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2010

우리 인생을 예배를 중심으로 다시 세우자.

사무엘하 5장에는 역사적인 사건이 나온다.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이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을 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지 일을 한다.
중에 오늘 본문은 번째 사건이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온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주인으로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이때 다윗은 기뻐 뛰고 춤을 추었다
그러나 다윗의 아내 미갈은 그것을 보고 비웃었고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가?

오늘 성경은 미갈을 다윗의 아내로 소개하고 있지 않다.
번씩이나 일관되게 사울의 딸로 소개한다(16, 20, 23).
미갈은 사울 왕국의 일원으로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미갈은 사울 시대의 대변인 격이다.
그러므로 미갈의 관점은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시대의 관점을 대변하는 격이다.
오늘 다윗과 미갈이라는 주인공은 시대의 대립으로 보아야 한다.

다윗시대와 사울시대이다.
다윗시대는 번영과 생명과 평안과 승리의 시대였다.
그에 비해 사울시대는 몰락과 죽음과 불안과 패배의 시대였다.
시대의 차이가 무엇인가?
도대체 시대를 갈라놓은 분기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한가지의 태도에 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다윗이 보여주는 태도와 미갈이 보여주는 태도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감격하고 기뻐한다.
미갈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예배이다. 예배의 차이다.

그러면 예배의 방식 차이인가? 성격과 기질의 차이인가? 아니다.
성경은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16, 21) 했다고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갈은 전혀 본질을 인식하거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다윗시대를 만든 핵심이다.
예배가 시대를 결정하고 우리의 인생을 결정한다.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을 예배를 중심으로 다시 세우자.

기도해야 할 15가지 이유

1.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을 알기 위해( 27:8)
너희는 내얼굴를 찾으라 하실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2.
문제거리에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3.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위해(벧전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귀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자들를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4.
마음의 짐을 벗기 위해( 142:1-2)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5.
하나님께 간구하기 위해( 21:22)
너희가 기도 할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한 것은 받으리라 하시니라

6.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8: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옆에서 기다리는자는 복이 있나니.

7.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5:13)
너희중에 고난 당하는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것이요 즐거워하는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8.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9.
고통에서 구원받기 위해( 107:19)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10.
하나님이 갚아주시기 때문에( 6:6)
너희는 기도할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1.
악에 대항하기 위해(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일을 행한후에 서기 위함이라.

12.
기쁨을 누리기 위해(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13.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64:7)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라.)

14.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 5:13)
너희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 할것이이요 즐거워하는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5.
평강을 얻기 위해(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출처:창골산 봉서방>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깨뜨리는 것이다 존 비비어 & 마크 듀퐁 & 릭 조이너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삶에서 이루시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미리 경고하지만, 목표는 즐겁고 누구나 좋아하며 아픔이 없는 길이 아닐수도 있다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좋은 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깨뜨리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broken)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 51:16~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34: 18)

주님과 친해지려면 우선 상한 심령이 있어야한다. 과정이 즐겁지않더라도  그분의 친밀한 임재하심은 거기에 따르는 고생에 비할수 없다.

다윗은 이것을 어려서부터 배웠다. 우리는 다윗의 상한 심령과 거기서 비롯된 삶을 다윗의 수많은 시에서 엿볼수 있다. 상한 심령은 희생적 삶이나 제사가 아니라 순종으로 얻을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군마는 자기 뜻이 꺾이기전에는 전쟁터에 나갈수 없다.
마구간에서 가장 세고, 빠르고, 재주가 많더라도 일단 깨어지기 전에는 싸울수 없다.
말은 마구간에 남아있고 재주가 덜한 다른 말들이 전쟁터에 나간다.
깨지는 것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과 상관있는 것이다.
말의 주인은 말을 타는 사람이다.
제대로 깨지고 훈련된 말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수 있다.
총알과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싸움터에서도 말은 꽁무니를 빼지않는다.
적들이 칼과 도끼를 휘둘러도 뒷걸음질치지 않는다.
총을 들고 대포를 쏴도 주인의 뜻을 거역하지않는다.
주인이 누구든 한마음으로 복종할뿐이다.
절대로 자기를 지키거나 몸을 사리려하지않는다.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깨짐의 과정은 주님의 처방에 따라 사람마다 독특하다. 과정을 제대로 수료하면 주님이 사람을 통해 하시려는 섬김을 준비가 셈이다. 때는 분만 아신다. 주님은 우리가 새로운 차원에 올라갈 때마다 다시 때에 맞는 깨짐의 과정을 시작하신다.

<출처: 비비어 /순종 >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징계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징계를 통과하고 나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단계 높이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된 우리에게 현재의 안전한 구역에서  나와 우리가 생각하기에 안전하지못하다고 여겨지는 구역으로 들어가라고 촉구하신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인간은 안전을 추구하는 반면에 고통과 희생은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을 먼저 걸어가게 하신후에 온전함과 풍요로움을 주신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행하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믿음 생활에 정도면 됐지 라고 생각하며 만족해하는 어느 시점에서 우리의 안전을 빼앗아 가신다.

심한 경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정도 믿음의 시점에 도달했다 싶으면 우리를 절벽의 끝으로 내어 몰아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신다. 그러나 우리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의 낙하산을 주셔서 안전하게 착륙케 하신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게 되는 법을 배워나가게 만드신다.

인간이란 속기 쉬운 존재인 동시에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존재이다. 예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도, 자신이 마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양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럴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난을 허락하셔서 자신이 현재 어디까지 있는지를 깨닫게 하신다. 그럴때 많은 성도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마치 마귀의 공격으로 생각하여 마귀의 공격을 차단하는 기도를 하여 닥친 어려움을 피해보려고한다. 만약 그런 사람들에게 욥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설명해 보라면 그들은 설명을 못할것이다.

믿는 자들    적지않은 수의 사람들이 어려움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에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러나 초대 교회 시대의 사도들을 보자. 그들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였을 때에 그들의 믿음은 더욱더 증가하였고 어려울 때일수록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많이 받았다.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주도권을 잡고 계신다는 믿음을 잃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신다고까지 생각하였다 (4:28)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55:9)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사이에는 정말 많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때론 인간이 보기엔 단순하고 어리석기까지 방법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도 말하였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5)

사도 바울은 위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손으로 쓰고 있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십자가 형벌이란 로마의 압제하에서 피압박 민족들이 받는 가장 참혹한 형벌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해 낼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런 방법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셨다.

인간이 상상할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경우는 성경에 매우 많다. 라합은 창녀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사용하여 명의 히브리 스파이를 적군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 2:1) 하나님께서는 경수가 끊어진 할머니 사라와 아흔 아홉살된 할아버지 아브라함 사이에 이삭이 생기게하는 일을 하셨다.

인간이란 십자가를 통한 깨어짐의 고통 없이는 사람 앞에서  항상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는 삶을 수밖엔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심령이 깨어진 고통을 경험하게 하신후 비로소 우리를 성숙케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욱 온전해 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수술하신다.
하나님은 마취제를 쓰시지 않고 수술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수술하실 우리에겐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수술을 통해 삶의 덩어리들이 제거된다.
그러나 우리가 수술을 받을 만약에 이때 아프다고 수술 도중에 수술실 밖으로 뛰쳐 나간다면 우리는 덩어리들을 몸에 달고 살아갈 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픈 수술과정을 우리는 깨어짐이라고 부른다. 깨어짐의 과정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깨어짐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꿈과 이상이 산산조작 나고 야망과 자만감이 여지없이 부서지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한 심령이 되게 하심으로 우리 속에 있는 분노와 상처 그리고 교만과 욕망의 덩어리들을 제거하신다.

우리가운데는 자신의 건강과 지혜가 영원할 같은 착각속에서 자신의 능력이 남보다 나음을 은근히 기뻐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적지 않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교만(pride)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이런 마음에 대해 예레미아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17:9)

마음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길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깨어짐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의 참된 모습을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를 거절하고 자신의 잘못된 눈으로만 자신을 과대 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면서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아픔을 겪게 된다.

1998 여름 어느날  나는 환상을 보았다. 나는 환상 가운데 친구로 보이는 사람이 서로 다가서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아름다운 포장지로 조그만 크기의 선물 박스를 들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포장 속에 귀한 것이 들어 있다고 추측한듯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선물의 포장을 뜯었다.

포장속에는 손으로 만든 조그맣고 예쁜 컵이 들어 있었다. 값이 나가는 컵이었다. 그런데 컵에는 금이 있었기에 물을 담아 마시기에는 부적절하였다. 친구는 컵에 금이   것을 알아차렸다. 선물을 받은 친구는 자신에게 금이 컵을 선물하였을까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친구는 자신이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선물을 친구가 실망할까봐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그리곤 컵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금이 가서 물을 담을수 없는 컵을 어떻게 사용할 방법이 없어서 친구는 컵을 다시 박스에 넣어 다락방에 집어넣었다.

장면이 끝나자 다른 환상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컵을 가져다주었다. 주님은 조심스레 컵을 받아들고 사랑스런 컵을 바라보았다. 컵은 장면에서 것과 동일한 금이 컵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환상속에서 나에게
" 너는 컵이 나에게 소중한 컵인 아니?"  라고 물었다.
나는 "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환상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 컵이 깨어져 금이 컵이기 때문에, 안에 나의 영광을 담을수 있단다. 내가 나의 영광을 컵에 담으면 깨어진 사이로 나의 영광이 흘러나와 주위 사람들에게로 나의 영광이 흘러들어가게 할수 있단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일단 자기중심적이 되면 가인이나 사울왕처럼 제일 좋은 것은 자기가 갖고 하나님에게는 그보다 못한것을 바치게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심령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되면 하나님께 최고의 , 자기 자신을 바치게된다. 바로 " 자신 " 이라는 깨어진 컵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노력을 바칠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분의 위대한 계명을 지킬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쳐야만 것이다하나님을 향해 상한 심령을 갖게된다는 말은 우리가 계속해서 고난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말은 우리가 점점 많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대신 하나님을 점점 많이 소유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은 또한 세례 요한이 외쳤던 소리 "그는 흥하여야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겠다" 말을 매일 되새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상한 심령을 갖고 살아간다는 말은 " 나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을 많이 경험하는 삶을 살리라" 라는 결단을 매순간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깨어짐의 상태는 하나님의 임재의 불로 점령당한 상태이다. 깨어짐의 상태는 또한 세상에선 결코 온전히 도달할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보좌에 가고 싶어하는  하나님에 대한 향수병에 걸린 상태이다

<출처:마크 듀퐁/경험>

당신의 길이 힘든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부르심이 고귀하기 때문이다  ( 조이너 )

생명을 얻는 회개를 맛보았습니까?

생명을 얻는 회개란 일반적인 회개와 동일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동일 하고 있다. 일반적인 회개란 돌이켜 뉘우친다는 개념 속에 자신의 과거에 잘못된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 양심적인 죄와 윤리도덕적인 죄를 포함하여 사회적으로 상식적으로 죄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가운데 자신의 직간접적인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잘못된 회개라는 개념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글을 펼쳐 본다. 자신의 인생 속에서 잘못된 방향에서 전환하거나 돌이켜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차원에서 회개를 기독교에서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생명을 얻는 회개에 근접한 내용일까? 하는 의문 속에 새롭게 관찰해야 것이다.

생명을 얻는다는 개념은 단순히 되돌아 자신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차원은 일반적인 종교에서도 얻을 있는 내용이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회개는 그런 차원에서 벗어나 생명을 추구하는 회개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도 이것을 원하시며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런 회개하는 자를 찾고 계시는 것이다.

회개라는 개념을 분석하기 전에 죄라는 개념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죄는 안에 하나님을 존재하심을 모르고 있는 차원을 죄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우리가 짓고 있는 양심적이며 도덕윤리적인 죄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죄의 정의가 되지만 항상 성경은 밖에 있는 존재를 만들어 놓고 안에 있는 존재성을 깨우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도 죄라는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로마서 7장에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조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라는 존재가 안에서 존재하며 죄를 짓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죄와 사망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니라 안에 나를 괴롭게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죄와 사망은 우리에게 생명의 존재와 가치를 상실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생에 억압을 주고 굴레를 씌워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는 사명과 책임 속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을 아는 것을 차단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공허와 혼돈과 흑암이란 무저갱 속에 거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이것을 알고 자유와 해방을 원하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의 나약함을 아시고 친히 우리 가운데 오셔서 능히 구원하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것이다. 분과 함께 사실을 깨닫고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삼일 동안 장사지내었다가 함께 부활하는 것이 바로 생명을 얻게 되는 회개라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믿거나 분에 나에게 하신 업적은 인식차원에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마귀 사탄을 이것을 노려 우리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다른 쪽에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고치거나 귀신을 쫓거나 은사를 발휘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좇아가게 하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생명을 얻게 하려는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빨리 인식해야 한다. 오히려 넓은 길로 인도하는 넓은 문에 불과하다. 진정 좁은 길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거나 보여 지는 길이 아니다. 진정 좁은 길은 길로 통과한 이들이 많아 길이 닳아 우리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길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영화와 비교하기는 뭐하지만 인디아나 존스 3편에서 성배를 찾아 가는 길에 헬라어 알파벳이 적혀 있는데 예수에 대한 알파벳을 영어로 착각하여 J 밟았다가 빠지는 것을 봤다. J 아니라 I 시작되는 예수의 단어를 잘못 인식하여 죽음을 모면하는 것을 봤다. 또한 마지막 통로에서는 길이 없는 낭떠러지인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가 기록한 책에는 아버지가 길이 없는데 걸어가는 모습을 그려 놨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신 앞에 모래를 던졌더니 유리 다리가 놓인 것을 발견하여 건너가는 장면을 것처럼 우리의 길은 암호로 비밀로 만들어 졌다. 이와 같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쉽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은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그렇게 어렵게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험난하여 가기 쉽지 않다고 할지라도 나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있는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길이요, 아버지의 높은 사상에 도달할 있는 유일한 진리요, 아버지와 함께 살아갈 있는 유일한 생명임을 요한복음 14 6절에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는 길이 아니며 혼자 깨닫는 진리가 아니며, 혼자 얻어지는 생명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길이요, 함께 깨닫는 진리요, 함께 나누는 생명임을 절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무작정 가는 길이 아니며 무작정 깨닫는 진리도 아니다. 그리고 무작정 얻어지는 생명도 아니다.

어느 신학교를 간다고 해서 그리고 어느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얻어지는 생명이 아니다. 어느 부흥회를 가서 회개한다고 얻어지는 생명은 더군다나 아님을 명백히 밝힌다. 주님의 세포와 세포가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 지듯이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 안에 들어와 나의 정신과 영혼과 육체에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암송하거나 금식을 하거나 철야를 하고 새벽기도를 한다고 되는 차원이 아니다. 거기에다 목적을 두지 말고 수단으로 주님과 서로 연결하는 관계성 속에 만남을 이뤄져야 한다.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가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사람이 추위가 느끼면 몸이 떨리고 닭살이 돋는데 이유를 질문하면 “추워서, 아니면 몸의 온도가 내려가서” 등등의 답변을 한다.

사실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와 같이 신앙의 몸부림을 생명을 얻는 회개라고 정의하고 싶다. 부흥회 때나 예배시간에 참회기도가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되면 된다. 진정 신앙의 몸부림으로 생명을 얻는 회개를 해야 한다. 아무도 없는 야심한 밤에 아니면 사람의 접근이 없는 곳에서 몸부림을 치는 기도와 절규를 했다고 어느 누구에게 자랑도, 간증도 하지 말고 조용히 혼자서만 해라.

성경을 읽는 것도 설교하기 위해서나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서 읽지 말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 더군다나 교회 차원에서 성경읽기나 통독차원에서가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해서 말씀에 대롱대롱 매달려 표현하기 그렇지만 거머리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빨아 먹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몸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가진 것은 십자가상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었다가 함께 부활하여 함께 보좌에 몸이 되어 연합된 존재가 살아가고 있음을 직시하며 땅에서 사람의 마음 바탕에 하늘을 심는 일에 계속 나가는 것이 현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