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2010

“회개치 않은 자들의 12가지 죄”

조셉 얼라인은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회개는 높은 수준의 신앙에 오른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이다. 회개가 없으면 구원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을 깨우고 생명을 살리는 목사님의 귀한 설교를 주일날 한번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고 매일의 삶에 적용하여 끊임없이 회개의 문에 들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회개치 않은 자들의 12 가지 죄
1. 고집스러운 무지의 죄: 무지가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한 명씩 단두대로 끌고 가 처참하게 목을 자르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의 무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무지의 죄를 버리지 않으면 이 죄가 당신의 생명을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지의 죄를 회개하라.

2.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은밀한 죄: 자기만 아는, 몰래 즐기는 죄를 버리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이끈다.

3.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죄: 종교적 의무(기도, 금식, 봉사 등)를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죄

4. 잘못된 동기에 이끌려 신앙 생활하는 죄: 육신적인 동기 곧 자기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경건하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세속적이고 불경건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등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앙 생활하는 죄. 이러한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당신의 행위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기까지도 깊이 살펴야 한다

5. 자기의 의를 믿는 죄: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이것이야 말로 자기 영혼을 멸망으로 이끄는 죄이다. 악한 죄로 멸망할 수 있듯이 겉으로 드러난 의와 선행 때문에 멸망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한 후에 당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인정하라. 나의 의를 더러운 옷처럼 여겨라.

6. 철저한 신앙 생활에 대한 은밀한 증오: 제대로 뜨겁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은근히 미워하는 죄. 이들은 철저한 신앙생활을 기묘한 것, 경솔한 것, 무절제한 열정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사람들은 거룩함을 사랑하지도 않고 거룩함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결국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이다.

7. 일정 수준의 신앙생활에 안주하는 죄: 자기가 정한 어떤 범주의 테두리 안에서만 신앙생활 하려는 죄. 곧 자기들의 신앙생활이 구원받기에 충분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면 더 이상 진전하려고 하지 않는 죄로 이것은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진정한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완전함을 열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8.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죄: 이것이야 말로 거룩하게 되지 못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이것은 또한 회개하지 않았다는 뚜렷한 특징 중 하나이다.

9.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악의와 시기심을 품는 죄: 겉보기에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당한 모욕을 기억하고 원한을 품고 악을 악으로 갚고 보복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악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데도 그것을 미워하거나 억제하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오히려 습관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악독이 가득하며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10. 억제되지 않은 교만의 죄: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더 사랑하고 사람의 존경과 갈채와 인정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회개를 모르고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교만을 보지도 못하고 문제 삼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죄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이다.

11. 쾌락을 사랑하는 죄: 육신에게 자유를 주고 육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육신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 배와 감각을 만족시키면서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겉으로는 아무리 경건해 보여도 다 가짜이다. 육신을 기쁘게 하는 삶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12. 육신의 안전을 의지하는 죄: , 명예 등 자신을 안전(secure)하게 지켜줄 수 있을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붙들고 그것을 의지하여 거기에 안주하려는 죄< 조셉 얼라인, “돌이켜 회개하라” 중에서…>

*  이렇게까지 꼭 회개해야 하는 이유 –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며 구하여도 얻지 못할 수 있으므로. 또한 구한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7: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 13:24)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19:25) 우리 힘으로는 회개할 수 없으나 성령께서 도우시면 가능하다“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19:26)


     ※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5가지 이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3:23
회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33:11, 5:32, 벧후 3:9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에: 13:3, 5
회개는 심판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유일한 길
  (회개치 않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이다): 2:4-5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16:28-30                                                                     

회개와 믿음 – 아더 핑크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말하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말하되, 회개하여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들의 사면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라( 2:37,38)

우리는 사도행전 2:37,38을 열심히 기도하며 주의 깊게 숙고해 봄으로써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조(思潮) 가운데에 나타나 있는 오류들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로 인하여 크게 놀랐고, 자신들에게 임할 영원한 진노로 인하여 두려워했으며, 마치 칼이 심장을 꿰뚫은 것처럼 마음에 찔림을 받고, 번민 속에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사도는 초칼빈주의자들처럼 "믿기만 하시오. 당신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초칼빈주의의 치명적인 타성을 두둔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오늘날의 '쓸모없는 많은 영혼의 의사들'처럼 '당신들의 죄가 다 말소되어짐을 믿으시오'라고 충고하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크게 달리 사도의 대답은 실제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받을 책망은 다 받으시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진리를 인정하시오. 당신을 속이려 하지 말고 당신의 사악함을 고백하시오. 당신의 할례 받지 못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낮추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하여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시오, 당신이 그리스도의 중보와 공로를 믿는다는 그 증거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시오. 그러면 당신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외적인 표시가 될 것이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람의 경우에 그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눈을 열어 하나님의 품성과 하나님의 법의 아름다움, 죄의 무한한 사악함, 무한한 속죄의 필요성,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함을 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최고의 충만한 선()이시며 그분께 돌아오는 모든 죄인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아들이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모두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자 하나님께서 비추어주신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최고의 주이시며 최상의 선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더 분명한 빛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율법의 영광을 보며, 마찬가지로 죄의 무한한 사악함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무한한 속죄와 완전한 의가 필요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불가분(不可分)하게 연관됩니다. 실로 회개와 믿음은 필연적으로 서로 안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율법의 영광 그리고 속죄의 영광에 비추어 회개하는 자는 회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긍휼의 자유로운 은혜를 바랄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 율법과 속죄의 영광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긍휼의 자유로운 은혜를 바라는 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불평했던 자신의 모든 허물을 받아들이며, 율법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나타난 자신에 대한 모든 심판과 정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며 돌아서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16:31)는 말씀은 "그런즉 너희가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되는 때가 주님 계신 곳으로부터 올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 3:19)라는 말씀과 똑같은 (회개와 믿음의 두 가지 뜻을 다 포함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선포한 믿음은 그 자체가 본질상 회개를 함축하며, 회개는 그 본질상 믿음을 함축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때로 믿음만을 언급하거나, 때로 회개만을 언급하거나, 때로 둘 다를 함께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견지에서 볼 때 회개와 믿음은 각각 속에 상호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죠셉 벨라미, 1750)


 "영적인 구원"에서 발췌,

구약성서에 나타난 회개 (2)


3)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떠남 -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은 새로운 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즉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모든 것과 일체의 악으로부터 떠나는 삶이다. 회개의 이러한 측면은 앞선 예언자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와서 '∼로부터 떠나다'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로 행함'이라는 추상적인 표현보다 '∼로부터 떠나다'는 표현이 더 구체적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혹시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각자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설수도(슈브)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내가 그들의 악한 행실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재앙을 거둘 것이다"( 26:3, 표준새번역).

4) 인간 스스로의 회개의 불가능성 - 예언자들은 이러한 회개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포로기 이전, 적어도 주전 8세기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예언자들이 회개를 언급할 때 이것은 등한히 여겨 이미 놓쳐버린 기회로 말한다:"그러나 이 백성이 자기를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슈브) 아니하며 체바오트 야웨를 찾지 아니하도다"( 9:13)

 호세아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회개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그의 하나님에게 돌아가지(슈브)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야웨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5:4)

주전 8세기 예언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회개는 실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회개가 불가능하다면 그들은 왜 회개에 대하여 말하는가? 그들의 선포에 등장하는 회개라는 단어는 "돌이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는 점은 지적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위하여 언급한 것이다. 예언자들의 선포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회개의 의지도 회개의 능력도 없었다( 30:15). 따라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심판뿐이었다( 9:1-4). 그들에게는 죄로 인한 심판을 경험한 이후 혹은 심판 중에서 회개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 회개의 주도권도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심판 이후의 회개도 하나님의 치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의 회개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내가 저희의 패역(메슈바탐)을 고치고(라파)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슈브)이니라"( 14:4)

V.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회개 이해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 와서 회개에 대한 이해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1) 회개의 개인화와 회개의 가능성 강조 - 포로기에 와서 예언자의 회개 촉구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하기 보다는 각각의 개인을 향해 선포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에스겔은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음으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리다"( 18:2) 는 이스라엘의 속담에 제동을 건다. 그는 미래가 과거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현재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즉 각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모든 영혼이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18:4)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18:19-20)

이러한 맥락에서 에스겔이 말하는 회개는 우선 개인의 회개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악인의 회개이다:"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슈브)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다"( 18:21; 참조. 18:27; 33:9, 11, 12, 14 ) 

그는 더 나아가 회개의 가능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말하기도 한다:"주 야웨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슈브)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슈브)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야웨의 말씀이니라 죽을자가 죽는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슈브) 살지니라"( 18:30-32).

 에스겔이 여기에서 새롭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마음과 영"은 다른 곳에서 야웨의 선물로 간주되고 있다:"또 새 영을 너희 손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36:26; 참조. 11:19). 따라서 에스겔은 회개의 가능성에 대해 긍정하는 점에서 포로기 이전의 선배 예언자들과 차이가 있지만 회개와 새로운 삶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점은 선배들과 다르지 않다.

 2) 회개는 율법준수 -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율법적 특성의 부각이 회개에 대한 이해에 또 다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회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네가 네 하나님 야웨의 말씀을 청종하여 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야웨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슈브)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30:9-10)

신명기 사가(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의 저자)는 요시아왕을 "야웨께로 돌이킨 자", "모세의 모든 율법"을 준수한 자로 높이 평가한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야웨께로 돌이킨(슈브)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포로기 이후 공동체의 정치 지도자였던 느헤미야의 장문의 참회 기도문에서도 회개는 율법으로의 돌이킴으로 이해되고 있다:"돌이켜(슈브) 주의 율법(토라)대로 바로 살라고, 주께서 엄하게 타이르셨지만 그들은 거만하여 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키기만 하면 살게되는 법을 주셨지만, 오히려 그 법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주께 등을 돌리고, 목이 뻣뻣하여 고집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9:29, 표준새번역)

 3) 회개는 구체적인 행동의 실천 - 포로기 이후 공동체에서 회개는 하나의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말라기서의 경우 회개는 곧 원래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와 헌물을 원 주인에게 되돌리는 구체적인 행위로 묘사된다:"너희 조상 때로부터 너희는 내 규례를 떠나서 지키지 않았다. 이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너라(슈브)  나도너희에게로 돌아가겠다(슈브) 나 만물의 주가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돌아가려면(슈브)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하고 묻는구나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3:7-8, 표준새번역)

여기에서 회개, 곧 야웨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정확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성전유지와 성전 봉사자들의 생활 그리고 공동체의 약자들을 위한 몫이었다:"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나누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또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네 손으로 하는 봉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4:28-29).

  VI. 나가는 말
구약성서에서 회개라는 개념은 '방향을 바꾸다/되돌아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슈브'를 빌어서 사용하고 있다. 이 동사가 '야웨께로 돌아가다'라는 주제로 쓰인 예는 주전 8세기 예언자들로부터 시작된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통한 형식적인 회개에 머무는 것을 질타한다. 그들에 따르면 회개는 죄의 고백인 동시에 바른 삶의 실천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회개는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하나님 이외의 모든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떠나는 삶을 뜻한다. 예언자들은 회개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회개는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 와서 회개의 개인성이 강조되고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체적인 행위를 실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약성서가 말하는 회개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회개 (1)


I. 들어가는 말
구약성서에는 '회개/참회'를 뜻하는 명사로 된 전문용어가 없다. 다만 '방향을 바꾸다/되돌아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슈브)가 이러한 개념을 대신하고 있다. 이 동사는 본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사용되는 세속적인 용어이다. 이 동사는 구약성서에서 약 1056번 사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종교적인 의미로 쓰인 예는 대략 118번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중요한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모스서에서 5, 호세아서에서 7, 이사야서에서 7, 예레미야서에서 28, 에스겔서에서 20, 역대기 역사서(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서)에서 16, 신명기서에서 3, 2이사야에서 3, 스가랴서에서 3, 말라기서에서 3, 그리고 시편에서 5번 사용된다.

이 동사는 '∼로부터 돌아오다(turn back from)' '∼로 돌아가다(turn to)'는 의미를 갖고 있다. '떠남'의 대상은 주로 '약한 행실', '지금까지의 행실', '', '악한 행동', '폭력', '우상', '가증한 것', '' 등으로 언급된다. '향함'의 대상은 명시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야웨 하나님으로 표현된다. 또한 향함의 대상으로 토라가 한 번 언급되기도 한다( 9:29). '떠남' '행함'을 하나로 묶어서 표현하면 회개란 한마디로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미 생활방식을 바꾸고 생활전체를 새로운 쪽으로 돌린다는 회개나 회심의 본질이 표명되어 있다.

위의 용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회개)이라는 주제는 주전 8세기이후 예언자에 와서야 중심주제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용례가 주로 예언서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으로 보아 회개 주제는 예언선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먼저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 나타난 회개의 제의적 형태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을 정리하고, 이어서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회개와 그 이후, 즉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회개이해에 대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II. 제의를 통한 회개의식
하나님의 벌로 말미암아 재앙이 닥쳤을 경우, 혹은 그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을 경우,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의 뜻을 표시하는 제사의식을 거행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예를 들면 금식을 하거나( 20:26; 왕상 21:8-10), 옷을 찢거나 굵은 베옷을 걸치거나(왕상 20:31-32; 왕하 6:30; 22:12; 3:5-8), 재 위에 눕거나( 58:5)하였다. 때로는 목놓아 울기도 하고 통곡을 하기도 하였다( 2:4; 1:13; 2:17).

솔로몬의 성전봉헌기도에 의하면 포로기 이전 이미 회개의식/회개의 날이 거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왕상 8:33-34). 예레미야 시대에도 금식의 날(회개의 날)이 언급된다( 36:6, 9). 구약성서는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도 회개의식이 정기적으로 거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스가랴 8 19절이 이점을 증거하고 있다:"만군의 야웨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이와 더불어 느헤미야 9장의 참회(회개)의 날에 거행된 기도도 또 하나의 좋은 증거가 된다.

III. 제의적 회개의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회개를 하곤 하였다:"오라 우리가 야웨께로 돌아가자(슈브) 야웨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야웨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야웨를 알자 힘써 야웨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은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6:1-3).

그러나 호세아는 백성들의 이러한 회개가 신실하지 못한 거짓 회개임을 간파하고 이를 질타한다:"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헤세드)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들의 회개는 잠깐 있다 사라지는 아침구름이나 이슬 같아서 지속적이지 못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불성실한 회개요 거짓회개이다. 그들은 회개의식을 통하여 자신들이 야웨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야웨께서 그들 쪽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란 것이다. 그들의 회개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애(헤세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다아트 엘로힘)이 결여되어 있다. 호세아는 이점을 비판한다:"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6:6)

이사야 58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금식)란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의식적인 행위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직접 실천하는 것이다:"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58:6-7)

스가랴도 포로기 이후 공동체가 포로기 때부터 습관처럼 지켜왔던 회개의 날을 비판하고 있다:"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 때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7:5-6)

 스가랴는 이러한 습관적인 회개의식 대신 이미 과거의 예언자들이 선포하였던 사회정의의 실천을 요구한다: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너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7:9-10)

마지막으로 요엘은 '마음을 찢는' 철저한 회개가 결여된 '옷을 찢는' 외형적인 회개를 비판한다:"야웨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는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슈브)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야웨께로 돌아올지어다(슈브)"( 2:12-13)

우리는 요엘 2 12절에서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식을 요구하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예언자들은 회개의식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회개의식 비판은 백성들의 회개가 단순히 지나간 죄를 고백하고 후회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회개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결여 되어 있다. 회개는 죄를 참회하여 용서를 구하거나, 처벌을 피하기 위한 간구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죄의 본질 자체에서 뛰어 나오는 것이다. 또한 죄의 본질로부터의 떠남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감과 다르지 않다:"너희는 나(야웨)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5:4).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뜻이 담겨진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예언자들의 선포에 나타난 회개는 죄의 고백인 동시에 바른 삶의 차원까지 포함한다.

 IV.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이 말하는 회개
예언자들이 보는 회개란 한마디로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예언자들의 회개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본래의 이상적 관계로 되돌아감'이다. 이러한 이상적 관계를 호세아는 부부관계로 표현하고( 2:7), 이사야는 부자관계로 묘사한다( 1:2). 이러한 이상적이고 본래적 관계의 파괴가 곧 '야웨로부터의 떠남'이며 이는 죄이다: "무리가 나(야웨)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1:16). 야웨께 대한 왜곡된 태도가 죄라면 원래의 이상적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회개이다. 그렇다면 예언자들이 말하는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란 전존재가 야웨께로 향한 상태로서 그분의 뜻에 전폭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주전 7세기에 이스라엘의 종들을 풀어주었던 사건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회개란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 곧 그들이 종살이 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며,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온지 칠년째가 되거든, 그를 풀어 주어라. 그가 육년동안 너를 섬기면, 그 다음 해에는 네가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서, 너에게서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너희 조상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마음을 돌이켜서(슈브), 각자 동족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줌으로써,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그것도 나를 섬기는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서 언약까지 맺으며 한 것이었다"( 34:13-15, 표준새번역).

 2)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 신뢰와 하나님 이외의 모든 도움을 거부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란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주관을 믿지 못하는 것 또한 죄이다:"예루살렘에 사는 시온 백성아, 이제 너희는 울 일이 없을 것이다. 네가 살려 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틀림없이 은혜를 베푸실 것이니, 들으시는 대로 너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셔도, 다시는 너의 스승들을 숨기지 않으실 것이니, 네가 너의 스승들을 직접 뵐 것이다."

또한 하나님 이외의 모든 도움, 예를 들면 외교적 동맹이나 원조 같은 모든 인간적인 도움과  이방신들과 우상들의 도움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슈브). 네가 지은 죄가 너를 걸어 거꾸러뜨렸지만, 너희는 말씀을 받들고 주께로 돌아와서(슈브) 이렇게 아뢰어 '우리의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자비롭게 받아 주십시오. 수송아지를 드리는 대신에 우리가 입술을 열어 주를 찬양 하겠습니다. 다시는 앗시리아에게 우리를 살려 달라고 호소하지 않겠습니다(외교적 원조). 군마를 의지하지도 않겠습니다. 다시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는 고백하지도 않겠습니다(우상).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14:1-3, 표준새번역).

회개와 변상 - DL 무디 (2)


회심은 30초 안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 오히오 지방에 있는 주도적인 복음 전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 얼마 전에 자신의 회심에 대한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습니다. 그것은 즉각적인 회심의 순간에 대하여 매우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19세 때에 벨몬트에서 기독 법률가와 함께 법률서적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그가 외출을 하자 그의 아내가 나에게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 오늘 밤에 모임에 같이 가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여 당신이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가정예배를 함께 드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다시 그의 집에 오자마자 나의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당신과의 만남이 계속되는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모임에 줄곧 나가게 되었습니다. 12명의 사람들이 조그마한 교실에 모여 있었습니다. 모임의 지도자는 나와 다른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는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불현듯 나는 그가 내게도 말을 건네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혼자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가끔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스쳐가자마자 그는 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친근하게 '찰스 형제님,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주 침착하게 ', 있습니다. 나는 방금 30초 사이에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였으며 또한 당신이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침착함이 그를 매우 당황하게 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나의 신실성을 의심하는 듯하였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별 말을 하지 아니했으며 다른 두 사람과 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 공부를 마칠 무렵에 그는 나를 바라보면서 '찰스 형제님, 마감 기도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내가 공기도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 순간까지도 아무 감정이 없었습니다. 나는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고민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 생각은 내가 기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생각은 내가 이미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이야기 했기 때문에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후자의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 기도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무릎을 꿇기 시작한 순간과 내 무릎이 마루바닥에 닿은 순간의 아주 짧은 시간 사이에 주님은 나의 영혼을 회심시켜버린 것입니다.

내가 기도 시에 첫 번째 언급한 내용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기도가 끝난 후에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이 너무 충만해서 다만 '영광'! 밖에는 달리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 이후 마귀는 감히 나의 회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찬양할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다만 일종의 신비로운 감정, 즉 어떤 신비로운 종류의 믿음이 임하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어떤 사람ㅇ게 몇 년전부터 전도를 해왔는데 그는 나에게 항상 동일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무려 5년 동안 나는 그를 회심시켜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매년 그는 항상 "아직 감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니, 무슨 뜻입니까? 무슨 감동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는 "글쎄 나는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 부딪치는 것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감동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이 보는 것처럼 볼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예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 위에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 즉 용서하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십니까? 그분은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께 나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항상 이런 자기의 논리 속에 빠져 있어서 도무지 그 생각을 바꾸지 아니했습니다.

, 가련한 사람! 그는 결국 이러한 미지근한 상태로 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60년 동안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내뱉은 말은 "아직 감동이 일어나지 아니했어"라는 무책임한 변명이었습니다.

막연한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성경 어느 곳에도 사람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회개하라고 긴급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용서받기를 원치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하나님이 이런 상태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용서하셨다면 그는 과연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다면, 하늘이 그에게 지옥과도 같을 것입니다. 천국은 준비하는 백성을 위하여 준비된 곳입니다. 만약 당신의 자녀가 나쁜 짓을 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를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당신의 서랍을 열어 10달러를 훔쳐 다 허비하였다고 생각해봅시다. 당신이 집에 들어왔을 때 당신의 하인은 당신의 자녀가 행한 일을 다 고했습니다. 드디어 자녀가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사실 여부를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정합니다. 결국 당신은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죄를 실토하지 않고 회개의 빛을 보이지 않게 될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은 "그래, 내가 용서하마, 이 문제는 잊어버리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회개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주정뱅이, 도둑놈, 창녀, 뚜쟁이에 상관없이 -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너무 자비하셔"라고 좋아합니다.

오 친구들이여! 이 세상 신에게 속지 마십시요. 참된 회개와 죄에서의 돌이킴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시거나 축복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회개가 일어날 때까지 축복을 보류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 다윗이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것은 매우 큰 불의를 그에게 행한 것이었습니다. 회개가 없는 곳에는 참된 화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실수를 행치 않습니다. 다윗은 재판의 실수로 인하여 문제에 봉착하고 있을 때, 그는 자기의 아버지를 권좌에서 쫓아내고 왕에 등극했습니다.

세인트 루인스의 부르크스 박사(Dr. Brookes)는 회개에 대하여 아주 좋은 정의를 내렸습니다: "회개는 엄격하게 말한다면 마음과 목적의 변화를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또한 자기 중심적인 신뢰를 버리고 오직 죄인들의 구세주이신 주님과 관계하여 자신에게 심판을 언도하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회개와 구원하는 믿음은 함께 움직이며 또한 당신이 믿는다면 회개에 대하여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회개'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간혹 회개를 더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고 생각하여 이미 회개한 것을 또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불신앙적인 사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충분히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이미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자비를 하나님께 요청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충분하게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또한 만약에 당신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당신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인도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당신의 눈물과 고뇌가 그분을 감동시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의 마음에 불명예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회개로 인도하는 것'은 당신의 결단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회개에 이르는 길, 그것은 결국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회개가 진짜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 만약에 참된 회개가 있다면 당연히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웃에게 악을 행했다면 우리가 그 손해 당한 이웃에게 배상하기 전에는 하나님께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어떤 사람에게 큰 불의를 행한 후 변상할 수 있을 경우에 그가 그것을 변상하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내 것이 아닌 물건을 취했다고 생각합시다. 나는 그것을 배상하기 전까지는 용서를 기대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큰 도시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신사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마음이 매우 불행하게 보였습니다. 그는 주저하다가 "사실 나는 사기꾼입니다. 나는 내 고용주의 돈을 사기쳤습니다. 내가 그 돈을 갚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그에게 "현재 돈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큰 돈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약 1500달러를 탈취했는데 현재는 900달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돈을 가지고 사업을 해서 돈을 번 다음에 다시 갚아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은 사탄의 유혹이며 그 돈을 가지고 결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에 일단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가지고 그 고용주에게 가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용서해달라고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나 그들은 나를 감옥에 넣을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기대하기 전에 그 돈을 먼저 갚아야 합니다." 그는 "그것은 너무 힘이 들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힘이 드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 일을 하니 않을 때에는 더 큰 영적인 짐을 지게 됩니다"라고 나는 권면하였습니다.

그의 짐은 너무 무거운 것이어서 그가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950달러와 몇 센트의 돈을 나에게 건네주고 나에게 그 돈을 그 고용주에게 돌려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다음날 나는 두 고용주들과 교회의 옆방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돈을 그들 앞에 내놓고 이 돈은 그들의 고용인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취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으며 그에게 용서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이 두 고용자들은 두 뺨에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용서하구말구요! 우리는 그를 아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겠습니다"라고 흔쾌히 승낙해주었습니다. 나는 계단으로 내려가서 그를 불러왔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릎을 꿇고 아주 축복스러운 기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만나주셨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주셨습니다.

얼마 전에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한 친구가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봉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전에 정부를 상대로 거래를 하면서 상당한 돈을 착복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회심하자 이 일이 마음에 걸려 큰 고민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는 내 재산을 헌금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기쁘게 그것을 받으실 줄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심각한 갈등에 빠졌고 그의 양심이 발동하여 그를 강타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1500달러짜리 수표 한 장을 미국 재무성에 송달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이러한 결단을 통하여 하나남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산출한 것입니다. 나는 믿기로 작정한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빛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도 자신이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빛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봅니다.

나는 일전에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겨우 32세 정도 되어 보이는 머리털리 아주 흰 어떤 사람이 나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은 내가 32세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머리가 희어진 사정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나는 12년 동안 아주 무거운 짐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나는 ", 그래요. 그 사정 이야기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혹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하여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후에 그는 말을 계속 이었습니다.

"나의 부친은 돌아가셨고 나의 어머니에게 시골 신문사를 유산으로 남겨주셨습니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신문사는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자금 사정이 상당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모친이 빚더미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문사와 그 건물은 약 1000달러 보험에 들어있었습니다. 결국 내가 20살 때에 그 건물에 불을 놓았고 1000달러의 보험을 타서 모친에게 드렸습니다. 12년 동안 이 죄는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나는 방탕과 쾌락으로 그것을 내 뇌리에서 지워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저주하였습니다. 나는 철저한 죄악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성경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저항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이 모든 세월 동안 나는 고문 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 고통으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변상하십시요. 여기 앉아서 그 이자를 계산해봅시다. 그후에 그 돈을 그 보험 회사에 되돌려 주십시요. 사람은 아직도 희망의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결단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자 그는 만약에 자신이 용서함을 받을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돈과 이자를 계산하여 갚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오늘날 자신들이 기꺼이 죄로부터 돌아서서 그것들을 고백하고 변상하지 못함으로 어두움과 속박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 용서함을 받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용서와 자비의 시대입니다  = 당신은 이 말을 너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회개할 수가 있으며 그 무서운 죄악의 전과를 깨끗이 말소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 후에는 결코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간혹 당신에게 죽음 후에도 회개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에서 이러한 사실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아주 주의 깊게 연구하였지만 사후에 또 다른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왜 또 한번의 기회를 요구할까요? 당신은 지금 회개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죄로부터 돌아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18:32)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당신은 죄인입니까? 그렇다면 회개하라고 부르는 그 요청을 거절하지 마십시요. 당신의 머리를 구세주의 발 앞에 쳐 박고 당신의 죄책을 고백하십시요. 세리는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여러분은 그가 얼마나 신속하게 용서함을 받고 축복함을 받았는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여러분을 의롭게 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당신의 죄를 위하여 내어 주신 그분의 의를 힘입어 의인으로 간주하실 것입니다.

아마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필요성이 없게 됩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와 다른 사람들, "토색하는 자 불의한 자 음란한 자 혹은 저 세리와"같은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하나님께 감사한 바리새인과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그 바리새인은 계속하여 말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였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나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사람 (이 불쌍하고 회개하고 통회하는 세리)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18:11-14).
"죄인은 업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범죄 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10,23).
어느 누구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각자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자리를 찾도록 하십시다. 그것은 바로 죄인의 자리입니다. 그후에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서 용서함과 의롭게 하심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11).
하나님이 중심으로 통회하는 자의 참된 회개를 볼 때마다 그분은 그 영혼을 바로 회개의 자리에서 만나 주실 것입니다.

회개와 변상 - DL 무디 (1)


회개(悔改)와 변상 - 회개는 막연한 흐느낌이나 울컥거림이 아닙니다. 혹은 자기 연민이나 한()의 표출은 더욱이 아닙니다. 다만 회개는 죄에 대한 고백이며 옛 삶으로부터의 단절과 분리요 새로운 삶을 향한 전환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철저한 변상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17:30)

회개는 성경의 근본적인 교리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 그것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거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들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교리들보다도 회개(悔改, 메타노이아 - , 마음을 돌이킴 - 참고), 중생(重生, regeneration, 거듭남 - 참고), 구속 등과 이와 같은 근본적인 교리들을 더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회개에 대해 정의하라고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이상하고 잘못된 정의들을 내릴 것입니다. 오히려 근본적인 진리에 있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것들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면 복음을 믿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침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까지 그는 오직 한 구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2)라는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만약에 그가 계속적으로 이 진리를 말하여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를 지시하는데 실패하였다면, 그는 많은 것을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까 그리스도가 당도했을 때, 그리스도도 역시 동일한 광야의 외침을 던졌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그리고 우리 주님이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동일한 진리, "사람들로 회개케 하라"(6:12)는 지침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분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셨을 때에도 우리는 베드로가 그 오순절에 동일한 외침, "회개하라"는 말씀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 당시 그러한 경이적인 결과(2:38-47)를 가져온 것도 이 설교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그는 "이제 어디서든지 사람을 다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17:30)라는 진리를 전심으로 외쳤음을 봅니다.

내가 회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기 전에 먼저 간단하게 회개가 아닌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합니다. 회개는 공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놀라고 두려워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에게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임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진실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이 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사람들을 모욕하며 악을 행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만 갑자기 위험이 닥치게 되면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들이 회개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폭풍우가 지나가면 그들은 이전같이 동일하게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땅에 재앙으로 치실 때에는 바로는 회개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떠나자마자 바로의 마음은 이전보다 더 강퍅해졌습니다. 그는 죄로부터 돌이키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동일한 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는 참된 회개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종 죽음이 한 가정에 닥치게 될 때 그 사건은 그 가정 안에 있는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6개월 정도가 지나면 모든 것은 잊혀지고 맙니다. 아마 이것을 읽은 독자들도 이러한 경을 했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임할 때 마치 그들은 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련이 제거되면 그 인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회개는 감정(feeling, 느낌 - 참고)이 아닙니다 . 또한 회개는 감정이 아닙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이상한 감정의 자극을 기다리는 사례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이키고자 할 때 야릇한 감정이 오기까지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볼티모어(Baltimore)에서 사역했을 때 나는 약 900명의 죄수들에게 매 주일 회개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당시에 통회 자복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풍성한 감정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매주에 감옥 속에서 울음소리가 반시간 정도 계속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형을 마치고 석방되었을 때 그들 대부분은 다시 그들의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에 슬픔을 느낀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또한 당신은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련의 기간에 슬픈 감정을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죄를 범한 사실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면전에서의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 시련이 참된 회개로 결과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감정은 너무나 자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회개는 금식이나 신체적인 고행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 기간 동안 금식하지만 한 가지의 죄도 회개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유다는 가서 목을 매어 죽을 만큼 철저한 후회를 했지만 그것은 결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믿기로 만약에 그가 주님에게로 가서 자신의 얼굴을 땅에 파묻고 자신의 죄를 회개했었다면 그는 분명히 용서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제사장들에게 갔고 그후에 결국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종류의 참회를 했다 할지라도 거기에 참된 회개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명심하셔야 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죄를 위하여 당신의 몸의 열매를 드려도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십시요.

회개는 죄에 대한 정죄가 아닙니다. 이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끼의 식사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상태로 몇 개월 동안 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심은 결코 일어나지 아니했으며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죄 의식과 회개를 혼돈하지 마셔야 합니다.

기도가 회개는 아닙니다 = 이 말 역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문제에 대하여 염려하면서 "나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어"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가 자기가 소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지만 그것이 결코 회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르짖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회개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회개는 어떤 한 가지의 죄를 끊는 것과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맹세하고 술을 끊었습니다. 한 가지의 죄를 끊는다고 해서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악을 버린다는 것은 꺽어야 할 전체 가지 중에 다만 한 개의 가지를 꺽은 것에 불과합니다. 남에게 모욕을 잘주는 사람이 남을 저주하는 것을 중단했더라도 그가 그 모든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는다면 결국 철저한 회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라고 볼 수 없습니다.

회개는 전 영역에 파급되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회개를 한 부분에 제한시키는 것은 인간의 기만이요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 나무 전체를 절단하여 토막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모든 죄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만약에 내가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런데 배의 세 네 군데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여 한 군데를 땜질을 하였지만 다른 곳을 조처를 못했다고 합시다. 결국 그 배는 물 속에 침몰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내가 세 네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고 가정합시다. 내가 한 곳은 응급조치를 하여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두 세 군데 상처가 간과되어 치료를 하지 못했다면 내 생명은 곧 끝장나게 될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단지 한 두가지 죄만을 제거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면 회개는 무엇입니까? = 아마 당신은 그러면 도대체 회개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완전히 돌아서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아일랜드 언어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온전히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한 방향으로 걷던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정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아서십시오. 돌아서십시오. 만약에 돌아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너무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너무 적은 감정을 가지고 있든지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죄로부터 온전히 돌아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회개는 역시 "마음의 변화"라고 묘사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교훈하신 비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되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1:28-29)

맏아들이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아마 그는 스스로 이렇게 중얼거렸는지 모릅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존경심을 가지고 순종하지 못했어. 그는 나에게 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나는 일하러 가지 아니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 같애." 그러나 그는 비록 이렇게 이야기했을지라도 결국 일하러 가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결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실제로 밭에 나가 괭이를 잡고 일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의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죄를 버릴 것이며 그분의 뜻을 행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회개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얼굴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린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가 만약에 진실로 회개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돌아설 것이며 자신의 옛 삶을 가차없이 포기할 것입니다.

인간은 단번에 회개할 수 있습니까 - 인간은 단번에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서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마음을 바꾸는데 6개월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뉴펀들랜드 연안을 항해하는 배 한 척이 있었습니다. 그 배가 해안선에 가까이 진입하고 있을 때 선장이 방향을 바꾸고 다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때 뱃머리를 돌렸다면, 그 배는 침몰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이키기가 이미 늦어버린 때가 있습니다. 내가 믿기에 우리 인생에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과 파멸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시간 내 죄를 회개하고 그것들로부터 돌아서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할 때가 있다고 봅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간섭의 때요 부르시는 때인데 만약에 이 때 결단하기를 주저한다면 결국 기회는 떠나가고 맙니다.

당신은 감정이 풍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깨달음이 있다면, 곧바로 돌아서서 "나는 더 이상 이전처럼 반역과 죄의 길을 걷지 않기를 원합니다"라고 외치십시요. 그리고 그 후에 당신이 기꺼이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돌린다면 구원은 당신의 것일 것입니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회심의 모든 경우가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매우 돌변적으로 옵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그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힘을 주시지 않으면서 그 어느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회개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앞에서의 진정한회개와 거짓회개


회개  -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방향전환
어른은 성인 오락실에서 대박의 꿈을 꾸며 도박 열풍에 빠져 있고 청소년들은 게임 광풍에 휩쓸려 낮과 밤을 바꿔서 생활하는 것이 일상의 모습이 됐다. 또한 어린이뿐만 아니라 기성세대까지 왕따 현상에 전염돼 남을 배려하고 함께 사는 공동체의 모습보다는 그들만의 울타리를 쌓고 기뻐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 나뉘고 진보와 보수로 벽을 쌓고 계층간 대립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더구나 빛과 소금이 돼서 갈등을 치유하고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교회는 맘모니즘에 함몰돼 성경적 세계관이 세속적 가치관에 지배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지나친 성장주의와 개교회주의 때문에 본보기와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교회는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는 참담한 상황에 처해 있다. 가슴을 찢는 참된 회개만이 적신호가 켜져 있는 이 나라 이 민족과 교회를 살릴 수 있다. 이 시간에는 참된 회개의 의미를 알아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다. 한평생을 부끄럼없이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그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부끄러워하며 죄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과 바람 속에서도 외롭게 양심을 지키며 끊임없는 자기성찰적 자세를 견지하겠다는 고백이다. 나를 돌아보는 반성적인 삶이 인생의 이정표를 제시해주며 어두운 찌꺼기를 걸러내준다. 윤동주는 이렇게 회개의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그럼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찰스 피니의 저서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따르면 죄의 견해에 따라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며 죄를 반복하는 경향이 사라진다. 행동의 변화를 일으킨다. 죄를 고백하고 동시에 범죄한 일에 대한 보상을 한다. 성격과 행동이 영원히 변화된다. 진정 회개한 자에게는 죄는 혐오스럽고 추악한 것으로 보인다. 죄를 두려워하거나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해서 피하게 된다.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은 과거에 탐닉했던 세속적 쾌락을 버리는 변화가 나타난다. 누군가를 속이고 부당하게 취한 것이 있다면 돌려주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일이 있다면 그 행위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거짓 회개는 어떻게 식별하는가?. 행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이기심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일시적인 변화로 옛 상태로 되돌아간다. 불법을 완전히 마음에서 몰아내지 못한다. 거짓 회개가 낳는 변화는 마지 못해서 행한 변화이다. 이것은 율법적인 회개이고 두려움으로 인한 회개이다. 거짓된 안전을 기대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 이러한 거짓된 회개는 죄에 대한 진정한 거부를 낳지 않아 달궈진 쇠처럼 양심을 무디게 한다.

회개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방향 전환이다. 죄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을 거꾸로 돌려나가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 죄악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거짓의 옷을 벗고 양심의 옷으로 갈아입는 행위다.

실제적인 회개 - 빌 존슨


마음을 새롭게 함
왕국의 일을 하기 위한 지속적인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마음을 새롭게 함입니다. 마음은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안으로 왕국을 들여오는 핵심적인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초자연적인 세계의 문지기로 만드셨습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은 본능적으로 마음을 불신합니다.

마음은 대속받지 못할 부패한 것이며 인간적이라는 생각에서 말이죠. 그러나 마음은 실제로 하나님의 영의 강력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이 땅에서의 왕국의 활동을 위한 문지기로 만드신 것입니다.

마음이 길을 잃고 타락할 때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자유가 제한 받게된다는 것은 커다란 비극입니다.

마음은 던져버릴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대로 쓰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과 정신적 동의가 댓가를 치루어야하는 치열한 전쟁이 있습니다. 당신 생활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에게나 혹은 사탄에게 충성합니다. 두가지 경우 모두 당신의 동의에 의하여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 지옥으로부터 왔고, 무엇이 천국으로부터 온 것인가를 인식하고 천국에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당신의 신적인 과업을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우주의 어떤 것보다도 가장 초자연적인 능력의 도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 미음은 정결함을 받고 성령님께 이끄심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디자인과 창조적인 아이디어들과 그리고 당신의 매일의 삶속에서 계획들을 이루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회개
마음을 새롭게 함은 회개(repent)로부터 시작됩니다. 회개는 우리의 본래의 과업을 이 땅에 이루기위한 출입구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쳔들은 용서받기에 충분할 정도로는 회개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있을만큼 충분히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회개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REPENT" 입니다. "RE" "돌아가다"의 뜻입니다. "PENT" 는 펜트 하우스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건물의 가장 윗층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Repent의 뜻은 "하나님의 시각인 가장 윗층으로 돌아가라"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우리의 자성과 감정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각성이 있고, 혁신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종종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이슈가 아니라, 바로 현재 그의 혹은 그녀의 삶에 얼마만큼의 천국을 소유하고 있느냐 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의 환상을 볼 수 있다고 - 물론 그와 같은 일도 있습니다-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더 실제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새롭게 됨을 입으면 예수님이 이 땅의 사역에서 행하셨던 표현되고 전시되고 증명된 천국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의 뜻입니다.

그분의 친절하심이  
우리의 영혼은 그와 같은 것을 "보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출입구와 접속점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들의 영역을 깨뜨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볼 뿐만 아니라 참여하고 싶은 꺼질 수 없는 강한 열망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저는 최근 주일 아침 예배 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뒤쪽에는 누군가손님으로 데려 온 한 노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팔을 기부스하고 있었고 그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팔은 어찌된 일입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이십 피트나 되는 다리에서 떨어져서 팔목이 으스러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죠 뭐." 그가 대답했지요.

우리는 기도했고, "이제 움직여보세요"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손목을 움직였고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놀란 충격으로 자신을 데려 온 여자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팔목이 바로 그 순간에 나았기 때문입니다.

예배 후에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시간을 사람들에게 초대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왔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로마서 2 4절의 "그의 친절하심이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는도다" 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돌아가는 것의 실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