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011

새 성품의 작용 – (떡) 덩어리

비록 덩어리(lump)는 새 성품을 칭하는 명칭은 아니지만, 새 성품의 본질을 묘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덩어리는 옛 성품에서 설명한 바 있는 누룩과는 상반되는 관계에 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에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6,7)

우리는 앞에서, 죄악된 성품의 한 유형으로서 누룩은 선을 악으로 물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반면에 덩어리라는 말은 구제적으로 떡 덩어리(loaf)에 해당되는 말이다. 옛 성품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악을 퍼뜨리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죄악은 대부분의 경우, 다른 이들에게서 배운 결과다. 육에 속한 마음은 다른 이들을 오염시킨다. 다시 말해서 옛 성품은 죄 짓기를 쉽게 배우는 학생과 같고, 자신이 배운 바를 다른 이들에게 전수하려는 욕구가 크다.

사단이 하와에게 죄를 짓게 한 후, 곧 일련의 재앙이 뒤따랐다. 그녀는 그 과실을 보았고, 땄으며, 마침내 먹었다. 그러나 하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사단은 하와의 옛 성품이 계속 죄를 짓도록 부추겼다. 따라서 옛 성품이 지닌, 타인에게 죄를 전염시키는 근본적인 특성에 의해 하와는 그 과실을 아담에게 주었다.

비록 분노, 이기심, 악독, 원한, 적개심과 같이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옛 성품의 특성들은 유년기에 나타나지만, 그 밖의 많은 것들은 다른 이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 거짓말, 욕설, 과음, 간음, 도적질 등과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에 해당된다.

각 세대는 아담과 하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타락상을 다음 세대에게 계속 물려 주고 있다. 물론 이런 죄악을 계속 획책(劃策)하는 자는 사단이다.

사람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될 때, 타락한 누룩 대신에 새 덩어리가 실재하게 된다. 떡 덩어리는 먹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떡 덩어리의 특징을 지닌 신자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때에 그는 새 성품이 소유한 자양분으로 다른 사람을 양육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의 극치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신 데에서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삶을 영위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고 생명의 떡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신자의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의 양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몇 달 동안 고심한 끝에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 어젯밤에 우리가 식당에서 만났던 때를 기억하고 있나? 그때 빌(Bill)의 이름이 우리 대화에 들먹여졌던 것도 기억할 걸세. 나는 자네를 만나기 얼마 전에 빌과 말다툼을 했는 데, 그때는 내 옛 성품이 나를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네. 나는 화가 치밀었고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었지. 그래서 어젯밤에 나는 빌을 헐뜯었을 뿐만 아니라 자네에게도 해()가 될 만한 말들을 많이 지껄인 것이라네.

나는 빌의 아내와 세 아이들의 이름까지 들춰 가면서 그들까지 저주하지 않았는가. 빌이 더 이상 교회 제직으로 봉사할 수도 없고, 주일학교 교사로 일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자네에게 말했었지. 나는 그날 빌의 재판관과 배심원이었지. 내가 관련되는 한, 그는 소송에서 질 수밖에 없었지. 또 나는 나의 그러한 판단을 자네에게 그대로 받아들이게끔 했던 것이라네.

비록 내가 한 말 가운데 어떤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지.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옛 성품에 기인한 연약한 모습들을 지니고 있으니 말일세. 육체의 연약함을 들춰내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이 되어야 마땅한데 말일세.

그 날 내가 자네에게 말한 것 중에는 과장해서 말한 부분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있었다네.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자네까지 빌을 싫어하도록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네. 또 자네가 내게 말한 내용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는 사실도 알지만, 결코 자네를 비난할 생각은 없네. 잘못은 모두 내게 있었으니까.

새 성품의 입장에서 옛 성품에 관련된 행동들을 이와 같이 고백하기란 쉽지 않다. 옛 성품은 교만하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는 새 성품과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옛 성품은, 타인에게 자신의 누룩을 먹이는 일에 민첩하다.

반면에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그들이 지닌 새 성품으로 다른 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권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육에 속한 누룩으로 먹일 수도 있고, 영의 떡으로 먹일 수도 있다.

성령께서는 이 점에 대해 골로새서 46절에서 매우 아름답게 묘사해 주고 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듯이, 은혜는 우리의 입술과 마음의 열매에 맛을 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그들은 우리로부터 옛 성품의 부패상이 아닌, 새 성품에 기인한 축복들을 받게 된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사랑 가운데 생명의 떡을 떼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아 드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우리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죽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마른 뼈들로 가득 찬 이 죽음의 계곡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의 삶에 영적인 소생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영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행위다. 우리가 소유한 새 성품의 이러한 측면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채워 주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일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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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품의 작용 – 신령(神靈)함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리라(고전2:15)

성령은 새 성품의 본질이다. 신령하다는 것은 새 성품을 지닌 결과로 나타난다. 영성의 신령한 측면은 영적인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가 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

신령한 성품이 바라는 것은 계속하여 신령한 것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신령한 것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 속에서 보여 주신 영원한 진리들이다.

신령한 성품은 자기 자신의 태도, 감정 그리고 행동들을 의와 진리와 바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본다.

영적인 진리에 자기 자신을 일키시킬 때에 신령하게 된다. 이 점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감정적인 체험을 계속함으로써 신령하게 되려고 시도하는 신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하루나 한 주간 혹은 한 달 정도는 흥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체험이 지속될 수는 없다.

영적인 성숙은 신령한 사람이 영적인 진리를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살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옛 성품은 우렁찬 사중주곡이나 장엄한 성가곡 혹은 유머 있는 설교를 즐기기도 한다. 또한 옛 성품은 교회의 여러 모임들, 수련회 그리고 종교적인 색채를 띤 여러 활동들을 즐길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옛 성품은 떠들썩한 일들, 많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말미암은 흥분 상태, 그리고 눈물이 핑 돌게 하는 강력한 호소들도 즐길 수 있다. , 옛 성품도 자신이 공격받지 않는 한, 성령의 메시지를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신령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새 성품도 이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지만, 이 일들이 성장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신령한 사람이 성장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뿐이다.

신령한 사람이 중요시해야 할 한가지 일이 갈라디아서 6 1절에 기록되어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옛 성품 때문에 그의 삶에 부정한 일을 범했을 경우,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이 옛 성품으로 인해 초래한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일이 온유함과 두렵고 떨림으로 행해져야 하는 이유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로 똑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옛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임들에서 이렇게 효과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모습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좀처럼 그런 모습을 대할 수 없다. 교회에서 한 지체가 범죄하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는가? 그들이 사랑과 온유함으로 범죄한 그리스도인에게 찾아가서 그가 다시 회복되도록 도와주는가?

그렇지 않다. 그 대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비난과 겁에 질린 모습,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것 그리고 경멸하는 것 등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 수군거리고 분리되며, 죄를 범한 사람이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는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경우를 매우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몸소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처럼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연약한 신자의 죄를 담당하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용서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런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진정으로 연합될 것이다.

신령한 성품이 감당하는 또 하나의 역할이 로마서 111절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에게 부여하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할 책임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측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척도는, 그가 다른 신자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기를 얼마나 갈망하며 얼마나 성공적으로 그 은사를 나누어 주는가에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해야만 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자신의 옛 성품에 지배당해 신령한 은사들이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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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성품의 작용 – 영성(靈性)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믿는 자의 새로운 출생(중생)과 더불어 신자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인은 그때부터 계속하여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영적 존재인 것이다. 신자의 영성은 성령에 의해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영적 존재인 것이다. 신자의 영성은 성령에 의해 양육되어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성령의 첫번째 세 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은 하나님과 맺은 새로운 관계를 시사(示唆)하고 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은사들을 받을 수 없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기쁨으로 그러한 은사들을 받는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하신 명령에 순종하고 계속해서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의 성품은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영성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에 있다.

또한 영성(신령성)은 타인에 대해서 육의 성품과는 다른 태로를 취한다. 육의 성품은 자기 만족이나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속인다. 그러나 영성은 받기보다는 주기를 원한다. ‘오래 참는다는 의미는 참을 수 있는 기간보다도 더 오랜 기간을 기꺼이 참아 낸다는 뜻이다.

영성은 다른 이들의 옛 성품들로 말미암는 짐들을 진다. 영성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그 사람은 다른 이들을 자비롭게 대한다. “자비라는 말은 은혜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자의 영성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악의, 분노, 원한, 복수하려는 생각보다는 선()을 행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을 믿음과 온유와 절제로 양육하심에 따라, 그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동시에 자기 자신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믿음은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에 따라 성장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신자의 영성에 부여하는 성령의 은사는 새로운 겸손과 온유인데, 이것으로 신자의 인격은 성숙한다. 또한 신자는 절제가 자신의 새 성품의 일부가 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절제란 육의 성품이 지니지 못한 어떤 것이다. 종종 육체의 충동들은 술 취함, 약물 남용 그리고 부도덕한 행위들과 같은 죄악된 방법으로 자신의 소욕을 만족시키려 한다.

사람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영성은 성령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은사를 받게 된다. 물론 육의 성품은 이에 대항하여 싸우려 들 것이 분명하지만, 영성은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의 정욕을 다르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절제한 결과 자신의 몸이 전보다 더 건강해졌음을 알게 된다. 어떤 이는 담배를 끊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암()에 걸릴 가능성도 훨씬 줄어든다. 술을 끊게 되면, 간경화증 따위에 걸릴 가능성도 줄어든다.

과식하는 습관을 고치게 되면, 그와 관련된 질병들이 감소할 것이다. 또한 걱정하는 습관을 버릴 수도 있는 데, 그렇게 되면 위궤양, 고혈압, 긴강, 두드러기 그리고 감정적인 흥분에 기인한 다른 많은 질병들도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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