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2010

8. 현대 한민족의 사명과 기독교





가야를 통해 전해진 기독교는 불교의 그늘에 묻혀 버리고 그 후 우리민족은 천 오백 년 간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되었고 수많은 내우외환을 겪으며 한 많은 세월을 보내 왔습니다.

그러나 한민족의 탄식이 하늘에까지 닿게 되어 야벳 족속의 후예인 서양 여러 나라를 통해서 의료선교를 중심으로 다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기독교는 평양과 대구를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여 그 당시 기독교인이 2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건만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사람의 50퍼센트가 기독교인이었고 전국에 독립운동을 감행한 모든 지도자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2퍼센트의 사람이 민족을 이끌어간 것입니다.
아! 아라랏에서 천지까지!



제 한민족은 일어나 빛을 발할 때가 온 것입니다. 한민족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로 서서 이 나라와 이 세계 모든 민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장자권자의 사명을 과감히 수행하여야 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한국찬가를 읽음으로써 '한국인의 기원'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동방의 등불)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림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펴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7. 고대 한국인이 고대 아메리카 인디언과 고대 일본에 끼친 영향





지금부터 고대 한국인이 고대 아메리카 인디언과 고대 일본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겠습니다.

1. 고대 한국인과 고대 아메리카 인디언과의 관계
고대 아메리카 인디언은, 동방족들의 일부가 알래스카와 베링해협을 거쳐 북미대륙과 멕시코와 남미 대륙까지 뻗어 가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들의 언어와 풍습에서 증명되고 있고, 지질학적으로도 베링해협이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는 걸어서 이 곳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어 있습니다(오른 쪽 그림). 그리고 흑요석의 분포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그 아래). 또한, 인디언의 말 중에 한국인의 언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상징인 버팔로 들소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모습입니다. 원래 인디언은 배고플 때만 버팔로를 잡았지 재미로 잡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멸족시키기 위해서 버팔로를 멸종시켰죠.

 먹지도 않고 가죽도 쓰지 않으면서 오로지 인디언을 굶겨 죽이기 위해서 말이죠. 그래서 멸종될뻔 했던 버팔로가 현대과학적 노력으로 지금은 다시 복구되기 시작했습니다.

인디언들이 썼던 말들 중에 한국인과 유사한 말이 많습니다. 아리조나 주에 살던 인디언들 중에서 아파치족들이 있었는데, '아파치'라는 말은 인디언 말로서, 영어로 번역하면 'Father', 즉, 우리말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가장 아름다운 국립공원 '요새미티' 공원은 인디언 말로 '웅주마티'에서 왔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there are many bears', 즉, '여기는 곰이 많지' 이런 뜻입니다. 이것도 우리말과 매우 유사합니다. 곰 수가 많다는 뜻에서 '웅수 많지' 라고 발음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 동부지방 '커네티컷'은 인디언말로 '큰네터갓' 라고 하여 강가의 넓은 땅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큰 내터 가' 가 되지요. 오른 쪽 그림은 커네티컷 지방의 큰 내터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 중에 '이시이' 족이라고 있습니다. 이 이시이 족이 쓰고 있는 깃발을 보면 갑골문자로 나무 목 자와 아들 자 자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나무 목(木) 자 밑에 아들 자(子) 자가 있으면 한자 말로 무엇입니까? '오얏 이(李)' 자 이씨(李氏) 지요? '이씨'니까 '이시이'가 된 것입니다.

왼쪽 그림은 캐나다의 도시 토론토입니다. '토론토'라는 말도 인디언 말인데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meeting place' 라는 뜻입니다. 인디언 추장들이 모여서 토론하던 터, 즉, '토론 터'인 것입니다. 


그리고 북미 인디언들이 철인5종 경기를 할 때 동네 원로들이 모여서 응원을 합니다. 이들이 응원가를 20번이나 30번 할 때까지 젊은이들이 돌도 지고 가고 통나무도 지고 가서 산 위에까지 다녀오는 것입니다. 그 노래가 너무나 놀랍습니다. "에이 챵해이라 코시앵헤 창헤이라" 이렇게 부릅니다. 

그 동안에 청년들이 산꼭대기까지 다녀오면은 철인5종 경기 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이 노래가사를 자세히 들어보면 "에이 장해라! 고생해, 장해라!"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 그대로의 응원가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말들이 북미대륙의 곳곳에 남아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언어학적인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또한 인디언들은 머리를 땋고요(아래 왼쪽), 짚신 신고 삽니다(아래 가운데). 새와 깃털을 숭상하고요, 집을 비울 때는 정랑을 걸며, 인디언 신생아의 엉덩이에는 몽고반점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멕시코의 인디언 박물관에 가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 한국의 민속박물관과 꼭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가장 정확한 증거는 인디언과 한국인의 혈연관계에 나타납니다. HLA 에 의한 혈연관계를 조사해 보면 분명한 증거가 나타납니다(위 오른 쪽). 인간 조직적합성항원 연구의 세계적 중심기관인 미국 UCLA의 HLA센터 교수들이 연구해 본 결과 한국인과 인디언들이 100퍼센트 똑같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HLA A2 나 B62, C3 와 같은 것은 한국인 외에는 세계 어디에도 안 나오는데 인디언들에게 나옵니다.

2. 고대 한국인과 고대 일본과의 관계
고대 일본의 천황(天皇)들은 우리 민족하고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많은 증거로 밝혀져 있습니다.
첫째로, 전에 죽은 2차 세계대전의 원흉 '히로히또' 천황(天皇)이 천황 집안의 오래 전 생활을 그린 그림책을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 놀라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하지 않고 천황족(天皇族)들만 하는 특수한 문화가 있는데요, 천황족(天皇族)들만 먹는 특수한 떡을 만드는 방법과 떡을 그려 놓고, 그 옆에 가다가나(일본어)로 '시루또꾸'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 떡은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시루떡'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여자들은 과거에 원시적이어서 팬티를 안 입고 살았는데, 천황족(天皇族)들만 유일하게 팬티를 입고 살았습니다. 그 팬티를 그려놓고 가다가나로 '고쟁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던 '고쟁이'입니다.

그래서 천황족들은 우리하고 혈연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고요, 지금 천황이 히로히또의 아들 '아끼히또'이지요? 이 사람이 얼마전 신문에 고대 일본천황은 한국인과 혈연관계가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자신의 몇 대 할머니는 백제 왕의 누구였고...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오른 쪽 위의 그림은 일본 천황족과 관련이 깊은 백제 무령왕의 무덤입니다. 그 아래는 '칠지도(七支刀)' 인데요, 그 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높으신 백제왕이 그 밑에 급인 일본 왕에게 주노라.


아래 왼쪽 그림은 일본의 기토라 고분의 무덤 천정에 그려진 천체도인데요, 일본 어디에도 이런 모습을 관찰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천체도는 바로 한국땅 평양의 하늘에서 보이는 천체도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고구려 평양출신의 한국인이 일본에 와서 천황족으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자 꿈에도 잊지 못할 자신의 조국 평양의 하늘을 사모하여 무덤에서라도 내 고향의 하늘을 보겠다고 유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말 속에도 우리말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말 '나라'를 일본에서도 '나라' 라고 하지요? 우리말의 '왔소'가 일본에서 '왔쇼이', 우리말의 '도착'이 일본에서 '도차꾸' 가 되지요. 일본사람들이 크게 낭패를 만났을 때 일본말로 '백제가 망했는데... (더 이상 무슨 희망이 있느냐)'라는 표현을 씁니다. 


백제가 망한 지 천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 일본이 백제와 얼마나 긴밀한 관계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 일본의 글자 '가나'는 알고 보니 신라 사람들이 만들어 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지난 2002년 4월에 일본의 NHK에서 방영되었습니다(아래 그림은 불경에 각필로 토를 단 것입니다).















일본의 신사에서 기도드릴 때 중년의 여인이여 어서 오셔서 우리를 어려움에서 구해 주오 라는 뜻의 기도문을 외웁니다. 이것은 일본 황실제사에서도 그대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일본 발음 그대로 읽어보면:
"아! 아지매! 어서 오게, 오게!"
경상도 말 그대로입니다. 번역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대 한국인들 특히 경상도 아주머니들이 일본에 가서 글도 가르치고 문화도 가르치고 문명도 가르쳤기 때문에 그 도움을 입었던 일본의 천황족과 원로들이 아쉬울 때마다 경상도 아주머니(아지매)를 그리워한 것입니다.
일본 사람도 HLA 연구결과가 한국인과 똑같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5. 고대 중국에 끼친 영향







고대 한국인이 고대 중국에 끼친 영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왼쪽 그림은 중국인들은 고궁(古宮)이라고 부르고, 우리들에게는 자금성(紫禁城)이라고 알려져 있는 베이징의 왕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중국인들의 기원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셈의 장자들인 엘람과 앗수르 가문이 동방으로 대장정을 시작했을 때 셈의 장막에 거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노아 할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야벳 가문의 일부가 따라 나섰습니다. 또한 함의 맏아들인 구스 가문의 일부도 셈족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서 야벳이 주축을 이루고 구스도 일부 섞인, 그리고 셈 가문 여자들을 며느리들로 맞아들여 다양하게 섞여버린 그들이 지금의 중국인들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 요의 아버지는 곡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곡은 아벳의 아들인 곡, 마곡과 연결이 됩니다. 또 서전요전에 보면 요임금의 대를 이은 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순의 아비는 고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수는 함의 아들 구스와 연결되고, 구스의 아들이 순이 됨으로써, 고대중국의 왕조와 성경의 족보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고대 중국의 문화를 잠깐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문화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크게 두 개의 문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앙소문화권(仰韶文化圈)과 용산문화권(龍山文化圈) 두 가지입니다. 
 
앙소문화권(仰韶文化圈)은 서남문화권(西南文化圈)이라고도 하는데 설립자는 중국인 스스로이고, 중국의 남쪽에 있으며, 하남성 앙소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규모는 소규모이고 원시적이고 상당히 시시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대부분의 훌륭한 문화권을 이루고 있는 용산문화권(龍山文化圈)은 놀랍게도 설립자가 동방족 혹은 동이족이라고 불리는 고대 한국인이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용산문화권은 다른 말로 동방문화권(東方文化圈)이라고 부릅니다. 그 중심은 산동반도의 용산현 근처입니다. 용산문화권은 중국문화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찬란했던 문화권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인 고고학자들이 밝힌 사실들입니다. 이러한 중국역사의 문화적 배경을 보면 중국이라는 나라는 동이족들, 곧 한국인들이 도와줘서 그 기틀을 세웠구나 하는 것을 당장에 알 수 있습니다.

산동성의 용산문화권은 고대 동방으로부터 파견된 동방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중국으로 파송된 동방족들을 '소호 금천(金天)씨'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인의 역사 기록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소호족의 거하던 곳은 중국대륙의 동해 바깥쪽에 있었는데, 바로 요동반도였으며, 거기서 들어와서 산동반도(山東半島)에 거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까지만 해도 요동반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요동에 거하던 동방족들이 중국인들을 도와 주다가 도와 주다가 끝이 없으니까, "에라, 안되겠다. 아예 중국에 들어가서 살면서 도와주자" 하고 산동반도로 들어가 살면서 돕게 된 것입니다. 그 산동반도 지역이 완전히 코리아타운으로 화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소호는 동쪽의 해 돋는 곳 (해가 돋을 때 동쪽 하늘이 금빛으로 물들지요?) 금빛 하늘에서 왔다하는 의미에서 쇠 금(金)자 하늘 천(天)자로 금천(金天)씨가 된 것입니다. "금천(金天) 땅에서 왔다"고 해서 이들은 금천(金天)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중국으로 파견된 동방족 출신의 엘리트 지도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고대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이 요를 중심으로 새 땅을 개척하기 위해 떠날 때 그들을 돕기 위해 산동반도로 많이 따라갔던 것입니다. 아직 자립이 안 되고 기술도 부족하고 홍수가 나면 대책이 없었거든요. 그 모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서 도왔던 것입니다. 요의 대를 이어 지도자가 된 순을 도와줬던 사람은 '부루(夫婁)'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루(夫婁)는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단군(檀君)의 아들이었고, 이 부루(夫婁)가 금천(金天)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천(金天)씨란 특정한 혈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을 통틀어 코리언(Korean)이라 하듯, 그 당시에 금천(金天)씨라 부른 것입니다. 


산동반도에 파견된 소호 금천씨와 자손들은 모두 중국남방의 형제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한 하나님의 파수꾼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우리나라 명성황후 시절에 한반도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님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의료인으로, 혹은 기술자로 들어와서 병원도 짓고 기술도 가르치고 학교도 세우면서 신앙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 김유신 장군의 비석과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김유신은 헌원의 후예이고 소호 금천씨의 자손인데, 그는 가야 왕의 후손이므로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성도 그의 동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헌원입니다. 이 헌원은 한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후난, 즉 셈의 자손인 앗수르 가문의 족보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는 유적으로 보나 삼국사기로 보나 성경으로 보나 엘람 형님, 제사장 형님을 도와 행정과 정치, 경제, 군사 업무를 장악하고 있던 셈의 둘째 아들 집안인 정통 기마민족인 것이 가장 유력합니다. 


즉, 소호 금천씨는 니므롯에 의해 밀려난 앗수르의 헌원의 직계자손이며 셈과 야벳과 함의 일부 형제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 동방을 찾아서 대장정을 감행한 주도세력이었던 것입니다.

왼쪽의 지도를 보시면, 요동반도에 거하면서 중국인들을 도와주다가 아예 산동반도 근처로 들어와서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고대 한국인들이었던 금천(金天)씨들이고, 그들이 신령한 장소로 지정해서 (아마 아라랏산을 형상화했겠지요) 정한 곳이 바로 태산이라는 지역입니다. 지금도 중국사람들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곳이 바로 여기 태산이고, 중국 역사에 의하면 금천씨들, 즉 동방족들이 살던 곳이 바로 태산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산 바로 옆이 곡부입니다. 곡부는 무엇으로 유명합니까? 중국 정신사에 매우 중요한 공자가 바로 곡부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그가 동방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기원전 500년경 사람입니다. 그 조상은 기원전 2000여년경에 여기 와서 살았고, 그 이후 공자가 태어난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의 문화도, 종교도, 정신세계도 거의 다 동방족이 이루었다는 사실을 중국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근래에 이르기까지 사대주의에 빠져서 "황공하옵게도 우리가 어찌 대국인 중국을 가르쳤습니까? 우리가 중국에서부터 배워 온 것이지요."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숨기고, 지우고, 왜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중국의 역사책까지 쫓아 가서 지울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중국의 역사책에는 이 대부분의 내용들이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오른 쪽 그림은 태산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중국의 역사에 보면 유명한 산이 다섯이 있습니다. 그 중에 태산이 가장 중요한 산이라 하여 오악지종(五岳之宗)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랫쪽 그림은 태산의 정상인데요, 태산의 정상은 완전히 성전(聖殿)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태산의 정상에는 천상신(天上神), 곧 하늘 황제인 상제(上帝)신의 성전(聖殿)이 지어져 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지고 새로 세워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습이 아니고 불교식, 유교식으로 건물모양이 변화되어 세워지게 되었을 뿐이지, '천상신부'라 하여 상제신을 섬기던 정신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맞은편을 보면, 상제신을 섬기던 제사장 소호 금천(金天)씨의 무덤이 있습니다(아래 오른 쪽). 소호 금천씨 무덤에는 그 아래의 그림과 같이 금천씨 상이 있습니다. 금천(金天)씨가 금(金)씨, 금(金)씨가 김(金)씨가 되어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姓)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중국의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은 전설적인 다섯 왕이 있습니다. 황제, 전욱, 제곡 그리고 요 임금, 순 임금입니다. 이미 순임금 시절에 상제(上帝)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공자의 서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2230년경입니다. 바벨탑 사건이 기원전 2247년경이니까 바벨탑 사건이 터지고 17년 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리고 황제, 전욱, 제곡은 중국인들의 조상이지만,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중국인의 조상이고, 이후 동방으로 오면서 엘람과 앗수르 가문과 함께 동행했던 중국인의 조상은 아마도 요임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임금이 아사달에서부터 중국인들을 인솔하여 중원대륙으로 들어갔고, 순임금 때 중원에 자리를 잡아서 안심하고 제사를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순임금 다음으로 왕조가 들어섰는데, 하나라, 은나라, 그 다음에 주나라, 그 다음에는 진시황이 통일국가를 세운 진나라,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나라, 수나라, 당, 송, 원, 명, 청나라 순으로 내려갑니다. 결국은 전설적인 왕 다음에 실질적인 중국의 왕들은 바벨탑 사건 이후부터 시작되어 요임금, 순임금 시대, 그리고 그 후 하-은-주, 진, 한-수-당-송-원-명-청 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중국의 간단한 역사입니다.

그러면 고대 중국에 끼친 한국의 역할을 알기 위해서 몇 가지 기록을 읽어보겠습니다. 서전 호서에 기록된 것을 보시면, 순의 제자 우(禹)는 장가를 잘 가서 출세한 사람입니다. 어디로 장가를 갔는가 하면 동방족의 도산국 여자와 결혼하였으며, 그 처갓집이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 처가의 도움으로 황하의 홍수를 해결하여 명성을 얻고 순임금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역대 신선통감 제 3권에 보시면 앞의 글과 연결이 됩니다. 순의 제자 우는 형산에서 창수사자(蒼水使者)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이라는 비결책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 금간옥첩(金簡玉牒)이 최초의 토목공학 원서가 되겠지요.
창수사자(蒼水使者)란 누구인가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는 도산(塗山)회의에 참석한 부루(夫婁)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창수사자란 동방족 출신의 지도자로 단군의 아들인 부루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가의 도움이라는 것은, 중국인 우의 처가는 한국의 왕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코카시안(Cocasian)의 얼굴을 가졌던 중국인들이 자꾸 한국인 얼굴처럼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말과 문화와 의자생활과 볶고 튀겨 먹는 문화는 그대로 남아서 지금의 중국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또 우(禹)는 동방의 지도자를 방문하여 가르침을 받고 중국의 역법과 절기를 모두 동방의 것에 맞추었다고 중국의 정사인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 (史記 五帝本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 순, 우 로 이어지면서 한번도 세습을 하지 않고 능력위주로 왕의 자리를 이었는데, 우는 자신의 아들 계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서 이 세습된 지도체계는 곧 반발에 부딪혀서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그때 설의 아들인 탕이 강력한 지도체계를 확립하고 대륙의 질서를 바로 잡았는데, 이 탕은 곧 산동반도에 들어와 있던 동방족 출신의 지도세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탕의 시대로부터 동방족이 직접 중국대륙을 치리 하였는데, 이렇게 한국인이 통치하던 시기가 바로 하-은 시대입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섬기던 신은 샹따이 로서 히브리인이 섬기던 하나님 엘 샤다이 와 발음도 뜻도 같다는 것을 고대 중국인들의 국경제사문 (國境祭祀文)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극히 오래 전 태초에 공허하고 흑암의 큰 혼돈이 있었사옵니다. 다섯 행 성은 아직 운행되지 않았었고 태양도 달도 빛을 발하지 않았었습니다. 거룩 하신 신 상제(上帝)께서 이곳에 모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주께서 모든 만 물을 만드셨사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셨사옵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만물이 지음을 받았사옵니다."

위의 국경제사문(國境祭祀文)과 기독교인이 믿는 경전인 성경(聖經) 창세기(創世記) 1장의 내용과 비교해 볼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 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리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 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 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1절-27절)

상제(上帝)를 창조(創造)의 신(神)으로 묘사함으로서, 국경제사문(國境祭祀文) 의 내용과 창세기(創世記)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국경제사문 (國境祭祀文)을 보시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았나이다. 上帝시여, 인간도 만물도 모 두가 당신의 사랑으로 이 낙원에 살게 되었나이다. 모든 생명체가 당신의 선 하심으로 지음 받았사오니, 그 축복은 당신으로 말미암음이옵니다. 오 주시 여, 당신만이 이 모든 만물의 참 어버이가 되시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기독교 이외에는 이런 기도문이 없습니다. 제사문이라 는 것이 결국 신(神)에게 드리는 기도문(祈禱文)인데, 바벨탑 사건이후 하나 님을 기억하던 백성들이 동방으로 이주해온 후 하나님을 기억하며 드렸던 기도문으로 생각됩니다.

공자(孔子)의 중용(中庸)에 보면 제사란 무엇인가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늘과 땅에 드리는 모든 제사를 통해 사람이 상제(上帝)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공자(孔子)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가짜 공자가 판을 치면서 진짜 상제(上帝)인 하나님에 대한 소식이 들어 왔을 때 얼마나 핍박을 주었습니까?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것처럼, 어용학자들이 만든 가짜 공자가 죽고 상제를 섬기는 진짜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잘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직접 한국인이 통치하는 하나라 은나라(夏-殷시대)가 지속되다가 14대째 지도자인 한국인 주(紂)가 난폭하여 중국인인 주(周)의 서백창(西佰昌)에게 쫒겨나고 주(周)나라가 통치하였습니다. 그 후로 얼마가지 않아 또 여러 나라로 갈려 혼란이 거듭되다가, 마침내 중국최초의 황제인 시황제(오른 쪽)가 나타나서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고 진(秦)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지역과 장사를 하여 수많은 돈을 번 장사꾼 여불위가 제국을 세우고자 하는 뜻을 가졌는데, 이를 알고 그의 아들 여정이 아버지를 제거하고 통일제국을 이룬 것이 시황제의 진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진(秦)나라는 서구사회에 중국이 알려진 최초의 나라가 되어서 지나(秦) - 차이나 가 된 것입니다.

장사꾼 여불위의 혈통인 진시황제 정(政)은 바벨론의 악한 문화를 받아들여서 그때까지 받들던 선한 천사의 상징 봉도등(鳳圖騰)을 포기하고 용을 황제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깃발도 용도등(龍圖騰)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백성들과 학자들이 종교의 자유를 달라, 민주화를 하라 외치니까 큰 압제를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은 산동(山東) 곡부(曲埠) 출신 공자(孔子)가 하늘의 도리를 가르치고자 지은 많은 책들을 모두 불사르고 가르치는 학자들을 생매장하여 죽인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입니다.
왼쪽 그림은 공자의 집 벽 곧 노벽(魯壁)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아무리 공자의 제자를 생매장하고 그 책을 다 불태웠어도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집 벽안에 숨겨 놓은 책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자의 집이 많이 허물어지면서 그 벽 속에서 공자의 책들이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옛날 책들은 오른 쪽 아래 그림과 같이 대나무 쪽에 기록해서 서로 연결하여 보관하였습니다. 이 책이 발견되면서 공자의 뜻이 잠시 빛났건만 그 당시 정권인 한나라의 어용 정치학자들이 임금에게 해로운 말은 빼고 필요한 말로 바꾸어서 원본은 숨기고 금문학파라고 해서 어용 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 중국과 한국에까지 전파되어 이것이 진짜 공자의 가르침인줄 알고 잘 못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금문학파의 조작 사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왼쪽 아래는 공자의 집에 남아 있던 우물입니다.
이제 진시황은 아사달과의 사이에 만리장성(萬里長城, 아래 그림)을 쌓음으로서 동방족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여 종교의 자유운동을 완전히 잠재우므로 써 중국은 하나님과의 그리고 동방과의 결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6. 소호 금천씨의 후손들





그러면 중국인을 돕고 또한 통치까지 했던 소호 금천 (金天)씨들과 그 후손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진시황제의 압제와 만리장성의 건설로 인해 중국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동방족들은 차차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산동성에 거하고 있던 금빛 하늘의 파수꾼들은 차츰 한반도의 남단으로 물러가서 AD42년 가야(伽倻)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요직에 있었고, 많은 기술(技術)과 부(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당당하게 들어온 것입니다. 한반도의 다른 지역들은 예부터 한국인들이 이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금천(金天)씨들은 한반도의 남쪽, 즉, 아직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들어와 가야를 건설하였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가야인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철제(鐵製) 투구와 갑옷입니다. 가야가 건립되기 전만 해도 우리 한반도에서는 철기문명(鐵器文明)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야가 들어옴으로써 우리나라에 철기문화가 시작합니다.

아래 왼쪽은 가야의 금관(金冠)입니다. 가운데 그림은 가야의 금동관(金銅冠)들이고요, 오른 쪽은 각종 금속으로 만든 장식품들입니다.




아래 왼쪽 그림은 가야사람들이 쓰던 술잔입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메소포타미아의 힛타이트 족속의 술잔(그 옆 그림) 스타일과 매우 비슷합니다. 동물의 머리와 가슴이 받침이고 몸이 술잔입니다.



가야문화연구소의 김도윤 소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 이 들고 들어온 성 도마교회의 복음이 AD48년에 먼저 가야에 전래되어 가야와 신라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허(許) 황후(皇后)의 능입니다. 

그 아래는 김수로왕 능으로, 왕릉정문에 떡 그릇과 물고기 두 마리 그림이 남아 있고, 가야라는 말이 인도 드라비다어로서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여담으로 인도의 허황옥이 아들을 열을 낳았는데, 그 중에 마지막 두 왕자는 엄마의 성을 따서 허(許)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김해 김(金)씨와 김해 허(許)씨는 혼인을 안 합니다. 

그들이 한 조상을 가졌기 때문이죠.
신라 김유신 장군의 비석에 의하면 그가 헌원의 후예이고 소호 금천(金天)씨의 자손인데 그는 가야 왕의 후손이므로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성도 그와 동성이다 라고 써 있다고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영향이 컸던 초기의 신라에서 외래종교인 불교는 좀처럼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으나, 불승 이차돈의 설득에 넘어간 법흥왕이 AD 527년에 대신들의 반대를 꺾고 비로소 불교를 공인했습니다. 그 후 법흥왕은 AD532년에 기독교 국가였던 가야를 전복시켰고 그 후로는 불교가 한반도 전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법흥왕은 어째서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본래 기독교적인 풍토에서는 고대로부터 왕권이 강하게 작용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를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호국불교 왕권불교로 만든 것이지요. 왼쪽 그림은 화려한 신라의 금관입니다. 강력한 왕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 편 고구려의 사정은 어떠했을까요?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하백(河伯)'의 자손이라 했는데, 이는 순 고구려 말로 '해밝'의 자손, 곧 빛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고구려편에 보면 고구려 사람들이 10월에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성회를 열었는데 이를 동맹이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여사람들은 영고라고 하여 똑같은 일을 했으며, 동예 사람들은 무천이라 하여 똑같은 일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흰옷을 즐겨 입으며 술 마시고 노래하기를 좋아했다고 중국의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을 통해 북쪽으로 들어온 불교가 고구려의 승인을 받은 것은 AD372년 이었습니다. 유일신인 하나님을 섬겼던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입니다. 불교가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기원전 500년경에 시작되었거든요. 그러므로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불교가 시작된 지 900년이나 지나서이고, 신라에는 불교가 시작되고 1100년이나 지나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가 멸망하게 된 원인이 규원사화 단군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발해가 나라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건원을 천통(天統)이라 하여 항상 공경하여 하늘에 제사지냈을 때는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손들이 교만해져서 차차 이것을 폐지하고,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일삼아 드디어는 나라가 시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삼신(三神)할머니의 비밀을 밝히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규원사화 단군기에 나와 있는데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사라지고 이제는 삼신(三神)과 제석(帝釋)을 숭상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매년 10월이 되면 햇곡식으로 떡을 쪄서 귀신에게 드리고 복 받기를 빌었다. 이것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을 섬기던 선조들의 신앙에서 온 것인데, 변질되어서 이제 하나님이 아닌 귀신을 섬기고 부귀와 장수를 무당과 박수에게 부탁하니 이것은 옛 풍속의 찌꺼기로서 커다란 폐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삼신(三神) 할아버지였다가 약한 여자로 바꾸어 삼신(三神) 할머니로 바꾸고, 제석(帝釋)은, 원래 불교에는 신이 없지만 사람들의 신앙을 완전히 떨치지 못해 제석(帝釋)이라는 것을 신으로 제공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