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2011

성령 없는 말씀, 말씀 없는 성령 둘 다 위험하다!

"제발 성경공부 좀 해라!" 성령충만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성령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해주신 것은 제발 좀 말씀을 공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만 추구하면 이상한 길로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님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둘은 하나님입니다. 모든 성령의 역사는 말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또한 말씀은 그 말씀에 따르는 능력이 임해야 진정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우리는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단지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이지 하나님을 실제로 직접 만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름부으심이 임한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 바로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 말씀이 바로 능력이 되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도 말씀에 기름부으심이 흐르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정말로 원하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성령충만을 구합니다. 하지만 성령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힘든 일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거짓으로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리라!"고 하는 결심이 어려운 것입니다.

당신은 성령 충만이 성령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라고 해도, 성령 충만을 구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명령하시는 것이라면 무조건 순종할 결심이 섰습니까?

모든 죄를 다 끊고 살겠습니까? 모든 음란한 영화, 잡지, 책들을 다 멀리하겠습니까?
욕심도, 거짓말도, 싸움도 다 끊겠습니까?
이런 결심을 하려고 할 때, 혹시 마음이 슬프고 무슨 재미로 사나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힘을 주시지 않으면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싶은 마음과 소원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 힘을 주실 수 없습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드리면,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완전히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힘으로는 용서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때, "나는 용서할 수 없어요. 사랑할 수 없어요"라는 것과 "하나님, 용서하겠으니 힘을 주세요. 사랑하기 원하니 힘을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당신은 성령님께 완전히 순종할 각오와 결단이 되어 있습니까?
성령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지 순종하겠습니까?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고 하시면 서겠습니까?
무엇을 바치라고 하든지 순종하겠습니까?
심지어 생명을 바치라고 하셨도 순종하겠습니까?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말 이런 것들을 요구하실까봐 겁부터 내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짜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 안의 두려움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증해줍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죽고예수로사는사람중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보디가드가 아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1요5:14,15)라는 구절을 읽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함이라" (요14:1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다. 이것도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렇다면 이 약속들은 얼마 동안 유효한가? 이 약속들을 주신 분의 성품(인격)만큼 유효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품은 얼마 동안 유효한가? 오, 이것이 우리의 확신이다. 믿음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부요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실수했는가? 우리의 확신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분을 지옥의 도피처로 이용하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주목해야 한다. 약속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유업이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 자체는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해야 한다.

어찌하여 교회들은 이런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오늘날 교인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선포하기를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손에 쥐고 계신다.
하나님은 땅의 티끌을 천칭에 달아서 재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망토를 펴듯이 하늘을 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이시고,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고, 당신은 땅에 있다.

<네믿음은어디있느냐중에서...>

속사람과 겉사람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29:5)

우리의 겉사람은 자아 중심의 생활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인간의 자아 중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생겨난 것이 바로 자아였기 때문입니다.

이 자아는 이기주의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생들이 극심한 이기주의에 얽매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의 책임을 추궁할 때 아담은 하와에게 미루었고 하와는 뱀의 핑계를 댔습니다. 또한 가인은 아벨을 돌로 쳐죽였고, 그 이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며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싸우고 한 배를 타고서도 서로 해칠 궁리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꽉 들어찬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떠난 자아 중심의 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로마서 1장 28~31절까지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자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사형선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보혈로 씻고 성령으로 거듭나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라가려는 우리의 속사람이 살아나게 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할 때 즐거워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믿기 전의 방탕하고 시기하고 살인하던 겉사람과,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는 속사람 사이에서 무서운 투쟁과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나 겉사람은 싫어하며, 속사람은 거룩하게 살려고 하나 겉사람은 싫어합니다.

이와 같은 분쟁은 우리에게 이유없는 불안과 우울증으로 나타납니다. 이때에는 속사람과 겉사람의 싸움이 시작된 줄로 알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자아를 깨뜨리고 승리하는 속사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부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