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悔改)와 변상 - 회개는 막연한 흐느낌이나 울컥거림이 아닙니다. 혹은 자기 연민이나
한(恨)의 표출은 더욱이 아닙니다. 다만 회개는 죄에 대한 고백이며 옛 삶으로부터의 단절과 분리요 새로운 삶을 향한 전환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철저한 변상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회개는 성경의 근본적인 교리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
그것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거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들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교리들보다도 회개(悔改, 메타노이아 - 헬, 마음을 돌이킴 - 참고), 중생(重生,
regeneration, 거듭남 - 참고), 구속
등과 이와 같은 근본적인 교리들을 더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회개에 대해 정의하라고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이상하고 잘못된 정의들을 내릴 것입니다. 오히려 근본적인 진리에 있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것들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면 복음을 믿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침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까지 그는 오직 한 구절,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라는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만약에 그가 계속적으로 이 진리를
말하여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를 지시하는데 실패하였다면, 그는 많은 것을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까 그리스도가 당도했을 때, 그리스도도
역시 동일한 광야의 외침을 던졌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그리고 우리 주님이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동일한 진리, "사람들로 회개케 하라"(막6:12)는 지침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분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셨을 때에도 우리는 베드로가 그 오순절에 동일한 외침, "회개하라"는 말씀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 당시 그러한 경이적인 결과(행2:38-47)를 가져온 것도 이 설교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그는 "이제 어디서든지
사람을 다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라는
진리를 전심으로 외쳤음을 봅니다.
내가 회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기 전에 먼저 간단하게 회개가 아닌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합니다. 회개는 공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놀라고 두려워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에게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임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진실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이 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사람들을 모욕하며 악을 행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만 갑자기 위험이 닥치게 되면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들이 회개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폭풍우가 지나가면 그들은 이전같이 동일하게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땅에 재앙으로 치실 때에는 바로는 회개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떠나자마자 바로의 마음은 이전보다 더 강퍅해졌습니다. 그는 죄로부터 돌이키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동일한 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는 참된 회개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종 죽음이 한 가정에 닥치게 될 때 그 사건은 그 가정 안에 있는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6개월 정도가 지나면 모든 것은 잊혀지고 맙니다. 아마 이것을 읽은 독자들도 이러한 경을 했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임할 때 마치 그들은 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련이 제거되면 그 인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회개는 감정(feeling, 느낌 - 참고)이 아닙니다 . 또한
회개는 감정이 아닙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이상한 감정의 자극을 기다리는 사례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이키고자 할 때 야릇한 감정이 오기까지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볼티모어(Baltimore)에서 사역했을 때 나는 약 900명의 죄수들에게 매 주일 회개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당시에 통회 자복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풍성한 감정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매주에 감옥 속에서 울음소리가 반시간 정도 계속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형을 마치고 석방되었을 때 그들 대부분은 다시 그들의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에 슬픔을 느낀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또한 당신은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련의 기간에 슬픈 감정을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죄를 범한 사실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면전에서의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 시련이 참된 회개로 결과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감정은 너무나 자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회개는 금식이나 신체적인 고행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
기간 동안 금식하지만 한 가지의 죄도 회개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유다는 가서 목을 매어 죽을 만큼 철저한 후회를 했지만 그것은 결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믿기로 만약에 그가 주님에게로 가서 자신의 얼굴을 땅에 파묻고 자신의 죄를 회개했었다면 그는 분명히 용서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제사장들에게 갔고 그후에 결국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종류의 참회를 했다 할지라도 거기에 참된 회개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명심하셔야 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죄를 위하여
당신의 몸의 열매를 드려도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십시요.
회개는 죄에 대한 정죄가 아닙니다. 이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끼의 식사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상태로 몇 개월 동안 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심은 결코 일어나지 아니했으며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죄 의식과 회개를 혼돈하지 마셔야 합니다.
기도가 회개는 아닙니다 = 이 말 역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문제에 대하여 염려하면서 "나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어"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가 자기가 소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지만 그것이 결코 회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르짖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회개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회개는 어떤 한 가지의 죄를 끊는 것과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맹세하고 술을 끊었습니다. 한 가지의 죄를 끊는다고 해서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악을 버린다는 것은 꺽어야 할 전체 가지 중에 다만 한 개의 가지를 꺽은 것에 불과합니다. 남에게 모욕을 잘주는 사람이 남을 저주하는 것을 중단했더라도 그가 그 모든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는다면 결국
철저한 회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라고 볼 수 없습니다.
회개는 전 영역에 파급되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회개를 한 부분에
제한시키는 것은 인간의 기만이요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 나무 전체를 절단하여 토막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모든 죄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만약에
내가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런데 배의 세 네 군데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여 한 군데를 땜질을 하였지만 다른 곳을 조처를 못했다고 합시다. 결국 그 배는 물 속에 침몰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내가 세 네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고 가정합시다. 내가
한 곳은 응급조치를 하여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두 세 군데 상처가 간과되어 치료를 하지
못했다면 내 생명은 곧 끝장나게 될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단지 한 두가지 죄만을 제거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면 회개는 무엇입니까? = 아마 당신은 그러면 도대체 회개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완전히 돌아서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아일랜드 언어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온전히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한 방향으로 걷던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정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아서십시오. 돌아서십시오. 만약에 돌아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너무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너무 적은 감정을 가지고 있든지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죄로부터 온전히 돌아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회개는 역시 "마음의 변화"라고 묘사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교훈하신 비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되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21:28-29)
맏아들이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아마 그는 스스로 이렇게 중얼거렸는지 모릅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존경심을 가지고 순종하지 못했어. 그는
나에게 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나는 일하러 가지 아니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 같애." 그러나 그는 비록 이렇게 이야기했을지라도 결국 일하러 가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결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실제로 밭에 나가 괭이를 잡고 일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의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죄를 버릴 것이며 그분의 뜻을 행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회개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얼굴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린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가 만약에 진실로 회개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돌아설 것이며 자신의 옛 삶을 가차없이 포기할 것입니다.
인간은 단번에 회개할 수 있습니까 - 인간은 단번에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서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마음을 바꾸는데 6개월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뉴펀들랜드 연안을 항해하는 배 한 척이 있었습니다. 그 배가 해안선에 가까이 진입하고 있을 때
선장이 방향을 바꾸고 다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때 뱃머리를 돌렸다면, 그 배는 침몰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이키기가 이미
늦어버린 때가 있습니다. 내가 믿기에 우리 인생에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과 파멸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시간 내 죄를 회개하고 그것들로부터 돌아서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할 때가 있다고 봅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간섭의 때요 부르시는 때인데 만약에 이 때 결단하기를 주저한다면 결국 기회는 떠나가고 맙니다.
당신은 감정이 풍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깨달음이 있다면, 곧바로 돌아서서 "나는
더 이상 이전처럼 반역과 죄의 길을 걷지 않기를 원합니다"라고 외치십시요. 그리고 그 후에 당신이 기꺼이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돌린다면 구원은 당신의 것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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