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2009

주의 재림과 휴거!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께서 땅에 오시는 재림은 한번밖에 없는 단회적 사건이나 재림의 과정이 두 국면 또는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땅에 임하시기 전에 공중에 오셔서 머무시는 단계가 있고, 다시 땅으로 오시는 두 단계가 있다. 재림의 첫째 국면, 즉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오실 때 교회 시대는 끝이 나고 대환난기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공중에 오실 때 일어날 일들은 어떤 것이 있나 살펴본다.

1. 죽은 성도들의 부활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시어 부활의 첫 열매(고전15:20) 가 되신 것은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그의 재림때 부활할 것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고전15:51-52).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으면 그를 본받아 마지막 날에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게 된다( 6:5).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공중에 임하실 때, 죽은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이다.

2. 살아있는 성도의 영화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임하실 때 죽은 성도의 부활사건과 함께 살아있던 성도들이 변화하여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다( 8:30).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땅에 속한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 받아야 한다(고전 15:50).

따라서 재림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오실 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갈아 입게 된다(3:  21; 요일 3:2). 이렇게 하여 살아 있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하게 될 터인데 이를 성도의 영화(榮化, 영화롭게 변화함)라 부른다. 이로써 살아서 예수를 믿는 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 축복에 이르게 될것이다 ( 11:25).

3. 공중으로 끌어 올리어 ! (휴거)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오실 때 부활한 성도들과 영화된 성도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져 거기서 주를 영접하게 되는데 이것을 휴거(携擧)라 한다 (살전 4:17).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령한 교회가 들림받게 되는 것이다. 이때 땅에 남기어지는 사람도 있고 올리어 가는 사람도 있어 나뉘게 될 것이다( 24:40-41; 17:34-35). 예수님께서 공중에 오실 때 성결한 성도는 휴거될 것이나 준비되지 못한 명목상의 신자는 땅에 남기어져 환난을 겪게 될 것이다.

4. 성도의 상급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오실 때 휴거된 성도들이 일한 대로 상급을 받게 될 것인데(22:12) 이는 성도의 심판과 동일시된다( 14:10; 고후 5:10). 성도들에게 상 또는 삯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사상은 성경적이며, 하나님은 상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11:6). 성도의 시상은 기독자의 올바른 삶과 봉사의 자극제가 된다.

5. 어린양의 혼인잔치
휴거된 성도 들은 어린양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로 더불어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된다( 19:7-8). 혼인잔치는 공중에서 있게 되는데 지금의 공중은 마귀가 권세잡고 있는 곳이지만(2:2;  6:12). 혼인잔치를 위해 공중이 청결하게 되고 잘 준비될 것이다.

6. 지상의 대환란
공중에서 권세잡고 있던 마귀가 땅에 내어 쫓김으로 땅에는 마귀가 주동이 된 큰 환란이 있게 된다. 이를 '대환란'이라 부르는데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큰 환란으로 전 지구상에 임할 환란이다(24:21; 12:1). 대환란은 휴거되지 못하고 땅에 남겨진 자들과 불신자 그리고 불신앙의 유대인들이 참예할 것인데 그 기간은 공중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것과 동일한 7년이다.
 <작성자 : 성기호 박사님>

건물 성전에서 몸의 성전으로의 전환

요한복음 2 19-21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건물 성전이 육체의 성전으로 바뀐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바뀌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몸이 성전이다.

고린도 전서 3 16-17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이제 새언약 안에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됨을 말한다. 이 글은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데살로니가 5 23을 보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우리 몸의 성전의 구조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성전의 구조의 구조를 간단히 말하면 바깥뜰과 성전즉 하나의 건물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몸의 성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구약의 성막 안으로 들어가 보면 건물 안에 휘장이 쳐 있어서 성소와 지성소가 나뉘어 있다. 즉 칸막이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바깥뜰과 성소와 지성소의 이 셋으로 나뉜다. 신약시대의 성전인 우리 몸의 구조도 성막의 구조와 똑 같이 영과 혼과 몸 이 셋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성막구조)--------------------------성소-------------지성소
(몸의 성전)----------------------------------------

고린도 전서 316절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우리 몸의 성전이 어떠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집을 말한다. 그러므로 거룩해야 한다.
<예수님따라가기>

만물 속에 숨어 있는 주의 음성

만물 속에 주의 음성 감취었으니
하늘은 나를 보고 낮아지라 말하고
땅은 나를 보고 한줌 흙이 되라 하며
비바람은 나를 보고 강해지라 말하고
눈보라는 나를 보고 인내하라 말하네

산은 나를 보고 힘을 내라 말하고
강은 나를 보고 걱정 말라 말하며
계곡은 나를 보고 정결하라 말하고
새들은 나를 보고 기뻐하라 말하네

계절은 나를 보고 깨달으라 말하고
연륜은 나를 보고 지혜로우라 말하며
어머니는 나를 보고 온유하라 말하고
어린이는 나를 보고 천국이 되라하네

나무는 나를 보고 곧게 서라 말하고
세상은 나를 보고 빛이 되라 말하며
땅은 나를 보고 소금이 되라 하고
흙은 나를 보고 섬기면서 살라하네

예수님은 나를 보고 제자가 되라 하시고
성령님은 나를 보고 평안 하라 하시며
아버지는 나를 보고 아이가 되라 하시고
하나님은 나를 보고 거룩하라 하시네.

( 1: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
17:25-27)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스스로 조심하라 -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오늘 21장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다. 따라서 오늘의 메시지를 살피는 우리의 눈은 어느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고 전체적인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메시지는 내용별로 볼 때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볼 때는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는 그 당시 실제의 일이다. 그리고 5절부터 33절까지에 설정된 4단락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 장차 이스라엘과 이 세상에서 펼쳐질 계시적 예언의 말씀이다. 따라서 본 장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을 현실적 감각으로 함께 보고 중간 단락에서 펼쳐진 장래의 일들을 미루어 보아야 할 것이다.

21장의 핵심은 장차 일어날 일에 대비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들의 영적 경계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단락인 34절에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대비하여야 할 복음적 계시를 언급하셨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도덕과 윤리에 합당한 삶이며 이를 위해서 교회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것을 은연중 강조하셨다.

I. 종말의 종교적 배경(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4)

믿음 생활의 양극화(1-4) - 예수님은 앞장에서 말미에서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외식적 종교행위를 경계하셨다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 긴 옷을 입고 다니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길게 기도하지만 실상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 하시며 이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셨다.

이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종교적 활동과 전혀 관계 없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연보궤 앞에 서서 부자들이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풍족한 중에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3,4) 하셨다.

여기서 렙돈이란 화폐는 그당시 가장 작은 화폐단위이다. 렙돈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되는 아주 적은 돈이다. 오늘날 500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돈의 양과 그 가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헌금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언급하신 것이다. 부자들에게 있어 돈은 풍요로운 삶을 위한 생활 도구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유지하는 힘이다. 그 과부는 생명과도 같은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그의 믿음과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헌금을 요구하시지 않지만 성경은 성도의 믿음의 한 부분으로서 헌금생활을 적용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6:7,8) 하였고 다시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 8:15)기록하였다. 이는 재물관에 대한 성도들의 기본적인 사고를 언급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후 8:12)하였고 다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6,7)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헌금이란 재물이 많다고 많이 드리는 것도 아니며 또 궁색하다고 드리지 못할 것도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헌금은 성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헌금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헌금에 대한 제자들의 사고를 교육 시키기 위함이다. 후일 교회시대에 나타날 믿음생활의 양극화를 암시하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 지도자들이 헌금의 많고 적은 것으로 믿음을 측정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묵시적으로 알리신 것이라 하겠다

 II. 종말에 일어날 일들(5-9)

A.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 - 5절에는 한 사람이 예수께 거대한 미석과 헌물로 꾸민 성전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한 것이 기록되었다. 그당시 성전은 헤롯대왕에 의해 46년에 걸쳐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리모델링 되고 있었다. 돌 하나의 크기가 20평에 달하는 것이 있었다 하니 그 웅장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당시 성전의 돌은 얼마나 정교하게 다듬어졌는지 돌을 쌓을 때 접착제가 필요 없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답하셨다. 사실 이 말씀은 주후 70년 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그대로 실행되었다. 원래 티도 장군은 성전을 무너뜨릴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술취한 병사가 실수로 불을 질러 예루살렘은 화염에 휩싸였고 불에 달궈진 돌들로 인해 성전 내부의 금도금 장식이 녹아 돌과 돌 사이로 흘러나오자 황금에 눈이 뒤집힌 병사들이 창과 칼끝으로 돌을 무너뜨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일이 그대로 성취 되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 무슨 증조가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B. 가지 징조  -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두 가지를 언급하셨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혼란이 있을 것을 언급하셨다. 주님은 먼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하시며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다 하며 때가 가까웠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9) 하셨다. 미혹이란 영적 유혹이다. 다시 말하여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이 복음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을 말한다.

두번째로 예수님은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지구 각처에서는 여러 가지 난리와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평화를 외치고 있지만 이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한 이래 전쟁과 평화의 비율은 18:1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무익한 꿈에 불과하다.

III. 교회가 처할 상황(10-20)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10)

세계적 상황 - 계속하여 예수님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 나겠고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10,11) 하셨다. 이 말씀은 난리와 소문들의 거국적 상황을 세부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된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한 일은 이미 우리 시대에도 겪고 있는 일이다. 이미 2번의 세계대전을 치렀고 이스라엘과 관련한 중동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처처에 지진은 날이갈수록 그 심도가 커지고 있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쓰나미와 중국을 혼란에 빠뜨린 지진들은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또한 이처럼 경제적으로 풍성한 시대에도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기근으로 인하여 수만명의 생명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 기근은 물 부족과 질병을 함께 불러 온다.

또 예수님은 온역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정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에이즈를 비롯한 사스 바이러스, 또한 오늘날도 신종풀루로 인해 전세계가 숨을 조리고 있지 않은가? 각나라별로 백신을 만들고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지만 새로운 전염병이 일어나면 새로운 백신을 개발하는데 최소한 6개월이 걸린다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백신이 개발되기도 전에 바이러스는 온 세상으로 펴져 나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또 무서은 일과 하늘로서의 큰 징조가 있을 것이라 하셨다. 여기서 무서운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핵을 언급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과 인도 중국 파키스탄이 이미 인류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핵을 소유하고 있고 근래에 이란과 북한이 핵 보유국으로 등단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은 정말 큰 문제이다. 이들의 목적은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핵 보유국으로의 부상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늘로서의 큰 징조란 무엇일까? 선지자 요엘은 이미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2:30,31) 증거하였다. 또한 계시록 6장에는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참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니라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계시록8장에는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라고 기록되었다. 이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지만 누가 이러한 재난에서 피할 수 있겠는가? 이는 인간으로부터 오는 재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오는 대환난인 것이다.

교회들의 상황(12)  - 이어서 예수님은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상황에 대하여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12) 하셨다. 마가복음 138절에서는 이 일들을 가리켜 재난의 시작이라 기록되었고, 여기서도 동일한 개념이지만 누가는 재난의 크기보다는 시간적 우선을 언급한 것이라고 보겠다또한 이 일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는 말씀은 미래 중간태로서 장차 제자들의 순교가 실행될 것을 미리 예고 하신 것이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14,15) 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는 말씀을 통하여 고대 연설가들이 연설문을 암기하는 사례를 인용하셨는데, 흥미로운 것은 변명을 준비하지 않기를 결심하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들이 준비해야 할 것은 성령에 의한 복음적 메시지라야 한다는 말씀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부모형제 친척 그리고 친구들에 의하여 배반을 당할 것을 예고하시며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6,17) 하셨다. 여기서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으리라는 말씀은 그들이 앞에서 먼저 말씀을 하신 바와 같이 순교를 당할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 곧 영혼의 획득할 것을 하신 것이다.

IV. 구속의 징조들(20-28)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20)

예루살렘의 멸망 - 이제 예수님은 좀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일들에 대하여 언급하셨다먼저 주님은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 쌓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하셨다. 여기서 군대들이란 진영에 있는 군대들을 뜻하므로 연합군일 수도 있겠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알라라는 동사는 기노스코로서 어떠한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닫게 되는 지혜를 뜻한다. 따라서 이는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그 때에 주시는 계시적 지혜일 것이다.

계속하여 예수님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21) 하셨다. 단편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주후 70년 로마 디토스 장군의 침공으로 성취된 일이기도 하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 말씀의 자각으로 모두 산으로 피해 재난을 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적 예언은 항상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대환난 기간 중 다시 한번 펼쳐질 예루살렘의 멸망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21절에서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말씀하셨고 다시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 유대인들이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토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위에서 언급된 환난을 겪었지만 예수께서 이 날들이라 복수로 칭하셨고 또한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 하셨고 다시 땅에 큰 환난이 일어날 것이라 하셨으므로 이는 적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기 까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주님은 이 날에 있을 을들을 상세히 말씀하여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 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에게 밟히리라”(24)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혼동을 갖게 하는 귀절이다. 앞에서 언급된 말씀들이 이중적 성취에 관한 말씀이라고 볼 때 이 말씀은 22절의 종결과 같은 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70년 로마군의 예루살렘 공격으로 일백 십만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구만 칠천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여기서 주님은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하셨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은 1948 5 18일 독립한 이래 1967 6월에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더 이상 예루살렘은 이방인에게 짓밟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록 11장에서 다시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어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는 말씀을 보게 된다. 이로서 우리는 성경의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러야 완성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월성신의  징조 - 이어지는 주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혼동하게 한다.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겠음이라”(25-26) 하셨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두우며 달이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라” (13:9-10) 증거하였고 요엘서에도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리라” (요엘2:30-32) 기록되었다.

바울사도는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주의 재림 앞에 교회의 휴거가 불연듯 일어날 것을 증거하였다.

또한 베드로 사도도 이 날들의 일에 대하여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 3:10) 증거하였으며 계시록 기자는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그 자리에서 옮기우매”(6:12-14)라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모든 말씀들을 미루어 볼 때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주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총체적으로 우리에게 언급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온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비밀한 계시를 비춰주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주님은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7) 하셨고 다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28)하셨다. 여기서 머리를 들라말씀은 영혼의 자각을 언급하신 것이다. 또한 구속은 십자가의 구속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있을 마지막 날의 영광된 일을 언급하신 것이다

C.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 - 27절의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권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7) 하신 말씀은 매우 쑈킹하다. 또한 이 일에 대하여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가 나타나 갈릴리 사람들아 무엇을 보느냐 너희가 본 예수는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시리라’” (1:9-11) 하셨다.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이 상황을 목격하는 사람들은 창조 이래 가장 커다란 복을 받는 사람들일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일이 창조시부터 예언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유다는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유다1:14)라고 증거하였으니 말이다. 성경의 증거가 이처럼 확실한데, 이러한 말씀들에 대하여 굳이 외면하려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 무겁기 때문이다.

V. 성경적 예지와 성도의 자각(34-38)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36)

무화과나무의 징조 - 계속하여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니나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29-32) 하셨다.

주께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 이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하신 것은 모든 일이 다 이루기까지는 이 세대가 지나가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종말의 날에 있을 일들을 언급하신 것으로 마가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경계하였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을 지칭하신 것이며 또 모든 나무들을 언급하신 것은 매우 흥미롭다. 아마 그 속에는 1948 815일에 독립한 대한민국도 포함된 것이라 생각한다.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인 것은 비단 디토 장군의 때만이 아니다. 이는 바벨론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의 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로마시대에까지 이른 것은 그 과정일 뿐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사로잡혀 티끌처럼 살아야 했다. 이처럼 세계 역사에서 지워진 이스라엘이 1948 518일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독립을 한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이방 나라에 사로잡혀갔던 유대인들이 속속 돌아 오고 있다.

또한 그들은 1967 6월에 예루살렘을 완전히 탈환하여 그 후도 더 이상 예루살렘은 이방인에게 짓밟히지 않고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영광을 꿈꾸며 성전을 다시 지을 계획 속에서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디. 흥미롭게도 33절에서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하셨다. 이 말씀은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싸인을 하신 것이다.

교회의 자각  - 그러나 오늘의 말씀의 핵심은 34절 이후에 있다. 성전이 무너지던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던 이 일들은 이제 모두 역사 속의 일들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있으니 일월성신의 징조와 하늘의 권능의 흔들림과 만 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우리 앞에는 아직 이 말씀이 살아 있다. 만약 오늘날 주를 믿는 자가 이 말씀들에 대하여 다른 해석과 변명을 할지라도 이 일들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신 세대에 반듯이 이루어 질 것이다.

예수님은 이 날들의 일들을 말씀하시며,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발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34)하셨다.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므로 이는 우리 교회에 하신 말씀이다. 오늘날 이미 많은 교회들이 방탕함과 술취함에 빠져 있으며 성도들은 생활의 염려로 그 마음에서 복음은 닫힌바 되었다.

여기서 더욱 두려운 말씀은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하신 말씀이다. 이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닌 것이다. 세계사, 인류사적인 사건으로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가도하며 깨어 있으라”(36) 하셨다. 오늘 이 말씀을 보는 당신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그러면 이제 당신이 하여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우리 삶을 진치고 있는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도들이 이렇게 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미혹되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으로 진리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가 처음 사랑에서 떨어져나가 다른 일들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여야 할까? 누가는 마지막 절에서 예수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행하여야 할 것을 모범으로 보이신 것을 소개하여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예수님은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감람원에서 쉬시고 모든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나아갔다.” ( 21:37,38) 고 기록하였다.

사랑하는 주님 당신의 영혼을 사모합니다. 내 영혼이 당신의 가르침을 사모합니다. 그리고 내게 이 진리를 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내 영이 방탕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미혹되지 말게 나의 믿음을 도와 주소서 내 육신이 약하옵니다. 주여 부디 나를 깨우치소서 아멘아멘! <출처:???>

하나님인가, 하느님인가....

자는 학창 시절, 교정에서 애국가를 열창할 때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란 소절에서는 아주 신나하며 목청을 돋우어 힘차게 불렀던 기억이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애국가에도 나온다는 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던 것이다이런 나를 바라보는 내 친구들은 종종 ‘하나님이 맞냐, 하느님이 맞냐’하고 물었다. 그럴 때면, 나는 주저함 없이 ‘하느님’이시다, ?”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하늘에 계신 분이니까, 하느님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현대도 같은 질문으로 성도들 간, 혹은 목사님들 간에 서로 심각한 대립현상을 보이며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주요 논점으로 대두하고 있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문제를 두고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잠시 고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느님'의 사전적이나 일반적 의미:
과연 국어사전은 ‘하느님’과 ‘하나님’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종교어로서 '하느님'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됨.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어 짐. 하늘. 황천'이라고 정의된다. 이를 살펴보면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하느님’이란 모든 종교인이 사용하는 용어이며 '그리스도교에서 신봉하는 유일신. 천지(天地)의 창조주(創造主)이며 전지전능하고 영원한 존재로서, 우주 만물을 섭리로써 다스림, 천주(天主), 하느님'이라고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사전에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찾아보니 '하느님을 개신교(改新敎)에서 이르는 말'이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일반적인 천공신(
天空神) 개념으로 볼 때 ‘하느님’은 우리말로는 하늘, 한자로는 천()의 존칭어인데, 광활하고도 높은 창공은 종교적 궁극자 및 최고원리의 상징으로서 인류 종교현상 속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종교표현이다. 종교학자들은 고대인들이 하늘이나 땅을 단순한 현상이나 물체로 예배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타나는 신적인 힘을 보고 그 거룩함의 신성을 경외한 것임을 밝혀내었다. 가장 오래된 문자문화를 지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누(Anu), 가나안 지방의 엘(El), 그리스의 제우스(Zeus)신들은 모두 천공신(天空神)으로서 다신(多神)들 중에서 그들이 아버지 혹은 천상회의의 임금으로서 권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다신(多神)주의자들 개념으로서 절대주권자, 천주님으로 보면 무리가 없겠다.

구약에서의 하나님:
이 이름은 모세에게 4개의 히브리어 자음(YHWH)으로 계시되었다. 바벨론 유수(BC 6세기)가 끝난 뒤, 특히 BC 3세기부터 유대인들은 2가지 이유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더는 사용하지 않았다. 첫째, 유대교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개종자들을 얻어 보편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모든 신에 대해 보편적인 주권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이라는 뜻을 지닌 일반적인 명사 '엘로힘' '야훼'라는 이름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둘째, 야훼라는 이름은 너무 거룩하여 발언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회당 예배에서는 아도나이('나의 주')로 발음했는데, 〈구약성서〉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 역은 이 단어를 '키리오스'()로 번역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이 지니는 이 고유한 이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많은 학자들은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한다'(Yahweh-Asher-Yahweh)는 것이 가장 정확한 뜻이라고 믿는다. 사무엘 상에서 하나님은 야훼 테바오트(Yahweh Teva-'ot),  '그는 만군(
萬軍)을 존재케 한다'는 뜻으로 알려지는데, 여기서 '만군'은 하늘의 왕국 또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나님의 이 고유한 이름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어머니 이름은 '요게벳'인데, 이것은 '야훼'라는 이름에 바탕을 둔 이름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기독교는 왜 ‘하느님’ 대신 ‘하나님’이라 부르기를 더 선호하는가?
기독교는 공식적인 '하나님' 칭호에 대한 태도는 시대별로 사용한 성서기록에 따랐다. 우리들의 '하나님' 칭호에 대한 변천은 성서 번역사와도 연관되어 있다. 먼저 대체로 한글성서의 번역과 사용시기를 구별해 보면 개인역 시대(1882-1903), 공인역 시대(1904-36), 개역 시대(1937-51), 맞춤법 통일안에 따른 개정판 시대(1952-70), .구교공동번역 시대(1971-현재)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한글성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를 채택할 때 계속적으로 상관된 개념은 곧 '하늘'(heaven) '하나'(one)이다. 그리고 이들 개념의 복합, 지역적 방언, 한글맞춤법과 한국어 발음의 변천 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서 완벽하다. 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란 명칭이 옳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 '하나'를 의미하므로 유일(
唯一)신을 의미하는 것이며, '크다'를 의미하는 ''에 통하는 말이므로 신의 위대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명칭보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올바르다고 본다. ‘하나님’과 ‘하느님’ 사이에 무슨 근본적 차이는 없는 것으로 인정하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기독교는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더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현재 '하나님'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그리스도교의 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통속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무당 종교의 신으로 오해한다는 것이 개신교도들의 입장이다. 이렇듯 기타 토속, 외래종교도 사용하는 신 명칭인 '하느님'과 구별, 기독교의 하나님을 선별 호칭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는 하나, 유일(唯一)신되심을 천명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45: 5-7 참조), ( 20: 1-17참조),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유일한 신이심을 강조하셨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12:29절 말씀), ( 5: 44절 참조), ( 17: 3절 참조 ).

‘하나님’이란 용어가 ‘하느님’이란 용어보다 부적절하다는 견해: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이란  표현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고 하며, 그 이유로는 하나라는 수사에 존칭 명사인 님을 붙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수사학자가 아니기에 그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하나라는 것이 수사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 숫자에다 님자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신 분, 한 분, 곧 유일(唯一)하신 참 하나님으로 생각할 때, 하나에다 님자를 붙여 부르는 것에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오히려 그런 발상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그분 주장에 따르면, 또 다른 이유로는 ‘하나님’으로서는 하나이기에, 삼위일체 신앙을 충분히 표현하기에 부족하며, 하나는 하나이지 삼위가 될 수 없고 단일 신이 되기 때문에, 여호와 하느님의 삼위를 설명하기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 역시, 글쎄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하나란 숫자를 표기하는 것이 더 마땅하다고 본다. ‘하느님’이란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 본 바로는, 천공 신이요, 다신(多神)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을, 한 분 하나님 속에 든 다른 위로 보지 않고 각각 다른 세 분의 신으로 본다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다신(多神)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랴? 성부 하나님 따로, 성자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부터 알아야하지만, 다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짧고 우선 간단히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삼위일체란: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곧 하나이며, 하나 속에 포함된 세 가지 다른 역할로 본다는 그런 의미다. 성서적 근거로는, 요1서 5:7절 말씀을 영어성경에는 한글 번역판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역할 분담의 정의는, 에베소 1: 3-10절을 근거한다.
성부 하나님= 창세 전에 인간 구원을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분, 성자 하나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인간 구원을 이루심, 성령 하나님 = 예수의 그날까지, 구원받은 백성을 인치시고 지키시고 견인하심. 이렇듯,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나뉘어져서 일하시는 그 목적은 오직 하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고로,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유일(唯一)하신 하나님을 다신(多神) 종교와 혼합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본다. 이외에 신학적인 논쟁은 더 많이 일어날 수 있지만, 필자는 신학자가 아니기에 그 어떤 논쟁도 피하려고 하며, 여기에 필자가 근거한 것은 신학적 자료가 아닌, 일반 사전적 의미와 성경에서 주는 교훈을 그대로 적용한 것일 뿐으로 더 이상의 깊은 신학적 질문은 나에게 물어보아야 대답할 여력이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바라기는 우리가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는 것을 따져서 설왕설래 다투며 변론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앙양심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다만 우리가 어떠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각자가 성경에 입각해서 올바른 선택을 잘 할 수 있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간절히 구할 따름이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45:5-6절 말씀).”  <출처:???>

축귀 사역은 치유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 두어야 할 과제다.

축귀 사역은 치유의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 두어야 할 과제다. 축귀라고 하면 미신적이고 원시종교의 냄새를 품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마귀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 것인가? 인간들의 악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악행을 설명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았다는 말씀은 단순히 정신병 환자를 고쳐주신 것을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복음의 말씀은 사실일 뿐 아니라 교회의 전통과 신자들의 구마 체험 모두가 악령의 존재를 인정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의 답변이 너무 단순하고 미신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놀라지 말라. 그것은 ‘마귀’라고 불리는 악으로부터의 방어인 것이다. 악은 단순히 무엇()의 결핍이 아니라, 효율적인 매체이며 살아 있는 영적 존재이며, 부패하고 타락하게 하는 무서운 실재이다.

이러한 실재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거나, 우리의 불운의 원인을 개념적으로 인격화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것은 복음서의 여러 구절( 11:21; 5:9)에서 교훈하는 바와 같이 귀신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수령은 사탄이다.

 정신 질환과 귀신들림의 식별 - 축귀 사역을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말 귀신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식별하는 것이다. 물론 정신분열증이나 기타 많은 정신병은 이름만 붙이는 것이지, 그 이름이 그 병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그 병의 원인이 귀신인 경우에는 축귀가 치료의 방법이 된다.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12년간이나 정신병원에서 고생하던 사람이 축귀를 위한 기도를 받고, 즉시 낫기 시작하여 그 후 4개월 만에 병원에서 퇴원한 예가 있다.

우리는 흔히 ‘신경성’이니 ‘정신질환’이니 하고 병명을 붙이지만 그 이름이 병의 원인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병중의 어떤 것은 귀신에 의한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 증상에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을 붙여 놓는 것은 병의 증상을 말해 주기는 하지만 질병을 치유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정신병 환자를 대할 때 축사(逐邪)가 필요하다고 속단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지만, 한편 정신분열증 같은 병이 귀신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그 병이 정말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마귀에 의한 것일 경우, 치유의 길을 막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정신병과 귀신들림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귀신들림과 정신병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귀신들림과 정신병의 차이점
귀신들림: 뚜렷한 의식이 있고 합리적인 말을 한다.
정신병: 말에 조리가 없고 횡설수설 한다.

귀신들림: 때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신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이다.  정신병: 악령 들린 증상이 보일지라도 실제로 뇌질환 혹은 신경이나 정신적으로 질환을 가지고 있다.

귀신들림: 자신이 귀신 들린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귀신의 존재를 노출시키려 하지 않는다.   정신병: 지나칠 정도로 자기 속에 악령이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귀신들림: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임재 앞에서 반응을 보이고 목회자의 상담에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정신병: 목회자의 상담에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고 예배 참석에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귀신들림: 약물에 의한 치료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병: 약물에 의한 치료 효과가 있다.

⑥ 귀신들림: 파괴적이다. /정신병: 비파괴적이다.
 
귀신들림: 눈에서 사악한 광채나 음침한 빛을 발한다.     정신병: 눈의 초점이 흐리다.
 
귀신들림: 투시, 예언, 괴력 등 초능력을 발휘한다.   정신병: 초능력이 없고 나약하다.

⑨ 귀신들림: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적대감이나 거부행위를 드러낸다.
정신병: 특별한 거부반응이 없다.
 
 귀신들림: 남의 목소리를 내거나 이상한 말을 한다.  정신병: 자신의 목소리로 말한다.

⑪ 귀신들림: 남에게 전이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정신병: 남에게 전이되지 않는다.
 
귀신들림: 급속한 구원(치유)이 일어난다.   정신병: 치유가 장기적이다.

귀신들림: 자살을 한다고 자주 말하기도 하며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정신병: 자살 충동이 아주 적으며 자살하겠다는 말도 잘 하지 않는다. 

상술한 귀신들림의 증세들이 여럿이 나타날 때 귀신들림을 의심할 수 있다(대체로 정신병의 경우에는 본인의 손상된 인격만 나타난다). 물론 영분별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등이 나타날 때는 진단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귀신의 화법 - 귀신은 축사를 위한 기도를 할 때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 “너희는 나를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수가 많다. 우리는 네게 아주 강하다.”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귀신은 반드시 1인칭으로 얘기하며, 귀신을 쫓는 사람을 2인칭으로 부르고, 귀신들린 사람을 3인칭으로 부른다.

이것은 정신병자가 자기 자신을 나폴레옹이라고 주장하거나 베토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구별된다. 이 경우는 당사자 자신이 어떤 다른 인물임을 주장하지만 귀신인 경우는 당사자를 제3자로 부른다. 예를 들면, “김삼순이는 나에게 머리를 숙이고 복종해야 한다.”등의 말이다.

  ☆조심해서 해야 축귀 사역
 축사를 위한 기도는 특별히 조심해서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상처를 줄 위험이 있고, 둘째로는 경험이 없는 사람이 축사 사역을 하다가 마귀에게 거꾸로 당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언급되어 있듯이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다가,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고 대들어서 옷을 찢기는 등 봉변을 당하고 도망친 사례도 있다( 19:16).
 
귀신 축출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과 축사를 받는 사람 모두에게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며, 기도를 해야 하고, 때로는 금식도 해야 한다. 분별을 조심스럽게 해야 할 뿐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축귀 사역을 원하시는가도 살펴야 한다.

축사를 위한 기도는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병의 치유를 위한 기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첫째, 치유를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고, 축귀는 악령에게 지시하는 것이다. 둘째, 치유를 위한 기도는 간청이며, 축사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물론 치유를 위한 기도도 ‘믿음의 은사’를 받았을 때 담대하게 명령으로 바꿀 수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3:6).

축귀를 하는 데는 확고한 목소리로 힘 있게 해야 하지만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다. 귀신이 소리 지른다고 해서 무서워하며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귀신이 괴롭히는 형태 -  악령이 우리를 괴롭히는 양상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강력한 유혹을 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고, 강력하게 유혹만 하는 상태이다. 이런 경우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해서 쫓으면 될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4:7).

둘째, 누가 보나 ‘저 사람은 귀신들렸다’고 알 수 있을 만큼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악령에게 잡혀있는 상태이다. 이런 경우는 축귀 사역을 받아야 한다.

 셋째, 우리 마음의 일부를 특정한 귀신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런 경우도 축사를 위한 기도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귀신의 종류를 분명히 알고 내쫓아야 한다. 물론 사탄은 하나이다. 그러나 사탄은 귀신들의 수령이기 때문에 수 없이 많은 악령을 부하로 데리고 있다.

이 사탄의 졸개들을 ‘귀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귀신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미움의 귀신, 질투의 귀신, 미신의 귀신, 실망의 귀신, 교만의 귀신, 탐심의 귀신, 욕정의 귀신, 명예심의 귀신, 거부의 귀신’ 등 수 없이 많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네 이름을 대라!” 하고 명령하면 귀신이 대답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옥황상제, 천지신명, 용왕대감’ 등의 이름을 대는 귀신들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신들 중 하나 또는 둘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경우에 귀신이 들어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가령 욕정의 귀신이 나의 마음 안에 들어와 있는 경우에는 무절제하게 더러운 욕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때는 정상적인 성욕과 마귀에 의한 욕정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분노의 마귀가 점령하고 있을 때는 무절제하게 강박적으로 화를 내게 된다. 이것도 정상적으로 화를 내는 경우와 구별해야 한다. 모든 성욕이나 분노를 귀신 때문이라고 못 박으면 안 된다. 정상적인 성욕, 분한 감정 등은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미신이 많기 때문에 귀신에게 점령당한 사람들이 특히 많다고 생각된다. 푸닥거리를 했거나, 사줏집에 갔거나, 부적을 했거나, 굿을 한 적이 있는 분은 그의 몸에 귀신이 침투했을 여지가 크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축귀 사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으신 분 중, 거짓 예언을 하게 되는 경우나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기 전의 미신 행위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당의 영에 의해 춤을 추거나 예언을 할 수 있다. 교회 지도자는 예배 가운데 혹시 이런 사람들이 사역하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나라 여성들 중 미신 행위를 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는 제2의 부흥의 역사를 위해 강력한 축귀 사역이 필요하다. 묶고 나서 푸는 것이 영계의 순서이기 때문이다( 16:19). 악령을 결박한 후 성령의 역사를 풀어 놓고, 저주를 묶고 나서 축복을 풀어 놓아야 한다<알이랑민족회복운동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