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2009

예수님이 도적같이 몰래 오실까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계6:12~14)

주님께서 “밤중에 도적같이”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께서 마태복음 24:42~44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이 말씀에서 주님의 재림은 몰래 오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을 때에 이루어집니다. 재림은 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것입니다.

주의 오심은 이 땅의 사람들이 가장 적게 기대하고 있을 때에 공중에 나타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밤중에 오는 도적을 예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도적처럼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오실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광경은 온 세상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다 볼 수 있게 될 장엄한 광경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59절에서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재강조해 주시고 있습니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리라”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계6:12~14)” 이 말씀에서 보면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 요즘 많이 논란되고 있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모든 증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오실 때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늘과 땅에서도 일어나는 격변을 모두가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밀스럽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공중에 살짝 오시고 동시에 아주 작은 숫자이기는 하나 당신의 신부들을 비밀스럽게 하늘로 끌어올리겠습니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모습으로 오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른 다는 성경해석은 주님께서 주신 말씀과는 정 반대입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그리고 예수님도 “큰 소리와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들”까지 일어나는 징조를 모든 사람들이 다 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뜻하는 것은?

질문: 예수님의 재림이 뜻하는 것은?

대답: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신자들에게 있어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주고, 또 말씀에 있는 대로 약속과 예언을 꼭 이루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오셨을 때 예언된 바와 마찬가지로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탄생, 삶,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메시야와 관련된 많은 예언들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에 관한 예언 중 예수께서 아직 이루시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바로 이 아직 이루지 않은 남은 예언들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가 처음 오셨을 때는 가장 낮고 겸손한 환경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하늘의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실 것입니다.

이런 차이점에 대해서 구약의 예언서는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7:14; 9:6-7 과 스가랴 14:4을 참조하면, 두 명의 인물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예언서 때문에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고난받는 메사야와 정복하는 메시야를 다른 인물로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점은 바로 이 고난과 정복을 모두 이룰 메시야는 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이사야 53장)의 역할을 첫 번째 오셨을 때 이미 이루셨고, 다시 오실 때는 이스라엘의 구출자와 왕이 되실 것입니다. 스가랴 12:10과 요한계시록 1:7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면서, 이스라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찔린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며 그 분이 처음 오셨을 때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애통해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워 지셨을 때 천사들은 사도들에게 말합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11). 스가랴 14:4는 재림의 장소를 감람산으로 얘기합니다. 마태복음 24:30에는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합니다. 디도서 2:13은 재림을 “영광의 나타남”으로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서는 요한계시록 19:11-16이 가장 자세히 말합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요즈음 교계에는 사후 상태에 대한 이상한 간증과 그와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돌아 다닌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말하는 이상한 이야기들을 일일이 언급해서 그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사후 상태를 분명히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사후 상태의 정확한 모습을 진술하여 성경적 사후 상태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고,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도움을 주려고 한다. 우리들의 궁극적 목적은 어떤 이들이 어떤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데 있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잘 제시하여 나가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적 이해가 확산되어 나갈 때만 교회가 건강하게 설 수 있는 것이다.

1. 사후 상태에 대해서 생각하는 성도들의 기본적인 시각
기본적으로 성도들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미 이 세상에서도 영생을 누리고 있고,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영생을 누리며, 또한 그 후에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영원히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죽은 다음의 상태가 성도들에게 대해 최종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영생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부활체가 누리는 영생의 극치의 빛에서 사후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거부터 신학에서는 사후 상태를 ‘중간 상태’(the intermediate state)라고 말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개개인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성도를 중심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영생과 극치 상태에서 누릴 영생 사이에 있는 시기(즉, 中間期; intermediate period)의 상태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중간 상태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인 ‘하늘’에서의 삶과 불신자들의 중간 상태인 불신자의 영혼만이 ‘지옥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 나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표현한 바와 같이, 최고의 하늘(the highest heaven)과 지옥(hell) 이외에 다른 중간 상태는 없는 것이다. 즉, 천주교회가 말하는 연옥(purgatory)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연옥에 대한 생각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잘못된 생각이 중세기에 발전한 것이다. 중간 상태는 ‘최고의 하늘’과 ‘지옥’뿐인 것이다. 성도들의 중간 상태는 최고의 하늘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고, 불신자들의 중간 상태는 지옥의 고통과 형벌을 미리 누리는 것이다.

2. 성도는 죽으면 하나님께서 계신 그 곳, 즉 ‘하늘’(heaven)에 있게 된다.
성도의 사후 상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면전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하늘(heaven)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편재성(遍在性), 즉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을 부인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늘에만 계신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편재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초월하셔서도 계신다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표현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충만히 채우시면서 계시지만, 또한 이 세상을 초월하신다. 이 초월성을 중점으로 말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심이로다”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초월성을 중심으로 말하는 하늘이라는 말은(루터파 신학자들이 루터를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기를 즐겨하듯이) 장소성 또는 경역성(境域性; locality)을 전혀 배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살과 뼈를 지닌 그러나 변화되신 몸을 가지시고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체를 가지고 있는 곳은 분명히 장소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영혼이 사후에 있게 되는 ‘하늘’(heaven) 또는 ‘최고의 하늘’(the highest heaven) 또는 ‘삼층천’(the third heaven)은 다 같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성경은 이것을 ‘낙원’(paradise)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삼층천과 낙원을 동일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의 한 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인 “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그 문맥상 죽으면 그 영혼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낙원은 루이스 벌코프 등이 잘 지적하듯이 하나님께서 계신 그 ‘하늘’(heaven)을 의미하는 것이다(the paradise is the heaven).

한국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계신 그 ‘하늘’(heaven),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승천하신 그 ‘하늘’(heaven), 그리고 성도들의 영혼이 죽음 후에 있게 될 그 ‘하늘’(heaven)을 번역할 때 ‘천당’(天堂)이라는 용어를 써서 번역해 왔다. “예수 천당”이라는 구호에서 말하는 천당이 바로 이 heaven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사용한 말이다.

이는 단순히 영어의 heaven에 대한 한글 번역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천당(天堂)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늘 집’이라는 뜻으로 한자어 풀이를 해서는 안 되고, 이는 그저 영어의 ‘heaven’ 이라는 말의 번역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죽은 후에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신 그 ‘하늘’(heaven), 한국 교회에서 흔히 그렇게 불러 오던 대로 ‘천당’(heaven)에 있게 되는 것이다.

3. 중간 상태는 영혼의 상태이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그 몸은 무덤에 묻히게 되고, 그리하여 그 몸은 썩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늘’(heaven)에 있을 때 그는 몸을 가지지 않은 영혼으로만 있게 된다. 물론 중세 때에 사후에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일종의 몸(a kind of body)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것은 ‘영체’(airy body)라고 부르는 일도 있어 왔다.

심지어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을 한 이들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모든 바른 신학자들이 성경에 근거해서 바로 생각하여 온 바와 같이 죽은 다음의 상태는 영혼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있는 상태이다. 영은 살과 뼈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후 상태의 영혼이 그 어떤 형태의 몸을 가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특히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는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라는 표현에서 이를 확인받을 수 있을 것이다(히 12:23).

그러므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와 나사로가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비유가 사후 상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주는 비유적 표현으로 주어진 것이지, 그것이 문자적으로 성도들이 사후에 몸을 가진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생각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다른 곳에서 가르치신 것과 모순되는 것을 제시하면서 이 비유를 통해 신자의 사후 상태를 가르치시려고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후 상태가 영혼만의 상태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중간 상태는 영혼의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영혼만이 있는 것이 과연 어떤 상태인지를 적극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몸과 관련된 어떤 생각을 영혼의 상태에 부과해 넣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 아주 분명한 언급이 있지 않으므로 이에 대해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가장 자연스러운 추론을 할 수는 있다. 그리고 성경에 단언되어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추론할 수 있는 것도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좋은 해석의 전통을 따라서 우리는 사후 상태의 영혼이 흰 옷을 입고 있다든지,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성도들이 중간 상태를 지내게 되는 ‘하늘’에서 흰 옷을 입고 있다는 내용의 간증들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찬양한다는 표현들을 그 말씀의 본래적인 의도에 대해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문제가 생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들에 대한 다음 설명에서 분명해 진다: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더라”(계 7:14). 이 말을 문자적으로 취하면 그들의 옷은 붉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어린 양의 구속으로 인한 정결케 함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는 문자적으로 구원 받은 이들의 영혼이 지금 하늘에서 흰 옷을 입고 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구속 받은 이들의 영혼이 집에서 사는 것이 아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부르짖어 기도하는 장면을 바라보면서(계 6:9-11) 그들이 항상 제단 아래 엎드려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이 있는 상태를 이 지상에서 몸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4. 사후의 신자의 영혼은 쉬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순교자들과 증언자들에게 대해 “저희에게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아직 잠시 쉬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부터(계 6:11)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는 본문의 직접적인 대답은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는 것이다(계 6: 11). 그러므로 하늘의 온전케 된 성도들의 영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정해진 때가 차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후의 하늘의 영혼은 기본적으로 그 일을 그치고 쉬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영혼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므로 기도도 하며 찬양도 하며 즐거움도 누리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 좋으나”(빌 1:23)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는 것도 유익하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면서 바울은 그들 중 어느 것을 가릴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결국 자신만을 생각하면 이 세상을 떠나서 주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상태가 성도들의 최종적 상태는 아니므로 성도들은 기쁨을 누리면서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주적으로 말하면 우주 전체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최종적 목적에 도달하는 것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피조세계 전체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러 피조세계가 허무한 것에 굴복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롬 8:19-21 참조). 이는 또한 개인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부활체를 가지고 그 부활한 온전한 존재 전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행하게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5. 사후 상태를 바로 이해하는 성도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이 성경적인 사후 상태의 이해를 가지게 된 성도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1) 지금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근거해서 누리고 있는 영생을 확신하고 그 영생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성령 안에서 사랑과 화평과 희락을 누리고 그것을 전하는 도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사후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면전에 있게 될 것임을 분명히 믿으면서 우리는 죽을 때에도 ‘하늘’ 소망을 가지고 죽음에 임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이 성도들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사후 상태에 대해서 정확하고 바른 이해를 가지고 그 상태가 몸을 가진 상태인 것과 같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3) 그러나 성도의 사후 상태가 최종적인 상태인 것과 같이 생각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온전한 영원 상태를 분명히 하지 않는 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성도들의 궁극적 상태는 부활체를 가지고 새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4)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믿지 않는 이들은 △ 지금 여기서도 영생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한 △ 사후에도 ‘하늘’의 복락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그 영혼이 ‘지옥’의 고통을 미리 경험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 영원의 상태에서도 그 몸과 영혼이 ‘지옥’의 형벌을 영원히 받게 되는 영벌의 상태에 있게 될 것임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만 한다.  <이승구 교수 /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의 시기

우리는 세대주의 신학이건 개혁주의 신학이건 전 천년설이건 무 천년설이건, 성도들의 변화의 시기를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시기로 주장하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이 일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 성경에는 두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휴거와 변화의 시기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다.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께서 강림하실 때, 그때까지 살아 있는 모든 성도들은 일곱째 대접 심판 직전에 하늘로 끌어 올리우는 공중휴거가 있을 것이다. 이 공중휴거는 그 직후에 일곱째 대접 심판으로 말미암는 불로 지구를 소멸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지시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공중에서 영접케 하시는 하나님의 기묘하신 섭리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후에 이 땅에 창조된 새로운 그리스도의 왕국에 내려와 천년 동안의 축복된 생애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은 이처럼 성도들의 휴거 시에 성도들이 홀연히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기존 신학이나 성경해석에서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성도들은 부활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변화한다는 드라마가 종말론의 필수적인 공식이었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는 성도들을 공중으로 끌어 올린다는 휴거는 있어도 휴거될 때 성도들이 변화 받는다는 말은 없다.

그들은 이 변화란 말을 다른 성경구절에서 빌려다가 짜깁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 짜깁기가 제대로 된 짜깁기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빌려다 아무렇게나 짜깁기한 성경구절을 찾아 보기로 한다.

고전15:50-54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살전4장과 고전15장, 이 두 곳의 말씀을 비교해 볼 때, 자연스레 해답이 나오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주 재림의 때에 일어날 일이요 후자의 경우는 마지막 부활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계시로 이 두 사건의 계시의 시차는 천년왕국이 그 중간에 개재해 있는 천 년간이나 된다.

주 재림의 경우,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을 불지만, 마지막 부활의 경우는 그 나머지 모든 성도들을 살리는“마지막 나팔”을 분다. 이 나팔소리에 죽은 성도들은 살아나게 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홀연히 변화 받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나팔을 부는 시기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그 시기를 말하며 이 시기는 천년왕국 이후에 백보좌 심판 때에 있게 된다.

이때 왜 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해야 하며 살아있는 모든 성도들은 변화 받아야 하나?“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때 일제히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때까지 천년왕국에서 혈과 육으로 살아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혈과 육을 벗고 변화 받은 새로운 몸을 입어야 한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홀연한 변화를 통해 이 옷을 입고 신령한 몸을 가지고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맺는 말 : 우리는 과감히 무의미하고 무모한 아직까지의 부활의 논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부활의 방향과 순서조차 제대로 정립해 놓지 못한 신학계를 탓하기에 앞서 성경에서 올바른 부활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곧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주 재림의 소망을 가지려면 올바른 부활관을 가지고 이 부활과 변화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한다.

마지막 때가 왔다는 싸인들은 무엇인가?

질문: 마지막 때가 왔다는 사인들은 무엇인가?

대답: 마태복음 24:5-8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거짓 메시야가 늘어나고, 전쟁이 불거지고, 기아, 전염병, 자연 재해의 증가가 마지막 때가 가까웠음을 알리는 징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마태복음 24:4). 왜냐하면 이런 현상들은 고난의 시작일 뿐, 마지막 때는 아직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6).

많은 사람들이 모든 지진현상과 모든 정치적 붕괴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에 행해진 공격을 급격하게 다가온 말세의 확실한 징조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이지, 마지막 때가 이미 이르렀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경고하길 마지막 때에는 거짓된 가르침이 눈에 띄게 증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디모데전서 4:1). 마직막 때에는 사람들이 갈수록 악해지고, 진리를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때문에 “패망의 때”라고 불립니다 (디모데후서 3:1-9; 데살로니가후서 2:3).

다른 징조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사원 재건축, 이스라엘을 향한 적대감의 증가, 그리고 세계 하나 정부로의 급진 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징조는 이스라엘 국가입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은 서기 70년 이래 처음으로 주권 국가로 인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번창할 것을 약속하시면서 가나안을 “영원한 소유”로 주셨습니다 (창세기 17:8). 이스라엘이 자신의 땅에서 하나의 국가로서 성립되는 일은 종말론적 예언의 입장에서 볼 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종말론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10:14; 11:41; 요한계시록 11:8).

이런 징조들을 마음에 염두해 두면서 우리는 마지막 때를 대비함에 있어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한 사건을 두고 마지막 때가 곧 온다는 확증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준비될 수 있도록 충분한 정보를 주신 것이지, 마지막이 언제인지 주장하라고, 교만해지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겠습니다

사도 시대 이후의 배도의 역사 2

5. 교회와 국가의 연합에 대한 개념
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를 포용한 첫번째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는 예배일에 대한 결정을 포함한 칙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으로 인해서 교회와 국가의 동맹은 한 단계씩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서기 533년, 로마 제국이 쇠퇴해가던 때, 저스틴 황제는 당시 로마의 주교였던 요한 2세에게 폰티펙스 맥시머스라는 제위를 부여함으로써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 버질리우스 교황이 모든 권력을 떠맡게 됨으로써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완성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로마의 주교는 종교적 - 정치적 주교가 되었으며, 교황권의 지배 권력이 확보되었다.

6. 오류의 변천과정과 그 창시자, 어거스틴.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방 종교의 영향력이 증폭되는데 있어서 어거스틴(Augustine) 이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그가 젊었을 때 받아들였던 이교의 사상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도 완전히 저버리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당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신학자로서 그리스도 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신학적 오류 중에서 상당 부분은 어거스틴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그를 따르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었는데, 그들은 어거스틴의 이설을 보충하고 공식화하였다.

어거스틴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던 이교 사상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자유 선택에 관한 개념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지배자로만 보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이해될 수 없는 분이었다.

그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구원을 받아 하늘 왕국을 기업으로 받고, 어떤 이들은 멸망을 받아 잃어버린바 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러한 진리를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학적 개념에 끼워맞추기 위해서 예정론의 교리를 도입하게 되었다.

예정론의 교리는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상당한 도전을 받았었는데,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어거스틴은 우리 중의 어떤 사람도 구원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허물이 많은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파멸로서 우리들의 운명을 미리 결정짓는 당신의 공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아무런 자격도 없다고 말하였다. 예정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오류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라는 또 다른 오류를 논리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절대적이고 변할 수 없는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구원받게 될 자들을 당신 임의대로 결정하시는데, 이런 식으로 일단 구원받은 자들은 다시는 잃어버린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파멸로서 운명지워진 자들은 결코 구원의 반열에 들어 올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것으로 미리 예정되었다고 믿는 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기만적인 안전감을 갖도록 유도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복음 전파의 필요성과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의문점들을 던져준다.

각 개인의 운명이 하늘에서 이미 다 결정되어졌는데 기별을 전해야 할 필요성이 무엇인가?

세상의 복음화의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종교를 개종할 이유는 무엇인가?

어거스틴의 논리대로라면,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관계는 구원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이 되고 만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once-saved-always-saved)는 잘못된 교리는 또 다른 오류인 "죄짓고-살고의 신학" (sin-live theology)을 낳게 되는데, 이러한 논리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이기만 한다. 그리하여 구원 문제에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중세 시대의 잘못된 개념을 근원으로 해서 출발한 논리가 계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와 결국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학적 바탕을 이루는 "죄는 이길 수 없어, 그저 죄짓고 사는거야" 라는 도덕적 패배주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거스틴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라도 죄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선택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믿는 이방 종교의 가르침을 근거로 했던 어거스틴의 잘못된 전제로부터 시작된 논리의 전개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비성서적인 결론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몰고가고 있다.

어거스틴은 또한 원죄설에 대한 개념을 대중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아담이 지었던 바로 그 죄 때문에 정죄받는다고 주장했다. 죄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모독과 범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상태 그 자체가 죄인데, 이 죄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타나는 행위에 의해서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고 논리를 전개했다.

초기에는 그는 성(sex)을 원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오랫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적인 욕망과 투쟁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성적 욕망은 본처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서자를 갖도록 하는 결과에 이르도록 하였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연약함은 자신의 죗된 경험에 대한 신학적인 변명을 만들어 내도록 이끌었다. 그리하여 그는 후에 원죄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다른 부류의 범죄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육체와 영혼 사이에는 해결할 수 없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그는 자신의 육에 대한 영의 승리를 결코 체험하지 못했다. 원죄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어거스틴의 개념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그를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죄인이 된다면, `그리스도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셨다고 추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나실 바 거룩한 자." (누가복음 1:35).

그리스도를 매우 죗된 인간으로 결코 묘사할 수는 없었다. 어거스틴은 억지 논리로서 결론 짓기를 그리스도는 인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을 취하셨다라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는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있는 가장 명백한 증거들을 무시하게 된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주장하였음으로 인해서, 천주교회를 참람된 교리인 '무염시태설'을 신봉하도록 인도하였던 것이다.

이 교리는 19세기가 되서야 천주교회의 교리로서 완전히 인정되게 되었다.

신학적인 논리의 계단에 의해서,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잘못된 신학들은 수많은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그러한 것들은 결국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르침으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통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천주교회, 특별히 서쪽에 있던 그리스도 교회들은 더욱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된 교리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딜레마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상위의 본성을 가지신 윗자리를 차지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보자로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어거스틴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우리가 시험받고 유혹받은 것과는 같지 않는 방법으로 시험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라도 인간은 죄에 대한 정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어거스틴이 가정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보다 열등한 인성을 가졌다면, 인간이 예수께서 지상에 계신 동안에 가지셨던 것과 같은 죄에 대한 계속적인 승리의 경험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거스틴의 관점은 그리스도께서 죄없는 생애를 성취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보다 죄의 문제에 있어서 큰 잇점을 가지고 있으며, 반면에 우리는 타락한 본성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를 그치시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그 시험으로부터 구해주는 위치에 계시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이외의 다른 중보자들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게 되었는데, 그 중보자들은 다른 인간들처럼 유혹을 느끼며, 고통당하며, 그리고 그 유혹에 굴복하는 남녀들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후에 교회는 예수의 어머니를 중보자로서 주장하게 되었고, 그런 다음 수많은 성인(saint)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으며, 그들 또한 중보자로서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교구에 있는 모든 신자들처럼 모든 사소한 점에까지도 죄에 대해서 동일한 생애를 살아가는 사제들에게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하는 중보자의 역활을 부여했다.

잘못된 이방 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교회는 논리적 이끌림에 의해서, 그리고 어거스틴의 잘못된 전제를 메꾸기 위해서 한번에 한계단씩 오류에 오류를 더해갈 수 밖에 없었다.

원죄는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킨다라는 것은 곧 교회의 가르침이 되었다.

임신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인간은 영원한 고통의 정죄를 받게 되었다.

원죄라는 잘못된 개념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질문을 자아내게 한다.

"어떻게 하면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제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얻어낸 결론은 침례라는 행위를 통해서 죄책감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해결책에 대하여 또 다시 뒤따르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그렇다면 침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답변은 끔직한 것이었는데, 침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불이라는 것이었다.

침례를 받지 못한채 죽음에 들어간 유아를 가진 부모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그러한 선언이 주었을 충격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유아의 사망률은 매우 높던 때였다.

자신들의 어린아기가 영원한 불에서 고통당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고뇌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교회는 즉각적으로 교인들의 그러한 고뇌를 해소시킬 수 있는 어떠한 해결책을 강구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연옥이라는 기상천외한 것이 발명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연옥은 하늘에도, 지옥에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중간적인 위치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제시하는 이러한 견해도 부모들의 고민을 해소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천주교회의 신조 가운데 유아세례 라는 예식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방 종교에 원조를 가지고 있는 로마 천주교회의 대다수의 교리는 분명 5세기 말엽에 완전히 발전되었다.

그 이후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신실했던 남녀들은 로마의 강압적 지배에 굴복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로마와 그들의 배도와 이방종교적인 행습에 굴복하기를 거절하였던 자들은 쫓기고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로마는 진리의 토대를 짓밟을 수 없었다. 마침내 영국의 위클립, 보헤미야의 제롬과 허쓰, 독일의 루터와 멜랑톤, 스위스의 쯔윙글리와 칼빈, 스코틀랜드의 낙스와 같은 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멍에를 쳐부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일지라도 로마의 모든 오류를 깨달을 수는 없었는데, 그들이 개혁하지 못한 오류와 잘못된 행습들은 그들의 다음 세대들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우리가 사도 시대부터 개신교의 개혁시대까지의 길고 긴 영적 암흑의 기간과 현시대를 되돌아 볼 때,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난 우리들은 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교황권의 권위에 무릅을 꿇지않았던 가치있고 용감한 부조들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들의 모본은 지구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소유해야 될 흔들리지 않는 증언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 외쳤던 그들의 증언처럼 우리도 하늘이 흔들려도 진리에 대해서는 굳건히 일어서야 하며, 원칙에 대해서는 나침판이 남과 북을 가리키듯 항상 진실하여야 할 것이다.

사도 시대 이후의 배도의 역사 1

과거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합쳐지지 않았던 두 줄기가 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팽팽히 두 선을 그리며 흘러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두번째 강림이 있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와 지혜를 통해서 그 두 줄기의 끝을 우리로 하여금 정확히 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 중에 어떤 진실한 이들은 그 두 줄기의 과거 역사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외치고 있다.

여러 독자들은 이 두 줄기 중 어느것을 선택하며 살아왔는가? 또 어떤 줄기를 믿으며, 그것을 붙잡고 서있는가? 여기 독자들 앞에 제시하는 두 줄기의 흐름이 있다.우리는 여기서 줄기의 시작과 끝을 크게 뜬 눈으로 쳐다보아야 한다.그리고 하늘을 향해 뻗쳐 있는 한 줄기를 굳게 잡아야 한다.

약 2000년 전에 기독교 시대가 시작된 이후의 첫 10년 동안은 그리스도 교회 안에 순결함과 진리와 의가 충만하였던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그러나 사단(루시퍼)은 사도들이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초기 그리스도 교회를 함몰시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6-8).

또한 요한은 그 배도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와같이 경고하고 있으며, "이와 같이 너희들에게도 (내가 미워하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2:15).

유다는 배도에 대한 그의 염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돌리고 홀로 하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서 1:4).

제자들이 순교와 죽음으로서 그들의 최후를 마치게 되자, 사도 시대에 이미 뿌려졌던 배도의 씨앗은 좀더 성숙해진 이설의 형태로 급속히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 가운데에서도 이교의 잘못된 사상의 잠입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가 점점 세속화됨에 따라 오류의 침입에 대해서 점점 더 개방적이게 되었고, 사도 시대의 교회가 지니고 있던 단순성은 파괴 당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배도와 안디옥의 충절
일찌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한 사회가 형성되었는데, 이 사회는 후에 배도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날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된 철학적인 배도와 시리아의 안디옥에 있는 교회가 가지고 있던 사도 시대의 순수 정통 진리를 찾아내어 비교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은 제2세기 경부터 기독교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게 되었다.

안디옥이 진리와 의의 상징이 된 것처럼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배도의 상징이 되었다.

안디옥이 사도 시대의 가르침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안디옥은 로마의 행정구역이었던 시리아의 수도였는데, 그리스도 교회의 총본부가 있던 예루살렘이 파괴되자 당시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으로 피신하였고, 그들은 모슬렘(회교)에 의해서 그 지역이 점령될 때까지 그곳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앗시리아의 Edessa 역시 사도들의 가르침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는 요새이었다. 시리아는 그 지역에 모슬렘(회교)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세계를 향해서 복음을 전하는 가장 위대한 전도 기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파송된 복음 전도자들은 멀리 페르시아, 인도, 그리고 중국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안디옥이 활력있는 복음 전도 기지로서, 그리고 강력한 말씀의 전파 기지로 알려진 반면에, 알렉산드리아는 철학적이고 인간의 지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 가르침과 연합하도록 이끌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은 기독교를 주도하는 두 대표 주자가 되었다. 안디옥의 참된 진리와 알렉산드리아의 배도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계곡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의 증가하는 간격이 좁혀진적은 결코 없었다. 4세기 경에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사이의 논쟁과 쟁투는 매우 심화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비유적인 해석을 신봉한 반면에 안디옥은 그들이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취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우리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안디옥의 정통적인 신앙 자세에 일치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알렉산드리아의 이설과 유전에 대해서는 완전히 분리된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사도들의 죽음 이후 얼마 안되서 신약성경은 옛 시리아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에 페쉬타(Peshitta)라는 표준 시리아어로 다시 개역되었다. 그 페쉬타 어의 영어 해석판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그중 가장 원어와 가깝게 해석되어 있는 것이 영어 성경 중에서 킹 제임스 역(King James Version)이다.

킹제임스 역의 신약 성경 내용이 이토록 페쉬타어로 된 신약성경과 놀랍도록 근접한 번역을 유지하고 있는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모든 개혁 번역판(Reformation version)들 처럼 킹 제임스 역도 동(東) 시리아-희랍어로 된 신약 성경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면에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신학교들은 당시 영지주의에 의해서 심각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영지주의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발생된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헬레니즘의 철학을 합병시킨 것이다. 또한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기원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다고 주장하는 이원론을 받아들였다.

3세기 경, 당시 페르시아에서 마니교라는 종교가 번성하였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교와 이방 종교의 혼합물로서 특히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트교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로마의 신학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뻗어내려온 신비적인 신학적 줄기였다. 이리하여 서로마 교회와 동(東 ) 시리아 교회 사이의 신앙적 갈등과 갈라짐은 점점 심화되었다.

그러나 고려되어야 할 또 다른 영향력이 있었다.

갈라디아와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
서쪽에 있는 교회들에게 잠입하여 들어오는 이교의 영향력에 대하여 저항하는 동쪽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극서쪽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우리들은 신약 성경을 통해서 바울과 베드로가 갈라디아 지방에서 설교하였던 사실을 알고 있다.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키 지역으로서 시리아나 그리스나 로마와는 완전히 다른 인종들이 살고 있는데, 이 소아시아 지역에는 캘트(Celt)족이 일찌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랜드, 스코트랜드, 영국, 웨일즈, 그리고 프랑스의 일부 지역에서 사용하는 동종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그 증거로서 영국과 프랑스 지역은 갈라디아의 캘트족에 의해서 그리스도교가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때 당시 프랑스와 영국 웨일즈와 갈라디아 지방 사이에는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캘트족은 전쟁에서 상대편을 무섭게 할만한 강하고 공격적인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되자 그들의 그러한 불굴의 용감한 정신은 새로운 선교지를 향한 모르는 노력으로 표출되었다. 갈라디아 지방의 신자들과 시리아 지역의 신자들 사이에는 밀접한 유사성이 있었는데, 그 둘 사이의 유사성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 더욱 분명해져 갔다. 후에 시리아와 갈라디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영향력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로마 천주교회의 배도에 대하여 끊질기게 저항하는 굳건한 요새가 되었다.

신실한 시리아인, 캘트족 그리스도인과 이단적인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인 사이에 존재했던 실제적인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갈라디아(지금의 터키) 지방에 살던 캘트족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동쪽에 살든지, 서쪽에 살든지 간에 성경을 그들의 유일한 권위로서 인정하고 받들었다. 이와 비슷하게 시리아 지방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의 최상권을 공언하였다. 그러한 그들의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시리아-희랍어로 되어있는 성경 원본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오늘날 그들이 보존한 성경 원본이 성경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번역이 정확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와 로마는 이교의 철학에 의해서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빛으로 취급되었다.

시리아 인들과 캘트 족은 성경에 쓰여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으로 믿었으나, 반면에 성경을 논리화하고 철학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에 있어서 성경은 매우 인기 있는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행습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성을 감소시키게 하였고, 그 결과로서 신약 성경의 기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원본에 대해서 많은 삭제와 변화를 일으키도록 유도하였다.

2. 성경
그리스도교를 믿는 시리아인 학자들은 성경을 사도들에 의해서 기록된 그대로의 신약을 성결히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3세기 경, 시리아에 있는 교회를 주도하는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루시안 (Lucian, 서기 250-312) 이었다. 당시 안디옥의 수도에서 태어난 이 헌신한 학자는 놀라운 분별력을 소유한 그리스도인 이었다. 루시안은 윌킨슨(B. J. Wilkinson)이 표현한 바대로 기독교계에 두 줄기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한 쪽은 진리를 버리고 그대신 이교의 가르침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 반면에 다른 한쪽은 그리스도 신앙의 깊은 토대 위에 그들의 기초를 세우고 있다." (윌킨슨 저, 진리의 승리, 46). 그러나 이즈음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는 깊은 동맹 관계에 있었다. 이미 저스틴 말터와 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 등은 로마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클레멘트는 그리스도교와 이방 철학을 혼합하지 않는 한, 더 이상 그리스도교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대담해져 있었다.

루시안은 이 무서운 이방 오류의 침공에 대해서 저항하며 일어섰다.
루시안의 진리와 의를 위한 결정적인 외침은 결과적으로 로마와 동방의 교회들 사이의 전면적인 전쟁을 유발케 하였으며, 말씀에 대한 그의 견고한 충절은 로마의 교회와 캘트족, 왈덴스인들, 위그노 교도를 포함하여 유럽에 있는 신실한 신자들 사이에 격돌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3. 전통을 권위로 주장함
서로마 교회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 후퇴되자, 교회 신조에 대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통과 유전을 중시하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3세기 초기에 터툴리안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일 그대들이 그러한 규범에 대한 성경상의 확고한 근거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대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전통은 다만 전통의 창시자로서의 인간적인 명예, 힘으로 지켜지는관습, 그리고 그러한 준수자들이 소유하게 되는 습관적인 믿음 등을 그대들에게 가져다줄 뿐이다." (터툴리안 저, 염주와 촛대, 제4장). 이 글을 통하여 터툴리안은 죽은자를 위한 연금이나 앞 이마에 십자가를 표시하는 행위, 그리고 침례 대신에 세번 물을 떨어뜨리는 것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과거에 로마 교회가 만들어낸 관습들이 오늘날 전 기독교계에서 자연스럽고 당연 한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4. 안식일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로서 첫째 날의 준수를 가르치는 어떠한 성경 구절도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3세기 이전에 이미 첫째날의 성결성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존재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편견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유대인에 대한 잔혹한 박해가 있었는데, 유대인들과 동일한 토요일을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겨서, 비록 그들이 이방인일지라도 매우 심각한 어려움을 받아야했다.

둘째, 그당시 일요일은 이방인들의 예배일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예배일로서 일요일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세째, 서로마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신비적이고 철학적인 신앙은 성경을 다시 번역하도록 유도하였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일요일을 신성시 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기원전 321년 경에 콘스탄틴은 모든 노동으로부터 쉬는 날로서 태양의 날을 공포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못해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사단은 하나님의 지배권을 격멸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으로서 어떤 일부 교회들로 하여금 휴식과 예배의 날로서 안식일과 일요일을 함께 준수하도록 유도하였다. 물론 일주일에 2일을 예배를 위해서 따로 떼어놓는 것은 하나님의 더 큰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사단은 자신의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해 나갔다.

결국, 한날은 축제일로, 다른 한날은 금식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일요일의 신성성을 주장하던 자들은 일요일을 축제일로서, 안식일을 금식일로서 주장했다. 그당시 사람들이 금식일보다는 축제일을 압도적으로 좋아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일로서 일요일을 지키고 있었지만, 4세기 말경에 밀란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안식일을 예배일로서 준수하고 있었다. 로마는 일요일 신성성을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에게 강요하였는데, 그것은 사단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

7세기가 되서야 스페인이 일요일 신성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기 664년, 윗비(Witby) 종교 회의에서 놀톰부리아(Northumbria) 국가의 왕과 왕비에 의해서 강요당하여 일요일을 예배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당시 놀텀브리아는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는데, 11-12세기 경에 웨일즈와 스코트랜드에 의해서 정복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후까지도 유럽의 이곳 저곳에 흩어져있던 성경을 사랑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제칠일 안식일을 유일한 예배일로서 인정하며 살았다. 안식일의 변경과 함께 영혼이 불멸한다는 교리는 그리스도 교회로 침입한 이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상징이 되었다.

EU가 열뿔이 아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계13:1)

짐승에게 있는 열뿔
교계는 유럽이 10-나라로 연합되는 것을 열뿔이라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27개국으로 확장되었다. 이제는 잘못 인식하고 해석했던 이 문제도 바꾸어야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또 다른 해석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항상 시대를 보지못하고 '누가 말하기를'만 강조하며 시대를 보지못하는 가르침과 배움에 대하여 주님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15:14) 하신 경고를 깨닫고 빨리 바꾸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환난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열뿔에 대한 역사는 이렇다.

1921년 7월 29일, 외교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CFR) 싸이트 http://www.cfr.org 에는 에드워드 매델 하우스(Edward Madel House)가 우드로 월슨(Woodrow Wilson) 대통령을 고문으로 앉히고 시작했다 한다. 이 계획은 1919년 불란서 Paris 회의후에 작업을 시작하여 1921년에 설립하였다. 하우스의 사상은 독일의 칼 하인릭 마르크가(Karl Heinrich Marx;1818-1883) 주창했던 사회주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외교협의회(CFR) 본부는 58 East 68 Street, New York City, New York 10021에 있다.

CFR을 설립하는데는 적극적이었고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 조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J.C. Morgan, David Rockerfeller, Bernhard Baruch, Paul Warburg, Otto Kehn, Jacob Schiff, 등이었다. 하우스는 영국왕실국제연구소(Royal International Institute of Affair-RIIA)가 일찍이 식민정책으로 200년동안 세계를 장악했던 전례를 표방하고 영국과 미국이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설립한 조직체가 외교협의회(CFR)며, 이곳이 열뿔의 역할이다.

지구정부를 위한 작업은 1921년부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짐승의 머리에 있는 열뿔은 이때부터 나타났다고 보아야 된다. 하우스는 프랭크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을 앞세우고 1,500명의 동조자들과 조직을 확대시켰다. 그후 31대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행정부가 시작되던 1929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월남전쟁, 한반도 전쟁, 휴전, 냉전, 등 모든 것은 이들이 세게를 장악하려는 정치적인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경고하신 '시대'를 보지못하면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없다.

참고문헌: 'Why a Bankript America?' pp27. Author, Devvy Kidd. 1994.
'Political dominave 4-Adminidtration' 1998.
http://www.councilonforeignrelations.com/

설립목적
외교협의회(CFR)의 설립목적은 세계를 단일화 시키려는 데 있다고 CFR 설립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It means control establishment on Media라 했다. MEDIA는 고대 영어에서는 왕국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면 어떤 왕국을 설립(Establishment) 하여 지배(Control)하려 하는가? 단일세계정부(One World Government)를 만들기 위해 외교협의회(CFR)를 설립했다고 한다.

1979년 상원의원 Barry Goldwater는 자신의 책 126페이지에서 "미국의 외교협의회는 영국의 왕실국제연구소 태평양지부 역할로서...나라와 경계선을 없애고 단일정부체제를 위해 설립한 것이다."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is the American branch of a society with organized in Englnad (and) believes national boundaries should be obliterated and one world rule established). 로 설명하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방식중에서 어느 것을 택하느냐 하는 논쟁이 있었지만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면 사람, 물건, 재산, 사람의 지능까지 장악하기 위한 통제가 따라야 된다. 사회주의 방식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개인의 소유나 재산을 인정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구정부 태동을 위해 만든 법이 '새세계질서(New World Order)라 한다.

열 지역
제1지역= 북미주. 제2지역= 중남미(라틴 권). 제3지역= 서태평양과 일본. 제4지역= 대양주. 제5지역= 서유럽(구 자유주의 권). 제6지역= 동유럽(구 사회주의 권). 제7지역= 중동지역(모슬렘, 아랍권). 제8지역= 중앙아프리카(모슬렘권 제외). 제9지역= 아시아(히말라야 산맥남쪽). 제10지역= 중앙아시아(히말랴야 산맨 북쪽).이라고 http://www.thenewamerican.com 은 말한다.

이렇게 지구를 10-지역으로 나누어서 단일정부를 만들고 있는 외교협의회(CFR)가 짐승의 머리에 있는 열뿔의 역할이다. 대부분이 EU를 열뿔로 인식해 왔었다. EU는 10-지역중의 한 지역이지 지구전체를 움직이는 대표적인 조직은 아니다. EU는 지구정부를 만드는데 요구되는 경제질서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EU는 27개국으로 늘어났고 앞으로도 더 많은 나라들이 가입하게 된다. 그렇다면 EU가 열뿔이라는 인식은 설득을 얻지못한다. EU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있어야 된다. 그것이 1921년부터 활동하는 외교협의회(CFR)라는 조직이 짐승의 머리에 있는 열뿔이다.

열뿔의 분담과 책임국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권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계17:13)

다섯지역만 예로 열거하면, 제1지역= 새세계정치질서(New world political order-미국). 제2지역= 새세계농업질서(New world agriculturam order-칠리). 제3지역= 새세계교욱질서(New world educational order-일본). 제4지역= 새세계환경질서(New world environmental order-호주). 제5지역= 새세계금융질서(New world monetary order-EU).이라고 http://www.thenewamerican.com은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마지막 징조를 말할 때, 시대를 분별하라 하셨다. 오늘이라는 시대적인 세계정부 구조를 볼때, 과거의 해석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오류다. 1921년부터 열뿔이 나타났는데도 지엽적인 EU를 열뿔로 정한(Established dogma) 것은 옳지 않음으로 드러났다. 옳지 않은 것은 고쳐야 된다. 바꾸지 않고 계속 주장한다면 거짓가르침 임으로 그러한 선생인 거짓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네가 보던 열뿔은 영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부터 임금 처럼 권세를 1시동안 받으리라.”(계17:12)

열 뿔은 열 왕이라 하였으므로 왕은 개인을 말한다. 따라서 열 지역에서 책임국가 통치자는 분활받은 지역에서 임금 처럼 힘을 가진다. 그러나 나라는 얻지못하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막강한 힘으로 지구정부를 만드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된다. 이러한 권력을 받은 것은 외교협의(CFR)를 만들 당시에 선정했고, 또한 일곱 머리인 G-7에서 그것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졌다.

1921~1933년,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행정부는 대통령과 재무장관 앤드로 멜론(Andrew Mellon), 멜론의 후임자 오그덴 밀스(Ogden Mills), 연방준비은행 위원장 유진 메이어(Eugene Meyer),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 국무차관 죠셉 카턴(Joseph Cotten), 주 영국대사 챠리스 다웨(Charles G. Dawer), 주 독일대사 후레드릭 쌔케트(Fredric M. Sackett), 등으로 시작되었다.

1933~1945년, 푸랭크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행정부는 재무장관 윌리암 우딘(William H. Woodin), 그의 후임자 헨리 몰켄타우(Henry Morgenthau, Jr.), 연방준비운행 위원장 유진 불랙(Eugene Black), 국방장관 핸리 스팀슨(Henry L. Stimson), 등이었으나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1945~1953년, 2차 세계대전이후 한국전쟁 시작과 휴전될 때까지 CFR은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헨리 투르맨(Henry S. Turman)은 CFR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연방준비은행 위원장, CIA 국장, 합참의장, 국방장관, 백악관 경제고문 등으로 골격이 형성되었다.

1953~1961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우어(Dwight D. Eisenhower) 행정부는 부통령 리챠드 닉슨(Ricjrd Nixon), CIA 국장 알렌 둘스(Allen Dulles), 안보고문 딜론 앤드슨(Dillon Anderson), 윌리암 잭슨(William Jackson), 골던 그레이(Golden Gray), 경제비서관 아투 범스(Arthus Bums), 재무장관 로버트 앤드슨(Robert Anderson), 연방준비은행 위원장 윌리암 마틴(William M. Martin. Jr.), 국방장관, 재무장관, 연합사령관, 주 UN대사, 주 영국대사, 주 서독대사, 주 소련대사, 등 모든 관료들로 확대시켰다.

1961~1963년에는 의문의 죽임을 당한 죤 케네디(John F. Kennedy) 행정부 당시dp는, 케네디와 부통령이던 린던 죤슨(Lyndon B. Johnson)은 CFR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모든 관료들과 국가안보고문, 그리고 대통령 보좌관들은 가입하였었다.

1963~1969년까지 죤슨 행정부는 대통령을 빼고 부통령 험프리(Henery H. Humphrey) 등 모든 관료들과 보좌관들과 안보고문, 그리고 주 UN대사, 주 NATO대사, 주 영국대사, 주 서독대사, 주 소련대서, 등이 크게 활약하였다.

1969~1974년, 닉슨(Richard Nixson)이 도청사건으로 물러나고 1974~1977년까지는 포드(Gerald Ford)행정부 당시에 전직대통령과 포드가 이끌던 행정부는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Spiro Agnew)를 제외하고, 닉슨 당시 부통령인 포드가 대통령으로 백악관에 앉을 때, 부통령인 넬슨 록커펠러(Nelson Rockerfeller), CIA국장 제임스 쉴싱거(James Schlesinger), 안보고문 죠지 부쉬(Geoge H. Bush).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경제고문 브랜트 스카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 폴 맥크라겐(Paul McCracken), 알란 그린스판(Allen Greenspan), 이었다. 그린스판은 카터 행정부 때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레건(Ronald Reagen) 때부터 최근에 이르까지 연방준비은행 위원장을 맡으면서 세계경제를 신탁통치(Bailout) 방식으로 골격을 만든 사람이다.

1977~1981년까지 카터(James Carter) 행정부는 다른 때와 같이 모든 관료들이 활약하였다. 그 중에서 주목할 사람은 즈비뉴 브르제진스키(Zbignew Brzezinski)와 연방준비은행 원원장 폴 볼커(Paul Volcker) 두 사람이다. 브르제진스키는 1970년에 콜롬비아대학(Columbia University) 교수fh 있을 때 '두 시대 사이(Between Two Ages)'라는 논문을 쓴 사람이다. 데이비드 록커펠러(David Rockerfeller)로 하여금 삼각통치(The Trilateral Commissio-TC)를 창설하도록 도왔던 사람이다. 카터 행정부 당시 연방준비은행 위원장이었던 볼커(Paul Volcker)는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그의 치밀한 계획과 조직장악력을 인정받고 CFR 책임자로 세계를 움직이었던 사람이다.

1981~1989년까지 레건(Ronadl Reagen) 행정부 당시에는 대통령을 제외한 부통령 죠지 부시(George H. Bush)로부터 모든 관료들이 활약하였으나, 대통령 자신이 CFR 에는 별 관심을 표명하지 않으므로 인해 지구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볼때, 루즈벨트와 투르맨과 케네디와 레건 등 4명의 집권자들은 CFR에 가입하지 않으므로서 지구주의 자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그러나 교계에서는 그들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였다.

1989~1993년까지 죠지 부시(George H. Bush) 행정부 때는 CFR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기였다. 닉슨(Richard Nixson) 행정부가 CFR에 뿌리를 내리는 시기라면, 카터(Jaems Carter) 행정부 때는 자라나게 하는 시기였고, 부시(George H. Bush) 행정부 때에는 꽃을 피우는 시기가 된다. 그리고 클린턴(William J. Clinton) 행정부는 열매를 맺는 시기가 된다. 지구주의 자증은 볼커(Paul Volcker)를 CFR 수장으로 앉히고, 스린스판(Allan Greespan)을 연방준비은행 위원장 자리에 앉히고 세계경제를 움직이도록 하였다.

1993년부터 클린턴(William J. Clinton) 행정부는 미국만의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세계경제를 흔들면서 경제위기로 몰아넣어서 세계정부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가장 주목할 대목은 클린턴 때는 동남아시아와 한국에 IMF 바람을 몰아붙였다 (제4장 큰 성 바벨론 참조) 그러나 그의 임기중에는 세계정부를 완성시키지 못한다고 한다고 'Lightening Shadows chrter between 1929-1997' Publisher The American Opinion은 진단하였다.

콜로라도 주 출신 연방하원의원 devvy Kidd의 책 "왜 미국은 망하는가?(Why A Bankrupt America?)" 30페이지에 1972년 리차드 닉슨 대통령 행정명령 제11,647호를 소개였다. "50개 주는 새로운 10-지역으로 나누고, 선거관리인으로 임명된 자들로서 대체하여 각 지역을 관리하게 될 것이다."(That re-divided the 50 states into 10-New regions, with appointments instead of elected officials over regions)

이 뜻은 10개 지역으로 나누어서 지구정부를 만들고, 지역정부 (현재의 나라들간의 경계선을 없애고 각 나라는 지역정부로 성격이 바꾸게 됨)의 책임자 등 관리를 선거할 때 미국의 50주에서 파견하여 관리하게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10지역은 지구를 10등분한 것을 말한다.

외교협의회와 삼각통치와 빌더베르거의 고리
지구정부를 만들기 위하여 외교협의회(CFR)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미국에만 4,000명이 넘는다. 상.하원 의원의 입법부 정치인들의 전원과, 사법부의 헌법재판소, 대법원, 고등법원, 법률연구기관의 전.현직 판사들이 참여한다. 금융기관에서는 세계은행장 등 27개의 큼직한 은행총수들이 포함되었다. 43개 대형 증권회사, 투자기관 그리고 보험회사 등 80개 금융기관들이 활약한다. 미디어 부문에서는 13개 TV방송사, 라디오 방송사들과 20여개의 출판사 총수들이 활약한다.

교육기관에서는 35개 명문대학 총장들과 학장들이 있으며, 30여 명의 명문대학 유명교수들까지 포함되어있다. 나아가서 고위급 군장성들 모두가 CFR 회원들이며, 모든 관료들과 주재국 대사들이 총망라됐다. 또 행정부의 고위급에 위치하는 모든 관료들과 특별히 정보부문과 경제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포함되어있다.

여기서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지난날 열뿔은 유럽연합 10개국으로 잘못 해석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사람들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대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짐승에게 있는 열뿔은 자연스럽게 10-지역(Global 10-Regional)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이 10-지역을 활용하여 지구정부를 만드는 외교협의회(CFR)가 열뿔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심판이 임박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짐승의 표가 이 시대에 실시되고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Biochip을 666이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Lightening Shadows charter between 1929-1997' publisher; The American Opinion 1997.
http://www.jeremiahproject.com/
http://www.thenewamerican.com/
http://www.omega,nu/
http://www.sweetliberty.org/

<장죠셉 목사(찬양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