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2010

비참한 그리스도인

오늘 제가 여기 선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제 삶의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간단한 메시지에 의해서 삶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메시지가 얼마나 새롭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제가 회심하고 난 이후 29년 만에, 목사가 된지 17년이 된 이후에,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 주님께서는 제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내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가르침이었습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내 신분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은혜 아래서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도덕 주의라는 암 병에서 나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이 메시지를 나눌 때에, 그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있었던 변화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전문가로 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믿음 안에서 여러분과 한 형제로서 여기에 서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메시지 때문입니다. 저의 기도는 아주 겸손하게 이 메시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메시지에 복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나왔습니다. 이 메시지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기를 가지고 활동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변화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수년 동안 제가 깰 수 없는 패턴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동기를 얻어 일하다가 실망하고 다시 헌신하고, 다시 동기를 얻고 재헌신하고 다시 실망하는 사이클 속에 살았습니다. 저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주님 앞에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였을 때마다 주님께 충분히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주 바쁘고 활동적이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복음 증거를 위하여 바빴습니다.

언젠가는 하루 105가정의 문들을 두드렸습니다. 이런 많은 가정들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더욱 더 거룩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였을 때 주님께서 나를 더욱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저는 제 사무실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무실을 수요일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주님을 섬길 때에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런 행위가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동기의 수준에서 저는 열정적이었으며 저는 이 동기의 수준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시간이 감으로 점점 더 침체되는 것이었습니다. 전과 비교해서 수준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두 번째 사이클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나를 자책하는 단계로 떨어진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책망했습니다. 왜 나는 좀 더 지속적이지 못할까? 나는 왜 믿음의 상태가 오르락내리락할까? 이런 단계 이후에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 이런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나를 재 헌신의 단계로 이끌어 갔습니다.

주님 앞에 약속하며 더 잘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성경을 더 많이 읽겠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나누며 섬기며 더욱 헌신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동기의 사이클로 들어갑니다. 동기, 책망, 재헌신의 사이클이었습니다. 항상 이렇게 반복됩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자유할 수 있을까? 지속적인 권능을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지속적인 승리를 가질 수 있을까?

1990년 주님께서 나에게 한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길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신분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29년 동안 저는 율법주의적으로 살았습니다. 저의 심장은 주님을 위해 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심장과 나의 신실함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내 머리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나의 깨달음의 문제였습니다. 율법주의란 우리가 만든 시스템인데 삶을 발전시키려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보려고 하는 시스템입니다. 다른 시스템이 있는데 바로 은혜의 시스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십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이 시간에 율법과 은혜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육신의 삶과 은혜의 삶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율법적인 삶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령 안에서 걷는 삶인데,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육으로 살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제가 육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삶과 믿음의 삶을 비교해 봅시다.

1) 육신의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자기 자신을 바치는데 몰두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흉하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육은 바로 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말합니다. 내 능력을 가지고 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내 삶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육은 내 능력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보려는 노력입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목사님들이 육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면 어떤 사람들은 토요일 저녁에 술을 많이 먹어서 눈이 충혈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육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적인 삶은 자기 아내를 속이고 딴 살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회사의 돈을 횡령하는 사람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육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삶은 이런 삶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삶을 드려다 보면 이것은 아주 좋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빌립보서 3:4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립보서3:4)

 바울은 ‘육적인 삶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내 삶을 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육에 대하여 자랑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내놓을 수 있는 이력서입니다. 자기의 이력서를 내놓았을 때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갖고 있는 종교적인 육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는 신실한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내가 살아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걸음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인데 육적인 것과는 완전히 반대가 됩니다.

2)은혜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사시도록 맡기는 삶입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를 통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무엇인가를 행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법칙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포커스는 예수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두 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무엇을 하는가에 강조점을 둡니다. 그러나 은혜의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였는가에 강조점을 둡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입니다.

2. 율법과 은혜의 체계 
율법이 한 쪽에 있고 은혜가 다른 한 쪽에 있습니다. 이쪽에 믿음이 있고 저쪽에는 율법이 서로 반대되는 쪽에 있습니다. 율법과 은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까? 은혜와 율법이 갖고 있는 근본을 봅시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의 근원이 에덴의 동산까지 갑니다.

1) 창세기 2 8-9절을 보면 에덴동산에는 두 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2:8-9)

바로 이 나무들이 두 가지의 시스템을 이야기합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는 무엇입니까? 신약에서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나무는 예수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을 만드시면서 사람은 생명의 나무를 인하여 살 것을 설계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생명의 나무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향한 처음의 계획이었습니다. 인간이 매일의 삶이 하나님과 교통을 하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 그 계획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15:4-5절의 내용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4-5)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 나무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여야 한다는 말합니다. 만약에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여러분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시면서 두신 첫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창조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디자인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할 때에 그분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열매를 거두십니다.

그러나 율법주의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걸음은 내가 아닌 내 안의 예수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판단해 보십시오
저는 미국의 남부에서 자라났습니다. 거기는 아주 복숭아들이 많이 납니다. 저는 과수원에서 놀았습니다. 그곳은 아주 고요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끙끙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일까? 거기에 복숭아 하나가 흔들리면서 복숭아가 떨어졌습니다. 복숭아가 더 많이 자라려고 더 많은 열매를 맺으려고 끙끙거리고 힘을 쓰는 것입니다. 큰 소리를 내면서 힘쓰자 열매가 더 많이 맺혔습니다.

이것이 맞는 이야기입니까? 성경의 이야기는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에게 합류가 되었을 때, 그 안에 거할 때, 그 분이 우리를 통하여 열매를 맺어 가십니다. 생명의 나무는 예수를 가르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율법을 보여줍니다.
그 안에는 다른 나무가 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이 나무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선악을 가려냅니다. 선과 악은 도덕을 규범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2:16-17)

하나님께서 이 나무에 대하여 이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의 나무를 먹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사탄이 옵니다.

2) 사탄은 첫 번째 거짓말을 합니다. 뱀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뱀의 이야기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26-31)

뱀이 ‘나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창조된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은 ‘너희가 이것을 먹어야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같은데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너희가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이 거짓말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만약에 그렇게 되고 싶다면 제가 말하는 것을 행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믿는 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이렇게 해야 닮을 수 있다고 설교를 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그의 형상을 본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예수를 닮기 위해서는 이렇게 행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사탄의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뱀은 한 가지만 하라고 했지만 저는 교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하라고 요구했는지 모릅니다.

이번 만남을 통하여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필요는 좀 더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거룩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미 주신 신분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스스로가 누구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스스로 이루어 보려고 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율법주의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3)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여러 가지 결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고, 하나님과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은 높이 계셨고 사람들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던 자기의 신분을 그 때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신분을 찾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이후 무엇을 보았습니까? 스스로 벌거벗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그들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살아왔지만 서로 벗은 것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에 벌거벗은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왜 전에는 벌거벗은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를 바라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먹기 전 까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집중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에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이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계속 자신을 쳐다봅니다.

아담과 이브가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에 대하여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대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노력하여 그들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잎사귀로 가렸지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율법주의 아래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바라보고만 있지 스스로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력과 행위를 통하여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보려고 하는 방법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은 가치의 세계에 의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치는 어떻게 하면 좋은 일을 하고 어떻게 하면 나쁜 일을 피할 것인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 그들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선악을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 선과 악이 같이 공존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도 악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도덕이 정해준 규범입니다. 그 이전에는 도덕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도덕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기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오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덕주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려내는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도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도덕적인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기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합니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늘 예수님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이미 경건한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규칙 때문에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 결과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자기의 행위에 퍼포먼스가 있습니다. 저는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경건한 행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넘쳐 흘러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삶의 핵심은 행위 중심의 삶입니다. 저는 전에는 행하라, 행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예수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고 성도의 행위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랑의 관계를 갖고 있으면 그분을 위해 살려는 마음이 자연히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목사였습니다. 율법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눈과 손과 발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필요로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4) 육신의 삶의 핵심은 행위 중심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잘하셨습니다.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집니다. 내가 없어도 됩니다. 우리의 섬김을 꼭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원하고 있습니다.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한다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사도행전17:25) 

하나님께서 무엇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의 섬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은혜 아래서 걷고 쉬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신앙생활에서 평안함을 절대로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아래서 쉬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율법주의에 끌려 다니게 될 것입니다. 육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즐길 수 없습니다.
  
육신의 삶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육신의 삶은 명성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 육신의 삶은 성취욕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육신의 삶은 자기에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 내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육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이런 것들이 왔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두 가정이 나옵니다. 가인과 셋의 가정입니다. 두 가정 중에 한 가정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았는데 한 가정은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산 가정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4 16-22절을 보겠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창세기4:16-22)

가인의 후예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습니까?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을 구축하고, 어떤 사람은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어떤 이는 음악가입니다. 이런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를 기록한 것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세기4:26)

그 때에서야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그들의 신분 안에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가정입니다.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세기4:6-9)

여기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그 행위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가 결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하는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름을 물어본다면 그리고 이름 이상의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하신다면 물어보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뇌 전문 의사입니다.

“오 그렇습니까?(놀라워하면서)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저는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래요!(우습게 여기며) 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냐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분의 가치가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가치입니다. 육적인 삶, 율법적인 삶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강조하지만 은혜 아래서는 예수 안에 있는 나 자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혜의 삶의 핵심은 예수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삶입니다.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더 열심히’를 생각하지만, 은혜의 걸음을 걷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노력해서 입니까? 믿어서 입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노력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마리아 집에서 주무셨습니다. 자매들이 조반 준비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냄새가 좋습니다. ‘오늘은 사역을 그만하고 쉬면 좋겠다, 그러나 악한 사탄 마귀가 있으니 쉬면 안 되겠지,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까?’ 스케줄을 조정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설교할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니까 오늘을 병자를 많이 치유하여야겠다.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는 귀신을 쫓아내야겠다.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하시니까, 그 이후에는 장례식에 가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야겠다. 그러면 오늘 하루가 멋진 하루가 될 거야.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을 하니까? 하나님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사역하셨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3. 은혜로 사는 삶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시고 넘쳐흐르는 은혜로 하루하루를 사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교통 안에 넘치는 은혜로 살았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한복음5:30)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한복음5:16)

이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하십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요한복음8:26)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요한복음8:42)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한복음12:49)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한복음14:24) 

예수님께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십니까?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활기있게 한 근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삶을 살게 한 근원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노력하여서 하나님을 위하여 산 것이 아니고, 기사와 표적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사도행전2:22)

성경은 기사와 이적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경우와 우리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20:21)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는데 너희를 통하여 역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한복음5:19)

만약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몇 가지의 기적을 행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5:15절을 근거로 하면 전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이시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있었습니다.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행할 것을 믿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적어도 설교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픈 사람을 방문하고 상담을 하며, 행정을 하며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주님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보며, 모든 것을 다 더 해보라. 다 더하면 제로가 나온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그를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안에서 여러분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사역을 다 하십니다. 내가 어디에서 이 말씀을 전해도 대부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동행하시고 돕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면 동의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를 통해 사는 가 입니다.

하여가(何如歌) 와 단심가(丹心歌)

인간은<영혼을 가진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육체를 가진 영혼의 존재> ,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 인간의 존재의식에 대한 인식은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와 방법과 목적을 좌우합니다,
 
형식이 내용을 규제(規制)하지만 내용은 형식을 규정(規定)합니다,그래서 형식이란 규제는 내용의 본질을 바꾸지는 못합니다,창세기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흙으로 지으시고(형식) 다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내용)으로 우리 인간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를 가진 영적인 존재>가 우리의 근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며,하나님의 호흡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습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심어놓았던 선악과 나뭇가지 하나와, 생명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만든 십자가는 사망과 생명이 교차하는 교차로요, 그 위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확실한 증거요, 그것을 인정함이 믿음입니다,
 
육체의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다,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객사(客死)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막장인생이나,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후(고후4;7)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현실은 삶속에서 늘 흔들리고 지척댑니다,그러다보면언젠가만을 꿈꾸며오늘이 없는 듯 살아가는 병약한 신앙인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림같이 맑은 호수 위를 춤추듯 헤엄쳐가는 백조의 물 밑 두발은 쉼 없이 헤엄치고 있듯이,우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그 언젠가가 바로 오늘처럼, 매일(每日)을 영원의 정점(頂点)에서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신체적으로 건강하기위해서 영적으로 건강해야 한답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나는 과연 영적인 존재로서의 주님의 말씀처럼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와 같은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4~5)
 
이 하나님과의 견고한 관계의 현실적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다음의 3가지 열매가 나의 삶속에서 맺혀가고 있다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건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경외> <순종>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일견(一見)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우리와 관계하시기 때문이랍니다,

첫째, 창조주요, 심판주요, 절대주권자 이신<거룩하신 하나님>은 그 거룩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 마땅하신 분으로 경외의 대상이십니다,
   
둘째는, 원수 마귀의 손아귀에서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하던 나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가로 지불하고 나를 되 사신<주 하나님>은 나의 주인(主人)이기 오직 순종해야 할 분입니다,
   
셋째는, 그러한 종 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양자로 삼으시고 늘 보호, 인도, 공급하시는 하나님은 그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늘 감사해야 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경외와 순종과 감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12;30)는 첫째 계명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그리고 또 하나의 반응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만큼 나도 나를 사랑해야합니다,이는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12;31)는 둘째계명의 전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더 잘합니다,
 
보스턴의 한 정신질환자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 환자가 있었답니다. 그의 상태는 심각하여 치료는 포기되고 회복불능 판정과 함께 정신병동 지하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모두 치료를 포기했을 때 노()간호사인 로라(Laura)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로라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그냥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셨듯이 사랑의 댓가는 희생입니다,로라의 이러한 헌신은 결국 열매를 맺습니다

마침내 2년 만에 앤은 정상인 판정을 받고 그 후 앤은 파킨스 시각장애아 학교에 입학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으로 밝은 웃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에도 성공했습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신문기사를 봤습니다. "보지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결국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최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습니다. 그 아이가“헬렌 켈러 '이고, 그 앤이 바로 설리번(Ann Sullivan)선생님이랍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습니다,호흡하지 않는 생명은 죽습니다,줄기에서 잘려나간 가지는 메말라 죽습니다,소통하지 못하고 막히거나 단절되면 부폐하고 썩습니다.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될 때 문제가 생기고 환란이 닥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제()문제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라고 합니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의 탄탄한 관계유지를 통해 영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 내장된 하나님의 GPS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 우리의 시선(안테나)은 언제 어디서든 항상 문제와 아픔과 절망의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한답니다,
 
알지 못하는 길을 달리는 운전수는 위성에서 보내주는 위치신호를 따라가면 목적지가지 헤매지 않고 갈수 있습니다,그러나 시건방진 운전수마냥 우리는 나의 지()와 능()으로 시작하여 할 것 다 해보고 터지고 찢기우고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GPS의 신호를 켜고 하나님을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14;13)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46;10~11)이를 줄여 표현하면 “기도(하나님과의 진정한 대화)는 우리의 마지막 호소처가 아니라 우리 삶의 첫 반응이 되어야한다 (Kerry Shook & Chris Shook)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엉뚱한 비유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고 유혹하는 이방원의 이 <하여가 何如歌〉같은 육체의 유혹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라고 답하는 정몽주의〈단심가 丹心歌>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영혼의 노래가 되기를 원합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10/28/2010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다. 요즘 먹고 살 만하니까 교회생활을 액세서리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졌다. 과거처럼 코가 석자나 바지는 생활이 아니라 여유를 가지는 생활이 되어서 그런지 그렇게 뜨거웠던 기도생활도, 간절했던 새벽기도도, 이제는 졸업한 지 오래된 것 같다.

신약성경 마 9:1~8, 2:1~12, 5:17~26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중풍병자를 비롯하여 그 주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아주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중풍병자 (네케) 자기 생각으로 똘똘 뭉쳐 머리 안이 굳어져 마비되어 있는 상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들어와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 그리스도 예수의 사상이 내 안에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 죄를 깊이 뉘우침 또는 마비됨이란 의미로서 사람의 생각으로 굳어져 하나님의 생명의 피, 그리스도의 생명이 몸 안에 돌지 않아서 마비되어 절뚝거리는 상태, 자신의 생각의 옥에 갇혀 있는 상태를 말고 있다.

다른 예로 문둥병자는 예수의 피로 갈아야 하는 상태, 말씀이 오염되어 변질된 상태, 열병환자는 자신의 감정과 혈기에 열이 넘쳐 나 있는 상태, 혈루병 환자 : 생명인 피를 내면세계에서 돌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하여 레마를 내놓은 상태, 생명의 본질이 마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 병을 고친 사건은 육신적인 병을 고친 사람도 해당되지만 그 사건을 접하고 있는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해당되는 병을 갖고 있음을 진단하시고 고침을 받기를 원하시는 내용이다. 또한 그 병을 치료함을 얻는 자가 바로 신유의 은사를 받은 것을 의미한다.

신유는 고치는 사역만이 아니라 자신의 병을 치료받는 것도 신유의 은사를 받은 것임을 직시하고 성경을 대했으면 한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갔더니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할 때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인가? (왕하 5:11~12) 자신이 살고 있던 고향에 강은 너무나 아름답고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목욕하기가 너무나 좋은 곳이다.

그런데 겨우 시냇물처럼 사람들이 폴짝 뛰어 건너뛸 수 있는 너무나 초라한 개천이라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목욕하기가 너무나 용이하지 않음을 분개한 것이다. 그러나 요단(야르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상태로 되어진 생명이 흐르는 강으로서 내가 낮아지고 낮아져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어 내 생각이 깨어지고 씻겨지는 강을 의미한다.

나아만 장군에게 일곱 번 목욕하라는 명령의 의미는 단순히 목욕하는 차원이 아니라 짐승의 속성을 완전히 씻으라는 명령이다. 나아만 장군의 내면세계 속에 잠자고 있는 짐승의 속성을 말씀의 방망이로 완전히 깨어져 하얗게 어린 아기처럼 피부가 깨긋해 지는 장면은 마치 마술처럼 영화 드라마처럼 멋진 장면이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 피부로 바꾸어졌다는 뜻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로 변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갖고 있는 짐승의 속성이 강물 속에 씻기고 씻겨서 깨끗하게 된 상태를 말하는데 예수를 처음 믿었다고 해서 완벽하게 완전한 구원을 이뤄진 것이 아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는 과정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 3:7~8 요단 물로 들어가라는 말씀도 낮아지고 낮아지는 요단 강안에서 꼼짝 달싹하지 말고 확실하게 서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여자문제, 돈 문제, 기타 문제로 넘어지고 있는가? 이미 드러난 목회자들의 잘못도 문제이겠지만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희희낙락하지 말라.

이미 드러난 목회자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자숙하고 자성하고 있다면 진정한 참회 속에서 주의 뜻을 이행하고 있다면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쉬지 않고 계속 감행해야 할 것이다. 만약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있다면 그리고 그 일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면 과감하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뤄진 강, 요단 강물 속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바로 세례며 침례인 것이다. 베드로전서 3:21처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바로 요단 강물에 서 있는 것이며 그 안에서 목욕을 해야 되는 나아만 장군인 것이다. 말씀 속에 퐁당 잠겨 있어야 한다.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나오는 물속에 들어가서 발목, 무릎, 허리, 능히 건너지 못할 강물에 잠겨야 한다.

3절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바이샤우후 베아르비아)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동침 안에서 새 생명으로 들어 올렸다는 의미를 말한다. (고전 12:25~27, 6:1~2) 중풍병자를 한 사람이 들고 올 수 없으며 두 사람도 안 된다. 왜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지 않으면 들고 올 수 없다.

4절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내고(히타르)라는 말씀은 “뚫다, 깨트리다, 지붕이음을 제거하다”는 의미로서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굳어져 있는 중풍병자의 머리속의 생각 하나 하나를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왓장을 벗기듯 깨뜨려서 벗겨냈다는 뜻을 갖고 있다. ( 9:18~19) 그러면 수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중풍병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 글을 쓴 본인을 비롯하여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일 것이다. 얼마나 수많은 잡념 속에 사로잡혀 고정관념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바로 중풍병자일 것이다. 내가 먼저 네 사람이든 네 천사이든 지금 예수님 앞으로 인도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지붕의 기왓장을 벗겨내는 것처럼 하나하나 벗겨져야 한다.

5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서 저희는 ‘복수’로 중풍병자가 아닌 환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것이다. 도저히 중풍병자의 믿음은 아주 미미하여 치료받을 수 있을 만큼 신앙의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를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네 사람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친구로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로 동침되어 있는 성도들이 필요한 시대다. 자신에게 이루어진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주고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깨닫고 중풍병자의 고정된 관념을 하나하나 벗겨내어 예수님 앞에다 내려놓는 믿음이 절실한 시대다. 이런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을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대목에서 기도하는 차원이 바로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람이 해야 되는 기도이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아무런 체험 없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중풍병자가 낫기 위해 데려간 네 사람의 신세를 진 것을 갚는 기도다.

하나님께로부터 빌려온 빚을 탕감받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빚을 갚고자 하는 간절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바로 빛을 탕감 받은 자들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심보다는 네 사람(레바이)의 믿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신 것이다. 네 사람의 단어 어근(라바)은 “동침하다”라는 단어로 즉 짐승의 속성이 소멸된 성도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시는 역사를 우리가 체험해야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여러분이 가장 뚜렷이 기억해야 할 내용은 "마지막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영원히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며, 이 땅의 문명 역시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시작된 인류의 역사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곧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를 알리는 경고가 온 세상에 널리 선포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들이 아무리 마지막 때를 경고한다 해도, 모든 사람이 듣고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 12 10절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고 했습니다.

선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떠나 정결한 마음을 이뤄갑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악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여전히 악을 행하며, 점점 더 악해집니다. 검은 것은 더 검게, 흰 것은 더 희게, 육은 더 육으로, 영은 더 영으로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 11절 말씀은 이처럼 악인과 의인으로 양극화되는 마지막 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양극화 되어가는 마지막 때의 모습

1)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11절 전반에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전해도,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의와 더러움 속에 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받고, 받지 않고는 각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의롭게 만드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만,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찌하실 수가 없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그대로 불의하게, 더러운 사람은 더럽게 남겨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의한 것"이 무엇인지는 고린도전서 6 9-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불의한 것입니다. 즉 불의한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유혹에 미혹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가 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걸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곳곳에 많이 기록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주여, 주여 부른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야 구원 받는다고 수없이 기록하고 있는데 사망에 이르는 죄가 뭔지 수없이 기록하고 있는데도 그런 건 다 빼버리고 무조건 구원 받는 것처럼 가르쳐가지고 어찌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의한 일들이 계속 쌓이면 더러운 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더러운 것"은 사람의 도리에서 벗어나며 난잡하며 방탕한 것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음행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음행을 넘어선 것들이 있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일을 저지르거나, 입에 담기도 민망하여 세상 사람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지저분하고 충격적인 일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음행 중에서도 더러운 것에 속합니다. 다른 예를 들어, 시기의 경우에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더러운 행함이 나옵니다. 상대를 시기하는 마음이나, 그로 인해 상대에게 악을 행하는 자체도 이미 불의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투기가 지나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없애려 합니다.

TV 사극 등을 보면, 종종 궁중의 여인들끼리 시기하여 저주를 하거나 주술적인 행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대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화살을 쏘거나, 상대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바늘로 찌르는 등 악한 영의 힘을 빌려서라도 상대를 해치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한 마음과 행함이 도를 지나쳐서 보통 사람들의 양심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이 나오는 것이 바로 더러운 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이에도 서로 이간질 시키는 것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더러운 행동입니까? 거짓말해가면서 이간질 시키는 사람들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에 이간질 시켜 상대를 매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더러운 행동들인지요? 마지막 때가 될수록 세상의 불법과 불의는 더 심해지고 죄악의 전파 속도도 빨라집니다. 수십 년 전, 아니 십여 년 전만 해도 너무 수치스럽게 여겼던 일들을 이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행합니다.

한 번, 두 번, 불의하고 더러운 일들을 점점 접하게 되면, 그렇게 보고 듣는 것이 마치 씨를 뿌린 듯이 마음에 심어집니다. 양심이 무뎌져서 악한 것을 보아도 경계하지 못하고 어느새 자신도 물들어서 따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착하게 자란 평범한 아이들도 나쁜 친구들을 만나 함께하게 되면 악하게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나쁜 친구들이 때리고 욕하고 훔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면서, 아직은 양심에 찔리더라도 친구들을 따라 자기도 악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따라하다 보면, 점차 양심의 가책도 사라집니다.

이제는 자기도 자연스럽게 욕하고 때리고 담대하게 훔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에 거하면서 불의와 불법을 계속 보고 들으니 점점 더 깊은 죄 가운데로 빠져들어 갑니다. 세상 어디서도 깨끗한 곳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2).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도 선한 양심 속에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 4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했습니다.

죄악 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어찌하든 자기를 지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죄를 버려가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신 것이 본문 11절 후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자"는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온전하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말씀을 온전히 이루어 세상과 구별되며,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처럼,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는 그 깊이가 다릅니다. 성결을 이룬 사람들 중에서도 영의 사람과 온 영의 사람의 깊이가 다른 것과 비슷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의로운 차원을 넘어, 진리에 속한 모든 분야를 두루 갖췄을 때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행하면서 깨우치는 만큼 성령의 감동하심 속에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아갑니다.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으면, 말이나 행동이 품위 있고 아름답게 나옵니다. 선에 속한 지식과 주의 교양을 갖추어 말과 행실에서 책잡을 것이 없게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늘의 지혜를 받아서 경우에 맞게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 15-16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니 우리도 선을 좇아가야 되고 우리 주님을 닮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쳐야 되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의로우며 더 나아가 거룩함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이 자기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죄악과 접하기 싫다고 해서 세상과 분리되어 살 수는 없으며, 자신이 원치 않아도 악한 것을 보고 듣기가 쉬우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와 악에 무감각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죄를 지적하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설령 교회에서 죄를 지적한다 하더라도, 성도들이 죄에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 때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결단하여 돌이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무서워서 하나님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죄를 버리지도 못하는 상태로, 교회와 세상의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 죄를 지적받고 마음이 불편해지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죄를 지적하지 않는 교회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요? 이런 세상이니,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고 죄를 지적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해서 떠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받을 백성이라면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교회에서 죄를 지적해도 자기를 지키지 않고 세상에 물드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의하고 더러운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의롭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키려면,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한 대로, 말씀과 기도 속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이 노력과 함께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또 성령님이 도와주셔야 됩니다. 3박자가 맞아 떨어져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야 내가 거룩해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이게 진리인지 비 진리인지 죄인지 악인지 선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뭘 버려야 되는지 뭘 하지 말아야 되는지 뭘 해야 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해서 내가 거룩해질 수 있고 성결 될 수 있고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섰을 때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고, 기도의 힘으로 선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택의 순간에서 불의와 타협하게 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안의 성령이 탄식하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곤고해지므로, 무엇이 문제인가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 불의를 행하는데 곤고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의롭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불의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심히 물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3).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요한계시록 22:17절 후반에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듣는 자란 복음을 듣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만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 2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을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고,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 곧 참으로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된 사람이라야 새 예루살렘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목마른 자가 나오는데 의에 대해, 진리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많이 바뀌었다면, 이 여인의 인생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고달프고 힘든 삶을 인내하며 어찌하든 만족을 찾아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진정으로 충만함과 기쁨을 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곤고했겠으며 얼마나 갈급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처럼,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갈급함을 채우고자 육적인 것을 취하고 또 취해 봅니다. 그러나 육을 아무리 취해도 그 마음에 진정한 해갈은 되지 않습니다. 짠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오히려 육을 취할수록 갈급함은 더해 갑니다. 이럴 때는 육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수를 찾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수이며,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았을 때, 그 마음에 생명수가 채워지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목마름이 해결되고, 희열이 넘쳤을 것입니다. 이처럼 거듭나는 기쁨을 맛본 사람들은 변화된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심히 행해 나갑니다. 그 갈급함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서 부지런히 배우고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 속에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를 공급받게 됩니다. 영생을 사모하며 의에 갈급한 사람은 누구라도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데 많은 교회들이 대표기도 할때를 보면 "이 죄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는 등 죄인 자가 왜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요?

죄를 짓고 사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짓고 사는게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0절에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하였듯 마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라 하신대로 하기 때문에 버리라는 거 버리고 죄와 악을 버리기 때문에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하고 말씀을 늘 듣고 아무리 듣고 안다 해도 내가 마음에 행치 않으면 의로워지지 않으면 마음에 할례하지 않으면 악을 버리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든 레이족이든 장로님들 권사님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할례하지 아니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쭉정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곡이 되어가야지 쭉정이 신앙생활하면 안 될 것입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아직도 간음기가 있고 욕심이 있고 교만하고 악을 가지고 있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도적질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하나님 말씀을 들어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많은 세월만 지금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성령을 보내주신 것도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구원의 길이 열렸고, 주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한 번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조건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아 나도 믿으니까 구원 받았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란 개념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믿습니다" 하면 그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개념을 안다고 하면 그런 말을 못합니다. 물론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근데 믿는다고 하는 게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참 믿음이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안타까운 지금의 현실입니다.

듣고 지식으로만 알고 "믿습니다"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행치 아니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이런 죽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고.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역사는 아무것도 따르지 않지 않습니까? "믿습니다"해서 응답이 오나요? "믿습니다" 하면 응답이 와야 하는 것인데 성경은 분명히 수없이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고 간구한 것은 응답 받은 줄로 믿으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다 주신다, 이렇게 곳곳에 기록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갓난아기가 세상에 태어났는데, 젖도 먹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면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수를 마신 사람이라 해도 더 이상 생명수를 마시지 않고 영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로 인해 고난 당하셨고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제는 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며 죄 가운데 살면, 한번 성령을 받았다 해도 성령이 소멸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생명책에서도 이름이 지워집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그 마음에 희열이 넘치고 감사가 가득하므로 부지런히 죄를 벗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심방합니다. 마음을 다해 예물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의 값을 지불할 수는 없습니다. 혹여 구원에 대해 어떤 값을 지불할 수 있다 해도, 그 값은 어느 정도라고 정할 수가 없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고 세상 모든 보화를 드렸다 해도, 구원의 값을 치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귀한 독생자가 처참한 형벌과 사망을 대신 당해 주셨는데, 무엇으로 그 값을 치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말할 수 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천국을 주신 것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은혜입니다그 은혜를 중심에서 깨닫는 사람이라면,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도 그냥 받고만 있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와 사랑의 향으로 드릴 때 기뻐 받으시고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큰 축복으로 돌려주십니다. 성결의 능력을 더하시고 영혼이 잘되게 하십니다. 심는대로 30, 60, 100배로 갚아주시고 믿고 구하는대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십니다.

요한일서 4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거룩함을 이루어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죄를 많이 버렸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잘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죄를 버리기는 하는데 그 속도가 더디고 억지로 힘들게 싸워 버린다면, 이것도 민망한 일입니다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생의 밑바닥, 가장 깊은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속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 은혜가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서 죄를 버린다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마음인데, 더러운 죄를 버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더구나 그 죄 때문에 질병과 재앙과 온갖 시험 환난을 겪는 것인데, 당장이라도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중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4). 성경 말씀을 더하거나 빼서는 안됨 
이어지는 18-19절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했습니다.

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임의로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신다 했습니다. 또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신다 했습니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가졌다면, 이러한 말씀을 더욱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는 것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부분은 빼거나 희석시켜서 가르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결에 대한 부분입니다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와 악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거룩하라", "성결하라", "죄를 버리라", "육체의 일을 행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런 말씀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은 빼 버리고,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흐린다"는 말씀도 있는데, 이런 말씀도 싹 빼고 가르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도 있는데 성령을 한 번 받으면 무조건 구원받는 것처럼 말합니다. 한번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반드시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영적으로 신랑 되신 주님의 신부입니다. 장차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시면,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서 흠도 점도 없으신 신랑을 맞아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혼인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예복을 갖춰야 하며, 영광스럽고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그에 맞는 거룩한 단장을 해야 합니다.

계시록 22: 14절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했습니다. '두루마기'는 주님의 신부들이 입어야 할 예복을 의미합니다. 예복을 입으면, 자세가 반듯해지고 행실도 평소보다 품위 있게 변합니다. 마음가짐도 달라집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예복, 곧 두루마기는 우리의 행실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기 전에는 두루마기가 검은 색입니다. 온갖 죄악에 찌들어 새까맣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고 나면, 맑은 물로 부지런히 두루마기를 빨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할례하며, 거룩한 행실로 신부단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행실을 가지려면, 먼저 그 마음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결국, 죄악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정결하게 할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그 밖에도, 방언이나 각종 은사를 금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잘못이라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 신약 수없이 부르짖어 기도하라 했는데 부르짖어 꼭 기도해야 되느냐 잠잠히 기도해야지 초신자나 부르짖어 기도하지 초신자가 아닌 사람은 묵상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이 못 들으시느냐 이런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짖어 기도하라면 부르짖어 기도하면 될 터인데 또 방언을 하면 잘못되었다 하는 둥 하나님 말슴들을 이렇게 제하여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나 선지자들이나 제자나 사도 바울이나 부르짖어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고 우리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성경에 있는 것을 제하여 버립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수도 없이 구약 신약에 말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사와 표적을 비롯하여 영의 세계에 대한 말씀들이 자기 지식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그런 부분은 빼고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천국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결코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습니다. 더구나 성경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결정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행했는가, 행하지 않았는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나뉘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결코 사람의 생각 속에 더하거나 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물에 빠져 죽으면 육의 생명을 잃지만, 영혼이 실족할 때는 영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삼가 근신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5).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20절에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마무리 짓는 22장에서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세 차례나 반복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 7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셨고, 12절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말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에 사는 증거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고 또 말씀하고 있는데 속히 오시리라 하면 당연히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말입니다.

죄 짓고 구원 받을 자신이 없는 사람은 두려워서 그 말을 안 받으려고 하겠지만 믿음이 있고 내가 천국갈 수 있다 하는 사람들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처럼 거듭하여 경계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그날과 시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때의 징조에 비춰 보면, 그때가 얼마나 가까운지는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한 2000여 년 전에 비해 끝 날에 더욱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설령 그 때가 넉넉히 남아 있다 할지라도, 각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이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라 해도,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당장이라도 가야 합니다. 언제라도 부르심에 응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죄의 담을 신속히 헐어버리고 죄의 담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라 이 말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주님을 맞을 준비가 덜 된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습니다.

그러나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들을 때 소망이 되고 가슴이 벅찹니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눈물부터 나오고, 그리운 주님께 무슨 말씀부터 드릴까, 어떤 모습으로 안길까 하면서 마음이 설렙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믿음의 선진들은 칼에 목을 베이고 사자 밥이 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해도 영광인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내 믿음 지킬 때 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믿음의 선진들도 칼에 목 베이고 사자 밥이 되면서도 찬양할 수 있었고 기도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고통의 순간이 아니라, 그립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은 순교하는 것도 아니고 살아서 주님을 맞게 된다면 얼마나 더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면서 기쁨으로 화답할 수 있습니다.

그 날을 얼마나 소망하는가에 따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또 내가 얼마나 신부단장이 되었는지를 스스로 측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 속에도 하나님이 은혜, 주님의 은혜가 입혀집니다.

6).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21절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자들은 이미 주님을 믿는 자들과 앞으로 믿을 자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매일의 삶 자체가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속하셨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 날마다 인도받게 하십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심같이 구하는 것마다 응답하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성령의 불 담으로,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범사에 형통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 끝나면 그립던 주님의 품에 안기고 천국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값없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할 것은, 이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주셨을지라도 각자가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은혜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는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말로는 은혜와 감사가 풍성한데 정작 그 마음은 변화가 더디기도 합니다. 감사할 줄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정말로 그 은혜에 감사한다면 그 은혜를 통해 변화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열매를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깊은 진리를 깨우쳤다. 하거나, 나의 근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는 "내가 이러한 사랑을 받았으니 내 생명 다해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고 눈물로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길이 보입니다. 속히 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지켜보면 그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 있기도 하고 더 이상 은혜에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처럼 은혜를 받고 쏟아 버리기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사람이 밧줄을 필사적으로 잡는 것처럼, 그 은혜를 꼭 붙잡아야 합니다. 중심에 새겨서 영적인 열매를 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결단하고 마음을 지키고자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 성결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며 더 많은 열매를 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 성결의 능력뿐 아니라 실한 열매를 맺을 능력도 더하시고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불의에서 떠나고자 노력하던 성도들도 한 번 두 번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각종 예배에 다 나가던 사람이 이제는 간신히 주일과 금요철야만 나가고, 때로는 주일 대예배만 근근이 드립니다. 기도 시간도 한 번 두 번 빠지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아예 쉬어 버리게 됩니다.

충만함이 없으니 구역이나 기관 모임도 빠지게 되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억지로 나간다 해도 이 사람 저 사람과 걸리고 감정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에 속한 일들은 조금씩 줄이고, 반대로 세상을 하나하나 취하기 시작합니다. 충만할 때는 버린 것 같았던 것들을 다시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 빠져들다가 중한 질병이 오거나 큰 시험 환란이 왔을 때, 이때라도 돌이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런 상황에 처하면 회개하여 돌이킬 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도 없습니다세상 방법을 구하기도 하고, 그러다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는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기 부탁드립니다. 날마다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온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존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료제공 : 우림과 둠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