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2011

감정에 따라 살지 않고 믿음에 따라 산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기 감정과 느낌에 죄우되지 않는 삶을 살도록 저를 이끌어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려운 훈련이다. 자신이 신령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기도로써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 싸움을 할 때, 자신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 감정이 어떻든 간에 내게는 문제가 없다"라고 말해야 한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감정에 따라 살지 앓고 믿음에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차갑거든 뜨겁든 관계없이 말이다. 물론 뜨거운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시편에서 볼 수 있듯이, 다윗 같은 사람도 차가워진 적이 많이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6:5)라고 말했다. 갑자기 슬프고 불안해져서 기쁨이 싹 달아나는 경우가 우리에게 종종 생긴다.

우리가 아무 기쁨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으면서도 잠깐 동안 아무 기쁨 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과 함께 일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삶을 극복하도록 훈련하고 성숙하게 하심을 믿어야 한다.

세례를 받음은.....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2:7)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한 에피소드를 통해 사람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너무나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속에서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인데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엣 것을 찾는 자들은 오늘 본문 1-4절 말씀을 통해 4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원문을 보면 “나는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화 함께 죽었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수도 중요하고, 오늘 학습과 세례를 받는 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영적인 고백입니다.
그리고 내가 과거에 대해 철저하게 끊어지고 회개하며 죽었다고 고백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하나님 안에 감추인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빅터 플랭클린은 의미요법을 통해 세 가지 가치를 소개하는데 간단히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여시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경험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만 과거에 묻혀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의 힘든 것을 토대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나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건강한 의미를 계속 도출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위의 것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해 주십니다.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땅히 죽어야 할 나를 바라보게 되고,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앞에 도래할 천국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계속해서 생명을 경험하게 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신비스러운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는 다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찾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로 승리하시는 성도들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동제일교회)

대적 자를 죽이심

사도행전 12 : 20 ~ 25
* 효유(曉喩)한대(21절) : 연설하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하는 교회에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악한 계획을 무력화 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패배를 모르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궁극적인 승리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대적 자를 죽이심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면서 교회를 핍박했던 헤롯이 세상을 완전히 지배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갑자기 죽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신으로 대접을 받을 정도로 교만했던 그를 하나님께서는 치셨고 헤롯은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롯이 5일 동안 복통을 앓다가 죽었다고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자들도 다스리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헤롯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승리합니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승리한다는 것이 기독교인의 역사철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는 자들은 대적 자들을 두려워말고 하나님을 믿고 위기를 돌파해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 중에서도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대적 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대적 자보다 더 위대하신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그리스도인의 승리 비결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1:15)

세상도 믿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몇 년 전 타임지에서 각 세기마다 중요한 인물들을 선정한 적이 있었는데 20세기의 인물로 아인슈타인을 선정했습니다. 그 아인슈타인이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과학의 기초는 진리이다. 과학의 기초는 믿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이 없으면 과학도, 인문학도, 신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일반적인 면에서도 믿음은 중요합니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킨 것은 그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의미와 목표는 하나님 그분을 믿게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 중 모세에게 산 위로 올라가 손을 들라고 명합니다. 이 말씀에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깃발을 보면 그가 어디 소속인지 아는 것처럼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주권자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은 일은 우리가운데 일어납니다. 우리 가운데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는 역사가 말씀 가운데 담겨있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단 한 사람도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알고 믿으라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일 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보내고 산으로 들어가십니다. 이 때 마가복음 6장 48절에는 독특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들을 보시고’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목해서 보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는 제자들이 풍랑 가운데서 믿음을 체험하는 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음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가셨습니다. 왜 물 위로 걸어가셨을까요?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고 믿음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 전체는 믿음입니다.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는 중복되어 있습니다만 구조적으로 보면 다릅니다. 사무엘상하는 왕정의 시작을, 열왕기상하는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합니다. 역대상하는 이스라엘 포로기 이후 기록되었는데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알려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모세오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는 앞의 성경을 다시 한 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 동일합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제자들을 통해,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 설명해주려고 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민수기 13장 14장을 신명기 1장이 또 기록하는데 모세는 의미있는 단어를 씁니다. 개역개정은 둘 다 정탐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바뀌기 전 성경은 민수기에서는 탐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정탐은 소가 풀을 먹기 위해 대충 훑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탐사는 주의해서 살펴보아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탐사하라고 했지만 그 사람들은 정탐, 즉 대충 훑어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이라는 말과 진실이라는 말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탐한 땅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며,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 살고 있었고, 아낙자손도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뚜기같아 보였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로 보면 믿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힘과 능력으로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니죠. 바로왕, 홍해, 아말렉의 위험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거기 아낙 자손이 있는 것 아십니다. 그러나, 나아가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나아가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이깁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리더는 사실을 사실대로만 보고 말하면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만 본다면 누가 순교하고, 누가 선교하며, 누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만 봅니다. 불평과 원망이 극에 달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른 백성을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용서를 구하는 모세의 믿음의 간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원은 하지만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믿음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시며 28절에서 너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너희에게 행하리라’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그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믿고 나아가기 바랍니다. 얕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풍요가 넘치는 곳으로 여겨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자신이 가는 곳이 삭막하고 오아시스가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살 줄 믿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믿음의 사람이 세워져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로 세워질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목동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