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2010

베두인(유목인)들은 철저하게 자기 집에 온 손님을 지켜준다 - 이진희목사

하루는 아브라함이 한창 더운 대낮에 장막 곁에 앉아 있는데 낯선 사람 셋이 왔다. 그러자 얼른 일어나 그들에게 뛰어가서 그들을 강권하여 자기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아브라함은 부랴부랴 빵을 굽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고 해서 그들을 대접했다.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아브라함도 같이 먹지 않고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18:1-8).

아브라함은 손님들에게 빵과 버터와 우유, 그리고 송아지 고기를 대접했는데, 빵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밀가루 전병이이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얇게 펴서 솥뚜껑처럼 생긴 곳에 올려놓고 굽는다. 베두인들의 주식이기도 하다. 우유는 양이나 염소에게서 짠 것이고 베두인들에게 중요한 음료이다. 버터는 염소나 양에게서 짠 젖으로 만든 것으로서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아브라함은 송아지를 잡았는데, 베두인들은 소는 거의 키우지 않는다. 양이나 염소를 키우기 때문에 극진히 대접을 할 때는 양이나 염소를 잡는다.

EBS에서 제작한 <세계 테마 기행, 시리아 2-광야의 자유인, 베두인>에 보면 베두인들이 자기 양을 잡아 손님을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베두인들이 양과 염소를 많이 키우긴 하지만 잡아먹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왜냐하면 양 고기를 먹는 것은 그들에게는 곧 돈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베두인들이 낯선 사람들에게 이렇게 환대를 잘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베두인들은 가족끼리만 모여 산다. 이웃이 거의 없다.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사람 만날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니 얼마나 외롭겠는가? 얼마나 사람이 그립겠는가? 아브라함은 아예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베두인들의 모습이다. 그러다가 낯선 사람이 오면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자기 집에 들어오라고 강청을 한다. 또한 사막을 지나는 사람이 묵을 때가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물이 떨어졌으면 생명이 위험하게 된다. 그래서 환대하는 것이다.

롯도 어느 날 저녁 지나가는 나그네 둘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땅에 맞대고 엎드려”(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집에 묵고 가기를 간청하였다. 그들은 롯이 “간절히 권하므로” 롯의 집에 들어갔다. 롯이 두 나그네를 집에 들였을 때, 온 소돔 성 사람들이 다 몰려와 그들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자 롯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의 두 딸을 그들에게 주면서 마음대로 하도록 하고, 그 대신 그 나그네들에게 손을 대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 나그네 대신 두 딸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그네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 딸들까지 내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잘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베두인의 환대법을 알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백여 년 전에 죄수 2명이 탈출해서 광야로 도망갔다. 그들이 네게브 광야에 사는 베두인 장막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군인들이 그들이 머물고 있는 베두인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죄수들을 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베두인 주인은 내 집에 온 손님이기 때문에 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가 제 발로 나갈 때까지는 절대로 그 사람들을 당신들에게 내 줄 수 없노라고 했다

군인들이 강제로 들어가려고 하자, 베두인 주인이 총을 꺼냈다. 그리고 한방을 탕 하고 쏘았다. 자기 말을 죽였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말을 죽였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도 죽인 마당에 내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소.” 이것이 유목민들의 환대 문화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집에 손님으로 온 사람은 지켜준다. 목자도 마찬가지다. 자기 양을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준다. 그러기 때문에 양들은 맹수들이 보는 앞에서도 꼴을 뜯어먹을 수 있는 것이다.

목자가 양을 치고 있는데 사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할까?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기 양을 지켜주면 진짜 목자고 도망가면 삯꾼 목자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성경 이야기 말고 현실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당신이 목자라고 하자. 그런데 사자가 어슬렁 어슬렁 나타났다. 어떻게 하겠는가? 목숨 걸고 싸우겠는가? 아니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가겠는가?

도망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다. 잘못하면 죽는데, 양 한 마리 지키겠다고 자기 목숨 걸고 싸우다가 죽으면 그게 잘 한 일이겠는가? 삯꾼 목자(고용인)가 아니라 진짜 목자(양들의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도망을 가게 되어 있다. 진짜 양을 사랑하는 목자라고 해도 도망을 간다. 목자가 양을 구하겠다고 사자와 싸운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그러다가 죽으면 그게 잘 한 일일까? 목자들이 모여서 추모비라도 세워줄까? 목자가 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지켜주어야겠지만, 목자가 양을 위해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역사 이래로 목자가 양을 위해 죽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탈무드(Mezia 7:8-9)의 규정을 살펴보자. 양을 치고 있는데 이리가 한 마리 나타났다. 그때는 도망가면 안 된다. 이리를 쫓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런데 두 마리가 나타났다. 그러면 도망가도 괜찮다. 잘못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도망가서 양들을 3마리 잃어버렸다고 하자. 그러면 물어내야 할까? 아니다. 물어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삯꾼 목자는 늑대나 사자가 나타났을 때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셨는가? 정말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좋은 목자일까? 아무리 좋은 목자라고 할지라도 양을 위해 죽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상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가 양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다. 그런데 목자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다. 인간(목자)이 짐승()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신이 인간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 목자는 예수님 한분밖에 없다.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선한 목자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는 “선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 밖에 안 계시다. 예수님만이 the Good Shepherd, the divine Shepherd, the Perfect Shepherd, the Righteous Shepherd,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목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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