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2009

영과 혼의 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4:12,13)

1. 혼과 영의 구분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성장에 크게 관련되는 것이다. 만일 혼과 영을 분별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영의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며 여러 번 혼에 속한 것을 영에 속한 것으로 오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혼에 속한 생활에 머물 때에는 영에 속한 것을 찾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곳에서 혼은 어떠하며 영은 어떠한가를 말씀하셨다. 또 성경은 어떤 사람은 혼에서 근심하고 어떤 사람은 영에서 근심하며 또한 어떤이는 혼에서 기뻐하고 어떤이는 영에서 기뻐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성경 구절을 총괄하여 영의 작용이나 혼의 작용이 같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이 곧 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4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 하셨다. 혼과 영은 정확히 구분된다. 영은 영이요 혼은 혼이다.

창세기 2장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최초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이다(창세기 2 7절의 '생령'은 원문에서는 '산 혼'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혼은 사람의 특징이다). 이 생기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의 영이다. 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후 그의 영은 하나님에 대해 죽었다. 그 때부터 아담과 그의 자손의 영은 혼의 압력을 받아 결국은 영과 혼이 혼합되었다. 사람이 구원받을 때 사람의 영은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난다. 영은 장기간 혼과 혼합되어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2 혼과 영의 효능은 유사하나 소속된 범위가 다르고 근본자체도 다르다.
오늘 우리가 기뻐할 때 그 기쁨은 다 같은 것이지만 그 기쁨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분별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근심할 때 그 근심은 과연 혼에 속한 것인가, 영에 속한 것인가? 근심은 같은 근심이지만 그 근심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리라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늙었으므로 그런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얼마 후 그 하나님의 약속하심이 응하기 전 그의 아내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곧 하갈을 그에게 주어 이스마엘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십 사 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그의 아내 사라로 말미암아 이삭을 낳게 하셨다. 우리가 창세기 15, 16, 17, 21장을 볼 때 이삭과 이스마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없으나 갈라디아서 4장을 읽어 보면 우리는 비로소 이삭이 무엇을 의미하며 이스마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는 약속으로 낳았고 하나는 혈육으로 낳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분별할 수가 있다. 사람에게 아들이 있다고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아들을 어떻게 낳았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됐든 아들만 있으면-이삭이건 이스마엘이건 관계없이-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이스마엘은 혈육을 대표하고 이삭은 영적인 사실을 대표했다. 이스마엘은 사람이 자기의 총명과 능력으로 얻어 온 것을 의미하고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혼에 속한 것인가? 혼에 속한 것은 곧 자기로부터 온 것이다.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인가? 영에 속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로부터 온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하나님이 하시길 기다리지도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혈기에 속한 것이며 혼에 속한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므로 나도 비로소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이 움직이시므로 나도 비로소 움직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영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의 모든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었는가를.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하는 일은 많지만 우리 속에서는 계속 그것을 정죄하고 있다. 우리 속에서 정죄하는 것은 우리의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보다도 우리가 한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이 우리 속에서 운행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3. 고린도 전서 3장에서는 '건축'을 말하고 있다.
사역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우고 어떤 사람들은 풀과 나무와 짚으로 세운다고 했다. 그러면 어떠한 역사가 금과 은과 보석의 역사이며 어떠한 역사가 풀과 나무와 짚의 역사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금과 은과 보석은 하나님에 속한 것이라고 했다. 금은 영광을 대표하고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의미한다. 은은 구속을 대표하며 아들의 역사를 의미한다. 보석은 땅의 불태움을 통해 이루어진 화합물로서 성령의 역사를 대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이 있고 아들의 십자가가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이 바로 금과 은과 보석의 역사이다. 무엇이 풀과 나무와 짚의 역사인가? 이것은 인간 자신에 속한 것을 말한다.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고 인간의 성정은 나무와 같고 인간의 역사의 결과는 지푸라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금, , 보석은 하나님에 속한 것을 대표하고 풀, 나무, 짚은 인간 자신에 속한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 , 보석은 다 지면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고 땅속 깊은 데서 파내서 얻은 것이다. , 나무, 짚은 다 지상에서 자라나는 것이고 얻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은 곧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육체로 말미암은 것은 다 인간 자신에 속한 것이고 쉽사리 이룰 수 있는 것이며 영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속에서 나온 것이며 영적가치가 있는 것이다.

설교를 하든지 복음을 전하든지 다 이러한 분별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잉태한 아기를 낳으려는 것같이 전한다. 이것이 금과 은과 보석의 역사이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머리가 빠르고 말주변도 좋고 기억력도 좋아 그것을 의지하여 전한다. 그러므로 그는 매우 바쁘게 일을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풀과 나무와 짚의 역사일 뿐이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어느 형제가 한 지방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볼 때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참 좋았다. 모든 형편을 볼 때 당연히 기뻐해야겠지만 이상한 것은 전할수록 속에서 힘이 빠져가는 것이었다. 속은 갈수록 허전하고 메마르고 힘이 빠져 갔다.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잘못을 자복하고 자신을 의지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은 표면적인 형편의 좋고 나쁨보다도 속에서 과연 누가 했느냐에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의 분별은 외면적인 말에나 외면적인 효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분별의 근거는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어디에서 왔는가에 있다. 이런 분별이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해도, 똑같은 설교를 해도 듣는 사람의 느낌에서는 한 사람은 총명한 사람으로 느껴질 뿐이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대해 보면 "하나님이 바로 여기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을 대해 보면 그가 단지 총명하고 말주변이 좋은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진 사람만이 능히 사람으로 하나님을 만지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혼을 만진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만지게 할 뿐이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4.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에서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생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종과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남을 비판하기를 두려워하며 그의 태도와 언어가 매우 겸손하고 온유했으나 그와 같이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그의 태도가 억지로 하는 것임이 느껴졌다. 그러므로 참된 겸손은 힘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가장된 겸손을 취했으므로 그의 겸손은 매우 힘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겸손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그는 겸손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인 겸손이다. 이것이 바로 혼에 속한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그의 속에서 역사하시면 그는 자연히 겸손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앉은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얼굴에 분을 바르는 사람은 항상 거울을 보게 된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은 그 자신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속에서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영에 속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인위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노릇하기가 매우 힘이 든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힘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언제든지 알아야 할 것은 외면적인 행위나 내면적인 행위가 다 좋은 것 같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 근본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인간의 혈기의 능력으로 모방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힘써 참고 있어 매우 딱하게 여겨지지만 어떤 사람은 힘써 참고 있지만 그 자신은 조금도 참은 것처럼 느끼지 않는가. 후자의 경우를 볼 때 우리는 머리 숙여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서 역사하신다고 말하게 된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인간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분별은 외면적인 것에 있지 않고 근본적인 것에 있는 것이다.

육의 생명에 속한 것도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으나 자연스럽다고 해서 다 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천성이 온유한 것과 주님이 주신 온유는 전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인간적인 사랑과 주님으로부터 온 사랑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적으로 매우 겸손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겸손과는 완전히 분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이고 천성적인 것이 영에 속한 것처럼 나타나게 되므로 사람들은 자주 자기의 천성적인 성품으로 주님의 역사를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혼에서 비롯된 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영으로 온 것만이 하나님과 관계있는 것이다. 성품이 아주 부드러운 사람도 어느 날 이것을 볼 때 그를 시험하는 것 중에서 천성적인 온유가 가장 무서운 것임을 깨닫게 된다. 언젠가 그의 온유가 바닥이 드러나고 그의 인내도 바닥이 드러났을 때 그의 온유는 고작 그 정도이며 그러한 인간의 천성적인 것에는 한도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은 그 능력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주님이 하시는 것을 우리는 할 수 없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라 시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 자신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것이다. 오직 주님이 우리 속에서 하시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할 수 있다. 그후 우리는 스스로 신기하여 "이럴 수가 있을까?"하고 자문하며 머리 숙여 말하게 된다. "주여, 내게는 인내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이 내 속에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영에 속한 것이다.

5.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외면적인 것으로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며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혼에 속한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진상을 알려면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이것이 영에 속한 것인가, 혼에 속한 것인가 하고 묻는 것도 별 가치 없는 짓이다. 그것은 우리가 물을래야 물을 수 없고 분석할래야 분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묻지 않아도 알 수 없고 물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영에 속한 일은 우리 자신이 분석해서는 ''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영적 절름발이가 될 수 있다. 참을 보려면 하나님의 빛이 있어야한다. 빛이 비취면 우리는 자연히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볼 필요 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으로 우리 속에 비춰주시기를 바래야 한다.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들어올 때 우리는 즉시 무엇이 혼에 속한 것이고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인가를 볼 수 있다. 이 판단이 어떤 사람의 판단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우리가 움직일 때 우리 속에서 "틀렸다"고 하시고 또 움직일 때 속에서 "이것은 깊이가 없는 것이다." 또 움직일 때 속에서 "이것은 네 자신이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라고 판단하신다.

, 이러한 분별력은 속에서부터 온 것이지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다. 속에서 보는 것이 참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너의 이런 행동은 네 자신에 속한 것 같다."고 지적해 줄 때 우리 자신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 말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오직 내 속에서 보는 것만이 참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우리 속에 빛이 있게 하시고 속에서 보고 분별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혼과 영의 분별은 그리스도인의 분별력의 근본이다. 우리의 식별력은 우리가 배워서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빛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빛을 비추어 우리 자신의 역사와 생활에서 무엇이 혼에 속한 것인가, 무엇이 영에 속한 것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이다.

워치만 니 [열두 광주리 가득히, "혼과 영의 구분"]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야고보서 1:21"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가 한 말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써 믿는 자가 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받음으로써 우리의 마음, 즉 혼을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구원해야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해야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통해서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여러분의 영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마음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지 않으면 (야고보의 표현을 따르자면  혼이 구원받지 않으면), 몸과 육체의  감각으로 교육을 받아온 마음은 여러분이 어린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아있도록 몸을 편들게 됩니다.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이며, 몸이 다스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이들에게 "너희가 아직도 육신적이다...." (고전 3:3) 라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을 어떤 번역본은 "너희는 몸이 지배하는 사람이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 불구하고 그들의 몸은 새롭게 되지않은 마음을 통하여 그들의 영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발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어린아이로서 살다가 죽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항상 막연합니다. 그들은 믿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는 것으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우지않고는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살 수 없습니다.

육신으로 사는 사람은 불신앙속에 살며 항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삶은 전쟁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된적이 없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전쟁을 승리하셨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마귀는 실패한 적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마귀와 싸우려고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탈진하여 대항할 힘이 없을 때까지 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면 새롭게 된 마음을 통하여 그의 영이 몸을 다스릴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혼(마음)은 이제 영의 편을 들게 될것입니다. 혼은 말씀으로 새롭게 됩니다. 새롭게 된 혼 (마음)은 영이 다스리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영을 통하여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자의 영(양심)과 거듭나지않은 자의 영(양심)의 차이
사람의 영은 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음성을 안내,즉감,내적 음성 혹은 양심이라고 부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양심은 안전하지 않은 안내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사람이 어떤 "종교적인" 훈련을 받았다면 그는 주로 그가 받은 훈련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어떤 훈련도 받지 않았다면 그의 양심은 많은 잘못된 것을 행하도록 허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거듭났다면 그의 영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으로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만일 그의 거듭난 영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게 되고 묵상하는 특권을 가진다면,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실천한다면, 그의 양심 즉 그의 영의 음성은 안전한 안내자가 되고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한다면, 또한 우리의 영의 음성에 즉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을 훈련한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삶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영의 개발
대부분의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권과 자신들의 권리에 걸 맞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있어야할 영의 개발을 왜 그들을 놓쳤을까요? 마귀가 할 수만 있으면 진리를 신자들이 모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곁길로 잘못 가거나 다른 영역에 있도록 하려고 애쓸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나서 5분 후에 강대상 앞으로 나와서 "주님, 내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면 당신 안에 발전소를 가지고 있는것입니다! 성령님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고, 그 분이 당신 안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그 분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십시오. 성령님은 거기 계시며 당신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성령님은 또한 신사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 분은 당신이 원하지않거나 요구하지 않으면 들어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빼앗아 주관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게 반응을 보일 때만 우리를 도와주실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을 실행하기까지는 수동적입니다. 집회에 나가기 전에 나는 종종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시다. 더 크신 분이 내 안에 계신다" 내 능력으로는 부족한 일을 해야할 때 나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이 더 크신 분이다 그분은 세상에 있는 마귀보다 크시다그분은 세상에 있는 미움보다 크시다. 더 크신 분이 내 안에 계시다."

이렇게 말을 하면 나는 내 안에서 내 마음에 조명을 비추고, 내 영에 지시를 내리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정복자가 되어 마귀와 그 졸개들을 짓밟고 바로 행진할 수 있습니다.  더 크신 분이 내 안에 계시며 그 분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시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배웠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안내자로서 계신 성령님을 모셨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하루를 시작해야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출처: "인간의 세가지 본성" 케네스 해긴

오신 목적이 죽음이었던 그리스도 (마 16:20-23)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조용히 불러모으시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많은 논쟁과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과연 그는 누구였는가? 그저 팔레스타인 변방에 출현하여 짧은 기간 군중의 인기를 누리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한 죄수였는가? 세계 4대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위대한 생을 살다 간 인류의 스승이었는가? 아니면 참으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인류의 역사와 철학과 문화 등 많은 부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질문은 모든 인간, 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예수님의 아이덴티티를 규명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이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를 내놓습니다. “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더군요. 세례 요한을 죽이고 나서 무척이나 찜찜해하던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상당히 긴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하는 얘기가 그는 바로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이 무척 두려워하고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이 당시 꽤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출현을 보고 큰 희망을 가졌을 터인데, 갑자기 그렇게 억울하게 죽는 것을 보고 못내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출현을 보고 그에게 요한에게 가졌던 기대와 희망을 투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을 엘리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엘리야의 위치는 매우 독보적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시대가 끝나면서, 즉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4:5). 특별히 엘리야는 죽지 않고 바로 하늘로 들려 올라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시면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는 사람으로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충분히 엘리야가 왔다고 믿었을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겠다고 하신 엘리야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예레미야 같은 그런 위대한 선지자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지자의 역사라고 할 만합니다. 백성 가운데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것은 선지자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선지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그럼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성미 급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대답에 예수님은 매우 만족하셨습니다. 지금까지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친 보람이 있는것입니다. 마침내 제자들은 졸업시험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하산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라는 그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즉 이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나라에 올 수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시험에 합격했고, 남은 것은 주님께서 구속의 사역을 마무리하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마침내 처음으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졸업시험에 합격하고 하산할 때가 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군요. 새로운 가르침, 다음 단계의 레슨이 이제 시작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이 새로운 레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에 의해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 새로운 레슨, 즉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가서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직까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줄 모르고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느니, 엘리야가 왔느니, 위대한 선지자가 나타났느니 하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서는 안 됩니다. 당시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의 개념과 정작 그 메시야로 오셔서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고백한 제자들마저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자마자 베드로가 달려들어 예수님을 붙잡고 하는 말을 보십시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며 정들고 사랑하게 된 스승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누가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려고 한다면 자신이 목숨을 걸고라도 스승님을 보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필요하다면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의병이라도 일으킬 용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베드로, 의리의 사나이 아닙니까? 인간이 이렇게 신의가 있어야죠. 우리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보시며, “그래, 베드로, 고맙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야.” 이렇게 말씀하실 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염려해서 나섰던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아주 극단적인 책망만 받고 말았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치 마른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겠지요? 베드로의 고백에 금방 그렇게 칭찬해 주셨던 주님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베드로라는 그 반석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겠다고까지 하셨던 주님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린 말 한 마디에 이렇게 심하게 책망을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그야말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 아닐 수 없군요. 어쩌면 마음의 큰 상처를 받았음직도 합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의 사역과 역할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이처럼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커다란 긴장을 야기했던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이 이해하고 기다리던 메시야는 그들을 해방시키고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줄 왕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다윗의 왕국을 재건할 강력한 통치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온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모시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로마의 압제와 싸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하러 오셨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스스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달성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왕으로 옹립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비록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충성심에서 주님이 고난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것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계획에 저항하는 행위가 될 뿐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목적은 고난을 받고 죽으시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님이 저 무자비한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고난당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붙잡히든지, 함께 싸우다가 칼에 맞아 죽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은 그렇게 죽임을 당해야 할 만큼 힘이 없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힘없이 붙잡혀 죽임을 당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이 목적을 가지고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고 의리를 지키려다 보니까 베드로는 결코 주님의 죽으심을 용납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참 고맙고 기특한 일일지 모르지만,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는 그것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공작일 뿐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장 가깝고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였습니다. 또 방금 그렇게 칭찬했을 만큼 믿음직한 베드로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바로 베드로의 사랑과 충성을 통로로 삼아서 사탄의 유혹이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사탄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마치 하와를 통해서 아담을 타락시켰던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재산과 자녀들까지 잃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욥에게 그의 아내가 다가와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럴 때는 사탄의 유혹을 간파하고 물리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담은 실패했지만 욥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주님처럼 가까운 사람을 통해 다가오는 사탄의 유혹에 그렇게 무정할 정도로 대처해야 할 때가 있을지 모릅니다.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피가 되어 떨어졌을까요? 얼마나 두려웠으면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온 인류의 죄악을 한 몸에 짊어지고 그 대가로 처절하게 심판의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연약함을 가지셨던 주님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난을 걱정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에게는 결코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하나님으로서 그 모든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이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베드로의 만류가 예수님의 두려움과 연약함을 부채질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비록 스승님이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아무런 대책없이 바라만 보아야 했던 베드로의 가슴이 찢어질지라도, 그 방법 외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들의 손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에 우리가 분노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 길 외에는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었고, 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바로 우리의 죄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권과 은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몸소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 받으심으로 인하여 가능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그 크신 사랑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악된 성품이 죽고 우리의 악한 습관이 죽고 더러운 언행과 심사가 죽어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내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율법을 내 대신 해 주신 하나님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8:3)

오늘은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신 것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7:12)/(딤전1:8) 그러나 그 선()한 율법이 도리어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을 의롭게 하는 일은 못 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 증언이 로마서 320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한 바로 그 증언입니다.

갈라디아서 311절에서도 율법으로는 아무나 의롭게 되지 못함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법대로 정죄하는 일 밖에는 못합니다. 율법은 도리어 진노를 이루게 합니다. (4:15) 율법은 죽이는 일은 해도 살리는 일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5:4)가 되는 엄청난 저주를 받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본절에 나타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 이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 뜻은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무나 연약하다는 것을 성경이 입증을 해 주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그 누구라도 율법의 완전한 요구를 이룰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할 수 없는’ 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는 말씀앞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이 연약한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 여기서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그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 즉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는 일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한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하시나니’ 라고 가르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로 하나님이 친히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만 할 정죄를 자기 아들에게 대신 죄를 정하시고 그 아들을 죽이심으로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4) 는 복음의 증언이 성립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진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 21절에 보면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귀절 속에는 보시는 봐와 같이 죄의 왕과 은혜의 왕이되는 두 왕이 나옵니다. 죄라는 왕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다고 합니다. 사단은 사망의 세력(권세) 잡은 자 입니다.(2:14)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죽기를 두려워 함으로 그에게 쉽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반면 은혜라는 왕은 무슨 권세로 왕노릇 합니까?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은혜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이 땅에 나타난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줄 수 있는 권세가 그분의 의로 인해 은혜의 왕이 되시는 예수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은혜의 권세가 우리에게 없었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의롭게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을 깨달은 자의 신앙 간증의 노래를 들어 보십시요!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중간 생략)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 (71:14-19)

주의 의()를 우리는 찬양 해야 합니다. 종일 토록 주의 의만 구원이 됨을 찬양 해야 합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소망을 주의 의에만 품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설교자)는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40:10)라고 하는 신앙 양심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참 된 성도는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 (시119:7) 하겠다는 신앙심을 자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롬10:3) 하면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를 이루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의 요구가 연약한 우리 사람들의 육신에게 직접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공의가 저주로 임하게 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일명 칭의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4:9) 로 나타 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참아 보지 못하시는 (1:13)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곳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만 의롭다 하십니다. 성경은 밝히 기록 합니다. 성경의 기록을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복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복음을 좇아 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말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3:21-27)

율법의 마침은 예수님에게 끝이 났습니다.(10:4)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이 엄청난 축복의 복음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렷하게 증언 하십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10:29-30) 합니다.

이 복음을 듣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시여, 부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고백하십시요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시119:142) 하는 신앙심의 고백을 부디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올리시길 바랍니다.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시119:2) 아멘!

<출처: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죄와사망의 법[로마서 8:1-4]


이 네 구절의 성경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믿는이는 전 성경을 보석을 끼워 박은 반지에 비유하고, 로마서는 그 반지에 있는 보석에 비유하고, 로마서 8장은 그 보석이 발하는 빛으로 비유했다. 이 말이 조금 지나치게 들리겠지만 체험있는 사람은 다 그가 말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로마서 8장은 가장 분명하면서도 가장 깊고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 로마서 8 1절부터 4절은 이 장에서도 가장 특별하다. 로마서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네 장이 있는데 바로 5장부터 8장까지이다. 5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것을 말하고, 6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 것을 말한다. 7장은 육체가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없음을 말하고, 8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의를 이룬 것을 말한다.
 
로마서 8 1절부터 4절은 이 네 장의 뜻을 포함한다. 1절은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음을 말하고, 2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말하며, 3절은 육체의 연약함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말하고, 4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네 구절은 우리가 얻은 구원의 결정(結晶)이다. 1절부터 4절까지를 말하기 전에,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주의를 환기 시키고자 한다. 로마서 7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로마서 7장은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말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이 참인가? 많은 때 우리에게 원함은 있으나 해 내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만 해 내지 못한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만 해 내지 못한다.
 
로마서 7장은 네 글자 곧 '할 수 없다'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 위에 모두 '할 수 없다'는 네 글자가 씌여져 있음을 기억하라. 당신이 선을 행하려는 결심의 원함이 없다면,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무능(無能)을 알 수 없다. 당신이 이기려고 할 때, 당신은 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 깊은 일은 그만두고라도 작은 일 곧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이나 삼백 육십 오 일 끊임없이 성경을 읽으려 하는 것도 할 수 없다. 극히 작은 일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없음을 느낀다. 하루, 이틀, 많아야 한 주는 할 수 있지만 더 이상은 할 수 없게 된다. 당신은 죄가 있으면 제거해야 하나 제거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안다. 예를 들어, 성질은 가장 이기기 어려운 것이다. 어떤 믿는이는 성질이 아주 좋지 않지만 동시에 그는 이렇게 하지 않아야 함도 안다. 어느 날 그의 집의 가장 좋은 화병이 일꾼에 의해 깨뜨려졌다. 그는 깨진 것을 보면 또 화를 낼까 두려워 곧 이불을 머리까지 둘러 덮고 잤다. 실제 그의 성질은 이불 안에서나 이불 밖에서나 무엇이 달라졌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실한 말을 하고 사실에 넘게 말하지 않으려 하지만, 할 수 없다. 한 번 넘어지고, 두 번 넘어지고 나서 다시 넘어지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다. 세상을 사랑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다.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려 하지만 할 수 없다. 비록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기 원하지만, 일단 다른 사람이 어떠어떠하다는 것을 생각하기만 하면 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면할 수 없다. 우리의 많은 체험들이 모두 우리의 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할 수 없다'이다. 그는 절망했으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라고 말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중 누가 교만하고 질투하지 않을수 있는가? 누가 세상을 사랑치 않을수 있는가? 누가 선을 행함에 원함은 있지만 할 수 있는가? 한 번 할 수 없고, 두 번 할 수 없고 마지막에는 이김을 구하지 않는가?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어찌 여러분에게 율법을 주어 거울처럼 비춰 보는 것뿐이겠는가? 아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다. 8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이제', 어제는 지나갔고 방법이 없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방법이 있다. 이 얼마나 귀한가헬라어를 잘 아는 어떤 사람은 믿을 만한 옛 기록에 근거해 "정죄"(定罪)라는 두 글자에 두 가지 용법이 있음을 증명했다. 하나는 법률적인 용법이고 하나는 일반적인 용법이다. 일반적 용법은 곧 통상적인 용법이다. 여기에서 "정죄"의 일반적 용법은 "무능"(無能), "방해하다"(견제하다)의 뜻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이 성경 구절에서 무한한 안위를 얻는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 방면에서 정죄할 수 없다. 육체 방면에서 다시 무능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어떤 방해가 없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한, 할 수 없음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할 수 있다. 8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서 말한 두 가지 법을 주의하기 바란다. 곧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다. 여기에서 왜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말하고 "생명의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말하지 않는가? "생명의 성령"과 "생명의 성령의 법"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죄와 사망"과 "죄와 사망의 법"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죄는 곧 안의 능력이다. 죄의 법은 곧 죄의 습관이다. 예를 들어 땅에는 중심인력(引劣)이 있다. 어떤 물건을 떨어뜨리기만 하면 인력에 의해 이 물건은 아래로 떨어진다. 이 인력은 법이 되었다. 그것의 습관은 어떤 것을 만나면 끌어서 내려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여기에서 떨어뜨리면, 결과는 땅에 떨어지고 만다. 장소를 바꾸어서 떨어뜨린다 해도 결과는 여전히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곧 법의 적용이다. 책 한 권을 여기에서 떨어뜨리면 떨어지는데 저기에서 떨어뜨리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상황은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릇 습관에 있어서 서로 같고 결국에도 서로 같은 것이 바로 법이다. 죄가 하나요 죄의 법이 또 하나이다. 우리의 범죄는 우리 안에 죄의 법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책 한 권을 떨어뜨리면 땅에 떨어지는 것이 땅의 중심에 있는 인력의 법으로 인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을 보았는가? 우리의 범죄가 하나의 법이 된 것은 기회를 잘못 만나서 실수하거나 넘어진 것이 아니다. 범죄는 일종의 습관이요 넘어짐도 일종의 습관이다. 범죄와 넘어짐 모두 법이 된 것이다. 하나의 법은 어떤 곳, 어떤 상황이든지 같은 작용에 대해서 모두 같은 결과가 있다. 만약 우리가 범죄하는 것이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죄의 법이 아니며 우리에게는 방법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범죄한 까닭이 환경이 좋지 않고 직업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면, 당신이 환경을 바꿀 때 직업을 바꾸면 범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형제 자매들이여,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범죄가 우연적인 것이 아니요 죄의 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자주 쉽게 화를 낸다 하자. 당신이 상해(上海)에서 쉽게 화를 낸다면 항주(杭州)에 가더라도 쉽게 화를 낸다. 당신이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쉽게 화를 낸다면 직업을 바꾸더라도 여전히 쉽게 화를 낼 것이다. 어느 때 어떤 곳에서든지 건드리기만 하면 화가 나온다. 형제 자매들이여,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죄의 법이 깊이 우리를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죄는 이길 방법이 있고 죽음도 이길 방법이 있을지 모르지만 죄와 사망의 법은 이길 수 없다!
 
왜 성경은 "죄와 사망의 법"만을 말하고 "죄의 법"과 "사망의 법"을 말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죄와 사망은 실제로 하나의 법이기 때문이다. 죄와 사망의 법은 두 가지의 법이 아니라 한 가지 법이 두 방면으로 나뉘어졌을 따름이다. 이 법을 죄의 방면에서 말한다면, 안에 하나의 습관이 있어 적극적인 방면에서 많은 죄를 범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법의 사망의 방면은 안에 율법의 요구를 준행하는 능력이 부족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소극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망"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망이란 곧 연약함이 극점에 달하여 조금의 힘도 없으며 생명을 잃은 것이다. 사망이 하나의 법인 것은, 연약하고 무능함이 우리가 항상 가지고 있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에서 가장 주의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이다. 바울이 말한 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는 사망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는 죄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매일매일 느끼는 어려움이 바로 이 죄와 사망의 법이다. 많은 때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할 능력이 없으며,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을 능력이 없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이 죄와 사망의 법이 얼마나 미운가를 본다! 우리는 죄를 미워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죄와 사망의 법을 미워해야 한다. 우리는 이 법에 대하여 결국 방법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그분은 근본적인 구원의 방법이 있으시다. 그분의 구원의 방법은 당신의 자질구레한 죄들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당신의 근본적인 법을 해결하는 것이다. 본래 당신은 같은 시험을 만나면 항상 같은 결과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는 성령의 법이 있는 것과 성령의 법이 없는 것의 차이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는 이길 방법이 없게 된다.
 
로마서 8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고 해방받는 것은 어디에서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 나는 "할렐루야!"라고 외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 좋은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범죄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정죄함이 없고 곧 자유함이 있다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의지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죽음 안에 연합시키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부활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은 그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다.
 
요한복음 3 16절은,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안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다. 로마서 6 3절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은 후에 침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비록 당신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었는지 모를지라도 이것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당신이 믿음으로 침례를 받을 때, 하나님은 당신을 그리스도 안에 연합시켰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믿는이라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이가 없다. 각각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얻는가? 로마서 8 1절부터 2절에 있는 두 개의 "완료형"은 매우 귀하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은 이미 우리의 죄를 처리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은 이미 우리의 사망-영적인 것에서의 지극히 연약함-을 처리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로 죄를 이겼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같이 사망을 이겼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을 얻은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있는 하나의 법이 전적으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당신 안에 죄와 사망의 법이 있음을 안다. 당신에게는 분명 당신의 특별하고 독특한 죄와 사망의 법이 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당신으로 하여금 그 죄와 사망의 법을 벗어나게 했다.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은 곧 부활의 법이요, 주님을 사망에서 부활케 한 그 법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은 그날 얻은 생명이 곧 부활의 생명이요, 거듭남의 생명이다. 우리가 처음 주님을 믿을 때 얻은 생명은 부활한 생명일뿐 아니라 또한 동시에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써 이 법은 우리로 하여금 해방을 얻게 하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한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긴 주님의 그 생명을 우리에게 나눠주시며 우리로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의지하여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게 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어쩌면 이것을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급할 것이 없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으면 된다. 당신은 하나님께 "주여, 당신의 말씀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저를 해방하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곧 해방될 것이라고 말하는가? 아니다. 장차 해방될 것이라고 말하는가? 아니다. 성경은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예전에 마치 감옥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죄와 사망의 법이 나를 가둠이 감옥의 가둠보다 더 심하게 나를 가두었다. 죄와 사망의 법이 나를 둘러쌈은 감옥이 나를 둘러쌈보다 더 심했다. 그러나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해방했다. 마치 나는 감옥으로부터 관청의 석방을 받은 것과 같았다. 어떤 사람이 감옥으로부터 석방의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기뻐서 즉각 나오겠는가 아니면 한바탕 울고서야 나오겠는가? 그는 석방받은 그 때 그날로 곧 기쁘게 나올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나를 해방하였고, 나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했다. 해방은 성령의 역사이며 벗어남은 우리가 얻은 결과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당신은 담대히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수 있는가? 당신은 이 생명이 얼마나 큰 것을 포함하고 있는지 아는가? 하나님은 단지 당신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신 것이다. 당신에게 당신을 붙잡고 있는 더러운 사상, 질투, 성질이 있는가? 당신은 담대히 믿음으로써,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내가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있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당신은 이미 해방을 받았고 이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 당신은 어제 당신을 붙잡은 그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해방받았음을 믿을 수 있는가? 당신은 백만 명의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죄인인데, 만약 당신이 이 구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다."는 말씀을 붙잡는다면 당신은 곧 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만약 내가 오늘 당신에게 선행하기를 권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덕 닦는 것을 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당신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라고 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하셨다고 말하므로 우리는 다만 믿기만 하면 된다. 온 세상에서 이기는 둘째 방법은 없다. 당신이 수신극기(修身克己) 할 수 있고 죄와 사망을 이길 수도 있지만 결코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수는 없다. 다른 것이 없다.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내가 구원받았을 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해방했고 그 더럽고도 연약한 법에서 벗어나게 했음을 믿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이기게 된다. 당신이 믿을 때 성령은 즉각 역사하시며 본래 당신을 붙잡던 그 법은 당신을 주관할 방법이 없게 된다. 나는 나에게 죄가 있음을 안다. 나는 또한 죄와 사망의 법이 지독한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이 나를 붙잡을 수 없음을 믿는다.
 
지구의 중력이 비록 하나의 법이지만 손으로 책을 들고 있으면 손의 힘은 중력의 법을 이길 수 있다. 중력의 법이 제거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법이 그것을 이긴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 것은 마치 이러한 이치와 같다. 죄와 사망의 법이 폐해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하나의 법이 나로 죄와 사망의 법에 붙잡히지 않을 수 있게 하고, 나로 죄와 사망의 법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정부에는 사람이 강도짓을 할 수 없는 법률이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강도짓을 하는 경향이 없다면 그 법률은 나와 관계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정부의 그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강도짓을 하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러한 법이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죄는 밖에 있는 행위이고, 법은 안에 있는 요구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죄를 이기는 것은 한 가지 한 가지 일을 이기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죄의 법을 이긴다면, 그것은 곧 이 죄의 법의 요구를 이긴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면 그는 강한 노력으로 한 번 두 번 마시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안에 술을 탐하는 요구를 없앨 수는 없다.
 
내게 한 친구가 있었다. 주님을 믿지 않았을 때, 중국 연극을 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징과 북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기만 하면 그의 안은 즉각 움직였다. 그가 한번 연극을 보러가면, 결국 삼일 밤 낮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보다 너무 피곤하면 땅에 쓰러져 자고, 깨어나면 다시보고 하기를 삼일 밤낮 동안을 했다. 주님을 믿은 이후, 주님은 그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구원하셨다. 그는 이제 자신을 강하게 억제하여 보러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절대적으로 보러 가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은 모두가 다 이러한 구원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안을 구원하시고 그로 안에서 이 법의 지배를 받지 않게 하신다. 그러므로써 그들에게는 자연히 좋은 외적 행위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하셨지만, 그분은 결코 죄와 사망으로 하여금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는 않으셨다. 예를 들어, 내가 만약 책 한 권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려 한다면, 나의 방법은 결코 대단한 힘을 들여서 지구의 중력을 없애지 않아도 된다. 나는 다만 나의 손으로 이 책을 들기만 하면 된다. 지구의 중력이 여전히 존재할지라도 내 손의 쥐는 힘이 그것을 이겨서 지구의 중력이 비록 존재할지라도 조금의 효력도 없게 한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불뱀을 없앤 것이 아니라 놋뱀을 세우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의 요구를 이기는 데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이 좋지 않을지라도 다급해 하지 말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잡을 수 있기만 하면 충분하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해방했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해방을 얻었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는 해방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믿고 집에 돌아갔을 때, 죄의 법은 여전히 똑같이 존재하는 듯하다. 어쩌면 당신은, 『집회 중에서 나는 이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고 믿었는데, 어째서 지금도 존재하는 것 같은가?』라고 자문할지 모른다. 이 때 사탄은 당신에게 와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믿지 않아도 이러하고 믿어도 여전히 이러하지 않은가?』라고 참소한다. 믿음의 시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당신이 이때 느낌을 상판하지 않고 참소를 상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승리하게 된다. 당신이 조금 조심하거나 방비해서 당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보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책임지실 수 있다. 처음으로 시험이 당신 앞에 임할 때, 당신이 설 수 있다면 곧 이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믿음이 참된 것인가를 시험하신다. 당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구원하시는 것이 참인가를 시험해야 한다. 믿음이 참이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믿는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나는 당신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셨으므로 책임지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이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음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여신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어떠한 사실인가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눈은 하나님을 보고 자신을 보지 말아야 함을 기억하라. 성경은 또 한 번도 당신에게 당신 자신을 보고 당신의 체험을 보라고 하지 않았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구원받음에는 믿음이 필요하고, 이김에도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시험이 올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사탄은 당신이 믿으나 믿지 않으나 같지 않느냐고 말한다. 당신은, 『네가 한나절을 그렇게 해도 나는 여전히 믿는다.』고 말해야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며 오직 마귀만이 거짓을 말한다고 말해야 한다.
 
형제 자매들이여, 나는 참으로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고 권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권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이김이 없다. 1절은 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할 수 없음이 없다고 말하는가? 2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는 이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다고 이미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없고 방해받는 까닭은 모두 죄와 사망의 법 때문이다. 이 법은 우리를 묶고 우리로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분의 부활 생명과 성령은 우리를 해방시키고 우리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할 수 없음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벗어남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이상 할 수 없음이 없는 것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을 해주사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잘 지나갔으며 이제는 여유 있게 승리할 수 있다고 느끼게 해 주기를 바랄 수 없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더이상 할 수 없음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리스도를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여전히 예전과 같이 연약해진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 15장에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살라는 명령이 있다.
 
8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죄를 정하사'는 원문에 따르면 '죄의 죄를 정하사'이다). 이 구절은 우리 사람들이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을 세상에 오게 하사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셨다고 말한다. 주님은 한면으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사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다른 한면으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가지고 가사 심판하셨다. 이렇게 하여 죄가 다시는 힘이 없게 되었다. 8 4절"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준행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우리가 오늘 믿으면 우리는 오늘 곧 능력이 있고 이김이 있게 된다
<워치만 니>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복음(1)


갈라디아서는 그 처음이  저주를 받을 찌어다 로 부터 시작하는 격앙된 어조로 시작하는 성경이다. 사도 바울을 격분 시킨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거짖 형제 들로서  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많은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다고 17절에서 분명히 말한다. 이 말은 다른 복음은 없으니 다른 복음은 그야말로 거짓 복음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변증을 들어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쫓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1:6-8)

오늘날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상실한 것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대적자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바르지 못한 것에 대한 격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44:23)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분별은 분명히 교만하거나 잘못된 행위가 아닌것이다. 옳지 않은 것을 분별하지 않거나 못 한다면 이는 마치 진리를 바로 깨달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이 전해준 십자가의 도를 속히 떠나 버렸다. 그리고 다른 복음(거짓 복음)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바울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3:1)하고 책망을 한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1)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옹호한다. 자기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 고 한다. 그러한 그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것도 아이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갈라디아교회에 복음을 전하였것만 그 복음을 지키지 않고 다른 복음을 쫓아간 그들에게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너희를 누가 꾀더냐고 격분된 그는 힐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 형제들은 복음을 어떻게 변질 시켰는가?
그들은 크게 두가지를 들어 바울을 공격했다. 첫째는 바울은 참 사도가 아니라고 하며 자신들이야 말로 예루삼렘에서 파송된 참 사도라고 자처했다. 그리고 두번째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할례를 받아야 함은 물론 율법에 명시된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까지 옹호 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람들아! 라고 비하하면서 까지 저렇게 격분해 있는 까달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필히 수호하기 위해 서였다. 왜 그?는가 복음은 여러것이 아닌 단 하나로서의 존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복음만이 곧 진리에 속한 복음이라는 것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알아야만 하나님으로 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바울은 먼저 깨달고 있었던 것이다.

올바른 것은 권위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 바른 것이 틀린 것으로 될때 격분되야 하는 것 역시 맞다. 기독교가 이토록 진리에 속한 권위를 상실하고 쉽게 비뚤어진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이단도 나오고 비진리에 속한 설교도 남무한 것이다.

혹자들은 고상한 자신의 도덕적 인품을 내세우며 자애스러운 태도로 다음과 같은 식의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저들이(갈라디아인들과 현 교인들) 예수를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어쨋던 좀 틀리게는 믿어도 예수 믿고 있는것은 확실한것 아닌가? 너무 편협된것 아닌가? 이래 믿으나 저래 믿으나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가? 도리어 까다롭게 구는 너가 잘못된것 아닌가? 하는 등등의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듣기는 그럴사 하고 이해를 해줘야만 하는 듯한 심정이 가는 설득인듯 싶으나 미안하지만 이 역시 분명 맞지 않다.

구원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얻어지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피와 살의 제사를 기념하는 것만으로 행하며하나님 존전으로 나가지 않으면 누구든지 온전한 죄씻음과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진리요 참 복음인 것이다. 이 복음에 다른 그 무엇을 첨가 시키려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1:7)하는 다른복음(거짓복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거짓복음을 쫓아가는 사람들은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5:4)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순수한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만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사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인들은 마치 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자신들도 무엇인가를 보태고 행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타락한 이 육체에서 나오는 그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모한 짓이다.

인간의 죄성은 구원을 얻었다 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죄성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월절날 그들의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졌듯, 우리 역시 이 죄성위에 발라짐으로 인해 저주가 넘어가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정 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이요 우리가 저주를 받지않고 피할 수 있는 참 복음인 것이다.

육신은 자꾸만 자랑 하려 한다. 공로를 세우려 한다. 그러나 이 모든것은 성경이 부질없는 교만이요 탐심이라고 증거를 한다 바울은 이 복음을 깨달기 전에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였다. 복음을 깨달고 난 후에 율법으로 흠이 없던 자가 아니였다. 다시말하지만 바울은 복음으로 구원 얻는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달고 난 후에 자기의 의와 율법으로 흠이 없는 것 이 모두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것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10:3)하려는 이 육신의 자랑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것 (4:16)이 되는 것이다.

또 다시 바울을 보자 그러나 나도(바울)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3:4) 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3:7-9)라고 말한다 허나 이뿐만이 아닌  이제 다음에서는 또 무엇이라 하는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위의 뜻은 무엇인가? 바울은 스스로를 자랑한다 쳐서 율법으로도 따진다면 누구보다도 흠이 없을 자신이 있고, 육체를 신뢰하여 구원을 얻는다 해도 누구보다도 더 그 구원에 이를만한 자격이 갖추어진 자신이 있는 자다 한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구원은 바울 자신의 그런 육체의 자랑 꺼리로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으로 바울은 영적으로 잘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갖은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의는 하나님께로서 난 의가 된다고 자신의 믿음과 구원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을려면은 우리의 율법적 행위와 육체적 신뢰감을 떨쳐 버리는 것이 먼저 되야만 한다. 우리의 의와 육체 가운데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만 배설물로만 여겨야 한다. 육신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본질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육신에게 억지로 모양새를 갖추거나 억지로 온전하고자 노력을 가한다 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만으로만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되고 온전한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영적으로 분별하여 보는 영안이 열려야 한다.

<출처: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예수님의 인성


1. 육신 안에 나타난 하나님
성육신 안에서 그리스도는 육신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딤전 3:16). 그분은 아들로서 뿐 아니라 아버지, 아들, 영이신 온전한 하나님으로 육신안에서 표현되셨다. 바로 그 하나님인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셨다(1:14). 그러므로 그분은 육신 안에 표현된 하나님 - 삼일 하나님- 이시다.

우리가 성육신 되셨던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서뿐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으로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요한복음 1 14절은 하나님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한다. 말씀이신 이 하나님은 부분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온전한 하나님 - 아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영 하나님 - 이시다. 신약은 육신 되셨던 말씀이 아들 하나님이셨다고 말하지 않는다그 대신 신약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은 온전한 삼일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셨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육신 안에서 그리스도는 육신 안에 나타난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육신과 인간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은 육신안에 나타나셨다. “육신 안에서”란 말은 사람의 모양 안에서, 사람의 형체 안에서를 의미한다.(8:3,2:7-8). 사람의 모양으로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으나 그분은 사람 안에 나타난 하나님 이셨다.

2. 하나님의 본질을 갖고 성령으로 잉태됨
그리스도는 하나님 - 사람이시다. 하나님 - 사람으로서 그분은 신성한 본질을 갖고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1:35, 1:20). 누가복음은 하나님 - 사람이 어떻게 잉태되셨는가를 우리에게 말함에 있어서 독특하다. 그분은 사람이 아닌 신성한 본질을 가진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성령은 사람에게 도달하신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 사람의 잉태 안에 성령은 인성 안으로 오셨다.

하나님- 사람이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그분은 거룩한 본질, 하나님의 본질을 갖고 계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성보다 한층 더 내재적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강한 의미로 ‘본질’ 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본질이란 어떤 실체의 내재적인 구성요소이다. 하나님 - 사람은 신성한 본성뿐 아니라 신성한 본질을 가진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하나님 - 사람의 잉태에 대하여 누가복음 1 35절은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말한다. 구름이 변형의 산(17:5)과 성막(40:34,38)을 덮은 것처럼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성령은 그녀가 주 예수님을 잉태하도록 능력으로서 다만 마리아의 위에 오셨던 것 같다. 그러나 마태복음 118절과 20절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을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거룩한 본질이 그녀가 주 예수를 낳기 전에 마리아의 태에서 생성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3. 사람인 처녀에게서 나셔서 사람의 본질을 갖고 계심.
하나님-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사람인 처녀에게 나셨으므로 인간의 본질을 갖고 계신다.(1:31,4:4). 그리스도는 사람의 본질을 가진 사람인 처녀에게서 나셨다. 누가복음 1 27-31에서 우리는 마리아라 이름 하는 한 처녀가 그 이름이 예수라 하는 한 아들을 그녀의 태 중에 잉태하여 낳았음을 본다.

하나님- 사람은 신성한 본질이 있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의 본질이 있는 사람인 처녀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신성한 것과 사람에 속한 것의 두 본질이 있다. 신성한 본질과 인간의 본질 둘 다를 갖고 이루어진 사람인 처녀 안에서의 성령의 그러한 잉태는 제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고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둘 다 소유하고 있는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신 분, 하나님-사람을 산출하는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과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성육신 안에서의 가장 놀랍고도 뛰어난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하나님- 사람의 잉태는 신성한 능력에 의해서 뿐 아니라 신성한 본질에 사람의 본질이 더해져서 두 가지 본성들 - 신성과 인성- 을 가진 하나님- 사람을 낳는 것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성육신이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육신 안에서 그분이 표현되실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을 인성과 연합시키셨다. 어떤 성경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잉태에서 연합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실패했다. 고대의 연합이란 단어에 관한 논쟁은 주 예수님의 인격에 있어서 신성한 본질과 인간의 본질의 연합에 관한 논쟁이었다. 이러한 연합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이들은 그것이 신성하거나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닌 어떤 재삼의 본성을 산출되게 했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하나님도 아니고 완전히 사람도아닌, 하나님도 사람도 아닌 어떤 재삼의 본성을 가진 제 삼의 실체라고 말하는 것은 커다란 이단이다. 주 예수님에 대하여 신성한 본질과 인간의 본질과 의 연합이 완전히 인성에도 속하지 않고 완전히 신성에도 속하지 않은 본성, 제삼의 본성을 산출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적인 것이다. 웹스터의 소사전(Webster's Abrided Dictionary)에 주어진 연합이라는 단어의 첫 번째의 정의는 “( 가지를 다른 것과 혹은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을 함께) 결합하고 연결하는 것, 특히 그 결합에서 원래의 요소들은 그 결합 안에서 구분할 수 있는”것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둘 또는 그 이상의 것들이 함께 연합될 때, 그것의 본성들은 잃지 않고 구분할 수 있도록 남아 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상항이다. 그분은 두 가지 본질, 신성한 본질과 사람의 본질로 잉태되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시다. 그러나 그분 안에는 신성한 본질과 사람의 본질이 남아 있고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본질들은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고 한 사람이신 그분 안에 연합되어 있다. 하나님- 사람이신 그분은 두 가지 본성을 소유하고 계시며 그분 안에서 각 본성은 구분될 수 있다.

4. 인간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앞 장의 메시지들에서는 주로 신성한 요소 안에서의 그분의 인격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요소 안에서 그분의 인격을 볼 필요가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측면 역시 하나님의 분배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해서 그분이 사람이 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기 전에 먼저 그분 자신을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분배하셔야만 했다. 우리는 성육신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인 처녀에게서 나셨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잉태와 출생을 인하여 그분은 신성한 본질과 사람의 본질 둘 다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을 때, 그분은 신성한 본질과 사람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사람이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사람이신 그분을 그분의 인생에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5. 사람의 아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심
인생 안에서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 인자이셨다. 그분은 인자이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한 사람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8 20절에서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인자이신 그분 자신을 언급한다. 그분의 삶 속에서 주 예수님은 계속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사셨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2 8절은 그분의 인생에서 그분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모양’이라는 말은 외부적인 모습, 외관을 뜻한다. 이것은 빌립보서 2 7절의 ‘형체’의 특별한 반복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보였던 것은 사람의 모양으로 되어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사람의 모양,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심은 그분의 자신의 낮추심이었다. 이는 그분이 사람이었을 때 그분의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첫째,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신을 비우셨다. 그 다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셨으며 죽음에 이르도록 순종하셨다( 2:7-8)

6. 뱀의 모양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모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듣고 매우 놀랄지 모른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4-15). 여기에서 주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놋 ,을 자신에게 적용시킨다(21:4-9).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고 반역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불뱀 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더라" (민 21:6). 그럴 때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그들이 여호와와 모세를 거스려 말하는 죄를 범했음을 자백했다. 그들은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제거해 주시도록 기도해 주기를 구했다.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주님은,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놋 뱀을 만들어 그것을 장대위에 달았다."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9).

민수기 21장에 있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예표를 계시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예비 되었다. 장대 위에 달린 놋 뱀은 요한복음 3 14절에 따르면 뱀의 모양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타락한 모든 사람들인 우리 모두는 악한 자, 뱀에게 물렸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뱀에게 물려 독을 주입받았을 때 물린 바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본성 안의 뱀의 독을 가지고 있는 뱀 같은 존재들이다. 하나님의 눈에 모든 타락한 인류는 독 있는 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한 뱀들인 우리에게는 어떤 대체물이 필요했다. 우리에게는 뱀의 모양은 있으나 뱀의 독 있는 요소는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어 주시는 것이 필요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뱀의 모양을 가지고 계셨지만 뱀의 독성을 갖지 않았다는 것에 매우 분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상 뱀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서 옛 뱀, 마귀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요일 3:10). 이런 이유 때문에 주 예수님은 마태복음 12 34절에서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 부르셨다. 마태복음 23 33절에서 그분은 그들을 가장 독이 많은 뱀의 종류의 자식, 뱀들,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셨다. 마귀는 죄인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8:44), 죄인들은 마귀의 자녀들이다. 죄인들은 또한 뱀들이며, 독사의 자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타락한 본성 안에서 죄가 있을 뿐 아니라 뱀과 같은 존재이다.

뱀은 ‘옛 뱀’이라고 불리 우는 마귀의 상징이다. (12:9). 의심할 여지없이 주 예수님은 사탄, 마귀, 옛 뱀을 ,처리하기 위하여 뱀의 모양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주 예수님은 옛 뱀, 마귀의 머리를 깨뜨린 것도 뱀의 모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하심을 통해서였다( 3:15). 그런 방식으로 그분은 이 세상의 통치자를 심판하셨다

7. 육신을 입으심
성육신 안에서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셨다. 육신 안에서 이 사람은 의복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 ‘의복’을 걸치셨고 입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이  땅에서 살고 행하셨을 때 내적으로 그분은 하나님이셨으며 외적으로는 육신 안에 계신 사람이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의복이신 이 사람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에 대하여 히브리서 2 14절 상반절은,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혈육에 참여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리킨다.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 우리와 다른 구주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 같이 되셨지만 죄는 없으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하여 육신 안에 오셨고 혈육에 참여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바로 하나님이 육신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 14절에 따르면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왜 그분은 육신은 육신이 되셨는가?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시려고 육신에 참여하셨다. 그러므로 성육신을 통하여 그분은 우리 수준에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실지라도 그분은 우리의 수준으로 오셨고 우리의 본성에 참여하셨다.

요한일서4 2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여기의 ‘영(spirit)'은 예수의 신성한 잉태를 시인하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으켜진 참된 선지자의 영을 가리킨다. 그러한 영마다 분명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예수는 그 영으로 잉태되셨다(1:18).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시기 위해 신성하게 잉태되셨음을 시인하는 것이다(1:31-35). 그분은 육신으로 태어나시기 위해 그 영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그 영은 그분의 신성한 잉태를 통하여 육신 안에 오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성육신 안에서 그분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육신 안에 계신 사람 곧 육신을 입은 사람이 되셨다.

8.믿는이들을  위해 죄가 되심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시기까지 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5:21).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죄가 되게 하셨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접촉이나 개인적인 체험에 의한 그러한 방식으로는 죄를 모르셨다(8:46, 벧전2:22, 4:15,7:26). 체험적으로나. 직접적 접촉에 있어서 주 예수님은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며,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죄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도록 죄가 되사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
  
죄는 하나님을 거스려 반역한 사탄으로 부터 왔으며(14:12-15), 사람안으로 들어가(5:12) 사람으로 죄인 되게 했을 뿐 아니라 죄 그 자체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신 안에서 사람이 되셨을 때(1;14), 그분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기 위해(8;3)죄가 되셨다(죄가 있는 것이 아님). 그분이 십자가에 계셨던 마지막 세 시간 동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눈에 죄가 되셨다. 하나님이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던 것은 바로 그 시간 동안이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던 분으로서 우리의 대치 물이신 그리스도는 영 단번에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으셨다.

9.육신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죄로 하여금 하나님에 의해 육신 안에서 정죄되게 하심
그분의 죽음 안에서 혈육을 입은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죄로 하나님에 의해 육신 안에서 정죄 받도록 했다. 로마서 8 3절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말한다. 육신은 죄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진실로 육신이 되셨다(1:14,2:14,딤전3:16). 그러나 그분은 단지 육신의 모양으로 계셨을 뿐, 육신의 죄에 참여하지 않으셨다. 로마서 8 3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육신 안에서 죄를 정하셨다.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 형태로 보내셨다. 이것은 죄가 어떤 요소 안에 거주한다는 것과 이 요소는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은 죄의 거처이다. 죄는 우리 육신 안에 거한다. 더군다나 죄는 사실상 우리 육신과 하나가 되었으며, 우리 육신은 사실상 죄의 성육신이 되었다. 성육신이란 전에는 밖에 있던 어떤 다른 것이 그것 안으로 들어와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말한다. 어느 날 하나님이신 주 예수그리스도는 성육신 되셨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되었다. 동일한 원칙으로 죄는 우리 육신과 하나가 되었으며, 그것은 죄의 성육신 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을 죄에 대하여, 죄를 처리하기 위하여, 심지어 그것을 폐하기 위하여 보내셨을 때, 그분은 죄 있는 육신의 실재 안에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죄 있는 육신의 모양, 형태 안에서 보내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의 성육신인 육신의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죄에 대하여, 죄를 처리하기 위하여 보내셨다. 로마서83절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음을 분명히 계시한다. 누구의 육신 안에서 하나님은 죄를 정죄하셨는가? 그 대답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을 받았던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 안에서 하나님이 죄를 정죄하셨다는 것이다이 육신 안에서 하나님은 죄를 정죄하셨다. 요한복음 1 1절과 14절에 의하면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영원한 말씀의 성육신인 이 육신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셧을 때, 하나님은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 안에서와 그분의 죽음 안에서의 그분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다.
  
그리스도는 혈육을 입은 사람이셨으며, 혈육을 입은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한 혈육을 입은 사람으로서 그분은 죄에 속한 육신의 죄 있는 본성이 아닌 죄의 육신의 모양만을 가지셨다. 그분의 육신 안에는 어떤 죄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죄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인성은 어떤 면에서 죄와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혈육을 입은 사람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로 육신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정죄 받게 했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하여 내주하는 죄를 정죄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신 것을 통하여 그분의 죽음 안에서 어떤 역사를 성취하셨다.

<출처: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