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2011

질문: 주기도문과 대제사장의 기도에 연계성에 대하여 알고싶습니다.

성경말씀을 근거로 하여 살피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대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누가복음 11:1)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를 가르치신 것으로 하여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말하듯 자연스럽고 진실되게 하나님께 아뢰면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지나치게 기도의 격식을 문제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린애가 점차 자라면 부모님께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면서 말하게 되겠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다름이 없습니다. 주기도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그에 맞추어 드리는 것은 표준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빠르게 의미없이 그냥 암송하는 것으로 그치거나 예배끝나는 신호로 이 기도의 내용을  격하시켜서는 안되겠지요.

그내용을 본다면,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것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대상을 부르지 않으면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하는 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하늘처럼 높으셔서 우리의 머리로는 미칠 수 없으신 분입니다.
(2) 하나님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3) 나의 아버지이시면서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형제 자매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가장 친근하게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므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그 이름이 높임을 받도록 그의 자녀들인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8가지 나타나 있습니다.
(1) 여호와 싯케누(tsidkenu) -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 (예레미아 3: 5,6)
(2) 여호와 마카데쉬(m'kaddesh) - "주님은 거룩하시다" (레위기 20:8)
(3) 여호와 삼마(shammah) - "주님은 거기 계신다" (에스겔 48:35)
(4) 여호와 살롬(shalom) - "주님은 평강이시다" (사사기 6:24)
(5) 여호와 라파(rophe) - "주님은 치유하신다" (이사야 53:5)
(6) 여호와 이레(jir) - "주님은 예비하신다" (창세기 22:14)
(7) 여호와 닛시(nissi) - "주님은 나의 깃발이시다" (출애급기 17:15)
(8) 여호와 로이(rohi) -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시편 23:1)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가 되시며(마카데쉬), 우리와 함께 계시며(삼마), 우리에게 평강(사사기)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질병에서 고쳐주시며(라파), 우리의 가는 길을 예비(이레)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승리를 보장하는 깃발(닛시)이 되시며 동시에 나를 인도하는 목자(로이)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 마땅합니다.

3.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가 넘치고 평강(평화)으로 가득차고 희락(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로마서 14:17)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나의 마음 속에, 가정에, 교회에, 그리고 우리가 활동하는 직장에, 온 세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4.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는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와 전혀 다르게 모든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 기도하며 또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5.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앞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관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 자신에 대하여 기도합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필요한 것들을 날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우리의 소원을 기도로 구하면 들어주십니다.

...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6)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6.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죄 용서를 기도합니다. 사람은 누구든 다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죄를 용서받는다는 점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다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마태복음 18:22)

7.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인간은 누구나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가복음 14:38)

그러나 실제 시험은 우리가 전혀 이길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구절을 잘 읽어보십시오.
...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나 만약 우리가 시험에 들었다면 거기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8.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앞에서 드린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 그 다음은 그의 백성된 우리 자신을 위해 구합니다. 사실 우리 자신의 소원도 하늘나라와 그의 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나라와 그 권세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하도록 기도드립니다.

이제 주님의 기도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을 부릅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 : 이름 거룩하게, 나라 임하게, 뜻이 이루어지게
- 우리 자신을 위해 구합니다 :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시험과 악에서 구원받게
- 하나님을 찬양하며 끝을 맺습니다 : 나라, 권세,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낱말의 뜻>
* 오늘날 : 현대어로 고치면 "오늘"이란 의미로 매일 매일을 뜻하고 있다
* 시험 : 어떤 사물의 성질, 능력, 정도 등을 실지로 알아봄
* 시험에 든다 : 시험에서 떨어진다는 의미이며 이는 유혹에 빠진다는 뜻
* 나라이 : "나라가"로 표현하는 것이 현대어에 맞다
* 대개 : 원문에 따르면 이 단어는 "왜냐하면", "그러므로", "이는" 이라는 뜻이다
* 아멘 : 진실로 혹은 간절히 소원한다는 뜻

나아가서 질문하신 분께서 말씀하신 "대제사장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 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17:21- 23). 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가 된다는 말은 똑같다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가 다르지만 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곧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지체는 그 기능이 각각 다르지만 한 몸에 붙어서 한 목적을 위해 삽니다. 그러므로 하나입니다. 그러나 한 지휘자의 지휘 아래 제각기 자기의 소리를 바로 낼 때, 호흡이 맞을 때 훌륭한 화음이 되어 아름다운 합창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라 평화의 매는 줄로 하나를 이룰 때 놀라운 하늘의 합창을 노래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 임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물질적인 어떤 유산을 남겨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실 때 가지고 계셨던 것은 로마 병정들의 손에 들어간 옷 한 벌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돈보다 값지고, 넓은 영토보다 더 좋고 위대한 유산을 주 셨습니다. 그것은 평화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이 평화를 가지고 하나 되는 일에 힘써야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은혜를 꼭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깨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 위하여 기도하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쉽다(A .W 토저)

사탄은 인류에게 가한 최초의 공격은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하와의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사탄은 성공하여 하와와 우리를 넘어뜨렸다. 그날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류는 의의 근원으로 부터 단절된 체 무모하고 파괴적인 생활을 일삼았다.

비천하고 무가치한 그릇된 신 관념보다 인간의 영혼을 흉하게 하는 것은 없다. 바리새인 같은 종파는 하나님을 엄격하고 준엄한 분으로 여겨 높은 외적 수준을 유지하였으나 그들의 의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속박이요 감당할 수 없는 큰 손실이 따르는 것이었다. 바리새인의 하나님은 함께하기 곤란한 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은 냉혹하고 딱딱하며 사랑 없는 것이 되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선한 그리스도인에게도 불행한 삶이 찾아온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엄격하고 많은 것을 바라며 핑계를 용납하지 않는 아버지 앞에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준엄하고 역정을 내시며 변덕스럽고 비위를 맞추기 힘든 분이라 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생활은 분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을 흉내 내는 삶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바른 개념을 유지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을 냉정하고 가혹한 분으로 생각한다면 그를 사랑하지 못한 체 우리 생은 비굴한 공포로 인해 고통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은 분으로 안다면 우리의 속사람은 이 개념을 ?아 갈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분이시고 그의 역사는 한없이 즐거운 것이다. 하나님은 온통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신뢰하는 자는 이 사랑 이외에는 결코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그는 진실로 공의로우시며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시지 아니하시지만, 영원한 언약의 피로 인하여 마치 우리가 전혀 범죄 하지 않은 것처럼 대해 주신다. 그를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인자가 공의를 항상 이길 것이다.

하나님의 교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들과 쉽게 교제하시며, 영혼의 평안과 회복을 주는 제한받지 않는 교제를 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동일하신 분이시며 그 분을 만족시키기는 어렵지만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그를 기쁘시게 하는 단순한 노력을 즉시 기록하시고, 우리가 그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을 아는 즉시 우리의 불완전한 모습은 못 본 척 눈감아 버리신다. 또 우리의 사랑을 새로 창조된 세계의 은하수 보다 더 가치 있게 보신다.

불행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그릇된 신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관념이 그들의 내적 자유까지 파괴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탕자가 돌아왔을 때의 형과 같이 하나님을 우울하게 섬기며 열심도 기쁨도 없는 의를 행하고 기운을 돋구고 넘치는 축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우울한 길을 억지로 가려고 하고,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의를 행해야 하며 최후 심판 날에 이기는 편에 서기 위하여 애써 의를 행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함께 생활하기 참 쉬운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물론 때때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징계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약속받은 아들이 더욱더 자기 아버지를 닮아 보고자 매일매일 찾아 나오는 모습을 보시고 기쁨을 금치 못하시는 아버지의 부드러운 미소가 함께하는 징계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우리의 길을 아신다는 사실 때문에 안절부절못한다. 하지만 이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모든 인내의 절정이시며 친절하고 선한 의지의 본질이시기 때문이다.

선해지기 위해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쁘시지는 않는다.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주 쉽다.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모두 그의 팔에 내어 맡기고 그분은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