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0/2009

초자연적인 성령 사역을 풀어내다 (Releasing the Supernatural Ministry of the Holy Spirit) - Mike Bickle

I. 영적 은사 사용
A.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우리의 권위와 영적 은사를 우리가 사용함으로 주님의 초자연적 사역을 위한 그릇이 될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성령은 교회가 영적 은사들을 무시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온다( 10:17). 일반적으로 우리가 은사들에 대해 듣고 배우게 될 때 우리안의 믿음이 자극을 받아 은사를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고전 12:1)

B.  우리는 영적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기 전까지는 은사들을 절대로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감을 경험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손을 구할 우리는 주의 능력을 풀어낼 있다. 우리는 은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미약한 시작이지만   은사들을 사용하면서 영적 은사를 더욱 사모해야 한다.
“31)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1)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39)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 (고전 12:31; 14:1, 39)

C. 모든 사람들은 예언하고 성령의 은사들을 사용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성령은 교회가 주의 능력을 행하며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믿음을 분발시키고 계신다. 이제는 우리가 병든 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오늘은 구원의 날이다(고전 6:1).
 
말세에 내가 내 모든 육체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을 꾸리라” ( 2:17)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31)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5, 31)

D. 예언의 영은 극적인 방법들 뿐 아니라 은은한 방법으로도 나타난다. 극적인 방법들에는 꿈과 환상, 천사의 방문,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들을 포함한다. 사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미묘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흐릿한 마음의 감동 등을 포함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마음에 떠오르는 그림: 사람들에게 치유나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만지실 것인를 나타내는 우리의 마음안의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이나 인상
.
2)
감정적인 감동: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만지실 것이라는 것과 관련된 부담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역이나 사람을 향한 부담이나 슬픔, 기쁨같은 다양한 감정을 느낌.

3)
동정심어린 통증: 다른 사람들 몸의 특정한 부위에 있는 통증이나 질병을 주님께서 치유하실 것이라는 표시로 우리가 같은 몸의 부위에 느끼게 되는 통증.
  
4)
육체적 감각: 주님께서 우리가 받은 육체적으로 느끼는 감각과 관련된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지시기를 사모하신다는 징표로서 우리의 오감을 통하거나 우리의 몸의 특정 부분에 성령의 임재(열기, , 뜨거움, 바람등)를 경험하는 것.

E.우리가 큰 모임이나 작은 모임, 또는 사회적 모임등으로 모일 때에 우리는  성령의 예언적인 인도하심을 받기를 지향해야만 한다. 우리는 성령님,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어떤 걸 말씀하고 계십니까?”라고 단순하게  성령께 요청함으로 할 수있다. 성령은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흐릿한 예언적 감동을 주심으로 대답하실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간단한 한 구절이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실 지에 대한 힌트를 주게 된다. 이것은 마치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5:19)

II.  성령의 은사 사용에 성숙해 지는 방법
A. 우리는 은사들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지녀 그 은사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B.  원리: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경우는 보통 성도의 입술에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 통해서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들을 우리가 선포할 역사하시게 된다.

C.첫째,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는 감동을 표현하면서 은사들을 사용한다. 우리가 말하는 마음의 감동은 반드시 성경의 원리에 합한 것이어야 한다. 성령이 주신 감동이나 인상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놓게 된다. 우리는 성령님이 주신 감동을 표현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감동들은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D.은사들은 많은 경우 우리 영혼 안에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 또는 성령의 미묘한 감동같은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너무나도 미묘한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을 무시하고 놀라운 열린 환상을 볼 때까지 기다리려 한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그들 안에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의 가치를 깨달았다면, 더 민감하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지진 후에 이 있으나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후에 세미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0)

E. 성령님,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라고 질문하라. 이렇게 질문하는 단순한 행동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더 민감하게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 질문은 우리가 우리 마음안에 성령의 감동이나 하나님의 예언적 속삭임을 받아들 수 있는 자세를 갖게 한다.

1. 나는 예언적인 것을 사용하는 것을 조용한 날의 호수에서 보트에 돛을 올리는 것에 비교한다. 미풍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돛은 겨우 보트를 움직일 수 있는 가장 미약한 미풍을 잡는다. 그럼에도, 보트는 움직인다! 우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시는 가를 물어볼 때에도 이와 같은 역동성이 발생한다.

2. 우리가 성령이 주시는 아주 미묘한 감동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발동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게 된다. “성령님,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나를 통해서 오늘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고백하면서 당신의 돛을 세워보라.

F. 우리가 예언적 감동들을 갖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것들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 4:2)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열어 기다리면서 어떤 일을 하실 지를 물어보라. 불신에 뿌리를 둔 모든 제약과 한계를 마음에서 없애버려라.

G. 두번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줄 때,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 앉히라 또는, 우리의 영혼을 고요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있게, 성령이 주시는 감동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하라.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기도해 줄 때 열성으로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줄 때 설교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
     
H.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조금만 나타날 때에도 그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조그만 것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의 두통이 10% 만 치유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역사이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마귀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한 것에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I. 우리의 교만으로 인해우리는 사역에서 나타나는 작은 하나님의 능력을 쉽게 무시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특별하게 또는 놀랍게 나타날 때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엄청난 능력이 나타날 때에만 예언과 치유 사역을 하고 싶어하는 열심을 보인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예언사역을 하고 싶어한다. 우리에게는 작은 역사가 일어나는 날들에도 신실하고 감사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J. 넷째, 틀리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라. 오히려, 우리는 영적 은사들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더 안타깝게 생각해야 한다! 더 중요한 질문은내가 잘못 받으면 어떡하지?” 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셨는 데, 필요한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을 풀어주는 기회를 놓쳐 버리면 어떡하지?”이다.

K.다섯째, 만약 당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느낌이 확실하지 않을 때에는 좀 더 부드러운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초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하라. 예를 들어서,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오늘 당신을 치유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제가 형제/자매님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데요. 제가 믿기에 하나님께서 지금 형제님을 만져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확실치 않을 때 우리가 좀 더 부드러운 언어를 사용한다면, 혹시라도 우리가 틀려도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게 될 것이다
.
L.특별한 것을 얻으려는 부담을 내려놓아라. 우리의 의무는 성령님께 마음을 여는 것이다.
  
M.왜 성도들은 예언하기를 게을리 하는가? 많은 경우에 예언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영적인 적극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인가? 주님께 작은 영감이라도 받기 위해서는 성령에 민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받은 영감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를 써야하고 또 위험을 무릎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 놓는 게 더 쉬운 일이다.

N. 성령에 계속에서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우리가 엄청난 감정의 혼란을 야기하는 여러 생각들과 자기연민에 빠지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III.성령의 아홉가지 은사
A. 성령의 나타남(은사)은 다른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다(7, 11).
7)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말씀,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말씀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분별함,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7-11)

B.모든 은사들은 자연적이 아닌, 초자연적인 은사들이며, 세가지로 구분된다.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계시의 은사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들 분별함  무엇인가를 행하는 능력의 은사들: 믿음의 은사, 기적행함, 치유의 은사   무엇인가를 말하는 영감의 은사들: 예언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

IV.계시의 은사들: 무언가를 드러내는 은사들
A.지식의 말씀 (4:18; 5:1-10; 9:10-12; 10:9-20; 2-3): 과거나 현재의 일에 관련된 계시. 이 은사를 지식의 은사라 부르지 않는다(많은 지식을 가진 것과는 구분된다는 말-역자주). 성령님은 사람, 장소, 어떤 것들과 관련된 말씀이나단편적인 정보를 주신다. 이것은 환상, 천사, , 또는 예언의 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여러 은사들이 함께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B. 지혜의 말씀 ( 9:10-16; 8:26-29; 11:28-30; 21:10-11): 미래와 관련된 정보를 나타냄. 이것을 지혜의 은사라 부르지는 않는다(일반적인 지혜를 지니는 것과 다르다는 말-역자주).

C. 영들 분별함 ( 9:3-8; 16:16-18): 영적 세계를 보는 통찰력. 이 은사는 어떤 영 또는 선하고 악한 영적 세계를  분별하거나 감지하는 은사이다. 이 은사를 분별의 은사라 부르지 않는다이 은사는  특별히 심리적인 통찰력이나 사람들의 성격들과 잘못들을 지적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V.능력의 은사들: 무언가를 행하는 은사들
A. 기적 행함: 이 은사는 순간적으로  기적을 행하는 성령의 나타나심이다. 기적은 평범한 자연적인 상태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개입을 말한다. 이 은사는 역동적으로 역사한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고( 2), 5 천명을 먹이셨다( 6:6-14).

B. 믿음의 은사: 이 은사는 보호하심, 인도하심등을 받는 성령님의 나타나심이다. 바울이 폭풍을 만났을 때에서 그랬던 것과 ( 27)  엘리야가 까마귀에 의해서 먹을 것을 공급받을 때처럼(왕상 17:2-6), 다니엘은 수동적으로 사자굴에서 보호를 받았다( 6:16-23). 이 은사가 나타날 때, 당신이 스스로 만들 수도 없는 일들이 당신 앞에 나타난다: 필요한 재정이 정확하게 채워진다는지, 하나님이 준비하신 약속들이 생긴다든지 하는 일이다. 믿음의 은사는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를 보호해준다. 기적의 역사는 위험한 상황 자체를 변화시킨다. 바울은 폭풍가운데에서도 보호를 받았다. 반대로, 예수님은 폭풍을 잠잠케 하기 위해 폭풍을 꾸짖으셨다.

C. 병고침의 은사 : 그리스 원어에서은사들:치유들은 복수이다. 이것은 유일하게 복수로 존재하는 성령의 은사이다. 기적은 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치유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물론, 치유가 순간적으로 일어나면 기적이 되는 것이다-역자주).

VI.영감의 은사들: 무언가를 말하는 은사들
A.예언의 은사: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영감 (고전 14:3). 삶의 방향등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B.  여러 종류의 방언들: 천사와 사람들의 언어들(고전 13:1). 개인적인 묵상과 공동체를 위한 방언의 은사에는 차이가 있다.  (고전 12:30; 14-2-4).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덕을 세우나니” (고전 14:2-4)

C.방언 통역:  방언 통역은 단순히 언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담을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의 법의 차이점

하나님의 율법의 특징*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시 19:7)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를 궁구하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시 119:152)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최고 통치자로서,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천연계의 전체적인 운행을 위하여 지배의 법칙을 제정하셨다.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생물계나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우주의 만물은 무시할 수 없는 고정된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으며 거룩한 손으로 만드신 것은 단 한 가지도 하나님께서 잊으신 것이 없으시다. 그러나 천연계의 모든 것이 자연 법칙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지만 오직 지적 존재인 인간만이 법칙의 요구를 이해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인 율법에 순종할 수도 있다.

당신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걸작품인 인간에게만 거룩한 율법의 신성한 요구들을 인식할 수 있는 양심과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율법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즉각적이며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억지로 순종하도록 강제하지 않으시며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로 대우하신다.

인간의 개인적 책임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는 자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우리는 각자가 순종하며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며 당신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런 생애에 따르는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 때에 모든 영혼에게 심각한 질문이 있을 것인데 과연 내가 하늘로부터 들려 온 음성을 순종하고 시내산에서 반포된 십계명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허다한 무리들과 더불어 빛나는 율법을 짓밟을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분의 율법을 지키며 그분께서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는 것이 가장 고상한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며 율법의 거룩한 주장에 대항하여 싸운다.

사람들은 거룩한 빛에 대하여 저들의 영혼의 문을 닫아버리며 거룩한 빛이 저들에게 비추일 때 빛 가운데 행하기를 거부한다. 저들은 이기적인 만족이나 세속적인 이득을 위하여 마음의 순결, 하나님의 은총 및 천국에 대한 저들의 소망을 희생시킨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시 19:7)다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의 그 단순성, 포괄성 및 그 완전성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가! 율법의 내용이 너무나 간단 명료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계명을 쉽게 암기할 수 있으나 그 의미는 너무나 원대하며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고 외형적인 행동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사상, 의도, 욕망 및 정서까지도 살핀다.

인간의 법률은 이같은 일을 할 수 없다. 인간의 법률은 다만 외형적인 행동만을 제재할 수 있다. 인간은 범죄자이면서도 자신의 악행이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길 수 있다. 또한 도둑질, 살인, 혹은 간통죄를 범한 형사상(刑事上)의 범인이 되고서도 발견되지 않는 한 법률이 그를 범죄자로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율법은 마음 속에 들끓는 질투, 시기심, 증오심, 악의 원한, 정욕 및 야심 등을 주시(注視)하여 본다. 이러한 악의 씨들은 뜻은 있으나 기회가 없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행동으로 옮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죄악적인 감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전 12:14)실 그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출처:예수그리스도의향기>

과연 악이 창조에 포함되었을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날이 갈수록 세상에는 죄악이 만연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죄악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칭(?) 의인들이 꽤 있습니다. 왜 의로운 자는 고통을 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주 불공평할 뿐 아니라 세상의 악을 방치하는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기에 도무지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합니다. 아예 신은 없거나 죽었다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죄악의 근원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셈입니다. 죄악을 실제로 범하는 이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선악 간에 공평한 심판을 해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죄악이 넘치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모든 사람이 그분을 잘 믿었을 것 아니냐고 따집니다. 죄 지은 자가 하나님께 벌 받아 불행을 겪는 모습을 보면 누가 감히 죄를 짓겠느냐는 것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아담이 당신을 배반할 것을 미리 아시고도 선악과 금령을 제정했다고 불만입니다. 마치 개구쟁이들이 담 넘어 뻗쳐 있는 감을 따먹으리라 빤히 알고도 그러기만 하면 벌주려고 담장 뒤에 숨어 있는 심술쟁이 할아버지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악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방관했으니 그분에게 책임이 대부분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핑계이자, 억지 중에 이런 최고 억지는 없습니다. 어쨌든 남의 감나무에서 주인 몰래 감을 따먹은 것은 아무 변명이 필요 없는 잘못입니다. 설령 할아버지가 담 뒤에 숨어 있었든 말았든 모든 귀책사유는 개구쟁이에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억지는 그나마 봐줄 만한 건더기가 있는 편입니다. 개구쟁이들의 입장에선 조금 억울한 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또 미처 철이 들지 않은 탓으로 돌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아주 고차원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비방이 존재합니다. 아예 하나님을 악의 형성자 내지는 허용자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논리인즉 선만 있어선 아무 의미가 없으며 또 선으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악이 있어야 선이 귀한 줄 알고 또 선을 더 선호할 것이라는 아주 그럴싸한 논리입니다. 선을 더 선답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악을 직접 만들었거나 최소한 의도적으로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자연세계의 동식물이 천적(天敵)이 있음으로써 생명력이 더 강해지는 현상을 그
  강력한 논거로 들면서 말입니다.    

언뜻 합당해 보이지만 하나님에 대해 또 그분의 창조에 관해 전혀 무지하다는 증거입니다.
  인본주의적 사고가 다다를 수 있는 논리의 한계를 노정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고의 중심에 둔다면 당장에 부인될 수밖에 없는 사상입니다. 창조를 인정한다면 이미 그분 중심으로 모든 사고체계를 가동시켜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토기에 불과한 인간이 토기장이이신 그분의 뜻을 헤아리려 드는 큰 잘못을 범한 꼴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선이십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원한 빛이십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세상에는) 없습니다.(막10:18) 그분에게서 어둡고 추한 악이라고는 단 한 치라도 도출될 수 없습니다. 악을 만들거나 조장하기는커녕 허용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는(약1:13)데 어찌 악을 직간접으로 생성하겠습니까?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했으므로 선악과 금령도 아담을 시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또 그분은 인간을 천적이 있어야만 더 활기차게 되는 동식물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습니다. 만드신 후에 심히 좋아할 정도였으므로 악이 들어오기 전의 인간은 너무나 선한 존재였습니다. 당신과 얼마든지 온전한 교제를 나누며 악과는 담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목적으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당신을 배역하여 악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정녕 죽게 되어 있었다면, 역으로 그렇게만 하지 않았다면 정녕 충만한 생명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 일부러 고생을 시켜 즉, 반쯤 강요하다시피 당신께 감사, 찬양, 경배케 할 정도로 그분은 통이 작거나 심술궂지 않습니다. 인간이 그분께 진심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당신의 모든 선한 것을 풍성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인간이 속한 세상에 선만 있다고 해서 결코 선에 대해 약한 인식을 갖거나 또 무료해지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로선 악과 대비되어야만 선의 정체성이 나타난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의 본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착오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그분의 선을 선답지 못하게 훼방, 왜곡, 변질 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이 일단 작동되면 그분의 모든 좋은 것이 100% 완벽하게 발휘됩니다. 하나님 하시는, 그것도 선을 행하는데 막을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한 기독교 학교에서 천국에 관해 설명하는 교수에게 어떤 학생이 좋은 것만 항상 있다면 정적이고 지루할 것 같다고 질문했습니다. 교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열렬히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정적이겠는가? 항상 좋아했던 동일한 음악을 이전에 갖지 못했던 더 벅찬 즐거움으로 들을 수 있다면? 앞으로 생길 어떤 일에 대해서도 한 치의 잘못을 느끼지 않는 기분으로 아침에 잠을 깬다면? 자기 내면 깊숙한 곳을 직시할 때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좋고 아름다워 보인다면? 마치 공기인 것처럼 하나님 그분의 존재를 숨 쉬면서 살아간다면? 또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게 호흡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런 축복을 함께 경험하는 모든 이들끼리 그분의 사랑으로만 서로 사랑할 수 있다 해도 과연 지루하겠는가?

천국에선 아름다움과 진실과 선함이 갈수록 더 충만해 가는 나날을 경험합니다. 절대로 지루하거나 정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존재치 않고 또 그분과 교제하지 않는 상태에선 아무리 선만 있다 해도 지루할 것입니다. 단순 작업에만 매달리는 공장 같은 세상에서 악을 아예 택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기계 인간들끼리만 살아갈 것이니까 말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온전한 선을 택하여 누리고 나누는 즐거움이라곤 전혀 없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선에 지루함과 정체함과 허무함 등이 내포될 가능성은 완전 제로입니다.
  그분의 선이 실현되면 반드시 선이 더 확대재생산 될 뿐입니다. 반면에 그분을 멀리하는 악은 반대 방향으로 확대재생산 됩니다. 세상의 죄나 환난이 의로운 삶과 기쁜 인생에 도움이 되는 필요악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아주 틀린 생각입니다. 세상이 왜곡, 모순되어 보이고 죄악이 만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아니 묵인할 의도에도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던 것으로 인간이 타락하여 얻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이 땅을 향해 아담이 타락한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을 배역하여 죄악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언제 어디서나 동행하며 그분과 너무나 아름다운 교제를 이어갔습니다. 그분의 따뜻한 품 안에서 정말로 천국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두 사람 상호간에도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죄가 개입되기 전이라 두려움과 수치가 없었다는 뜻만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 숨길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온전한 사랑만이 그 관계를 잇는 유일한 근거이자 힘이었습니다. 당연히 모순, 왜곡, 변질, 거짓, 위계, 분노, 저주 등은 한 치도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선이 그들 사이에도 선으로서 온전하게 작용하여 선이 확대재생산 되고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오직 선만이 충만했습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할 줄을 미리 아셨고 또 그에 대한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비 되어 있었다 해도 당신의 창조는 분명히 인간의 선함만을 의도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은 제발 먹지 말라는 너무나 강하고도 유일한 바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매일 매일 선이 더 충만해지는 삶을 살라는 그분의 열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의 그 열망은 무참히 부서졌습니다. 최초 인간들은 동산의 모든 실과를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영생하는 생명나무 실과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단 하나 먹을 수 없는 과일은 선악과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품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생명나무까지 먹어서 온전한 선의 상태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아예 작정하고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쫓아내기 이전에 그들의 마음이 에덴에서 먼저 떠나버렸던 것입니다.
    

그럼 이제 인간이 그런 온전한 선을 누리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계21:4)

처음 것이란 첫 사람 아담의 배역으로 불러온 결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악과 금령대로 정녕 죽게 된 것입니다. 인간끼리 참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하나님과 다른 이들에게 감추거나 속이면서 서로에게 잘못을 전가하기에 더더욱 부끄럽고 두려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선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너무나 신나는 소식이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온 천하에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마지막에 이뤄질 그 천국이 이미 이 땅에 들어왔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거듭남이 한 죄인에게 임하면 이 땅에서부터 이미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7-19)

처음 것이란 처음에 창조된 사람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온전한 선이 실종된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스스로 의로워도 서로 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예비 된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것의 형벌인 죽음으로 그 배역의 모든 죄를 씻었기에 이제 그분의 후손이 되는 자는 정녕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진정으로 아는 자는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와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은 처음 것의 잔재가 생생하게 남아 있는 세상 속에 살아야만 하며 또 자신의 내면에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 잔재들은 주님이 다시 오셔야만 완전히,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제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이라도 신자는 적극적으로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종교적 활동에 적극적 열성적으로 모든 것을 바치며 헌신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면야 당연히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긴 하지만...) 예의 신학교수가 천국을 묘사한 대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분을 호흡하며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십자가 진리에 따라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그분만 의지하며 기도하며 순종하면 주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지고 발휘됩니다. 우리가 겪는 슬픔, 눌림, 갈증, 애통, 고난 등을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 짊어지셨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한숨을 막아주셨지 않습니까?
    

신자가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미 들어왔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은, 현실의 형통이 절대 아님, 것입니다. 영생의 본질이 어떤 것입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따라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나가며 묵상하는 일이 바로 천국을 침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존재가 그분의 뜻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반면에 아담이 타락한 결과로 정녕 죽게 된 인간이 악의 노예가 되어서 그 뜻과는 달리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지 철두철미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즉, 악이 형통하는 세상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독생자를 둘째 아담으로 보내어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신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더 깊이 알아나가며 그 지혜에 올바르게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이 우리를 통해 놀랍고도 충만하게 확대재생산 됩니다. 선만 있어도 절대 지루하거나 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새 생명이 더욱 활력 있게 넘치게 됩니다.
  

세상에 악이 만연하고 자기보다 나쁜 악인들이 형통하는데 반해 자기 같은 의인은 고생만 하고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불평불만하거나 부인 외면 저주하는 자들 앞에 기다리는 운명이 무엇입니까? 정녕 죽는 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반대쪽 악의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택하여 짊어진 악으로 인해 악이 확대 재생산되는 상황에 그저 눌려 지내다 죽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과의 연결 고리라고는 아예 없습니다. 다른 말로 그런 불평을 할 자격조차, 아니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으로 바뀔 것이라곤 전혀 없기에 헛되고 헛된 넋두리이지 않습니까?

신자는 선에서 더 나은 선으로 그래서 최고의 선으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조차 악에 눌리고 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이 악은 모양이라도 멀리하라고 권하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 속에 타락한 영혼의 찌꺼기가 남아서 날마다 괴롭힐지라도 날마다 우리는 천국을 침노하여 차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얼마든지 이겨내고 씻어내고 깨끗케 하며 더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속을 채울 수 있습니다.

단지 구원 받아 지옥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예수 믿은 보상이라고 여기면 참으로 가난한 신앙입니다. (최근에는 이마저 확실치 않은 교인들이 너무나 많지만...) 얼마든지 하늘의 보배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옮겨와 심고 물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당신께서 정말로 놀랍고도 아름답고 거룩한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분명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요15:16,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14:12)고 확언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이 심히 좋아했던 타락 전의 상태로 회복되었기에 그분의 선으로 더 큰 사랑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과연 그러합니까? 최소한 그럴 수 있다고는 확신하기에 올해와 다른 내년을 살 준비와 각오는 되어 있습니까?  요컨대 남의 형통에 비교하여 자신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을 믿음이라도 갖춰졌는지 묻는 것입니다. <출처: FAITH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