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2009
성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말씀하나님과 성령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성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나님(성자) 예수그리스도를 주시고 예수님의 청하심을 통해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 두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성부하나님을 밝히 드러냅니다. 말씀하나님과 성령하나님에 관해 공부합니다.
*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에베소서 5:18b-19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말씀충만(골로새서)할 때와 성령충만(에베소서)할 때, 똑같은 외적 현상이 나타남을 볼 수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시고 또 성령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성령이 아니시고 또 성령도 말씀이 아니십니다. 성령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말씀충만은 곧 성령충만으로 성령의 나타나심이 드러납니다. 이 일이 우리 삶에 나타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계 12장:11절과 연결해서 묵상하십시오. 이기는 성도들의 두 가지 무기는 어린양의 피(성령)와 예수를 증거하는 우리의 말(말씀)입니다. 곧 성령과 우리안에 절절히 체험한 말씀의 역사하심으로 도는 사단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먼저 요6: 51- 60까지 묵상하시고 다음을 읽습니다.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빵만으로도 안되고 성령만으로도 안됩니다. 말씀과 성령, 혹은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생명이 있습니다.성령은 포도주로 말씀은 빵으로 비유가 됩니다. 스피드와 활동하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되는 영의 말씀의 빵과 성령의 포도주가 우리 몸에 섭취될 때 어떤 역할을 할까요? 육적으로 빵이나 포도주나 사람에게 에너지들 주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빵은 위와 장의 소화를 거쳐서 몸에 흡수되어 에너지가 되고 포도주는 소화를 거치지 않고 바로 혈관에 흡수가 되어 에너지가 됩니다. 비슷하게도 포도주로 말해지는 성령의 사역은 이 포도주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처럼 단기간에 강력한 에너지(능력)가 나타납니다.
성령의 터치를 받으면 나의 혼의 이해와 뜻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나의 영에서 부터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미치게 알고 싶어지고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렇게 성령께서 포도주 마신것처럼 임하신 다음에는 우리는 말씀인 빵을 먹어야합니다. 우리 각자는 말씀을 먹어 포도주로 발효시키는 포도주공장입니다.
말씀/빵을 지속적으로 먹으면 포도주/성령이 계속해서 내 안에서 계시로 폭발합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빵/말씀을 먹어 내 심령에 에너지를 공급을 해야하고 다른 이들에게 우리안에 생산된 포도주를 공급해야합니다. 간혹 성령을 소멸시켜서 다시 성령의 안수받고 휘저어야(stir up) 되는 분들도 있지만 평상시 말씀충만한 분은 당연히 성령충만할 것입니다.그런데 말씀/빵은 먹지않고 성령집회만 다니면서 성령/포도주에만 취하려는 분들도 걔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먹지않고 마시는 것만 좋아하는 성령중독자들이죠. 씹어먹기도 귀찮고, 소화시키기도 힘들고, 그저 마시자. 이런 분들은 십중팔구 하나님의 선지자(예언)을 죽이는 미혹과 왜곡의 영을 동반한 조종의 영인 이사벨의 초청을 받을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는 분들이나 이런 분들이나 영적성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우리가 성령집회를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찬양과 경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영적 만족을 위해서라는 개인적인 것이라면 조심하십시오. 성령이 아니라 조만간에 ‘자기 중심’이라는 사단과 친구하게 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성령은 결코 개인적인 영적 독립심과 개인적인 영적 만족, 개인적인 영적권위를 추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흘러가지 않고 고여있는 어떤 것도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육적인 빵과 비슷해서 그렇게 포도주같이 순간적이고 표면적인 폭발적인 능력이 나타나지 않지만 지속적입니다.말씀의 빵은 영적 소화기관인 혼을 거쳐 소화되고 흡수되어 (지정의의 이해를 거쳐) 우리의 심령에 변화를 일으키며 행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말씀을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씹어야하고 위에 머물게 하고 장을 지나가게 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그 말씀을 깨우쳐주심을 사모하며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령의 불꽃을 전해 받았으면 바로 땔감이 되는 빵(말씀)을 상고하셔서 그 불꽃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빵(말씀)을 먹어 영적 소화기관인 혼이 소화를 시키면 그것은 피가 되어 혈관에 전해지고 그 피가 된 에너지는 강력한 성령의 포도주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간단하게 육적인 포도주와 빵을 성령과 말씀에 관해 비교했습니다만 말씀으로 그 불꽃을 더욱 키우면 결국 그 성령불꽃(포도주)을 또 우리가 사랑하는 또 다른 잃어버린 영혼에게 전달하는 통로로 우리를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성령집회에서 주님의 임재안에 있는 것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예배를 통해 나타나신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를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 들이시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성령께서 우리를 고치시는 등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나타내는 것은 나만을 사랑해서만은 아닙니다. 나를 통해 또 다른 사람을 고치시고 그 역사하심을 나타내시겠다는 의지이십니다. 생수의 강이 나를 통해 또 다른 이에게 흘러넘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 생수의 강이 내게서 혹은 우리 안에서 고여있거나 고갈되지 않길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우리가 교회안에 한 지체로 태어났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지금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성도와 성도의 관계에서, 교회와 교회의 관계에서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너나 잘해,” 혹은 “나나 잘하자”는 말은 원수가 우리 마음에 준 영적 독립심 즉 교만입니다. 그 말속에는 그리스도의 연합이 없습니다.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4:16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갖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 사 61:1,2-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과 성령이 흘러넘쳐야만 합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사실 제가 보는 성도들의 문제는 성령집회만 쫓아다니는 분들보다도 성령으로 전하는 말씀에 배고픈데도 배고픈 줄 모르고 점점 율법적으로 변해가는 분들과 성령으로 목마름에도 목마른줄 모르고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성경적인 기준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는 분들입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망각하고 사역자들에게 의존해 주일예배에 설교 말씀듣는 것으로 혹은 신령하다는 성령사역자를 통한 한 두번의 성령의 터치로 배도 부르고 목마르지도 않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합니다. 아버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저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한결같이 주님의 말씀으로 배고파하고 주님의 성령으로 목마르게 하소서! 먹고 마신 것으로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로 거룩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의점 : 우리가 말씀중심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말씀은 우선은 지정의(혼)의 차원에서 이해되어 영적인 깨달음을 가져오고, 성령사역은 우리의 혼이 아닌 영의 차원으로 경험하고 그 나중에 혼에 맺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사역과 달리 말씀사역은 혼의 깨달음으로 전해도 그닥 심각한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말씀중심이라고 하면서 성령으로 말씀을 전하지 않고 나의 이해의 수준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면 말씀을 전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가 생명력이 없게 됩니다.
나의 혼적인 이해(나의 은사 중심)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in Christ’ 에 있는 것이 아니라 ‘in me’ 가 되어 인본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분은 성령이 그 입술을 주장하도록 내어드리고 성령사역을 하시는 분은 말씀의 영역밖으로 나가선 안될 것입니다. ( 벧전4:11. 시80:8-19 )
딤전4:4-5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성령으로 교통)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매일 하나님이신 말씀과 성령을 먹고 마시며 흘러 넘치는 우리 되길 기도합니다.
< 구약에 하나님이 직접 성삼위일체를 언급하신 구절>
잠언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사야59:21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학개2: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찌어다.” 에스겔 37장 전체를 묵상하십시오. 말씀과 신의 역사하심이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둘 다 주님의 주권과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을 자유케 하고 그 분의 성품으로 살게 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아버지께 청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신약>
에베소서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요한1서 5:5-7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성령사역후 교회가 흩어지는 이유
모 사모님이 성령집회가자고 했더니 주저합니다. 왜냐면 교회에 성령사역자가 다녀간 뒤에 분란이 있어서 교회가 나뉘는 것을 서너차례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의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관찰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둘 중에 하나입니다.
1. 더러운 물(인본적인 가인의 예배를 드리는 곳) 에 깨끗한 물이 부어져서
2.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제세벨의 영-가짜 성령)이 부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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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성령사역을 한 후 갑자기 영적 단체에 분열이 생겨 흩어집니다.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궁극적으로 성령을 가장한 종교의 영인 이세벨과 성령이 섞이면서 confusion 이 생긴것입니다.
1. 종교심의 이세벨이 있는 교회(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은 없는 교회)가 성령집회를 가진 후에 오는 분열(영에 있는) 성령의 자원하는 심령이 (혼에 있는) 종교의 영인 이세벨과 갈등을 잃으켜서 자유케하려는 성령님의 마음이 사람의 혼의 부정한 것과 섞여서 방종이 되어 버립니다.
교회 밑에 가라앉은 인본주의 찌끼가 성령의 맑은 물이 부어지면서 spirit of confusion 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본 교회 지도자분들 중에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이해가 없는 교단에서 자란 분들은 성령사역을 거절하고 더욱 말씀중심이라는 생명이 흘러가지 않지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종교심으로 성도를 몰아 갑니다.
2. 내적치유와 중보와 축사사역이 있는 교회에 mixed wine이 들어와 사역한 후에 오는 분열 영적독립심이 풀려서 성령사역이 있으면 뭐하나 성령의 은사보다 성령의 열매가 중요해라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에 심드렁해집니다.
-- 영적 독립심의 영이 찾아옵니다. spirit of confusion 의 한 형태입니다.(confusion ---> passive or control 의 패턴으로 나타나는 Jesebel) 자기 생각에 갖혀서 하나님이 성령의 은사가 부질없는 일이라면 왜 아직도 성령께서 왜 오늘날에도 은사로 일하실까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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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2의 일을 막는 일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기 원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은사에 관한 성경적인 말씀을 확실하게 영으로 받아 혼으로 이해하고 또한 평상시성령과 함께 겸손과 순종으로 일하는 것을 훈련받아야한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평상시 영적 질서와 영적 권세에 바운드리(보호하심)를 튼튼히 해서 영적 질서 가운데 한 몸의 성도가 처한 위치를 확실 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때문에 혹은 지도자때문에 사역 단체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소명을 주셨기 때문에 그 단체에 즉 하나님과 그 단체의 지체들에게 서로 고용되어 있음을 깨닫기 원합니다. 지도자에 대한 실망과 지체들과의 갈등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갈등과 실망을 어떻게 다루는가가 나의 영적 성숙도의 바로미터라고 믿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옛사람이 죽었고 새사람이 살아있음을 인식하고 나의 욕심과 나의 명예를 내려놓고 주님이 주신 소명을 위해 달려가기 원합니다. 소소한 감정싸움, 섭섭증 개인적인 일로 주님의 일을 망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가 좀 손해보는 것 같고 나만 바보 되는 것 같아도 그 길을 걸을 때 주님이 영광받으신다고 믿습니다.
영적 민감성에 관하여
예언 중보 은사나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흔히 꿈으로 계시를 얻는다는 데 있다. 일반인들이 꾸는 꿈과 다르다는 것은 이들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진다던가, 위급한 상황을 알려 보호하시려는 하나님 뜻이 있기 때문인데, 아직 주님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 중에도 장차 예언자로 부르셨다는 전조로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능력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 지금은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지만 주의 길을 가기 훨씬 이전에도 꿈이 현실로 반영되는 경우가 있었다. 꿈은 환상과 같은 것으로 환상은 외적 경험이라는 것과 꿈은 내면세계의 스크린 같다는 것의 차이다. 환상을 뜻하는 단어로는 vision과 trance가 있다. vision은 다메섹 상에서 주님을 만난 사도바울의 경험 쪽에 속하고 trance는 요한의 천국체험과 같이 환상보다 한층 더 깊은 경험, 소위, 황홀경(ecstacy)쪽에 가깝다. 오늘날의 경우는 바울과 같은 "극적"인 환상을 보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만 주님의 형상이라든지,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천사의 형상을 본다던가 하는 일은 흔하다.
그런데 환상(vision)에는 외적인 형체를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flash insight이라고 해서 아주 즉흥적으로 영감이나 계시를 주심을 포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잊어버려서 한참 찾다가기도하자마자 어디에 두었다는 영감이 떠오르고 물건을 찾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므로 "왜 나는 꿈을 꾸지 못하는가, 또는 기도할 때 환상이 보이지 않는가"라며 낙담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 주시는 방법은 여러모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각 개인마다 어떤 방법으로 보여 주시는 것이 최상인지 하나님이 아신다.
위에 설명한 바는 비단 영적 민감성과 관련 있는 꿈과 환상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성도가 구해야 할 것은 이런 신령한 체험의 차원을 넘어 영적 민감성을 소유하는 것인데, 곧, 영적 분별력을 갖추라는 뜻이 된다.
영적체험은 은사적 성향이 짙어서 믿음이 아직 초보단계인 사람에게 많이 주시지만 영적 민감성은 늘 기도하며 깨어 있는 성도에게만 임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며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감으로 생겨난다.
골로새서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비밀. 즉,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다(2:2)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경지가 깊어질수록 영적으로 민감해진다. 민감해지면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는 일이나 천사숭배나 세상의 초등학문에 죽는다고 말한다.(2:18-22)
말씀인 그리스도 외에 천국간증이나, 이교도 숭배, 사람의 명과 가르침에 속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골로새서의 주된 핵심이다. 주안에 있는 우리는 결코 인간의 어떤 지혜나 행함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민감해지면 영의 기운에 예민해져서 그날따라 영에 먹구름이 끼었다든지, 영에 불안을 느낀다던지 하는 신호를 얻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방언 기도를 읊조리게 된다던지 하게 되는데 신기하게도 그날 그 시각, 내 방언기도로 말미암아 내가 아는 어떤 이가 용케 위험을 피해 간다던지,어떤 불길한 일이 터졌을 것을 피해간다던지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영적 민감성은 꿈이나 환상처럼 예언적 성향을 띄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지혜와 지식과 명철함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골 2:3). 마땅히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아는 지혜가 생겨나며 그리스도의 사상이나 인격과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바로바로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많은 이들이 십여 년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영적으로 자라나지 않는 이유는 지혜의 부족에서 온다.이는 성경의 무지함에서 오는 지혜의 부족이기도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지도자보다는 육에 속한 사역자들의 가르침을 더 숭배하는데서 온다.
천국간증 이라든지, 영적체험 간증이라든지, 골로새서 2장 18절에서 말한 바처럼 저가 본 것을 의지하여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는 간증들에 더 마음이 쏠리는 까닭이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자기 주관이 있어야 한다. 신령해 보인다고 다 신령한 것이 아니다. 진리처럼 들린다고 다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이란 말씀과 타협하지 않는 외고집을 뜻한다.
그러니까 '남이 이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인도되어 성령의 가르침에 민감한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성령께서 "아니다!" 라고 하시면 그 아무리 귀에 달콤한 것일지라도 타파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을 이끄는 사역자들에게 역시 당부하고 싶다. 이들이 추구해야 할 바는 자기 사역의 번성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온 정신을 집중하라고 가르쳐서 따르는 이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자라가도록 돕는 일이다. 그들이 해야 할 바는 사실 그것밖엔 없다.
영적 성숙을 돕지 못하는 프로그램은 그 어떤 것일지라도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영적으로 민감해지려면 늘 말씀과 기도에 헌신하는 삶을 살고, 모든 행실과 언어와 생각에 그리스도의 목적이 배어나도록 힘써야 한다.
<출처:우림과 둠밈>
하나님이 주신 우리안의 기름부음을 신뢰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stream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하나님의 stream 이 있지는 않습니다. --요한 15장 --
많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삶에 들어왔음에도 구약에 머물러 계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긴 되셨는데 성령받기 이전의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을 지닌 분들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게 된 자기안에 있는 성령, 기름부으심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자신에게 성령 세례를 주신 분이나 영향력을 끼친 사역자와 교제하는 것에서 잘못된 관계성에 머무는 것을 봅니다.
자신들에게 은혜의 통로가 된 사역자는 점점 영적으로 자라가는데 그 사역자에게 양육받는 성도들은 점점 수동의 영을 받아 거짓된 겸손으로 "나 같은게 뭘 하겠어요. " 한다면 나와 사역자와의 관계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몇 달 전 동기부여의 은사세미나에 인식하는 은사가 있는 자매님이 왔습니다. 선지자를 접대하는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선지자를 접대하는 일을 너무도 당연히 하시는 분인데 그 분 자신이 예언의 은사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녀에게 예언의 능력이 있음을 말해주었고 다음 주 모임을 마칠 때 지금까지 잘못된 생각으로 묶고 있었던 예언의 은사가 풀렸습니다.
만일 그 분이 계속 말씀공부를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기름부음의 근원인성령하나님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면 그분은 지금쯤 놀라운 예언사역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자매님을 얼마만에 뵈었습니다. 귀한 선교사님을 모시고 다니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전혀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름부음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과 동역하기 원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안에 있는 기름부음을 이해하기 원합니다.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가 선지자의 상을 받나니 -- 그러나 대접한다고 하셨지 숭배하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숭배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선지자를 접대하고 모시는 분들 중에 간혹 보면 잘못된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passive 와 조종의 영의 양쪽 스위치를 갖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사실 저는 그 선지자가 그 분의 상태를 모르는 것이 이상했고 제가 이 말씀을 드려야하는지 부담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우리안에 성령을 모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드러나는 사역자를 향한나의 마음이 숭배인지 존경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분들이 너무도 많음에 놀랍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자신안에 성령을 신뢰해 자신을 통해 성령의 기름부음이 흘러넘치도록 허락하시길 원합니다. 타마라 윈슬라라는 찬양 경배 사역자는 말씀으로 혹은 자신이 작곡한 "당신안에 기름부음있네 ---" 라는 찬양으로 우리안에 기름부음을 일깨웁니다. 이 찬양이 저희 사역의 주제가가되어갑니다.
저는 성령의 통로가 되는 것이 정말 즐겁고 그 일로 제가 증인이 되는 것을 기뻐하고 정말 간절히 원합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다른 자매님들이 성령의 통로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가르치는 자로 세우신 것은 다른 분들안에도 성령이 계시고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그래서 성령께서 그 분들과 마음껏 일하시도록 믿음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필요한 분들에게 고기를 잡아주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도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저는 말씀을 가르침으로 또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가 다른 분에게 전수되길 원합니다. 저는 축사를 하겠지만 또 축사받았던 분들이 다른 분을 축사하길 원합니다. 영적 은사의 부분이나 영적인 말씀의 가르침의 자리에서 교회안에서 편중되게 한 두면의 사역자가 원맨쇼(?)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자를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수혜자만 만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제자로 훈련하는 것에는 말씀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으면합니다.
선생보다 나은 제자가 없고 제자가 온전하여지면 선생만큼 될 꺼라고 하신것은 리벨레온을 경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만 또 다른 말씀으로 너희가 나보다 큰일을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함께 연합해 사역할 때 예수님보다 큰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 성령을 받은 우리라면 당연히 성령의 은사가 드러납니다. (열매 이야기는 지금 제외합니다.)
* Passive spirit 은 조종의 영의 또 다른 디멘션인데 사람들에게 거짓 겸손으로 만족하게 합니다. 이 영은 자신보다 강한 의지를 만나면 패시브해지지만 자신보다 약한 자를 만나면 컨추롤하는 영으로 스위치됩니다. 사역자가 사역을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름붓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기름부음을 신뢰하지 못하게 해서 사역자를 의지하게 한다면 그것은 아직 구약에 머물르고 있음이고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 사이에 성령사역자가 머물면서 그 관계성을 좌지우지 하고 싶은 리워야단이 된것입니다.
영적 능력과 혼적 능력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 참 좋아졌어.”라고 하는 사람과 “옛날이 좋았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처럼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의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데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굳이 택하라고 한다면 필자는 “옛날이 좋았어.”라는 말에 더 정감이 가고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진리를 몰랐을 때에야 모든것이 느리고 불편했던 시절이 넌더리가 나겠지만, 진리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 엉망으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현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사는 삶의 방식은 조금 편해지고 요즘 말로 진보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암흑으로 변한 지 오래 되었다.
필자도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 옛날 고생은 했지만 식구들끼리 같이 부대끼며 살던 그 시절이 사뭇그립기도 하다. 그런데 그리운 고향을 가고 싶을 때 간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서 친척들과 주위 사람들을 통해 소식을 듣는 선에서 그치곤 하는데 “세상 참 좋아졌어”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처럼 어떤 면에서 보자면 세상 참 좋아진 것 같다.
과학의 발달, 즉 인공위성을 통한 위성통신의 발달로 인터넷이 전 세계를 하나로 묶어버린 지금 토론토에서 필자가 태어난 고향 동네소식을 가만히 앉아서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울 수밖에 없다. 어디 그뿐인가? 위성으로 촬영한 지도를 통해서 필자가 살던 집을 지금 책상 앞에 앉아서 그대로 볼 수 있는데 안채와 바깥채의 지붕이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주위 환경은 많이 변했지만 어린 시절 생활했던 그 반경들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고 세상 참 좋아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특히 혼적인 능력으로 이루어 놓은 과학의 진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데 충분하다고 하겠다. 컴퓨터 업그레이드와 관련된 IT 기술과 우주 산업의 발달 그리고 생명공학을 통한 의료기술 등은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야단들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현실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것을 사람들은 진보라고 하고 그래서 좋아졌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인간들의 진보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하늘들에 앉으신 분이 웃으실 것이요, 주께서 그들을 조롱하시리로다"(시 2:4). 거기에다 과학에 대해서 경고하시는데 이 시대에 특별히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 디모데야, 네게 맡겨진 것을 지키고,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딤전 6:20).
옛날이 좋았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특별히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 후로도 사람들이 아담의 타락한 성품을 지니고 죄인으로 태어났을지라도 오늘날처럼 그렇게 사악한 상태는 아니었다. 물론 인내하시는 가운데 악을 차마 보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기도 하셨지만 그 죄악상은 결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진보와 더불어 그들의 악함도 더해져만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선조들의 하나님께 대한 범죄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하는 더러운 음란과 우상숭배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방종으로 하나님께 진노를 샀다면, 지금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죄들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으니, 보이는 물리적인 진보와 함께 영적 퇴보가 함께 이루어져 더욱더 하나님의 진노를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치 않는 존재로서 균형 잡힌 모습 그대로 존재하신다. 그분의 능력이나 인격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시다.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겨우 70 ~80년을 살면서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들먹이며 거드름을 피우는 하찮은 사람들의 죄악은 가일층 진보하며 극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들의 사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으신다. 다만 죄인들이 두려움 없이 죄를 쌓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더욱더 악해져만 갈 것이고 언젠가는 그 끝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아직은 기회가 있다. 바로 영적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이 죽어서 태어나기에 영적 능력에 대해서 무지하지만 우리의 죽은 영을 살려 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이 살아나고, 혼이 구원을 받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셔서 내주하시게 된다.
그 결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성도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신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제 아담 안에서 무용하게 된 혼적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의지하여 죄와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며, 하나님께서 처음에 의도하셨던 본래의 사람으로서의 위치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살리는 영이신 분의 영적 능력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들이 엎드려 말씀드리기를 “오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영들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하였더라"(민 16:22).
결코 혼적인 능력으로는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 특히 혼의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오직 영들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믿고 따를 때 영적 능력을 소유할 수 있게 되고 이처럼 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혼적 능력에 목을 매는 사람들의 허세에 짓눌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혼을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는 영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또 너희는 몸은 죽일 수 있으나 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차라리 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마 10:28).
하나님은 영이시니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그것은 유한한 사람들이 따질 일이 아니다. 다만 믿고 따르면 그만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성경을 못 믿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리고 모순이 많다고 비난하고 조롱하며 타박을 한다. 그러나 성경을 그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3,500여 년 전에 기록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까지 읽혀지고 또 그것을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성경은 아직도 다 풀리지 않은 구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람들이 혼적 능력을 사용하여 달나라까지 가고, 또한 앉아서 모니터를 통해서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이 시대에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은 바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적 능력과 혼적 능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주와 타락한 피조물의 차이는 측량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마치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말이다. 그러므로 혼적 능력과 영적 능력을 알고 이 세상에서의 순례자의 길을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이 될 것이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BP <마지막 때의 진리(眞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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