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2009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김영한 교수) - 1.초기(1~2세기) ‘비기독교 자료’가 증언하는 나사렛 예수


1. 초기(1~2세기) ‘비기독교 자료’가 증언하는 나사렛 예수 여태까지 필자는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4차례 다큐멘터리 방영과 그것이 기초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에 관하여 “아니다” “왜곡이다”는 내용으로 비판하는 변증적인 글을 써왔다. 여섯 차례 비판이 끝난 후에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SBS 다큐멘터리의 왜곡된 방영으로 상처를 입었거나 신앙에 혼란이 초래된 분들(특히 젊은이들)에게 치유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에 관하여 역사적인 자료에 기반된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른 신앙은 이성적 논증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의 내면적 증언(testimonium interum spiritus sancti)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은 이성적 증거를 무시하고 맹신하지 않는다. 올바른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다. 올바른 신앙은 역사적이고 이성적인 증거를 요구한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믿기 위하여 사유한다”(credo ut intelligam). 이 글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불변하시고 살아 계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에 관하여 아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초기 비기독교 문서들은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관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성경 및 고대 기독교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1-2세기 기독교 밖의 자료는 역사적 예수가 실재했다는 것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다. 이 자료들은 예수가 죽으신지 수십 년이 지난 주후 60년경에 쓰여진 것이다. 이 자료들은 유대교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쓴 역사기록인 『유대 고대사』, 유대교 법전인 『탈무드』, 트라얀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인 “비투니아에서 온 편지”, 타키투스가 쓴 역사 기록인 『연대기』, 수에토니우스의 문서 등이다. 이 문서들은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사실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들 문서들은 종교적인 문서가 아니라 일반 세속적인 문서들이다. 이러한 초기문서들은 우리의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과 같이 그 시대에 일어난 사실에 관하여 보도하고 있다.

  1세기 유대교 문서들의 증언 60년경에 집필이 시작되어 93년에 완성된 대저작『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에서 귀족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교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나사렛 예수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주후 62년에 투석형으로 죽임을 당한 야고보를 언급하면서 그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동생”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여기서 예수가 이미 그의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로 전제하고 있다(Ant. 20:200).

요세푸스의 대저작의 제18권에는 유명한 ‘플로비우스의 증언’(18:63-64)이 있는데 이 증언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가장 충격적이고 의미있는 증언이다. 그는 다음같이 증언한다: “이 때 예수가 살았는데, 참으로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는 현인(賢人)이었다. 그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많은 희랍인들을 추종자로 얻었다. 그는 메시아였다…”(Ant.18:63). 이것은 요세푸스 자신이 제시한 나사렛 예수에 대한 증언이다. 요세푸스는 예수를 “지혜로운 교사,” “기적을 행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사형 선고받아 당시의 극형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유대교 법전인 탈무드(Talmud)도 예수에 관하여 매우 드물게나마 언급하고 있다. 탈무드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예수를 “사생자, 기적을 일으키는 자, 요술쟁이, 거짓교사”로 비난하고 있으며, 유월절 전야에 나무에 달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2세기 그리스 로마 문서들의 증언주후 112년에 쓰여진 “비투니아에서 온 편지”(Letter from Bithynia)에서 당시 비투니아 총독 젊은 총독 플리니우스(Plinius, AD 61-113)는 트라얀 황제(Kaiser Trajan)에게 기독교인들의 실태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로마 황제의 상에 존경을 표하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물으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신인 것처럼 그에게 바치는 찬송시를 흔히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이들의 오류와 잘못이란 동터기 전에 모이는 고정된 날에 대한 관습과 그리스도에 대한 단어의 형식을 신(神)으로 교대로 외우는 관습이었습니다.

이들은 맹세에 구속되어 있었으며도둑질이나 강도짓이나 강간에 연루되지 않았고, 그들의 말을 깨뜨리지 않았고, 요청될 때 증거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습은 이것을 행하고 난 후 헤어지고 다시 모였는데 그것은 일상적인 해없는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Epistles 10:96). 여기서 플리니우스는 예수가 세상에 살았고 초대교회 신자들에 의하여 신성(하나님의 아들, 인자 등)으로 불렸던 인물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비투니아에서 온 편지”이라고 불리는 플리니우스의 서신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나사렛 예수에 관한 가장 오랜 자료이다. 이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1세기의 기독교인들이 믿었고 생활했던 것을 비기독교적 원천에서 알 수 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AD 55-120)는 『연대기』(Annals)에서 “크레스챤들”(Chrestianer), 곧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이 종파의 창설자 그리스도에게 소급시키고 있다. 그는 예수가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Diberius)치하에서 유대 총독 빌라도의 명령에 의하여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말한다(Annals, 15:44, 2-5). 『연대기』보다 5년 후, 다른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 AD 69-140)는 그의 문서에서 클라디우스 황제(Kaiser Claudius, AD 41-54)가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에 의하여 지속적인 소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말한다(Life of Claudius, 25:4). 여기서 “크레스투스”는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다. 그는 예수를 기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반체제적 유대인들 모임의 지도자로 묘사하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의 문서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립에 의하여 일어난 소요에 관하여 보고하고 있으나 이 소요의 사실적 진상에 관하여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상의 초기 비기독교 문서들에 대한 고찰에서 우리는 다음같은 사실을 확정할 수 있다.

  첫째, 나사렛 예수는 명확히 역사적 인물이다. 1세기경 기독교 밖의 역사적 자료들은 나사렛 예수를 사실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비기독교 문서의 증언들은 거의 예수를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당시 다신론적인 이방 종교가 지배하는 이교도 사회에서 로마 황제에게 참배를 거부하고 박해를 받은 기독교가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이로 보아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티모시 프리크(Demothy Fleke)나 피터 갠디(Peter Gandy)가 공저한 『예수는 신화다』(The Jesus Mysteries)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가 역사성이 없는 가공적 인물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으로 실재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정할 수있다.

  둘째, 나사렛 예수는 당시 유대교와 이방 종교의 다신사회에서 비방을 받았다. 이들 비기독교문서들에서 나타나는 예수에 대한 비방적 언사는 복음서가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행하는 긍정적인 서술에 대하여 평행적으로 가해지는 부정적 서술로 보인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동정녀에서 탄생했다고 쓴 것을 이들 비기독교문서에서는 “사생아”로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소경과 귀머거리, 앉은뱅이, 문둥병자 등 불치병자들을 고친 것을 두고 “괴술을 행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서가 기록한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바다 위를 걸은 사건”을 두고 “요술쟁이”로 비난하고 있다.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라는 권세있는 가르침에 대하여 “거짓교사”로 비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내용과 이들 비기독교문서가 일치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문서들은 예수가 “유월절 전야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기록에 있어서 복음서와 일치하고 있다.

  셋째, 나사렛 예수의 진정한 모습은 그를 추종한 제자들과 복음서 기자들에 의하여 드러난다. 그러나 이들 비기독교적 문서들이 예수의 역사적 사실성을 확증해줄 수는 있으나 ‘이 분이 과연 누구였던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줄 수 없다. 이 답변은 기독교 안에서 찾아야 한다. 말하자면, 예수를 3년이나 따라 다니면서 그와 침식을 같이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 기적을 행하시던 삶의 현장에 같이 있었던 증인들이다. 이들은 12사도들과 4복음서 기자들이다. 이들의 증언은 나사렛 예수 복음사역의 목격자들이었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바울, 요한 등 12사도들과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등 복음서 기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진실된 모습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는원천이며 규범이 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막1:1,눅1:35)), “인자”(마24:30), “그리스도”(마16:16), “이스라엘의 구속자”(눅24:21), “주”(마16:16), “하나님의 말씀”(요1:1) “하나님”(요1:1, 18)으로 증언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상은 신앙의 예수상과 긴밀한 관계 속에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1. 내게 힘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왜 내가 할 수 없겠는가?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2.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나의 모든 것을 채워주신 다고 했는데 왜 내가 부족하겠는가?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3.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인 데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4.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분량만큼 믿음을 주셨는데, 왜 내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데 믿음이 부족하겠는가? 롬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5. 여호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휘할 것인데, 왜 내가 약하겠는가?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단 11: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6.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신데, 왜 내가 사단의 지배를 허용하겠는가? 요일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7.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이기에 하시는데, 왜 내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하겠는가?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8.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지혜가 되셨고, 내가 지혜가 부족하여 구할 때 꾸짖지 아니하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내게 지혜가 부족하겠는가?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 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9.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신실하심과 소망이 있는데 왜 내가 우울하겠는가? 애 3:21-23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10. 나를 돌봐주시는 그리스도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데 왜 내가 염려하고 두려워하겠는가?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11. 주의 성령이 계시는 곳에 자유함이 있는데, 왜 내가 멍에 속에 있겠는가?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2.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 왜 내가 정죄받은 것처럼 두려워하겠는가?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13. 그리스도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떠나거나 버리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내가 외로워하겠는가?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히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4.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 율법의 저주에서 나를 속량하시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는데 왜 내가 저주를 받았거나 불행한 희생자라고 느끼겠는가? 갈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15. 바울 사도처럼 내가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는데, 왜 내게 불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6.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리스도를 나 대신 죄로 삼으셔서 나를 의롭게 하셨는데, 왜 내가 무가치한 사람처럼 느끼겠는가?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 아무도 나를 해할 자가 없는데, 왜 내가 박해를 받는 것처럼 피해의식을 갖겠는가?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18.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나에게 지식을 주시는데, 왜 내가 혼란에 빠지겠는가? 고전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일에 이길 수 있는데, 왜 내가 실패할까 두려워하겠는가?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20. 예수께서 세상과 세상의 환란을 모두 이기신 것을 알고나니 담대함이 있는데, 왜 생활의 어려움으로 고민하겠는가? -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닐 앤더슨의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중에서>

성령의 영감(靈感)을 얻으려면?


성경의 영감에 관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에게 성경은 부분적으로 하나의 신비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진리를 인간에게 전하기로 하셨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 때가 많다.오히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하나님이 말씀하기로 선택하셨다.

  얼마나 큰 기적인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이 이해하며 행동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과 교통(交通)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떻게 인간의 언어가 궁극적인 진리를 담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 안에서 성경을 통해 호흡하실 때 성경의 언어가 우리에게 진리를 전한다고 믿는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우리를 조명(照明)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시는 과정을 설명해주셨다. 제자들은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영적 귀를 가진 자들은 듣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거침돌은 바로 완악한 마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3:9-16).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깨달음을 가로막는 ‘완악한 마음’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성경구절을 읽거나 말하거나 되풀이할 때마다 말씀이 기계적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청중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실 때라도 그분의 존재와 권세가 성공을 보장해준 것은 아니었다. 신적인 교통은 두 사람, 곧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이다.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기적적인 연합 하나님은 성경기자들의 인간적 능력과 관심을 사용하시면서 이들과 함께 일하시고, 이들을 통해 일하셨으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신다.성경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기적적인 연합을 통해 하나가 된다.이것이 큰 신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신비도 인정해야 한다.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하나됨을 상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셨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리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시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무신 것처럼, 성경은 지상적인 동시에 천상적이어서 거대한 교통의 틈을 잇는 다리를 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기 위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비이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할” 때(벧후 1:21), 이들은 천상의 일을 성취하는 능력으로 충만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이들의 모든 달란트와 순종을 사용하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의 말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성별될 만큼 이들은 성령이 충만했고, 하나님의 전망이 이들의 저작을 통해 빛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과 시인들과 역사가들이 평범한 인간 그대로였던게 분명하다. 이들은 각자의 책과 편지를 쓰면서 회상, 편집, 조사, 세세한 선택, 특정 사실의 포함과 배재와 같은 평범한 기술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누가는 자기가 조사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한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눅 1:1-4). 하나님은 성경기자들의 기술을 취하시고, 그것들을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를 포함하여 미래 세대에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셨다. 

성경에서 어떤 부분이 인간적이고 어떤 부분이 신적인가? 성경은 솔기 없는 옷이다.말씀에는 이러한 구분을 불가능하게 하는 통일성이 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성육신의 신비를,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비록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전달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그러나 이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다만 이것을 믿고 영감의 진리 가운데 사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내가)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 119:16).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속을 믿기 위해 믿음을 훈련하듯이 믿음으로 성경에 접근한다. 베드로가 우리 주님께 말했듯이 우리도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말해야 한다 - 이사벨 앤더스 트룹,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세상에 사시러 오셨다. 모든 일이 마땅히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아시는 분이 명백히 모든 형편이 그렇지 못한데 오셨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한 인격, 즉 과거와 미래를 막론하고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어떤 사람과도 다른 인격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에도 앞으로도 영원히 한 인격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시다. 이 한 분이 역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완전히 모든 점에서 인간이셨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태에서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로 잉태되셨다. 마태복음1장18절은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 났더니". 이 사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한가지 점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인간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예수님이 평범한 인간으로 나신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가졌듯이 예수님도 마찬가지셨다. 어린 시절에 예수님은 "자라며 강하여지고"(눅2:40), 점점 나이가 듦에 따라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눅2:52). 금식 후에는 주리신 적이 있고 십자가 상위에 매달리실 때에는 "내가 목마르다"(요19:28)는 말씀도 하셨다. 예수님의 몸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았다. 예수님은 더 이상 약함이나 질병이나 죽음에 매이지 않는 물리적인 인간의 몸을 입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부활한 예수님을 보고 놀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예수님은 하늘에서도 여전히 완벽하시지만 인간과 같은 몸으로 계신다. 예수님의 지성도 우리와 같았다. 예수님은 어느 아이들처럼 배우는 과정을 거쳤다. 예컨대 누가는 예수님의 지혜가 자라갔다고 말한다(눅2:52). 보통 아이들처럼 예수님은 말하는 법, 읽는 법, 쓰는 법, 먹는 법 따위를 배우셨다. 예수님은 인성을 입고 있을 때 자기가 이 땅에 재림할 날도 모르셨다. " 그러나 그날 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한 가지 점만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닮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애 끝자락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요15:10).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일컬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고후5:21)라고 말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벧전2:22) 없으셨다고 말한다. 요한은 "그에게는 좌가 없느니라"(요일3:5)고 말한다.

분명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 이시다(히4:15). 그리고 예수님의 인성은 (예수님의 신성과 더불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딤전2:5) 역할을 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는 또한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분이므로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실 수 있으시다는 뜻이기도 하다(히4:15).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니라"(히2:18).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셨다. 또한 완전한 인간이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은 참된 인성을 입으셨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은 예수님 한 분 안에서 영원히 갈라놓을 수 없이 연합되어 있으면서 영원히 구별되며 각각의 특성을 유지시켜 준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스스로 완전하신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그로 인해 영원히 인성과 결합하셨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결코 다시 볼 수 없을 유일무이한 사람이신 예수님은 무한과 유한을 영원히 결합하심으로서 역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꾸어 놓으셨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 무엇이 바뀌었는가? [찰스 콜슨]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나는 천국에 갈 것이다.그러나 이런 사실이 오늘 내게 어떤 차이를 낳는가?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그러나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이 똑같아 보일 때가 너무나 많다.그래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어떤 차이를 낳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값이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믿은 후,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그분의 길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인정하는 만큼만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완전히 바꿔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삶의 원리들을 따르기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외적인 차이는 전혀 없을 것이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 자신의 태도와 행동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할 말이 많았으며, 그 가운데 칭찬은 한마디도 없었다.그는 여러 가지를 말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말도 했다.“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14).

  사랑이 목표가 된다 예수님은 두 개의 기본적인 계명이 있다고 말씀하셨다.하나는 자신의 전체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마 22:37-39).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최고의 우선순위는, 일류가 되거나 개인적인 이익을 구하거나 인정받거나 인기를 얻거나 심지어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태도에서 일어나야 할 가장 큰 변화는 ‘사랑’이 우리의 첫 번째 목표가 되는 것이다.그리스도의 태도가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지배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목표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본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라운 소식은 하나님이 그분의 본성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우리가 그분이 그렇게 하도록 내맡길 때 약속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 사소한 주제가 아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그 다음 절은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열거한다.이러한 목록을 거의 다 읽은 후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만큼 선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 때 바울은 이 편지를 끝내려고 준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0,11). 어떤 인간의 본성도 충분히 선하지 못하다.그러나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우리는 그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고 자주 변명한다.

 “우리가 옳은 것을 하도록 돕는 힘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가 힘든 상황에서 기꺼이 옳은 것을 하려 할 때 너무 힘들지 않은가?” 그러나 바울은 이미 앞에서 분명히 진리를 지적한 바 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19,20). 

변명에 대해서는 이 한 구절로 충분하다.그런데도 우리는 이 문제를 교묘히 피하기 위해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바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이 하는 걸 좀 봐.나는 그렇게 나쁘지 않아!” 그러나 이것은 사탄의 위험한 속임수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기준과 비교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기준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2,13).

 이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사야와 다니엘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기준을 보고 땅에 엎드렸고 자신들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깨달았다(사 6:5 ; 단 10장). 그러나 하나님은 둘 가운데 어느 하나도 티끌 속에 누워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하나님은 다니엘을 일으켜 세우셨고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다.“하나님이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십니다.”

 이사야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과 내게 하고 계시는 말씀이다.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넘치는 사랑의 동기가 우리의 새로운 태도여야 한다. 

사랑이 우리의 목표라면, 우리의 행동이 변할 것이다.우리는 거의 성경 어디서나 하나님이 추천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을 발견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는 결코 자신의 본성이나 능력으로 이것을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의 본성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4-26).

  당신의 행함의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다른가? (4) [존 페어렐]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내용을 모두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이 성경의 참저자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이 교훈의 적용은 변할 수 있지만, 그것의 본질적 진리는 언제나 동일하다. 우리는 성경뿐 아니라 교회, 친구들, 그리고 책들에서도 기독교적 교훈들에 대해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교훈들에 대해 우리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1)는 바울의 가르침을 적용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듣는 모든 것들을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성경의 말씀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하며,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기본적 진리들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즉,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자신의 구주라고 고백하면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반드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무지와 잘못된 견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약화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오직 해를 끼칠 뿐인 무지와 잘못된 견해가 당신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성경 말씀에 푹 잠겨라.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 특정한 교리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사람들은 아주 적은 지식을 가지고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임을 믿었다. 그들은 그분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분임을 알았고, 그분을 사랑했으며, 그분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다. 그분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삶은 그분과의 관계 때문에 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모든 교리들을 다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는 명백한 진리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길 수 없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자신이 죄악되고 부패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이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다른가? (3) [J.I. 패커]

다섯 가지의 변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변화는 그가 새로운 성품들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고 분명히 밝힌다. 이것들은 주 예수님의 성품들인데, 신자들에게서도 이런 것들이 나타나야 한다. 이 각각의 성품들은 그리스도인이 부딪히는 상황들에 따라 거기에 맞게 적절히 나타나기 마련인데, 만일 마음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면 이런 성품들이 나타날 수 없다.

  마음이 새로워진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변화는 행동의 동기가 새로워지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변화이다.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가르친다.비그리스도인이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적인 마음으로 오직 자기중심적인 동기에 따라 행동하는 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찾고 예배와 찬양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다.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상적인 자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리스도인은 그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세 번째 변화는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는 점이다. 그는 하늘 아버지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기를 원한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데서 큰 기쁨을 느낀다. 회심하지 못한 그의 친구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이 친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성경을 좋아하는 거야?’라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네 번째 변화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사랑이 생기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연장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그리스도인의 다섯 번째 변화는 주님을 알리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증거하기를 갈망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눈에 보일 정도로 확연하다. 그리스도인의 충성심은 자신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다.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에게는 새로운 성품들, 동기들, 성경에 대한 관심,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사랑, 그리고 복음 증거의 열정이 생긴다. 그의 삶의 모든 것들은 그의 삶의 새로운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구심점으로 하여 새로운 형태로 재편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바울은 많은 일들을 행했지만, 그 일들을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행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에서 그분을 사랑하고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다른가? (2) [J.I. 패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결정적 차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난다. 하나는 충성의 대상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변화이다. 우선, ‘충성’에 대해 논의해보자. 내가 이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다른 어떤 단어도 이 단어만큼 강한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 만일 어떤 사람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면 그는 왕을 위해 절대적으로 헌신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왕의 처분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도 이런 충성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당신의 헌신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당신을 그의 뜻대로 완전히 지배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대인들은 이런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 심지어 부부 관계에서도 헌신의 개념이 너무 희박하기 때문에 부부 관계도 충성의 좋은 예가 되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은 현재의 부부들 사이의 헌신보다 강하지만, 이상적인 부부간의 헌신보다는 약하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떨어질 수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 충성의 핵심 개념이다.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부터 이제까지 줄곧 이 개념에는 변함이 없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녔다. 그분이 어디로 가시든지 그들은 따랐다. 그분은 가난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일 밤마다 잠을 어디서 자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어려웠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분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그들은 불평하지 않고 어디든지 그분을 따랐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모범적 예를 제시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그분이 능력이 많으신 분임을 잘 안다.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그분께 맡길 수 있다. 그분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 자신을 그분의 손에 맡긴다. 바로 여기에서 충성심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간다.

우리의 헌신은 사랑과 감사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을 잘 안다. 우리가 자신을 그분의 손에 맡겨드리면 그분이 사랑 가운데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책임지고 지켜주고 영화롭게 하실 것임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께 충성하는 일은 즐겁고 기쁜 일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두 번째 차이점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마음’은 인간의 모든 동기와 목적과 욕구의 근원이요 자아의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가르친다. 우리 의식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개인적 부족함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갖게 된다. 한편 무의식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주신다.

마음에 변화가 생기면, 그에 따른 가시적인 변화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생기는 결과들을 보거나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는 우리에게 미스터리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새로운 방향과 목적을 갖게 된다. 불신자들에게는 이것이 미스터리일 뿐이다. 마음의 변화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필수적인 사항이다.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참신자가 아닐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과거와 전혀 달라진 점이 없이 생활한다면, 나는 그의 신앙고백이 참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믿는다. 생명의 중심인 마음이 변화되었다면, 그 변화의 결과가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다른가 (1)[J.I.패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A, B, C를 통해서 쉽게 정리할 수 있다.
 A는 ‘인정하는 것’(Admit), 즉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나의 죄도 포함되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나의 죄를 인정해야 한다.

 B는 ‘믿는 것’(Believe),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영접하고 믿고 경배해야 한다. 또한 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을 인정해야 한다.

 C는 ‘고백하는 것’(Confess),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과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내가 나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나는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할 수 있다(벧후 3:18).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캘빈 밀러]

기독교 지성 프랜시스 쉐퍼는 「그리스도인의 표지」(the mark of a Christian)라는 그의 책에서 ‘사랑’을 그리스도인의 표지(특징)라고 불렀다. 이 놀랍고 간단한 진리는 교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관계들을 서로 묶어주는 유대의 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실 때 우리는 그분을,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특징이 사랑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님의 내적 통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준은 “성령님의 내적 통제와 인도가 있느냐?”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통제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어떤 것들인가? 성령님의 최우선 관심사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가(성령이)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이 우리 개인들 각자의 직업이나 생활을 인도하실 때 그것은 그 개인들 각자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결국 그분은 우리 각자의 삶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신다.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그들은 물론 우리 안에서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을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들은 우리의 가치관, 윤리의식 및 의지력보다 더 큰 힘이 우리의 삶을 이끌고 나간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랑과 성령님의 통제, 그리고 열망 그리스도인의 이 두 가지 특징, 즉 ‘사랑’과 ‘성령님의 통제’라는 두 특징은 서로 함께 역사한다.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한 사랑으로, 덜 가혹하게 대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성령님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우리를 신뢰하며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고, 우리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단계까지도 발전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지혜의 말씀과 사랑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우리를 통하여 가까이 가셔서 그들을 도우실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강한 열망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성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열망을 가지셨다. 그분은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요 8:29)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나님은 자신이 예수님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이렇게 성부와 성자는 서로를 기뻐하신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열망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려는 지속적인 의지로 표현된다(눅 9:23).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열망은 우리의 모든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는 삶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바울은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화목의 사역’에 동참하게 되며, 사랑 가운데 사람들을 그분께 이끌려고 애쓰게 된다.

  기쁨의 삶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특징이 우리에게 생길 때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리가 기쁨의 삶을 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순교자는 “기쁨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우리의 삶에서 행복을 보기를 원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한 가운데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으며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이 늘 슬픈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충만히 거하시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밭에 감추어진 보물’(마 13:44)에 비유하셨다.

그 비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우리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들은 누구나 마음의 평안을 갈망한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조차 스트레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사야는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라고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소유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개인적 삶이 안정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실패하고 고난을 당할 때조차 사람들은 우리가 좌절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그 답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빌 4:11)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선한 일들을 보기를 좋아할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데 급급한 모습에서 탈피하여 이웃에게 관심을 돌리고 그들을 도울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억울하게 악한 일을 당하는 이웃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볼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볼 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관심을 보이는지를 지켜볼 것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섬김을 받는 것보다는 섬기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찾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하면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 때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히 알게 된다. 예수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마 7:16)고 말씀하셨다. 바울이 지적했듯이, 성령님의 열매는 죄악된 본성의 열매와 완전히 다르다(갈 5:19-24).

  성장하면 자연스러워진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정적 특징들을 보인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니 그리스도인답지 않군요”라고 말할 것이며, 우리의 증거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어떤 다른 존재인 척해서는 안 된다. 즉, 우리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기쁨이 넘치고 긍정적인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나타내도록 온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문제들이나 어려움에 대해 묻는다면 우리는 솔직하게 그런 것들이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동시에 또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깨끗케 하면서 더 나은 단계로 올라가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랑이 많고 평안이 넘치는 척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힘쓸 때 우리의 인격은 자연히 변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려고 힘쓸 때, 그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남을 섬기도록 이끄시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기 때문이다. 선한 열매들을 맺으려고 의도적으로 애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것보다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열매들은 우리가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아서 충성할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에 빠진다면 그들은 작은 행동들 하나하나까지 예의를 차리려고 신경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는다.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려는 열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연히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분을 섬기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성장하게 되면, 그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섬기게 된다. 일단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스스로 영적인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며 연구하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절제와 훈련을 통해서 노력할 때,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우리가 성숙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실 것이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매 순간마다 복종할 때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이렇게 매 순간마다 복종할 때 우리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③ - 챨스 콜슨[기독교 교양]



하나님이 이루신 일 당신이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할수록 그분은 그만큼 당신을 도와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예전 같으면 당신의 혼자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도 이룰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자기의 생명을 지키려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고, 그분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자는 그것을 다시 찾을 것이다. 나의 삶을 돌이켜볼 때 나는 하나님이 분명히 실패를 통해서 큰일을 이루신 것을 깨닫는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실패였던 것이 그분의 손에 의해 사용될 때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되었다. 내가 섬기는 재소자 선교회 ‘프리즌 펠로우십’(Prison Fellowship)은 미국의 수백 개의 감옥을 비롯한 수십 개의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35,0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 이 선교회를 돕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자랑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이 단체를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 단체를 만들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애썼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삶을 통해서 이 단체를 만드셨으며, 전 세계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주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적 방식에 따라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내가 그분의 뜻에 따라 사용되기를 원하면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이 그분 백성을 통하여 큰일을 이루려고 하실 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사용되기를 원하면서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2) [찰스 콜슨]

순종의 결심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성경의 교훈에 따라 철저히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이렇게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일상생활 속에서 이 세상의 풍조에 휘말리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교훈에 따라 살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화(聖化)가 일어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명령들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성화가 일어난다. 성화를 위해 우리는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잠겨야 한다. 성화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의 요구사항들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하며, 그것들에 따라 우리의 행동들을 점점 더 확실히 통제해야 한다. 성화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협동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옳은 것을 받아들이도록 성령님을 통해 도우신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뒤로 물러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도록 기다리라는 말은 아니다. 반면, 옳은 일이라고 여기면 무조건 결정을 내리고 행동으로 나서라는 말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에 협력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하는 가장 큰 요인은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경공부 시간, 개인기도 시간, 기도회 시간, 주일 대예배 시간만이 하나님의 시간이고 다른 시간들은 우리의 시간이라는 오해가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켰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시간이다. 

성경공부 시간이나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은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들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켜줄 뿐이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하루 24시간 지속되어야 한다. 마치 원하는 때에 양복을 입고 또 원하는 때에 양복을 벗고 하듯이 그분을 대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그분을 24시간 입고 있다면 우리의 순종은 반사적 행동이 될 것이다. 이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하루를 열 때 “오늘 하루의 제 삶을 통해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하루를 살면서 순간순간 그분이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라. 그러면 하루의 생활 동안 우리는 그분을 옆으로 밀어놓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아침의 30분을 그분께 드리고 나머지 시간을 나의 것으로 삼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하루 전부를 통제하셔야 한다. 아침 10시쯤 되면 우리의 마음은 아마도 그분에게서 어느 정도 떠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주여, 지금 저를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분의 교훈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는 이 마음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날마다 윤리적인 문제에 직면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그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순간순간 닥치는 문제들에서 그분이 우리의 생각들에 임재하셔서 완전히 통제해주시도록 훈련한다면, 그분은 점점 더 우리의 의사 결정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끼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1) [찰스 콜슨]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국적자’(無國籍者)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순종한다면, 성경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에 따라서 산다면, 당신은 세상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다. 반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들과 밀착되어 있다.

즉, 부와 명예를 우상 삼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충성을 바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 즉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것들을 성경의 눈을 통해 보게 될 것이고, 그럴 때 그것들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이란 권력, 영향력, 경제력, 명성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성공적인 삶이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종종 세상이 원하는 것이나 세상이 보답해주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들을 해야 한다. 종종 세상의 가치관은 부패한다. 이럴 때 기독교는 그것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에 동조함으로써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잘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저항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는 어려움을 겪거나 다른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거나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할 책임을 지게 된다. 예수님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러빙 갓」(Loving God. 홍성사 역간)이라는 책을 썼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 교회에 다니는 것, 선한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성경을 읽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가르치셨다.

  - 찰스 콜슨, 기독교 교양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루이스 팔라우]


언젠가 나는 페루의 수도 리마(Lima)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다. 청중 속에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경찰관들과 민간인들을 죽인 경험이 있는 게릴라 전사였다. 그날 밤 말씀을 들은 그녀는 그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성경 지식은 거의 없었지만, 예수님을 그녀의 구주로 영접했다. 그 후 예수님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으셨다. 이제 그녀는 아침마다 2,000명의 가난한 아이들에게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페루의 빈민가에 학교들을 세우고 교회들을 개척했다. 내가 아는 또 다른 여성이 있다. 그녀는 영국에서 부유한 여성들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훌륭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컬트(occult. 점성술, 마법, 사탄 숭배, 영매와의 상담 등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힘을 얻으려는 시도 및 그와 연관된 여러 가지 현상들)와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런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평안한 삶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비참한 빈민가에서든, 영국의 가장 부유한 지역에서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오늘의 소망이요 미래의 약속인 영생을 체험하고 있다.

  구원과 거듭남, 그리고 영생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 “나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깊은 마음의 평안을 느꼈으며,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확신을 가지고 영원 속으로 들어간다. 이런 설명하기 힘든 평안과 확신을 가지게 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나는 영생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 표현은 생명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구체적으로는 과거의 죄로부터 구원 받은 것, 현재의 사고방식들에서 건짐 받는 것, 그리고 미래와 영원에 대해 확신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모두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나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이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태어나서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듯이, 우리는 또한 영적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분의 피조물로 창조되었지만, 그분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열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우리의 마음 안에 모시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또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생이 있다. 영생의 약속은 우리가 죽을 때 완전히 실현되지만, 지금 이 땅에서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는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로움과 허무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다.영생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위대한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 단계 우리는 각자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시기와 체험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세 단계를 거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나의 죄가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완전함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롬 3:9-23). 그러므로 죄인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사도 요한은 이렇게 분명히 밝힌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 다시 인도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다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전기나 무선전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자세히 몰라도 그것들이 제공하는 편리함을 누리듯이, 그리스도의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것이 주는 구원과 축복을 누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히 증거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세 번째 단계는 개인적 결단을 통해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각각의 개인은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분을 믿고 영접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영생의 선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오면서 아내를 위한 선물을 사왔다고 가정해보자. 아내는 어떻게 해야 그 선물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을 고맙게 받으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즉 받아들이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믿음으로써 당신은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주님을 저의 삶 속에 영접합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하나님의 선물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은 당신의 것이 된다. 개인적 결단은 의지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부하든지 아니면 영접하든지 둘 중 한 가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참신앙 없이 부모가 믿으니까 혹은 친구 따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오직 참신앙만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할 수 있다. 루이스 팔라우, 기독교 교양


삶으로 증거하는 복음만이 역사한다 – 존 쇼오트

삶으로 증거하는 복음만이 역사한다 – 존 쇼오트 삶은 그 자체로 말보다 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성품은 웅변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사역자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언변은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성령님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내면적인 삶을 확실히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당신의 인격적인 성품을 최고의 힘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멋진 말솜씨가 가라질 때에도, 당신의 영향력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있는 능력으로서, 또한 이세상에 바래지 않는 빛으로 남을 것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아름다움)을 우리에게 힘하게 하사”(시90:17)

  능력있는 증거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소책자나 전단지를 통해 증거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효과는 거의 없는 듯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증인들의 간증을 조소하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형편없는 삶을 떠벌려대며 자신들의 죄를 더욱 강화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대항할 수 없는 강력한 논증, 우리로 결코 잠잠히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우리의 체험적 고백,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은혜의 능력에 대한 굳건한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경건한 삶의 아름다움과 능력”입니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경건은, 그가 청중들에게 마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엄중한 무게를 실어주며, 그들의 기억과 양심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증인이 본향에 돌아간 한참 후에도,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삶의 간증은 오래도록 기억되며 계속해서 역사합니다. 그러한 경건한 삶, 그리스도와 같은 삶,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경험함으로써 나오는 간증은 다른 모든 음성이 잠잠해졌을 때에도 말을 합니다. 경건하고 지속적인 삶만큼 그토록 멀리까지 미치는 음성도 없습니다. 그것은 가장 경건치 못한 사람에게 조차도 영향을 끼치며, 전혀 반박할 수 없는 영향력입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행4:14).

  일관성 인간의 전적 타락과 그로 인해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인 것”(마3:10)을 전파하는 사람이 자아로 가득하여,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설파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적합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20:24)을 전파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은혜가 결핍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전혀 말이 안 됩니다. “회개와 죄사함”(행20:21; 눅1:77)을 전파하는 사람이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는 일을 게을리하고, 자신에게 죄를 진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기를 싫어하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고후5:19)을 전파하는 사람이 자리를 다투거나, 화목을 깨뜨리는 행동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2:10)을 전파하는 사람이 우울해하거나, 슬퍼하거나, 비관적인 것 역시 전적으로 불합리합니다. “평안의 복음”(엡6:15)을 전파하는 사람이 안달하거나 일상적인 일로 근심하는 것도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엡1:13)을 전파하는 사람이 자신의 말에 조심성이 없거나, 반쪽 진리를 말한다거나, 심지어 완전히 거짓된 것은 전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딤전1:11)을 전파하는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구하거나, 그것을 즐기는 것 역시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멸망에 처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들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전파하지만 복음을 실천하지 않는 우리 자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요? 

복음을 전파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비록 문맥은 다르지만,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를 빌려와 현재 주제에 적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리스도를 가까이서 따르며 계속 좇았던 그 한 사람은 자신의 삶과 봉사를 다스려온 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고후6:3-4) 우리도 그 본을 좇아 행합니다.

영혼 구령의 열매를 맺는 복음전도자의 특징 – 찰스 스펄전

영혼 구령의 열매를 맺는 복음전도자의 특징 – 찰스 스펄전
 우리 그리스도인의 주요 임무는 영혼을 구령하는 것입니다. 대장장이가 여러 종류의 말 (horses) 과 편자에 대해 정통한 것처럼, 우리도 영혼과 구령에 관한한 정통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일군은 자기가 맡은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서 도루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위대하신 하나님, 모든 일군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위대하신 역사 가운데, 특히 영혼 구령의 아름다운 역사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도구를 갖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옛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만의 도구를 사용하셨습니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시33;9).

더군다나 새 창조에 있어서도 가장 강력한 도구는 여전히 그분의 능력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의 전도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도구가 되기에 합당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사람의 귀와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하는 도구에 되기에 온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이 준비되었는지 스스로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특징1- 거룩함 제가 확신하기론, 영혼 구령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갖추어야할 특성에 대해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거룩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조지 뭘러씨가 멘톤(Mentone)이라는 곳에 왔을 때, 한 번은 그곳에 가서 그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평범한 주일학교 선생이 학생들에게 하는 듯한 설교였지만, 나의 영혼에 그 이상 좋았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풍성한 설교를 들어본 일이 없는 듯 했습니다. 조지 뮐러는 자신의 인격으로써 진리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거기 있었으며 “자기가 믿은 것을 말로 증거 할뿐만 아니라, 자기가 믿은 대로 사는 사람”으로서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방식으로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증거한 모든 말속에는 자신의 믿음의 영광스러운 삶의 각 영혼의 귀와 미음에 호소하는듯했습니다. 거룩함이 그 설교자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여러분도 거룩함을 입어, 우리의 능력이 그 동일한 원천에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특징 2 - 겸손의 심령 그리스도인이 교만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이것 저것을 다 따져봐도 이것보다 마귀를 즐겁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영혼을 구령함에 있어 겸손은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며 보잘 것 없는 자로 여기게 해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능하게 하셔서 열매를 주시면, 우리는 곧바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에 대한 자랑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시인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만일 아무런 열매가 없을지라도, 겸손은 그 실책을 하나님의 주권에 돌리지 않게 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에 돌리게 해줍니다. 영혼 구령자에게 있어서 깊은 겸손에 대한 필요는 그가 참으로 겸손하지 않은 만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실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외눈박이라도 분명히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 특징3 – 살아있는 믿음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열매를 맺는 필수적인 일군의 자질은 –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 바로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복음 증거를 듣는 사람의 영혼을 얻고자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매우 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당신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종종 강단에 서게 되면, “이것은 내가 그분의 이름을 증거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축복을 위해 구한 이상 헛되어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것이고, 내가 전한 메시지가 듣는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있는 향기던가, 아니면 사망을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써 역사하여 그분의 목적이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고 다짐합니다. 주께서 사용하시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실 것을 기대하고, 그러한 확신 가운데 힘을 다해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일에 많은 열매가 맺히고 큰 성취가 있게 되면 그 삶은 전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을 바라고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살아있는 말씀의 씨를 부리고 큰 수확을 거두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식물을 물 위에 던지는 사람은 도로 찾으리라는 기대로 열심히 살피고 깨어 경성할 것이 틀림없습니다(전11:1참조).


그 특징4 – 열심 여러분이 정말로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닫도록 돕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믿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열심이 없다면 사람들로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일은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한밤중에 내집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서, 무슨 일인가 하고 창문 밖으로 내다보게 될 때, 문을 두드린 그 사람이 냉담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당신 집 뒤편에 불이 났어요”라고 말한다면, 나 같으면 그 불에 대해선 상관치 않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물한바가지를 쏟아 붓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 구령을 위해 세상에 자기 사람을 보내시고자 할 때, 그 복음전도자가 문을 두드린 바로 그 사람의 삶의 태도나 정신 자세와 같다고 해봅시다. 영혼을 향한 격렬한 고뇌도 없고, 그 마음과 입술에 “재앙이로다! 큰 재앙이로다!’라는 외침도 없으며, 온전한 헌신도 없는,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정도 없는 그러한 복음전도자를 생각해봅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함께 열심을 내도록 합시다. 온 마음을 다해 주의 일에 힘쓰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 구령은 일찍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 특징5 – 단순함 영혼 구령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또다른 자질은 마음의 단순함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은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높은 신분과 많은 월급을 바랄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일 성공적인 사업이나 좋은 대학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면 여러분은 일생동안 가난한 복음전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저는 여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의 가난하지만 영혼을 구령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 가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지, 우리는 진실로 단순한 마음으로 영혼구령에 힘씀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 특징6 – 전적인 순종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하프 연주자는 자신이 특별히 아끼는 하프로 연주하기를 즐거워하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 하프를 잘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하프도 그의 손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프의 모든 현을 다루듯 여러분을 붙드시면 여러분의 모든 능력은 그분의 손의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하게 되므로, 비로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과, 성령께서 여러분을 쓰시고자 할 때, 그분에 의해 즉시 감화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민감한 상태로 항상 긴장하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적인 순종을 습관화하게 되면 가능하게 됩니다. 오, 하나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러한 자질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