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2010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뒤돌아보아야만 볼 수 있다. - 이진희 목사

<도망자>(Fugitive) 같은 영화들을 보면 죄수들이 탈옥을 해서 목숨 걸고 도망친다. 그러면 그 탈주범들을 잡기 위해 끝까지 달라붙지 않는가? 결국 붙잡히고 만다. “나를 따르리니”라는 표현은 바로 탈주범들을 붙잡기 위해 쫓아갈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FBI가 범인을 추적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붙는다는 것이다.

미국이 빈 라덴을 찾기 위해 문자 그대로 땅 끝까지 동굴까지 지하까지 어마어마한 군사 장비를 동원해서 추적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추적해오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나를 보라. 결국 땅 끝까지 바다 한 가운데까지 쫓아가셔서 그를 붙잡아가지고 오지 않으셨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하나님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오실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추격해 오실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나 하이에나가 끊임없이 우리를 노리고 추격해온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리나 하이에나만 우리를 따라붙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붙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결코 우리는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양이 많을 때는 목자가 앞에서 인도하면 뒤쳐진 양들을 혹시라도 이리나 하이에나가 물어갈까 봐 목자는 뒤쪽에 두 마리 개를 따라오게 한다. 양들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뒤에 오는 양들도 안전하게 목자를 따라갈 수 있다. 바로 양을 지키기 위해 뒤에 쫓아오게 만든 이 두 마리 개가 바로 하나는 주님의 선하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님의 인자하심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앞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의 가는 길을 인도해주시고 뒤에서는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보호하며 따라오고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우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가끔씩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왜 그런가? 앞만 보기 때문이다.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운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

다윗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따라온다고 했다. 그럼으로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려면 뒤를 돌아다보아야 한다. 앞을 보면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없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의심 되는가? 믿어지지 않는가? 뒤돌아보라. 과거를 돌아보라.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라.

앞에 험한 낭떠러지가 있는가? 사망의 골짜기가 놓여 있는가? 원수가 앞에 있는가?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고 사망의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하게 하시고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주셔서 지금 여기까지 우리가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양도 저녁이 되면 양 우리로 돌아간다
양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산에서 저산으로 하루 종일 옮겨 다닌다. 여름에는 서너 달씩 나가 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면 양들은 산이나 들판에서 야영을 한다. 때로는 동굴 같은 곳에서 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런 시설도 없는 곳에서 이슬 맞으면서 밤을 지내야 한다. 그런 생활을 여름 내내 해야 하니,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집이 그립겠는가? 그러다가 가을이 다가오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겨울 내내 따뜻하고 아늑한 우리에서 지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정처 없이 나그네처럼, 떠돌이처럼 살다가가 인생 여정이 끝나고 인생의 황혼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의 본향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거하리로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멈추면 텐트를 치고 그들도 머물렀다. 그러다가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움직이면 다시 텐트를 걷었다. 어떤 때는 생각보다 오래 머물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하루만에 움직일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 2년도 아니고 40년을 그랬으니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장막절을 지키면서 조상들이 광야에서 고생하던 때를 회상한다

언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언제 주님께서 우리를 오라 하실지 모른다. 오라 하시면 언제든지 가야 한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결국은 이 세상에서 텐트 치고 사는 것이다.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은 계속 옮겨 다니면서 살았다. 양을 치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광야에서 베두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집을 짓지 않고 장막을 치고 산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은 하루 밤 머물고 가는 임시 피난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것뿐이다. 하늘나라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집이다. 양들이 겨울이 되면 본래 우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때가 되면 목자의 인도를 따라 우리의 영원한 본향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양이 우리에 들어가려면 - 이진희 목사

목자가 양을 치다가 밖에서 밤을 지내야 할 때, 동굴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마땅한 은신처가 없을 때는 임시 우리를 만든다.
 
주변에 있는 잡목이나 돌을 이용해서 울타리를 만든 다음, 그 위에 가시나무를 올려놓는다. 그러면 양도 밖으로 뛰어 넘어가지 못하고, 이리나 늑대도 그곳으로 넘어오지 못한다.

이 양 우리는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한쪽은 열려 있다. 양들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입구다. 그러나 거기에 문은 없다. 이리나 늑대가 우리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입구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목자가 바로 그곳에서 자기 때문이다. 목자가 문을 지키는 것이다. 목자가 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목자가 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0:7).

예수님이,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울타리로 넘어오는 자마다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셨는데( 10:10), 지금도 중동에서는 양 도둑들이 많다고 한다. 전문 도둑들이 트럭을 대놓고 몇 십 마리씩 훔쳐간다고 한다.

목자들은 막대기 대신에 총으로 무장하고 개들을 키우고, 문을 겹겹으로 자물쇠를 채우지만, 그래도 도둑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목자들은 문 옆에서 잔다고 한다. 그러면 세상 없는 도둑도 양을 훔쳐가지 못한다.

John J. Davis라는 사람이 베두인과 함께 열흘 정도 같이 생활하면서 어떻게 광야에서 양을 치는지를 보고  라는 책을 썼다.

하루는 야영을 하게 되었다. 베두인 목자가 양들을 임시 우리를 만들고 그곳으로 양들을 다 들여보냈다. 그리고 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께서는 저쪽 구석에 가서 주무셔요. 그러면 양들이 귀찮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I will be the door."
“나는 문에서 자겠습니다” 라는 말을 그 베두인은 “I will be the door"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베두인들이 2천 년 전의 예수님처럼 자신들을 양의 문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단순히 비유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목자는 양의 문이 되어서 양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양을 지켜준다.

베두인 장막을 방문했을 때 양 우리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6살쯤 된 꼬마 아이가 문을 가로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 아이가 바로 양의 문인 것이다. 문지기가 지켜 서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못 들어가는 것이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어야 들어갈 수 있다. 문을 열고 닫고 할 수 있는 권세가 문지기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목자는 자기 양이 아니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다른 양은 절대로 양 우리로 들여보내지 않는다. “양의 문”되신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문을 열어주실까? 자기 양에게다. 예수님에게 속한 양에게만 영원한 양 우리에 들어가게 하신다.

목자를 통해서 양들이 양 우리에 들어가듯이,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양도 양 우리에 들어갈 수 없듯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없다( 10:9).

한 작은 도시에 음식점이 있었는데, 30년 동안 그곳에서 유창한 언변과 성우 같은 목소리로 손님들을 매료시킨 연극배우가 있었다.

하루는 이 사람이 시편 23편을 분위기를 살려가면서 아주 감동적으로 낭송했다. 낭송이 끝나자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일어났다.
“나는 오늘로 100살이 되는 탐 롤린스라는 목사입니다. 저도 시편 23편을 좋아하는데, 한번 암송해 보겠습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시편 23편을 천천히 크지 않은 목소리로 암송해나가기 시작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도다.

시편 23편을 암송하는 백발이 성성한 목사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좌중이 숙연해졌다.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바로 5분 전에 이 목사님과 똑같은 시편을 낭송해서 손님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은 배우는 당황했다. 자기는 30년 동안 그 곳에서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아왔지만, 한 번도 이 목사님 같은 그런 반응을 얻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목사님 테이블에 가서 물었다.
“목사님, 오늘 저녁에 저도 목사님과 똑같이 시편 23편을 낭송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반응이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아. . 당신은 오늘 시편 23편을 잘 낭송을 했습니다. 물론 시편 23편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시편 23편에 나오는 그 목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내가 다른 점일 것입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이는 내가 상처를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게 하려하심이라

동물의 세계에서는 어디나 다 서열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양도 마찬가지다. 서열을 정하느라고 그 순한 양들도 치고받고 싸운다.

가을이 되면 양들은 짝짓기 철이기 때문에 대단히 민감하게 된다. 숫양들이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운다뿔로 들이받고 싸우다가 서로 뿔이 엉켜서 풀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꼼짝 못하고 서로 뒷발에 힘을 주고 버티다가 기진맥진하게 된다. 서로 박치기를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 두개골에 손상을 입고 죽기도 한다고 한다.

양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맹수들과는 싸우지 않으면서 자기들끼리는 피터지게 싸운다. 세상과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싸운다. 악한 영적 세력과 공중 권세 잡은 영들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 교인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양들이 싸울 때 목자는 어떻게 대책을 세우는가? 양들의 머리와 코에 올리브기름을 듬뿍 발라준다. 그렇게 하면 이 기름이 미끈미끈 하지 않는가? 서로 부딪혀도 미끄러져 빗나가고 만다. 받으려고 해도 받치지를 않는 것이다. 조금 싸우다 포기하고 만다. 서로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다가 싸움을 끝내고 만다.

목자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는 것처럼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실 때 우리는 서로 들이받거나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된다.

치고받고 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교회이다. 성령의 기름이 떨어진 교회이다. 성령님이 떠나신 교회이다. 그러니까 은혜가 떨어지고 사탄이 역사하고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다.

공장이나 차 같은 것을 보면 기계와 기계가 맞물려 돌아간다. 그때 쇠가 깎이지 않도록 소리가 나지 않고 잘 돌아가도록 윤활유를 쳐준다. 그러면 쇠끼리 부딪히지 않고 깎이지 않고 잘 돌아간다.

성령의 기름이 부어질 때 교회라고 하는 마차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잘 굴러가게 된다다른 사람과 잘 부딪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윤활유가 필요하다. 그 사람의 성격과 마음에 그리고 성품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본인도 상처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자꾸 마찰이 생기는가? 그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성령의 기름이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게 되면 부딪혀도 나도 다치지 않고 상대방도 다치지 않는다. 교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충만하면 모든 것이 원활하게 잘 돌아갈 것이다. 서로 부딪히지 않고 잡음이 생기지 않고 상처를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내가 병에 걸리지 않게 하려하심이라
목자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양들에게 올리브기름을 발라주는 것은 알겠는데, 왜 다른 곳이 아니라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일까양들에게 치명적인 원수는 이리나 늑대가 아니다. 파리다쇠파리, 말파리, 발뒤꿈치파리, 사슴파리, 진디, 등에, 모기, 각다귀 등 양을 괴롭히는 파리들이 참으로 많다. 양은 이런 파리들이 윙윙 거리면서 날아다니면 자리에 눕지를 못한다고 한다. 단지 파리가 귀찮게 해서가 자리에 눕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주기 때문에 눕지를 못하는 것이다.

파리 떼들이 극성을 피우면 목자는 양들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어 파리가 콧속에 알을 까지 못하게 한다. 또 이미 알을 낳았어도 기름을 부으면 콧속에 있는 기생충 알이나 유충들이 죽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들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이다. 이렇게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주면 양들이 안심을 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은 양의 생명을 구해주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사탄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가라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탄은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에 밀밭에 가라지를 뿌린다. 은밀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과 의심을 심는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면 빨리 그 생각을 뽑아버려야 한다. 나만 알고 있으라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다. 사탄이 자주 쓰는 말이다.

날파리들이 양의 생명을 위협하듯이, 사탄이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하지 않는가? 목자가 날파리들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 기름을 발라주듯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실 때, 감히 사탄이 우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손 못 대도록 우리를 해치 못하도록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게 되면 파리 떼들(사탄)이 얼씬도 못할 것이다. 사탄이 우리 안에 까놓은 알들도 다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신앙생활도 그렇다. 기도는 문제 예방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문제가 생긴 다음에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보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기도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것이다.

예수님도 시험에 들기 전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문제가 생긴 다음에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한 발 늦은 기도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없을 때는 기도를 안 한다. 그러다가 문제가 터진 다음에 부랴부랴 기도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목자가 파리가 양의 콧속에 알을 까기 전에 미리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것처럼, 우리는 미리미리 예방하기 위해 기도해야 하고, 예방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고, 예방하기 위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유목민들에게 우물은 재산 목록 제 1호 - 이진희 목사

요셉이 던져졌던 웅덩이는 들판 한 가운데 있었다. 사람이 마실 물을 모아둔 웅덩이가 아니라 농사를 짓거나 양들에게 먹일 물을 모아두었던 웅덩이다. 목자는 여름이 되면 풀을 찾아서 3-4달 동안 계속 돌아다닌다. 그 뜨거운 여름에 풀 한포기 없는 황량한 황무지에서 물을 찾아다니느라 얼마나 힘들고 지치겠는가? 그러다가 이런 웅덩이를 만나게 되면 양들이 물 냄새를 맡고 흥분을 한다.

목자는 두레박을 내려 물을 끌어올린다. 그리고는 웅덩이 곁에 물을 담을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용기(물 통)에 물을 계속 퍼붓는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는데, 여기 잔은 컵이 아니라 양들에게 물을 마시도록 하기 위해 나무나 바위를 파서 만든 물 담는 통을 말한다.

양이 50마리 있다고 하자. 50마리에게 물을 실컷 마시게 하려면 목자는 적어도 두 시간은 계속 물을 퍼 올려야 할 것이다. 100마리라면 3-4시간 걸릴 것이다.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그래도 목자는 힘들어하지 않는다. 양들이 맛있게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마에는 땀이 줄줄 흘러도 마음이 흐뭇한 것이다.

목자는 양들이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계속해서 물을 길어 올린다. 물통에 물이 차고도 넘친다. 그때 양들은 더 없이 행복해한다. 그때 양들이 하는 말이 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목자는 양을 위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린다
라헬이 하루 종일 양을 몰다가 저녁때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양들에게 물을 먹이려고 우물에 들렸다. 그 우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니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29:1-3).
라헬이 이 우물가로 양 떼를 몰고 오자 야곱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자기를 소개하고는 라헬을 끌어안고 울었다.

양들은 목자를 잘 만나야 “잔”이 넘칠 수 있다.
이렇게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우물이나 웅덩이에서 물을 길어 올린다. 그리고 마음껏 마시게 한다. 그럴 때 양들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는데 이유는 바로 이 우물 때문이었다. 양들에게 마시게 할 물이 충분하지 않자 서로 자기 양에게 먼저 물을 마시게 하려고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결국은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지게 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삭에 관한 이야기의 대부분이 바로 이 우물과 관련한 것이다. 마치 이삭은 평생 우물만 파다 만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대 유목민들에게 우물은 재산 목록 제 1호였다. 우물이 많아야 양들을 많이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삭처럼 우물을 많이 갖고 있는 목자가 치는 양들은 항상 “내 잔이 넘치나이다” 노래할 수 있다. 이렇게 양들은 목자를 잘 만나야 그들의 “잔”이 넘칠 수 있다.

시편 23 1절에서는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5절에 가서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어떤 때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채워주신다.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에게 차고도 넘치게 채워주신다. 그래서 흘러넘치게 하시기도 하신다.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음성을 들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그만하면 충분하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느냐? 그런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가 분에 넘치는 은혜와 축복과 사랑을 받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있는가를 아는 사람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주님이 주신 축복을 아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들은 다 거저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받은 것 중 어느 것 하나 그분이 주시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인생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인생에 대해 감사의 태도를 갖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지금 내 잔이 얼마나 채워져 있든지 간에 상관없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다.

왕 정도는 되어야 “상”(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 이진희목사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나는 여기 나오는 상을 학교에서 잘 했다고 주는 상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이 상은 그런 상이 아니라 밥상(테이블)이다. 양들의 밥상은 풀밭이다. 푸른 초장이 양들의 밥상이다. 새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주시고.

광야에 사는 양들에게 있어서 푸른 초장에서 마음껏 꼴을 뜯어 먹는 날은 잔치날이다. 그런데 그런 잔칫날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이리나 늑대. 하이에나가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잔치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구경만 하고 있다.

목자가 양들 곁에서 지켜서 있기 때문에, 밖에서 침만 흘리는 것이다. 양들이 맹수들 앞에서 안심하고 꼴을 먹고 있는 장면을, 다윗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테이블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것은 예사스런 일이 아니다.

고대 시대에는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약 성경에 상에서 먹었다, 다시 말해 테이블에서 먹었다는 말이 20여회 나오는데, 원문에 보면 테이블이라는 말이 없이 그냥 먹었다 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하면서 테이블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 당시에는 보통 사람들은 상 없이 바닥에서 음식을 먹었는데, 부자들이나 높은 신분의 사람들은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었다.

신약 시대에도 테이블에서 먹지 않았는데, 구약 시대는 말할 것도 없지 않는가? 구약에 보면 테이블에 음식을 차려놓고 의자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다. 누군가 하면 바로 왕이다! 왕의 가족만이 테이블에 음식을 차려놓고 의자에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다윗은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귀한 자리에 앉히신다고 고백하고 있다즉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특별한 귀빈처럼 대우해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VIP이다. 그래서 그분의 테이블에서 먹게 하신다. 하나님은 원수가 보는 앞에서 당신의 테이블에 앉아서 먹게 하신다. 이보다 더 통쾌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를 괴롭히고 모욕하고 우리에게 몹쓸 짓을 하던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높여주시고 우리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VIP로 대하신다.

양들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목자
양들이 여름 내내 돌아다니며 꼴을 뜯다가 가을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목자는 “dipping”이라고 해서 해충 제거를 위해 소독약으로 양들을 목욕 시킨다. 양들을 완전히 소독 물에 들어갔다 나오게 한다. 이때는 더러운 양이나 깨끗한 양이나 건강한 양이나 병든 양이나 다 소독 물에 들어갔다 나오게 한다. 그렇게 전신을 소독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더러워진 몸을 깨끗하게 하고 해로운 해충들을 제거하고 상처를 닦아준다.

양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무사히 빠져나와 새로운 초장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양은 그 골짜기를 통과하느라 지쳤다. 여기 저기 상처도 많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양들은 털이 많아서 상처가 났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일일이 털을 헤집어보아야 한다. 사람들도 그렇다.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 감추고 있다.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질러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는다. 양들은 결코 자기가 아프다고 목자에게 와서 말하지 않는다. 양은 아파도 목자를 찾아오지 않는다.

양들이 아픈 것을 발견하는 것은 목자의 몫이다. 그러기 때문에 목자는 양들을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상처 난 곳이 있으면 올리브기름을 발라준다. 우리가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받은 상처가 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나면서 받은 상처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도 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약을 바르면 낫겠지만, 마음에 받은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잘 아물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도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상처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 동안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받은 상처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지만 그러나 아직도 마음으로는 그 골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두운 골짜기 그늘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성지 여행 중에 베두인의 장막에서 머문 적이 있다. 해가 저물어 양들이 다 우리에 들어갔는데 한 마리만 우두커니 혼자 밖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양은 한쪽 다리를 부러뜨렸는지 나무 조각을 대서 고정시켜 놓았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 양이 주인의 방에 있는 것이 아닌가? 주인이 그 다친 양을 자기 방에서 재웠던 것이다. 양인데 아프니까 마치 자기 자식처럼 자기 방에 데리고 들어가서 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마음이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베두인(유목인)들은 철저하게 자기 집에 온 손님을 지켜준다 - 이진희목사

하루는 아브라함이 한창 더운 대낮에 장막 곁에 앉아 있는데 낯선 사람 셋이 왔다. 그러자 얼른 일어나 그들에게 뛰어가서 그들을 강권하여 자기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아브라함은 부랴부랴 빵을 굽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고 해서 그들을 대접했다.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아브라함도 같이 먹지 않고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18:1-8).

아브라함은 손님들에게 빵과 버터와 우유, 그리고 송아지 고기를 대접했는데, 빵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밀가루 전병이이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얇게 펴서 솥뚜껑처럼 생긴 곳에 올려놓고 굽는다. 베두인들의 주식이기도 하다. 우유는 양이나 염소에게서 짠 것이고 베두인들에게 중요한 음료이다. 버터는 염소나 양에게서 짠 젖으로 만든 것으로서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아브라함은 송아지를 잡았는데, 베두인들은 소는 거의 키우지 않는다. 양이나 염소를 키우기 때문에 극진히 대접을 할 때는 양이나 염소를 잡는다.

EBS에서 제작한 <세계 테마 기행, 시리아 2-광야의 자유인, 베두인>에 보면 베두인들이 자기 양을 잡아 손님을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베두인들이 양과 염소를 많이 키우긴 하지만 잡아먹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왜냐하면 양 고기를 먹는 것은 그들에게는 곧 돈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베두인들이 낯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환대를 잘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베두인들은 가족끼리만 모여 산다. 이웃이 거의 없다.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사람 만날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니 얼마나 외롭겠는가? 얼마나 사람이 그립겠는가? 아브라함은 아예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베두인들의 모습이다. 그러다가 낯선 사람이 오면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자기 집에 들어오라고 강청을 한다. 또한 사막을 지나는 사람이 묵을 때가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물이 떨어졌으면 생명이 위험하게 된다. 그래서 환대하는 것이다.

롯도 어느 날 저녁 지나가는 나그네 둘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땅에 맞대고 엎드려”(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집에 묵고 가기를 간청하였다. 그들은 롯이 “간절히 권하므로” 롯의 집에 들어갔다. 롯이 두 나그네를 집에 들였을 때, 온 소돔 성 사람들이 다 몰려와 그들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자 롯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의 두 딸을 그들에게 주면서 마음대로 하도록 하고, 그 대신 그 나그네들에게 손을 대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 나그네 대신 두 딸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그네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 딸들까지 내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잘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베두인의 환대법을 알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백여 년 전에 죄수 2명이 탈출해서 광야로 도망갔다. 그들이 네게브 광야에 사는 베두인 장막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군인들이 그들이 머물고 있는 베두인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죄수들을 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베두인 주인은 내 집에 온 손님이기 때문에 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가 제 발로 나갈 때까지는 절대로 그 사람들을 당신들에게 내 줄 수 없노라고 했다

군인들이 강제로 들어가려고 하자, 베두인 주인이 총을 꺼냈다. 그리고 한방을 탕 하고 쏘았다. 자기 말을 죽였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말을 죽였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도 죽인 마당에 내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소.” 이것이 유목민들의 환대 문화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집에 손님으로 온 사람은 지켜준다. 목자도 마찬가지다. 자기 양을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준다. 그러기 때문에 양들은 맹수들이 보는 앞에서도 꼴을 뜯어먹을 수 있는 것이다.

목자가 양을 치고 있는데 사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할까?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기 양을 지켜주면 진짜 목자고 도망가면 삯꾼 목자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성경 이야기 말고 현실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당신이 목자라고 하자. 그런데 사자가 어슬렁 어슬렁 나타났다. 어떻게 하겠는가? 목숨 걸고 싸우겠는가? 아니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가겠는가?

도망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다. 잘못하면 죽는데, 양 한 마리 지키겠다고 자기 목숨 걸고 싸우다가 죽으면 그게 잘 한 일이겠는가? 삯꾼 목자(고용인)가 아니라 진짜 목자(양들의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도망을 가게 되어 있다. 진짜 양을 사랑하는 목자라고 해도 도망을 간다. 목자가 양을 구하겠다고 사자와 싸운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러다가 죽으면 그게 잘 한 일일까? 목자들이 모여서 추모비라도 세워줄까? 목자가 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지켜주어야겠지만, 목자가 양을 위해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역사 이래로 목자가 양을 위해 죽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탈무드(Mezia 7:8-9)의 규정을 살펴보자. 양을 치고 있는데 이리가 한 마리 나타났다. 그때는 도망가면 안 된다. 이리를 쫓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런데 두 마리가 나타났다. 그러면 도망가도 괜찮다. 잘못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망가서 양들을 3마리 잃어버렸다고 하자. 그러면 물어내야 할까? 아니다. 물어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삯꾼 목자는 늑대나 사자가 나타났을 때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셨는가? 정말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좋은 목자일까? 아무리 좋은 목자라고 할지라도 양을 위해 죽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상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가 양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다. 그런데 목자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다. 인간(목자)이 짐승()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신이 인간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 목자는 예수님 한분밖에 없다.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선한 목자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는 “선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 밖에 안 계시다. 예수님만이 the Good Shepherd, the divine Shepherd, the Perfect Shepherd, the Righteous Shepherd,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목자이시다

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목자도 함께 있다. [이진희 목사]

양만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양이 있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목자가 있다.
? 양은 절대로 목자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물학자들은 만일 인간이 돌보아주지 않았더라면 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졌을 동물이 바로 양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먼저 길들여서 키운 동물이 바로 양이라고 한다.

양은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는 그런 존재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양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먹는 것조차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목자 없이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양이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목자가 양들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양이 목자를 떠나는 순간 그는 죽은 목숨이 된다. 굶어죽게 되고 길을 잃어버려 죽게 되고 맹수의 밥이 되어 죽게 된다.

잃은 양의 비유에 보면 잃은 양을 찾기 위해 99마리를 그 자리에 두고 즉시로 찾으러 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찾으러 가면 되지 않는가? 양은 목자를 떠나서는 하룻밤을 넘기기가 어렵다.

내일 아침이면 이미 너무 늦어버린다. 길을 잃고 방황하다 어디 떨어져서 죽든지, 구덩이에 빠져 죽든지. 맹수의 밥이 되어 죽든지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양의 생명은 100% 목자에게 달려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날 밤 예수님 탄생의 소식이 베들레헴 들판에서 한 밤 중에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맨 먼저 전해졌다. 그들은 자지 않고 깨어서 자기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만 밤중에 자지 않고 깨어서 양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목자들은 밤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양을 지킨다. 깜박 잠이 들면 이리나 늑대가 와서 양들을 잡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자의 수칙 가운데 하나는 밤에도 한 눈을 뜨고 자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121:3-4)

여기서 “지킨다”는 말은 목자들이 양을 지킬 때 쓰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양을 지키기 위해 밤에도 자지 않는 목자처럼 그렇게 당신의 자녀들을 지키신다.

양이 움직이면 동시에 늑대나 하이에나도 같이 움직인다. 그러나 그들이 먹이를 코앞에 두고도 잡아먹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목자가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맹수가 노려보고 있는데도 마음 편하게 꼴을 뜯어 먹고 쉴 수 있는 것은 목자가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으르렁 거리며 우리를 노리고 있지만, 사탄이 감히 우리에게 손대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이다목자는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한다

2천마리나 되는 양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많은 목자들을 고용해서 양을 치고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당신은 많은 양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양들과 얼마나 자주 접촉을 하십니까?
“나는 매일 내 양들과 함께 있습니다. 여름에는 그들과 함께 야외에서 삽니다목자가 양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목자가 아닙니다.
많은 고용한 목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그 사람의 양들을 다 돌보기 때문에 그는 직접 양들을 돌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양들과 같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목자는 양들을 원격조정하지 않는다. 사무실에 앉아서 지시하지 않는다. 목자는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한다. 양들이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양들이 안심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들이 불안해한다. 그래서 목자에게는 하루도 휴일이 없다. 1 365, 하루 24시간 양들과 같이 있다. 같이 움직인다. 같이 산다.

삯꾼 목자는 양들을 돌보다가 맹수가 습격해오면 걸음아 날 살려라고 도망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삯꾼 목자가 아니다.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옆에서 지켜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우리와 함께 그 골짜기를 지나시는 분이시다.

양들에게 목자는 든든한 존재다
양들에게 있어서 목자가 옆에 있다고 하는 것보다 더 든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양은 목자만 옆에 있으면 늑대가 눈앞에 있어도 안심하고 꼴을 뜯어먹는다. 양은 목자만 옆에 있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목자가 책임져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목자는 결코 양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