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2010

제19강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 - 여주봉목사

히12:26-29절입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의 예배가 가운데 하나님이 참으로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욱 거룩한 불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 중요한 한 부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주일에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본문을 보면 28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에서 섬기라는 말은 헬라어로 라크류온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유대인들이 공식적인 예배를 말할 때 쓰여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성경이 이 구절을 번역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예배할지니’라고 번역합니다.

여기보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할 때 그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본문에 보면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당연히 더욱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해야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8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 나라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리온 모리스라는 학자는 이 진동치 못할 나라는 최종적인 하나님의통치가 실현되는 실체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권적인 통치를 말하는데 이것은 최종적으로 주님의 재림으로 성취됩니다. 이 세상 나라는 멸하게 될 것이고 새나라와 새하늘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초침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며 운행하는 임재와 능력이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림 때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그 사이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하고 하느냐면 우리가 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붙잡을 뿐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자로 합니다. 신약백성인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해야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절이 하나님의 부흥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때에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출애굽시대입니다. 시내산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셔서 육성으로 말씀하실 때 두려워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때 흔들릴만한 것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다고 하지요. 26절을 보면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이제는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약 학개서 2장에 약속된 말씀입니다.
학2:6-9절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보면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과도 관련된 구절입니다. 물론 가장 큰 부흥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흔들릴만한 것은 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가 없었습니다. 우리 바짝 깨어있어야 합니다. 


지진만 해도 옛날에는 진도 7.0이상은 자주 있지 않았어요. 지금은 너무나 흔합니다. 복음서 중에서 말세에 대한 구절이 마24장 눅21장 막13장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주님이 암하실 때 흔들릴만한 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땅뿐아니라 국가도 없어졌다 생겼다 합니다.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습니다. 아시아선교센타 때문에 달러를 주시하고 있는데 900원하던 달러가 1500까지 올랐습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흔들릴만한 모든 것을 흔들 것인데 그 이유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세위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이 신약시대 우리에게 해당되고 재림과도 해방되지만 하나님의 부흥과도 해당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2.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멸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라기 시대가 좋은 예입니다. 말1장 6-14절까지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절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은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짐승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온전한 제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병든 것을 드렸습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타락하면 자신의 죄를 정당화시키지요. 당시 짐승의 피로 드리는데 아니 병든 것은 피가 없느냐 어차피 피를 드릴 것인데. 또 번제는 태워 드리는 것인데 어차피 태울 것인데 좋은 것 나쁜 것 구별할 필요가 있느냐. 그래서 병든 것을 드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이 9-10절을 보면 어떻게 반응하셨는가를 보여줍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여기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셨어요. 받지 않으셨어요. 그들의 예배가 헛된 예배라고 합니다. 얼마나 그 예배를 싫어하셨는지 성전문을 닫아서 더 이상 헛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런 행위를 뭐라고 말씀하신다고 표현하십니까?
7절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12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저들이 하나님의 제단을 더럽게 여기는 것이야!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저들이 하지도 않은 말은 했다고 하는 것도 아니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말의 소리가 아니라 행동의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14절입니다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영어성경을 보면, 속이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속이라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수컷 제물을 가지고도 맹세까지도 했어요.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리겠다고. 그런데 좋은 것은 자기가 갔고 쓸모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어요.

그들이 말로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행동은 실제로 하나님의 이 제단을 경멸히 여겨야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세요. 두 가지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여기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이 찬양을 받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과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연결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서방에서 동방까지 언제 높임을 받으십니까?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실 때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9장에 보면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선하신 성품이 계시됨으로 인하여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해일이 다가오는 것처럼 영광으로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부흥으로 임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은 참된 예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것과 참된 예배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임이 임하는 것과 예배회복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와 중보기도라는 십자가복음학교를 했어요. 이번에는 하나님이 정말로 함께하셨어요. 제가 섬기면서 무엇을 경험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참된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이 많으시구나를 깨달았어요.

뿐아니라 또 한 가지가 있어요. 이번에 예배와 중보기도학교를 하면서 기도중에서도 그렇고 소그룹으로 나눌 때도 그랬고 지금까지 어떤 집회보다도 하나님의 부흥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을 많이 말씀하셨어요.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실 것을 어느 때보다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기 위해서는 예배회복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는 것과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것이 연결되어 있어요.

말라기서에 그 당시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가 드려졌어요. 그런 말을 하다가 중간에 이런 말씀을 하셔요. 열방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겠고 이방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을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가 드려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에는 참다운 예배가 회복될 것이고 참된 예배가 회복되기를 위해서 부흥으로 임할 것도 보여주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는 것과 참된 예배가 연결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시는 목적 또한 참된 예배가 회복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뒤집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아까 읽은 말라기 1장을 보세요.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누구를 멸시했다고 합니까?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합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그럽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격을 말합니다. 여기보면 저들이 예배를 멸시했는데 하나님은 저들이 나를 멸시한다고 반응하십니다. 여호와를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예배를 멸시하면 곧 누구를 멸시하는 것이냐 즉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심각합니다.

그런데 이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 타락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멸시했는데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병든 것 저는 것을 드린 것은 열매에 불과합니다. 다른 모양으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가장 살지도 좋은 것을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똑같이 저들이 하나님을 멸시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병든 것 저는 것은 열매에 불과합니다. 근본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 그들의 중심이 문제입니다.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서 1장 6절에서 말합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불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주인이라 부르면서도 아버지일진데 공경함이 어디 있고 주인일진데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경함 두려워함을 말하는데 이것이 정확하게 하나님을 경외함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한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예입니다. 삼상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2-17절까지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13-16절까지를 보면 그 당시 예배를 드릴 때 어떻게 했습니까? 제물을 가지고 오면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를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하는데 제사장들의 하인이 와서 먼저 가져가는 겁니다. 이들은 제사에는 관심이 없었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크다고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한 가장 주된 요인이 무엇입니까? 먼저 제물을 빼앗아다가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은 열매에 불과합니다. 

얼마든지 다른 모양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시대처럼 제물을 뺏어다가 자신의 배를 채우지 않았습니다.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도 똑같이 했습니다. 채찍으로 휘두르며 상을 엎으시고 소를 내쫓았습니다. 그들도 여호와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안보면 표면적인 것만 보고 아 저들은 저렇게 했지만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해답이 12절에 잇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인 지식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서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을 경외함은 같이 갑니다. 다시말하면 저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예배를 멸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29-30절을 보면 또 무엇을 멸시했다고 합니까?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29절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30절에서는.  하나님이 말을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은 보증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하나님을 떠나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거두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종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자를 경멸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와 아들들은 하나님을 멸시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저들이 하나님을 멸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배를 멸시한 것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예배가 싫었으면 문을 닫아서 제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라고 했겠어요. 또 얼마나 하나님이 참된 예배를 원하셨으면 때가 되면 열방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겠어요. 이와같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멸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양은 다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멸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3.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 이하를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를 보면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소멸하시는 불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과 질투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신명기 4:24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질투가 함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소명하시는 불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가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라기 시대만 해도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의 경우도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고 하나님의 약속이 거두워지고 주권적인 통치가 거두어집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심판입니다. 거기서 돌이켜지지 않으면 더 큰 심판이 있습니다. 예배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이 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는 여기서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수록 하나님의 기준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 현실화됩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첫째 예가 나답과 아비후입니다.
레위기 10:1-3절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으로 제사드릴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불로 제사했습니다. 다른 불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기준과 방법이 아닌 것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닥쳤는데 제단으로부터 불이 나서 태워죽였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약시대는 은혜의 시대라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은 분입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앞 구절에 답이 있습니다. 9:23-24절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여기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신 시대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이 들어가 하나님을 뵐 뿐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예배하고 축복할 때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이들이 임의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니까 나답과 아비후도 자신들도 제사드리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어쩌면 그들도 자기 부모들처럼 자시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심판이 임했어요.


그때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10:9절입니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이것을 보면 무엇을 추측할 수 있느냐면 이들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 술에 취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데 술취한 가운데 임의대로 세상의 방법 자기 원하는 대로 다른 불을 드렸더니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심판하셨습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이 영광으로 머물러 계신 시대입니다. 심판을 보면서 저는 두려웠습니다. 두 아들이 죽었는데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옷을 찢는 것도 머리를 푸는 것도 성전문을 떠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만일 떠나면 그들 뿐아니라 온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약에도 좋은 예가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행5장에 나옵니다. 이들이 재산을 팔아서 일부는 숨기고 일부만 교회에 가져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성령을 속였다고 하면서 왜 거짓말하냐고 하자 그 즉시 죽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보다 죄를 덜 지어서 지금 살아 있습니까? 오늘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면 예배 끝나고 문을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실체를 잘 모르니까 그냥 넘어갑니다. 어떻게 이해해야하냐? 앞을 보아야 합니다. 2장에도 나오고 4장에도 나옵니다. 초대교회 중에서 재산을 팔아서 나누었습니다. 


4장 36절을 봅시다. "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대표적인 한 사람이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동기부터 순수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팔기 전에도 네 것이고 판 다음에도 네 것이다. 문제는 일부를 드리면서 다 드렸다고 거짓말한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가 태동하는 시기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이 교회가 확장되려는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 교회에 시기 질투로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할 때 두려운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부흥과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 소중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다루는 곳에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한 팀들이 은혜를 받으러 가는데 통역해주면 비용을 대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갔습니다. 갔더니 큰 장소에 사람들이 가득했어요. 그분들이 가서 통역하려고 앉아 있었는데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엄청나게 강하게 임했어요. 그래서 의자에 앉아 있지 못하고 복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때 또렷하게 제 마음 속에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에게 있는 기름부음을 건드리지 마 그러면 네 속에 있는 기름부음도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고 하셨어요. 


성령의 기름부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함부로 다루고 비판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지금도 교회안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분들을 함부로 판단하면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임재를 거두십니다.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질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기름부음 거룩함 등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술에 취해서 함부로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수록 더욱 강력합니다.
고린도교회를 보면 성찬을 멸시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경외함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필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은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오늘 우리예배회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의 관계를 살펴보았고 다음 주일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이냐를 볼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어떤 축복을 주시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흥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아멘.

제18강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 - 여주봉목사

시24:1-6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우리가 예배회복을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2주간 예배와 중보기도학교 1기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참으로 함께하셨습니다. 섬기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예배회복에 관심이 있는지 알겠어요. 또한 방해도 심했어요. 그러면서 한편 느끼기는 사단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예배를 참소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는데 집중적으로 살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인데 일주일에 한번씩 모이니까 어떨 때는 몇 개월이 걸려서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어떻든 예배회복이 절실합니다.



거짓된 예배를 살펴 보았는데 오늘부터는 참된 예배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3절에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 예배로 나가는 구절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여호와의 산은 성전이 있던 시온산을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가는 구절입니다.


6절에서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하나님께 예배로 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아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화하실 때도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예배인데 그 당시 종교적인 헌신과 의식은 많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속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전혀 없을 때 예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우리 예배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럴싸한 의식이 많아도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문학에는 평행법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는 말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이 평행법으로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이며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1.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삶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분리된다면 우리의 예배는 입술뿐인 예배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절대로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은 타락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면서 참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을 뿐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은? 자기의 목적과 목표와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것이 삶의 패턴인 신앙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 마실 것 고기 위기에서 구원 등 자기들의 필요와 처지를 따라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을 구하는 것이 그들이 구한 전부였습니다. 이런 삶의 자세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하지 않고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위해 이런 것이 우리의 삶의 패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가치관이 깔려 있습니다.



한 자녀가 있습니다.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필요가 생길 때마다 ‘돈 줘’ 합니다. 돈을 받으면 필요가 채워졌기 때문에 또 혼자 삽니다. 이 자녀에게는 부모와 교제 부모의 의중 이런 것은 관심도 없습니다. 또 필요가 생기면 부모에게 옵니다. 부모에게 잘합니다.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도움을 얻어내야 하니까. 그래서 부모에게 와서 다시 말하지요. ‘돈 줘!’ 그러면 부모가 잘 안주려고 합니다. 그러면 아침저녁으로 떼를 씁니다. 돈줘 돈줘 돈줘. 그래도 안주면 날짜를 정해놓고 떼를 씁니다. 일주일동안 이십일 동안. 그래도 안주면 안먹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받으면 자기 필요가 채워졌기 때문에 곧바로 일어나서 나갑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한다면 어떻겠어요. 머리가 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나올 때 자기들의 목적 필요 처지를 위해서 하나님께 도움만 구하려고 옵니다.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께 나오는 목적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나님의 의중과 목적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필요만 채워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채워지면 자기 길을 갑니다. 그러다가 필요가 생기면 또 하나님께 나옵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으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절대로 안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급하고 넘어가야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올바른 신앙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는 은사만 받으면 될 줄 압니다. 그런데 은사가 나타나도 심지어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안되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수많은 은사가 나타난 교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세운 교회 중에 가장 영적으로 어린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가장 문제 많은 교회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삶은 변화되지 않고 우리 삶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전환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란? 
한 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이 그분이 우리의 목적이 되는 삶입니다.

1)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는 삶

2)하나님의 목적을 알아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

3)하나님의 길을 따라 그 길로 행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



(1)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이 우리의 유일한 보화되는 삶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신앙은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 유일한 보화가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를 구하는 상인 비유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값진 진주이고 보화이며 우리 모든 것으로 그것을 샀다는 것입니다. 즉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재산이며 보화라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이미 타락한 예배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를 믿어도 자기 목적 목표가 살아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일한 보화가 되는 삶이 참된 신앙이라고 하면 낯설게 느낍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 년에 두 차례씩 이웃초청 잔치를 하는데 다음번에는 한동대 총장인 김영길 박사를 초청합니다. 그분은 창조과학회 회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원인이 아니라 인격체이십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사랑하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보화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화를 발견하고 그분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는 것, 즉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보는 자들만이 살 수 있습니다. 그 가치를 보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보화가 되는 삶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시40편에 다윗의 시가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는 한 가지 그것을 구하겠다고 합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나는 한 가지를 하나님께 구한다. 이것이 내가 찾는 것이다고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분을 찾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도 고전2장 2절에서 말합니다.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여주봉 목사의 개척초기에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셨던 간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목회했었는데.



사역을 할 때도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 사역하는 것입니다. 사역이 결국 자기 체면을 위한 것이고 자기 신분을 대변하는 것이고 자기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며 목표가 되는 자리게 가야 진짜 사역이 가능합니다. 그때 교회성장을 위한 모든 노력이 내려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아지는 대로 회개하고 돌이키고 했습니다. 줄기차게 주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영생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하나님의 목적을 알아 그 가운데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아 우리의 모든 삶으로 동참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모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했습니다. 출33장 7절 이하입니다. 회막을 세워놓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셨습니다. 모세가 거기에 들어갈 때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얼굴과 얼굴을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졌던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2-13절부터 봅시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아주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점은 금송아지를 섬긴 이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하시려 하자 모세의 기도 때문에 거두셨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주님의 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길 뿐아니라 주님의 목적 주님의 의중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나도 행하고 주님의 의도한 곳에 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입니다. 

지속적으로 주님의 의도한 자리에 머물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같이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 그분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얼마나 다른 태도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손만을 구했는데 모세는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소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말합니다.

‘어느 시대에 그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그 시대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무엇인지 보고 그 일에 온 삶으로 동참해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는 하나님의 의도와 길을 알아 그 가운데 온 삶으로 동참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3)하나님의 길을 알아 그 가운데 행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최선과 좋은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알기 위해 사모하며 서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길에 섰습니다.

그래서 시편 128편 1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대하6:31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며 주의 길로 행하리이다”


시5: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25: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이처럼 주의 길을 알기 위해 구해야 합니다.



지난 주인가 제가 예배 끝나고 기도사역을 하는데 내려가서 기도해주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한분에게 갔습니다. 제가 몇 마디 기도하다가 그냥 갈까 하다가 물어보았어요. 그런데 그분이 런던에 사셔요. 지난주에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기도하는데 인생에서 중요한 처지에 놓여있음을 알았어요. 결정해야 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인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할 것인가였어요. 이런 선택을 할 상황이었어요. 

우리 삶에는 날마다 매 순간 선택의 순간에 놓입니다. 내 목적대로 하나님의 길대로. 그런데 여러분이 세상의 길을 따라 가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주면서 그분에게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했어요.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직장 다시면서 날마다 결정해야할 것이 많아요. 사업하는 분들 많은데 여러분이 삶 속에서 결정해야할 것 중에서 하나님의 길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찾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로 가야 하나님이 뒷받침하십니다. 하나님의 길이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길로 행하기 위해 기꺼이 때로는 대가를 지불하시더라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길로 행하려면 주와 동행해야 합니다. 주의 길을 알고 그 가운데 서기를 원하는 것 없이 주와 동행할 수 없습니다.



2.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하는 삶으로 전환해야할 뿐아니라 지속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처음에 진짜 하나님의 얼굴만 구할 때 교회가 세워질까 하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믿음으로 의지하니까 어느 순간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셨어요. 문제는 거기서 얼마나 지속적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일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이 높아져 구하지 않으면 점점 사라집니다.

빌3장 7-14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의 목표는 주님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자 손해로 배설물로 여기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삶이다. 삶의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주님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연초에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마음을 비추어주시는데 지속적으로 주님을 찾는 일에서 너무나 멀리 떠나있는 것을 보여주셨어요. 4개월도 안되었는데. 제 속에 타락함이 가득했어요. 하나님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배고픔을 주시라고 절박하게 기도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해야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3.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고 지속적으로 얼굴을 구할 뿐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 예배하라 나와야 합니다.



시26:8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언약궤가 노출되어 있었어요. 그 위에 영광의 임재가 노출되어 있었어요.



시27: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여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을 알고 주님의 목적을 구하고 주님을 찬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1)예배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배는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 아닙니다. 예배를 수단으로 삼는 순간 우리의 예배는 타락한 것입니다. 컨퍼런스 기간에 기도사역을 하는데 하나님이 사역을 막으시면서 하나님이 오늘날 목회자들이 이렇게 예배한다고 하면서 회개하라고 하셨어요. 평신도 컨퍼런스 때인데 목회자들을 초청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나왔어요.


첫째, 예배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


둘째,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손을 구하여 나오도록 사람
       들을 인도한 것.


셋째, 예배를 인도하려고만 했지 자신은 예배하지 않은 것.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가 되려면 예배가 수단이 아니라 자체가 목적인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2)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라여 나오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과 만남입니다. 살아계신 인격체 하나님과 만남입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고 어느 계층이 나오느냐 보다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마당만 밟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하러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마음을 알고 의중을 알고 길을 아는 것이 없으면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예배 때마다 스릴 있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타성에 젖어있는 예배라면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는 경각심을 가집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4주 동안 그렇게 하나님과 만남이 없었다. 그러면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나는 육개월 동안 그런 하나님과 만남이 없었다. 나는 일년 동안 없었다. 여러분 더 심각한 것입니다. 나는 예수믿으면서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여러분 심각성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만남이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세 가지로 전락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는 의식으로 전락해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의 습관으로 전락해서도 안됩니다. 또 하나의 형식으로 전락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기억하셔요.



3)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준비해야 합니다. 찬양시간에 일찍 나와야 합니다. 방해하는 요소를 준비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1)죄책감입니다. -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죄책감 때문에 못나갑니다. 미리 나와서 예수보혈을 의지하고 해결받아야 합니다.



(2)분주함입니다. - 우리가 얼마나 분주합니까? 미리 나와서 준비하면서 일정시간 기다리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3)조급함입니다. - 우리는 조급해 합니다. 예배 빨리 끝나고 가서 할 일이 많아요. 그러면 절대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조급함이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생각해보세요. 사랑하는 연인과 만나는데 30분이 되었는데 왜 안끝나는 거야 그렇다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배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의무여요. 그래서 빨리 끝나고 가서 다른 일을 해야해요. 그래서 조급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그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배는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하는 것입니다.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4)자기 의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 제 아내는 기도제목이 있으면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올려 보냅니다. 그리고 내려놓습니다. 지혜로운 일입니다.



(5)염려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구해서 나아야 합니다. 주님께 감사하기 위해 나와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에는 예배에는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알티킨델 목사는 말합니다. '참된 부흥의 주된 표적은 사람들이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에 대해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는다.’



로이드죤스는 말합니다. ‘부흥에 이르는 불가피한 단계는 하나님께 대한 갈증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생생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며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일어서서 자신의 원수들을 훼파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불타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부흥의 필연적인 예비단계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나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고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길을 알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 동참하게 됩니다. 아멘.

제17강 인본주의와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신명기 30:15-16절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동안 거짓신앙체계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인본주의 예배를 살펴보겠습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신앙에 대한 왜곡된 잘못된 이해로 가짜 신앙입니다. 진자 신앙같이 보일 때도 있지만 실제로는 가까여서 생명이 없습니다. 이번에 NWS에 갔더니 양란이 있었어요. 잎사귀와 몽우리가 있어서 만져보았더니 진짜 같았어요. 언제 가짜인줄 알았냐면 꽃 잎사귀를 만져보았을 때 가짜인줄 알았어요. 요즘은 너무나 가짜가 진짜 같아서 분별이 참 어려워요. 가짜이니까 아무리 아름다워도 생명이 없습니다. 거짓신앙체계는 가짜이기 때문에 모양은 그럴듯해도 생명이 없습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로 삼위일체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중 한 축이 인본주의입니다. 율법주의가 거짓신앙체계에 이론을 제공한다면 기복신앙은 그 배후에 탐심을 사리키고 인본주의는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1.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펴보았어요.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중심적입니다. 하나님중심적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데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삶입니다. 거기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보라 오늘 내가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다고 하십니다. 한쪽에는 생명과 복 다른 쪽에는 사망과 복을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을 택하기를 원하십니다(19절). 다시말해서 복을 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생명을 택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 여호와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명기에 나오는 6장에 나오는 것처럼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의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다해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존재를 다해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데 아내 뿐아니라 다른 여자로 사랑하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나뉘어진 마음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바알도 사랑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면.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면 우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존재를 다해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을 얻는 방법 중 하나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존재를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생명과 복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생명을 얻는 길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삶입니다.

수22장 5절 이하입니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6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이 말씀은 요단동편 두지파 반을 보내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이 무엇인가를 요약한 것이 다음 말씀입니다. 이 말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명령한 명령과 규례를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신30장과 같은 말입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은 존재를 다해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다음에 그 모든 길로 행하라. 다음에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그를 섬기라고 합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을 한 마디로 줄여놓은 말입니다. 그중에서 하나가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역시 여기도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을 신앙의 핵심임을 볼 수 있습니다.

렘7장을 봅시다. 21절 이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22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NIV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해라. 너희 희생제물에다 번제를 더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면. 그들은 많은 희생제물을 드렸고 거기다가 번제를 드렸음을 알 수 있어요. 번제를 어떻게 드렸는가 하면 렘6장 20절에 보면 오늘날 에디오피아나 남미예멘 인도까지 가서 특별한 향품을 사다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음을 볼 수 있어요. 인도를 가려면 지구의 시분의 일을 갔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번제를 더하라고 하면서 고기는 너희나 먹으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런 엄청난 희생을 받지 않으시는가? 성경이 말하는 규례에 맞지 않는 흠 있는 것을 드려서요?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좋은 짐승으로 드렸어요. 이사야시대와 이 시대는 별로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안받으신다고 하십니다. 본인들은 안받으시는 줄 몰랐어요. 왜냐하면 안받으시는 줄 알면서 그런 엄청난 희생을 드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본인들은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전혀 받지 않았어요.

그러면 왜 안받으셨는가? 22절입니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그런데 여러분 잠깐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건져낼 때 번제와 희생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아닙니다.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나 신명기 등등을 보면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잔뜩 말씀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전체의 절만 이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는 말씀하시고 언제는 다른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거짓말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말씀 안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할 때 내가 너희에게 말한 가장 핵심적인 것, 가장 중대한 것이 번제나 희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번제와 희생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드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가장 본질적인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엇이냐?
다음절에 나옵니다.23절입니다.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여기를 보아도 하나님이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질과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는 하나님 종심적인 삶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서 말하는 생명이 우리에게 넘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4-26절입니다.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이들은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귀도 안귀일이고 하나님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라는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하나님의 중심적인 삶을 살라는 말에는 귀로 안기일이고 그저 많은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에서 너희를 건져내신 것은 이런 것 행하라고 한 것이 아니야. 내가 너희를 건진 이유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고 내 길로 행하라고 부른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을 예레미야 전체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의 필수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필수입니다. 출33: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신30장 15-16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 관계
신8: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길로 행해야 합니다.


출33: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길로 행하지 않고 40년 동안 하나님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많은 기적을 경험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길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격노케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길을 의롭습니다. 시145:17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
하나님의 길은 옳습니다.


신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하나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시77:13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하나님의 길은 사랑스럽고 신실합니다.


시25:8-10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9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하나님의 길은 영원합니다.


합3:6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열국이 전률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길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 반박합니다. 

겔18:25, 29, 33:20절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2.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길로 행합니다.
다시말해서 세상의 길로 행합니다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길, 혹은 세상의 길로 행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타락의 본질이 뭔가? 자기중심적인 삶의 한 부분이 자기 방법 세상의 방법을 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하면 자기  길 세상의 길을 따라 삽니다.

이사야53장 6절을 보면, 인류의 타락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는데 사람들이 작자 자기 길로 행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장은 예수님의 구속을 예언하는 말씀인데 인류의 타락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데 각기 자기 길로 행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것입니다.

1)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길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올바른 신앙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하나님의 의중을 알기를 하나님의 방법을 알기를 하나님을 더욱 더 알기를 더욱 사모하고 열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조정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여 우리 삶을 조정하여 동참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삶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우리 삶이 같이 있기를 열망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길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하나님을 믿지만 결국은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자기 자신 잘되고 자기 사업 잘되고 돈 많이 벌고 직장에서 승진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길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과 자기들의 목표를 채워질 그런 메시지만 듣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지난 주에 살펴본 내용입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30장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8-11절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라 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보세요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런 모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러 오면서 하나님의 길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처럼 타락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하여 심지어 하나님의 길을 반박합니다.

2)자기 방법 혹은 세상 방법대로 사는 것이 악한 삶입니다.
사55장 6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여러분 지금이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을 때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부르면 응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나오면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여러분 하나님 찾기 원하십니까? 만나기 원하십니까? 경험하기 원하십니까? 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조건이 있어요.
7절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악한 자 불의한 자는 누구입니까?
8-9절에서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자기 생각 자기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악한 자 불의한 자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려면 자기 길 자기 방법 세상의 길 세상의 방식대로 사는 삶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다윗의 장막에 와서 주님을 간절히 찾는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윗의 장막에 나와서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날마다 와서 찾고 사모하고 주님을 알기를 열망하고 주님을 경험하기를 열망하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갈말해도 세상의 방법을 따라 사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기 길 자기 방법 세상의 길 세상의 방법을 따라 사는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나오라 이때다 내가 만나줄게 내가 용서해줄게 하지만 자기 길 방법을 버리고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을 길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과 우리 길이 하늘이 땅에서 높은 것처럼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3)자기 길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를 보세요. 자기 길을 따라 행하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3.인본주의의 정의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길과 법도를 떠나 자기 방법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엡2:1-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기서 바울은 안믿는 이방인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말합니다.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있는 불신자들의 삶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이 세상풍속을 따르는 삶, 타락한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단을 따르는 삶이라고 합니다.

렘7장 24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여기보면 이 시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안식일을 지켰고 향품을 사다가 번제로 드렸지만 그들의 삶은 안믿는 이방인들의 삶과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주일날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새벽기도하고 드리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것이 많습니다. 너무나 타락한 삶입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바알을 향한 삶이었습니다.

렘11:8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느니라 하라”


16:12절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18: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이것이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좋은 약속들을 임의로 뽑아서 그들에게 생명이다 축복이다고 외치는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은 거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3:16-17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히브리어에는 평행법이 있습니다. 두 개의 문장을 병행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지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과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엄청난 제물을 드렸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행동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자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의 예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인본주의는 타락한 것입니다.

반면에 회복되려면 자기 길을 따르는 삶에서 돌이키는 것이 포함됩니다. 렘3장 17절을 보면 나중에 예루살렘에 회복될 것에 대해 말합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열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


회복되려면 이것이 포함됩니다.
이제 인본주의가 왜 죄인가가 보이시지요?

4.인본주의 예배
인본주의는 타락한 것으로 거짓신앙체계입니다. 제가 가짜라고 말씀했지요. 왜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일까요? 많은 의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짜 신앙의 모습 같습니다. 그런데 가짜인 이유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의식들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의 온 삶으로 동참하는 우리의 삶이 신앙의 본질이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핵심이고 이런 것은 수단입니다. 


그런데 의식은 많지만 본질에서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떠나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을 잘못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서 의식들을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많은 의식들을 행하는 이유는 중심에 있는 탐심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되고 우리의 모든 것이 내려지고 하나님을 우리 모든 것으로 사는 삶을 살 때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진정한 만족과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신앙체계에는 탐심이 가득하여 하나님은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많은 예배를 드리지만 자기 문제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헌금하고 예배하고 새벽기도하고 그런 것입니다. 실제로는 탐심이 가득하여 하나님이 수단된 삶은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차피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이 목표요 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길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살아가는 방식은 세상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있는데도 떠나있는 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예레미야시대에는 수많은 서기관 제사장 율법사 할 것 없이 이같은 이해를 가지고 그저 헌신만 많이 하면 축복이라고 외쳤어요. 하나님은 그것을 거짓이라고 하셨는데. 이제 왜 이것이 가짜인지 보이십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 이런 이해가 너무나 팽배합니다. 교회는 극도로 침체되어 있고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한국교회가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만큼 심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새벽기도 드렸으니까 하나님께서 내 자식 좋은 학교에 가게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예배도 종교적인 의무 하러 옵니다. 


이것을 하면 하나님이 내 문제 해결해 줄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들의 관심은 예배의 절차와 순서를 때우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고 예배하는 데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왜 가짜인지도 모릅니다. 진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그래서 인본주의 예배를 살펴봅니다. 인본주의 예배 형태는 다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과 방법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길과 방법을 따르는 모든 것이 인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종류는 수없이 많을 수 있습니다.

제가 우선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쓴 하나님과 신선한 만남이라는 책에서 다섯 가지를 언급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여 산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자기자원으로 사는 것이지요. 이것 하나만 해도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 심각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자기와 자기의 입지를 먼저 챙깁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높인다.
하나님은 자기 목숨을 잃으라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우리가 가진 것을 움켜쥐려고 애쓴다. 이것이 심각합니다. 

하나님은 주님께서 일꾼을 보내주도록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조정해서 봉사하게 만든다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그분은 인본주의라는 말을 안씁니다. 그분은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어쩔 때는 목회자들이 교회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순종하기보다 성도들이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성경구절을 통해서 강사를 통해서 회유하고 선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인본주의입니다.


어떨 째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고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여 자신의 삼에서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의 길로 조정하기를 기도하며 기다리기보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잘해줄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인본주의입니다.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막아버리는 인본주의입니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오늘날우리 가운데 있는 인본주의는 방법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제가 그중에서 다섯 가지 주된 부분을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감정주의 예배
우리의 신앙이건 우리의 예배건 우리의 찬양이건 우리의 설교건 우리의 가르침이든 우리의 권면이건 그것이 사람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이면 그것은 철저하게 타락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길과 목적을 발견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우리 마음 속에 감정이 복받쳐 오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 신앙에는 감정이 포함됩니다. 문제는 사람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타락한 것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리더십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구절입니다. 고린도후 4장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관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는데 반드시 알아야할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교회안에서 목회자 뿐아니라 평신도 리더들에게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부모이건 직장에서 상사이건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고후4장 1-6절입니다.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바울은 전할 때 전혀 낙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성도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들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분을 못보고 성도들을 보고 저를 보면 낙심합니다. 낙심치 않고 어떻게 했는가? 자기를 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전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바울처럼 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 목적이 내려졌어요. 누구를 전한다? 예수를 주로 전했어요. 그러면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나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서 그들을 이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를 보면, 낙심하지 않고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렸어요. 영어성경을 보면, 우리는 은밀하고 비밀스럽고 부끄러운 방법들을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말씀을 혼잡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목적을 위해 말씀을 가져다 붙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목회자와 리더들이 실수하기 쉬운 것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실제로 그 구절은 그런 의미가 아닌데도 갖다 붙일 수 있어요. 이것을 바울은 혼잡케 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한다? 진리를 단순하게 전한다고 합니다. 단순하게 전하되 무엇을 의지하느냐? 태초에 어둠이 흑암이 모든 것을 덮을 때 빛이 있으라고 하셨던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이제는 각 사람 마음에 빛을 비추심으로 저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광체가 비추기를 기대합니다.

무슨 방법입니까? 주님만 의지할 때 주님이 각 사람 마음에 예수님ㅇ늘 앓게 하고 그들의 온 삶으로 주님께 나와 헌신하도록 주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구절이 전도 뿐아니라 리더십에 있어서도 핵심입니다. 헨리블랙가비 목사님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에 따르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비전이 아닐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비전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세운 계획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계획이고 쓸데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비전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비전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이때 리더들은 자신이 삶을 조정하고 따라갈 뿐아니라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비전을 나누게 됩니다. 이 비전에 따라오도록 숨은 동기를 가지고 인간적인 방법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회유하거나 부끄러운 방법을 사용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비전을 나누면 단순하게 정직하게 나누면 각 사람은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하나님이 목적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안하면 어떻게 하느냐? 리더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우리 신앙의 기본적인 자세를 당연히 가르치고 말해야하겠지요. 우리 신앙은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목적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일이 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고 강하게 말하고 강하게 전하겠지요. 그때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보로 돌아서도록 주님을 의지하지요. 안 돌아서면요? 그들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그래서 사도바울은 숨은 부끄러운 일을 버렸다. 말씀을 갖다 붙이지 않았다. 혼잡케 하지 않았다.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았다. 진리를 단순하게 전하고 각 사람의 양심에 호소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 눈을 밝혀 그들로 마음 문이 열려 예수를 보게 했다. 만약에 그 예수가 가려졌다면 그것은 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어떻게 되느냐?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감정에 호소해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끌어 가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본주의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교회가 우리 마을에 있었습니다. 지금 10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을 떠났는데 그 뒤로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그 지역을 지나가다가 시골마을을 가서 교회를 한번 가보았습니다. 새로 지었어요. 교회중심에 무엇이 있냐면 종탑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종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 과거의 추억들이 살아나고 가슴이 뭉클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그것 성령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요. 자기는 큰 교회 가기를 원한다고 해요. 파이프 오르간을 칠 때 마음이 차분해지고 교회느낌이 난다고 합니다. 큰 교회 가는 것 파이프 오르간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지금 말하는 그것은 전혀 성령이 아닙니다. 감정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음악을 가지고. 거기에 참다운 예배 드려지지 않습니다. 참다운 예배는 성령의 비추심을 따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그분께 우리 중심으로부터 우리 삶을 드리며 높이며 사모하는 것입니다. 감정에 호소함으로는 절대로 참다운 예배는 드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경우에 메시지를 통해서도 그저 감동적인 예화를 통해서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고 설교를 가지고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고 찬양을 가지고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고 사람의 감정을 움직여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도록 이끌어가려고 노력하는 시도들이 오늘날 너무나 많습니다.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과는 상관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을 이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하지 않았던 방법입니다.

2)오락의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사람의 쾌락을 위한 예배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알티킨델 목사님은 예배에 관한 책에서 말합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거나 즐겁게 하기를 추구하는 어떠한 예배도 그것은 공연에 불과하며 멸시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달란트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찬양팀들은 싱어나 음악가들은 우리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인도한다.”

세계적으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찬양사역자 엔디팍이 있어요. 자기 예배인도를 따라 사람들이 수천명 수만명이 찬양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연주하고 있는 것을 느낀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할 예배를 자기가 취하고 있는 루시퍼가 된 것을 순식간에 의식하고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게 집중하고 그분을 예배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연주가 아니라 예배입니다. 연주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찬양리더들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해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로 중매한다고 했어요. 정결한 처녀로 중매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깨끗하게 주님께만 드려지게 했습니다. 이것이 리더들이 예배인도자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연주형태를 통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저들의 마음에 따뜻하게 만들어지기 원하여 추구하는 것은 그들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오락예배에 불과합니다. 그때에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연주에 불과합니다. 공연에 불과합니다. 오락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공연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추구합니다.

한번을 그래요. 교회에서 예배인도자인데 여러 찬양집회를 참석해보았나 봅니다. 십자가 성령 컨퍼런스를 한번 와서 내려가면서 담임목사님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보면서 여기처럼 리더들이 보이지 않는 데가 없었다고 합니다. 리더가 안세워졌다는 말이 아니라 리더가 안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배자의 자리를 바울처럼 하나님께만 자신이 먼저 할 뿐아니라 지체들이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예배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또 한 가지 덧붙혀서 말하기를 그런데 여기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한 데가 없었다고 하더랍니다. 그분의 이야기입니다. 예배와 연주는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찬양과 경배, 또한 성가대 무대효과 여러 가지 기법들을 동원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엔터테인먼트 워십이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본주의 예배입니다.

3)홍보의 영
여기에 영은 자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교회나 예배를 알리는 모든 홍보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홍보의 영이란 우리의 자세를 말하는데 우리가 집회건 교회건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광고기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알려서 우리의 목적을 얻어내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방법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어떨 때는 심지어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도 홍보하는 말의 진실성에 대해서 전려 개의치 않을 때가 많습니다. 터무니없이 과장된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인본주의입니다.

어떨 때는 교회를 크게 광고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목회자의 사진을 크게 실어서 광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누구누구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 오면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광고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인본주의입니다. 그런 교회 가운데 십자가의 능력이 절대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왜요? 성경의 관전에 의하면 예수님만이 우리의 의와 지혜와 능력과 구원이 되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내세우고 교회를 내세우는 것은 예수님이 서야할 자리에 사람이 서고 교회가 서기 때문에 그곳에는 십자가의 능력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타락한 인본주의인지를 모릅니다.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세상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 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무서운 점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강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강함을 자랑하는 것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신학이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리더가 된다. 그럴 듯 하지요. 그러나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될 수도 있지만 안될 수도 있어요. 


히브리서 11장을 보세요.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구절입니다. 33-40절부터 읽겠습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두가 다 믿음의 삶을 살았는데 모두가 하나님을 다 사랑했는데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았는데 어떤 사람은 강함 가운데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약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다니엘과 요셉을 삶을 보세요. 다니엘과 요셉은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그 당시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고 예레미야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멸시와 학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살하여 떠났고 나머지 제자들중에 사도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었고 나머지는 모두가 다 순교했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모두가 다 부자되고 예수 잘 믿으면 성공하고 예수 잘 믿으면 건강하고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된다는 신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거기에 더 나아가서 세상에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전적으로 인분주의적인 방법과 삶을 살면서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적으로 잘되기만 하면 거짓신앙체계도 받아들이는 것은ㅇ 너무나 타락한 가치관입니다. 오늘날 이런 이해가 많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만 성공하면 그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하고 돈만 많이 벌면 하나님이 축복하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성공신학은 가짜입니다. 그것은 강함만 자랑하는 것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신앙은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마7:13-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러분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길을 추구하기 위해 세상에서 강함을 포기하고 기꺼이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있게 하기 위해 주님의 길에 서기 위해 주님의 목적을 이루어지기 위해 세상에서 강함을 추구하던 것을 기꺼이 내려놓은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높일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요셉처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그런데 그들은 세상에서 강함을 추구하던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국회위원 중에 40%가 기독교인입니다. 이들 중에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정의가 어떻고 선거 때만 교회에 와서 자기는 장로니 집사니 하면서도 당선만 되면 하나님의 길과 법도는 간 곳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요? 실제로는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팔 뿐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좁은 길을 가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기 위해 세상의 길을 추구하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세우실 수 있습니다. 권세를 주고 능력과 1부를 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함을 추구하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하나님의 길에 서기 위해 그런 것을 포기하던 자들이었고 그런 자리에 하나님이 세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자들은 자리에 올라가면 자기 목적을 위해 자리를 이용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공신학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예수 잘 믿으면 반드시 세상에서 부자되고 승진하고 성공하고 리더가 된다는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인본주의로 지극히 타락한 것입니다. 육체의 강함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은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선택하고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힘과 능력과 의와 구원이 도시는 사람은 우리 속에 어떤 선한 것도 없는 것을 보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약함을 자랑합니다. 우리의 약함을 자랑함으로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한 것임을 하나님만이 높여지도록 주님만이 신임을 받도록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과 관련해서 너무나 중요한 구절입니다.
고후 12장 9-10절입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홍보의 영의 배후에는 강함을 자랑하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국회위원이 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서울대 몇 명 들어갔습니다. 우리교회는 재벌들 중 누가 나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은 30대 재벌 중 하나인 어느 그룹의 총수입니다. 그래서 그런 홍보를 통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지요. 거기에는 십자가의 능력은 함께하지 않습니다. 인본주의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방법을 동원해서 수는 많이 모이고 예산을 증가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임재는 걷힐 것입니다. 그러면 껍데기만 남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4)성장병
오늘날 많은 교회가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온갖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인테리어, 예배 리어설, 순서, 등등 1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의 필요를 위해서. 인본주의를 통해서 교회의 숫자적으로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그곳에 없습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타락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시면 사람들은 몰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슥8장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면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8-2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2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21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교회가 이렇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이렇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5)프로그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이 다 클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열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담기 위해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대신에 프로그램을 통해서 교회성장이나 생명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아법 잘 교육받는다고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아이가 생긴 다음에 육아법이 필요합니다. 교회성장에 관한 이론 가지고 프로그램 돌린다고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임재하셔야 생명이 탄생합니다. 이때 프로그램도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경우에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채해 버립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프로그램을 내세운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저는 인본주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나라 교회 가운데 우리 예배가 얼마나 심각하게 인본주의에 빠져있는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타락한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인본주의에서 돌이켜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과 예배 가운데로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더 회복되어지고 은혜가 회복되어집니다. 우리가 살게 되고 이 나라가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