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2010

하나님의 집: 각 장의 요점들

종교적인 교만은 그리스도의 충만에 다가가기 위해서 반드시 낮아져야 하는 높은 산입니다.

주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영원한 생명의 강은 모든 다른 강들이 그렇듯이 산을 피해서 흐릅니다. 평야와 골짜기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주 예수님을 맞으려 한다면 교만이라는 산을 낮아져야만 합니다우리가 골짜기가 되는 정도에 따라서만 메워질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같은 크리스천 형제와 갈등하며 증오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죄인들에게 깊고도 영원히 신뢰할 만한 하나님의 용서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 성소를 깨끗게 함 그 아들에게 순결한 신부로 내놓으시려고 아버지께서는 교회를 죄로부터 깨끗케 하십니다. 이 새로운 수준의 순결함 속에서 주님의 집은 또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하나님은 나라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제사장들을 성결케 하고 주님의 집을 깨끗케 하려 하셨습니다. 영원하신 그분께서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이 눈에 보이기 전에 그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룩하게 움직이십니다

주님께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아무 장에 없이 말씀해 주시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주님의 실재에 민감하기 위해서는 마음 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에 더욱 깊이 들러가면 들어갈수록 우리 마음이 더욱 더 씻어져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성전이 지어지는 곳 하나님의 제일 좋은 것을 얻으려면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그분이 예비하신 가장 훌륭한 것을 얻고자 한다면 그분께 우리의 가장 큰 사랑을 드려야만 합니다. 돌 성전이 세워진 곳도 신중히 고르셨던 주님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풍경을 보시며 우리를 그분의 육체의 성전으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들과 함께 돌아오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배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데리고 올라갈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집으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지녀야 할 태도는 예배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세우려고 하신 곳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려야 합니다. 순종하고 예배하는 마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집을 지으십니다.

☆ 하나님의 승인을 받음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을 받게 위해서는 그의 가장 높은 목적을 우리 마음에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가 단지 예수님의 집이 되는 것뿐이라면 이것은 또 하나의 지나가는 교리로서 날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모든 충만함으로 교회 안에 거하시는 것이 없으면, 한낱 정치적인 집단보다도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적을 것이고 하나님보다 교인 수에 의지하는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능력을 철저히 의지하고 믿지 않으면서 영적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하겠다는 희망을 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높은 목적임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완전히 승인하시는 증거인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기에 합당치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개개인이 각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지 못하면 교회에 총체적으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가 없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다른 교회들과 단결하지 않으면 하늘의 처소를 차지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를 통해서그리스도를 세상에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principalities & powers)”(3;10)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요 목적입니다.

우리의 도시와 나라에 있는 영혼을 구하는 전쟁에서 대적에게 명령하는 방법을 알기보다는 우리의 사령관이신 분을 알아야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에 보조를 맞추어야 승리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에 하나님의 승인을 받고자 한다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세상이 우리에게 현실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 신뢰성의 문제 순수한 기도교가 타락해서 야심적인 사람들이 이끄는 분파들로 나뉘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성전의 조화와 능력과 축복이 깨어지게 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부서진 곳에 머무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시 세우시려고 일해 주시기는 하지만, 타락된 상태인 채의 우리에게 능력을 부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질서할 때 신뢰해 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나 기도하며 사랑하는 범도시적인 교회로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이 지금도 그리스도의 최우선적인 관심사입니다. 지도자의 길은 참으로 좁아서 모든 것에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 그 유일한 특권이어야 합니다. 그 결과로 무질서와 무법과 모든 악한 일을 우리 사회에서 보게 되었고, 교회 공동체의 방황과 분열이 최소한 부분적으로 그 뿌리가 됨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수 년 동안 세상은 신뢰할 수 없는 사역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는 이제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신뢰할 만한 사역을 세울 때입니다.

☆ 한 가지 목적: 그리스도의 충만을 드러냄 우리는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속에 하나님 대신 교리를 채워 놓았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 대신에 안내서를 쥐어 주었습니다우리가 3년 반 동안 희석되지 않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예수님께서 그들속에 만들어 내셨던 것과 같은 것을 우리 안에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천년 전 사람들 안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셨던 그 영원하신 분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분히 같은 일을 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예수님을 희석하거나 제한하지 않아야 하는 것뿐입니다. 그분 외에는 다른 어떤 것이나 사람으로 만족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할 뿐입니다.

교회 행정이나 지엽적인 교리로 논쟁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든다는 교회의 본래의 목적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역자가 아닌 종이 되어야 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교회를 회복하시는 것을 보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지도력의 형태는 단순합니다. 즉 지도자는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진심으로 그분을 추구하기만 하면 교회의 형태야 어떠하든지 그 모임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 외적 형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마음 자세로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없음이 더욱 크게 느껴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 커져 가지 않던가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찾는 열정이 있어서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 실제로 형성되기까지 만족하지 않는(4:19)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셨던 기도와 같은 응답을 받을 수 있고 같은 일을 하며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 끈질긴 사랑 우리는 영원에 이르며 그리스도의 영광과 실존이 그분의 지구상의 집에 오시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성숙해 가는 과정에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극진해져서 단지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한 지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지칠 줄 모르는 굶주림을 의미합니다. 편리한 시간에 편안한 곳에서만 그분을 찾는 것으로는 그 충만함을 만나기가 어려움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굳게 정하고 계속해서 그분이 우리에게 계시될 때까지 순례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3:12).

이렇기 때문에 주님을 계속해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분을 만나는 때가 오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원합니다. 그러나 신부만이 그분을 찾아서 집으로 모셔올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이 회개를 그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보십니다. 신부가 준비가 되었다고 보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이 주신 많은 과업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 주님이 집을 세우실 때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늘과 완전히 보조를 맞추어서 성령께서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어두움을 물리치시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이 몇 년 동안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돌을 뜨는 곳(채석장)”에 두셨습니다. 지도자들을 세우셔서 주님의 집의 한 부분으로서 합당한 마음을 갖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자신이 속한 교회 회중과 함께 이 하나님의 종들은 교회를 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인정과 자신의 욕망 추구라는 기반 위에가 아니라 범도시적인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기반을 둔 교회를 층층이 세우고 있습니다. “주님이 집을 세우시게 되면 그 때 주님은 도시를 지키실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서로 협력하기 시작하고 있고 서로 다른 교회로 성도들을 보내면 전체적인 크리스천 지역 공동체가 세워져 가도록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집이 형성되면 지금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다? 주님의 집이 지어지면 주님의 보호하심이 누구에게나 느껴질 것입니다.

☆ 용서와 당신이 사는 도시의 미래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힘은 사람들이 서로 용서할 때 발휘됩니다. 용서받을 때 하나님의 깨끗케 하시고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용서는 모든 인간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귀신들의 은신처를 없애 버리는 하늘에 속한 영입니다. 용서의 능력은 우리의 도시를 구원하는 싸움에 놀랍게 쓰이는 무기입니다.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맺게 될 때 서로 덮어 주는 사랑이 없으면, 서로 상대편에게 요구를 하게 되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채무자가 됩니다.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은 부정적인 반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우리의 반응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종들을 놓아 주면 그들 자신도 종으로 잡혀가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즉 자비를 베풀면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비가 심판을 이기어도시가 멸망을 면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2:13).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회는 지옥에 그 문을 열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이 줄어들면 악한 영의 활동이 늘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 기도하는 집 평화를 만드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를 위시한 회중은 개교회적이고 영적으로 교만하고 서로 교류가 없었던 것에 대해 회개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도시를 위해 놀랍고도 경이로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길은 교회가 범도시적으로 합력하여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대적 앞에서 승리자로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두 함께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 끓는 것입니다.

벌써 미국과 유럽의 큰 도시들 중에 하나님께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완전한 어두움과 절망과 파괴로 이루어진 장소가 될 것인가 지금 기로에 서 있는 곳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깨 위에 우리의 도시를 맡겨 놓으셨습니다!

☆ 나라와 교회를 위한 싸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재해가 많이 일어날 것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확신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3:2). 살아있는 거룩한 교회가 사회에서 공의와 성결을 실천할 때, 그 사회의 많은 악이 실제로 제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할 때 악으로 인하여 그 사회는 파괴됩니다.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누구를 만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준비를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는 그 날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위해 준비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게 복수하실 때 그 첫 번째 하시는 일은 그분의 택하신 자들을 억압해서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영국의 월리엄 부스나 존과 찰스 웨슬리, 마틴 루터, 이탈리아 아사시의 프랜시스 등, 언제나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은 주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태를 고칠 수 있는 길은 정부의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정책이 아닙니다. 그 대답은 신약의 그리스도교-즉 하나님의 구속의 자비를 덧입은 능력 있는 의의 나무들입니다.

☆ 소돔 조차도 - 하나님께서 우리 땅을 고치시는 것을 지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무관심과 불신앙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온 도시 전체가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나라들이 우리의 빛으로 나오고 왕들이 우리의 비취는 광명으로 나오리라고 말해줍니다(60:1-3). 예수님은 한 도시, 도시에 말씀하셨고 회개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우리의 도시를 구할 수 있으려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능력 가운데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개개인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를 통하여 단결되어 나타날 때 가장 악한 도시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늘은 교회가 행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은 옛날이야기가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는 더욱 나쁘다고 말합니다. 구원받을 여지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베풀었다면 아직 그 도시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라고 도시들을 향해 꾸짖으셨습니다(11:23). 놀랍게도 소돔조차도 회개 하였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를 생각에 떠올릴 때 길이나 공장이나 산이나 학교들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보십니다. 현대의 많은 가르침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하는 그 부분을 오히려 권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목표는 우리를 축복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아들의 형식으로 변화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셔서 우리가 사는 도시를 그분께로 돌이키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니는 것만을 우리의 땅을 고치시는 조건으로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정당한 차원의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이 그 동기가 되고 지혜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우리의 도시를 사로잡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약속을 아는 것이 그것을 얻은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몰론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얻습니다. 우리가 게을러서 적이 우리 도시에 들어오는 것을 방치했다면, 우리가 부지런할 때 적을 내쫓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세상은 종말이 오는데 이러한 싸움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종말론이 불신앙의 변명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이 믿음에서 떠나는 것(배교 또는 변절)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적용해 봅시다. 다른 곳에서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 살펴봅시다. 역사의 가장 무섭고 극심한 암흑의 시대에 주님은 외치십니다. “일어나가,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 독수리의 날개 개인이나 도시나 나라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소명과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상 이상의 것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을 보셨던 것처럼(4:1-5), 우리도 우리나라의 매춘 행위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소명과 목적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미래가 어떨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과거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미국에 대해서 또는 이 성경 말씀과 미국과의 관계가 어떤지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든지 간에, 미국이 이제껏 세상의 압제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강한 보호자 되어 온 사실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는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과도 같아서 논란과 이의와 심지어 불경건까지도 그 안에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해 온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기회였습니다. 우리가 그 나머지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 사회가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더욱 관념적이고 영적이고 사정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가 우리의 적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기를 멈추고 안심하며 쉬고 있으면 지금 보고 있듯이 악이 만연하게 됩니다.

우리로 자유롭게 모이고 예배할 수 있도록 하는 그 법이 다른 면에서는 인본주의자들과 무신론자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그대로 이러한 싸움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는 아주 유리한 입장에 서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의 메시지가 세상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자유하게 하며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는 우리가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복음이 우리의 생활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우는 대상이 미국이 아니라 이 나라를 공격하는 어두움의 영들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터가 어떤 때는 법정에까지 확대되기도 하지만, 진정한 전쟁터는 영계와 우리 이웃과 도시의 영혼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우리는 1세기부터 사용되어 온 방법을 써야만 합니다. 그것은 기도이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교리들과 프로그램과 건물들이 아닌 바로 그분-께서 들림을 받으시면 사람들은 그분께로 이끌려 올 것이고 산회는 변화될 것입니다.

☆ 짓기 위한 기름부으심 우리를 불태우는 열심과 강권하는 사랑은 아버지의 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라고 믿는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피 아래 거듭난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각자가 소속되어 있는 독특한 유대관계를 끊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으로 관계들을 치유하시고 세우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사실상 우리의 초점은 지도자들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또한 새로운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흐름 출신의 목사들이 함께 흐를 수 있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교만이 첫 번째로 무너져야 할 요새였습니다. 성령님의 이 새로운 움직이심에서 종교적 교만이 첫 번째 죄악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어떤 교회든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성경의 진리를 꼭 붙잡고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간절히 바란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형제들로 받아들인다는 것에 유의합시다.

이 사도적 기름부으심이 무엇입니까? 목사가 그의 교회 성도들을 이기심없이 돌보도록 기름부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적 기름부으심은 범도시적 그리스도의 몸의 필요들을 채우는 데 있어서 지역 목회자들과 중보기도자들을 함께 일하도록 일깨웁니다. 신선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은 기도하는 범도시적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이미 다양하게 존재하는 사역들을 감사하세 여기고 존중합니다.

사역에 죄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이 일에 흐르는 은혜의 흐름을 차단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너무 이르거나 율법적인 핵임 기준을 세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첫 번째 단계는 관계적인 것으로서 우리는 형제들의 신조보다는 필요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공동위원회 모임에서가 아니고 공동으로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할 때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지시가 왔습니다.

겸손은 우리의 어떤 재주나 교묘히 다룸이나 돈으로도 창조주의 집을 지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짓는 무엇이든지 그 속에 얼마간의 우상 숭배가 있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시 손에 행한 것들을 예배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깨어짐과 회개하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거룩하고 떨리는 두려움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재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건축물이며 하나님께서 쉬실 수 있는 장소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예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기도 모임 전부가 주님을 찾고 구하는 것에 드려지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높은 목적과 일치되는 것일 것입니다. 사도적 중보기도는 또한 새로 태어난 것, 연약한 것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여적 책임의 태도를 가집니다.

이 사역이 자라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도시를 이한 부담을 그들의 기도 어깨위에 놓으시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지 지역 사회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지역의 상태에 대한 책임을 질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개인적 기도 생활과 자기 도시에서 원수가 진보하는 것 사이에 직접적인 상관이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 건축자들이 버린 돌 교회의 영원한 터(기초)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기초를 두고 그분 위에 세웁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노력의 중심인물이 되셔야 하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집을 건축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우리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었는데 말씀이 되신 분이 아니었고 영원한 말씀인데 사람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그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그분 자신을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왕국의 건축 규정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폭풍우가 오고 있습니다. 이미 하늘이 어두워졌고 빗방울들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견디려면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제발 들으십시오. 폭풍우 속에서는 집을 건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과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오직 그분의 말씀과 영만이 우리의 영혼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성품과 같게 만드심으로써 아버지 자신께서 우리 안에 그분의 거처를 삼으실 수 있게 하십니다(14:23).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서 함께 견고히 세우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속사람을 성숙함에 이르기까지 재형성하는 것입니다. 다만 모퉁이돌이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전체 건물이 우리가 우연히 기대는 쪽을 향해 기우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아닌 다른 기초 위에 세우려고 할 때 그 결과는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스도인들을 창조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 지혜로 집이 지어짐 하나님의 지혜는 부족한 사람일지라고 취하여 하나님의 방식으로 훈련시켜서 한 도시를 해방시킬 전략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도시에 있는 혼돈은 창조 이전의 깊고 모양없고 공허한 것을 덮었던 혼돈바다 더 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창조를 질서 있게 하였고 마찬가지로 교회도 다시 질서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아와 교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체험하고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의 영혼이 완전히 약해져 떠는 것입니다그것은 종교가 아닌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사는 사람이 갖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움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순종하는 사람은 어느 무엇에 의해서도 정복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원수가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돌아올 때 하나님의 공포가 원수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지혜에 의해서 건축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불쌍히 여지는 마음으로 우리의 형제들의 필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견고히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고 견고히 세워진 후에는 지식이 그 부요함으로 방들을 채울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을 말하며 그것을 언제 말할지를 압니다. 하나 됨에 대한 지식 조차도 그것(지식)만으로 제시되면 분열시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도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지 않다면 하나님의 임재하심 밖에 살 수가 있습니다.

올바른 교리들의 결과는 사랑- 다른 크리스천들을 덮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누가 마음을 상하게 할 때 용서하고 숨은 동기 없이 섬깁니다. 사랑은 자진해서 누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해줍니다. 우리의 교리들이 이러한 사랑을 산출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우리를 계속 분리시키고 하나님의 집 밖에 있게 할 연막에 불과합니다. 지식이 없으면 우리가 망할 것이 사실이지만, 사랑이 없는 지식은 그 자체가 망하는 상태입니다.

도시 교회의 올바른 기초를 놓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서로 사랑하라는 그분의 명령에 대하여 동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것에 대하여 이보다 더 큰 지혜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는 자아가 아닌 예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강권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어야지 사람들 가운데 두드러지세 놀아지려는 욕망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좀 더 가까지 지도하려고 하기보다는 섬기려고 하고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교정을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완고하지 않고 다른 사역들이나 관점들에 기꺼이 양보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서이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심에 관하여는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온유하지만 또한 흔들리지 않고 위선이 없습니다.” 이 지혜는 조직적인 기술이 아닌 비전에서 납니다. 이 지혜는 집을 지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참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그래서 실수들을 너그럽게 보아 주고 더 약한 교회들을 도우며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사랑의 확실함을 가지고 의심과 두려움의 무장을 해제합니다.

☆ 부흥의 원동력 하나님의 운행하심이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시는 것을 위하여 기꺼이 죽으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열심히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어느 가르침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운행하심이 있을 때 일상적인 삶의 회색 지대는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선은 선지자들을 자극하여 그 참된 본성이 나타나도록 충만한 상태를 향하여 가고 또한 악도 바리새인들을 자극하여 그 참된 본성이 나타나도록 충만한 상태를 행하여 가는 것입니다.

지식의 힘을 여는 열쇠는 순종입니다. 마귀가 사람들의 영혼을 교회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을 우리는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열정을 가지기까지는 부흥이 우리 땅을 휩쓸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들을 서로 연결하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우리의 하나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점점 더 깊어지는 어두움과 대비하여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임재하심이 많은 사람을 그분께로 이끌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도를 통해서 이 땅까지 호송됩니다. 이렇게 간단합니다. 부흥은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부흥도 없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영적 각성을 일으키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굉장한 날이 동터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교사들 밑에서 자라고 같은 적들에 대항하여 싸워 오고 있는 동안에, 놀랍게도 우리는 주님께서 다른 길들로 우리 모두를 그분 자신께 인도해 오고 계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믿기로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기름부음 받은 진리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집이 지어질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집에서 앞으로 나아가실 때 많은 도시에서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 영적 권세와 우리가 사랑하는 것 지독교의 교리들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형상은 오직 영감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관리자는 많지만 그리스도의 모법이 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교사는 많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영적 권세란 바로 하나님 자신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말을 확증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예들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뒷받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위하여 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말을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과 권세는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되돌아갈 때, 우리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모든 것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목숨을 양들을 위하여 버리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가장 깊고 친밀한 사랑 안에 사셨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권세가 더해질 것이라면, 그분의 양들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싸워 이길 수 있을 때 다른 뺨을 돌려 대려, 불의하게 반대에 부딪힐 때 조용히 견딥니다-그러한 순간들에 영적 권세는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택하실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싸우는 천사들과 즉각적인 자기 해방이든지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온 세상의 해방이든지 둘 중에서 말입니다. 그분은 죽으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목숨을 버리기로 자원하여 결정하는 거이 참된 권세가 성장하는 바로 그 길입니다.

영적 권세는 영원한 것의 능력으로 일시적인 것을 침공하여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공급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세는 하나님의 인가를 필요로 합니다. 이 인기는 사랑에 대한 시험들을 합격하는 것에서 옵니다. 권세가 사랑 없이 행해질 때에는 지배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사랑하며 참된 권세를 행하든지, 지배하여 거짓 권세를 행하든지, 아니면 전혀 권세 없이 행할 것입니다.

참된 권세가 사랑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그 목표는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권세 안에서 참으로 움직일 수 있기 전에 두려움과 지배하려는 욕구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훈련하라고 우리에게 주셨지 그저 숫자만 세라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우리가 영감을 주는 사람들이 실제로 우리의 성공의 척도이며 우리의 사역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범위가 어느 정도 넓은 지에 따라 그만큼 우리는 영적 권세를 가집니다. 모든 영적인 것의 시험장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우리의 동기를 순수하게 하며 자아의 속임수에서 우리를 해방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양들을 사나운 동물들로부터 보호하면서 골리앗을 죽이는 기술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 기술을 전쟁터에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들을 몹시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내걸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또한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우리 아버지의 양들을 보호할 때 권세가 더해집니다.

권세는 사랑의 팔에 있는 근육입니다. 더 사랑할수록 더 권세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우리의 도시를 사랑하고 우리의 목숨을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버린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넓히시며 정사들과 권세들을 대적할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면, 우리의 도시가 구원받는 것을 보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그렇게 큰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가 대가를 치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위하여서는 기꺼이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로부터 멀리 추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을 다시 짓기 위하여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몸을 헐어 내리는 때가 아니고 세우며 지어 올리는 때입니다.

☆ 영광의 집 하나님은 돌 성전의 헌당도 자신의 영광을 눈에 보이게 나타내심으로써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더 많이 살아 있는 성전인 교회에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나타내시기를 원하시겠습니까? 그 영광으로 들어가는 길, 그 영광을 위한 준비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집이 되는 것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집은 교회가 각자의 직무에 따라 나누인 것에 상관없이 함께 연결될 때에만 나타납니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성전 즉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형제들의 참소자들을 밝혀냄 부도덕함이나 교회 헌금의 오용으로 인한 것보다 형제들의 참소자와 그의 흠잡는 행위로 인대 더 많은 교회가 무너졌습니다. 사단은 다음에 올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아주 막아버리거나 적어도 방해하기 위해 흠잡는 귀신들의 군대를 교회를 향해 진격시켰습니다. 흠잡는 영의 의무는 관계들을 모든 수준에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척하면서, 이 영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살짝 끼어들어와서는 우리를 비판적이고 판단적으로 만듭니다.

우리의 생각들이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영적 공격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숙함이 측정됩니다. 이 원수가 공격해 오는 목적은 우리로 목회자를 불신하게 함으로써 그의 메지시에 의혹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흠잡는 영은 자기 행동의 악마적인 본색을 가리기 위해 자주 자기의 비난을 종교적인 복장으로 치장할 것입니다. 교리의 하루살이만한실수를 고친다는 미명아래 양들로 하여금 약대 크기의 사랑 벗는 징계의 잘못을 삼키도록 몰아갑니다.

교회가 물론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권장의 사역은 형제들의 참소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가장 심각한 훈계에서도 예수님의 음성은 은혜와 진리(1:14) 의 표현이었습니다. 이것은 기억해야 할 중요 사항인데, 적은 우리를 대적해 고소할 것을 찾는 데 있어서 그의 비난거리들을 지옥에서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먹이로 삼는 대신 서로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형제들의 참소자를 쫓아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을 열심히 따라갈 때 흠잡는 영을 쳐부숩니다. 어린 양처럼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고 제사장으로서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적을 정복할 사람들은 흠잡는 자들이 죄를 캐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은 그런 열심을 자가지고 그들이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부르신 소명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바로잡음은 보복이 아닌 존경함으로 진행되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로 책망할 수 있기 위한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온전히 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비난이 기도로 바뀌어야 하고 덮어 주는 사랑으로 흠잡는 것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의 도시를 위한 하나님의 전략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연합과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기도로부터 우리의 도시를 위한 하나님의 유일하고 독특한 전략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날을 가진 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똑같이 날카로운 두 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확립된 뜻으로서 이것은 성경을 아는 것에서 옵니다. 두 번째 것은 하나님의 전달된 뜻으로서 이것은 주님과 우리가 가지는 관계를 통해서 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의 깊게 알아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영적 성장은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때, 하나님조차도 우리로부터 멀어지신 것같이 느껴지는 그런 때에 일어난다는 것을. 크리스천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의 아들들과 딸들을 시험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전투를 묶고 푸는 면에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포한 것을 이루는 것은 하늘의 승인인데, 이는 광야에서 시험과 연약함에서 성립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이 없이는 권세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원수를 맞서 패배시킴이 없이는 지속적인 해방(deliverance)도 없습니다.

☆ 범도시적 교회를 필요로 함 믿음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범도시적 교회가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유지하지 않는 것은 아주 비성경적이며 죄악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몸의 지체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한 교회가 전투를 하고 있을 때 우리 모두가 전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영적 피난처의 장소 즉 유아들을 위한 성읍을 제공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족간인 의식과 그들의 계속적 존재를 위해서도 그들의 양 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의 칼을 계속 뽑아 들고 우리의 형제들을 위하여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적과 타협한다면 우리 밖에 있는 적에 대한 권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투의 시작 단계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어느 도시에 역사하는 정사들과 권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보다 교회 안에 주님의 임재하심을 이루는 것에 더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은 곧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하늘을 꿰뚫고 어느 지역을 지배하는 강한 자를 결박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이여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11:21 -22 참조). 우리는 다른 교회들을 판단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버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알게 됩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하시고 계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의 회복 기간과 매우 비슷합니다. 우리는 효과적인 영적 전투를 위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기름부으시기 전에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일으키고 계시는 군대를 감지해야 하며 이러한 비전에서 나온 기름부음 받은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법도시적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범도시적 교회를 필요로 한다고 말입니다. 한 사람이 육적인 성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때 그것이 한 교회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범도시적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면 그것이 그 지역 사회에 혁명을 일으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권세 오직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온전히 변화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예수님 바로 그분을 연구함으로써만 교회의 신비는 풀어지며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 봅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행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교회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어둠의 왕이 이 땅에 계신 평강의 왕에게 맞서기 위해 일어났고 사단 자신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통치자로 섰다는 것은 신중히 검토할 만한 일이니 것 같습니다. 이 영역에서 성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영적 수준에 이르게 될 때마다 좀 더 사납고 숙련된 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복종하며 순종하는 교회를 통해서 머리이신 예수님의 권세가 마귀의 모든 능력을, 하늘의 처소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까지도, 싸워 이기고 의기양양하게 승리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에 주님은 모든 것을 무너지게 할 흔들림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하나님은 땅의 교만한 통치자들과 하늘 처소의 영적 지배자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움직이심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이 우리의 갑옷과 투구하는 것,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힘이라는 것, 그분의 용서가 귀신들의 무기를 제거해 버린다는 것을 압니다.

☆ 획기적인 영적 돌파 후에 있는 전투 주님으로부터 말씀이 있을 때마다 마귀가 그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것을 예상하십시오. 이 전투를 그거 결박하고” “푸는것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으로써 이길 것입니다. 이러한 공격이 올 때 유일한 해답은 실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우리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연약한 것들을 미끼삼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바로 그 영역에서 아들의 성품을 만들어 내려고 하십니다. 모든 것은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서 감지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담대함을 희생시키거나 거짓 겸손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고백은 과장이나 함부로 하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결론
우리의 현재의 재난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은 교회의 품 안에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같은 비전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합하여 서로 도우며 하나님의 집을 짓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the LORD)/프랜시스 프래지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