. 꽃잎은 분홍색이고 중간은 빨갛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꽃술이 달려 있는 것이지요.

무궁화 장식은 우리 민족이 고대 때부터 여러 군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 민족의 높은 지위에 있던 여인들이 사용하던 고급 거울 (동경; 銅鏡)로 이 거울 전체가 무궁화 모양을 본 따서 만들어 놓았습니다(오른 편 그림).

또 우리나라의 훈장 중에 최고의 훈장, 그것은 무궁화 대훈장입니다. 이것은 대통령급 이상의 사람들에게만 주는 최고의 훈장입니다(아래 왼쪽). 그런데 이 무궁화대훈장을 오른쪽에 확대해 놓은 것을 보십시오(아래 중간), 노란 부분이 꽃입니다. 그리고 붉은 부분은 형상화해서 크게 빼낸 것이지요. 그리고 중간에 보시면 화랑들이 쓰는 모자가 있습니다. 모자에 장식된 것이 무궁화입니다. 전체도 무궁화고 장식도 무궁화여서, 무궁화로 뒤덮인 이것이 우리나라 최고의 훈장인 것입니다.




무궁화의 학명(學名)이 말하듯이 무궁화는 중동에 대 제국을 이루었던 시리아, 인류 최초의 문명인 에블라 문명의 발상지, 그 나라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위 오른쪽).

왼쪽 그림은 시리아의 정궁(正宮), 가장 큰 궁전의 장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큰 기둥들이 있고, 전체를 무궁화 장식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크게 확대를 해 보면 오른 쪽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군(軍)에 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부대대장쯤 되면은 소령이지요? 소령이 무궁화 꽃입니다. 무궁화가 소령 무늬하고 같습니다.


아래 왼쪽 그림은 시리아 정궁을 멀리서 본 것입니다. 이렇게 기둥들이 있고, 그 기둥 밑에 무궁화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발코니같이 생긴 난관, 이것도 무궁화 잎으로 장식해 두었습니다. 또한 외성 (바깥성벽)도 무궁화 잎으로 장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아래 중간).

메소포타미아를 떠나서도 흑해연안 곧 한민족이 이동해 왔을법한 이동경로를 따라 살펴보면 무궁화들이 끊임없이 피어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아래 오른 쪽).


6. 복식, 의상의 분포
기타 우리 민족의 기원을 추정할 수 있는 것으로서 도기 등의 유적 분포는 생략하고 의상의 분포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래 왼쪽 그림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그려놓은 기마민족(騎馬民族)의 기상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말 타고 다니던 민족들이지요. 흔히 우리민족을 농사를 짓던 농경민족으로 역사학자들이 잘못 가르치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래 가운데 그림은 몽골사람들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의 위상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중앙아시아 그리고 몽골에 이르기까지 기마민족들이 지배를 해 온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이 몽골의 말타기 좋은 핫바지, 승마바지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아래 오른 쪽 그림은 우리 민족의 고대 고구려의 고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고분에서도 이 승마바지, 핫바지의 그림을 볼 수 있고, 또한 신라에까지도 연결됩니다. 곧, 신라 경주의 천마총에 보시면 천마가 그려있는 말안장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은 임금의 무덤인데요, 천마가 그려진 말안장은 자작나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자작나무는 북방 시베리아쪽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이것은 곧 메소포타미아를 떠나서 몽골 만주 한반도를 거쳐오면서 기마민족(騎馬民族)들이 북방 아시아를 지배하고 다스려 온 것이고 그 후예가 신라에까지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북방에서부터 내려온 기마민족(騎馬民族)이었던 것입니다.

1. 한국인의 기원

한국인의 기원에 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은 사도행전에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다" 고 하여 모든 족속, 즉, 한국인 뿐 아니라 흑인, 백인 모든 사람이 한 혈통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는, 구약에서 신약까지 성경 전반의 일관된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많은 과학적인 지식으로 볼 때 과연 한국인의 기원은 이러한 성경의 지식과 어떻게 연결될 것이며, 한국인의 기원의 현실은 어떠한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과학적으로 한국인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증거는 크게 여섯 가지 중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 즉 입니다. 왜냐하면 민족은 곧 어족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어는 알타이어족에 속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고대인이 쓰던 아주 중요한 도구가 한국인의 기원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합니다.


세 번째로 장사지내는 매장문화인데, 그때 사용하는 붉은 흙을 우리는 황토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아시아 사람들은 아직도 '오클라' 하고 부릅니다. 지금도 물감에서 사용되는 붉은 색을 '오클라' 라고 부릅니다.


네 번째로 날개, 즉 깃털이나 를 숭상하는 문화, 이것이 한국인의 기원을 추정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증거를 줍니다.


다섯 번째로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 이 무궁화라는 것이 신통하게도 한국인의 기원에 아주 깊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또 여섯 번째는 기타 여러 가지 것들인데요, 아시아 북방계 지역에 있는 유적의 분포. 특히 재미있는 것은 의상, 곧 핫바지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한국인의 기원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신 구약 중간시대를 알아야 신약이 열립니다 2 – 신약에 등장하는 주요 직책들



헤롯왕? 분봉왕? 총독? 산헤드린 공의회?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파? 사두개파열심당엣센파?...

1) 헤롯 성경에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나타났던 대헤롯(Herod Great. B.C. 37-4)도 헤롯왕이라고 말하고, 또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30세 어간에 있었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B.C. 4- AD 39:대헤롯의 아들, 아켈라오 동생. BC 78년에 사망한 최초의 에돔 왕 안티파스와 이름은 같지만 4대째 내려온 때임)도 헤롯이라고 지칭합니다.

대헤롯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서 알다시피 소위 헤롯가문을 유다에 튼튼히 으로 자리매김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이후에도 약 30년 이상을 다스린 사람입니다. 마치 남방 유다를 쳐들어온 애굽과 바벨론이 자기 말 잘 듣는 왕을 세워놓고 떠났던 것과 똑 같은 그런 식으로 된 왕이지요. 식민 백성은 유대인이요, 꼭뚝각시 왕은 에돔사람이요, 실권자는 로마인 셈입니다. 그는 BC 37-4년까지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건축도 시작했고, 여러 도시들을 세워 나가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통치 말년에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인데, 어떻게 해서 얻은 유대인의 왕자리인데, 자기 말고 누군가 유대인의 왕이 난다니, 이 대단한 헤롯이 가만 있을 리가 없지요. 유아들을 다 살해하라는 명령까지 냈는데 그만 자기가 죽어버립니다


BC 4년 봄에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BC 4년이라고도 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일찍이 BC 5년 겨울로 잡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이 대헤롯의 죽음이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계산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유대인의 왕예수께서 나타나시자마자, :“유대인의 왕대헤롯이 죽는다는 사실이…)

그러니까 예수께서 성인(30)으로서 활동하시는 때는 더 이상 이 대헤롯 왕 때가 아닙니다. 그의 아들들이 다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여럿이었다는 겁니다. 안티파스, 빌립, 아켈라오입니다. 누구 한 사람을 지명해서 왕을 잇게 했으면 우리도 안 복잡할텐데, 대헤롯은 아들 셋에게 골고루 나눠주겠다고 유언을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데 그 쪼그만 땅을 또 조각조작 나눠 따로 다스리게 해 놨으니 우린 여간 골치 아픈게 아닙니다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요단 동편)을 줍니다. 빌립에게는 갈릴리 북동부 지역을 물려줍니다. 그리고 아켈라오에게는 유다, 사라미아, 이두매(에돔지역)의 통치권을 줍니다. 아켈라오에게 반을 주었고 나머지를 두 아들에게 준 셈입니다.

이렇게 나눠진 땅을 다스리던 왕들을 가리켜서 분봉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헤롯이 유언했다고 다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인가를 받아서 되는 것인데 분봉왕 ethnarch’ king’(대헤롯 같은)보다는 낮은 지위입니다. 한국말로는 똑 같은 분봉왕이지만 분봉왕 ethnarch’분봉왕 tetrarch’보다 높은 지위로 불리던 명칭입니다. 아켈라오에게는 ethnarch, 빌립에게는 tetrarch라는 명칭으로 허락합니다.

아켈리오 는 마태복음 2 22절에서 한번 성경에 언급됩니다. 이집트에 피난갔던 예수님의 가족이 유대지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갈릴리로 올라가 살게 된 경위를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유대 예루살렘과 사마이아 에돔직역을 분할받습니다. 유대지역은 아켈라오 영역이었습니다.

빌립 이 다스리던 갈릴리 북동부 지역은 주로 이방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이사랴 빌립보는 그가 세운 도시였습니다. 이것 역시 로마황제 가이사를 가리기 위해서 지은 도시였습니다. 이미 가이사랴라는 도시[건축광 아버지 대헤롯이 세웠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체포된 후 로마에 재판 받으러 가기 전에 2년 동안 억류되어 있던 곳]가 지중해 연안 해변에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와 구분하기 위해 자기이름도 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했습니다. 북쪽의 헐몬산 자락에 있는 휴양도시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셔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기도 하신 그 곳입니다.

헤롯 안티파스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대헤롯의 아들 분봉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 중에 나오는 헤롯왕은 바로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한 언급이 세 번 있습니다. 그는 헤롯 빌립(분봉왕 빌립은 아님, 다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왕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이 사건을 질책합니다

결국은 이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후 예수님의 활동이 활발해지지 죽었던 요한이 살아난 것 아닌가 싶어서 매우 초조해 하기도 한 사람입니다(9:7). 그리고 예수님을 매우 보고 싶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 헤롯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그도 아버지를 닮아 건축광이었습니다. 갈릴리에 디베랴라는 도시도 건설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나타났던 헤롯가문들은 그 후 사도 바울이 선교하는 동안에도 계속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승천이후 사도행전으로 들어가면서부터는 다른 헤롯왕들이 나타나지요. 이 때 나타나는 헤롯왕가의 이름이 바로 가르립바입니다. 그들의 아버지 대헤롯의 형, 그러니까 그들의 삼촌들 가운데 파사엘이라고 하는사람의 혈통을 타고 내려온 다른 계열의 사람들입니다.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결국은 충이 먹어 죽은 헤롯왕(12)입니다. 처음으로 아그립바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 후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올라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됩니다. A.D. 55년경에 이르면 갈릴리와 데가볼리,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며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으로 A.D. 100년 경까지 다스립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것 아시지요? 이미 1, 2, 3차 선교여행을 다마치고 예루살렘에 헌금 전달하러 갔다가 체포된 얘기 말입니다

데사로니가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서, 로마서 편지를 이미 다 쓴 시점이지요. 바울은 자기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해서 일단 가이사랴 감옥에 억류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유대총독 관저가 있었다)에 있는 동안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있었던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합니다(빌라도 다음에 나타난 총독). 

이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아그립바 2세가 가이사랴로 방문오는데 이때 바울이 그들 앞에서 간증을 합니다. 그 유명한 바울의 개인 구원 간증이 이 아그립바 2세 앞에서 한 간증입니다(25-26). 아그립바 2세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은 수 있을 뻔하였다”(26:28, 32)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2) 총독 - 방금 위에서도 총독이 등장했지만, 그럼 총독은 또 뭘까요? 로마지배 아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헤롯이 왕으로 있었고, 거기다가 또 유다자체에도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약시대의 배경이 이다지도 복잡합니다.

보통 전쟁을 해서 나라를 빼앗으면 그 나라를 다스리기는 다스려야 하니까 누군가 통치자를 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통상 정복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통치자(king, ethnarch, tetrarch)로 새로 세운 다음에, 그 사람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배울 때 애굽의 바로느고가 백성들이 세운 여호아하스는 잡아가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던 것 기억나시지요? 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도 여호야긴은 잡아가고 그 아자비 시드기야를 대힌 왕으로 세웠던 것 생각나시지요

그것처럼 자기 말 잘 듣는 왕을 만들어 놓고 원격조정하는 것이 보통 하는 식민정책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세울 왕이 없을 때는 본국에서 사람을 파견합니다. 그 사람을 총독이라고 불렀습니다. 포로시대 때 느헤미야는 총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을 빌라도 총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왜 분봉왕이 있었는데 또 총독도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런 연유입니다.

대헤롯이 아들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죽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중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에돔지역을 통치하는 분봉왕이었는데 그만 정치를 잘 못했습니다. 너무 야만적인 독제정치를 했습니다. 가이사(아우구스투스)는 유화정책으로 다스리라 그랬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이 때 아켈라오는 2,000~3,000명을 죽였습니다. 이 일로 유대는(예루살렘 지역) 혼란해졌습니다. 폭동은 더 심하게 번져갔고 로마의 개입으로 진정됩니다. 유대지역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헤롯가문의 통치를 못 받겠다고 종식기켜달라는 청원을 로마 가이사에게 합니다.

가이샤는 아켈라오를 로마로 소환했고, 고올(Gaul 프랑스)이라는 곳으로 추방시킵니다. 정치를 잘 못한 거지요. 그 이후부터 유대 예루살렘 지역만(갈릴리는 아닙니다. 분봉왕이 있습니다)은 분봉왕이 다스리지 않고 직접 로마의 직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총독이 파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헤롯의 아들, 분봉왕 아켈라오가 다스리던 유대지역은 첫 로마 총독 코포니우스(1)를 시작으로 해서 마르쿠스 얌비블루스(2), 아니우스 루푸스(3), 발레리우스 그라투스(4)를 거쳐 우리가 잘 아는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 5, AD 26-36) 로 이어집니다. 예수님 당시의 총독입니다. 그러다가 바울 때에 가서 나타나는 총독이 위에서 얘기한 벨릭스와 베스도 이런 사람들입니다.

총독의 관저는 가이사랴(지중해변)에 있었는데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마침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소동을 염려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관저에 와 있었고, 헤롯 안티파스도 같은 이유로 성 안에 자기 관저에 있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왔다갔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로마총독들이 가이사랴에 머뭅니다. 거기 영체자 있었기 때문에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체포됐지만 가이사랴로 후송되었습니다.

3) 산헤드린공의회 황제나, 헤롯가문이나, 총독이나 그런 정복자들은 순수 유대인 공동체에서 볼 때는 적들입니다. 힘이 없어 당하고 있는 것이지 힘만 있다면 들고 일어나서 독립하고 싶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다보니 바로 이 순수 유대인 공동체 속에는 나름대로 그들을 대표하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라는 겁니다. 이 말 속에 들어있는 공의회라는 말이 시사해 주듯이 이것은 의회를 가리킵니다. 유대인 최고 자치 의결기관입니다

황제나, 헤롯이나, 총독 같은 외부세력 말고, 유대 공동체 속에서는 가장 높은 소위 정치기관이 바로 이 의회였습니다. 공식적인 주권은 비록 로마나 헤롯왕이 갖고 있었으나 산헤드린 공의회는 사법적 기능과 입법적 기능, 그리고 행정적 기능까지 갖고, 어느 선 까지는 자치적으로 정치를 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18:31)”라고 한 말에 나타난 법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법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예외는 이방인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죄를 범했을 때입니다. 물론 모든 법은 율법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 공의회라는 것은 언제부터 있어왔는가? 우리는 이 공의회를 쉽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주 먼 옛날 모세시대 때 돕는 백부장, 오십부장 등이 있었지요? 그 사람들을 장로라고 불러왔습니다(27:1). 이들은 그 후 여호수아나 사사시대를 지나오면서도 계속해서 백성들의 대표로 유대사회에서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장로들’, ‘귀인들’, ‘방백들이라는 이름으로 있어오다가 신약에서는 산헤드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4) 데제사장 산헤드린이 유대인 자치세력으로서 최고의 기관인데 반해 한 개인으로서도 또 대장(?)이 있는 겁니다. 이 대장은 누구였을까요? 이 유대인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였기 때문에 과거 에스라 이래로 대제사장이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위치라고 볼 수 있는 직책이라면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종교당파(신학적 배경)로 말하자면 사두개파였습니다. 이렇게 외형적 전통으로 볼 때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대제사장이요,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지, 사실은 로마나 헤롯이나 총독에 붙어서 자기의 권력을 즐기며 백성들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착취하는 세력으로 쉽게 타락하곤 했습니다.

잘하는 대제사장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라는 직함이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라는 것을 안 정복자들은 아예 이 대제사장까지도 자기네가 다루기 쉬운 사람들을 임명해 버리면 쉽다는 것을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계열의 레위인이 대제사장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을 임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데 눈이 밝은 사람들은 돈을 갖다주고 이 대제사장권을 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 안나스 같은 사람입니다. 물론 유대공동체 내에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남은 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숨어 있는 참 이스라엘, 경건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는 나다나엘, 시므온, 안나, 요셉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대제사장이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영적지도자로 자처하지만 속으로는 결국 로마나 헤롯 가문과 결탁해서 그게 그거인 셈이 된 형국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성전에서 제물을 팔아서 돈을 버는 장사까지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백성들을 대신해서 속죄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5) 서기관, 율법사, 랍비 팔레스타인 땅 본국에 사는 유대인들을 어쨌거나 이런 성전에라고 출입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온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바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율법을 배우고 유대정신을 이어갔습니다. 그 모이게 된 장소를 가리켜 회당이라고 부릅니다. 외국 땅에서 유대정신을 잇게 하는 집회장소인 셈이지요

이 회당은 후에 팔레스타인 땅 안에도 수없이 많이 세워져 교육기관이 되었고, 그 후로 바울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세워집니다. 회당에서 드린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가르치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교육을 한 것입니다. 회당은 이방 땅에서뿐만 아니라 고국에 포로귀환으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도 세워졌습니다. 사실 이 운동은 원래 제사장 겸 학사였던 에스라가 했던 일입니다.

에스라 이후 중간기를 지나오면서부터는 어떻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율법을 쉽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해석하고 쉽게 풀어주는 서기관, 율법교하, 지혜교사, 랍비가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들도 요즈음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성경을 본문으로 하고 설교를 하십니다.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 풀어 해석해 주어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었습니다. 과거 모세 시절에 기록된 모세오경을 포로시대 후기에는 어떻게 적용해야할지 해석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2km’. ‘정결케 하는 규례로 손을 씻을 때는 팔꿈치가지 씻는다등등 율법을 연구하고, 명상하고, 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는 일들을 서기관들이나 율법사들이 한 것입니다. 또 공적인 자료들을 기록하고 필사했던 사람들(왕하12:10)이 있었듯이 서기관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서기관들은 법률가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그 중 일부는 산헤드린의 회원이기도 했습니다. 또 신학자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6) 바리새파(The Pharisees) –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가장 많이 예수님의 사역에 관계된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바리새파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명칭인지는 정확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말은 분리되다. 구별되다라는 의미를 갖도 있습니다. ‘바리새파라는 명칭이 분리된 자들과 관계된 말이라면, 마카비 가문의 거룩한 전쟁에 함께 참여한 전사들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를 거룩하게 생각하며 의식상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별했습니다. 정결 예식과 먹는 법 안식일 계명 등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이들은 실제적으로 백성들의 인정을 받는 그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 그룹들은 엉터리라는 것을 백성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조세프스 기록에 의하면 제사장가문을 욕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중이라는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적으로 보다 종교적인 면에서 더 인정을 받는 그룹이었습니다

니고데모, 바울과 같은 바리새인도 있었던 점으로 보아 진지하게 율법을 연구하며 구약을 계승하려는 그룹임에 틀립없었습니다. 구약에서 흘러 내려오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이들을 통해 명맥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정통 유대인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유대교의 핵심세력이 이들입니다. 사두개파 A.D. 70, 또 한번의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것에 비하면 바리새파야말로 유대교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사두개파(The Sadducess) –사두개파는 유대교 안에서 제사장적 귀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종파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지주들입니다. 이 명칭은 일반적으로 사독에서 유래된 것으로 봅니다. 사독은 다윗시대에 아비아달과 함께 제사장이었고 솔로몬이 아비아달 대신에 대제사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직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카비 혁명을 전후로 해서 제사장 제도가 재정비되고 재조직될 때 사두개파가 하나의 당파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파와는 반대 입장을 취하며 경쟁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교사들과 논쟁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8) 열심당(The Zsalots) – 열심당은 영어의 음역을 따라 셀롯인 시몬’(6:15)이라 표기된 것과 같이 셀롯당이라고도 합니다. 이 당파는 종교적 당파가 아닙니다. 열성적 민족주의 집단입니다. 이들은 마카비활동에 그 기원을 둡니다. 그런데 요세푸스 같은 역사가는 이들을 강도들’, ‘산적으로 불렀습니다. 맹렬한 반로마주의자면서 또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기득권 세력자들에 대해서도 적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토라(모세율법)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칼을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9) 엣센파(The Esseness) – 이밖에도 쿰란 공동체로 불리우는 엣센파가 있었습니다. 경건한 유대 공동체 중의 하나인데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문서들의 발견으로 이 시대의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들이 백성들과 접하는 대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면 이들은 광야에 은둔하는 수도사적 성격을 가진 단체였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이 엣센 공동체에 관계된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추정하기도 합니다. 종교 공동체로서 극기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이 주로 거주했던 동굴 속에서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중에 유명한 것이 사해사본입니다. 이 사본은 구약성경의 정확성을 증명하는 아주 중요한 증거자료로 공헌을 합니다.

<어 성경이 읽어지네 중에서>

신 구약 중간시대를 알아야 신약이 열립니다 1 - 바뀌고 바뀌는 팔레스타인 땅의 패권

말라기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신이 감동되어 말씀이 임한 이후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계시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 그 흔했던 수많은 선지자들의 활동이 더 이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200년 간의 포로 귀환의 역사 속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그 이후 침묵하십니다. 마치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70 식구 얘기가 있은 이후 모세가 등장하기까지 약 400년 동안 성경은 역시 침묵합니다. 그래서 이 400년의 기간을 암흑시대, 또는 , 구약 중간시대라고 일컫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져서 암흑시대라 일컫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도 이 시대에 대해서는 글로 기록된 자료가 가장 빈약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경책에서 구약과 신약 사이는 한 장 차이지만 그 사이에 숨겨져 있는 400년의 역사는 구약을 읽던 우리의 관점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왠지 신약은 구약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어쨌든 구약보다는 좀 수월한 느낌이 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복잡한 역사얘기가 없어서 좋고, 읽으면 그래도 깨달아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어서 친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읽는 신약은 곁으로 그냥 읽어서 얻는 깨달음이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구약을 역사적인 배경과 연결해서 읽지 않으면 윤리와 도덕률을 깨닫는 수준 정도의 교훈밖에는 얻기 힘들고, 눈에 안보이게 깔려있는 수많은 신약의 사건들과 예수님의 교훈은 그래서 읽어도 읽어도 어려울 때가 많은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신약의 배경이 되는 정치구조, 사회구조, 영적인 상황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는 연결된 것이고 흘러온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약에 나타나는 기원 후의 역사, 소위 A.D. 원년이라 불리우는 예수탄생의 역사도 과거에 끈이 매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끈은 바로 구약 이후 400년 동안 성경이 침묵한 그 기간 동안의 것입니다.

구약은 구약인가보다 하고 신약은 신약인가보다 하지만, , 구약 그 사이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배울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의 선지서 부분처럼 바로 이 신 구약 중간 부분도 안개에 싸여있는 동네처럼 늘 뿌연 느낌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도 우리가 조금 투자해서 공부해 놓으면 신,구약이 뻥 뚫리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지 않고 있는 이 기간 동안의 역사를 이스라엘이 소장하고 있는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기록, 세계역사들, 또 역사가들이 기록한 책들을 통해서라도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 신약시대에 나타나는 성경의 주인공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파괴했다는 것은 이제 국가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그 국가를 이루고 있던 제도나 조직도 이젠 옛날 같은 형태로는 재조직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잡혀가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유다의 지도층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들에 의해서, 이전의 국가조직처럼은 못 돼도,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데 혁혁한 활동을 한 사람이 바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였다는 것은 이미 공부했습니다.

이제 중간기 시대를 공부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려놓아야 할 그림이 있습니다. 지금 이 중간기 시대의 사람들이 어디 어디에 흩어져 있는 중인가를 염두에 두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들어가서 나타나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지역뿐만 아니라 그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등장인물들이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라 이 중간기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주 옛날에 앗수르에 망했던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얘기를 보면, 그 당시 그들의 예배장소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분명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남방 유다가 포로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같이 하고 싶어했지만 단호히 거절하는 얘기가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이 산’(4:20)이라고 표현된 그리심산에 예배처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있던 세겜(그리심산)을 복구해서 그들 나름의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 키워나간 것입니다. 마치 남방유다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던 것처럼, 그들도 바사제국 말기 즈음에 건설 허가를 받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이 중간시대를 세겜중심의 종교문화를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또한 성경의 사본 중에는 사마리아 사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모세오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섬겨온 흔적이 이렇게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이후 성경은 유다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기록이 없어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신약에 와 보니 예수님이 자라나신 땅은 북방 이스라엘의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팔레스타인 땅 북부지역의 한 도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과는 상종을 안하고 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이 북부 갈릴리 지역에는 살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구약을 공부한 것으로 보면 북방의 10지파들이 살고 있던 땅에는 북이스라엘 사람만 살 것 같았는데, 막상 신약에 오니까 북방땅에도 유다지파 요셉과 마리아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어느 때인지 이 북부 갈릴리쪽에도 정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바사에서 귀환한 백성들은 나름대로 살 곳을 찾아 여기저기 흩어진 것 같습니다. 에스라서 명단에 나타나는 귀환백성들은 주로 레위지파 중심의 지도급 인물과 예루살렘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들인데 이들의 후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북쪽 지역으로도 퍼져나가 정착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거나, 북방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거나, 남방 유다지역을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 있거나, 이 사람들은 모두 다 팔레스타인 땅 덩어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서 후손이 퍼져나와 계속해서 신약까지 흘러간 것입니다. , 팔레스타인 땅, 가까이로는 요단동편 베레아지역(모압), 데가볼리(갈릴리 동복쪽 이방땅), 지중해 연안의 두로와 시돈 지역에도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3개월 간은 베레야지역에서 사역하시는데 회당에서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13:10).

그런데 이 사람들 말고 또 있습니다.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즉 포로로 잡혀갔거나 일찍이 팔레스타인 땅을 벗어나 외국에 흩어져서 계속 거기에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애굽으로도 흩어졌고, 또 우리가 아는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나름대로 살게 됐고, 에스더서에 있는데로 바사(이란)의 수사성에도 유대인 무리들이 살았습니다. 바벨론, 바사의 세력이 지나고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면서 터키 지역(소아시아, 에베소), 유럽(첫 성 빌립, 데살로니가, 마게도냐, 아테네, 고린도 지역 등),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에도 유대인들이 살았습니다. 물론 러시아 쪽으로도 흘러가 산 유대인들이 있습니다(심지어는 일본에도 유대인들이 흘러들어 갔다는 사실을 전시해 놓은 사진을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0.

바울사도가 이방을 전도할 때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도한 것을 보면, 위에서 설명한 세게 여러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 나름대로 회당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 바뀌고 바뀌는 팔레스타인 땅의 패권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70년간 바벨론에 종살이를 합니다. 그 후 구약이 끝날 때는 바사의 통치를 받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바사통치를 받은 총 연수는 약200년입니다. 그러다가 B.C 336년 경 그리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바사를 점령해서 약 30년 간 지배권이 넘어갑니다. 그후 알렉산더의 부하였던 프톨레미가 이집트지역을 점령하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어 100년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나서 역시 알렉산더의 부하 중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프톨레미와 맞수였음)가 팔레스타인 땅을 프톨레미에게서 빼앗는 바람에 이번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셀주크 왕국)왕조가 약 34년 간 지배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유다의 마카비 B.C. 165년에 셀레우코스에 대항하는 독립전쟁을 일으켜 성공합니다. 그후 약 100녀간을 유대는 독립국가로 있다가 B.C.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게 예루살렘을 점령당하므로 그 유명한 로마제국의 수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것은 다시 한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벨론(70)⇒ 바사(200)⇒ 헬라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30)이집트의 프톨레미왕조(100)앗수르
바벨론 통치자 셀레우코스왕조(34)유다가 독립함(100)⇒ 로마의 점령(B.C. 63)예수 탄생(B.C.4)

1) 첫째 주인: 바벨론 바벨론은 70년 동안 유다를 지배합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
두스(벨사살)는 혜성처럼 나타난 페르시아 고레스에게 패합니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남
아있는 유대인들은 근근히 그저 개인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이지 특별한 집단이나 공동체 운
동도 없습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고급 인력들은 나름대로 왕궁에 등극되기도 합니다. 이때
 다니엘과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이곳에 잡혀온 레위인, 제사장을
 중심으로 율법이 가르쳐지고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을 통해 유대인으로서
의 정체의식을 고수합니다.

2) 둘째 주인: 바사(페르시아) – 성경에 나타나는 포로시대의 주인공들은 주로 바사, 즉 페
르시아의 왕들을 많이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포로에게 자유령을 내렸던 고레스를 비롯해
서 다리오 1,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1, 다리오 2, 아닥사스다 2세를 거쳐 다리오 3
에 이릅니다. 이 왕들 사이에 함께 살았던 유대지도자들은 다니엘, 스룹바벨, 예수아, 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등입니다. 그러니까 포로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선
지자들은 바사의 영향력 밑에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는 이 동안에 일어났던 성경의 사건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포로귀환, 성전재건, 성곽재건, 개혁운동 등을 통해 새
로운 포로귀한 공동체가 생기는 기간입니다.

후대에 이르러 역사는 이 공동체를 유대교라고 명명합니다. 구약의 왕국시대까지는 유대교라는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나라가 없어진 이후 과거 왕국의 조직이 아닌 세 공동체그룹이 형성되면서 유대교라는 이름으로 일반 역사 속에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명되게 된 가장 큰 중심 인물은 에스라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띄고 역사에 등장하게 된 다윗의 후손, 유대인입니다. 에스라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했나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외적인 그들의 생활도 점점 달라지지 시작합니다. 페르시아 말기(에스라 후 100) 즈음부터는 유다는 자체의 화폐를 찍어내고 내국세를 징수라는 정도의 권한이 허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의 제사장 가문 이름의 인()들이 찍힌 항아리 손잡이가 발견된 것을 보면 이미 이때부터 제사장들이 바사의 총독으로서 행정관 역할도 한 것이 아닌가 보입니다. 또한 이 때는 이미 대대수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대신 그 당시 공용어였던 아람어를 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적 공용어로는 아람어를 썼지만 히브리어도 기독교 초기까지 계속해서 쓰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헬라문화도 주변을 공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페르시아와 헬라는 자주 접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아직 헬라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전이라 해도 이미 문물은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인, 군인, 학자 등이 오고 갔고, 헬라어 공예품들과 드릇들이 뵈니게 항구를 거쳐 유다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이제 유대인들이 헬라문화에 접속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3) 셋째 주인: 그리스(헬라) – 사실 바사의 마지막 왕인 다리우스 3세와 그리스 마게도냐의 알렉산더는 같은 시기에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각각 자기 나라에서 왕이었지요. 그런데 이제 그 패권이 알렉산더에게로 넘어갑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운 사람입니다. 학문과 문화, 철학에 일찍 눈이 떴던 알렉산더는 온 세상을 헬라화시켜야 한다는 분명한 꿈을 갖고 대단한 열정으로 세상을 정복해 나갔던 사람이었습니다


B.C. 333년 이수스 전투로 페르시아 군을 패주시킨 후, 뵈니게, 두로, 이집트라 치례로 그의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유다)도 그의 수하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 그의 정복은 동방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바벨론 지역을 공격해서 수사(에스더 궁이 있던 곳)까지 점령했고 멀리 인더스강까지 건넜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병에 걸려 서른 세 살이 채 못되어서 죽었습니다(B.C. 325). 정말로 짧고 거창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의 저돌적인 공격은 동방지역에 새로운 획을 그었습니다. 헬라화입니다. 당시로서는 온 세상을 완전히 헬라화하는 바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비록 그는 갔어도 그의 부하들이 이 빼앗은 땅들을 맡아서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4) 넷째 주인: 프톨레미 왕조 온 세상을 다 얻다시피 통일천하를 한 알렉산더는 그 어마어마한 땅들을 정복했지만 갑자기 죽는 바람에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에는 서로 권력을 잡으려는 투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 두 사람이 가장 큰 권력을 갖데 되는데, 프톨레미와 셀레우코스였습니다. 프톨레미는 이집트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셀레우코스는 바벨론 땅을 갖게 됩니다. 이 두 경쟁자는 팔레스타인과 뵈니게를 탐냈는데 결국 프톨레미 손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은 헬라인이 다스리는 이집트의 속국이 됩니다. 이 왕조는 100년 동안 팔레스타인을 다스립니다. 헬라의 속국이었을 때는 팔레스타인에 이렇다 할 중요한 사건이나 자료들이 없는데 반해 이 프톨레미 왕조는 유대 공동체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지 않아도 과거 수백년 동안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이집트에 거류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프톨레미 1세가 팔레스타인 원정 중에 많은 포로들을 끌고 왔다고 합니다. 그밖에도 생활 터전을 찾아 이민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찍이 프톨레미 1세는 알렉산더 대왕을 기념해서 지중해를 낀 해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개발해서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 도시는 오늘날까지도 대도시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도시에만도 약 백 만 명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있었다고 하니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아볼로라는 사람도 알렉산드리아 출신(18:24)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집트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 동안 히브리말로 쓰여진 구약성경을 가지고 그 땅의 공용어인 헬라아로 된 구약성경을 만들게 됩니다. B.C. 3세기 경, 프톨레미 2세의 명령에 의해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최초의 번역본을 칠십인경, 혹은 칠십인역 이라고 한다고 앞에서도 말씀드렸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세계를 헬라화시켰기 때문에 유대인의 점유물이었던 구약성경도 헬라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신약시대에 와서 온 열방에 복음이 전하되도록 하는 예비 작업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접하게 된 이방인들도 직접 헬라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경건한 이방인들이 생기게 된 바탕이 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 다섯 번째 주인: 셀레우코스 왕조
① 선왕들의 호의정책 알렉산더 대왕의 유력한 두 부하가 있었다고 했지요? 한 사람은 앞에서 얘기한 프톨레미 왕조를 이룬 프톨레미 1세이고 또 한 사람은 셀레우코스 1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셀레우코스 왕조도 헬라 사람의 왕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역사의 무대에서 일찍 사라졌지만 그의 부하들이 곧 이어 이집트와 바벨론 두 큰 덩어리 땅들을 차지했기 때문에 알렉산더가 원했던 대로 사실은 헬라화가 된 셈입니다.

, 여러분 알다시피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 끼어있는 땅이 바로 팔레스타인이라 그랬지요? 그렇기 때문에, 늘 양 쪽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프톨레미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훔친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것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100년이 지나는 동안 계속해서 엎치락뒤치락 이것 때문에 싸워왔는데 드디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고, 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습니다(B.C. 198). 우리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안디옥 교회같은 이름도 사실은 이 안티오쿠스 가문의 이름입니다. 어쨌든 이 전쟁으로 셀레우코스 왕조는 팔레스타인을 자기네 영토로 통합해 버립니다.

셀레우코스 1세는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갖고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포로 석방령을 내렸고, 세금도 면제해 주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었고, 제의지원을 위한 국가 보조비도 약속 했으며, 제의 종사자들은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마련되었던 제단용 땔감(10:34)도 면세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전 수리공사비도 보조받게 되었습이다.

그러다 보니 유대 공동체는 역사가 흘러가면서 알렉산더, 프톨레미, 셀레우코스, 이 세 왕조로부터 결국 헬레니즘 문화의 공격을 받게 되는 정황이 된 것입니다. 온 세상이 헬라화 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알게 모르게 이 문화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 안에도 헬라식 도시들이 여러 개 세워졌습니다. 헬라의 문화는 발달된 문화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겨왔습니다.

② 안티오쿠스 4세의 잔인한 유대교 탄압 그러네 위기가 닥칩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을 잔혹하게 핍박하는 정책으로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왕들이 정복민들에게 호의적이었는데 이 왕은 태도가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기 역사 중에 아주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장본인이 됩니다. 그의 핍박을 대항해서 유대인들이 투쟁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 유대의 독립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마카비 전쟁입니다.

이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을 핍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선왕 안티오쿠스 3세는 그 당시 점점 무서운 속도로 세력이 확장되어오고 있던 로마와 자꾸 격전을 했는데 결국은 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막대한 조공을 로마에 바쳐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피정복 국가로부터 세금을 뜯어내고, 갖은 방법으로 돈 되는 것을 갈취할 수밖에 없는 악정을 합니다. 신전들을 습격해서 금붙이를 빼앗아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로마에 조공을 바치게 된 상황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프톨레미 6세도 다시 팔레스타인을 찾고 싶어서 위협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안티오쿠스 4세는 우선 내정을 정돈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도시국가 같은 정복국들을 헬라라는 구심점으로 통일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우선 종교적으로 헬라의 신들(그리스 신화 아시죠?)을 섬기도록 강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제우스 신이라고 자칭하며 가시적인 신격화를 합니다. 이런 정책을 정복민에게 감행할 때, 유대인들의 형편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순수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어도 시원치 않은 판에, 오히려 유대 공동체는 타락으로 썩고 있었습니다. 헬라화를 은근히 받아들이는 세력도 있었고, 이들은 자연히 셀레우코스 왕실에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썼으며, 그러다 보니 왕실은 돈을 많이 갖다 바치는 사람을 끼고 정치를 하는 겁니다. 대제사장직을 싸고 암투를 벌이는 거지요. 나체로 참석하는 헬라식 운동경기를 열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할례의 표기가 부끄러워 재수술을 받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B.C. 167년 급기야 유대인 양민들을 급습하여 학살합니다. 그의 부왕이 내렸던 유대인들에 대한 특혜를 폐지하고 유대교의 모든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했습니다. 희생제사를 금지했고, 안식일과 절기 지키는 것을 금했고, 율법의 사본들을 파기하는 명령을 내렸고, 할례를 금지시켰습니다.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한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이교의 제단들을 도처에 세웠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숭배하게 했으며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6) 마카비 혁명
① 하스모니안 왕조와 헤롯왕조 유대인들은 이 잔인한 탄압을 무장을 하고 궐기하게 됩니다. 이 때 율법과 언약에 열심이었던 제사장 가문에 속한 맛다디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들들(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살, 요나단)과 함께 이 탄압에 대항하여 투쟁합니다. 결국 이들의 활동으로 안티오쿠스 4세에게서 독립하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우리는 흔히 마카비운동이라고 부릅니다. ‘마카비란 맛다디아의 셋째아들 유다의 별명인데 쇠망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승리로 마카비 가문은 100년 동안 독립을 합니다. B.C. 166년 유다의 마카비가 앗수르의 안티오쿠스 4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은 후 그 다음 해인 B.C. 165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는데 바로 이를 기념하는 명절이 신약에도 나오는 수전절입니다. 그 때 아래로 마카비의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유대인들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 왕조를 하스모이안 왕조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제4대까지 내려왔을 때는 예루살렘 동남쪽의 이두매(에돔지역)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이 때 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총독들을 두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안티파스(B.C. 78년 사망)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에돔을 다스리던 왕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대헤롯:2:1-12)의 할아버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다 역사에 등장하게 된 헤롯가문(에돔가문)이 후에는 점점 로마세력이 커진다는 정세를 파악하고는 자꾸 친 로마 정책을 폅니다. 그러다가 로마를 등에 업고 마카비 왕조에 반역합니다. 로마와 손을 잡고 출발한 헤롯 왕조는 후에 유대의 왕자리를 빼앗아 왕이 됩니다. 그러니 헤롯가문은 유대인이 볼 때는 반역자인데, 그 밑에 복종해야 하는 기가막힌 관계를 갖고 출발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 탄생하시는 그 시각에 유대의 왕으로 에돔 사람 헤롯대왕이 있었고, 그 위에 로마라는 큰 지배세력이 버티고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제부터 이중 지배구조의 압제라는 틀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셀레우코스 왕국(앗수르 지역)의 안티오쿠스 4(에피파네스)와의 전쟁으로 독립을 얻어낸 유다 마카비 혁명의 역사는 앞으로 전개될 신약시대의 정치 구조에 큰 영향을 기칩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신약에 헤롯가문이 등장하게 되는지 그 연고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카비 시대와 관련되어 탄생되는 헤롯왕조의 가문을 이해해야 신약시대의 정치 판도가 보이디 시작합니다.

② 마카비 시대의 유대교 부흥 마카비 운동의 시작은 다섯 형제의 아버지 맛다디아였습니다. 유대 공동체 내에서는(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했지요?) 제사장들이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에 늘 신정적 통치가 있었고, 그 사회를 내적으로 이끄는 지도급은 성전중심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잔인한 안티오쿠스 4세의 학정은 성전을 핍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과 더불어 싸웠다는 것은 성전문화를 고수했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유대인들은 그래서 제일 먼저 성전을 청결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율법과 성전을 중심으로 더욱 더 열심을 내고 부흥하게 되는 문화를 낳게 됩니다. 지금까지 여러 종주국에 지배를 받아오다가 마카비 자유시대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마카비 시대는 소위 유대교가 제도적으로 다져지는 시대라고 일컬어집니다. 바로 이 마카비 시대 속에서 발전된 유대교가, 에스라시대 이후로, 신약시대 즉 예수님 시대의 영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반드시 어떤 특성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율법 중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주도된 이 새 공동체는 토라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지키는 일이 가장 기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개혁운동의 핵심은 율법이었습니다. 즉 안식일, 할례, 정결의식, 십일조, 성전과 제사규례 등을 강조함으로써 정화된 새 이스라엘공동체의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새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재정의되게 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로부터 독립한 이 이스라엘은 이제 어엿한 국가적 실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불려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율법을 중심으로 결속된 유다의 남은 자들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유일무이한 최고가지가 된 것입니다. 율법은 그들의 상징이었습니다.

율법을 높이다보니 그 율법에 나타나는 제사행위는 당연히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마카비 혁명을 주도한 맛다디아 가문은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 혈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스모니안 왕조는, 왕이요, 대제사장 역할을 하는 유대 공동체의 정신적 수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역사는 후에 이들 유대 공동체 내에서 누가 대제사장이냐?’가 곧 누가 권력가냐?’로 대치되는 역사를 낳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 첫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 안에서 재물을 사고 파는 사람들을 내쫒은 사건을 압니다. 그 때 그 성전도 바로 이 흐름을 타고 흘러내려 가다가 또 부패하기 시작한 대제사장 부류들이 장사를 하고 있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7) 여섯 번째 주인: 로마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가장 유명한 제국이었던 로마도 처음 B.C. 8세기 경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간 쯤에서 생겨난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도시국가 로마는 점점 힘이 강대해져서 B.C. 270년경에는 드디어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습니다. 이러면서 잡아온 노예들을 검투사로 만들어 즐겼는데 이런 노예들을 특별히 스파르타쿠스’, 검노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검노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검노들이 뭉쳐서 반란군이 되었고 급기야는 그 수가 10만이나 이르게 됩니다. 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원로원은 폼페이, 크랏수스를 임명했고 이들은 성공리에 검노들의 반란을 진압합니다. 그 후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을 더 가입시켜서 원로원을 누르고 그 유명한 ‘3두정치라는 걸 합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케자르, 율리어스 시저(가이사)였습니다. 가이사는 이렇게 해서 등장합니다. 그 후 가시아는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 북이탈리아 지역) 지방에 쳐들어가서 엄청난 숫자의 부족들을 평정합니다.

품페이 장군 역시 여러 지역에 출정(出征)해서 나라들을 합병합니다. 그는 특별히 동방으로 진출해서 터키 지역과 수리아 등지를 정복합니다. B.C. 64년에 다메섹을 점령한 후 수리아 주()를 만들더니 1년 후에는 그 아래로 눈을 돌려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 일조를 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전쟁으로 1 2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카비 혁명으로 시작된 유다의 독립이 약 100년 후 다시 로마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B.C. 63년에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킨 사건을 시작으로 로마 통치시대를 것입니다.  마카비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 2세는 항복을 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합니다. 이로 인해 힐카누스는 더 이상 왕으로서가 아니고 대제사장으로서 유다를 다스리게 됩니다. 폼페이가 그렇게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안티파터(안티파스의 아들, 대헤롯이 아버지)집정관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지역을 다스리게 해 주었습니다. 이때로부터 마카비 수하에 있었던 헤롯 가문은 공공연히 유다지역의 정치가로 등단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폼페이와 가이사는 패권을 놓고 싸웁니다. 결국 가이사는 이집트에서 폼페이를 죽입니다. 가이사는 여기서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를 만납니다. 이 일로 이집트 프톨레미왕조의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 됩니다. 프톨레미 왕조라는 이름으로 흘러오고 있었던 이집트 기억하시죠? 가이사는 그 후 아프리카와 스페인 싸움에도 승리하여 로마의 영토를 넓혀 나갑니다. 그리고는 최초로 로마를 통일천하하는 주인공이 됩니다. 유대의 힐카누스 2세와 에돔사람 안티파터는 이제 가이사를 섬기게 됩니다. 가이사는 마카비 가문의 힐카누스 2세를 한 지역의 총독 정도로 임명을 했고, 안티파터를 사실상 유대의 행정관으로 임명을 합니다. 안티파터의 세력이 점점 확잦되는 것입니다. 안티파터는 그의 작은 아들 헤롯(이하 나오는 헤롯은 대헤롯)을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던 중 가이사는 그의 충신이었던 부루투스에 의해 살해되어 일생을 마감합니다(B.C. 44). 가이사는 최초로 천하통일을 하긴 했어도 황제라는 칭함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가이사가 죽은 후, 로마의 힘 싸움은 가이사의 양아들이었던 옥타비아누스와 또 역시 가이사의 신하였던 안토니우스 두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그러는 와중에 안티파터는 살해를 당했고, 그의 아들 대헤롯은 정치적으로 곤궁에 빠집니다. 파르티안들(Parthians, 바대. 오늘날 이란 북부지역, 오순절 사건 때 여기서 온 사람들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다. 2:9) 이 헤롯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 마카비 하스모니안 가문 중 한 사람인 안티고누스가 이 파르티안들과 합세를 한 것입니다. 헤롯은 결국 이집트로 도망가 있다가 로마로 들어가 있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유다 마카비 가문의 안티고누스는 다시 하스모니안 왕조로서 유다를 통치하게 됩니다 (B.C. 40년 경).

로마로 간 헤롯은 대단한 로비활동을 합니다. 만약 자기를 유대의 왕이 되게 해 주면 돈을 내겠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로마 원로원은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합니다. 지금 쫓겨온 신세인데 왕으로 임명했다는 말입니다. 현재 유다 땅은 유대인 안티고누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다 백성들은 헤롯 가문을 에돔의 종놈들이라고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가 헤롯을 정식 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지금 유대인들이 차지하고 있어도 다시 빼앗어라. 뺏을 때 도와주지!” 그런 뜻이겠지요. 헤롯은 다시 싸워서 이 당을 얻어야 했습니다.

결국 헤롯은 로마군의 지원을 받아 마카비 하스모니안 왕조 계열의 마지막 통치자 안키고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성을 빼앗습니다. 이 때 헤롯을 도와준 사람이 안토니우스였습니다.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대단한 충성을 맹세했겠죠? 이렇게 해서 헤롯은 명실공히 유대의 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B.C.37년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에돔사람 헤롯가문은 유대의 왕으로 다스리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B.C. 37년부터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B.C. 4년까지 유대를 통치합니다. 대헤롯은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동부지역(수리아, 터어키 등 지중해 동쪽 내륙)을 장악했던 안토니우스는 그만 이집트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집니다. 가이사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이라는 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과 해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므로 명실공히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대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입니다. 예수님 탄생 시기의 로마의 황제입니다. 이때에 아우구스도(아우구스투스)가 영을 내려 천하에 있는 사람들은 다 호적을 하라고 하는 바람에 요셉과 마리아도 그들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내려갔습니다(2:1).

이렇게 황제 명칭을 최초로 가긴 사람이 가이사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숭고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나중에 받음)였지만 가이사라는 이름이 통상 로마황제를 상징하는 칭호로 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가이사하면, 황제를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