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8/2010

예언적인 예배란 무엇일까?

예언적인 예배란 한마디로 주님의 뜻에 의한, 주님의 뜻을 위한, 주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바라보는, Communion(함께하는)의 예배라고 정의하고 싶다. 주님은 성찬을(communion) 위해 그의 피와 살을 찢으셨다. 성찬을 통한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분과 하나됨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내 언약이니 이 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3-2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6:56)

이것은 그 예배에 임재의 기름부음이 얼마나 넘쳤는가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기름부음이 넘치는 예배가 곧 예언적인 예배라는 공식은 부족하고 심지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예언적인 예배는 더 이상 그분의 일방적인 쏟아부으심이 어떠했는가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예배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언적이라는 것이 그분에게서 일방적으로 온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것은 그분 혼자만의 사역이 아니라 반드시 그것은 전달하는 어떤 존재를 포함한 동역의 사역이다. 그것의 전달자가 천사이든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내어준 선지자나 사역자이든..

반석에서 솟아난 두가지 생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사막에서 체험한 르비딤 ,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기적을 체험한 두가지 상황을 돌아보자.

그들이 사막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기적은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쳤을 때에 일어났다. 이것은 대부분의 회중,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주권적인 주님의 은혜였다(171-7)

그러나 두번째 그들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다시 반석위에 섰을 때 그들은 이제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반석을 향하여 물이 솟아나도록 명령해야만 했다.(20:7-11)

비록 불평하는 백성들로 인해 화를 내던 모세가 이 명령에 순종하지 못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댓가를 치뤄야 했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고 결국 그들을 믿음으로 물을 끌어올리는 단계로 성장시키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라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20:7-11)

거기서 브엘에 이르니 브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시던 우물이라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이르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한 것이로다 하였더라 그들은 광야에서 맛다나에 이르렀고(21:16-18)

더 이상 자신의 목마름을 해소해야만 하는 필요의 절실(?)을 노래해서는 안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활성화 시키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에 시선은 돌려야 했다.

예언적 예배는 이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빈야드 찬양과 여러 앞세들이 문을 열어둔 찬양과 경배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우리가 그분의 보좌와 그분의 영광을 노래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반석앞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생수를 예배가운데 마실 수 있었다.

이것은 그분이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의 동기로 그분의 임재의 지팡이를 우리가 서있는 예배장소에 내리치신 결과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이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며 걸어가려는 마음으로 진정한 예언적인 예배를 드려야한다.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 예언적 이라는 요소는 과거에는 요구되지 않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희생의 제물이다. 예언적이라는 요소는 그분의 영광의 보좌에서 그분을 바라보며 섬기는 경배로 나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이제 이 예배에 관하여 우리는 말하고자 한다. 성도들이여 이제 그분과 함께하는 것에 관하여 문을 열어라! 열어라! 열어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여호와의 노래/라마 보쉬맨/HPWN

신약의 선지자는 성경적인가?

이 책은 신약 교회에 선지자의 직임이 구약에서와 같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책이 아니므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예언의 은사의 활성화와 예언사역자의 회복을 위해서 공격적으로 신약의 선지자에 대해 잠시 다루려고 합니다. 신약의 교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사도행전을 열어 보시면 안디옥 교회에 공식적으로 선지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은 분명히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구약에서만 존재하는 과거형 직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신약의 교회에서도 특별히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받고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사역하는 공식적인 직임이었습니다.

위의 성경구절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시면 사도 바울이 비록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서 회심하였지만, 또 아라비아 광야에서 성경을 공부하며 가르치는 사역도 하였지만, 그가 사도로서 공식적으로 권위를 부여받은 장소는 안디옥 교회의 예언적 장로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교회의 선지자들이 안수하여 사역지로 보냄으로 보내진 자사도의 직임이 부여되었습니다. 비록 선지자들에 의해 보내졌지만 성령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신약의 선지자들도 구약의 선지자 못지않게 그 사역위에 하나님의 권위가 주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3-4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이렇듯 신약의 교회 안에 선지자의 직임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권위를 부여 받았으며 그 수도 여러 명이었다면 오늘날 같은 교회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선지자 직임에 대하여 초대교회와 동일하게 그 직임의 권위를 인정하여 예언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을 적극 격려하고 배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위의 성경구절 외에도 신약의 교회 안에 선지자들이 있음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성경구절이 더 있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로마로 압송시킨 아그랍바 왕조차도 선지자를 심중에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성경 구절도 있습니다.

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21: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26:27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선지자의 직임을 보내주셔서 그의 몸 된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신 사도적운동을 지지하는 모든 교회와 단체는 다음과 같이 예언사역자에 대한 3가지 호칭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언의 영으로 예언하는 예언적인 한 성도’, 둘째는 예언의 은사로 섬기는 예언사역자’, 셋째는 선지자의 기름부음으로 오중 직임 중 한 직임을 부여받은 선지자입니다.(빌 해몬: ‘선지가와 개인적 예언참조)

임동철/HPWM

마지막 때

비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지구 역사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벧후 3:3-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 바로 마지막 때의 징조이다.
요일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예수님께서는 언제 종말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가?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예수님처럼 행세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24:23-24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해와 달과 별들을 통한 징조가 있을 것이다.
24:29-30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지막 때에 이 사회의 도덕적 형편은 어떠할 것인가?
딤후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지식이 증가하고 왕래가 빨라지는 것이 마지막 때의 징조가 될 것이다.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마지막 때에 대한 다른 어떤 징조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가?
21:25-26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안전하다 평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마지막 때의 징조이다.
살전 5:2-3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이러한 징조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24: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