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명하심을 따라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도와 영적 생활에 대해서입니다.
[계 5:8]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거문고와 금 대접을 가졌습니다. 그 금대접에는 향이 가득히 싸여 있습니다.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금 대접에 담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기도가 향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금은 거룩한 것이고 향은 향기로운 것입니다. 거룩한 그릇에 담겨 하나님 앞에 바쳐질 기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바쳐질 성도들의 기도는 향입니다. 곧 그 말은 향기로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거룩하고 향기로운 기도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기도에는 합당한 삶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합당한 기도여야 합니다. 이 땅에 속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주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기도의 수준은 자기 욕심을 위한 기도들이 많습니다. 이 땅에 속한 것들이나 혈육에 속한 것들이나 땅에서 잘 되고 성공하려고 하는 기도는 다 똥 같은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모두 다 배설물 즉 똥입니다. 똥을 금 대접에 담아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타락한 세상 교회들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욕심이 무엇인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대부분 세상에 속한 것들을 축복이라 여깁니다. 그것이 사단이 쳐 놓은 덫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이 땅에 속한 것들을 축복이라 여기면 자연히 그것들을 좇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속한 것들이나 육신에 속한 것들이 기도의 목적이 될 때 그것이 타락입니다. 그것은 사단에게 속은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들이 마치 이와같습니다. 경에 이르기를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는데 오늘날의 성도들은 양다리 걸치려고 합니다.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성도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지요? 이 땅에서 성공하거나 부해지면 천국가기 힘들다는데도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갑니다. 그 형제는 이 땅에서 성공하고 천국은 포기하려는 자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왜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잘못 된 가르침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현시대의 목자들이 그만큼 육적이고 썩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목자라고 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목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같으나 실상은 거의가 다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뜻을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는 간단히 진단 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축복으로 여기는가 안 여기는가? 이 땅에서의 성공을 성공으로 여기는가 안 여기는가를 보면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하나 주시고 믿으라 하십니다. 그 성경에는 보이지 않는 천국에 대한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유혹할 만한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단은 세상에 있는 보이는 것들로 끝없이 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고 천국으로 달리기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들을 끊어주고 천국을 향해 달리기 하도록 해야 할 목자들이 이 땅에 재물을 복이라고 여기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지옥으로 끌고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모들이 자녀 교육을 왜 시키는 것입니까? 땅에서 성공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이 땅의 축복과 정 반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존귀에 처한 자들은 하늘 나라에서 비천에 처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눈을 뜨고 보면 열심히 돈 들여 자녀 교육해서 성공하게 하여 영원토록 고통 받게 하는 꼴이 됩니다.
자녀에게 가르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서 할 일은 자나 깨나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알게 하여 잠시잠깐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세상에서 고난을 받더라도 썩어질 것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마땅히 고난을 받으며 영원한 축복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면으로서 혈육에 속한 것들은 다 사단과 옛 뱀에 속한 관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모와 처와 자식과 전토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상숭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족이라도 하나님 보다 사랑하여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이것을 꼭 지켜야 합니다.
신앙이 무엇인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사단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성공하고픈 유혹이 끝없이 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성도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유혹을 받지 않도록 끝없이 하늘에 속한 소망을 제시하고 바라보게 하며 땅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말씀의 검으로 잘라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이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세상에 속한 것들을 바라게 만들고 이 땅에 속한 것들을 복이라고 여기니 그것들을 좇아가게 됩니다. 땅을 바라보게 하는 것과 육신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지옥으로 끌고 가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그릇에 똥 같은 것들을 담지 말아야 합니다. 소경 된 목자들은 그것이 합당한 기도인지 자기 욕심을 위한 육에 속한 기도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단은 끝없이 땅을 바라보게 합니다. 목자들은 깨어 있어서 성도들에게 이것들을 가르쳐 줘야 합니다. 무엇이 영에 속한 삶인지를....... .
주님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옵소서!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바쳐질 기도를 하면서도 세상과 육신에 속한 것들을 구하여 거룩한 금 대접에 똥 같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 향기 나는 삶과 기도이거늘 똥 향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인생들의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마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출처:예수님따라가기>
11/12/2009
날마다 죄와 싸우라! (회개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정원목사님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입니다. 우리가영혼의 기쁨을 누리고 경험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도 죄입니다. 우리는 죄와 주님을 동시에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기쁨을 동시에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와 천국을 동시에 도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서로 철저하게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우리 안에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모신다면 그 때부터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는 항상 기쁨과 평화를 경험하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빛이 있어도 그 빛을 종이나 무엇인가로 가리면 빛의 밝음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의 안에 계셔도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는 삶을 살고 있으면 그 죄가 주님의 임재와 풍성함과 빛의 역사를 가리게 됩니다.
똑같이 주님을 영접했어도 각 사람이 맺는 열매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어떤 사람은 비교적 많은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은 별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주님으로 인하여 많은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의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험상궂고 이기적이며 교만하고 강퍅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안에 있는 주님은 서로 다른 주님일까요?
그럴리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동일한 복음을 받아들여도 마음의 밭에 따라 다른 열매를 맺는 원리와 같습니다. 똑같은 말씀의 씨앗을 받고도 길가의 밭은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며 흙이 얇은 돌밭은 조금 열매를 맺었지만 시험이 올때 곧 사라졌고 가시떨기 밭도 역시 조금 열매를 맺었지만 나중에는 시들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이 많은 열매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씨앗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 밭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복을 받아들이고 동일한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해도 마음 밭에 따라 우리는 다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은 그분을 영접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계시지만 모든 이들의 속에서 동일한 상태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속에서는 아주 편안하게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의 마음속에서는 아주 고통스럽게 거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 밭을 얼마나 청소하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예수님의 보혈을 적용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깨끗히 청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편안하게 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과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마음속의 죄들을 깨끗이 청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매우 불편하게 할 것 입니다. 주님은 빛이시며 죄와 악과 어두움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죄에 대하여 몹시 예민하며 죄를 버리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들은 사소한 말의 실수를 했을 때 상대방에게 사과하며 조심합니다. 사소한 죄를 지었어도 주님께 그것을 고백하며 용서받기를 구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점점 더 영혼이 아름답고 청결해지며 주님의 임재와 영적인 감각에 점점 더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죄에 대하여 아주 둔감합니다.
남들이 자신에게 준 상처나 무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기억하면서도 자신이 남에게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합리화하고 변호합니다. 그러한 이들은 주님의 임재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그는 주님을 가까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죄와 아주 멀리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점점 더 완악해지고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집니다. 이들은 회개해라는 말을 들어도 도무지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너무나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하루 종일 마귀와 싸우며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도 여전히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행위들이 자석처럼 마귀와 악한 영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게 마련 입니다. 썩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는 모기가 가까이 오게 됩니다. 죄는 영혼의 감각을 둔하게 만듭니다. 죄를 용납하는 이들은 많이 기도하고 주님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여도 뭐가 오는지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은혜를 받거나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뭔가 다른 체질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상한 것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아주 둔감합니다.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죄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대학을 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자녀들이 죄를 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가난에 대해서는 고통을 느끼지만 자신의 속에 있는 음란과 정욕과 시기와 거짓에 대해서는 별로 아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이미 중증이며 주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임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은혜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회개에 대한 말씀은 부족합니다. 오늘날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저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그러한 측면만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그렇게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싼은혜를 넘어서 정결함을 구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싫어해야 합니다.
죄의 즐거움과 쾌락을 거절해야 합니다. 공상을 통해서 짓는 죄도 주님은 보고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타협을 해서는 안 됩니다. 타락한 육체는 죄의 즐거움에 끌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건한 영을 가지고 육체를 제어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도님이 외롭다고 하면서 음란죄에 빠질 것 같다고 상담을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주님께 죽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살 바에는 빨리 가는 것이 낫습니다." 성도님은 놀랐는지 무사히 시험을 극복하였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을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는 우리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원수입니다. 그 원수를 우리가 용납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를 십자가의 원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경향이 어떻든 우리는 그 사조를 따라가면 안 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그런 문제보다 죄를 끊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무서운 것입니다.
부자의 집 앞에 살았던 나사로는 가난하고 병들었지만 죽은 후에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아프고 가난해봤자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영원토록 저주받은 삶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은 죄가 있는 없든 믿음을 가지고 선포하고 부하게 되는것을 강조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난이나 질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기심임 교만함이며 완악함이며 더러움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가르치고 있는 넓은 길을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그것은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영혼의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길은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지 않지만 내적인 행복감이 가득합니다. 그 길은 주님의 영광과 은총이 가득하게 임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형통이나 성공이나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라면 우리는 죄의 문제와 심각하게 씨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유명한 대학에 가려고 온갖 대가를 지불하며 고통을 겪는데 죄의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치열하게 투쟁하고 기도해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승리!' '이미 죄에서 이겼다!' 그렇게 선포하는 많은 이들이 실제의 삶에서는 많은 죄를 짓고 넘어집니다.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하며 치열한 투쟁을 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비관할 필요는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지속으로 싸워야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미 모든 죄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죄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들은 남에게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내는 것이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사소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지나친 자기 연민이나 근심이 죄가 아닌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도 죄입니다. 사소한 죄를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아주 조그만 먼지가 눈 속에 들어가도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죄는 그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이들은 사소한 죄를 통해서도 고통을 겪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나친 죄책감에 빠져서 항상 우울하고 비통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을 심어주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복음과 예수님의 보혈을 붙잡고 죄를 고백하며 적용하는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맑은 양심과 기쁨과 후련함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기쁨에 대해서 경험하고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죄를 처리해나가야 할까요? 회개는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자세하게 쓰려면 한 권의 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간단한 방법은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주님..제가 무엇을 회개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의 삶에서 주님이 거슬리는 것이 있습니까?"
또한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나는 내속에서 죄라고 알면서도 용납하는 것이 있는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경우에 여러 가지의 일들이 떠오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고백하면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지 않다는 것을 깊은 의식 속에서 느낍니다. 우리가 '이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없어.' 하고 말하더라고 깊은 속에서는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고 화를 내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상대방이 잘못한 것 같은데 그래도 속으로는 찝찝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 행동한 것을 우리의 양심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계속 합리화하고 변호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계속 하고 있으면 정말 양십이 마비되고 영감이 죽게 됩니다. 남의 죄에 간섭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이 그랬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은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남의 죄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고백하고 주님의 보혈에 씻어서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내 모든 죄를 씻어주십시오' 이렇게 한번에 몽땅 회개하는 것은 게으르고 무성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뷔페 음식점에 가서 모든 음식을 한 입에 넣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는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죄의 씻음을 귀찮아하지 말고 하나하나 정결케 되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하나 씩 하나 씩 죄를 고백하고 주께 용서를 구하며 보혈을 적용할 때 문자 그대로 우리의 영혼은 정결해지게 됩니다. 그것은 느낌으로도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고 선명하고 예민해집니다.
찬양을 해도 전과 다르고 기도를 해도 주님과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며 성경을 읽어도 감동과 기쁨이 많이 오게 됩니다. 그것은 죄와 정화를 통해서 영혼이 아름답고 맑아졌기 때문입니다. 죄를 고백하면서 실제적인 행동을 주님이 요구하실 때는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는 마음의 고백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사람에게 행동으로 잘못한 죄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 때 행동으로 잘못을 시인했을 때 그는 더 깊은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초신자인 어떤 분이 복음을 받은 후 성경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 데 성경을 읽다가 밤에 외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어디를 가느냐고 묻자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에게 전에 잘못한 일이 생각나서 사과하러 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씀의 감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곧 영혼이 맑아지고 밝아지며 주님의 풍성하신 은혜에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의 깊은 은총을 경험하지 못하고 영혼이 맑지 않은 이들은 대체로 죄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습니다.
간혹 이러한 신문 기사를 읽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몇 십 년 전에 가게에서 도둑질을 했다고 하면서 그 가게의 주인에게 그 돈의 몇 십배를 같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양심은 오랫동안 괴로웠을 것이고 그 갚는 돈보다 그 죄책감에서 해방된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즐거이 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갚는 자도 기쁘고 받는 자의 마음도 흐뭇해지게 됩니다. 그러한 기사를 읽는 이들의 마음도 즐거워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 문제 처리도 이렇게 좋은 것이거늘 하물며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정화를 위하여 주님께 회개하고 사죄하며 용서함을 받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죄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죄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사람들은 죄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죄를 짓다가 잡혀서 망신을 당하거나 벌을 받는 것은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그 수준에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 자체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로 죄와 함께 하지 않고 죄를 변호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성결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오늘날 어떤 사역자는 죄를 회개하라는 말보다 치유 받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사람에게도 당신의 환경이 나빠서 그런 것이니 내적 치유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내적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경우도 많이 있겠지만 사람에게 근본적인 상처가 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고 죄의 문제이며 완악함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타락했으며 이스라엘은 환경이 나빠서 광야에서 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죄와 불순종과 거스름으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맑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회개를 즐겨야 합니다. 날마다 사소한 죄를 찾으며 그 벌레들을 잡아 죽여야 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에 저주와 재앙을 가져오는 것들입니다. 암병보다 무서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 죄들을 우리의 삶에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부디 죄와 싸우십시오.
투쟁하십시오. 간절하게 강력하게 죄와 씨름하십시오. 사소한 죄도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가만히 두면 그들은 점점 커집니다. 그렇게 싸울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점점 더 맑고 예민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과 천국의 임재에 대해서 점점 더 열어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최초로 말씀을 전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하셨습니다.(마4:17)
회개는 천국의 문입니다. 부디 회개를 통하여 천국의 그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할렐루야.
-주님의 마음 주님의 임재속으로 중에서-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우리 안에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모신다면 그 때부터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는 항상 기쁨과 평화를 경험하며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빛이 있어도 그 빛을 종이나 무엇인가로 가리면 빛의 밝음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의 안에 계셔도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는 삶을 살고 있으면 그 죄가 주님의 임재와 풍성함과 빛의 역사를 가리게 됩니다.
똑같이 주님을 영접했어도 각 사람이 맺는 열매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어떤 사람은 비교적 많은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은 별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주님으로 인하여 많은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의 열매를 맺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험상궂고 이기적이며 교만하고 강퍅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안에 있는 주님은 서로 다른 주님일까요?
그럴리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동일한 복음을 받아들여도 마음의 밭에 따라 다른 열매를 맺는 원리와 같습니다. 똑같은 말씀의 씨앗을 받고도 길가의 밭은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며 흙이 얇은 돌밭은 조금 열매를 맺었지만 시험이 올때 곧 사라졌고 가시떨기 밭도 역시 조금 열매를 맺었지만 나중에는 시들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이 많은 열매를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씨앗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 밭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복을 받아들이고 동일한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해도 마음 밭에 따라 우리는 다른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은 그분을 영접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계시지만 모든 이들의 속에서 동일한 상태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속에서는 아주 편안하게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의 마음속에서는 아주 고통스럽게 거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 밭을 얼마나 청소하였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예수님의 보혈을 적용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깨끗히 청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편안하게 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과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마음속의 죄들을 깨끗이 청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매우 불편하게 할 것 입니다. 주님은 빛이시며 죄와 악과 어두움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죄에 대하여 몹시 예민하며 죄를 버리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들은 사소한 말의 실수를 했을 때 상대방에게 사과하며 조심합니다. 사소한 죄를 지었어도 주님께 그것을 고백하며 용서받기를 구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점점 더 영혼이 아름답고 청결해지며 주님의 임재와 영적인 감각에 점점 더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죄에 대하여 아주 둔감합니다.
남들이 자신에게 준 상처나 무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기억하면서도 자신이 남에게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합리화하고 변호합니다. 그러한 이들은 주님의 임재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그는 주님을 가까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죄와 아주 멀리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점점 더 완악해지고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집니다. 이들은 회개해라는 말을 들어도 도무지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너무나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하루 종일 마귀와 싸우며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도 여전히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행위들이 자석처럼 마귀와 악한 영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있게 마련 입니다. 썩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는 모기가 가까이 오게 됩니다. 죄는 영혼의 감각을 둔하게 만듭니다. 죄를 용납하는 이들은 많이 기도하고 주님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여도 뭐가 오는지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은혜를 받거나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뭔가 다른 체질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상한 것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아주 둔감합니다. 개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죄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별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대학을 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자녀들이 죄를 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가난에 대해서는 고통을 느끼지만 자신의 속에 있는 음란과 정욕과 시기와 거짓에 대해서는 별로 아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이미 중증이며 주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임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은혜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회개에 대한 말씀은 부족합니다. 오늘날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저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그러한 측면만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그렇게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싼은혜를 넘어서 정결함을 구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싫어해야 합니다.
죄의 즐거움과 쾌락을 거절해야 합니다. 공상을 통해서 짓는 죄도 주님은 보고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타협을 해서는 안 됩니다. 타락한 육체는 죄의 즐거움에 끌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건한 영을 가지고 육체를 제어해야 합니다.
어떤 여성도님이 외롭다고 하면서 음란죄에 빠질 것 같다고 상담을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주님께 죽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살 바에는 빨리 가는 것이 낫습니다." 성도님은 놀랐는지 무사히 시험을 극복하였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을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는 우리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원수입니다. 그 원수를 우리가 용납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를 십자가의 원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경향이 어떻든 우리는 그 사조를 따라가면 안 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그런 문제보다 죄를 끊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무서운 것입니다.
부자의 집 앞에 살았던 나사로는 가난하고 병들었지만 죽은 후에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아프고 가난해봤자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영원토록 저주받은 삶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은 죄가 있는 없든 믿음을 가지고 선포하고 부하게 되는것을 강조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난이나 질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기심임 교만함이며 완악함이며 더러움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가르치고 있는 넓은 길을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그것은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영혼의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길은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지 않지만 내적인 행복감이 가득합니다. 그 길은 주님의 영광과 은총이 가득하게 임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형통이나 성공이나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라면 우리는 죄의 문제와 심각하게 씨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유명한 대학에 가려고 온갖 대가를 지불하며 고통을 겪는데 죄의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말 치열하게 투쟁하고 기도해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승리!' '이미 죄에서 이겼다!' 그렇게 선포하는 많은 이들이 실제의 삶에서는 많은 죄를 짓고 넘어집니다.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어있어야 하며 치열한 투쟁을 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비관할 필요는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지속으로 싸워야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미 모든 죄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죄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들은 남에게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내는 것이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사소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닌 줄 압니다. 지나친 자기 연민이나 근심이 죄가 아닌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도 죄입니다. 사소한 죄를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아주 조그만 먼지가 눈 속에 들어가도 우리는 고통을 느낍니다.
죄는 그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이들은 사소한 죄를 통해서도 고통을 겪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나친 죄책감에 빠져서 항상 우울하고 비통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죄책감을 심어주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복음과 예수님의 보혈을 붙잡고 죄를 고백하며 적용하는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맑은 양심과 기쁨과 후련함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기쁨에 대해서 경험하고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죄를 처리해나가야 할까요? 회개는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자세하게 쓰려면 한 권의 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간단한 방법은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주님..제가 무엇을 회개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의 삶에서 주님이 거슬리는 것이 있습니까?"
또한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나는 내속에서 죄라고 알면서도 용납하는 것이 있는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경우에 여러 가지의 일들이 떠오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고백하면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지 않다는 것을 깊은 의식 속에서 느낍니다. 우리가 '이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없어.' 하고 말하더라고 깊은 속에서는 편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않고 화를 내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상대방이 잘못한 것 같은데 그래도 속으로는 찝찝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 행동한 것을 우리의 양심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계속 합리화하고 변호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계속 하고 있으면 정말 양십이 마비되고 영감이 죽게 됩니다. 남의 죄에 간섭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람이 그랬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은 주님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남의 죄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자신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고백하고 주님의 보혈에 씻어서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내 모든 죄를 씻어주십시오' 이렇게 한번에 몽땅 회개하는 것은 게으르고 무성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뷔페 음식점에 가서 모든 음식을 한 입에 넣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는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죄의 씻음을 귀찮아하지 말고 하나하나 정결케 되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하나 씩 하나 씩 죄를 고백하고 주께 용서를 구하며 보혈을 적용할 때 문자 그대로 우리의 영혼은 정결해지게 됩니다. 그것은 느낌으로도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고 선명하고 예민해집니다.
찬양을 해도 전과 다르고 기도를 해도 주님과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며 성경을 읽어도 감동과 기쁨이 많이 오게 됩니다. 그것은 죄와 정화를 통해서 영혼이 아름답고 맑아졌기 때문입니다. 죄를 고백하면서 실제적인 행동을 주님이 요구하실 때는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는 마음의 고백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사람에게 행동으로 잘못한 죄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 때 행동으로 잘못을 시인했을 때 그는 더 깊은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초신자인 어떤 분이 복음을 받은 후 성경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 데 성경을 읽다가 밤에 외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어디를 가느냐고 묻자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에게 전에 잘못한 일이 생각나서 사과하러 간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씀의 감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곧 영혼이 맑아지고 밝아지며 주님의 풍성하신 은혜에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의 깊은 은총을 경험하지 못하고 영혼이 맑지 않은 이들은 대체로 죄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습니다.
간혹 이러한 신문 기사를 읽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몇 십 년 전에 가게에서 도둑질을 했다고 하면서 그 가게의 주인에게 그 돈의 몇 십배를 같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양심은 오랫동안 괴로웠을 것이고 그 갚는 돈보다 그 죄책감에서 해방된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즐거이 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갚는 자도 기쁘고 받는 자의 마음도 흐뭇해지게 됩니다. 그러한 기사를 읽는 이들의 마음도 즐거워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 문제 처리도 이렇게 좋은 것이거늘 하물며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정화를 위하여 주님께 회개하고 사죄하며 용서함을 받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죄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죄에는 형벌이 따릅니다. 사람들은 죄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죄를 짓다가 잡혀서 망신을 당하거나 벌을 받는 것은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그 수준에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 자체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로 죄와 함께 하지 않고 죄를 변호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성결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오늘날 어떤 사역자는 죄를 회개하라는 말보다 치유 받으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사람에게도 당신의 환경이 나빠서 그런 것이니 내적 치유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내적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경우도 많이 있겠지만 사람에게 근본적인 상처가 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고 죄의 문제이며 완악함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타락했으며 이스라엘은 환경이 나빠서 광야에서 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죄와 불순종과 거스름으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맑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회개를 즐겨야 합니다. 날마다 사소한 죄를 찾으며 그 벌레들을 잡아 죽여야 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에 저주와 재앙을 가져오는 것들입니다. 암병보다 무서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 죄들을 우리의 삶에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부디 죄와 싸우십시오.
투쟁하십시오. 간절하게 강력하게 죄와 씨름하십시오. 사소한 죄도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가만히 두면 그들은 점점 커집니다. 그렇게 싸울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점점 더 맑고 예민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과 천국의 임재에 대해서 점점 더 열어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최초로 말씀을 전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하셨습니다.(마4:17)
회개는 천국의 문입니다. 부디 회개를 통하여 천국의 그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할렐루야.
-주님의 마음 주님의 임재속으로 중에서-
교만한 영을 대적하십시오
교만은 지옥의 중심에 속하는 악입니다. 모든 종류의 죄를 짓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나 교만한 사람들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본질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창기는 죄인이기는 했으나 구원과 천국에 이를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마귀의 자식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하고 경건하고 신앙에 열정적이고 기도도 많이 하고 금식도 하고 말씀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가르치고 모든 선행에 앞장섰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았지만 오직 주님께는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른 사람들처럼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며 그들의 중심에 있는 교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병에 자각증상이 있지만 교만에는 자각 증상이 없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에 열심이므로 자신의 믿음이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리를 보고 자기는 그들과 다르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항상 자기는 남들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높은 자리에 앉고 남들의 인정을 받으며 존경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이들의 영혼은 지옥에 아주 가까이 있지만 이들은 평생을 신앙적으로 존경을 받고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교만과 악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이 지옥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만처럼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살인죄나 간음죄는 가벼운 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들은 인간적인 죄이지만 교만은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자기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적인 사람들 가운데 교만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영적이고 은사적인 경험을 많이 한 이들중에도 교만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부족하고 체험이 부족한 자들을 무시합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대단하게 여겨지던 이들이 비극적인 심판을 받는 것을 보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무식하고 부족하다고 업신여김을 받던 사람이 높은 곳에 주님과 함께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성경의 많은 곳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주님께 속한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들의 사랑과 존경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 주님께 충성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면서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감히 면류관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께 속한 사람의 특성입니다.
나는 어디서 영성훈련을 받고 어디서 무엇을 배웠다는 이들이 자신의 믿음이 좋은 줄 알고 거들먹거리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심판을 면할 수 없을것입니다. 여기저기서 훈련을 받고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교만한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살아있을 때에 회개해야 주님께 버림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교회에서 봉사하던 이들이 여러 영적인 단체에서 훈련을 받으면 높은 마음을 가지게 되고그 다음에는 사역자를 비판하며 결국 교회를 떠나거나 분파를 만드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교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도 좋고 참 신실하던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사람이 참 이상해지고 강팍해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평신도였을 때는 참 좋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것 역시 신학을 하면서 높은 마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특별하게 기름 부음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 교만한 영이 들어와서 사람이 망가지게 됩니다.
이 부분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종들이 왜 가라지가 생겼느냐고 묻자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마13:28) 주님은 사랑과 빛과 진리와 아름다움을 심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원수가 뿌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종 악인데 가장 무서운 것이 교만입니다. 그리고 그 씨를 받아먹으면 가라지가 됩니다. 그는 지옥 백성이 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고 판단하며 교회를 대표하는 사역자를 비난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영적으로 높고 깊은 경지에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이들은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자들입니다. 아직 생명이 있을 때에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마귀에게 속는가 하면 마귀의 음성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속삭입니다. ‘너는 진리를 깨달았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 없다’
'너는 정말 대단한 종이다. 내가 너를 나의 깊은 보좌에 이끌리라‘
‘너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다 사탄이다. 저 목사는 너를 핍박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를 세계적인 사람으로 크게 사용하고 높이리라’
‘저 교회는 잘못된 교회다. 바른 교회라면 너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마귀의 유혹은 아주 유치한 것이지만 자신이 충분히 주님께 드려지지 않고 자신이 영광을 받기 원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점차로 마귀의 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높여줌을 아주 즐깁니다. 그들은 자신을 높여준 사람들의 말을 길이길이 기억하고 간직합니다. 누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고 이렇게 인정해주었다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전파합니다. 그러한 이들은 마귀에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마귀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유혹하고 높여서 그 영혼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보다 자기를 더 생각하기 때문에 마귀의 계략을 분별할수 없습니다.
‘나는 이런 놀라운 것을 체험했다.’
‘나는 이런 수준에 있다.’
‘***은 아직 멀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이들을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말속에 은근한 교만이 들어있는 이들을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아주 멀리 있습니다. 주님께 속하고 천국에 속한 이들은 자신을 가장 부족하고 낮은 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이들에 대한 비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찬사와 칭찬으로 인하여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오직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려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영광을 얻느니 차라리 지옥을 선택할 것입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은 오직 항상 주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리며 거기에서 힘과 능력을 얻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면 몹시 고통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국인과 지옥인의 차이입니다. 지옥인은 사람에게서 높임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외식을 하게 되는 것이며 천국인은 중심을 보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에 사람의 시선이나 체면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부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항상 가라지를 뿌립니다. 사람의 마음에 가라지를 뿌립니다. 할수만 있다면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먹혀들어가면 그 영혼을 사로잡아 지옥으로까지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교만을 증오하십시오. 교만을 저주하십시오.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순결하게 깨어있으십시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마귀가 당신을 높여줄때 선포하십시오.
“마귀야! 물러가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부족한 주님의 종이다!”
그렇게 외칠때 마귀들은 물러갈 것입니다. 마귀는 겸손한 자를 당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영을 대적하십시오. 거기에서 모든 재앙이 오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교만에서 지키십시오. 천국에서 떨어지지 않고 주님께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오직 교만을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지 마십시오.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입니다.
부디 이 영들과 대적하며 싸우고 승리하십시오.
당신이 교만의 영을 물리치고 이길수 있다면 당신은 다른 대부분의 마귀의 공격을 잘 분별하고 물리칠수 있을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할렐루야! -정원목사님의 '대적기도의 적용원리 中-
세리와 창기는 죄인이기는 했으나 구원과 천국에 이를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마귀의 자식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하고 경건하고 신앙에 열정적이고 기도도 많이 하고 금식도 하고 말씀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가르치고 모든 선행에 앞장섰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았지만 오직 주님께는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다른 사람들처럼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며 그들의 중심에 있는 교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질병에 자각증상이 있지만 교만에는 자각 증상이 없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에 열심이므로 자신의 믿음이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리를 보고 자기는 그들과 다르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항상 자기는 남들에게 가르칠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높은 자리에 앉고 남들의 인정을 받으며 존경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이들의 영혼은 지옥에 아주 가까이 있지만 이들은 평생을 신앙적으로 존경을 받고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교만과 악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이 지옥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만처럼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이에 비하면 살인죄나 간음죄는 가벼운 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들은 인간적인 죄이지만 교만은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것이며 오직 자기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적인 사람들 가운데 교만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영적이고 은사적인 경험을 많이 한 이들중에도 교만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부족하고 체험이 부족한 자들을 무시합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대단하게 여겨지던 이들이 비극적인 심판을 받는 것을 보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무식하고 부족하다고 업신여김을 받던 사람이 높은 곳에 주님과 함께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성경의 많은 곳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주님께 속한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들의 사랑과 존경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들은 목숨을 바쳐 주님께 충성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면서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감히 면류관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께 속한 사람의 특성입니다.
나는 어디서 영성훈련을 받고 어디서 무엇을 배웠다는 이들이 자신의 믿음이 좋은 줄 알고 거들먹거리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심판을 면할 수 없을것입니다. 여기저기서 훈련을 받고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교만한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살아있을 때에 회개해야 주님께 버림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교회에서 봉사하던 이들이 여러 영적인 단체에서 훈련을 받으면 높은 마음을 가지게 되고그 다음에는 사역자를 비판하며 결국 교회를 떠나거나 분파를 만드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교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도 좋고 참 신실하던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사람이 참 이상해지고 강팍해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평신도였을 때는 참 좋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것 역시 신학을 하면서 높은 마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특별하게 기름 부음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면 교만한 영이 들어와서 사람이 망가지게 됩니다.
이 부분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종들이 왜 가라지가 생겼느냐고 묻자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마13:28) 주님은 사랑과 빛과 진리와 아름다움을 심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원수가 뿌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종 악인데 가장 무서운 것이 교만입니다. 그리고 그 씨를 받아먹으면 가라지가 됩니다. 그는 지옥 백성이 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고 판단하며 교회를 대표하는 사역자를 비난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영적으로 높고 깊은 경지에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이들은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자들입니다. 아직 생명이 있을 때에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마귀에게 속는가 하면 마귀의 음성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속삭입니다. ‘너는 진리를 깨달았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 없다’
'너는 정말 대단한 종이다. 내가 너를 나의 깊은 보좌에 이끌리라‘
‘너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다 사탄이다. 저 목사는 너를 핍박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를 세계적인 사람으로 크게 사용하고 높이리라’
‘저 교회는 잘못된 교회다. 바른 교회라면 너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마귀의 유혹은 아주 유치한 것이지만 자신이 충분히 주님께 드려지지 않고 자신이 영광을 받기 원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점차로 마귀의 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높여줌을 아주 즐깁니다. 그들은 자신을 높여준 사람들의 말을 길이길이 기억하고 간직합니다. 누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고 이렇게 인정해주었다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전파합니다. 그러한 이들은 마귀에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마귀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유혹하고 높여서 그 영혼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보다 자기를 더 생각하기 때문에 마귀의 계략을 분별할수 없습니다.
‘나는 이런 놀라운 것을 체험했다.’
‘나는 이런 수준에 있다.’
‘***은 아직 멀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이들을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말속에 은근한 교만이 들어있는 이들을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아주 멀리 있습니다. 주님께 속하고 천국에 속한 이들은 자신을 가장 부족하고 낮은 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이들에 대한 비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찬사와 칭찬으로 인하여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오직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려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영광을 얻느니 차라리 지옥을 선택할 것입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은 오직 항상 주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리며 거기에서 힘과 능력을 얻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면 몹시 고통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국인과 지옥인의 차이입니다. 지옥인은 사람에게서 높임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외식을 하게 되는 것이며 천국인은 중심을 보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에 사람의 시선이나 체면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부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항상 가라지를 뿌립니다. 사람의 마음에 가라지를 뿌립니다. 할수만 있다면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먹혀들어가면 그 영혼을 사로잡아 지옥으로까지 이끌고 가려고 합니다.
교만을 증오하십시오. 교만을 저주하십시오.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오직 순결하게 깨어있으십시오.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마귀가 당신을 높여줄때 선포하십시오.
“마귀야! 물러가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부족한 주님의 종이다!”
그렇게 외칠때 마귀들은 물러갈 것입니다. 마귀는 겸손한 자를 당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영을 대적하십시오. 거기에서 모든 재앙이 오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영혼을 교만에서 지키십시오. 천국에서 떨어지지 않고 주님께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오직 교만을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지 마십시오.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입니다.
부디 이 영들과 대적하며 싸우고 승리하십시오.
당신이 교만의 영을 물리치고 이길수 있다면 당신은 다른 대부분의 마귀의 공격을 잘 분별하고 물리칠수 있을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할렐루야! -정원목사님의 '대적기도의 적용원리 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두 방면
[고전 15: 4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을 보면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에는 둘이 같지 않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첫 사람 아담이란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사람을 말하고 마지막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해석하면 아담은 살아 있는 혼적 존재가 되었고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원어가 다른데 똑 같이 영으로 해석한 이유는 교리로 인한 잘못 된 고정관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혼이나 영이나 영혼에 대한 분명한 구분이 없이 영도 영혼이고 혼도 영혼과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두 방면에 대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의 무엇이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육신 하실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또 부활 하실 때 진리의 영이 살려주는 영 즉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전 삼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하셨고 우리 속에 들어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0절을 보면 보혜사 성령님만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삼위께서 함께 들어오시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그 중 진리의 영이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되었고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신 결과 나타난 현상이 평강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유대인들과 제자들이 말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 육신의 살을 뜯어 먹고 피를 마시라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공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어떻게 우리가 먹을 수 있느냐면 원래 진리의 영이신 주님께서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자신의 살과 피를 그 영으로 공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으로 공급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부활의 두 방면을 말합니다. 두 번 부활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자 되신 방면과 성자 되신 방면이 부활 속에서도 두 방면으로 나타나더라는 말입니다. 육체가 다시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활체의 방면과 영의 방면이 있습니다. 부활체의 방면은 공개적이고 영의 방면은 은밀하게 감추어진 방면입니다. 그래서 공개적인 방면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나 은밀하게 감추어진 방면은 아무나 알지 못하는 비밀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드시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공개적인 방면으로서 부활체 즉 육신이 다시 사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은 영이신 은밀한 방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두 방면이 있다는 말입니다. 평안이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를 성전 삼고 우리 안에 오신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이나 23절에 보면 우리 안에 오신 보혜사를 말하는데 또 다른 보혜사만 오신 것이 아니라 삼 위께서 함께 오셨음을 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나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오시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오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말씀이셨던 독생자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때 무엇이 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육신이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한 방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영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 즉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 살려 주는 영은 원래 진리의 영이셨습니다. 그 진리의 영은 부활 안에서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두 방면
(구분) (이름) (선물) (몸) (계시는 장소)
인자-----예수------은혜------부활의 몸------하늘 보좌 우편에 계심
성자-----그리스도---진리------살려주는 영----보혜사와 함께 영 안에 오심
<출처: 예수님따라가기>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을 보면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에는 둘이 같지 않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첫 사람 아담이란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사람을 말하고 마지막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해석하면 아담은 살아 있는 혼적 존재가 되었고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원어가 다른데 똑 같이 영으로 해석한 이유는 교리로 인한 잘못 된 고정관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혼이나 영이나 영혼에 대한 분명한 구분이 없이 영도 영혼이고 혼도 영혼과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두 방면에 대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의 무엇이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육신 하실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또 부활 하실 때 진리의 영이 살려주는 영 즉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전 삼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우리 위에 임하셨고 우리 속에 들어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0절을 보면 보혜사 성령님만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삼위께서 함께 들어오시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그 중 진리의 영이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되었고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신 결과 나타난 현상이 평강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유대인들과 제자들이 말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 육신의 살을 뜯어 먹고 피를 마시라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공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어떻게 우리가 먹을 수 있느냐면 원래 진리의 영이신 주님께서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자신의 살과 피를 그 영으로 공급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으로 공급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부활의 두 방면을 말합니다. 두 번 부활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자 되신 방면과 성자 되신 방면이 부활 속에서도 두 방면으로 나타나더라는 말입니다. 육체가 다시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활체의 방면과 영의 방면이 있습니다. 부활체의 방면은 공개적이고 영의 방면은 은밀하게 감추어진 방면입니다. 그래서 공개적인 방면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나 은밀하게 감추어진 방면은 아무나 알지 못하는 비밀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구워 드시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공개적인 방면으로서 부활체 즉 육신이 다시 사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은 영이신 은밀한 방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두 방면이 있다는 말입니다. 평안이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를 성전 삼고 우리 안에 오신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이나 23절에 보면 우리 안에 오신 보혜사를 말하는데 또 다른 보혜사만 오신 것이 아니라 삼 위께서 함께 오셨음을 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나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오시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오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말씀이셨던 독생자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때 무엇이 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육신이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한 방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영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 즉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 즉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 살려 주는 영은 원래 진리의 영이셨습니다. 그 진리의 영은 부활 안에서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두 방면
(구분) (이름) (선물) (몸) (계시는 장소)
인자-----예수------은혜------부활의 몸------하늘 보좌 우편에 계심
성자-----그리스도---진리------살려주는 영----보혜사와 함께 영 안에 오심
<출처: 예수님따라가기>
관유가 되신 그리스도/우리 속에 사심으로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명하심을 따라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관유가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입니다. 우리 속에 은밀하게 오셔서 사시면서 우리를 거룩한 성전 되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29장 21절을 보면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취하여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관유의 용도는 성전이나 성전 기명 기구나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그 구약은 육체의 법으로서 하나의 비유요 그림자에 속합니다.
신약 시대인 지금 우리의 몸을 성전 삼고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시대에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관유의 실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고 가신 이후에 보냄을 받고 오신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관유가 되사 성령님과 함께 오셔서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관유의 재료는 감람유에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를 섞어 만든 것으로서 제사장과 성전의 기명 기구에 뿌려 거룩케 하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여기에서 감람유는 성령님을 상징하고 감람 기름에 첨가되는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네 과정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관유란 하나님의 영에 인자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네 과정을 거친 후에 그 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요14:21) 이것은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실제이신 하나님에 관한 영의 방면을 이해하는데 아주 요긴하고 중요한 설명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령의 역사가 다른 점/성령의 두 방면 역사
구약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가 계셨지만 우리 위에만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관유가 되신 후 부터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 성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성전삼고 거룩케 하시며 불 밝히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이 두 방면으로 임하십니다. 우리 위에 임재하시는 성령님과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성전 삼고 사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우리 위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은 공개적인 성령의 역사로서 복음 전파가 그 목적이며 은사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성전 삼고 사시는 성령님은 은밀한 성령의 역사로서 성전 된 우리를 거룩케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새 언약 시대에 성령께서 두 방면으로 임하신 증거
누가복음 2장 26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7장 38-39절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히 누가복음 2장 26절을 보면 시므온 위에 성령이 계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7장 38-39절을 보면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않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순 같으나 자세히 보면 모순이 아닙니다. 누가형제님은 시므온 위에 있는 성령을 말하고 있고 요한형제님은 우리 속에 임할 성령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기 전에도 역사하셨고 새 언약 시대에 우리 속에 오셔서 사시는 성령님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은 후 즉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처음 익은 열매로 아버지께 바쳐지신 후에 다시 보내심을 받을 보혜사 성령님을 말합니다.
아들의 공생애 후에 보내실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약속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인생을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다시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보혜사의 역할의 두 방면
보혜사께서 영을 받은 자에 대한 역할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속대로 보냄을 받은 보혜사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 속에사시면서 하실 보혜사의 역할을 말하되 영을 받은 자신에 대한 역할을 말합니다. 그 역할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보혜사께서 영을 받은 자를 통하여 타인에게 하는 역할
요한복음 15장 2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보혜사의 정체와 그 역할을 말하되 타인에 대한 역할을 말합니다. 그 보혜사의 정체는 아들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고 아버지께로서 나오는 진리의 영을 말합니다. 그 보냄을 받고 우리 속에 오신 진리의 영의 타인에 대한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보혜사 성령님의 하시는 일의 두 방면을 말합니다. 그 하나는 영을 받은 자에게 하시는 일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위해 하시는 역할입니다. 개인에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며 타인을 위해서는 복음을 전파하게 하실 것입니다.
보혜사를 보내시는 조건/아들이 가야 보혜사가 오심
요한복음 16장 7절을 보면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보혜사를 보내시는 조건을 말합니다. 그 조건은 아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신 후에 보혜사를 보내실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시는 방법/한 영 안에서 아들과 함께 오심
요한복음 14장 20절을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간에 집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집 삼으시고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집 삼고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시는 방법을 말합니다. 성전 삼으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사신다는 말입니다. 그 성취 방법은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때에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함께 오심을 말합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을 세 분으로 표현하실 때가 있고 두 분으로 표현하실 때가 있고 한 분으로 표현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세 분으로 표현 할 때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아버지의 영을 말하고 두 분으로 표현할 때에는 아버지와 아들만을 말합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교리적인 말입니다. 원어적으로는 그 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거룩한 이라고 하는 수식어가 붙어 성령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잘못 된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표현은 못됩니다. 이것은 교리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두 방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 우리 안에 오신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오십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4장 20절과 23절에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비유적으로 말하면 감람유에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의 네 가지 재료를 섞어서 만들어 성전과 제사장에게 뿌려 거룩하게 했듯이 아들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네 가지 과정을 거치신 후에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오신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안에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 속에 오셔서 성전삼고 사시는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오십니다.
신약 안에서는 하나님과 아들과 그 영의 형상을 각각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근본 하나님 한 분에서 시작하여 신약 안에서 확장 되신 것을 말합니다. 아들은 원래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품 안에 계셨던 말씀이셨으나 신약 안에서 보냄을 받고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인생을 사시고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신약 안에서 확장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형상과 모양이 있으나 신적 존재 즉 영체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셔서 그 말씀이 육신을 입음으로서 육의 몸을 갖게 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의 이름을 예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과 모양을 사람들 가운데 나타내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보냄을 받으신 보혜사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 영은 아버지의 영으로서 그 위치는 보좌 앞이고 그 형상과 모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상징적인 말입니다. 일곱 뿔은 완전한 권세를 말하고 일곱 눈은 완전한 통찰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위치는 보좌이고 아들의 위치는 보좌 우편이며 아버지의 영의 위치는 보좌 앞입니다.
승천의 두 방면에 대한 증거
요한복음 20장 16-18절을 보면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 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신 것은 이미 아버지께 올라가셨다가 다시 오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부활 후에 사십일 정도 머물다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던 공개적인 승천 전에 한 번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올라가셨다가 오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 속에 영을 불어 넣으심
요한복음 20장 21-23절을 보면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숨이나 성령은 원어적으로 똑 같은 프뉴마로서 영, 숨, 바람, 호흡 등을 말합니다. 그 영을 받으면 뉘 죄든지 사할 수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숨은 영으로 해석 되어야 맞습니다. 이것은 해석자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고 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또 죄를 사하실 권세는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라고 합니다. 곧 여기에서 말하는 숨을 내쉬며 란 말은 아들이 은밀한 승천 이후에 다시 오셔서 제자들 속에 불어 넣으신 아들 그 자신을 말합니다.
아들이 부활 안에서 된 것의 두 방면/ 첫 열매와 생명주는 영이 되심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을 보면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원어도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 즉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부활 안에서 아들 자신을 우리 속에 불어 넣으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두 방면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보냄을 받았느냐면 말씀이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하면 태초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말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분의 이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두 방면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방면과 사람의 아들이신 방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성자 된 방면을 말하고 예수란 인자되신 방면을 말합니다. 인자되신 방면은 부활 안에서 첫 열매가 되셨고 성자 된 방면은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 영을 불어 넣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 과정과 두 번의 변화 즉 무엇에서 무엇으로의 완전한 변화가 두 번 있습니다. 네 번의 과정을 거쳤다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승천하셔서 아버지께 바쳐진 것을 말하고 두 번의 변화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과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비유로 말하자면 감람유에 네 가지 재료 즉 몰약 육계와 창포와 계피를 섞어 관유를 만들어 성전과 제사장의 몸에 발라 거룩하게 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이것들이 비유요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구조는 비유요 그림자이며 그 실상은 신약 안에서 성전 된 우리 몸을 말하고 관유의 실상은 우리 속에 오셔서 사시면서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신약 안에서 보냄을 받으신 성령님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 안에 비밀스럽게 오셔서 성전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열매를 맺어 가게 하시므로 이 비밀의 방면을 알고 실행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은 모든 성경 속에 그 비밀이 있지만 마태복음 5-7장까지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는 분은 하나님께서 그 속에 살지 못하시고 떠나십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꼭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육신에 속한 믿는 자들은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오셔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 속에 사시면서 거룩하게 하시고 열매를 맺어가게 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비밀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글을 보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깨달아 결단하게 하시고 열매를 맺어가게 하옵소서!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아멘!
<출처:좋은땅에뿌려진씨앗>
출애굽기 29장 21절을 보면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취하여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관유의 용도는 성전이나 성전 기명 기구나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그 구약은 육체의 법으로서 하나의 비유요 그림자에 속합니다.
신약 시대인 지금 우리의 몸을 성전 삼고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시대에 성전을 거룩하게 하는 관유의 실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고 가신 이후에 보냄을 받고 오신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관유가 되사 성령님과 함께 오셔서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관유의 재료는 감람유에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를 섞어 만든 것으로서 제사장과 성전의 기명 기구에 뿌려 거룩케 하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여기에서 감람유는 성령님을 상징하고 감람 기름에 첨가되는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네 과정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관유란 하나님의 영에 인자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네 과정을 거친 후에 그 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요14:21) 이것은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실제이신 하나님에 관한 영의 방면을 이해하는데 아주 요긴하고 중요한 설명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령의 역사가 다른 점/성령의 두 방면 역사
구약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가 계셨지만 우리 위에만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관유가 되신 후 부터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 성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성전삼고 거룩케 하시며 불 밝히시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이 두 방면으로 임하십니다. 우리 위에 임재하시는 성령님과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성전 삼고 사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우리 위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은 공개적인 성령의 역사로서 복음 전파가 그 목적이며 은사와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성전 삼고 사시는 성령님은 은밀한 성령의 역사로서 성전 된 우리를 거룩케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새 언약 시대에 성령께서 두 방면으로 임하신 증거
누가복음 2장 26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7장 38-39절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히 누가복음 2장 26절을 보면 시므온 위에 성령이 계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7장 38-39절을 보면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않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순 같으나 자세히 보면 모순이 아닙니다. 누가형제님은 시므온 위에 있는 성령을 말하고 있고 요한형제님은 우리 속에 임할 성령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기 전에도 역사하셨고 새 언약 시대에 우리 속에 오셔서 사시는 성령님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은 후 즉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처음 익은 열매로 아버지께 바쳐지신 후에 다시 보내심을 받을 보혜사 성령님을 말합니다.
아들의 공생애 후에 보내실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약속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인생을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다시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보혜사의 역할의 두 방면
보혜사께서 영을 받은 자에 대한 역할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속대로 보냄을 받은 보혜사께서 그를 사랑하는 자 속에사시면서 하실 보혜사의 역할을 말하되 영을 받은 자신에 대한 역할을 말합니다. 그 역할은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보혜사께서 영을 받은 자를 통하여 타인에게 하는 역할
요한복음 15장 2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보혜사의 정체와 그 역할을 말하되 타인에 대한 역할을 말합니다. 그 보혜사의 정체는 아들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고 아버지께로서 나오는 진리의 영을 말합니다. 그 보냄을 받고 우리 속에 오신 진리의 영의 타인에 대한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보혜사 성령님의 하시는 일의 두 방면을 말합니다. 그 하나는 영을 받은 자에게 하시는 일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위해 하시는 역할입니다. 개인에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며 타인을 위해서는 복음을 전파하게 하실 것입니다.
보혜사를 보내시는 조건/아들이 가야 보혜사가 오심
요한복음 16장 7절을 보면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보혜사를 보내시는 조건을 말합니다. 그 조건은 아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신 후에 보혜사를 보내실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시는 방법/한 영 안에서 아들과 함께 오심
요한복음 14장 20절을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간에 집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집 삼으시고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집 삼고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시는 방법을 말합니다. 성전 삼으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사신다는 말입니다. 그 성취 방법은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때에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함께 오심을 말합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을 세 분으로 표현하실 때가 있고 두 분으로 표현하실 때가 있고 한 분으로 표현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세 분으로 표현 할 때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아버지의 영을 말하고 두 분으로 표현할 때에는 아버지와 아들만을 말합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교리적인 말입니다. 원어적으로는 그 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거룩한 이라고 하는 수식어가 붙어 성령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잘못 된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표현은 못됩니다. 이것은 교리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두 방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 우리 안에 오신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오십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4장 20절과 23절에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비유적으로 말하면 감람유에 몰약과 육계와 창포와 계피의 네 가지 재료를 섞어서 만들어 성전과 제사장에게 뿌려 거룩하게 했듯이 아들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네 가지 과정을 거치신 후에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오신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안에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 속에 오셔서 성전삼고 사시는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오십니다.
신약 안에서는 하나님과 아들과 그 영의 형상을 각각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근본 하나님 한 분에서 시작하여 신약 안에서 확장 되신 것을 말합니다. 아들은 원래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품 안에 계셨던 말씀이셨으나 신약 안에서 보냄을 받고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인생을 사시고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신약 안에서 확장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형상과 모양이 있으나 신적 존재 즉 영체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셔서 그 말씀이 육신을 입음으로서 육의 몸을 갖게 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의 이름을 예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과 모양을 사람들 가운데 나타내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보냄을 받으신 보혜사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 영은 아버지의 영으로서 그 위치는 보좌 앞이고 그 형상과 모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상징적인 말입니다. 일곱 뿔은 완전한 권세를 말하고 일곱 눈은 완전한 통찰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위치는 보좌이고 아들의 위치는 보좌 우편이며 아버지의 영의 위치는 보좌 앞입니다.
승천의 두 방면에 대한 증거
요한복음 20장 16-18절을 보면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 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신 것은 이미 아버지께 올라가셨다가 다시 오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부활 후에 사십일 정도 머물다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던 공개적인 승천 전에 한 번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올라가셨다가 오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 속에 영을 불어 넣으심
요한복음 20장 21-23절을 보면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숨이나 성령은 원어적으로 똑 같은 프뉴마로서 영, 숨, 바람, 호흡 등을 말합니다. 그 영을 받으면 뉘 죄든지 사할 수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숨은 영으로 해석 되어야 맞습니다. 이것은 해석자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고 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또 죄를 사하실 권세는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라고 합니다. 곧 여기에서 말하는 숨을 내쉬며 란 말은 아들이 은밀한 승천 이후에 다시 오셔서 제자들 속에 불어 넣으신 아들 그 자신을 말합니다.
아들이 부활 안에서 된 것의 두 방면/ 첫 열매와 생명주는 영이 되심
고린도 전서 15장 45절을 보면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원어도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 즉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부활 안에서 아들 자신을 우리 속에 불어 넣으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두 방면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보냄을 받았느냐면 말씀이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하면 태초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말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분의 이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두 방면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방면과 사람의 아들이신 방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성자 된 방면을 말하고 예수란 인자되신 방면을 말합니다. 인자되신 방면은 부활 안에서 첫 열매가 되셨고 성자 된 방면은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 영을 불어 넣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 과정과 두 번의 변화 즉 무엇에서 무엇으로의 완전한 변화가 두 번 있습니다. 네 번의 과정을 거쳤다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승천하셔서 아버지께 바쳐진 것을 말하고 두 번의 변화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과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비유로 말하자면 감람유에 네 가지 재료 즉 몰약 육계와 창포와 계피를 섞어 관유를 만들어 성전과 제사장의 몸에 발라 거룩하게 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이것들이 비유요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구조는 비유요 그림자이며 그 실상은 신약 안에서 성전 된 우리 몸을 말하고 관유의 실상은 우리 속에 오셔서 사시면서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신약 안에서 보냄을 받으신 성령님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 안에 비밀스럽게 오셔서 성전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열매를 맺어 가게 하시므로 이 비밀의 방면을 알고 실행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은 모든 성경 속에 그 비밀이 있지만 마태복음 5-7장까지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는 분은 하나님께서 그 속에 살지 못하시고 떠나십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꼭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육신에 속한 믿는 자들은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오셔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 속에 사시면서 거룩하게 하시고 열매를 맺어가게 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비밀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글을 보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깨달아 결단하게 하시고 열매를 맺어가게 하옵소서!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아멘!
<출처:좋은땅에뿌려진씨앗>
제단의 두 방면/육신이 피 흘린 장소와 영혼들이 호소하는 장소
제단의 두 방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명하심을 따라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성경에 눈을 뜨게 하려는 준비로서 제단의 두 방면에 대해서 말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2-23절을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속에서 영들이 거하는 장소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거지는 죽은 후 그 영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부자는 죽어 그 영이 어디로 갔다는 말이 없으며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나사로는 죽어 그 영이 천사들에게 받들려 장소 이동이 되었고 부자는 죽은 후 어디로갔다는 말이 없고 바로 음부에서 고통 중에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부자가 죽은 장소가 음부라는 것입니다. 음부란 어두운 장소로부터 불이 있는 심연까지의 한도 끝도 없는 어두운 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음부의 두 방면이 있습니다.
음부를 좁은 의미로 말하면 불타는 심연을 말하고 넓은 의미로 말하면 이 우주 안을 말합니다. 성경은 사단을 음부에 던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14:11,겔35:15) 그러나 사단은 이 세상에 있고 공중 권세 잡은 자로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땅과 우주까지를 음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죽어 어디로 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이 음부이기 때문에 저가 죽자마자 음부에서 고통 중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죽은 후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장소 이동을 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상징적인 말로서 이스라엘이 일컫는 그들의 영들이 안식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을 보면 그 장소가 어떤 곳인지를 더 세밀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같이 못 박힌 두 강도 중 한 강도가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은 후 불신자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음부에서 죽어서 음부에 머물고 믿는 이들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낙원으로 간다고 보아야 합니다(눅23:23)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영혼들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낙원에 들어갔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들이 자기들의 억울한 피 흘림에 대해서 보응 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자기들의 억울한 피 흘림을 신원해 달라고 호소한 장소가 제단 아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제단의 두 방면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방면은 부활하기 전까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모여 자기 피를 신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하늘제단을 말하고 또 한 방면으로는 각 시대를 따라 순교자들의 육신이 죽은 장소로서 피 뿌려 제물이된 장소가 그들의 제단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제단은 순교자들의 영혼이 피를 신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장소를 말하고 땅의 제단은 육신이 피 흘린 장소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창세기 4장 9-12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기록하고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자였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습니다. 가인이 이것을 못 마땅히 여겨 들에 있을 때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살인자 가인을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알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의 제단은 바로 땅이요 그가 제물 되어 피 흘린그 장소를 말합니다. 바로 그곳이 그의 제단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 방면으로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자기들의 억울한 피를 신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의 두 방면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이 피 흘려 제물이 된 장소가 그들의 피가 호소하는 제단이요 또 그 영들은 하늘 제단 아래 모여 자기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육신의 제단은 이 땅으로서 자기들이 피 뿌린 장소를 말하고 영혼의 제단은 하늘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무고한 피 흘림에는 피의 호소가 따릅니다. 순교자들의 영들은 하늘 제단에서 자기들의 억울한 피를 신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고 또 한 방면으로 순교자들이 희생된 장소가 그들의 제단이 되어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하는 것처럼 순교자들의 피가 지금도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하고 있음을 봅니다. 순교자들의 피 뿌림 위에 선 교회들을 축복하소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이 때에 눈을 열어 시대의 징조를 보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소서! 주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아멘! <출처:예수님따라가기>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명하심을 따라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성경에 눈을 뜨게 하려는 준비로서 제단의 두 방면에 대해서 말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2-23절을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속에서 영들이 거하는 장소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거지는 죽은 후 그 영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부자는 죽어 그 영이 어디로 갔다는 말이 없으며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나사로는 죽어 그 영이 천사들에게 받들려 장소 이동이 되었고 부자는 죽은 후 어디로갔다는 말이 없고 바로 음부에서 고통 중에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부자가 죽은 장소가 음부라는 것입니다. 음부란 어두운 장소로부터 불이 있는 심연까지의 한도 끝도 없는 어두운 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음부의 두 방면이 있습니다.
음부를 좁은 의미로 말하면 불타는 심연을 말하고 넓은 의미로 말하면 이 우주 안을 말합니다. 성경은 사단을 음부에 던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사14:11,겔35:15) 그러나 사단은 이 세상에 있고 공중 권세 잡은 자로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넓은 의미로 볼 때 이 땅과 우주까지를 음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죽어 어디로 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이 음부이기 때문에 저가 죽자마자 음부에서 고통 중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죽은 후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장소 이동을 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상징적인 말로서 이스라엘이 일컫는 그들의 영들이 안식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누가복음 23장 43절을 보면 그 장소가 어떤 곳인지를 더 세밀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같이 못 박힌 두 강도 중 한 강도가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은 후 불신자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음부에서 죽어서 음부에 머물고 믿는 이들의 영혼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낙원으로 간다고 보아야 합니다(눅23:23)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영혼들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낙원에 들어갔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들이 자기들의 억울한 피 흘림에 대해서 보응 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자기들의 억울한 피 흘림을 신원해 달라고 호소한 장소가 제단 아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제단의 두 방면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방면은 부활하기 전까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모여 자기 피를 신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하늘제단을 말하고 또 한 방면으로는 각 시대를 따라 순교자들의 육신이 죽은 장소로서 피 뿌려 제물이된 장소가 그들의 제단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제단은 순교자들의 영혼이 피를 신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장소를 말하고 땅의 제단은 육신이 피 흘린 장소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창세기 4장 9-12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기록하고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자였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습니다. 가인이 이것을 못 마땅히 여겨 들에 있을 때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살인자 가인을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이 알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의 제단은 바로 땅이요 그가 제물 되어 피 흘린그 장소를 말합니다. 바로 그곳이 그의 제단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 방면으로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자기들의 억울한 피를 신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의 두 방면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이 피 흘려 제물이 된 장소가 그들의 피가 호소하는 제단이요 또 그 영들은 하늘 제단 아래 모여 자기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육신의 제단은 이 땅으로서 자기들이 피 뿌린 장소를 말하고 영혼의 제단은 하늘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무고한 피 흘림에는 피의 호소가 따릅니다. 순교자들의 영들은 하늘 제단에서 자기들의 억울한 피를 신원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고 또 한 방면으로 순교자들이 희생된 장소가 그들의 제단이 되어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하는 것처럼 순교자들의 피가 지금도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하고 있음을 봅니다. 순교자들의 피 뿌림 위에 선 교회들을 축복하소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이 때에 눈을 열어 시대의 징조를 보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소서! 주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아멘! <출처:예수님따라가기>
기근의 두 방면/육적 기근과 영적 기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각처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평강 가운데 더욱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때가 가까웠고 마지막 때에 복을 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을 풀어 온 세상에 알리라는 명하심을 따라 지금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근의 두 방면입니다.
육적 기근/시대 말에 있을 기근과 부자들의 횡포로 인한 심판
아모스서 8장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데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1-10절까지는 땅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고 11-14절까지는 목자들과 믿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악 때문에 땅을 심판하고 우상 때문에 말씀 없는 기갈이 오게 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암8:1-10]” 1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2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3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처처에 내어버리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6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8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9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셨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을 용서치 않고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시대 말에 있을 기근과그것을 악용하는 악한 자들을 향해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마지막 심판이 오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나 이스라엘을 빙자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그 증거는 9절을 보면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해가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밖은 이후로 버림을 받았다가 다시 고국을 건설하여 회복하였으나 아직 해는 멀쩡하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이 이스라엘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예언의 이중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대 말에 이루어질 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3절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결과를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 11장 18-19절은 시대 말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 방법은 창세 이후로 없는 큰 지진과 우박으로 심판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을 요한 계시록 16장 17-21절에 다시 세부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6절까지는 왜 하나님께서 범죄 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고 땅을 큰 지진과 우박으로 심판하시고 끝내시며 땅의 종말이 오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고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 기껏 하는 말이 초하루 축제는 언제 지나서 곡식을 팔고 안식일은 언제 지나서 장사를 할 수 있을까?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자.힘없고 빚진 자 종으로 삼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까지 팔아먹자고 한답니다.
7-10절까지는 죄악을 행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때에 나타날 현상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7절은 하나님께서 그 악한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맹세로 나타내셨고 8절은 그 심판의 결과로 인해 교만하여 높아진 자들의 교만을 꺾어 낮추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9-10절은 그 때에 나타 날 현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9절은 천재지변으로 인해 나타 날 현상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데 그 날에는 해가 대낮에 지고 캄캄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절은 사람들에게 나타 날 현상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데 그 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사람 죽었을 때 입는 굵은 베옷을 허리에 동이고 외아들이 죽었을 때에 슬퍼하는 것처럼 슬퍼하게 된다고 합니다.
영적 기근/시대 말에 있을 말씀 없는 기갈(우상 숭배 때문임)
[암8:11-14]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 말은 시대 말에 있을 영적 기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11절은 기근의 종류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날이 이르면 하나님께서 땅에 기근을 보내시는데 모두가 굶주리고 갈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고 물이 없어 갈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굶주리고 갈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12절은 말씀이 없는 기근의 결과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 현상은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또 북에서 동까지 즉 이곳저곳 사방을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다니며 왔다 갔다 하여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시대 말에 세상 즉 교회에 나타날 현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13절은 그 때에 기근으로 인해 굶주림과 갈증을 느낄 대상을 말합니다. 그 대상은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처녀는 아름다운 것들을 상징하고 젊은 남자는 힘 있고 강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아름다운 것들이나 강한 것들까지 모두 다 굶주리고 갈증이 나 피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은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기갈 끝에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적 기근을 보내셨다는 말이 됩니다.그러므로 우상숭배는 영적 기갈을 가져 온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모스서 8장에서 말하는 영육 간의 기근과 연관성이 있는 두 가지 즉 속이는 저울 추와 우상숭배의 일은 요한 계시록 13장에서 말하는 마지막 시대에 있을 두 가지 저주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육적 기근의 결과는 속이는 저울 추로 상징 된 시대 말에 진행 될 경제정책을 가져오게 되고 영적 기근을 가져오는 원인은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 13장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 의해서 전개 될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또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일을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상징과 비유로서 미리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기근의 두 방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교회가 많고 말씀의 홍수 시대는 없었습니다. 인터넷 세계만 해도 성경 말씀 자료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땅에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 29장 9-13절을 읽어 보면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묵시가 마치 봉한 책의 말과 같아서 모두가 소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존경하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법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입술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딴 곳에 팔아먹었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가르침이 잘못 되어서 그런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설교마다 유명한 사람의 말이나 교훈으로 설교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말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지켜 행해야 할 법을 가르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많으면 뭐하고 교인이 많으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원하시고 진리 편에 선 이기는 자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양적으로 팽창한들 뭐하겠습니까? 어떤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신학교에서 가르치기를 목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은혜 위주의 설교를 하고 하나님의 법에 관한 설교는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 끓어 모으면 뭐하겠습니까?
지구촌 교회들이 목적지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으며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마15:8-9)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것입니까?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세상 끝까지 진행 될 일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중에 기근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기근을 성경은 두 방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시대 말에 있을 영적 기근과 육적 기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왜 오고 또 어떻게 오는지 알아야 하며 이것들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있어야 합니다. 시대를 보는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돈을 좇아갔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를 버리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 복을 좇는 것이 타락인 것을 깨달아야 하고 또 무엇이 우상숭배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최고의 우상은 자기 가족이랍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모와 처자와 전토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기근으로 인하여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여 두 가지 저울추를 사용하지 않으며 우상숭배를 버리고 유일하신 참 신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목자가 되사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시고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아멘!
<출처:예수님따라가기>
육적 기근/시대 말에 있을 기근과 부자들의 횡포로 인한 심판
아모스서 8장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데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1-10절까지는 땅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고 11-14절까지는 목자들과 믿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악 때문에 땅을 심판하고 우상 때문에 말씀 없는 기갈이 오게 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암8:1-10]” 1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2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3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처처에 내어버리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6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8 이로 인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의 넘침 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9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셨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을 용서치 않고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시대 말에 있을 기근과그것을 악용하는 악한 자들을 향해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마지막 심판이 오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나 이스라엘을 빙자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그 증거는 9절을 보면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해가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밖은 이후로 버림을 받았다가 다시 고국을 건설하여 회복하였으나 아직 해는 멀쩡하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이 이스라엘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예언의 이중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대 말에 이루어질 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3절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결과를 말합니다. 요한 계시록 11장 18-19절은 시대 말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 방법은 창세 이후로 없는 큰 지진과 우박으로 심판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을 요한 계시록 16장 17-21절에 다시 세부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6절까지는 왜 하나님께서 범죄 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고 땅을 큰 지진과 우박으로 심판하시고 끝내시며 땅의 종말이 오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고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 기껏 하는 말이 초하루 축제는 언제 지나서 곡식을 팔고 안식일은 언제 지나서 장사를 할 수 있을까?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자.힘없고 빚진 자 종으로 삼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까지 팔아먹자고 한답니다.
7-10절까지는 죄악을 행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실 때에 나타날 현상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7절은 하나님께서 그 악한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맹세로 나타내셨고 8절은 그 심판의 결과로 인해 교만하여 높아진 자들의 교만을 꺾어 낮추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9-10절은 그 때에 나타 날 현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9절은 천재지변으로 인해 나타 날 현상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데 그 날에는 해가 대낮에 지고 캄캄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절은 사람들에게 나타 날 현상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데 그 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사람 죽었을 때 입는 굵은 베옷을 허리에 동이고 외아들이 죽었을 때에 슬퍼하는 것처럼 슬퍼하게 된다고 합니다.
영적 기근/시대 말에 있을 말씀 없는 기갈(우상 숭배 때문임)
[암8:11-14]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 말은 시대 말에 있을 영적 기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11절은 기근의 종류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날이 이르면 하나님께서 땅에 기근을 보내시는데 모두가 굶주리고 갈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고 물이 없어 갈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굶주리고 갈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12절은 말씀이 없는 기근의 결과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 현상은 사람들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또 북에서 동까지 즉 이곳저곳 사방을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다니며 왔다 갔다 하여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시대 말에 세상 즉 교회에 나타날 현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13절은 그 때에 기근으로 인해 굶주림과 갈증을 느낄 대상을 말합니다. 그 대상은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처녀는 아름다운 것들을 상징하고 젊은 남자는 힘 있고 강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아름다운 것들이나 강한 것들까지 모두 다 굶주리고 갈증이 나 피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은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기갈 끝에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적 기근을 보내셨다는 말이 됩니다.그러므로 우상숭배는 영적 기갈을 가져 온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모스서 8장에서 말하는 영육 간의 기근과 연관성이 있는 두 가지 즉 속이는 저울 추와 우상숭배의 일은 요한 계시록 13장에서 말하는 마지막 시대에 있을 두 가지 저주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육적 기근의 결과는 속이는 저울 추로 상징 된 시대 말에 진행 될 경제정책을 가져오게 되고 영적 기근을 가져오는 원인은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 13장에서 말하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에 의해서 전개 될 짐승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또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일을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상징과 비유로서 미리 말씀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기근의 두 방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교회가 많고 말씀의 홍수 시대는 없었습니다. 인터넷 세계만 해도 성경 말씀 자료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땅에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 29장 9-13절을 읽어 보면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묵시가 마치 봉한 책의 말과 같아서 모두가 소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존경하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법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입술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딴 곳에 팔아먹었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가르침이 잘못 되어서 그런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설교마다 유명한 사람의 말이나 교훈으로 설교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말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지켜 행해야 할 법을 가르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많으면 뭐하고 교인이 많으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원하시고 진리 편에 선 이기는 자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양적으로 팽창한들 뭐하겠습니까? 어떤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신학교에서 가르치기를 목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은혜 위주의 설교를 하고 하나님의 법에 관한 설교는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 끓어 모으면 뭐하겠습니까?
지구촌 교회들이 목적지를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으며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마15:8-9)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것입니까?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세상 끝까지 진행 될 일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중에 기근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기근을 성경은 두 방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시대 말에 있을 영적 기근과 육적 기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왜 오고 또 어떻게 오는지 알아야 하며 이것들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있어야 합니다. 시대를 보는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돈을 좇아갔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를 버리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 복을 좇는 것이 타락인 것을 깨달아야 하고 또 무엇이 우상숭배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최고의 우상은 자기 가족이랍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모와 처자와 전토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기근으로 인하여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여 두 가지 저울추를 사용하지 않으며 우상숭배를 버리고 유일하신 참 신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목자가 되사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시고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아멘!
<출처:예수님따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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