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012

쉿! 침묵해보세요...

우리는 지금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고독하고, 침묵할 필요가 있습디다.
고독하고 침묵해야 거짓 자아가 탈을 벗고 참 자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과 고요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독', '침묵',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 있을지라도, 여리고 성 앞에 있을지라도, 어떤 위협과 급박한 것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3세기 말부터 5세기에 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드의 사막으로 들어가 생활한 수도자를 가리켜 사막의 교부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사막으로 들어간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전까지 기독교는 로마의 박해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고인하여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에는 더 이상 싸움이 필요 없었습니다. 이제 세상은 교회의 적이 아니며 세상은 교회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친해지기 시작했고, 세상 문화를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박해 시절과 다른, 아니 더 심하게 죄에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타락한 문화 속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는 일이 더 여러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막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막은 세상 죄와 유혹의 문화에서 벗어나는 장소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을 멈추는 일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읽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생각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를 이해 우리에게는 침묵과 고독이 필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점이 큐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큐티가 잘 안되는 이유는 큐티(Quiet Time with God)라는 단어의 뜻 처럼 하나님과만 함께하는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독이 필요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큐티할 때TV를 겨놓거나 음악을 듣지는 않습니까?
전화를 받거나 다른 일을 함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큐티 시간을 자투리 시간이 날 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쿠티는 언제나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내려놓고 고독과 침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하나님의음성을듣는큐티/하정완>

내 안에 역사하는 부활의 권능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119:9)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5절부터 네 가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본문은 마지막 네 번째 기도제목에 해당합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너희들이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도대체 어떤 능력을 주셨고, 또한 지금도 어떤 능력이 머물러 있는지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강력과 힘과 능력으로 일하셨는데, 그 결과 믿는 우리에게 지극히 큰 능력이 부어졌고 바로 그 능력이 지금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신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대자연과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은 부활의 능력입니다. 창조 능력이 대단하지만 그 창조 능력도 죽은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하지는 못합니다. 죄를 씻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려놓았고, 성령님은 오늘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권능이 우리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제발 알기를 바란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칫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무력하지 않은가’라는 고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앞에서 무력하게 순교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그들은 이와 같은 고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을 뒤집어 놓은 부활의 능력이 있으며, 이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우리 안에 머물러 역동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사상도 철학도 교리도 아닙니다. 
부활은 능력이고 실제 경험해야 할 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죽은 자의 무덤 위에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부활절의 형식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질문합니다(고전 15:29). 부활은 생활 속에 체험해야 할 능력이고, 바울은 자신의 예를 들어 그것을 주장합니다. 자신은 그 부활의 능력 때문에 날마다 죽을 수 있었으며, 또한 짐승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이는 경험을 했지만 결국은 이겼다고 간증합니다(고전 15:31∼32). 


믿음은 결코 무력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은 무력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교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 즉 부활의 능력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것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체험하면서 살았고, 더욱 더 체험하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빌 3:10). 부활의 능력은 현장성을 가집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거기서 부활의 능력은 나타나야만 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바로 그것이고, 그 바울의 기도는 바로 우리의 기도가 돼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