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적인 예배란 한마디로 주님의 뜻에 의한, 주님의 뜻을 위한, 주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바라보는, Communion(함께하는)의 예배라고 정의하고 싶다. 주님은 성찬을(communion) 위해 그의 피와 살을 찢으셨다. 성찬을 통한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분과 하나됨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내 언약이니 이 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3-2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6)
이것은 그 예배에 임재의 기름부음이 얼마나 넘쳤는가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기름부음이 넘치는 예배가 곧 예언적인 예배라는 공식은 부족하고 심지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예언적인 예배는 더 이상 그분의 일방적인 ‘쏟아부으심’이 어떠했는가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예배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언적’이라는 것이 그분에게서 일방적으로 온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것은 그분 혼자만의 사역이 아니라 반드시 그것은 전달하는 어떤 존재를 포함한 ‘동역의 사역’이다. 그것의 전달자가 천사이든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내어준 선지자나 사역자이든…..
반석에서 솟아난 두가지 생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사막에서 체험한 ‘르비딤’ 즉,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기적을 체험한 두가지 상황을 돌아보자.
그들이 사막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기적’은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쳤을 때에 일어났다. 이것은 대부분의 회중,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주권적인 주님의 은혜였다(출17ㅣ1-7)
그러나 두번째 그들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다시 반석위에 섰을 때 그들은 이제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반석을 향하여 물이 솟아나도록 명령해야만 했다.(민20:7-11)
비록 불평하는 백성들로 인해 화를 내던 모세가 이 명령에 순종하지 못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댓가를 치뤄야 했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고 결국 그들을 믿음으로 물을 끌어올리는 단계로 성장시키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라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20:7-11)
“거기서 브엘에 이르니 브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 하시던 우물이라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이르되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지휘관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규와 지팡이로 한 것이로다 하였더라 그들은 광야에서 맛다나에 이르렀고”(민21:16-18)
더 이상 자신의 목마름을 해소해야만 하는 ‘필요의 절실(?)’을 노래해서는 안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활성화’ 시키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에 시선은 돌려야 했다.
예언적 예배는 이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빈야드 찬양과 여러 앞세들이 문을 열어둔 찬양과 경배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우리가 그분의 보좌와 그분의 영광을 노래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반석앞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성령의 생수를 예배가운데 마실 수 있었다.
이것은 그분이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의 동기로 그분의 임재의 지팡이를 우리가 서있는 예배장소에 내리치신 결과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이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며 걸어가려는 마음으로 진정한 ‘예언적인 예배’를 드려야한다.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 ‘예언적’ 이라는 요소는 과거에는 요구되지 않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희생의 제물’이다. 또 ‘예언적’이라는 요소는 그분의 영광의 보좌에서 그분을 바라보며 섬기는 ‘경배’로 나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이제 이 예배에 관하여 우리는 말하고자 한다. 성도들이여 이제 그분과 함께하는 것에 관하여 “문을 열어라! 열어라! 열어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여호와의 노래/라마 보쉬맨/HP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