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조심하라 - (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오늘 21장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다. 따라서 오늘의 메시지를 살피는 우리의 눈은 어느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고 전체적인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메시지는 내용별로 볼 때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볼 때는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는 그 당시 실제의 일이다. 그리고 5절부터 33절까지에 설정된 4단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장차 이스라엘과 이 세상에서 펼쳐질 계시적 예언의 말씀이다. 따라서 본 장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을 현실적 감각으로 함께 보고 중간 단락에서 펼쳐진 장래의 일들을 미루어 보아야 할 것이다.
21장의 핵심은 장차 일어날 일에 대비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들의 영적 경계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단락인 34절에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대비하여야 할 복음적 계시를 언급하셨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도덕과 윤리에 합당한 삶이며 이를 위해서 교회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것을 은연중 강조하셨다.
I. 종말의 종교적 배경(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4)
믿음 생활의 양극화(1-4) - 예수님은 앞장에서 말미에서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외식적 종교행위를 경계하셨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길게 기도하지만 실상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 하시며 이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셨다.
이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종교적 활동과 전혀 관계 없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연보궤 앞에 서서 부자들이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풍족한 중에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3,4) 하셨다.
여기서 렙돈이란 화폐는 그당시 가장 작은 화폐단위이다. 렙돈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되는 아주 적은 돈이다. 오늘날 500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돈의 양과 그 가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헌금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부자들에게 있어 돈은 풍요로운 삶을 위한 생활 도구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유지하는 힘이다. 그 과부는 생명과도 같은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그의 믿음과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헌금을 요구하시지 않지만 성경은 성도의 믿음의 한 부분으로서 헌금생활을 적용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6:7,8) 하였고 다시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 8:15)기록하였다. 이는 재물관에 대한 성도들의 기본적인 사고를 언급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후 8:12)하였고 다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6,7)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헌금이란 재물이 많다고 많이 드리는 것도 아니며 또 궁색하다고 드리지 못할 것도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헌금은 성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헌금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헌금에 대한 제자들의 사고를 교육 시키기 위함이다. 후일 교회시대에 나타날 믿음생활의 양극화를 암시하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 지도자들이 헌금의 많고 적은 것으로 믿음을 측정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묵시적으로 알리신 것이라 하겠다.
II. 종말에 일어날 일들(5-9)
A.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 - 5절에는 한 사람이 예수께 거대한 미석과 헌물로 꾸민 성전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한 것이 기록되었다. 그당시 성전은 헤롯대왕에 의해 46년에 걸쳐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리모델링 되고 있었다. 돌 하나의 크기가 20평에 달하는 것이 있었다 하니 그 웅장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당시 성전의 돌은 얼마나 정교하게 다듬어졌는지 돌을 쌓을 때 접착제가 필요 없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답하셨다. 사실 이 말씀은 주후 70년 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그대로 실행되었다. 원래 티도 장군은 성전을 무너뜨릴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술취한 병사가 실수로 불을 질러 예루살렘은 화염에 휩싸였고 불에 달궈진 돌들로 인해 성전 내부의 금도금 장식이 녹아 돌과 돌 사이로 흘러나오자 황금에 눈이 뒤집힌 병사들이 창과 칼끝으로 돌을 무너뜨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일이 그대로 성취 되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 무슨 증조가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B. 두 가지 징조 -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두 가지를 언급하셨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혼란이 있을 것을 언급하셨다. 주님은 먼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하시며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다 하며 때가 가까웠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9) 하셨다. 미혹이란 영적 유혹이다. 다시 말하여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이 복음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을 말한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않는다” 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지구 각처에서는 여러 가지 난리와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평화를 외치고 있지만 이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한 이래 전쟁과 평화의 비율은 18:1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무익한 꿈에 불과하다.
III. 교회가 처할 상황(10-20)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10)
세계적 상황 - 계속하여 예수님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 나겠고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10,11) 하셨다. 이 말씀은 난리와 소문들의 거국적 상황을 세부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한 일은 이미 우리 시대에도 겪고 있는 일이다. 이미 2번의 세계대전을 치렀고 이스라엘과 관련한 중동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처처에 지진은 날이갈수록 그 심도가 커지고 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쓰나미와 중국을 혼란에 빠뜨린 지진들은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또한 이처럼 경제적으로 풍성한 시대에도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기근으로 인하여 수만명의 생명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 기근은 물 부족과 질병을 함께 불러 온다.
또 예수님은 온역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정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에이즈를 비롯한 사스 바이러스, 또한 오늘날도 신종풀루로 인해 전세계가 숨을 조리고 있지 않은가? 각나라별로 백신을 만들고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지만 새로운 전염병이 일어나면 새로운 백신을 개발하는데 최소한 6개월이 걸린다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백신이 개발되기도 전에 바이러스는 온 세상으로 펴져 나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또 무서은 일과 하늘로서의 큰 징조가 있을 것’이라 하셨다. 여기서 무서운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핵을 언급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과 인도 중국 파키스탄이 이미 인류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핵을 소유하고 있고 근래에 이란과 북한이 핵 보유국으로 등단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은 정말 큰 문제이다. 이들의 목적은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핵 보유국으로의 부상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늘로서의 큰 징조란 무엇일까? 선지자 요엘은 이미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욜2:30,31) 증거하였다. 또한 계시록 6장에는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참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니라” 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계시록8장에는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라고 기록되었다. 이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지만 누가 이러한 재난에서 피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인간으로부터 오는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오는 대환난인 것이다.
교회들의 상황(12) - 이어서 예수님은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12) 하셨다. 마가복음 13장8절에서는 이 일들을 가리켜 ‘재난의 시작’이라 기록되었고, 여기서도 동일한 개념이지만 누가는 재난의 크기보다는 시간적 우선을 언급한 것이라고 보겠다. 또한 ‘이 일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는 말씀은 미래 중간태로서 장차 제자들의 순교가 실행될 것을 미리 예고 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14,15)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고대 연설가들이 연설문을 암기하는 사례를 인용하셨는데, 흥미로운 것은 ‘변명’을 준비하지 않기를 결심하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들이 준비해야 할 것은 성령에 의한 복음적 메시지라야 한다는 말씀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부모형제 친척 그리고 친구들에 의하여 배반을 당할 것을 예고하시며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6,17) 하셨다. 여기서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으리라는 말씀은 그들이 앞에서 먼저 말씀을 하신 바와 같이 순교를 당할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 곧 영혼의 획득할 것을 하신 것이다.
IV. 구속의 징조들(20-28)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20)
예루살렘의 멸망 - 이제 예수님은 좀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일들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먼저 주님은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 쌓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하셨다. 여기서 군대들이란 진영에 있는 군대들을 뜻하므로 연합군일 수도 있겠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알라’라는 동사는 ‘기노스코’로서 어떠한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닫게 되는 지혜를 뜻한다. 따라서 이는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그 때에 주시는 계시적 지혜일 것이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21) 하셨다. 단편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주후 70년 로마 디토스 장군의 침공으로 성취된 일이기도 하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 말씀의 자각으로 모두 산으로 피해 재난을 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적 예언은 항상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대환난 기간 중 다시 한번 펼쳐질 예루살렘의 멸망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21절에서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 말씀하셨고 다시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 유대인들이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토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위에서 언급된 환난을 겪었지만 예수께서 ‘이 날들’이라 복수로 칭하셨고 또한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 하셨고 다시 ‘땅에 큰 환난이 일어날 것’ 이라 하셨으므로 이는 적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기 까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주님은 이 날에 있을 을들을 상세히 말씀하여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 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에게 밟히리라”(24)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혼동을 갖게 하는 귀절이다. 앞에서 언급된 말씀들이 이중적 성취에 관한 말씀이라고 볼 때 이 말씀은 22절의 종결과 같은 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70년 로마군의 예루살렘 공격으로 일백 십만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구만 칠천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여기서 주님은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 하셨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8일 독립한 이래 1967년 6월에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더 이상 예루살렘은 이방인에게 짓밟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록 11장에서 다시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어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는 말씀을 보게 된다. 이로서 우리는 성경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러야 완성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월성신의 징조 - 이어지는 주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혼동하게 한다.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겠음이라”(25-26) 하셨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두우며 달이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라” (사13:9-10) 증거하였고 요엘서에도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리라” (요엘2:30-32) 기록되었다.
바울사도는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주의 재림 앞에 교회의 휴거가 불연듯 일어날 것을 증거하였다.
또한 베드로 사도도 이 날들의 일에 대하여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0) 증거하였으며 계시록 기자는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그 자리에서 옮기우매”(계6:12-14)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모든 말씀들을 미루어 볼 때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주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총체적으로 우리에게 언급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온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비밀한 계시를 비춰주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주님은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7) 하셨고 다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28)하셨다. 여기서 ‘머리를 들라’ 말씀은 영혼의 자각을 언급하신 것이다. 또한 ‘구속’은 십자가의 구속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있을 마지막 날의 영광된 일을 언급하신 것이다.
C.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 - 27절의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권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7) 하신 말씀은 매우 쑈킹하다. 또한 이 일에 대하여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가 나타나 “갈릴리 사람들아 무엇을 보느냐 너희가 본 예수는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1:9-11) 하셨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이 상황을 목격하는 사람들은 창조 이래 가장 커다란 복을 받는 사람들일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일이 창조시부터 예언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유다는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유다1:14)라고 증거하였으니 말이다. 성경의 증거가 이처럼 확실한데, 이러한 말씀들에 대하여 굳이 외면하려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 무겁기 때문이다.
V. 성경적 예지와 성도의 자각(34-38)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36)
무화과나무의 징조 - 계속하여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니나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29-32) 하셨다.
주께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 이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하신 것은 “모든 일이 다 이루기까지는 이 세대가 지나가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종말의 날에 있을 일들을 언급하신 것으로 마가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경계하였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을 지칭하신 것이며 또 모든 나무들을 언급하신 것은 매우 흥미롭다. 아마 그 속에는 1948년 8월15일에 독립한 대한민국도 포함된 것이라 생각한다.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인 것은 비단 디토 장군의 때만이 아니다. 이는 바벨론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의 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로마시대에까지 이른 것은 그 과정일 뿐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사로잡혀 티끌처럼 살아야 했다. 이처럼 세계 역사에서 지워진 이스라엘이 1948년 5월18일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독립을 한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이방 나라에 사로잡혀갔던 유대인들이 속속 돌아 오고 있다.
또한 그들은 1967년 6월에 예루살렘을 완전히 탈환하여 그 후도 더 이상 예루살렘은 이방인에게 짓밟히지 않고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영광을 꿈꾸며 성전을 다시 지을 계획 속에서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디. 흥미롭게도 33절에서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이 말씀은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싸인을 하신 것이다.
교회의 자각 - 그러나 오늘의 말씀의 핵심은 34절 이후에 있다. 성전이 무너지던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던 이 일들은 이제 모두 역사 속의 일들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있으니 일월성신의 징조와 하늘의 권능의 흔들림과 만 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우리 앞에는 아직 이 말씀이 살아 있다. 만약 오늘날 주를 믿는 자가 이 말씀들에 대하여 다른 해석과 변명을 할지라도 이 일들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신 세대에 반듯이 이루어 질 것이다.
예수님은 이 날들의 일들을 말씀하시며,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발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34)하셨다.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므로 이는 우리 교회에 하신 말씀이다. 오늘날 이미 많은 교회들이 방탕함과 술취함에 빠져 있으며 성도들은 생활의 염려로 그 마음에서 복음은 닫힌바 되었다.
여기서 더욱 두려운 말씀은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이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닌 것이다. 세계사, 인류사적인 사건으로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가도하며 깨어 있으라”(36) 하셨다. 오늘 이 말씀을 보는 당신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당신이 하여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우리 삶을 진치고 있는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도들이 이렇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미혹되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으로 진리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가 처음 사랑에서 떨어져나가 다른 일들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여야 할까? 누가는 마지막 절에서 예수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행하여야 할 것을 모범으로 보이신 것을 소개하여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예수님은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감람원에서 쉬시고 모든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나아갔다.” (눅 21:37,38) 고 기록하였다.
사랑하는 주님 당신의 영혼을 사모합니다. 내 영혼이 당신의 가르침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내게 이 진리를 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내 영이 방탕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미혹되지 말게 나의 믿음을 도와 주소서 내 육신이 약하옵니다. 주여 부디 나를 깨우치소서 아멘아멘!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