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2009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 – [강병국목사]


1) 말씀을 붙잡는 것이란?
죄의 유혹과 감정들을 이기고 대신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말씀 속에 승리를 위한 모든 능력을 약속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경을 상고하고 말씀을 암송하여 유혹이 오고 감정이 올라올 때에 그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따르므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바로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다. 예수께서 질병을 고치시고 마귀를 내어쫓으신 것은 말씀으로 하신 것이었으며, 또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 온 성경은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말씀 위에 고정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4:4).

우리 육체의 생명이 음식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처럼 영적 생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된다. 사람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한다. 영양분을 위하여 스스로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 말씀을 우리 각자를 위하여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단지 다른 사람의 지식을 중개로 하여 말씀을 얻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깊은 주의를 가지고 성경을 연구해야 하고, 한 구절씩을 취할 뿐 아니라 문맥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을 확인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그 사상이 우리의 것이 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알게 될 때까지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진리의 원칙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소화시킬 때에 그 원칙은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고 생명의 원동력이 된다.심령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사상을 형성하고 품성을 발달시킨다. 이 말씀은 우리의 본성적이며 땅에 속한 성정을 멸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붙들고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심령에 임하신다.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말씀을 붙드는 사람 안에서 재창조되고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는다는 것이다.

2) 말씀에 나타난 약속들
여러 가지 다른 환경이나 난처한 상황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마음에새기며 주님의 뜻대로 전진해야 한다.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이게 될 때, 또 유혹과 부정적인 감정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육신의 감정이 자신의 원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 치밀어 올라올 때, 분노와 격정이 마음을 휘몰아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약속들을 헤아리며, 또 그 말씀들을 암송하며 이겨내야 할 것이다. 다음의 성경 절들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은혜로운 성경 구절들이다. 기억해 놓도록 하자.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2~3)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12:5~10)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119:71)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12)

낙심이 들어올 때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27:14)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2: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29:11)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12:2~3)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3:21~23).

슬픔과 외로움이 밀려올 때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49:14~15)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46:10)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4)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8:20)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눌릴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55:22)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68:19)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6:25~27)

말씀으로 사신 예수님 - [강병국목사]


1) 말씀으로 사신 예수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생애는 우리에게 모본이 된다. 그분이 처하셨던 상황과 그 상황에 대처하시던 태도와 방법들 그리고 일어난 사건들을 처리하시던 태도와 마음가짐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좋은 실례가 된다. 예수님의 생애를 특징 지웠던 한 가지 확고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주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셨고, 말씀으로만 사셨다는 것이다. 그 예는 특히 광야에서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다.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대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주님께서는 어떻게 사는 것이 말씀으로 사는 것인가 하는 실례와 방법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것이다. 그분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시험을 대항할 수 있었다. 그분이 행하셨던 모든 일의 동기와 배후에 있는 원칙은 “기록되었으되”였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셨지만, 지상에 사실 때 매일 새벽 미명이면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고 기도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명상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과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일과 자신의 뜻과 계획을 따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그르치지 않으려고 매일 그분의 헌신을 새롭게 하셨다. ,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충성심과 결심을 매일 새롭게 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말씀으로만 사셨다. 그분 생애의 신조는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10:7)였다.

지상에서 모든 시험당할 때마다 예수님의 싸움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실천하러 오신 것이 그분 생애의 목적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사단이 거는 시험의 맹공격을 받을 때, 상황이나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말하는 대로 행하고 순종하여야 한다. 우리가 말씀으로만 살 때, 그 말씀의 모든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며, 예수님과 같은 생애를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19:11)

2)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1~3,14) 그리스도는 거룩한 말씀이시다. 온 세상 만물은 그분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유지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는 무엇이라도 성취시키는 힘이 있다. 말씀 속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바로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 4:12)으로서, 말씀 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며,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생애에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17) 말씀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는데, 이것은 말씀이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가운데로 모시기 때문이다. 창조의 능력을 가진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생애에는 변화가 생긴다.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모든 것을 정결하게 하는 변화가 생기는데, 곧 말씀이 버려야 할 것들을 잘라 쪼개 버리게 하고, 자아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들은 쳐서 복종시키며, 마음의 동기와 원칙과 생활이 바뀌게 하는 변화가 생기게 한다. 미워하고 원망하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사랑과 감사로 충만한 사람이 되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불평하던 사람이 긍정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사람으로 변하며, 게으르고 나태하던 사람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매사에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생애와 마음의 동기와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여 바뀌고, 또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되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고, 말씀으로 변화되었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3) 감정과 느낌을 부인하고 말씀을 따르는 것
말씀으로만 산다는 것에는 매우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그 중요한 원칙을 알 뿐만 아니라 마땅히 그것을 체험하고 살아야 한다. 대부분 사람은, 믿는 것이란 그저 “머리로 아는 것”, 혹은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것은 그 이상을 뜻한다.

진정한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온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모든 것들이 그것에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그 말씀을 의지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 안에서 영혼이 편안히 쉼을 얻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만으로 사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말씀으로 산다는 의미는, 매일의 삶을 영위해 나가면서 처하게 되는 상황과 일과 사건과 경우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이나 욕망을 따르지 않고, 그 감정들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에 느껴지는 대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그 감정이나 느낌이 밀려올 때, 그것들을 붙잡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며 그분의 뜻과 섭리 안에서 편히 쉬는 것을 가리킨다.

조상의 죄 결과로 우리는 죄로 치우치는 경향들을 타고났다. , 유전자를 통해 조상의 성정과 성격과 기질들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짓기로 선택하는 우리의 고의적인 선택 없이 우리의 존재 자체, 즉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가진 그 부족한 자체를 죄인이라고 정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죄에 대해 성경에서 말하는 정확한 개념이다.

우리 속에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려는 죄의 본성들이 자리 잡고 있으므로 매 순간 여러 가지 감정과 욕망이 마음속에서 올라온다. 그러나 말씀만으로 산다는 것은 그것들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5:16~17)라고 말하며,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러므로 죄를 승리한다는 것은, 자신의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소욕을 좇지 않고, 그 느낌을 부인하고 말씀을 붙잡고 사는 것, 곧 말씀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 1:17). 그분의 말씀과 원칙은 일정하시며, 또 사랑과 자비는 변함없으시며 그분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과 느낌은 시시때때로 변하기 쉽고 안정적이지 못하다. 또한, 육체에 속한 감정들은 시간이나 상황, 또는 육체의 건강 상태나 환경과 분위기에 따라 변하기 쉬운 것이므로 그것은 신뢰할 수가 없다.

육체의 소욕들 대부분 부정적이고 악한 감정이나 느낌을 통해 형성되고 일어난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들은 실체가 아니고 허상이다. 그러므로 좋지 않은 감정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느낌들이 엄습할 때, 또한 죄의 유혹이 감정을 자극하며 올라올 때, 우리는 그것들에 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그 말씀의 명령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육체에서 일어나는 허상들이 우리를 자극하고, 긍정적인 영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를 끌어내리고 쓰러지게 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나의 감정과 뜻을 부인하고 그분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뜻과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실체를 붙잡는 것이며, 그것이 죄를 승리하는 비결이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 것인가? 2 - [강병국 목사]


버림받을 위험
사도 바울은 육체적 죄의 성향을 재갈먹이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린도전서 9:27).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버림”이라는 말은 꽤 흥미로운 말입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아도키모스”로서 다른 곳에서도 버리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3 5절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버리운(아도키모스)자의 마음에 거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디도서116절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아도키모스)” 자들의 가증함과 순종치 아니함에 대하여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다시 죄에 사로잡히도록 허용한다면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중생(거듭남)을 경험한 신자들이 파멸을 당할 가능성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는데, 이는그들이 주의 만찬을 합당하게 먹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9). 이 사람들은 기성 그리스도인들이며, 구원을 함께 나누어 가졌던 교인들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심판을 받아 멸망 당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심판을 받습니까? 디모데전서 512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신자가 “처음 믿음을 저버리고” 마지막 때에 심판을 당하게 될 수 있음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나는 영생에 대한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비유로 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내 자녀는 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그들은 항상 나의 자녀이다. 그들은 이미 태어난 존재이다. 나의 자녀와 나의 관계 즉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분리될 수 없다. 자녀가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를 불문하고, 그는 항상 나의 자녀인 것이다.

이 논리는 중대한 것 하나를 빠뜨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다시 태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자녀가 병들어서 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의사들은 어머니들에게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이야기 해줍니다. 아이가 죽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주어야 할 권고와 경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아기가 잘 먹지 않는다면 그 아기는 죽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53)고 하셨습니다.

자 이제, 최종적인 구원을 위해서는 계속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셨습니까? 바울은,“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로마서 6:16)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더 이상 그리스도를 순종하지 않기로 선택한 후 사단에게 순종할 때,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고 사단에게 속하게 됩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한일서3:7,8).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서 떠나는 일에 대하여 특별한 경고를 거듭해서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0 23절은, 일단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이 계속되며, 아무도 그 구원을 번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을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신자들의 모임에서 뒤로 물러가도록 유혹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권면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분명히 뒷걸음질에 대한 경고 중의 하나입니다. 이 편지서의 저자(나는 그가 바울이라 생각합니다만)는 이 경고의 대상에 자기 자신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기록하기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히브리서 10:26-29). 여기에 묘사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고의적으로 배도에 빠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확신을 버리고 멸망에 빠질 가능성이 없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가 왜 이러한 분명한 경고를 남겼겠습니까?

히브리서 6 4-6절에서, 우리는 또 다른 두려운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중생을 경험했으나 후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성령을 버린 자들에 대해 이보다 더 잘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성경절이 경고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향력 밖에 자기 자신을 두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불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십자가에 못박는 한, 구원받을수 없습니다.

가지가 꺾여 나갈 수 있음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육신적 이스라엘 자손 중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여 꺾여 나간 사실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그는 감람나무를 사용하여 예를 들었습니다. 17절에서 20절까지에 의거하면, 가지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들은 꺾여 나갔습니다. 그 후에 돌 감람나무 가지가 접붙여졌는데, 그것은 이방인이었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이제 다음 권면을 주의해보십시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희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준엄하심)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준엄하심)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21,22).

그 가지들에 대한 안전은 전적으로 나무와의 연결에 달려있음을 유의하십시오. 영생에 대한 안전과보장은 조건적인 것입니다. 베드로도 이러한 바울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니라”(베드로후서 1 9-10). 확실히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음을 지적해 줍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심지어 구원받았다고 공공연히 말한 후에라도 멸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은 베드로후서 2 20-22절입니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패배하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었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구원의 보장”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개나 돼지로 비유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하여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났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를 주님께 의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죄의 “구덩이”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옛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은 “고기 가마”와 “부추와 파”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은 죄의 즐거움을 생각하게 되었고, 마치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로 가서 도로 눕듯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돼지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교훈은,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길 수 있는 가능한 일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영도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들어봅시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디모데전서 4:1). 이것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언제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가겠습니까? 그것은 지금 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이며, 우리 앞에 놓인 때입니다. 전에 한번도 이런 것을 생각해보지 않으셨다면,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지금은 위험한 시기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 있어 온 사람들입니다. 형제들과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교회에 출석하며,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교회 사업에 자금을 드리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목사들이었으며, 제직들이었고, 지도자적 위치에 있어온 평신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에서 떠나갑니다. 그들은 견고하지 못하며 충성되지 못합니다. 이제 마지막 때에 위험한 시기가 올 것입니다. 핍박과 말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올 것인데, 어떤 이들은 굳세게 서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사물들에 유혹되고 악한 영에 미혹될 것입니다. 슬프게도 그들은 십자가의 구주께 대한 충성심을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공언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에는 등을 돌립니다. 그들도 전에는 그리스도의 편에 섰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과 시련이 왔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원수의 편에 가담할 것입니다.

그러나 들어보십시오! 만일 여러분들이 “영생의 무조건적 보장”을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을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 곁에 머문다면 여러분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신실한 분이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리라(시편 55:22). 여러분들이 그분 곁에 서 있는 한, 그분은 언제나 여러분 곁에 서 계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14:6)라고. 요한도 주님에 대해 기록하기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뒷걸음질친 자가 항상 죽기 전에 주님께로 돌아오는가?
아니요. 천만에!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사울에 대하여 성경은, “그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네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사무엘상10:6). 그러나 사울은 그의 높이 들린 위치에서 뒷걸음질 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사무엘상 31:1-6 참고). 사울 왕은 새 사람이 되었으나, 뒤로 물러나서 죄악 속에 빠지게 되었고, 끝까지 하나님께 반역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회개도 하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빼앗길 필요가 없음
마지막으로 영원한 보증의 교리를 가장 잘 지지해 주는 것으로 인용되고 있는 구절을 한번 살펴 보십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29).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모든 자녀들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언뜻보기에 이것은 영적으로 잃어버릴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불변의 보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맥 전체를 자세히 읽어 보세요. 27절을 읽지 않는다면, 이 말씀을 기록한 요한의 의도를 심각하게 왜곡하게 됩니다. 27절은 28절과 29절의 약속을 성취시키는데 필요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 안에서편히 거하는 자들은, 오직 그분을 진실하게 따르는 자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듣고 당신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양들에게만 영생을 주십니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에 의해서 흔들려 떨려나가지 않고 영원히 그분 안에 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 안에 있는 양을 훔쳐가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원수들로부터의 보호를 말하는 것이지, 양 우리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를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양우리 밖으로 나간 불순종한 양들의 보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들을 하늘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는 없지만, 그들은 언제라도 스스로 아버지의 보호 밖으로 뛰어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선택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실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도 멸망 받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배도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배도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성경의 수없이 많은 구절들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사람이 멸망 당할 수 없다면, 왜 성령께서는 바울이나 베드로 혹은 그 밖의 사도들로 하여금 영원한 멸망에 대해서 그토록 심한 경고와 권면을 남기게 하셨을까요? 만약 한번 구원받으면 그것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라고 가정한다면, 마귀는 신자들이 멸망 당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쓸데없고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기 때문에 신자들을 빼앗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단이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게 하고자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알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구원이 과거나 현재의 한 차례의 취소할 수 없는 공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혀주시는 의와 나누어주시는 의를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경험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원천되시는 그리스도와의계속적이고도 역동적인 관계가 없이는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는 문제를 성서적으로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제 안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과거에 일어났고, 현재 일어나고 있으며, 미래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
한번은 어떤 사람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뒤집혀 물속으로 가라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영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다른 고기잡이 배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많은 화물을 싣고 있어서 더 이상의 또 다른 승객을 태운다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쌍한 이 사람을 구조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에게 밧줄을던졌습니다. “여기 이 밧줄을 잡으세요. 우리가 당신을 해안까지 끌어다 주겠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밧줄을 잡자마자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구조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가 밧줄을 붙잡고 있는 한, 그는 구조 받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 속에서 그가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그가 밧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다시 잡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구조되지 못할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있는 한, 그는 구원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잡은 손을 놓기로 마음먹고, 그 대신에 마귀의 손을 잡는다면 그는 멸망당한 것입니다. 그의 구원은 그가 결정하는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구원을 세 시제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 과거, 현재, 미래. 그가 밧줄을 잡았을 때,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배에 매달려서 끌려오고 있을 때,“나는 구원받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가 해안에 발을 들여 놓기까지,“나는 구원받은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칭의”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가 현재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고 있다면, 이것을 “성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는 죄의 본성과 육체로부터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영화”라고 말합니다. 이 세가지 시제가 모두, 성경이 구원에 대하여 설명할 경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보다 분명하게 세 가지의 시제가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 24절에“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과거: We were saved). 고린도전서 1 18절에는“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이라고 되어 있고(현재: We are being saved), 사도행전 15 11절에는“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미래: We shall be saved).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세가지 시제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았습니다.

위에 언급한 예화를 잘못 이해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조 받기 위하여, 그가 밧줄을 꽉 붙잡아야만 했던 사실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밧줄을 스스로 만들지도 못하며, 다만 배에서 던진 밧줄을 붙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자신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서 그가 끌려갔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단지 그 힘에 협력했을 뿐입니다. 그는 밧줄을 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가 안전하게 끌려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그분께 계속해서 붙어있어야만 합니다. 그분께 확고부동하게 남아있음으로써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붙잡는데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돌아가라고 쫓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우리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오직 한가지 방법은, 우리 자신을 그분께로부터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의 의지가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서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과 하늘의 사물들 대신에 세상의 사물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구원받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4:12).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써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결과 입니다. 바로 이러한 결과들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행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밧줄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께 계속하여 굳게 붙어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 26.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 것인가? 1 - [강병국 목사]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무도 타락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싫다고 해서, 자신이원하는 대로 그렇게 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싫든 좋든 간에 이기적인 죄인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출생에 관한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죄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죄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영생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본성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우리 자신들의 당당한 권리입니다. 이 선택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결정입니다. 이 선택은, 죄의 본성을 따라서 살다가 영원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로운 품성을 받아서 영원히 살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제공된 이 선택에 대해서 사람들은 서로 매우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그들에게 하셨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너희들의 불행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한가지 결정권을 줄게! 일단 네가 구원받기로 선택하기만 하면, 너는 결코 다시 멸망 당할 수 없단다. 너는 그 결정을 바꿀 수 없어. 네가 그리스도를 너희 구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것은 너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다. 나중에 네가 생각을 바꾸어서 너의 결정을 포기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너무 늦었단다. 아무리 네가 멸망 당하기를 원하고, 네가 과거에 하였던 회개를 후회한다고 할지라도, 너는 결코 영생을 피할 수는 없단다. 네가 아무리 큰 반역을 일으키고 고의로 신성을 모독하고 악한 생애를 산다고 할지라도 구원받기로 한 너의 결정은 바뀔 수 없지. 나는 네가 예수를 너의 구주로 받아들인 후에는 더 이상의어떤 선택을 하도록 허락할 수 없단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구원에 대한 영원한 보장의 교리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입니다. 한편 또 다른 그룹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가 마음을 자의로 바꿀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단 한번의 번복할 수 없는 선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개인적 관계에 기초된 것으로 믿으며, 고의적인 불순종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질 때, 신자는 더 이상 참 신자가 아니며 구원에 대한 어떤 보장도 가질 수 없게 된다고 믿습니다.

위태로운 수백만의 영혼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Once Saved, Always Saved(예수를 믿음으로서 일단 한번 구원받으면, 품성과 믿음의 영적인 성장에 상관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상관없이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라는 구원론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가이처럼 매혹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압도되어 따라가고 있습니다. 만약 신자들의 미래의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보장된다면 그것은 가장 놀라운 교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오류가 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수백만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도 있으며, 잃어버린 바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영혼들의 영원한 운명이 바로 그 교리의 진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스스로 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과 신앙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까?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할 때, 우리는 더 이상의 선택권을 포기하는 것입니까? 구원은 한 순간의 결정으로 완성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러한 결정 후에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죄들이 당신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실까요?”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답해주는 분명한 구절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그 성경절들을 살펴보고, 아울러 “일단 구원받으면 그것이 끝”이라는 교리를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생각되는 몇몇 성경 구절들도 찾아보십시다.

계속되는 생명이 계속적인 삶의 비결임
계속해서 살아 있으려면 계속적인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의 하십시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아니하면, 그는 시들어 죽고 결국에는 불에 살라집니다. 이 사실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단지 과거의 경험에 기초된 정지된 상태의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골로새서 3:4)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을 신자가 계속적으로 나누어 받는 것을 말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분리될 때, 생명의 근원은 없어지고 그 결과는 죽음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너무도 분명해서 누구나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 포도나무와 연결된 신실하고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포도나무로부터 분리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죽게 되며 불에 던지어져서 살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살아 있었던 것이, 지금은 시들어서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보장은 오직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께 고정되고, 그들의 마음이 “우리 생명이신” 그분과 연결된 사람들에게만 영원한 것입니다.우리는 과거에 어떻게 구원받았었든지 간에 다시 잃어버린바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시덤불과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누가복음 8:1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오직 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길가와 바위 위와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로 비유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 동안만신실하였던 사람들은 얼마 동안만 구원받은 상태로 있다가 유혹의 때에 떨어져 나갔습니다. 물론 그들은 결국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마 동안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가 후에 믿음을 잃으면, 멸망 받게 된다는 주님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유를 또 하나 읽어보면, 신자들에 대한 계속적인 용서는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마태복음 18 23-3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어떤 왕이 자기 종의 간청에 응하여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그 종이 자기에게 약간의 빚을 진 동료 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자신에게 빚을 갚을 수 없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그를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왕이 듣고 나서 분노하여, 그가 전에 그 종에게 탕감해 주었던 많은 빚을 취소하고, 그 종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놓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아무도 이 비유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지만, 그 용서가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대함으로써, 이미 받은 용서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33 13절의 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이 원칙은 18절에서 다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

영원한 구원의 비결은 구원의 근원되시는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데 있습니다.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24:13)고 하셨습니다.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서 그것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제거될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무조건적인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음에 나오는 성경 말씀이 말하고 있는 진리를 부인하지만, 요한계시록 3 5절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 리라. 이 말씀에 함축된 의미는 명확합니다. 이기지 못하는 자 -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 - 는 그들의 이름이 지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구절들은 똑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영생에 대한 보장에는 항상 조건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7).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요한일서 2:24).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0:38).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요한복음 15:6).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8:51).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로마서11:22).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베드로후서 1:10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로마서8:13).

구원받는 것과 멸망받는 것, 어느 것이 쉬울까? 2 [강병국목사]


성령의 능력으로 일함
하나님의 성령 충만한 자녀들은, 능하신 정복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에있어서, 좀 더 확신에 차 있고 좀더 공격적이며 담대하게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육체의 힘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되시는 그분(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적하는 자(사단)보다 능력이 크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이제 다음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인가이 질문의 뜻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그리스도인 생애를 사는 것이 쉽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의 타고난 본성과 힘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애쓰는 것처럼 세상에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순종의 길이 즐겁고 기쁘답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한일서 5:3). 요한은 사랑의 대 원칙을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일 경우에는 힘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시편의 기자도 요한의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편 40:8)라고. 진실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두가지를 말하겠습니다. 첫 번째,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며, 자신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그리스도를 최고로 사랑하며 그분을 결코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원칙과 규칙의 요구가 기쁨이 될 수 있음
성경에 기록된 요구들과 범죄자에게 가해지게 될 형벌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한 제재들과 위협적인 형벌들이 우리의 순종을 더욱 힘든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작성한 두가지의 가상 인터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방금 종합 진단을 마쳤다고 가정합시다. 의사가 제게 결과 보고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건강진단 결과 당신은 제가 시키는 대로 정확히 따르지 않으면 죽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제가 지금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야 하며, 당신의 여생 동안 매일같이 저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해야 합니다. 당신이 살아있는 한 매일같이 이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죽게 될 것입니다.

잠시 이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의사가 말한 것은 죽음의 형벌이 따라오는 엄한 규칙들 임에 틀림 없습니다. 저는 그 의사의 처방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저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명령들을 따르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의사가 식사를 제 때에 잘 하라고 명령하였다면, 위장에서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낼 때마다 건강에 유익한 식사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의 신체의 법칙들은 제가 규칙적으로 식사하는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몸에서 자동적으로 보내는 유익한 요구입니다. 먹는 것은 제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의사의 엄한 지시를 따르도록 저 자신에게 억지로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의사가 저를 위한 최선의 처방을 내렸다고 믿기 때문에 아무런 불평없이 의사의 지시를 따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 가운데는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의 자연적인 산물인 사랑의 법칙이 작용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계명들이나 형벌들은 전혀 위협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계명과 원칙을 주신 분은 바로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최선의 유익을 위하여 계명과 원칙을 준수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행복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 것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는 분께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의무를 즐거운 특권으로 바뀌게 해줍니다.

좁은 길이 힘들고 불행한 길인가?
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종종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여러가지 제재가 많아요”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종교보다 훨씬 더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제약들이 결혼생활을 불행하게 만듭니까?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신랑 신부가 서로가 주고받은 약속들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저는 갓 결혼한 부부들이 그들의 서약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마냥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침례 의식은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과 결혼하는 예식입니다. 누군가가 새로 침례 받는 한 그리스도인을 실망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얘, 너는 이제 큰일났다. 생각 좀 해봐라. 넌 더 이상 술집에도, 춤추러도 가지 못한다. 넌 주일에 골프 게임도 하지 못하게 되었단다. 이제 너는 여러 명의 남자 친구들과 사귈 수 없게 되었단다.” 새로 거듭난 그 그리스도인은 밝은 미소로 말할 것입니다. “좋아요. 그래도 좋아요. 오히려 그것이 저에게 큰 기쁨인걸요.” 신부의 응답에 대한 설명이 고린도후서 5 14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사랑은 사람들을 움직여서, 자신을 위해 죽으신 분을 기쁘시게 할 일들을 행하게 합니다. 그런 봉사와 순종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어떤 것도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흠정역),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요한계시록 22:14).

사랑이 없는 결혼과 사랑이 없는 종교는 비참함
참된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리고 모순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무아적 봉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떤 부부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망가짐에 따라서, 결혼을 괴로운 속박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들의 잘못은 결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떠나서 그분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그들은 종교적 의무들에 대하여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잘못은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을 부인하면서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9:23). 그분의 말씀은 순종의 길이 힘들고 불행하다는 뜻인가요? 천만에요. 그분께서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생애 중에 마음을 혼란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유혹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우리를 미혹하여 그리스도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육체적, 세상적 유혹들이 있습니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강력한 영향력이 없다면, 그것들의 감정적 유혹이 우리를 압도할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성경 말씀에는 사랑의 권위가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강한 사랑이 나를 그분께 붙들어 매며, 육체적, 세상적으로 접근해오는 사단의 끊임없는 유혹에 대해서 “No!”라고 말하게 합니다. 사단이 던지는 유치하고 어리석은 도전들이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방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항상 그분께 머물러있기로 선택할 것입니다. 첫째, 나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그분을 더 사랑합니다. 둘째, 그분께서는 나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신뢰합니다.

사단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육체나 감정은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압니다. 우리는 의와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지, 마음이나 생각 속에 떠오르는 느낌이나 감정을 근거로 해서 그분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마귀를 섬기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감정에 의해서 속임을 당해서 눈이 멀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하여 죗된 쾌락을 따르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참으로 눈멀고 귀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판단하지 못하는 로봇처럼 자신의 육체적 욕구가 지시하는대로 움직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준수되어야 할 신령한 사랑의 법을 따를 만한 힘이 없는 것입니다. 육체적 욕망들에 대항하여 저항할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육체가 지시하는 대로 생각과 몸을 내어 맡기게 됩니다. 또한 자아 역시 외부적인 자극들이 던지는 감정적 호소에 굴복하게 되어서 육체의 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타락한 의지력은 힘을 잃고 휘청거리면서, 감정과 감각이 요구하는 대로 끌려 다니게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옳은 일보다는 그릇되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이 더 쉽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실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옳고 의로운 일에 대한 확신이 너무도 강력하여서, 아무도 그들에게 죄악적인 일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진리의 말씀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의 기쁜 소식이 있는데, 저는 모든 독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해주고자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고, 거룩하게 될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죄책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넉넉히 해방될 수 있습니다.

승리를 얻는 방법
혹시 나쁜 습관이나 죄를 점진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에 대하여 들어 보셨습니까? 때때로 그것은 “점차적으로 줄이는 방법” 혹은 “노력하면 된다” 등으로 불리워집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런 방법은 별로 효력이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유혹과 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 그 방법이 부분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우리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다가, 1년쯤 후에 나와 마귀를 비교해보면, 그는 여전히 우리보다 강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죄의 세력을 깨뜨릴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항상 우리보다 더 강한 적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패배를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답고 고귀한 비밀로 안내합니다.

이제 승리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요구하기 위한 성경의 4대 계단을 알아보십시다. 우리가 찾아보고자 하는 4개의 성경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놀라운 역사에 대하여 잘 말해줍니다.

첫째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57). 여러분의 마음에 이 기이한 메세지를 깊이 새기십시오. 승리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으며, 어떤 선행을 많이 행한다고 해서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단 한가지는 그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는 일이며, 그 승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사단을 이기고 승리를 얻으신 유일한 분이시며, 우리가 얻는 모든 승리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식욕의 노예이며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이나 담배의 노예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불순한 행위들이나 급한 성격 또는 세속적인 욕망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허우적거립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선물로 주어지는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그 능력을 구한다면 그것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까? 승리를 요구하는 여러분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응답해 주실 것을 전적으로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보증하는 약속으로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성경절은 마태복음 711절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죄에 대한 승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구하는 모든 자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다음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가 구한 후에, 승리를 쟁취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실 분이 아님을 압니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순간, 우리는 약속의 성취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선물에 대해서 감사하며, 마치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성취 느낌이나 표시를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속 안에 있는 능력이 우리의 소원과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세 번째 성경절로 로마서 611절을 보십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여기서“여기다(consider)”라는 말은 “믿는 것 또는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간주하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믿음의 연습은 승리를 요구하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하며, 그런 후에는 그 요구가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승리할 것을 믿어야 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죽은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죽은 자는 성내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이기적인 탐심을 갖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죄에 대해서 승리를 얻고자 한다면,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흡연 습관이나 늘 붙어 따라다니는 죄를 극복하기를 진정으로 소원하십니까? 지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승리를 주리라.” 여러분이 구원받았음을 믿는 한, 여러분은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승리를 위한 능력을 간구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여러분이 승리를 구하는 순간, 승리는 능력의 보급소로부터 여러분의 생활 안으로 즉시 놓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느낄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은 틀림없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있습니다. 러분이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 항상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승리가 너무도 극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들은 죄를 혐오하게 되며, 죄를 증오함으로써 죄가 가져오는 맛을 잃어버립니다. 때로는 흡연 중독자가 흡연에 대한 욕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욕구와 욕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의 순간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하늘로부터 우리의 마음 속으로 전달되어서 솟구쳐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육체와 감각이 우리에게 죄를 행하라고 격렬하게 요구할지라도, 우리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조용한 호소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은 하늘을 찌를 듯이 향상됩니다.

승리를 위한 마지막 단계는 로마서 13 14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자신에게 이르러온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너무도 강해서, 이제는 죄의 세력에 빠지는 일은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예전의“노력”을 통한 방법으로서는 대부분의 경우가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실패에 대한 한 예화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린 철수는 어머니의 명령을 어기고 수영하러 갔었기 때문에 꾸중을 듣게 되었습니다. 왜 어머니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전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아침에 수영복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왜 아침에 수영복을 가지고 갔지?” 철수는,“유혹 받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투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타협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실패할 경우를 위해서 미리 대책을 세웁니다.

지금 말씀 드리는 이런 방법이 실망을 줄 수도 있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일 실패한다면요? 승리가 계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심이 흔들려야 합니까? 천만에요. 우리는 단지 자신의 연약함을 더욱 더 절감해야 하며, 더욱 더 많이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존해야 된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통하여 승리와 능력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을 변경시키지는 못합니다. 받는 자의 편에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약속일지라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분명한 한계선이 예수님의 말씀에 명시되어있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태복음 9:29).

형제자매들이시여! 승리는 단순함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작용합니다. 여러분이 기꺼이 구원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죄를 기꺼이 버리고자 하지 않는 자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구원받는 것과 멸망받는 것, 어느 것이 쉬울까? 1 [강병국목사]


다이너마이트” 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두나미스”(dunamis)를 번역한 것으로서, 그 원어의 의미는 “능력”입니다. 성경에서 “능력”이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묘사하기 위하여 종종 사용되는데,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말했습니다(로마서 1:16).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폭발적 능력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로마서 1장에 기록된 바울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복음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은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과연 그렇습니까?

불행히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무기력하고 나약합니다. 놀라운 능력 대신에 실망과 패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복음을 믿고 있는 것인가요? 왜 그들의 생애 속에 그토록 능력(dynamite, 다이너마이트)이 결여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공언하는 바를 진실로 믿지 않거나, 거짓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짜 복음 만이 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가장 큰 영적 문제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슬프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자신들이 받는 것이 무엇이며, 그 복음이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넘어지게 되며, 자신들의 연약한 인간적 믿음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만을 주장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를 손대지 못함
왜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잃어 버린 채 자신들의 연약한 인간적 믿음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만 주장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 까닭은 그들이 사단이 주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겁쟁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특권에 대하여 그들을 성공적으로 기만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악한 자의 가면을 벗겨서, 그가 주장하는 거짓을 폭로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과 모든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이 믿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그의 거짓 주장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으며, 성도들을 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곳과 그분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는 사단이 꼼짝 못하고 벌벌 떨며 피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단의 능력보다 훨씬 크다는 영광스러운 진리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항상 확신에 차 있도록 하십시다.

물론, 사단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죄인들의 생활 속에 역사하여 그들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믿기 어려운 놀라운 영향력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죄인 속에서 사단을 다시 쫓아내시고 영혼을 다스리실 때에는 선의 능력이 악의 능력을 지배하게 됩니다. 사단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 진리라면, 죄의 세력보다 은혜의 능력이 훨씬 더 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은 이 우주 안의 어떤 존재와도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벌어졌던 대쟁투에서 승리하셨으며, 사단은 패배한 원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우린 멸망 당하는 것보다 구원받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힘든 것은 범죄자의 길이지 순종하는 자의 길이 아님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쉽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인 생활에 따르는 여러가지 제약이 가져오는 무거운 짐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할 것이라는 암시를 전혀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길이 쉽고 가벼울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분을 핍박하던 사울을 만나셨을 때, 그에게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범죄자의 길은 힘들지만, 순종하는 자의 길에는 마음의 평화와 안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자신의 능력을 거짓으로 과장함으로써, 우리를 세뇌하려고 하는 기만을 막아야 합니다. 죄의 지배 하에서는 옳은 일을 하기보다 그릇된 일을 하기가 더 쉽지만, 은혜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죄를 범하는 것보다 의를 행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속한 특권을 주장하지 못합니까? 성경의 저자들은 제한된 사단의 권위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기록하기를,“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로마서 5:20-21).

“죄가 ... 왕노릇한 것같이”라는 표현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어떻게 죄가 왕노릇을 합니까? 죄가 다스리는 권세가 왕같다는 말이지요. 모든 신령한 충동을 거스리는 육체적 본성은 은혜로 마음을 채우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압도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죄보다“더욱 넘쳤”다는 것과“죄가 왕노릇한것같이 은혜도 왕노릇”한다는 사실을 유의하십시오. 분명히 은혜도 죄의 모든 세력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능력(power) 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보증이 아닙니까? 마귀는, 그리스도께 굴복된 생활 속에 역사하는 복음의 폭발적인 힘에 비하면, 너무도 하잘것 없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절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구원받을 것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를 소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진정한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보증하기를,“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신”다 라고 하였습니다(로마서2:4). 그분께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고 계십니까? 물론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32)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십니다. 그분의 선하심은 모든 영혼을 회개로 인도하며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십자가로 이끕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의 부드러운 인도하심과 호소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멸망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사울에게,“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대로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실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디도서 2:11 영문흠정역)났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히브리서 2 9절은, 예수께서“모든 사람을 위하여”죽음을 맛보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고린도후서5:18 영문) 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모두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단 한가지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를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로마서 5:18 영문)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영혼들을 의롭게 하기 위한 예비책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온 세상을 다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지극히 합법적인 칭의(의롭다고 하심)가 영광스런 구속의 경륜으로써“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칭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칭의는 그것이 개인적으로 인식되고 개인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각 개인에게 유효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 편에 있어서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칭의가 그 사람에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로마서 3:24-26).

비록 십자가가 모든 사람에게 칭의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지라도, 오직 “예수 믿는”자들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유의하십시오. 전기 회사가 충분한 전력과 빛을 저의 집에 제공해 주었지만, 제가 집안에 있는 스위치들을 누르지 않고서는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며, 정결케 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모든 능력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저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방금 읽은 성경절, 특히“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이라는 말은 칭의에 대해서 설명하는 표현 입니다. 이 “죄를 간과하심”이나 죄에 대한 용서는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칭의(, 죄를 용서하심, 의롭다 하심)의 경험이 자신들의 생활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들의 영생과 멸망에 대한 운명을 이미 결정해 놓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용서와 칭의(의롭다고 여기심)를 말할 때에, 죄인의 마음에서 일어나야 하는 변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뿐이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변화될 필요가 있는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율법 앞에서 어떠한 은혜나 용서도 받을수 없는 범법자로서 정죄 받는 존재입니다. 율법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의로움도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옳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어떤 능력도 제공받을 수 없습니다. 죄인은 율법의 저주 하에서 정죄받은 상태로 힘없고 무기력하게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저주와 정죄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칭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의 칭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칭의와 용서가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바울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로마서 8 1-4절에서, 그는 칭의가 한 개인을 위하여 무엇을 이루는지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쫓지 않고 그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너무도 연약하여서 율법을 순종할 수 없는 우리의 육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서 무엇인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성경절에서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다카이마”(dakaima)인데, 이 말은 “정당한 요구”를 뜻합니다.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기 위해서는 연약한 육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치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도록 하심으로써, 충분한 해결책을 제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칭의를 입혀주실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과 희생과 죽음이 육체 가운데에 있는 나의 연약함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그분의 계획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들어와 계실 때, 정죄함은 제거되고 죄가 용서되며,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가 우리 생활 속에서 만드는 변화입니다.

용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애버림으로써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경건치 못한 것을 없애심으로써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칭의) 하십니다. 그분은 반역을 제거하심으로써 반역한 죄인을 의롭다(칭의)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때는, 그분의 말씀이 친히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실제가 아닌 무엇을 선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을 정복하신 그분께서, 이제는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도록 승리를 주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