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2009

시편23편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시편 23편에는 “푸른” 초장이 없다(12) - 이진희 목사



우리는 시편 23편 하면 맨 먼저 2절을 떠올린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편을 그리라면 누구나 푸른 초장을 그릴 것이다. 우리가 시편 23편을 좋아하는 이유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 이 두 단어 때문일 것이다.

“푸른 초장”이라는 단어가 시편 23편의 키 워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23편의 “푸른 초장”은 히브리어로 deshe이다. 이 단어는 다음 구절들에서는 “연한 풀” “새 풀” “새로 돋아난 움” 등으로 번역되었다.

시편 23편에는 대관령이나 뉴질랜드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드넓은 푸른 초장은 없다
시편 23편의 양들은 넓은 초원에서 푸른 풀들을 뜯어 먹는 것이 아니라 고산 지대나 광야에서 이제 막 움이 돋은 여린 풀들을 뜯어먹는다.

아마도 그 풀은 지난 밤 내린 이슬을 먹고 싹튼 풀들일 것이다.
광야에서는 풀들이 비를 맞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이슬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오래된 풀은 질기고 잘 씹히지도 않고 맛도 별로 없다. 그러나 어제나 그저께 나온 풀은 연하고 부드럽고 맛이 있다. 그리고 소화도 잘 된다. 좋은 목자는 그런 풀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양들에게 꼴을 먹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었다. 그들은 매일 그날그날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었던 것이다. 한 번도 하루 이상 묵은 만나를 먹어본 적이 없다. 하루만 지나면 썩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했는데, 그 대신 매일 신선한 만나를 먹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어야 한다. 일주일에 한번 먹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weekly bread가 아니라 daily bread를 먹어야 한다.

주기도문을 통해서 구하는 “일용할 양식”은 단지 하루치 양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빵집에 가서 빵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다. 그때 이렇게 말한다. “빵집에 가면 어제 팔다 남은 빵도 있을 거야. 아마 50% 할인해주겠지. 그러나 그 빵은 딱딱하게 굳어서 맛이 없을 거야. 그러니 싸다고 그 빵 사오지 말고, 오늘 아침 새로 구운 빵을 달라고 하거라.

이런 빵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이다. 우리의 좋은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매일 천국 오븐에서 막 구워낸 따끈따끈하고 신선한 빵을 주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이른 아침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편목자들이 평생 돌아다니며 사는 것은 양들 때문이다.(11) - 이진희 목사



유대 광야에 사는 양들은 1년 중 2-3월이 가장 행복할 때다. 11월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2월말쯤 되면서 그치고 봄이 시작된다. 그러면 유대 광야에도 꽃이 핀다. 광야지만 풀들로 덮힌다. 초원처럼 변한다. 이때는 양들이 꼴을 찾아서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맛있고 신선한 풋풋한 꼴들이 천지사방에 있다. 목자도 이 시즌이 제일 행복할 때이다.

4월로 접어들면서 광야에 자라던 풀들도 다 말라버린다. 점점 먹을 것이 없어져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꼴을 찾아서 점점 더 멀리 가야 한다.

5월이 지나고 6월정도가 되면 주변에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목자는 짐을 꾸려 양들을 데리고 4-5달 동안 집을 멀리 떠나 풀이 있는 곳을 찾아다닌다. 날씨는 점점 뜨거워지고, 풀은 점점 말라 가고... 이 때는 목자도 힘들고 양도 힘들다. 하루 종일 풀을 찾아 움직이다가 밤이 되면 아무데서나 야영을 해야 한다. 목자는 여름 내내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베개 삼고 밤이슬 맞으면서 자야 한다. 이것이 목자의 삶이다.


목자들은 봄에는 고산 지대에 머물러 있다가 여름이 되면 평원 지대로 내려온다. 봄에 골짜기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은, 아직 밀과 보리 추수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양들이 밀밭을 지나게 된다면 미친듯이 달려들어 다 먹어치우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농작물 피해에 대해 고스란히 배상을 해야 한다.

종종 양떼들이 남의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망쳐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율법은 그런 경우에 어떻게 배상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규정하고 있다. 양들이 남의 밭에 들어가서 농작물을 뜯어 먹었는데, 주인이 없다고 하자. 그냥 갈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목자들은 허가받은 강도들이라고 하는 말이 생겼다. 유대인들은 목자를 법정에 증인으로 서지 못하게 했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야곱이 요셉에게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오도록 형들이 있는 곳으로 요셉을 보냈다. 요셉의 형들이 왜 세겜에 올라가 있었는가? 양을 치기 위해서다. 그들은 헤브론에서 살고 있었지만, 양들을 먹이기 위해 세겜까지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헤브론은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풀이 일찍 말라버린다. 그래서 요셉의 형제들은 풀이 있는 곳을 찾아서 계속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이들이 집을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들의 안부를 알아보기 위해 요셉을 보냈던 것이다.

요르단의 와디 럼 광야에 있는 베두인 장막에서 머문 적이 있는데, 그 베두인은 그곳으로 이사 온 지 2주가 되었다고 하면서 양들에게 먹일 풀이 없어지면 또 이동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목자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양들에게 먹일 풀을 찾아서 평생을 떠돌이처럼 살아가고 있다베두인들은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국경 개념 없이 양들을 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들은 국적은 있다. 그러나 아무런 제재 없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리아까지 옮겨 다니면서 양을 치는 베두인도 있다.


목자들은 자기 양들을 위해, 양들에게 좋은 꼴을 먹여주기 위해, 평생을 옮겨 다니면서 산다. 그래서 집도 짓지 못하고 장막을 치고 사는 것이다. 이렇게 목자들은 양에 맞추어서 살아간다. 양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목자들의 삶이다.

시리아의 한 베두인의 말이 생각난다. “양이 배부르면 우리도 배가 부릅니다. 양이 배고프면 우리도 먹지 않습니다. 양이 배부르면 우리는 행복합니다”<세계 테마 기행, 시리아2-광야의 자유인, 베두인, EBS>. 이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시편 23 2절에서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했는데, 양들은 배가 부르지 않으면 절대로 눕지를 않는다. 양떼들이 푸른 초장에 누워있다고 하는 것은 양들이 다 배부르다고 하는 증거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들은 자기 양떼들이 누워있는 모습을 바라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편.양은 목자만 있으면 Everything is OK(10) - 이진희 목사



어느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설교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설교 제목을 알려달라고 전화가 왔다. 그래서 제목을 알려주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The Lord is my shepherd.

그러자 제목이 너무 평범하다 싶었는지 재차 물어왔다. “그게 답니까?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That's enough.
설교하러 가서 보니 주보에 설교 제목이 이렇게 실렸다.
"The Lord is my shepherd, that's enough."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날 설교와 딱 맞아 떨어지는 제목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 그 이상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갓난아이가 자라는데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그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엄마다. 엄마만 있으면 만사가 OK.

이 아이에게 엄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다른 것이 더 필요 없다
엄마만으로 충분하다

양은 가장 둔하고, 가장 나약하고, 가장 미련하고, 가장 힘이 없는 짐승이다. 아마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짐승은 양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이 돌보아주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갈 수 없는 유일한 짐승이 바로 양이다. 양은 사람이 키우지 않았더라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대책이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그러나 양은 목자만 있으면 만사 OK.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양은 목자만 있으면 부족함이 없다. 목자가 다 책임져주기 때문이다. 양들은 “내일은 어디에 가서 꼴을 뜯어 먹지? 어디에 가서 물을 마시지? 사망의 골짜기를 어떻게 지나지? 이리나 하이에나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파리가 코에 알을 까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이런 걱정들은 사실 다 양이 해야 할 걱정들이다. 그러나 양은 그런 것 하나도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걱정은 목자가 한다. 양이 해야 할 걱정들을 양 대신 목자가 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의 문제들을 목자가 다 해결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양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가 그의 양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걱정 할 것 없다. 염려할 것 없다. 목자가 곁에 있는데, 왜 양이 염려하는가?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The Lord is my shepherd, that's enough."

주일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시편 23편을 외워오도록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 시편 23편을 외울 수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러자 다들 손을 자신 있게 번쩍 들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손을 반쯤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이었다. 외우긴 외웠는데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다 못 외워도 좋으니까 아는 데까지 외워보라고 했다. 이 아이가 일어나서 외우기 시작했다. “The Lord is my shepherd. That is all I want."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주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원래는 이래야 한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그런데 단어들이 서로 섞여버리고 만 것이다. 비록 이 아이는 시편 23편을 한 절도 제대로 외우지는 못했어도, 다른 누구보다 시편 23편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양은 목자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목자가 옆에만 있어 주면 양은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목자가 다 알아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provide), 돌보아주고(care), 인도해주고(guide), 보호해주기(protect)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이다. 그분만 우리에게 있으면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편 양의 운명은 100% 목자에게 달려있다(9) - 이진희 목사



목자를 잘 못 만나게 되면 양들은 불행하게 된다. 꼴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도 못한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시냇가는 꿈도 못 꾼다. 초장에 풀도 말라버리고. 양 우리도 다 쓰러져 가고, 양들은 비쩍 마르고 병들고 비실비실 댄다. 그런 목자의 목장에는 양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없어진다. 병들어 죽고, 맹수의 밥이 되어 죽고, 목자가 잡아먹어 죽고, 도둑이 훔쳐가서 양이 계속 줄어든다. 양들은 새끼를 잘 낳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낳아도 젖을 제대로 주지 못해 제대로 크지 못한다. 그런 목자의 양들은 다른 목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양이 목자를 잘 못 만나면 양들의 신세가 비참하게 된다.

에스겔 34장에 바로 그런 목자들이 나온다. 그들은 양들을 먹이라고 맡겼더니 양들은 먹이지 않고 양들을 잡아먹었다. 이들은 목자가 아니라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 그들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양들을 다스렸다(4). 목자가 양들에게 관심이 없다. 목자가 있으나 있으나마나였다. 그래서 양 떼가 흩어지고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5, 8). 목자를 잘 못 만나면 이렇게 된다

뉴질랜드 같은 곳에서는 대규모로 양 털을 깎기 위해 양들을 키운다. 양을 잘 돌보지 않는다. 한 두 마리가 없어져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얼마든지 다른 양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혹시 그 양을 찾아 나선다고 하더라도 그 잃은 양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재산상의 손실을 막기 위해서다. 이런 목장의 주인들은 양들을 치지 않는다. 그들은 목자가 아니라 목장 관리인이다. 양몰이 개가 양을 몰고 다닌다. shepherd라는 말이 원래는 목자였는데, 지금은 개에게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왜냐하면 목자가 하던 일을 개를 훈련시켜서 개가 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양을 앞에서 인도하지 않는다. 뒤에서 카우보이처럼 몰아댄다. 양은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쫓겨 다닌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뉴질랜드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목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 하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다 안다. 양도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안다. 점순이, 점박이, 왕눈이, 겁쟁이... 그렇게 양의 이름을 부르면서 양들을 쓰다듬어준다. 그들은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시냇가로 데리고 간다. 양들이 쉴 때에도 목자는 쉬지 않고 양들을 돌본다. 부족한 것은 없는지, 양들을 괴롭히는 것은 없는지, 양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핀다.

선한 목자는 항상 양들과 함께 있으며, 앞서서 양들을 인도한다. 어린 양들은 품에 안고 간다. 잃어버린 양이 있으면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다. 맹수가 몰려오면 목숨을 걸고 양들을 지켜준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그런 목자이시다.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해주신다.

우리가 위험한 인생길을 걸어갈 때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인도해주신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와 동행하신다.

이리나 하이에나가 우리를 노리고 있을 때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신다. 그리고 우리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신다.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하늘 본향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 - 양은 목자 때문에 살고, 목자는 양 때문에 산다(8) - 이진희 목사



베두인들은 문명의 세계와 완전히 담을 쌓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평생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들에게 양이나 염소 몇 마리만 있으면 광야에서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다.

그것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양이나 염소는 우선 털을 공급해준다. 이 털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양털(wool)로 만든 옷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양이나 염소는 매일 젖을 공급해준다. 그래서 매일 신선한 우유를 마실 수 있다. 또 이 젖으로 치즈나 요구르트도 만들어 먹는다.
 
죽으면 고기를 먹는다. 가죽으로는 장막을 만들기도 하고 물주머니를 만들기도 한다. 뿔로는 나팔을 만들어 양을 칠 때 사용하기도 하고, 는 제사용으로 사용한다. 로는 연장들을 만든다. 광야에는 나무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불을 지피는가? 바로 양이나 염소 똥이다. 그것을 말려서 태우면 아주 화력이 좋다. 이렇게 양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의 문제를 다 해결해준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금 과 은 그리고 옷을 잔뜩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수많은 양떼들을 몰고 나왔다( 12:36-38). 그들이 양떼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양이나 염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산 것이 아니었다. 바위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만 마시고 산 것이 아니었다. 매일 신선한 우유를 마셨다. 때로는 고기를 먹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옷을 40년간 입은 것이 아니었다. 양털로 필요할 때마다 옷을 해 입었다. 모두가 다 양 덕분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목자는 자기 양을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하고 돌보고 자기 가족처럼 여긴다. 또 양은 자기를 돌보아주는 목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친다. 죽어서도 모든 것을 다 주인을 위해 바친다. 이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이다. 목자 때문에 양이 살고, 양 때문에 목자가 산다.

양의 젖을 짜주지 않으면 퉁퉁 분다. 염증이 생긴다. 자주 짜줘야 한다. 그래야 또 나온다. 털을 깎아주지 않으면 피부병에 걸리기 쉽다. 또 움직이는 것이 둔해진다. 잘 따라오지 못한다. 넘어지기 쉽다.

양은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서지 못한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나중에는 호흡곤란으로 죽고 만다.

털은 자꾸 깎아주어야 한다. 깎으면 또 자라지 않는가? 털 깎을 때 보면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홀딱 깎아버린다. 그런데 양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잠잠히 있다( 53:7).

소가 도살장에 끌려갈 때는 안다고 한다. 양도 자기가 죽을 것을 안다. 목자가 시퍼렇게 날선 예리한 칼을 양의 목에 갖다 댄다. 그래도 양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 위에 묶어놓고 칼을 내리치려 할 때 이삭이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양으로 바쳐질 때 그러셨던 것처럼, 양은 자기를 그렇게도 사랑해주던 목자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도 가만히 있는다.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다.

양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 목자가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듯이, 양도 자기 목숨까지 자기 목자를 위해서 바치는 것이다. 은혜를 아는 것이다. 감사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라고 찬송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아까워서 바치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가?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 - 목자는 결코 낭만적인 직업이 아니다(7) - 이진희 목사



목자는 광야에서 하루 종일 이곳 저 곳으로 옮겨 다니며 양들에게 꼴을 먹여야 한다. 뜨거운 태양은 내리 쬐는데, 쉴만한 그늘도 없다. 여름이 되면 4-5달 동안 나가 있어야 한다. 여름 내내 집을 떠나서 지내야 한다. 밤에는 이슬을 맞으면서 들에서 자야 한다.

광야의 험한 산들을 오르내리다 보면 잘못 디디면 그야말로 사망의 골짜기가 되고 마는 위험한 곳들도 많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는 양만 무서운 것이 아니다. 목자도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또 언제 어디서 늑대나 사자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러면 목자는 양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그것은 목숨을 건 싸움이다. 잘못하면 양 한 마리 구하려고 하다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다윗은 자기 양들을 이러한 맹수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양들이 쉬는 동안에도 쉬지 못하고 물매 연습을 했다. 다윗이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 물맷돌 던지는 연습을 피눈물 나게 했기 때문이다.

목자는 양이 잘못해서 다리가 부러지거나 다치게 되면 그 양이 나을 때까지 계속 그 양을 어깨에 메거나 안고 다녀야 한다. 양 한 마리가 40Kg 나간다고 할 때 그것을 하루 종일 안거나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광야에서 하루 종일 양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더군다나 여름에는 몇 달씩 집을 떠나서 양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친구가 없다. 그러니 얼마나 외롭고 적적하겠는가? 하루 종일 가도 말할 사람 하나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양들에게. 양들이 친구다.

목자는 지혜로워야 한다. 많은 양떼들은 혼자서 거느려야 하기 때문이다. 100마리의 양떼를 한 곳으로 잘 인도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일이 있어서 양들이 흩어졌다고 했을 때 그 양들을 다시 모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양들이 다 잘 때도 목자는 자지 못한다. 이리나 늑대는 밤을 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자들은 잘 때도 한쪽 눈만 감고 잔다고 하는 말이 있다. 목자는 이렇게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양들을 돌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외삼촌의 양을 20년간 쳤던 야곱이 이렇게 회고하지 않았는가?

낮에는 더위에 시달리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낸 것, 이것이 바로 저의 형편이었습니다”( 31:40).

이것이 목자의 삶이다

그래서 오늘날 모직 주식회사에서 목자들을 고용한다면 그들에게 생명 수당을 지불해야 한다. 맹수에게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험 수당도 지불해야 한다. 광야와 험한 산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근 수당도 지불해야 한다. 여름 4-5달 동안은 하늘을 이불 삼고 돌을 베개 삼고 찬이슬 맞으면서 자야 하기 때문이다. 야근 수당도 지불해야 한다. 밤에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야근을 하면서 양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 수당도 지불해야 한다. 거의 모든 시간을 혼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았다!(6) - 이진희 목사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떠날 때 그들은 수십만 마리의 양떼를 데리고 나갔다( 12:36-38).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양에게 마시게 할 물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20:4). 


모세가 반석을 쳐 물이 흘러나왔을 때 사람만 마신 것이 아니고 짐승들도 같이 마셨다( 20:11).

광야 40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에돔 땅을 지나야 했다. 그 때 모세가 에돔 왕에게 그들의 땅을 지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하면서 만일 짐승이 물을 마시거나 농작물에 해를 끼치면 배상을 하겠다고 했다( 20:19).

우리는 여기에서 광야 40년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을 쳤음을 알 수 있다.
양들은 약한 짐승이긴 하지만 의외로 광야나 고산 지대에 잘 적응한다. 양들은 먼 거리도 잘 걷는다. 광야나 고산 지대의 기후에도 잘 적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분 섭취를 많이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그래서 양들을 광야에서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시편 23편에 나오는 양들이 어디에 사는지 확실해졌을 것이다.
시편 23편의 무대는 초원이 아니라 광야이다.

우리는 시편 23편에 대한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없다. 황량하고 거칠기만 한 광야, 나무 한 그루 없는 험한 산을 밑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그려야 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양들 앞에는 원수(맹수)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리나 늑대나 사자도 시편 23편의 그림에 넣어야 한다.

또 그려야 할 것이 있다. 양들이 하루 종일 험한 산길을 돌아다니느라 여기 저기 상처가 났다. 그래서 목자가 그들에게 올리브기름을 발라주고 있다. 새로 그리는 시편 23편의 그림에는 푸른 초장에 누워서 평화스럽게 쉬는 양들이 아니라 여기 저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는 양들을 그려야 한다. 이것이 시편 23편에 대한 바른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그려놓고 보면 시편 23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시편 23편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시편 23편에 나오는 양들은 뉴질랜드에 사는 양들처럼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에서 사는 양들이 아니다

이 양들은 버려진 땅, 광야, 황무지, 험한 산에 산다. 그들이 푸른 초장에 살기 때문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양들은 광야에 살지만 그러나 목자가 있기 때문에 행복한 양들이다. 광야에 살지만 광야에서도 식탁을 차려주는 목자가 있기 때문에 행복한 양들이다.

광야의 험한 산을 오르내려야 하지만 안전한 길로 인도해주는 목자가 있기 때문에 행복한 양들이다


광야에 살지만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동행해주는 목자가 있기 때문에 행복한 양들이다.


광야에 살지만 그래서 맹수들이 늘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그들과 동행해주는 든든한 목자가 있어 행복한 양들이다. 원수들 앞에서 보라는 듯이 상을 차려주는 목자가 있기 때문에 행복한 양들이다

광야에서 살지만, 그래서 여기 저기 상처가 많지만, 그러나 기름을 부어 상처를 치유해주는 목자가 있기 때문에 행복한 양들이다


광야에 살지만, 그래서 하루 종일 옮겨 다녀야 하지만, 저녁때가 되면 양 우리에서 안식을 누리게 해주는 목자가 있어 행복한 양들이다.  
 
나는 왜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데도 시편 23편과는 동떨어진 광야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푸른 초장에 살지 못하고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양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고 해서 우리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백년 …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광야와 같다고 해서 이상한 것이 아니다. 양이 원래 광야에 살기 때문이다. 우리만 광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시편 23편의 양들처럼 광야에 살더라도 하나님을 우리의 목자로 삼고 살아가면 우리도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편 23편이 우리의 삶의 고백이요 신앙고백이요 간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편. 시편 23편의 양들은 푸른 초원에 살까?(5) - 이진희 목사



시편 23편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푸른 초장과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들이 푸른 초장에서 평화롭게 꼴을 뜯거나 쉬고 있을 것이다.
그 옆에는 목자가 서 있고,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목자이신 예수님의 품에는 어린 양이 한 마리 안겨 있을 것이다.


얼마나 낭만적이며 목가적인 풍경인가?
마치 어디선가 목자들의 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양들이 광야에서 산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시편 23편 때문이다. 시편 23편은 양들의 사도신경이라 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양들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우리는 양들은 당연히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서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양들은 뉴질랜드의 양들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양들은 푸른 초원이 아니라 광야(황무지)에서 산다.
베두인들이라고 있다. 이들은 광야에서 평생 양과 염소를 치면서 살아가는 유목민이다.
그들은 장막에서 생활한다. 양들과 함께 계속 이동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집을 짓고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몇 천 년 동안 문명의 세계를 등지고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베두인들이 시나이 반도와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의 네게브 광야와 유대 광야에 걸쳐 20여만 명이 있다.


성지를 방문하게 되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곳(유대 광야)에서 베두인들이 양을 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같은 족장들은 유목민이었는데, 그들이 양을 친 곳도 광야였다. 그들은 땅이 없었다.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 대신 양을 쳤다. 그러면 어디에서 양을 쳤을까?

농사를 짓지 않는 산이나 황무지, 광야 같은 곳을 찾아다니며 양을 쳐야 했다. 족장들은 주로 브엘세바와 헤브론 근처에서 살았다.

브엘세바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비가 내리는 지역으로서 성경에서도 남방한계선으로 나온다. 브엘세바를 지나면 바로 이어서 네게브 사막이 펼쳐진다. 헤브론은 해발 1000미터 정도의 산악지대로서 동쪽으로는 유대 광야가 펼쳐져 있다.
그러면 왜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런 곳을 터전으로 삼고 살았을까?
광야를 끼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양을 키우려면 광야가 있어야 한다.
남의 밭에 들어가서 양을 키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다보니 광야와 험한 산을 끼고 있는 헤브론과 브엘세바 근처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베들레헴에서도 양을 많이 쳤다. 다윗이 바로 이곳 베들레헴 출신이다. 그곳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부르셨다. 예수께서 태어나시던 날 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의 소식이 맨 처음 전해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이 맨 먼저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했다.


베들레헴도 해발 900미터가 넘은 산악지대로서, 베들레헴을 벗어나면 바로 황량한 유대 광야가 펼쳐진다. 그러기 때문에 그곳에서 양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잃은 양의 비유의 무대가 어디인가?
누가복음에서는 99마리의 양들을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으러 갔다고 되어 있다( 15:4).
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레모스(eremos)로서 영어 성경에서는 모두 “광야”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만
“들”로 번역되어 있다. 우리는 들 하면 곡식들이 자라는 기름진 들판이나 평야를 연상한다. 그러나 에레모스는 그런 들이 아니라, 빈들, 다시 말해, 버려진 땅, 외딴 곳, 황무지, 광야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40일 동안 시험 받으신 곳이 바로 이 광야(에레모스)이며( 4:1), 오병이어의 기적이 행해진 곳이 바로 이 광야(에레모스)이다( 14:15).
세례자 요한이 활동했던 곳도 바로 이 광야(에레모스)이다.
바로 이런 광야, 황무지에서 양들을 키운다( 15:4).


그러면 마태복음에는 양들을 산에 두고 갔다고 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유대 광야는 험한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야는 사막과 다르다.
사막은 끝없이 모래가 펼쳐진 곳이지만 광야는 버려진 땅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사하라 사막처럼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 아니고 황무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으로 마태가 말하는 산이나 누가가 말하는 광야는 같은 것이다.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 - 양들에게 정말 이름을 붙여줄까?(4) - 이진희 목사



예수님이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면서 불러낸다고 하셨는데, 과장법적인 표현일까? 아니면 실제일까?

지금도 많은 목자들이 양들의 이름을 다 져주지는 않더라도 특별히 사랑하는 몇몇 양들에게는 이름을 져준다. 그런가 하면 베두인들 가운데 어떤 종족은 모든 양에게 다 이름을 져준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양을 300마리 키우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름을 다 붙여주었다고 하는 것은 한 마리 한 마리 개별적으로 300마리 양을 다 안다는 이야기다.

우리 눈에는 양들이 다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구분을 하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달려온다고 한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아는 것이다

양들의 이름은 양들의 특징을 가지고 짓는다. 눈이 크면 왕눈이, 점이 있으면 점박이 점순이 점돌이... 그런 식으로 이름을 져주는 것이다. 태어난 장소를 이름으로 져주거나, 태어날 때 특별한 일이 있었으면 그것을 가지고 이름을 져주기도 한다.

양들에게 이름을 져주는 것은 그만큼 양들을 사랑한다는 표시이다.
베두인들은 하루 종일 아니 평생 동안 양과 같이 지낸다. 그들은 친구가 없다. 양이 친구이다. 그래서 양을 가족처럼 사랑하고 가족처럼 돌보고 가족처럼 같이 생활한다.


베두인의 장막은 한쪽 끝에 양우리가 있다. 사람 사는 집과 양우리가 같은 천막 안에 있는 것이다. 같은 지붕 아래서 사람과 양이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커튼 하나 사이로 한쪽에는 사람이 살고 다른 쪽에는 양이 산다. 이것이 목자의 삶이다. 그만큼 양을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베두인 장막을 방문했을 때 다리가 부러진 양을 한 마리 보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 양이 양우리에 있지 않고 주인(목자)의 안방에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이 불쌍하니까 자기 방에서 재운 것이었다. 나단의 신탁 가운데 나오는 말이 단순히 시적인 표현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삼하 12:3).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목자가 양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그만큼 양을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49:16).

하나님은 내 이름을 그분 손바닥에 새기셨다.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분은 나를 아신다

내 이름을 아신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만 아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나 요한만 아시는 것이 아니고, 리빙스턴이나 말틴 루터나 존 웨슬리만 아는 것이 아니고, 빌리 그래함 목사님 같은 분만 아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사람도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 - 양들이 정말 자기 목자를 알아볼까?(3) - 이진희 목사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10:14-15).

양들이 야외에서 밤을 지날 때 다른 양떼들과 같이 자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양들이 서로 섞이게 된다. 그러면 다음 날 아침 목자들이 자기 양을 고르느라 대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 목자가 일일이 자기 양을 찾을 필요가 없다. 양들이 다 알아서 자기 목자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성지 순례를 간 어떤 사람이 양이 정말 자기 목자를 알아보는지 알아보기 위해 목자와 똑같은 옷을 입고 지팡이를 잡고 목자의 음성을 흉내 내면서 양들을 불렀다. 그러나 한 마리의 양도 그 가짜 목자를 따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10:4-5).

요르단 카락(Karak) 근처에서 사는 한 베두인의 이야기다. 한 여인이 양을 치다가 한 마리 새끼 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같이 치던 다른 양떼들과 섞이지 않았나 해서 다른 목자들에게도 알아보았지만 잃은 양은 찾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두 달이 지났을 때 그 동네로 큰 양떼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은 그 양떼의 목자들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면서 자기 양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 여인이 목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바로 그녀가 찾고 있던 양이 양떼 속에서 나와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양이 다른 양떼 속에 섞여 있다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는 자기 목자에게 온 것이었다. 이 양은 길을 잃어버리고 다른 목자에게 갔다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양들은 목자를 알아볼 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알아본다. 양은 거의 50마리 정도의 다른 양들을 알아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두인이 여러 양떼들을 같이 돌볼 때가 있다. 이 때 양들은 같은 주인의 양들끼리 몰려다닌다고 한다.

또 양들은 집으로 돌아올 때 자기 집 앞으로 지나가면 알아서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일일이 목자가 양들을 집으로 데려다 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양들은 목자를 알아보고 자기 친구들을 알아본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1:3).

소나 나귀 뿐만 아니라 양도 자기 주인을 알아본다. 그러나 자기 주인인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소나 나귀, 양보다 못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탄 스토리에 목자들이 등장하는 이유는?(2) - 이진희 목사



베들레헴은 양을 많이 치던 곳이다. 다윗도 이곳에서 어린 시절 양을 쳤으며, 예수님 탄생하시던 날 밤 목자들이 들에서 양을 치던 곳도 바로 이 베들레헴이었다.

베들레헴은 높은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베들레헴을 벗어나면 바로 광야가 펼쳐지기 때문에 양을 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베들레헴에서 많은 동굴들이 발굴되었다. 고대 시대에는 동굴에서 많이 살았는데, 동굴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기 때문이다. 동굴 입구 안쪽은 2층으로 이뤄져 있어서, 위층에는 사람들이 살고 아래쪽에는 짐승 들이 살았다.

그러면 베들레헴서는 어떤 짐승들을 키웠을까? 소나 말이 아니고 양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구유는 말이나 소에게 먹이를 주는 말구유가 아니라, 양들에게 먹이를 주는 구유였다.

이 구유는 어디에 놓여 있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의 은신처를 집 밖에 따로 세우지 않고, 위에서 살펴본 대로 동굴 안에 마련해주었다. 동굴 안에서 사람들과 같이 지내게 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요약해보자. 예수님은 외양간이나 마구간이 아니라 양 우리에서 태어나셨다.
말구유가 아니라 양에게 먹이를 주는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왜 양 우리에서 태어나셨을까?
왜 양에게 먹이를 주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분은 이 세상에 선한 목자로 오신 메시야이셨기 때문이다.

목자가 양 우리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이렇게 이 세상에 목자로 오신 메시야 예수님은 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들에게 둘러싸여 태어나셨다. 단순하게 여관에 방이 없어서 구유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선한 목자로 오신 메시야 예수님이 양 우리에 있는 구유에 누워계실 때 누가 가장 먼저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는가? 베들레헴 들판에서 한밤중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이 천사들을 통해서 가장 먼저 전해졌다.

그 당시에 메시야의 탄생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대제사장이나 왕에게 전해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하필이면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해졌을까?
왜 하나님이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그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기로 작정하셨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선한 목자로서 오신 메시야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전해주신 것이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누워계신 양 우리로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렸다. 목자들이 경배를 드린 아기 예수님은 그들의 목자장이 되시는 메시야이셨다.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께 가장 먼저 경배를 드린 이 목자들은 어떤 목자들이었을까?
어떤 목자들이었기에 그들에게 가장 먼저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을까?
그들은 한밤중에도 자지 못하고 깨어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다.

이렇게 그들이 깨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 소식이 전해졌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목자들은 특별한 목자들이었다. 그들은 밤에도 양을 쳐야만 했던 가난한 목자들로 상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서 양을 치는 목자들이 아니었다. 양털을 깎기 위해 양을 치는 목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로 바칠 양들을 키우는 목자들이었다. 베들레헴에서 키우는 양들은 거의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로 바쳐질 양들이었다.

이런 양들을 베들레헴에서 키웠던 이유는 베들레헴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물로 바칠 양들은 흠이 없어야 했다.

먼 곳에서 양들을 데리고 오다 보면 흠이 생기기 쉽다. 그러면 제물로 바칠 수 없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제물로 바칠 양들을 키웠던 것이다.

이렇게 이 목자들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양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목자들이었다. 그래서 밤에도 자지 않고 양들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목자들에게 메시야 탄생의 기쁜 소식이 맨 처음 전해졌을 때 그들은 예수께서 누워계신 곳으로 달려가 그분 앞에 경배를 드렸다. 그들이 경배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셨다. 장차 모든 사람을 위해서 대속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이 땅에 희생양으로 오신 메시야이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희생양으로 드려질 양들을 키우는 그 목자들로 하여금 인류의 희생양이 되실 아기 예수를 맨 먼저 경배할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23편(1) - 이진희 목사



이스라엘 사람들은 족장시대부터 양을 쳐왔다. 이집트로 내려갈 때에도 양들을 데리고 갔다.
이집트에서도 양을 치며 살았다. 출애굽을 할 때에도 양들을 데리고 나갔다. 광야 40년 생활을 할 때에도 양을 치며 살았다.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도 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양도 쳤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의 인물들은 대부분 목자들이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모두 유목민이었다. 모세와 다윗도 목자였다. 예언자 아모스도 목자였으며,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날 밤에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맨 처음 경배한 사람들도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다.

예수님도 양을 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계셨으며 예수님의 청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양을 소재로 여러 비유들을 가르치셨으며, 당신 자신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까지 선언하셨던 것이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어느 날 궁중을 거닐다가 영감이 떠올라서 써내려 간 시가 아니다. 이 시는 목자로서의 그의 경험에서 나온 신앙 고백이다. 목자였던 다윗이 광야에서 양을 치며 만난 하나님은 바로 목자이신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체험을 통해서 양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목자가 양에 있어서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그렸던 것이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어떤 동물들은 먹이를 찾아 수천마일씩 이동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철새들이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양은 절대로 혼자서는 먹이를 찾아갈 수 없다. 양은 목자가 풀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이렇게 양은 먹는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눕게 하시며”
양은 잘못 누우면 죽는다. 등이 땅에 닿게 되면 혼자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다가 죽고 만다. 이렇게 혼자서 눕고 서지도 못하는 짐승이 바로 양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양은 15미터 앞도 잘 보지 못한다. 그래서 길을 잃어버리기가 쉽다. 목자를 잃고 길을 잃고 헤매다 보면 밤은 어둑어둑해지게 되고, 겁이 나게 되니까 더욱 초조하게 된다. 당황하게 된다. 그러다가 잘못해서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기도 하고 아니면 사나운 들짐승의 밥이 되고 만다. 목자를 잃은 양의 생명은 하룻밤을 넘기기가 어려운 것이다.

양은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앞에 가는 양을 무조건 따라간다.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지면 두 마리 세 마리 다섯 마리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마는 것이 양이다. 이렇게 늘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것이 양이다. 그리고 길을 잃으면 절대로 혼자서 길을 찾아오지 못하는 짐승이 바로 양이다. 그래서 반드시 목자가 양을 찾아가야 한다.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가지 못한다. 어디로 가야 하는 지 조차 모른다. 방향감각도 없다. 목적지도 없다. 어디에 자신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그를 인도해줄 가이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양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양을 노리는 맹수들이 언제나 뒤따르고 있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 양이 움직이면 이리나 하이에나들도 같이 따라서 움직인다.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그러나 양에게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힘이나 재주나 능력이 전혀 없다. 목자가 지켜주지 않으면 양은 다 맹수의 밥이 되고 만다.


양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양은 자신의 생명도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기술도 없고 힘도 없다. 아마 세상에 이렇게 약하고 대책 없는 짐승은 양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동물학자들은 인간이 양을 돌보지 않았다면 양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졌을 것이라고 한다. 그 정도로 대책이 없는 짐승이 양이다.

성경에 “목자 없는 양”같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양은 100% 목자를 의존한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하나에서 백까지 다 목자가 돌보아주어야 한다. 목자의 손이 가야 한다. 목자가 돌보아주지 않으면, 목자가 함께 있어주지 않으면, 목자가 인도해 주지 않으면, 목자가 지켜주지 않으면, 목자가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양은 죽는다. 동물 중에 인간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양이다.

그런데 성경은 많고 많은 동물 중에서 인간을 바로 이런 양에 비유를 하고 있다.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간은 양처럼 나약한 존재다. 양이 목자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없이는 절대로 살 수 없다. 양이 살 수 있는 것은 목자가 보호해주고 지켜주고 인도해주고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