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8/2011

사랑의 성질

바울이 고린도전서(13:4-7)에서 제시한 사랑의 15가지 성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래 참음- 해를 끼치는 자에게 복수하지 않고 견디어 냄
온유함- 해를 끼치는 자에게 친절과 선을 베푸는 일
투기하지 않음- 상대가 잘되는 것을 시기하지 않고 기뻐함
자랑하지 않음- 자기를 드러내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
무례히 행치 않음- 함부로 하지 않고, 적절한 예의를 갖추어 상대를 대함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음-  자기의 것과 자기 의견만 고집하지 않음
성내지 않음- 감정적으로 상대를 대하지 않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 남의 잘못을 저주하거나 악한 감정을 품지 않음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 불의와 불의한 일에 참여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함
진리와 함께 기뻐함- 진리 편에 서서 선한 방법으로 과감하게 투쟁함
모든 것을 참아줌-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그것이 내게 미치는 해를 기꺼이 감수함
모든 것을 믿음- 상대가 실망스런 일을 해도 신뢰 관계를 유지함
모든 것을 바람- 상대가 성령 안에서 새롭고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을 믿어줌
모든 것을 견딤- 상대가 잘못을 해도 참고 인내함.

우리 목사님 내쫓기? - 5가지 아이디어

크리스천인 존 로버츠 칼럼니스트(저널-애드보킷)의 가장 인기있는 칼럼은 아이러니하게도‘우리 목사님 내쫓기?’였다. 인기 있는 이유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간추려 본다.

얼마전 나는 자기네 담임목사님을 내쫓으려 하고 있는 한 회중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슬프게도 이것은 오늘날 수많은 미국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교인들은 목사님이나 교회의 일에 관하여 불편한 마음을 가질 때 기도로써, 성경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편당을 가른다. 그래서 정말 불쾌한 일을 만들기에 충분한 숫자를 모으면 표결로써 담임목사를 내쫓는다.

이것은 그 담임목사에게 다가올 영향을 보더라도 마구 깨어질 관계와 목사가 떠난 뒤에도 두고두고 남아 치유를 기다려야 하는 깊은 상처를 보더라도 비극적인 불행이다. 솔직히 말해서,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담임목사를 내보내고 싶으면 표결이나 편당짓기보다는 다음 다섯 가지 아이디어중 하나를 시도해 보라.

아이디어 1:
주일예배 설교를 경청하고 노트를 하라. 담임목사의 눈을 직시하고 고개를 끄덕이며‘아멘!’을 외쳐대라. 설교로부터 얻은 교훈을 삶 속에 진지하게 적용하는 노력을 하라. 신이 난 목사는 반년 정도 지나면 죽을 힘을 다할 정도로 설교할 것이다. 그러다 죽지 않겠는가?

아이디어 2:
목사님의 어깨를 두드려 주라. 한달 2-3회씩 그의 장점을 칭찬해 주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전화를 걸어 목사님의 좋은 점을 널리 알려라. 얼마 안가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이며, 따라서 부교역자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면 담임목사는 조만간 떠나도 되지 않겠는가?

아이디어 3:
주일예배때 설교 후 헌신자를 초청할때 강단 앞으로 나가서 그리스도께 삶을 바쳐라. 그런 다음 몇주 후 담임목사와 시간을 약속하여 교회 내 일자리를 요청하라. 특히 잃은 영혼들을 방문하여 그리스도께 이끌라. 아마도 당신에게 전혀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담임목사가 충격으로 기절하거나 심장마비로 쓰러지지 않을까?

아이디어 4:
두문불출하는 사람들과 노령층 교우들을 방문하기 위한 사역체를 구성하여(참고: 행 6:1-7) 담임목회자를 격려하여(행6:1-7) 그로 하여금 좀 더 많은 시간을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 연구와 설교준비에 바치게 한다. “만약 목사님께서 설교에 충분히 신경쓰신다면 제가 과부들을 돌보겠습니다.” 라고 말하라. 그는 온 회중이다 미친 줄로 알고 즉시 딴 교회를 찾으려 할 것이다.

아이디어 5:
상당수의 교우들을 모아 중보기팀을 엮고 담임목사의 사역과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라. 교회성장과 담임목사를 그리워하고 그를 위한 중보기도 모임을 갖는다. 그러다 보면 교회가 대거 성장하면서 좀 큰 딴 교회에서 기꺼이 그를 스카웃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 중 하나를 시도하다 보면 결국 그분을 내쫓고 싶지 않게 될 것이다.

출처:크리스찬투데이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입니다


사도행전19:21-41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의 복음이 힘있게 들어가서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자 에베소 사람들은 엄청난 영적 경제적 충격을 받고 소동을 일으킵니다. 이 소동 속에서 나타나는 우상 숭배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입니다. 
에베소는 풍요의 여신 아데미를 섬기는 거대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길이 115m, 폭 55m의 터 위에 높이 19m의 대리석 원주 127개로 이루어진 초대형 신전이었습니다. 축제 때마다 사람들은 이 신전에서 엄청난 술판과 성적 타락을 일삼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신전 모형과 아데미 신상을 팔아서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아데미 신전은 거대하고, 아데미 여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쾌락과 성적 만족, 경제적 이익을 주었지만 참 신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복음 앞에서 침묵하며 무력하게 에베소를 주님께 내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데메드리오 일당이 소동을 일으킨 것도 아데미를 독실하게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수입이 줄어든 것에 대한 항의일 뿐이었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자신의 유흥과 쾌락,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헛된 만족을 위해 내가 만든 썩은 나무 지팡이 같은 무력한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물질적 풍요나 육체적 쾌락이 줄 수 없는 말할 수 없이 신령한 기쁨을 하나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썩어져 가는 헛된 습관일 뿐입니다. 
데메드리오에게 선동된 사람들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고 큰소리로 외치기를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하였습니다. 두 시간 동안이나 소리친다는 것은 보통 열정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혜로운 서기장이 제지하기까지 왜 자기들이 소리를 지르는지 그 까닭도 모르는 채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주변 사람들을 따라 여기 저기 몰려다니며 사람들이 하는 데로 소리를 지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의 모습은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세속적 삶의 허망함을 잘 보여 줍니다. 


말씀의 비전을 따라 살지 않을 때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젖어 사람들의 유행과 습관을 좇아 허망한 것의 종이 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간 진리는 결코 다수결이 아님을 명심함으로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 거룩함의 새 사람을 새롭게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바울과 같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품고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